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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후에 두 장의 가공할 만한 위조품이 나왔기 때문에, 나는 그것에 '시대'를 붙이고 테두리에서 빼내 예전의 그림가게로 가지고 갔다.

"저 생각이 바뀌어서요. 이 두 장이라면 팔아치워도 좋습니다."

나는 두 장의 그림을 펼쳤다.

"오오! 왜 처음부터 이것을 가지고 오지 않았죠? 요전에 당신이 보여준 잡동사니에 비하면 격이 달라요!"

"이것은 그것보다 훨씬 후기 작품입니다."

"그러면 녀석도 드디어 그림 그리는 방법을 알았다는 건가. 과연…… 얼마나 아름다운 푸른 하늘인가! 이거라면 한 장에 75파운드를 내겠어요."

나는 그에게 새로운 타임즈지 종이조각을 보여주었다. 런던에서 로스차일드가의 한 사람이 한 장의 고갱에 2천 파운드를 지불했다는 기사였다.

"좋아요. 그럼 한 장에 100파운드 내겠소."

나는 승낙하고 현금을 받아들고 그 가게를 나왔다. 처음 손님에게서 돈을 받은 창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의 200파운드면 영국까지 일등선의 배값을 지불하고도 아주 충분했다. 항해 동안 나는 거의 선실에 틀어박혀 자신이 보충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다섯 장의 고갱 중 맨처음 두 장의 제작에 착수했다. 수중에 있는 진짜 다섯 장을 그저 모작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들은 아직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도 내가 불태워 버린 것에 비길 만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자신에게 자유재량의 여지를 주고 가지고 있는 다섯 장 가운데에서 여러 가지 요소를 빌려 두 장의 새로운 그림을 창작하기로 했다.

배가 도착할 때에는 두 장의 멋진 고갱이 완성돼 있었다. 바닷물을 넣은 욕조에 담갔다가 언제나의 방법으로 말려서 낡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여자 나체에는 여전히 익숙해질 수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재현하기로 했다. 그저 그 그림이 순진한 아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바랄 뿐이었다.

내가 그린 고갱을 파는 기술을 더욱 연마한 것은 런던에 온 후였다. 만약 놀면서 살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이 있다면 그 그림을 무료로 세계에 제공했을 것이다. 유감이지만 나는 생활비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나는 한번도 자신의 작품을 고갱의 그림이라고 주장한 일은 없다. 그의 작품과 비슷하다고 말했을 뿐이다. 또 그 그림을 팔 물건이라고 은근히 꾸민 일도 없다. 자신의 손에 들어온 그림이 가짜가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있는, 푼돈을 가진 수집가를 가장해 보였을 뿐이다. 고갱의 일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대수집가인 당신을 신용하고 조언을 구하러 왔다――그런 의미의 말을 했던 것이다. 최근에는 과학적인 시험법이 개발되어 그림의 연대를 감정할 수 있게 됐지만, 내가 말하고 있는 이 시대에는 아직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고갱의 그림의 진위는 '직감력과 추측'만으로 판정되고, 그것에 반대를 주장하는 것은 저능아나 거짓말장이로 간주됐다.
수집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 동안에, 나는 그 그림에서 아무래도 의심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점을 세밀히 지적하기로 했다. 내가 아는 한 고갱은 다른 그림에서 여차여차 이런 짓을 한 일이 없다는 논법이다. 상대의 수집가가 만약 고갱의 작품을 조금이라도 연구한 일이 있는 인간이라면, 여기서 득의의 미소를 숨기고 내 무지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 곧 상대방은 내 의혹에는 근거가 없는 이상 일고의 가치도 없고, 따라서 그 그림은 진짜임에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나서 상대방은 그대로 두어도 수집가 쪽에서 나에게 그 그림을 팔라고 설득해 온다.

이렇게 해서 나는 런던에서 두 장의 그림을 5천 파운드에 파는 데 성공했다.

(주=당시의 1파운드가 5달러에 상당하고 생활비가 현재―― 1960년―― 의 반도 채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 상당한 금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4년 남짓, 나는 놀고도 생활에 걱정 없이 편안히 살 수 있었다. 드디어 남은 돈이 바닥나기 시작하자, 스페인 북부의 해안에 2주일 정도 체재하며 석 장째의 고갱을 완성했다. 이 그림은 로마에서 이탈리아 왕가의 한 사람에게 3천5백 파운드에 팔렸다. 아주 잘된 고갱은 드디어 고가가 되고 있었다.

3년 후, 또다시 빈곤에 시달려 그리스의 작은 섬에서 넉 장째의 고갱을 그려 냈다. 이것은 이집트의 백만장자에게 7천 파운드에 팔리고, 다시 4년간의 호화로운 생활을 지탱해 주었다. 그러나 타고난 사치스러움 때문에 나는 다시 무일푼이 됐다.

내가 그릴 수 있는 고갱은 이제 한 장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으로 나에게 부여된 세계에 대한 의무는 모두 완료되는 것이다. 다섯 장째가 끝나면 이제 절대로 앞으로 그리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마음 속으로 맹세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은 일생을 풍요롭게 살 생각이라면, 이 마지막 한 장은 대단한 값을 부를 수 있는 진짜로 멋진 고갱이 아니면 안 된다.

나는 이탈리아의 해안에 오두막을 빌려 제작에 착수했다. 이미 이때―― 1939년―― 에는 수많은 고갱의 복제가 팔리고 있었고 자료는 풍족했다. 이 마지막 고갱에는 6주를 소비했는데, 스스로도 만족할 정도로 완성한 그것은 틀림없이 걸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완성된 작품은 높이 38인치, 폭 27인치―― 고갱의 그림으로서는 상당히 큰 것이었다. 제일 앞에는 이국적인 식물이 노란 나비를 닮은 꽃을 달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녹색의 선이 들어간 짙은 푸른 연못, 그 연못에서 당당히 걸어 나오는 것은 전라의 타히티 여자를 태운 커다란 붉은 말이었다. 그 맞은편에서는 뒤얽힌 나뭇가지 밑에서 섬의 아이들이 물보라를 튀기면서 연못에서 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전경 위에 타히티의 산들이 점점이 구름이 떠 있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있다. 이거라면 분명히 고갱도 자신 있게 '붉은 말'이라는 제목을 붙였을 것이 틀림없다.

그림의 성과가 너무나도 뛰어나기 때문에 2만5천 파운드 이하로는 절대로 팔지 않겠다고 나는 결심했다. 분명히 엄청난 금액이지만 그것을 쟁취할 자신은 있었다. 단 하나 계산에 넣는 것을 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행운이 다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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