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름에 응답하여 주어 고맙다3

 

은총으로 보살핌

 

끝나지 않는 발현

   목격증인들과 마을 전체를 매우 놀라게 한 것은 1981년 9월로 접어들어서도 발현이 여전히 계속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과거의 발현에 관해서 아무 지식이 없었던 목격증인들이 프랑스의 루르드에서는 복되신 동정녀께서 도합 18번 발현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동정녀께서 매주고리예에서도 같은 횟수만큼 오시지 않을까 추측했던 것이다. 18번째의 발현이 지나가자 그들은 동정녀께 얼마나 더 오래 와주실지 여쭈어보았더니 그 대답으로 미소를 지으시면서 약간 멈추시고는, '내가 오는 것이 벌써 지루해졌느냐?' 라고 반문하셨다.
   얼마 후 동정녀께 같은 질문을 다시 드렸을 때, "나의 천사들아, 너희들이 원하는 한 언제까지든지 오겠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께서 정말 계속해서 매일같이 오실 수 있을까? 하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 뉴스는 순식간에 그곳 전 지역에 퍼져나갔으며 얼마 안가서 더 많은 군중들이 메주고리예로 모여들었다.
   밀려드는 방문객들의 인파는 전기와 수도 그리고 하수도처리 등 공공설비에 과중한 부담을 주었으며 모든 자원을 최대한으로 동원시켜야 했다. 일상업무는 혼란상태에 빠졌고 도로는 차로 통행이 막혀 보기 드문 교통마비가 일어났다. 그리고 본당 프란치스코회 사제들은 영적 지도와 발현에 관하여 알고싶어 찾아오는 그 많은 사람들을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몰랐다.
   지방 공산당 당국은 곧 폭동이 일어날 것만 같아 두려워졌다. 당국은 목격증인들을 계속 무자비하게 괴롭혀 가면서 그들과 그들의 가족을 위협했다. 아무런 사전 통고도 없이 당국은 그들을 붙잡아 가까운 차트륵에 있는 경찰본부에 연행하여 장시간 문초를 가했다. 또 당국은 그들의 가족들에게도 만일 이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지 않으면, 직장 상실과 구속을 면지 못할 것이라고 위협을 가했으며 그 지방으로 찾아오는 순례자들을 가로막고 수색을 했으며 장시간 지체하게 하는 불편을 가했다.
   가장 가혹한 협박은 성 야고보 본당 주임으로 이제는 목격증인 아이들을 위해 강한 후원자이며 영적 지도자가 된 프란치스코회의 요조-조브코 신부와 그곳 교구의 파바오-자니치 주교님에게 가해졌다. 정부 기관은 그들에게 매일의 집회를 즉각 중단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그 외의 대안은 감옥밖에 없다는 위협을 가했다.

요조 신부의 사명

   발현이 시작되기 겨우 6개월 전에 메주고리예 성당 주임으로 부임한 요조 신부는 처음에는 아이들을 엄하게 심문했다. 그분은 만일 그 환시가 진정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왜 사람들이 미사와 고해성사를 보러 성당으로 오지 않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발현이 시작 된지 수주일 후에도 마을사람들은 여전히 매일저녁 발현산에 몰려들고 있었다.
   요조 신부는 어느 날 저녁 성당에 혼자 앉아서 만일 이 일이 진정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표시를 하나 보여주십사 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을 때 갑자기, '우선 나가서 아이들을 보호하여라,' 라는 뚜렷한 남자의 음성을 들었다.
   깜짝 놀란 요조 신부는 교회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런데 그 메시지는 다시 반복되었던 것이다. 교회 문을 탕탕 두드리는 소리에 그는 제정신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보니, 그 어린 목격증인들이 구르다시피 뛰어들어와서는 경찰들이 뒤쫓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그 신부는 재빨리 그들을 사제관으로 데리고 가서 조그마한 방에 감춰두고 성당 앞쪽으로 돌아오면서 그들을 보호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몇 분내로 경찰이 나타나서 혹시 아이들을 보았느냐고 무뚝뚝하게 물었다. 본적이 있다고 했는데도 경찰은 의외로 더 들으려하지도 않고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다.
   요조 신부와 아이들은 성당으로 돌아왔다. 조금 후에 동정녀께서 발현하시어 그들 앞에 나타나셨다. 그 동안 의심을 품고 있던 그 신부도 갑자기 아이들과 똑 같이 그분을 그곳에서 뵙게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순간부터 요조 신부는 그들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이자 옹호자가 되었지만 이로 인해 곧 자유를 잃게 되는 대가를 치러야했다.
   1981년 10월 당국은 그들의 협박을 결국 집행했다. 요조 신부는 체포당했으며 본인 자신이 동정녀의 발현을 목격한 얼마 후 매우 열렬한 설교를 통하여 폭동을 부추겼다는 죄목으로 고발을 당했다. 당국은 그 강론이야말로 마르키스주의 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라고 간주했다. 물론 그것은 신부를 체포하는데 필요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렇게 조치함으로서 그들은 발현이 끝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요조 신부는 3년형의 유죄 판결을 받고 1년 반 징역살이를 했다.

주교의 돌변

   지난 4개월간 당국으로부터 괴롭힘을 받아온 자니치 주교님은 발현에 대한 태도를 완전히 바꾸고 말았다. 초기의 열광적인 지원자에서 강한 반대자로 탈바꿈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처음 몇 주 동안에는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 주교님은 본당을 다섯 번이나 찾아오셔서 목격증인들과 사제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7월에 주교님은 강론을 통하여 "온 세계가 들어보십시오" 하면서 자기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만일 누구라도 그 아이들을 교묘하게 조작해왔더라면, 그 단순한 여섯 아이들은 반 시간도 못가서 모든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확실하게 말씀드립니다만, 그와 같은 일을 조작할만한 신부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증하며 더욱이 아이들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런데 무슨 연유가 있었기에 주교님은 그토록 과격하게 변심하게 되었을까? 간단히 말해서 프란치스코회 소속 신부들과 교구 소속 신부들간의 사소한 말다툼이 발단이 되어 확대된 것이었다. 그 주교님은 프란치스코회 출신이 아니었으므로 문제가 여기에 깔려있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회 신부들은 지난 수 백년간 외부의 침략과 전쟁으로 인하여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도 그곳 사람들을 위한 사목을 맡아왔다. 그래서 그곳 신자들은 애정이 담긴 표현에서 신부를 "아저씨" 라고 부르고 있었다.
   발현이 시작되기 전 해인 1980년 9월에 새로 부임한 모스타 교구의 주교님은 즉시 교구내의 본당들을 프란치스코회의 교권에서 교구소속의 교권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대상이 된 본당 신자들은 몰론이거니와 프란치스코회 사제들은 격분했다. 본당들에 이미 부임한 프란치스코회의 사제들이 계속 사목을 맡아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선 것은 그 본당의 전 신자들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은 계속 사목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자니치 주교님은 보복책으로 가장 인기 있고 젊은 프란치스코회의 두 사제들을 본보기로 그들의 교단에서 그리고 성직에서 추방하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니 문제가 더욱 악화되었다. 교구내에서 이 문제를 조용히 해결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처리해야 할 문제였으나 그 지역 신자들의 기질 때문에 달리 할 수 없었으며 세상이 다 알게된 어려운 대립문제로 확대되고 말았다. 세간에서는 이를 "헤르체고비나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상황이 더욱 악화되는 일이 생겼다. 프란치스코회 사제 한 분이 이 문제에 대하여 복되신 동정녀께 말씀을 들어보도록 목격증인들을 설득시켰다. 놀랍게도 동정녀께서는 언급을 하셨는데 목격증인들의 말에 의하면 동정녀께서는 "주교님이 오해를 하셨고 또 잘못 알고 계시다" 면서 "두 프란치스코회 사제를 추방하는 조치에 대해서 재 고려하여야 한다" 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분노의 도화선이 되었다. 목격증인 비스카가 열정적인 표현이 담긴 메시지를 본인이 직접 전달했는데 주교님께서 이를 읽으시고는, "하느님의 복되신 어머니께서 주교에게 절대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라고 소리쳤다.
   그 순간부터 그는 발현의 철저한 반대자가 되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 사이에 오가는 말에 의하면 주교님 자신도 공산당국에 의해 투옥 당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현문제와 거리를 두기 위해 적절한 이유를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대립을 둘러싸고 주교님이 취한 가장 최근의 방향전환은 발현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알맞은 방법이었다.

성 야고보성당에서의 발현예식

   주교님과 연루되어 힘들고 어렵게 돌아가는 사건들은 몹시 애처로운 일이었다.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목격증인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귀담아 듣고 기도와 단식과 보속을 하고 또 자주 고해성사를 보라고 간청하셨다. 발현을 통한 하늘나라의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반드시 이 일을 지혜롭게 주관해야 했으며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그 마을과 지역이 따라야 할 도리었다. 그런데 요행히도 발현 장소를 언덕에서 옮겨야 한다는 정부의 지령으로 인하여 모든 일이 곧 올바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집회는 더 이상 야외에서는 못하게 되었으니, 만일 젊은 목격증인들과 마을 사람들이 계속 집회를 가지려면 장소를 성당 안으로 옮겨야만 했다.
   그리하여 성 야고보 성당의 제대 오른편에 있는 경당에서 매일 저녁 발현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제는 수많은 군중들이 성당 안과 성당 주변 마당을 메우게 되었다. 사제들의 지도 아래 매일의 영적 예절 절차가 형성되었으며 바야흐로 온 세계의 수백만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기반이 성립되었다. 정부당국은 알지 못했지만 그들이 괴롭힌 것이 도리어 전화위복이 되어 동정녀께서 사람들로부터 바라셨던 것이 그대로 멋지게 이루어졌다.
   로마에서 개최된 성령대회에서 브리에지-멕켄나 수녀가 토미스야브-브야시치 신부께 기도해주면서 예언했던 대로 지금은 메주고리예에서 "살아있는 성령의 물"이 아낌없이 흐르게 되었다. 토마스야브 신부는 투옥된 요조 신부의 뒤를 이어 성 야고보 성당의 주임 신부가 되었다. 매일 오후에는 넘쳐흐르는 군중들이 일찍부터 모여들어 동정녀의 발현준비를 위한 묵주기도를 바친다. 발현이 끝나면 신자들은 앞서하던 기도를 마저 끝마치고 미사에 참례한다. 미사 후 신자들은 영광의 신비 묵주기도를 바치며 발현 초기에 동정녀께서 부탁하신 기도, 즉 사도신경에 이어 주의 기도와 성모송 그리고 영광송을 일곱 번씩 바치고 그날 밤의 모든 예절을 끝낸다.

선행되어야 할 회개와 화해

   그 지방 전역에서는 발현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마을 사람들은 변화되고 있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저녁 미사에 참례하고 저녁때나 주일에 일하는 사람들도 얼마 없었다. 공동체의 상표처럼 특징이 되어온 오랜 가족간의 반목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그들이 사이좋게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런 중요한 변화는 발현이 시작된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발현이 진정 하느님께서 보내신 것이라고 확신한 요조 신부는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받아드리지 않는다면 그 초자연적인 은총의 목적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메주고리예와 주변 지역 사람들은 장치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모범 신자가 되어야만했던 것이다.
   회의론자로부터 믿는 사람으로 자신의 변화를 체험한 요조 신부는 얼마 후 성당에서 저녁모임을 갖고자 마을 신자들을 불렀다. 모인 주민들은 성 야고보 성당 주임신부 자신이 동정녀를 보았다는 체험담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곳 신자들이 성모님의 메시지를 따라 사는 모범신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요조 신부는 "여러분이 서로 용서해줄 때까지 오늘 저녁 이 성당을 떠나지 못합니다," 하고 연설을 끝맺고는 팔짱을 끼도 기다렸다.
   거북한 분위기와 낮게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드디어 몸이 억세게 생긴 한 사람이 얼굴을 붉힌 채 안절부절 못하면서 일어서더니 여러 해 동안 반목해왔던 한 남자 쪽으로 걸어가서 손을 내밀었다. 그 사람은 일어서서 자기 손을 내미는 대신 그 사람을 껴안았다. 이것은 매일의 고된 노동과 오랜 세월의 억압으로 인하여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진 크로아티아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보기 드문 행동이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집단적인 용서가 시작되고 메주고리예 사람들이 회심의 길로 나서게 되었으니 교회는 기쁨이 넘치는 북새통이 되었다.
   이렇게 영적 회심의 새로운 물결은 계속 성장해갔다. 발현이 있을 때마다 목격증인들은 질문을 했고 이에 대해 동정녀께서는 회답을 주셨다. 이제 사람들은 매 번의 메시지를 초조하게 기다리게 되었다. 메시지와 답변 하나하나는 신구약 성서의 내용들을 그대로 재확인하고 있다는 것이 곧 분명해졌으며 그 초점은 언제나 하느님께 있었다.

활발한 토론, 질문과 답변

   남편의 학대 때문에 떠나고 싶다는 한 부인의 경우처럼 일상생활에서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질문들이 제일 많았다. 이에 대해 동정마리아께서는, '남편을 떠나지 말도록 도와주며, 그녀의 고통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어라. 예수님 자신도 역시 고통을 당하셨다' 라고 대답하셨다. 가정의 궁극적인 파괴를 가져오는 이혼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또 마치 직업을 바꾸는 것처럼 이혼을 아무렇게나 쉽게 하는 현세에서 볼 때 그것은 실로 놀라운 회답이었다.
   그러나 호기심에 의한 질문도 많았다. 사람들은 세상일에 관한 것들을 상세히 듣고싶었다. "비행접시"는 정말 있습니까?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겠는지요? 그와 같은 질문을 포함한 가르침을 한 번 주신 후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목격증인 두 사람에게, '호기심에서 우러난 그런 소용없는 질문들은 묻지 않도록... 나의 천사들아,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일이란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신앙에 관한 질문들도 계속 있었다. 왜 그렇게 갖가지 다른 종교들이 많습니까? 모든 종교는 다 같습니까?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부글부글 끓고 있던 그 지역에서 볼 때, 그 대답은 놀랍게도 단도직입적이었으며 의미심중했다.'무슨 종교를 믿던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동등하다... 어떤 주권자가 자기 왕국을 통치하는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도 각각 다른 신앙을 다스리신다... 믿는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같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거역하였고 무시했단다'
   즉각 지방의 여러 종교단체들은 물론이거니와 발현의 회의론자들은 그 답변에 이의를 들고나섰다. 소위 그 초자연적이라고 말하는 사건은 하느님께서 온 것이 아니라는 증거로써 그 답변들을 들추고 나왔다. 그 대답에 의하면 모든 종교는 다 같다고 되어있지 않으냐고 그들은 반박했다. 그러나 복되신 동정녀께 그 문제를 의논드린 후 목격증인들은 그 잘못된 개념을 서둘러 정정하여 주었다. 동정녀께서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어떤 종교를 가졌던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동등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종교가 같다는 것은 아니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믿음이 무엇이든 서로 존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메시지를 따라 살 수 있겠는가?' 라는 뜻이었다.
   반대자들은 계속 밀고 나갔다. 그 말은 모든 교회는 같으며 하느님께서 모두 받아들이고 계시다는 뜻이 아닌가? 성모님의 회답은 다음과 같았다. '어떤 곳에서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힘이 더욱 크며, 반면 기도의 힘이 작은 곳도 있다. 그것은 신자들이 기도하도록 이끄는 성직자들에게 달려있으며 또 성직자들의 능력에도 달려있다.'
   사제들과 신학자들의 성화에 못이겨 목격증인들은 복되신 동정녀께 이렇게 여쭈어보았다. "당신은 정말 하느님의 어머니이신지 또 운명하신 후에 천국으로 가셨는지, 아니면 운명하시기 전에 가셨는지?" 그분의 대답은 역시 직설적이었다. '나는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평화의 모후다. 그리고 죽기 전에 하늘나라로 갔단다.'
   그리고 그들은 신앙인들 사이에서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또 다른 까다로운 문제를 여쭈어보았다. "예수님 외에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다른 중재자가 계십니까?"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오직 한 분의 중재자만이 계시는데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동정녀께서 대답하셨다.
   그것은 목격증인들과 그들의 가족들, 마을 사람들 그리고 교회당사자들에게는 놀라운 기간이었으며 그들은 대단히 많은 정보를 얻고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이 정말 하늘나라에서 온 것일까? 하며 의심하는 성직자들이 많았다. 그 동안에 세르비아인들이 주도권을 잡고있는 정부 당국에서는 메주고리예 사건들은 간단히 말해서 정부를 반대하고 전면적인 폭동을 일으키려는 크로아티아인들의 모략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때가 가장 좋으면서도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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