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사랑 : 가톨릭메신저 ; '마리아'지 기사
 

 

성체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가능한 한 가까이 있고자 하듯이 하느님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에 바로 우리 곁에 계시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고 우리는 피조물을 통해서 하느님이 가까이 계심을 더욱 체험하게 된다. 사도 바오로도 하늘과 별, 태양과 달 그리고 산들을 바라보노라면 그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그 무엇을 볼 수 있으며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하느님은 또한 당신의 예언자들이 우리들에게 전하는 말씀을 통해서도 당신을 알리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창조물을 통해 우리 가까이 오시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셨나 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들을 보내어 당신에 대해 말하게 하셨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가까이 계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말씀을 전할 예언자들을 보내신 뒤 직접 우리에게 오고자 하셨다.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게 하시어 우리에게 보내셨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다. 인간의 손으로 또 인간의 목소리로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쓰다듬고 감싸 안아주시며 치유해 주신다.
   하느님은 인간의 몸을 취하시고 우리가 감지할 수 있도록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시고자 하셨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경험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의 생활 안에 아주 깊숙이 들어오셨고 우리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복음 안의 여러 비유를 통해서 한 내 말들과 기적과 치유,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한 일, 또 부활 이후 내 무덤을 찾아왔던 여인들과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들에게 발현했던 사실 등등에 대한 것들을 알고 있지 않은가?"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만족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오직 사물이나 책 그리고 말씀이나 기억들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전달하는 방법은 예수님의 표현 방식이 아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존재 전부를 완전히 드러내시면서 당신 스스로 우리들 곁에 현존해 계시고자 하신다. 예수님은 계속 우리가 당신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들 곁에 아주 가까이 들어오셔서 우리들을 완전히 채워주시고 자양분을 주고자 하신다. 우리가 매일 먹는 빵처럼.
   사도들에 비해 우리는 한 가지 이점을 가지고 있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만날 때 그분의 손을 잡고 포옹하는 등 예수님과 접촉함으로써 그분을 느낄 수도 있었지만 지금 우리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 몸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들의 가장 깊숙한 내면과 접하신다. 잡히시기 전까지만 해도 사도들은 예수님을 볼 수도 있었고 말씀을 듣고 그분과 동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밖에" 머무르고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와는 아주 가까이 계시고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우리 몸 안에 들어오심으로써 당신을 우리가 "먹고 마시도록" 하신다. 더이상 어떻게 가까워질 수가 있겠는가?
   성체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지닌 당신의 전 존재로 우리에게 오신다. 한 부분이 오시는 것이 아니고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어떻게 당신의 살을 먹으라고 주십니까?" 라고 항변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전 것중에서 하나의 기념이 될 수 있는 어떤 물건을 너희들에게 남기겠다." 라고 말씀하셨다라면 아마도 그들은 더 잘 알아들었을지도 모른다. 제자들은 아마도 "당신이 주시는 선물을 기념으로 기꺼이 받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작은 기념물보다는 더 많은 것을 주고자 하셨음을 느끼기는 했겠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의 뜻은 깨닫지 못했다. 그 말씀은 그들이 파악하기에는 너무 심오했기 때문에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 "그런 말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라며.
   예수님께서는 신비스럽고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방법으로 성체의 빵과 포도주에 현존하신다. 거의 이천 년 동안 교회는 단 한순간도 이것을 증명하기를 멈춘 적이 없다. 신앙을 충실히 지킨다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히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전 세기에 걸쳐 교회는 이러한 "우리들의 신앙의 비밀" 전승해왔다.
   그러면 성체 안에 예수님이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과연 자신이 믿고 있는지를 어떻게 시험해 볼 수 있겠는가?
   여기 그것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작은 비유가 있다. 아침에 우편배달부가 편지를 우편함에 던져 넣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언제 왔는지를 알 수 없기에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하게 된다. 하지만 우편배달부가 초인종을 누르고 편지를 건네주면 그들은 적어도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곤 한다.
   이처럼 성체 안에 예수님이 현존한다는 사실을 자신이 믿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도 예수님과 나의 인격적인 대화를 통해서이다. 대화를 나누는 나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다.
   영성체할 때에나 미사를 드리는 동안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가? 자신을 예수님께 알리고 예수님을 찬미하며 예수님께 온전히 의탁하는가?
   미사 후에도 예수님과의 일치를 위해 내적인 침묵을 지키는 것이 좋다. 감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마음을 가라앉혀 침묵하면서 내 안에 하느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생각을 하고 또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침묵하는 것이 좋다. 감실 앞에서 기도하며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이 성체 안에 현존하심을 내가 믿는다는 증거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성체조배는 특히 중요한데 함께 기도하며 함께 노래하고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함께 한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분명히 아름답고 좋은 것이다. 하지만 성체의 신비를 완전히 내면화시키기 위해 필요로 하는 침묵의 시간이 너무 적은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성체조배, 즉 성체 성사를 공경하는 시간을 따로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성체조배를 하지 않는 시간은 세속적인 것에로 흘러가기 쉽다. 예수님은 성체 안에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다. 커다란 선물에 대한 우리의 답례는 잠심과 경외심, 대화와 흠숭이어야 한다.
   교회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커다란 진보와 고도의 종교문명 시대가 있었고 동시에 그때는 언제나 성체가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 가까이 계시고자 하신다. 우리 가까이에 계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소망은 너무나도 커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은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모든 시대를 초원하여 우리 곁에 계시고자 하셨고 포도주와 빵을 통하여 우리를 완전히 당신의 신적 생명으로 변회시켜주려 하셨다. 예수님은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표시로써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셨다. 그렇기에 그분께 대한 우리들의 사랑도 구체적이여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분에 대한 나의 사랑이 구체적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인식할 수도 있고, 볼 수 있는 나의 사랑도 표현해야 한다. 예를 들면 포옹이나 나를 필요로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 가득찬 어루만짐 등이 그러한 표현일 수 있다. 그리고 간호, 온화한 미소, 부드럽고 따뜻한 말 한 마디 등 내가 이웃에게 보내는 모든 상냥함도 사랑의 표현이다.
   죽은 뒤 예수님과 만났을 때 그분은 "너를 필요로 했던 사람들을 통해서 너는 나를 만나보았느냐? 내 형제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해주지 않은 것은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과 같다." 라고 하실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과 일치하고자 한다면 또 성체 안에서 일치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빵과 우리들의 재산을 이곳만이 아닌 전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가정과 주변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사랑을 실행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들의 사랑은 더욱 구체화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확인할 수 있는 표시로 드러나므로 그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이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몸을 만질 수 있도록 인간의 몸을 취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우리들의 형제, 자매를 만날 때에 특히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에 그와 같이 행동해야 한다. 성찬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이어진다. 양자는 동일하다. 제대 위의 빵과 포도주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들이 이웃 안에서 만나는 그리스도의 몸과 동일하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해주신 것이다. 이 점을 언제나 거듭해서 생각해보야 한다. 즉,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또 예수님은 성체의 빵과 포도주 안에서 완전히 우리 가까이에 계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교회가 점점 더 "성체 안에서의 일치" 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며... 아멘.(곧프리드 단넬 추기경) -마리아 1995년.74호-

[HOME] Copyright 2000-2003 Agnes Le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