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사랑 : 가톨릭메신저 ; '마리아'지 기사
 

 

암스테르담에서의 성체 기적의 불가사의

 

    암스테르담은 성모님께서 오시기 정확히 600년 전인 1345년 당시는 네델란드의 작은 항구 도시였다. 이 작은 도시에서 성체 기적이 일어났는데, 그때부터 암스테르담은 네델란드이 수도로서 유명해지고 경제적으로도 도약하고 부강하게 되었다. 여러 문헌과 그리고 약간의 이본이 있는 옛 녕대기 기사들에 적혀 있는 이 기적적인 사건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우트레트(Utrechter) 교구에 속했던 암스테르담에서 어떤 사제가 종부성사의 부름을 받고 병으로 죽아가고 있는 도마라고 하는 남자를 방문하러 칼버 거리로 갔다. 고해성사를 마친 후 임종을 앞둔 그 남자는 성체를 영했지만 바로 토해내었다. 그를 간호하던 여인이 구토물을 쓸어담아 토해낸 성체와 함께 화로 집어 넣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불을 다시 지폈을 때, 그 성체가 하나도 훼손되지 않은채 불길 위를 떠도는 것을 보았다. 깜짝 놀란 그 여인은 불에 데이지 않고 맨손으로 그 하얀 성체를 불길에서 끄집어 낼 수 있었다. 그 여인은 경외심으로 가득 차서 성체를 깨끗한 모시 수건에 싸서 옷함에 보관해 두었다. 그리고 나서 전갈을 듣고 달려온 사제가 이 성체를 성합에 모셔 성 니콜라스 본당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 다음날 아침 성체가 다시 칼버 거리에 있는 자신의 옷함에 있는 것을 보고 그 여인은 깜짝 놀랐다. 신부가 다시 이 성체를 교회로 가져 갔지만 그 다음날 성체는 다시 옷함 안에 있었다.
   이 희귀한 사건을 보고 사제은 결국 하느님께서 성체의 기적을 숨기지 않으려고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제는 교회의 주교관의 신부들과 이 문제를 의논한 뒤, 그 집에서 본당까지 같은 길을 따라 주님의 성체를 모셨으며, 이번에는 교회 성직자들과 민중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한 행렬을 이루었다.
   시 당국의 책임자들과 암스테르담 구역의 공무원이 같은 달(1345년 3월)에 이 사건의 신빙성을 공적인 기록을 통해 확증했다. 일 년 뒤(1346년) 교구 주교인 아르켈(Jan von Arkel) 주교는 이 기적을 공적으로 공경하는 것을 허락했다. 같은 해에 주민들은 성체의 기적이 일어났던 그 집 위에 성체조배 경당의 건축을 시작했는데, 그 성체조배 경당은 처음부터 "거룩한 곳" 이라고 불리어졌다. 그 기적이 일어났던 개방식 돌화덕도 거기에 남아 있었다. 그 다음해인 1347년 우트레터(Utrechter) 부주교가 성체조배 경당을 봉헌했고, 기적의 성체는 수정으로 된 성체 현시대에 전시되었다.
   중세에는 수없이 많은 성체 행렬과 간구 행렬이 그곳으로, 즉 "거룩한 곳" 에 있는 성체의 주님께로 이어졌다. 매년 3월에 열리는 성대한 기적 행렬 때에는 사람들은 성체 조배 경당에서 성 니콜라스 성당까지 1345년에 거행되었던 첫 번째 성체 행렬이 있었던 길을 따라 갔다.
   얼마 되지 않아서 수많은 치유와 기적이 일어나 "암스테르담의 기적"은 아주 급속도로 네델란드를 훨씬 넘어서 알려지게 되었다.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길들은 그냥 "거룩한 길" 이라고 불려질 정도록 전 유럽에서 엄청난 순례자들이 찾아왔다.
   100년 뒤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다. 즉 1452년 5월 24일 암스테르담에 대화제가 발생했을 때 비록 "거룩한 곳" 이 불타고 감실이 파괴되었지만 귀중한 기적의 성체가 있던 성체 현시대와 그 위를 덮고 있는 섬세한 천은 훼손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재빨리 새로운 경당을 지었다. -마리아 1999년 9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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