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눈물의 유서 (이 루갈다. 1801년 신유박해때의 한국순교자 동정부부)
형님 전상서.
4년 동안 쌓이고 쌓인 회포이오매, 붓을 드니 가슴이 막혀 할 말씀 전혀 없나이다. 불쌍하신 우리 오라버님! 죽으셨나이까? 살으셨나이까? 구월 초승에 소식 조금 들었사오나, 그후 저도 잡혀 갇히매 다시는 소식 막혔나이다.저는 죄도 많고 또 가까이 당한 일이 너무 많으므로, 정신이 혼란하여 지금 말할 수 없사오며, 이제 또 죽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말씀을 쓸지 아득한고로, 이전 지나간 몇가지 일을 쓰려 하나이다.
이제는 세상을 하직하고 천당에서 만나기로 작정하오며, 면할 수 없는 금년 환난에 일초간장이 찢어지는 가운데 집안 식구들을 이별하매, 그때부터 마음에 살 생각이 아주 없어지고, 다만 이런 좋은 기회를 만났으니 천주를 위하여 생명을 바칠 마음 밖에 없어서 마음을 결심하고 잠잠히 생각하며, 아무쪼록 잘 예비하기를 힘써왔더니, 뜻밖에 어느날 아침에 포졸들이 와서 나를 잡아내겠지요. 잡힐 기회없는 것을 원통히 여기어 한탄하던 때에 소원대로 된지라 그 은혜를 천주께 못내 감사하며, 마음이 기쁘고 즐거움은 말할 수 없는데, 또한 근심도 되고 아득도 합니다.관가에 이르러 먼저 수급청(水汲廳)에 가두더니 한시후에 다른 옥으로 옮기니, 이곳은 시어머님과 시동생이 갇힌 옥이라 내려가서 만나보매, 서로 바로보고 눈물만 흘릴뿐 한마디 말도 내지 못했습니다. 저녁이 되어 어두워오매 때는 9월 망일인지라, 서리는 희고 달은 밝은데 달빛이 옥 창문에 비치기로 서로 바라보며 마음속만은 서로서로 알고, 서나 움직이나 누우나 앉으나, 누구든지 잠잠히 구하고 원하는 것은 치명의 은혜뿐이었습니다. 차차 마음이 서로 넘쳐서 각기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다섯 사람이 한 입이 되어 한 목소리로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자고 그 마음들이 쇠와 돌같이 굳어 치명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마음이 꼭 같은지라, 서로서로 더 친하고 서로서로 더 사랑하여 절로 근심 걱정이 없어지고, 갈수록 천주의 은혜가 풍성히 내리어 신령한 즐거움이 울 마음속에 더하여 무슨 일이든지 잊을 수 있고 무슨 염려이든지 다 없어지던 중, 나만은 일편 마음과 일편 육정이, 다른 옥에 갇힌 우리 사랑하온 벗 내 남편 요안에게로 암암이 가더이다. 어찌 잠시인들 잊히리까? 제가 잡히기 전 집에 있을 때에, 요안에게 한날 한가지로 함께 치명하면 얼마나한 복이겠느냐? 하는 편지를 써 보냈더니 기회가 마땅치 않아 못만나고, 그후 얼마 못되어서는 통신이 엄금함으로 종내 못보내고, 그때부터 천주를 위하여 우리 벗과 한날 한시 한가지로 치명하기를 진정으로 바라며 정원으로 원하여 항상 은근히 기구하였사오나, 천주의 주재하시는 일을 누가 아오리까?
10월 초 9일에, 나의 사랑하온 벗, 요안이 생명을 바쳤다는 소식이 들리는지라, 육정에 아픈 것은 둘째이고 요안의 복락이 내 마음에 즐거움을 가득히 주기는 하나 아직도 조금 근심이 남아, 내 스스로 말하기를 '주여! 어찌되었나이까?' 너무 급작스레 떠나게 되어 어떻게나 예비하였는지 마음에 칼이 걸리는 것같아 심정을 어떻게 진정할지 산란한 마음 걷잡을 수가 없다가,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마음이 차차 조금 안정이 되더이다. 생각에 그렇게 떠난 것이 도리어 천주의 은혜가 아닌가? 얼마만한 공로라도 있었으니, 천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를 버리시랴? 생각하매 마음에 근심이 얼마간 풀리듯 하나 아직도 생각이 요안에게 가는고로 함께 갇힌 일가들더러 이런 말을 한즉, 대답이 근심말고 걱정마라. 이전부터 제 할 일은 다 잘 작정하였으니까 하더이다.
그 다음에 집에서 편지 한장이 왔는데 겉봉에 쓰기를, 이것은 요안이 제 누이에게 전한다고 한 종이조각이 제 옷속에 들어있기에 보내노라고 하기에 펴보니 곧 저에게 작별하는 요안의 글씨인지라, 이는 요안이 평소에 나더러 누이라고 한 연고입니다. 쓰기를 "내가 너를 권면하고 위로하노니, 천당에서 서로 만나자" 하였기로, 그때서야 온갖 걱정이 없어지고 또 그 생전 행위를 생각하매, 염려하고 원통할 것이 없음은 세속을 다 벗어버린 참교우였기 때문입니다.
4년 전 봄에 나의 친애하는 벗 요안이 잡혀, 사계간(四季間)에 한번도 옷을 바꾸지 못하고, 여덟달을 갇히어 칼을 잠시도 벗지 못하니, 내 마음에 일간 근심이 쌓인 중, 밤낮으로 생각하기를 천주를 잊지나 않는가. 우리 벗 요안 있는 곳에 내가 가서 보고 위로도 하고 죽을 까 바랐더니, 나보다 먼저 떠날줄을 뉘가 알며 생각이나 하였으리오? 이것이 또한 내게 큰 은혜로다. 이 세상에서는 어느 편에로 돌아보든지 나의 사랑과 생각과 의탁을 받아들일 것이 돌연히 없어지니, 마음에 무슨 생각이 나든지 천주께로만 향하고, 마음에 무슨 설움이 나든지 천당에로만 향하는지라, 12월 13일 관가에서 불러들여, 평안도 벽동에로 위노(爲奴) 정배 가라거늘, 영장을 대하여 곧 말하기를 "우리가 천주를 공경하는고로, 나라 법대로 죽어야 옳으니, 우리 잡아 간 님과 같이 천주를 위하여 죽으려 하나이다." 영장이 듣지 않고 나를 물리치라 하거늘 내가 더 가까이 들어서서 말하기를 "영감께서 나라 녹을 잡수시거늘 어찌 국법대로 아니하시나이까?" 여러가지로 말하여도 도무지 듣지 않는고로 하인을 분부하여 내어 쫓거늘 할일없이 쫓거나와 길을 떠나가며 뜨거운 마음으로 기구하였더니, 백리를 못가서 다시 불러 돌아오는지라, 이것이 어떤 은혜인고, 은혜 위에 말할 수 없는 은혜라, 어떻게 이 은혜를 감사하오리까? 바라노니 죽은 후에라도 형님과 아우가 나를 대신하여 감사하옵소서. 오 주 예수 갈바리아산에 올라가실 때에 네 동리를 지내셨으니, 천주 오 주 예수의 형상과 같이 안배하심이 아닌가? 데리러 온 포교를 다시 보매, 마음이 기뻐 부모를 다시 봄과 같아서 따라 돌아와, 첫번 추열에 천주를 위하여 죽기를 말하니, 즉시 징계하여 비답이 내리신 후에 영장이 나를 다시 올려 죽을 문안에 답하라기에, 수장 그려 다짐하니, 현문 1차 쳐서 칼씌워 하옥하는지라, 옥에 내려가 본즉 두 다리에 살이 헤어져 피 흐르더니, 한시경쯤 되매 아픈 것이 전혀 없으니, 이것이 바라지 못할 은혜로다. 3~4일이 지나매 터진 살이 다나으니, 누가 이런 생각이나 하였으리오? 형문 맞은 후 20일 지나매 아픈 데가 도무지 없고, 남들의 말이 오죽 괴로우랴? 하나, 내 생각에는 이런 말이 바른 말이 아니오 거짓말인듯 싶어 몸이 도무지 이같이 평안할 수 없으니, 누가 제 집에 있어 나와 같이 평안하오리까? 즉시 생각한즉, 도리어 근심됨이 천주 나를 싫어하시는가? 내가 이 형벌에서 더 큰 형벌을 못받을 사람인가? 이렇게 생각이 들어가면, 마음이 부끄럽고 정신이 아득하며, 고복 장계후로 소식이 없고 어찌 들리는 소문에 오히려 살 사람이 있다 하거늘 천주께서 도와주시기를 바라는 것밖에 다른 수가 없고 나를 진정 버리지는 않으실듯 싶어서 어서 바삐 비답이 내리소서 하며 죽기를 바라고 기다릴 동안 아무일이 없어 심심한 때에, 옥사장의 눈을 피하여 몇 줄씩 글자를 써서 이것으로 형님께 영결하직을 같이 받아보소서. 이것을 보시면 조금 위로되실까 바라옵나이다.
어머님! 마음 아프시고 서러워하심을 제가 생각하옵고, 동생아! 네 마음에 근심되고 슬픔을 내 이제 생각하여 나의 심회를 마지막 보내기를, 마치 임종에 무슨 물건을 보냄과 같이 하노라. 어머님! 받으시옵소서.
이 편지가 말이 많고 긴데, 나 덕없는 사람이 감히 남을 경계하였사오니, 진소위 길가에 섰는 장승이 남의 길을 가리키고, 저는 가지 못하는 것이오이다. 그러나 옛 명현의 말이 죽는 새의 소리는 슬프고, 죽는 사람의 말은 착하다 하였사오니, 이 말씀이 영결하는 유언이매, 과히 그르지 않을 듯 하오니, 애정으로 보시고 소제의 괘씸함은 용서하옵소서. 무궁한 말씀을 이 세상에서 다 못하겠기로 그만 아뢰옵나이다.(이 루갈다의 '옥중편지'에서) - 마리아 2001년 110호(11~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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