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상을 입은 심은하를 보고 싶다

후지 TV 드라마에 나가라는 글을 올리자, 나그네로부터 멜이 왔습니다. 일본보다는 중국이 낫지 않겠느냐. 특히 장이모우나 첸카이거라면 좋겠다는 거죠. 그래서 오늘은 중국감독들과 일하면 어떨까-하는 전제하에 글을 써봅니다.

저번과 같이, 다른 의견을 갖고 계신 분들은 답변글보다는 따로 게시판에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쓴 글에 추가, 보충할 것이 있는 글은 답변글로 올려주시고, 기타 자기의 짧은 견해 등은 글 밑의 comment난을 이용해 주십시오.

중국과 홍콩, 대만에는 한국에선 씨가 마르다시피 한 예술영화감독들이 꽤 있습니다. 냉정히 말하면 그들의 영화는 필름 페스티발에서는 환영받지만, 최근 몇 해동안은 썩 좋은 흥행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역량은 있지만, 그들의 미학에는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무사의 편집에 관심을 보였고, 한편으로는 조폭위주의 영화만 양산되는 한국이 느와르만을 붙잡고 늘어지다 주저앉아버린 홍콩으로부터 배울 게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중국이나 대만에서 한국배우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한국배우들의 연기가 중국인들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중국배우들에게서 볼수 없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즉, 중국인들은 참신함을 본 것이지, 완성도를 기대했던 것은 아닙니다. 단적인 예로 연기파 배우들이 인기가 있는게 아니라 젊은 스타들만이 인기를 모으고 있는 점을 주시하십시오.

그런데 심은하는 이런 스타들과는 연기 스타일이 많이 다른 편이고, 연기에 깊이도 있고, 심은하 자신을 내버리고 배역에만 몰두할수 있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이렇게 말할수도 있겠지요. 심은하의 국적을 모르고 언어를 구별할수 없다면, 일본영화에 나오는 심은하는 일본인처럼 보일 것이고, 중국영화에 나오는 심은하는 중국인처럼 보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까지 그런 면이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그녀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건데, 그건 충분히 가능합니다.

지금 중국시장에서 환영받는 한국 스타들은 전부 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스타가 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십시오. 저번 글에서도 밝혔지만, TV와 스크린은 매체의 성격이 다릅니다. TV 스타들은 친근하기 때문에 시청자들로부터 받아들여지는 것이지만, 영화의 스타들은 관객으로부터 공감받을수 있기 때문에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TV에선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인 소재라도 스타들이 연기하면 시청률이 올라가고, 영화에선 욕을 먹어도 친구와 조폭마누라 같이 관객이 무릎을 치며 "바로 그거야!"라고 공감할수 있는 영화가 히트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은하는 다른 한국계 배우들과는 달리 그녀만의 독특한 포지셔닝(positioning)을 외국영화시장에서 할수 있고, 이 점을 십분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쉬리보다는 텔 미 섬싱이 훨씬 더 많은 극장에서 개봉되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는 지나치게 한국적입니다. 그에 비하면 심은하의 영화들은 그런 테두리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또 심은하의 영화들은 남자주인공 한 명을 빼면 상대적으로 스타급이 없는 편입니다. 이건 쉬리에서 여러 주연급이 나오고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조연급이 주연급들과 맞먹는 비중을 차지하는 것과 비교할 때,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이며 따라서 심은하의 영화에서는 관객들이 심은하 외의 인물에 시선을 뺏기는 일이 적다는 것입니다. 한국스타들에 대한 인지도가 높지 않은 일본에서 쉬리를 상영할 때는 김윤진을 앞에 내세웠고, 공동경비구역 JSA 상영당시에도 이영애를 앞세웠던 것은 미녀들을 앞세워 영화를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목을 끌 사람을 한 사람으로 한정시켜 여기 저기로 잠재적으로 관객이 될 일반인들의 집중력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헐리우드 예를 들면, 펄프 픽션은 시사회 때 사람들이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그렇다고 흥행에 자신을 가질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마케팅 부서에서 여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유일한 여자였던 우마 써먼을 포스터에서 가장 크게 보이게 했지요. 그 후 입소문이 퍼져 처음 일주일 후 개봉관의 수가 대폭 늘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심은하의 지난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외국에서 만들게 될 영화에서도 심은하 외에 주연급은 한 명 이하로 제한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작품이 소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사건 중심(event-oriented)의 이야기 전개보다는 사람 중심(character-led)의 이야기 전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글래디에이터입니다. 주연급은 막시마이저와 황제와 황제의 여동생뿐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절대로 조연급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스케일이 커도 이야기가 넘친다거나, 그래서 이해가 안 간다거나 하는 일이 없는 것이죠. 김성수 감독은 무사에서 9명 무사의 성격을 전부 개발할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하다 만 이야기만 있는 영화를 만들고 만 겁니다.

이 점을 감안할 때, 스케일이 빈약하고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그려내는 소품 위주로 영화를 제작하는 일본영화계보다는, 스케일이 크고 한 인물의 일대기를 그려낼수 있는 중국영화쪽이 심은하로서는 그 쪽 시장에 더 큰 인상(impression)을 남길수 있어서 좋습니다.

특히 첸카이거나 장이모우는 스케일이 큰 영화를 만들수 있고 시대물에 강한 감독들입니다. 시대물에서의 여성이란 대개 서정적인 모습을 그리므로 심은하의 주요 성격을 드러내는데 적합합니다. 심은하는 서구적이거나 세련되었다기 보다는 정중동(靜中動 : 조용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음)의 이미지에 단아한 외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극중 주인공의 성격이 개발되어서 후반으로 갈수록 강해지는 인간상을 보여준다면 그런 배역이야말로 심은하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수 있겠죠.

중국 시대물에서의 매력중 하나는 중국 여인의 의상은 몸을 감싼다는 것입니다. 즉 여성적인 매력을 최대한 드러낼수 있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죠. 한국고전의상은 한반도의 기후를 감안하여, 여름에는 옷이 살에 달라붙지 않도록, 겨울에는 옷이 따뜻한 공기를 많이 안고 있도록 여유가 있어서, 옷이 몸에 얹혀져 있다는 식이죠. 그래서 여성의 체형을 드러내는데는 적합하지가 않습니다. 심은하는 글래머는 아니지만, 아기자기한 매력을 드러내는 데는 역시 중국 고전의상쪽이 한복보다 낫다고 봅니다.

요즘 한국의 사극에서는 여자들이 강한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는게 연기 패턴으로 잡혔는데, 중국에서 제작되는 영화라면 그런 연기와 다른 패턴으로 자기만의 연기를 하더라도 뭐라 시비거는 사람들이 없겠지요-한국인들이 얼마나 획일적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남의 선례를 따르지 않고 자기만의 연기 개발을 할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 시대물은 매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심은하가 성격개발에 실패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중국 영화이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의 한국영화에서 실패했을 경우보다는, 한국의 영화제작자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더라도 그 강도가 훨씬 낮을 겁니다.

중국에서 제작되는 영화에 참여할 때는 몇 가지 주의점이 있습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감독의 선택이 제일 중요하지요. 참신한 감각의 감독보다는 장인정신을 가진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는게 낫다고 봅니다. 감각적인 영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완성도가 높은 영화로 감명을 주는 편이 심은하의 이름을 알리는데는 더 낫다고 봅니다. 두 번째 영화로는 참신한 감각이나 실험적인 추구를 하는 감독도 괜찮다고 보여집니다. 그런 면에서 첸카이거나 장이모우는 권할 만하고, 기분에 따라서 영화 찍은 것과는 상관 없이 편집을 해버리곤 하는 가위질의 대명사 왕가위는 피하는 게 좋으리라고 봅니다.

두번째는 소재의 문제인데, 시대물이 아닌 현대물은 피하는게 낫다고 봅니다. 현대물일 경우, 아무래도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않으면 안될 씬(scene)이 곧잘 있을 겁니다. 외국인 억양으로 떠듬떠듬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인상을 못 보여준다고 생각되는군요. 시대물이더라도 중국어 구사가 많이 요구된다면 결코 좋은 선택이라고는 할수 없겠습니다. 또 현대물의 경우 중국인의 정서와 한국인, 일본인간의 정서에서 오는 괴리가 두드러질 경우, 그야말로 협소한 시장만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결코 환영할수 없습니다.

또 무술이 등장하는 영화도 피하는게 좋습니다. 무술이 등장하면 아무래도 그 쪽으로 신경이 쓰이게 마련입니다. 주연급이 아니더라도 조연급이라도 무술을 하면 화면에서 심은하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만약 주연급이 무술을 한다면, 그 시나리오는 보나마나 심은하가 그 무사를 사랑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을 겁니다. 차라리 만화책방 가서 무협지를 빌려보고 말지요. 전쟁씬에 무술이 등장하고, 무술을 구사하는 이들이 엑스트라가 아닌 이상, 무술이 들어가는 영화는 피하는게 상책입니다.

세번째는 배역의 문젠데, 얼마나 감독이 유명하던, 얼마나 시나리오가 잘 쓰여졌던, 얼마나 영화가 이슈를 많이 달고 다니던 간에, 주연급이 너무 많은 영화나, 심은하가 조연급으로 나오는 영화라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심은하의 배역이 주연급 같은 조연급이더라도 사양해야 하고, 주연급이지만 주연급 못지 않은 조연급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그런 주연급은 피해야 합니다. 심은하는 안성기처럼 이 영화 저 영화에 다 얼굴 들이미는 타입이 아니기 때문에, 좀더 선택에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비싸게 굴었는데 외국에 나가선 싸구려 처신한다는 말을 들을수도 없는 일이구요.

왜 중국영화 감독들이 심은하를 안 부르는지 나에게는 그게 신기하답니다.

2001년 10월 28일

방문객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