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를 향한 목소리 (제 3회)
세상이 다르게 보이던
날
방문객 씀. (2002년 12월 26일)
여느 때처럼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탄 그 날은 하늘이 우중충했습니다. 비가 막 내릴 듯한, 하지만 내리지는 않았고, 가끔 땅 위로 떨어지는 햇빛은 여름날의 그것에 못지 않아서, 선글래스를 끼었던 날이었습니다. 언제나 다니던 길을 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웬지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전혀 다녀보지 않았던 길처럼 새롭게 느껴지더군요. 한참 주위를 둘러보다가 무릎을 치고 깨달았습니다-왜 그 날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였는지를.
바로 날씨때문이었습니다. 개인 날씨라고 보기에는 뭐하고, 그렇다고 흐린 날씨라고 치부하기도 뭐한 그런 어정쩡한 날씨. 그 날씨때문에 세상은 유난히 밝지도 어두워 보이지도 않았고, 덕분에 난 건물들의 외벽의 재질을 새삼스럽게 보게 된 것이죠.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은 달라보였던 것입니다.
눈에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게 보였다는 말은, 그것들이 어둠속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의 모습은 확인할수 있으나, 평상시에 느껴보지 못했던 그것들의 재질감을 느껴볼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오의 햇빛보다는 구름 사이로 슬쩍 흘러나오는 햇빛이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사진에는 하이 라이트(high light)와 섀도우(shadow)라고 부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전자는 빛이 강하게 떨어져서 아무 것도 알아볼수 없고 하얗게 뜨는 부분이며, 후자는 빛이 전혀 떨어지지 않아 아무 것도 알아볼수 없고 까맣게 나오는 부분입니다. 즉, 하이 라이트와 섀도우만으로는 사진을 만들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알아볼수 없으니까요.
사진가들은 어디에 하이 라이트를 주고, 어디에 섀도우를 남겨놓을지를 두고 조명에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그것은 하이 라이트와 섀도우가 사진 전체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기 보다는, 그 둘을 이용함으로써 얼마나 효과적으로 피사체를 드러낼수 있느냐에 대해 고민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심은하씨는 오래동안 하이 라이트로부터도 벗어나 있었고, 지금쯤이면 얼마전의 섀도우로부터도 벗어났을 것입니다. 지금은 그녀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부분은 아닐테지만, 그녀가 그녀의 인생을 관조하고 새로운 결정을 내리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적절한 시기일 것입니다. 그녀는 가장 중립적인
상황에서 그녀가 가진 또 가졌던 모든 것을 다 꺼내 보고 살펴볼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심은하씨가 섀도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하이 라이트마저도 포기함으로써 모든 것을 암흑속에 버려두는 우(愚)는 범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