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 부는 바람

 

중국

 중국은  최초의 유럽인들이 통상을 제의하여 왔을 때 이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일본보다 늦게 포루투칼 인에 의해 전파되었다. 그리고 1567년 포루투칼인이 광동에서 식민지를 개설한 이래 중국 남부에 확대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의약용으로 사용되었다.  16세기 말경 청의 군대가 운남을 정복했을 때 병사들 가운데 흡연한 병사들만이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흡연은 말라리아의 특효약으로써 급속히 번져 1620년경에는 대 유행하게되었다. 1638년 이래로 심한 금연령을 내렸으나 효력이 없었고 흡연은 중국의 북부로 그리로 지방 촌으로 전파되어 나갔다. 그리고 1715년 야소회의 선교사가당시의 조정인 청조에 냄새 맡는 담배와 그 용기를 헌상한 이래로  신사 숙녀들 사이에  이 담배가 유행하였고 그 결과 프랑스에 못지않는 용기가 만들어졌다. 17세기 말 이래로 동북부 및 동부 시베리아에서 담배를 재배하여 시베리아에 판로를 개척하였으며 이로 인해 동부 시베리아에 진출한 영국 상인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일본

 담배는 1605년 포루투칼 선교사에 의해 일본의 나카사키에 전해졌다. 일설에는 이것보다 훨씬 일찍 1543년에 다네 가시마에 표착한 포루투칼 선박이대포와 함께 전해주었다고도 한다. 저자 미상의 연초기에는 게이초 연간에 처음 조선에서 들어왔다고도 하며 임진왜란 때에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부하군졸들이 흡연법을 배워 일본에 전하였다고도 하며 1877년 영국인 A.M사토가 쓴 연초기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조선 침공때 그 종자도 도래하였다고 기술한 것도 있으나 서양인들의 내왕에 따라 바다를 건너 전해진 것이 더 확실하다.

어쨌든 일본에 들어온 담배는 타바코 라는 명칭과 함께 포루투칼어의 키세루와 라오차라는 단어도 동시에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에도 막부는 1609년 흡연 금지령을 내리고 이른바 담뱃대를 사냥했다. 이것은 막부의 사치금지 정책과 화재예방을 위한 것이었으나 금지는 도저히 불가능했고 흡연은 서민들에게까지 확산되었으며 담배를 특산물로 삼아 재정을 돕는 번(番) 마저 등장했다.

 

조선

 조선과 교역을 해왔던 쓰시마 사람들은 나가사키를 드나들면서 담배를 알게 되었고 이를 조선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조선이 이것을 청나라 수출품 목록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아 담배 재배는 아주 신속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653년 제주에 표류하여 조선 조정에 의해 붙잡혀 있던 하멜은 그의 표류기에서 50~60년 전까지만 해도 조선인들은 담배를 몰랐는데 이것의 재배법과 흡연 습관을 일본에서 배웠다고 적고 있다. 경상도에는 담바구 타령 있어 담바구는 다바코의 음으로 담배를 가르키고 담배가 일본을 통해 들어와 경상도 지방에는 많이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유한은 이 일본 견문잡록에서 담배를 부산 동래에 있는 왜관에서 처음 알게되었는데 이를 담바고라고 조선인들이 부르는 것은 왜인들이 다바코라 부르는 것을 보고 조선인들인 흉내낸 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바코라는 것은 다엽초(多葉草)에서 입을 떼어 이를 세분한데서 나온 이름이라고 하였는데  담배라는 말이 다바코라고 하는 일본어에서 전래된 것임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처럼 조선에 담배가 전래된 연대와 경로에 대해서는 고정된 설이 없다. 다만 국내 문헌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기록들을 종합하면 1608년~16년 사이에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국내 문헌들은 그 설명에서 모두 광해군 때에 일본으로부터 들어왔다고 하는 견해인데 반해 오오쓰키 켄타쿠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담배의 용도의 설명으로는 조선 제14대 선조 때부터 인조 때까지 명관이며 석학이었던 지봉 이수광이 1614년 지봉 유설중에 <담배초의 다른 이름은남령초라고도 하는데 근세 왜국에서 나오다>라고 하였다. "담배는 잎을 따서 폭건(爆乾)하여 불을 붙이어 피운다. 병든 사람이 대통을 가지고 그 연기를 마신다. 한번 빨면 그 연기가 콧구멍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능히 담과 하습을 제거하며 또한 능히 술을 깨게 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이를 심어그 방법을 씀으로 매우 효과가 있다. 그러나 독이 있으므로 경솔하게 사용하면 아니 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담배가 우리 나라에 전래된 17세기초인 당시에 있어서는 의약품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관계로 회충에 의한 복통에 담배를 피워 진통을 시키거나충치 예방이나 치통에 담배 연기를 입안에 되 품어 진통하게 하였다. 곤충에 물렸을 때 그 부위에 담배를 피운 후에 침을 발랐고 상처의 지혈 또는 화농 방지제 등으로 이용하였다. 특히 문헌에 의하면 담을 치료하는데 특효가 있다고 선전되어 어린아이들이 치료제로 피웠다.  이를 본 하멜은 조선에서는 4~5세만 되어도 담배를 피운다고 기록했다.  담배가 들어오고 곧이어 17세기초 경에는 담뱃대가 보급되어 있었다. 18세기 김홍도 등의 풍속도를 보면 대개 긴 담뱃대인 장죽을 물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짧은 것은 곰방대라고 하며 긴 것은 장죽으로 당시양반의 권위의 상징이 되었으며 중인 및 상인은 짧은 것을 쓰게 되었다. 훗날 곰방대도 점점 짧아져 호주머니 속에 휴대할 만큼 짧아졌다. 담배의 고가와 그 피우는 모습으로 인하여 조선에서의  담배는 또한 유교 질서의 권위 속에서 장유유서 및 남녀의 차별로 인하여 어린이와 여성의 흡연은 공개적으로는 금지되어 왔다. 그런 연유로 1960대까지는 미성년자와 여자의 흡연율은 외국에 비해 매우 낮은 편이다.  

담배가 우리 나라에 전해지자 담배를 찬성하는 찬연론과 이를 배척하는 배연론이 대립하였다. 배연론자는 --- 좋은 밭이 아무 쓸데없는 담배 경작으로 곡식 농사에 지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항상 불을 사용하므로 화재의 위험이 따른다 하여 이를 배척하였다.  찬연론자는 --- 담에 유익하고 기분 나쁠 때 소화가 잘되고 엄동에 한기를 막는다는 등의 의약상의 효과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흡연 풍속은 우리 민중의 대중적 기호품이 되어가면서 긴장 완화위안 작용에 큰 구실을 하게 되었고 양반층의 붕괴로 평민층으로 확산되어 가면서 흡연 인구는 점차 증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