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제발 절 좀 때려주세요. 남자는 1분에 1000엔(약 1만1000원), 여자는 500엔(5500원)입니다."

오늘 드리려는 말씀은 며칠전 도쿄 신주쿠 코마극장앞 광장에서 만난 일본사람 얘기입니다. 그의 직업은 '매 맞아주는 남자'. 좀 슬픈 얘기이긴 하지만 냉엄한 자본주의 속에 살아가는 '너무나 책임감 강한' 사람의 얘기이지요.(이 얘기는 다음주쯤 신문에도 기사로 쓰려고 해요. 그전에 홈페이지 독자들만을 위해 단독보도하는 겁니다.)

그를 만난 건 지난달 26일 밤 11시반이었습니다. 이전에도 신주쿠 광장에서 그가 매일 밤 매를 맞는 '장사'를 한다는 소문을 듣고 몇번 가보았습니다만 시간이 맞지 않아서인지 헛걸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날은 좀 기다려서라도 그를 꼭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에 신주쿠 근처에서 저녁식사를 마쳤습니다. 마침 함께 저녁을 먹었던 LG전자저팬의 건장한 남자 두명이 저를 도와주겠다며 동행을 해주었습니다.

그때가 10시쯤 됐을까요. 코마극장앞은 추운 날씨 때문인지 인적이 거의 없고 썰렁했습니다. 추워서 안나왔으려나 하는 생각에 근처 포장마차(정확히 말하면 트럭뒤를 포장마차처럼 개조한 선술집) 주인에게 물어봤더니 비가 오지 않는한 몇시가 됐든지 반드시 나온다고 하더군요. 내친김에 옆의 커피숍으로 들어가 기다렸습니다. 커피숍의 아가씨도 그 사람을 안다며 자기가 퇴근하는 새벽 6시경에 늘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늦게 나오면 여기서 밤을 새워야 하나...

너무 늦은 것 같아 11시반쯤 커피숍을 나왔습니다. 그가 안오면 그냥 집으로 가려구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코마극장앞을 한번 둘러봤더니 그때 막 그가 '출근'한 것입니다. 추위 때문에 파랗게 얼어붙은 입술, 맞아서인지 퉁퉁 부어오른 눈두덩, 푸석푸석한 얼굴... 그는 커다란 보스턴백 같은 것을 풀어놓고 그리세린 덩어리를 덜어내 얼굴에 막 비벼 바르고 있었습니다.

좀 무섭기도 하지만 슬금슬금 다가가 "실례합니다. 한국 매스컴인 동아일보의 이영이특파원입니다. 취재차 나왔는데요"라고 말을 걸었지요.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취재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꺼리는 아픈 얘기까지 물어봐야 하니까요. 그래서 그의 첫 반응이 걱정이 됐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첫 대답은 "환영합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기자도 제 손님이 돼주셔야 해요. 여기 세분이 같이 오셨으니까 세분 다 저를 때리신 다음에 취재를 하시죠"라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때리고 시작하라... 순간 저는 당황했습니다. 여자인 제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마음먹고 때려본 적이 있겠습니까.(물론 마음속으로는 미운 사람들을 무수히 때렸겠지만요) 그래도 상대방은 남한테 맞아야 먹고 살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어차피 사진을 찍으려면 그 사람이 누군가에게 맞고 있는 장면이 필요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옆에 동행한 LG의 젊은이에게 부탁했죠. 그사람을 때려달라고요. 그는 처음에는 막 거절하더니 나중에는 하는 수 없이 글러브를 끼더군요. LG의 나머지 한사람과 저는 조마조마 하면서 1분간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때리는 손님의 규칙은 간단했습니다. 권투시합과 마찬가지로 두사람이 글러브를 끼고 맞붙는데 손님만이 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무조건 다 맞아주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은 사정권안에 있으면서도 나름대로의 기술을 발휘해서 몸을 이리저리 피합니다. 또 강펀치에 대비해 권투선수처럼 머리에 헤드기어를 씁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맞지 않으면서 맞아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LG 젊은이는 왕년에 좀 운동을 했던지 펀치가 날카로왔습니다. 저는 중간중간 사진을 찍으면서도 그 불쌍한 사람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습니다. 다행히 몇 대 안맞았고 1분이 끝났습니다. 공은 '맞아주는 사람'의 홈리스(homeless) 친구가 울려주었습니다. 그 사람 펀치가 끝나고 저와 나머지 한사람에게도 때리라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질문이 끝난후 도망치듯 돌아왔습니다. 왠지 딱한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은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며칠동안 마음이 언짢았습니다.

아참. 그 사람 이름도 소개를 안했군요. 이름은 하레루야 아키라. 물론 본명이 아닙니다. 하레루야는 기독교의 할렐루야와 발음이 비슷하죠. 한자로는 晴留屋 明. 일본어로 '하레루'는 '기분이나 날씨가 맑아지다'는 뜻이고요, '야'는 우리식으로 말하면 '∼꾼'의 의미죠. 스트레스나 울분이 사라지고 기분이 상쾌해지게 해주는 사람이라는 말이죠. 또 '아키라'는 원래는 '밝다'는 뜻이지만 발음이 비슷한 '포기하다'는 뜻의 일본어 '아키라메루(諦める)'를 끌어다가 '포기하지 않는다(아키라메나이)'는 의지를 담았다고 하는 군요.

나이는 36세. 자신은 23세라고 주장하지만 첫인상으로는 40대중반정도로 보이더군요. 일본 북부지방인 아오모리 출신으로 고교입시에 실패한 후 16살에 도쿄에 와서 토목공사장 막노동꾼이나 수산물시장 짐꾼으로 일하면서 권투연습장에 다녔답니다. 그리고 20세에 프로권투선수로 데뷔. 첫 시합과 두 번째 시합은 첫 라운드에서 KO패, 3번째는 판정승으로 이겼는데요 28살때까지 통산성적은 4승8패. 별로 실력이 없는 사람이었죠.

8년전에 요코하마에서 전기공사업을 시작해 처음에는 사업이 점점 확대됐습니다. 마침 일본의 거품경제가 최고조에 달했던때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순진해서인지 매번 주변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해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누가 와서 보증서달라고 하면 서주었다가 뒤집어쓰고, 재하청업체가 공사대금을 선불로 지급해달라고 부탁해 돈을 주고 나면 공사도 착공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재하청업체가 도망가 손해를 뒤집어쓰고... 등등입니다. 그래도 사람이 너무 선해서인지 남의 탓은 하지 않더군요. 자신은 성선설(性善說)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누구나 착하게 태어났는데 환경이 어쩔 수 없어 나빠졌다고요.

그러다가 보니 빚이 무려 1억5000만엔(16억원)으로 늘어났답니다. 어떻게든 빚을 갚아보려고 음식점 경영에 손을 대보기도 했지만 빚을 갚기는 커녕 종업원 월급도 못주는 나날이 계속됐습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빚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앞이 캄캄해진 그는 밤에 몰래 도망갈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자신의 짐을 떠넘기는 것이 부당하게 느껴졌습니다. 자신대신 누군가 짐어져야할 빚이 엄연히 남아있었으니까요. 자살도 생각했습니다. 마침 그는 1억5000만엔의 생명보험에 가입해있었습니다. 며칠동안 자살로 보이지 않도록 교묘하게 죽어 보험금을 탈 수 없을까 고민하며 자살방법을 짜내었습니다. 그러나 자살이라는 것이 발각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고 자신이 죽고나면 부인과 세명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했습니다.

"도망가지도, 죽지도 말자. 현실에 맞서 정직하게 살자"고 다짐했지만 그에게는 돈을 벌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일이 있을때마다 스스로 아무 공사장이라도 나가고 전기공사사업도 명색은 유지하면서 일감이 들어오길 기다렸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한때 프로복서였던 경험을 살려 돈을 받고 매를 맞아주는 일을 해보자고.

1분에 1000엔씩 받으면 모두 15만명에게 맞으면 빚을 갚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리고 98년말부터 시부야 신주쿠 등지를 전전하며 매맞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적당한 공터가 있는 신주쿠 코마극장 앞에서 정착한 다음부터는 비가 오지 않는한 반드시 나와 '장사'를 합니다. 낮에는 공사장에 나가 막노동을 하고 밤에는 신주쿠에 나와 매를 맞는 그는 늘 수면부족으로 비몽사몽한 상태랍니다. 한푼이 아쉬운 그로서는 한 대라도 더 맞아야 먹고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빚을 얼마나 갚았는지 궁금하시죠? 2년2개월동안 그는 모두 1만여명에게 매를 맞았답니다. 단순히 계산하면 수입은 1000만엔. 그런데요,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빚이 오히려 2억엔으로 늘어났다는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게 빚이죠.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매를 맞아도 늘어나는 이자조차 갚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은 엄청 강합니다. 어느날 부인이 집세를 내지 못해 붸겨나게 됐다며 밀린 집세와 새로 이사할 집에 내야할 비용 등 모두 150만엔이 필요하다고 했답니다. 그말을 들은 그날 그는 새벽 6시까지 100명에게 매를 맞아 10만엔을 벌었답니다. 물론 그 다음날은 몸져 누웠지요. 그래도 어떻게든 가족에게 필요한 돈을 마련하겠다고 기를 쓰고 맞았답니다. 자신은 가족과 떨어져 홈리스 같은 사람들하고 생활하며 밥도 제대로 못먹으면서...

건강은 어떻냐고요? 물론 엉망이죠. 가끔씩 격투기 등 과격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주변사람들에게 잘난체 하기 위해 그를 막 때린답니다. 그것도 정해진 권투규칙도 어기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때려눕힌 뒤 의기양양한다는 거죠. 그래서 때로는 약값이 더드는 적도 있습니다. 부인이나 주변사람들도 모두 이일을 그만두라고 말린답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어봤죠. 빚도 못 갚는데 도대체 왜 이 일을 계속하냐고요. 그는 "대전(對戰)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이렇게 계속 하다보면 화제가 되어 커다란 도전이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거죠. 사실인지 모르지만 전에도 몇 번인가 대전이 성사될뻔 하다가 무산된 적이 있답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CBS방송이 그의 얘기를 듣고 그때 막 프로복서로 데뷔한 알리의 딸과 그와의 대전을 추진한 적이 있답니다. 돈도 제법 준다고 하고 모든 것이 순조로왔는데 막판에 그 사람 친구들인 홈리스 몇사람을 매니저 자격으로 미국에 데려가겠다고 우겼다가 일이 틀어졌다는군요.

이 사람의 얘기를 들으니 어떠세요? 속이 갑갑하시지 않으세요? 세상을 이렇게 답답할 정도로 순진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니... 빚? 그까짓것 요즘 세상에 딱 떼어먹고 버젓이 잘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얼마나 바보 같아요?

하지만 저는 그 사람 만나고 참 가슴이 찡했습니다. 그런 방법을 그사람이 몰라서 안하겠습니까. 원래부터 그래선 안된다는 것이 정답이지요. 그런 정답을 외면한채 자기 위주로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많이 맞아서 돈도 많이 벌고, 그러면서도 정말 건강하길 빕니다.(2001년 3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