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도쿄 니혼바시의 브릿지스톤 미술관에서 개최하고 있는 오귀스트 르노와르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이단아에서 거장으로의 길'이라는 이 전시회는 저에게 여러 가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우선 (여러분들은 비웃으시겠지만) 제가 그리는 그림이 르노와르에 비해 너무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제 겨우 유화 세장 완성한 생초보치고는 너무 꿈이 크다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르노와르 그림 중에도 어떤 그림은 정말 수준이하처럼 보이는 습작도 많더라구요. 눈여겨 보아두었다가 그대로 흉내라도 낼 수 있을 것 같이 보이는 그림이었죠. 그렇게 못그리는 그림은 저도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은 화가가 또 다른 그림에서는 너무나 완벽한 볼륨감을 보여주었죠. 왜 그렇게 편차가 큰 것일까요? 아니면 제가 그의 습작 그림들을 너무 과소평가 한 것일까요? 그의 습작들을 보면서 분명히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갖다가도 완성작을 보면 또다시 커다란 좌절감이 밀려왔죠.

특히 르노와르의 그림에서는 아무리 작은 부문을 그리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거칠게 그리더라도 나름대로의 효과는 다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 얼굴을 손톱만하게 그린 그림에서도 그 안에 눈 코 입이 모두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화난 표정인지 즐거운 표정인지 나른한 표정인지 금새 알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펜이나 연필로 그린 세밀화도 아니고 그저 아무렇게나 물감을 툭툭 찍은 것 같은 투박한 유화인데도 말입니다.

제가 최근 완성한 누드화(홈페이지의 yes202 갤러리에 공개)는 캔버스가 무려 25호 사이즈로 실제 모델 크기의 절반정도는 되는데요, 그렇게 크게 그리는데도 눈 코 입 그려넣기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붓이 문제일까요? 아무리 가는 붓으로 그려도 선이 굵어져서 이목구비가 살아나지 않더라구요.

여기까지는 제 잘난체였습니다. 진짜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제부터입니다.

뭐냐면 말이죠,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일본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 미적 호기심이 대단하다는 겁니다. 일본에서는 세계 유명화가의 전시회나 세계 유물전이 아주 자주 열립니다. 그렇게 자주 열리는 전시회에 도대체 누가 찾아갈까 생각했던 적도 있는데요, 실제 전시회에 가보면 입이 딱 벌어집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요.

르노와르전도 2월 10일에 시작해 다음달 15일까지 열리니까 지금은 거의 끝물인데도 어제 전시회장은 발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특히 평일 저녁 7시경이었는데도 말입니다.(물론 6시 이후 관람객은 입장료(원래 1300엔)를 200엔씩 할인을 해주는 서비스 때문인지도 모르지만요) 그래도 그렇지 할머니 할아버지 아줌마 아저씨 젊은이 아이들 할 것 없이 한 그림앞에 십여명씩 몰려들어 쾌적하게 감상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죠.

르노와르전 뿐만이 아닙니다. 지난달에 가봤던 로트레크전(도쿄 도부미술관)에서도 짜증날 정도로 사람이 많았습니다. 지난해 봤던 실크로드 유물전(도쿄 우에노 박물관)도 마찬가지였구요. 모두들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작품을 이해하려 무던히 애쓰고 어떤 사람들은 수첩에 깨알같은 글씨로 메모하는 모습을 보니 한국과 참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지적 호기심이 너무나 강하다고 할까요. 특히 미술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참으로 높습니다. 별로 지적으로 보이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도 왠만한 미술상식을 거의 완벽하게 알고 있고 무슨 전시회가 열렸다하면 모두들 그 전시회를 화제로 대화를 나누더라구요. 그래서인지 왠만한 전시회 하나 하면 거의 본전을 뽑고도 남을 것 같더군요.(한국은 반대로 너무 손님이 없어 적자 보는 곳이 많지 않을까요?)

르노와르전에 붙어 있던 설명을 보니 르노와르가 일본에서 폭발적으로 인기를 끈 것은 세계제1차대전 직후라고 하더군요. 그 시절 우리나라 사람은 르노와르라는 화가가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을텐데(일부 화가는 알았을지도 모르지만) 일본 국민 전체가 르노와르에 열광했다는 게 무섭지 않으세요?

그도 그럴 것이 쇄국정책을 써오던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은 서구와의 교류가 상당히 일찍부터 이뤄져 19세기부터 유럽에 일본풍이 유행했을 정도라니까요. 실제로 일본의 대표적 화가인 호쿠사이(멀리 후지산이 보이고 그 앞에 커다란 파도가 가깝고 멀리서 일렁이는 그림으로 유명하지요)의 그림이 유럽에 알려지면서 19세기 후반 유럽화풍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도 합니다.

클로드 모네의 '자포네즈' 19세기 후반 유럽에 일본풍이 유행하면서 화가들의 그림에도 자주 등장한다. 모네 작품중에서 가장 화려하게 일본풍을 표현한 작품. 기모노에 붙어있는 수염난 일본남자 표정과 모네의 부인인 카미유의 귀여운 표정이 대조적이다.

어제 전시된 르노와르의 작품 '독서하는 카미유 모네'에서도 배경 벽면에 일본부채가 그려져 있었고요(이 작품은 특히 일본인들이 주목했죠) 르노와르전 옆방 전시실에 있던 폴 고갱의 '말 머리가 있는 정물'에도 일본 인형이 등장하더군요. 로트레크도 일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에서 일본에서는 인기가 대단하구요.

일본사람들이 미술이면 사족을 못쓴다는 것은 지난해 여름 가봤던 시코쿠지방 도쿠시마에 있는 오츠카국제미술관에서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포카리스웨트 등으로 유명한 오츠카제약이 설립한 이 미술관은 유명한 서양 미술작품 1074점을 정교한 도자기에 실물사이즈 그대로 재현하고 전시관도 원작품이 전시돼있는 전시장과 똑같이 재현해 전시한 이른바 '모조 미술품' 전시관이지요.

고대 그리이스의 항아리그림, 폼페이의 벽화, 모자이크화를 비롯, 중세의 성당벽화, 르네상스 바로크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명작품이란 유명작품은 모두 실물크기로 정교하게 재현한 이 전시관을 둘러보고 그저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수박 겉핥기 식으로 휙휙 둘러보는데만 세시간 이상 걸렸습니다. 각 방마다 세계 유명 박물관이나 미술관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 마치 세계 각국의 전시관을 여행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고요.

시코쿠 도쿠시마현에 있는 오츠카국제미술관 안내책자 표지에 실린 미술관 내부풍경. 미켈란젤로가 시스틴성당 천정과 벽면에 그린 천지창조 등의 작품을 도자기에 그대로 재현하고 실내 구성도 바티칸에 있는 시스틴 성당과 똑같이 꾸몄다.

이 미술관은 오츠카 계열사인 도자기회사가 작품을 제작하는 등 무려 400억엔을 들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돈을 많이 들여 지었는지 물어봤습니다. 우선 오츠카가 갖고 있는 정교한 도자기제작 기술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 첫째 목적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다음 대답이 더욱 재미있었습니다. 일본인이 개별 미술작품을 보기 위해 일일이 세계를 여행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는 거죠. 그것은 그만큼 일본인들은 미술작품을 보면서 문화적 욕구를 채우고 있다는 뜻이죠.

이번 르노와르 전시회에서 느낀 또 한가지. 역시 일본은 경제대국이라는 겁니다. 어제 본 르노와르 작품중 '탄호이저의 무대'를 비롯한 몇몇 작품이 일본인 개인 소유로 돼있더군요. 또 옆방 전시실에 있던 고갱 고호 모네 마네 등 세계적인 화가들의 작품은 모두 브릿지스톤 소장이더라구요. 일본에는 이렇게 세계적인 작품을 다수 소장한 미술관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현재 일본의 대표화가인 히라야마 이쿠오도 실크로드 유물을 엄청 많이 소장한 걸로 유명합니다.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시기에 일본인들의 미술품 수집은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그 대표주자인 소고백화점은 거품경제 붕괴후 경영이 악화돼 지난해 도산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림책에서나 볼 수 있는 유명작품들이 일본 소유라는 것이 좀 배도 아프고 부럽기도 하더라구요.

그래도 제 개인적으로는 그런 좋은 전시회가 여기저기서 자주 열리는 도쿄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작은 기쁨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들도 일본에 오시면 좋은 전시회 소개해드릴께요.

2001년 3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