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역사교과서 문제로 좀 바빴습니다. 그래서 며칠전 SK사보에 기고하기 위해 써둔 원고로 이번 주 일본 소식을 대신할까 합니다. 이해해주시는 거죠? 조금 내용이 딱딱하더라도 일본경제 공부 한다고 생각하시고 읽어주십시오.>

"휴, 드디어 악몽같은 3월이 끝났다."

금요일인 3월 30일 저녁, 일본의 경제관련 부처와 금융기관 관계자들은 일제히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 도쿄증시의 닛케이주가가 다소 하락하고 엔화가치가 떨어지긴 했지만 올초부터 전세계 증시를 폭락사태로 몰고갔던 '일본경제 3월 위기설'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고 3월이 무사히 지났기 때문.

그러나 어느 누구도 앞으로 사태가 호전되리라고 내다보는 사람은 없다. 그저 한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에 불과한 것이다. 오히려 증권가에서는 향후 각종 금융일정에 따른 'X월 위기설'이 끊임 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80년대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던 일본. '소니의 워크맨'을 시작으로 최고의 기술경쟁력을 자랑했던 일본에선 요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세계 경제까지 요동치며 불안해하는 것일까.

-거품경제 붕괴와 금융부실

일본의 80년대 고성장이 끝나고 거품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90년대는 '잃어버린 10년'으로 표현된다. 80년대 고성장기에 폭등했던 부동산 가격이 90년대 들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부동산을 담보로 빚을 끌어다쓴 개인의 가계와 기업의 경영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빚을 갚지 못하는 채무자들이 급증하자 금융권의 부실채권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자민당 정권은 10년간 구조개혁의 외과수술 보다는 경기부양의 영양제 요법에 중점을 두어왔다. "경기만 살아나면 된다"며 10년간 110조엔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재정자금을 쏟아부었으나 경기가 살아나기는커녕 세계 최악의 재정적자만을 기록했다.

요즘 일본의 부실채권 처리가 문제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경제에 주는 충격을 피하기 위해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처리에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임기응변'으로 대응해왔다. 이에 따라 금융기관들도 부실기업에 빌려준 돈(부실채권)을 정리하지 못하고 부실기업을 살리기 위해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으로 자금을 쏟아부었다.

결국은 금융기관들도 덩달아 부실해져 세계 증시하락의 '주범'이 돼버렸다. 경제규모로 세계에서 두 번째인 일본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메가톤급 충격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는 것.

특히 일본의 회계연도 기준일인 3월말을 앞두고 기업이나 금융기관이 적자결산을 피하려 국내외 보유주식을 대량 매각할 경우 증시폭락 뿐 아니라 금융기관 연쇄 도산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게 '3월 위기설'의 핵심이다. 지난달 세계적인 신용평가회사 피치가 19개 일본은행에 대해 신용등급 하향조정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해 위기설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여기에 모리 요시로 내각의 퇴진을 둘러싼 정치공백도 일본 경제를 더욱 추락시키고 있다. 모리 총리의 잇단 실수와 실언으로 구설수에 오르면서 내각 지지율이 9%대까지 떨어지자 정치권에서 4월중 자민당 총재 및 차기총리 선출을 추진하고 있는 것. 이에 따라 퇴진이 예정돼있는 '식물총리'가 주도하는 긴급경제대책도 힘을 얻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미-유럽-일 경제 악순환

미국은 일본 금융시장 불안이 세계 경제를 악화시킨다며 일본 정부에 과감한 부실채권 처리 등 구조개혁을 서둘러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입장에서 보면 미국의 경제후퇴도 원망스럽다.

지난해까지 사상 최고의 호황을 누리던 미국 경제가 갑자기 후퇴하면서 직접적인 타격을 입고 있기 때문. 미국 경제 호황이 계속되면 일본도 어떻게든 현상황을 유지하며 버텨볼수 있지만 미국마저 무너질 경우에는 일본은 더욱 심각해진다는 것. 특히 상대적으로 정보기술(IT)부문에 뒤져있던 일본은 지난해부터 '5년내 IT대국'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IT 신산업을 디딤돌로한 경제회복을 노렸으나 이 역시 급속한 성장은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그동안 비교적 견고한 성장세를 보이던 유럽도 미국과 일본증시의 영향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유럽 증시의 폭락은 다시 미국과 일본 증시로 이어지고 있다. 결국 미국과 일본, 유럽이 서로 개별적인 악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악영향을 주고 받는 악순환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달 19일 워싱턴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는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과 모리 요시로 일본총리가 세계 경제안정을 위해 긴밀히 협조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또 미국의 연방금리이사회(FRB)와 일본의 일본은행은 금리인하 등 증시부양 조치를 단행하는 등 공조태세를 갖췄다.

-일본 경제의 각종 지표들 '빨간불'

도쿄증시는 올해초부터 하락세를 거듭, 3월13일에는 11,819.70엔으로 16년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그후 일본이 부실채권 처리 등 구조개혁을 추진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다소 회복되긴 했지만 3월말(30일) 현재 12,999.70엔으로 13,000엔이하를 밑돌고 있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지난해 상반기 간신히 플러스 성장으로 올라서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감을 주었으나 지난해 7∼9월에는 다시 마이너스 0.6%로 떨어졌다. 당초 이기간중 성장목표는 플러스 0.2%였다. 일본 정부가 당초 목표로 삼았던 2000년도 실질성장률 1.2%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10∼12월 성장률이 0.4% 이상 돼야 하지만 현재 예상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일본 정부가 현재 가장 우려하고 있는 것은 디플레이션(물가하락) 심화. 물가가 하락하면 기업의 수익이 악화되고 기업 수입이 줄어들면 개인소득도 줄어들어 다시 소비가 위축되고 물가가 하락되는 악순환으로 접어들게 된다. 최근 일본 정부는 이미 디플레이션 상황에 접어들었다고 인정했다.

실제로 1월 도매물가지수(95년 평균=100 기준)는 95.7로 지난해 1월보다 0.3% 하락했으며 조사 비교 시점인 95년보다는 4.3%나 떨어졌다. 4개월 연속 하락한 것이며 하락폭도 지난해 9월 이후 최대다. 또 지난해 전국소비자물가지수도 전년보다 0.7% 하락했다.

실업률도 크게 늘어 지난해 12월과 올 1월 두달간 4.9%로 세계 2차대전 이후 최고수준을 기록했으며 2000년말 현재 일본의 국가채무도 전년보다 38조엔(9.3%)이나 늘어난 522조엔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일본의 국가채무가 크게 늘어난 것은 정부가 경기 부양 등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발행을 늘려왔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실제 경제생활은

경기침체로 기업의 인력삭감 등 구조조정이 계속되면서 일반소비도 위축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세계 증시가 일본 경제에 주목하며 요동을 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일반인의 경제생활은 의외로 안정돼있는 편이다. 예전엔 '일본이라는 나라는 부자이지만 일본 국민은 가난하다'는 말이 통했지만 요즘엔 오히려 '일본 정부는 빚투성이지만 일본 국민은 부자'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

이 정도 경제불안이라면 우리나라 같으면 벌써 거리에 노숙자가 늘어나고 국민들의 원성이 높아졌을 텐데 일본은 아무리 봐도 그런 기색은 없다. 샐러리맨은 물론 상점 경영자나 택시기사 등 쉽게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경제가 조금 나빠졌지만 나와는 크게 상관 없다"는 식의 반응이다.

오히려 고급소비는 크게 늘고 있다. 루이뷔통이나 에르메스 등 해외명품 브랜드 업체는 사상 최고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으며 고급 레스토랑일수록 장사가 잘 된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처럼 '고급브랜드 사는 사람'과 '시장 물건 사는 사람'이 구분된 것도 아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는 학생들까지도 루이뷔통이나 에르메스를 살때는 서슴치 않고 돈을 쓴다. 물론 일상 소비생활에서는 누구나(부자건 가난하건) 싼 물건을 선호한다.

이런 소비생활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다름 아니라 거대한 경제규모와 높은 저축률이다.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3만달러를 넘어 우리나라의 세배 이상된다. 게다가 미래를 대비해 저축하는 습관 덕분에 현재 가구당 금융자산이 3000만엔(약3억원) 가량된다. 게다가 일본 국민은 10년간의 장기불황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왠만한 경기하락에는 무디어진 것.

그러나 이같은 무감각 때문에 일본 경제가 더욱 침체되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일본 전체가 위기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나 하나쯤이야 어떻게든 먹고 살수야 있겠지'하는 무관심이 일본을 장기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원인중 하나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2001년4월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