特別寄稿 李 承夏 牧師의 雅歌書 講解 (4)

주제: 잃어버린 애인을 찾아 나선 슐람미(3:1 - 3:11)

아가서(雅歌書) 1장에서 우리는 슐람미 여인의 겸손의 미덕을 느껴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가슴에 가득히 간직한 연모의 정이 금새라도 터져 나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찾아 나서기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제 2장에 이르러서는, 서로의 마음이 무언 중에라도 통하였던지, 아름다운 사랑의 이중창이 동산의 꽃향기를 타고 고요히 울러 퍼졌다. 그 이중창은 지나가는 님을 멀리 바라보면서 토하는 애끓는 사랑의 고백과, 바람결에 들려오는 남자의 시원한 응답과도 같은 것이었다. 요즘의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라면 두 사람은 달려가서 뜨거운 포옹을 서슴지 않는 그런 장면이다. 그러나, 자기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는 그녀는 아가 2:8절과 17절의 표현 그대로 그의 애인이 산과 언덕을 넘어 자기에게로 달려오는 꿈을 꾸면서 한시라도 빨리 그이를 만나는 염원을 표시 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사랑은 동양적이기는 하여도 미미하고 소극적인 사랑은 아니었다. 흔히 듣는 말로, 동양적 사랑은 소극적이고 서양 젊은이들의 사랑은 적극적이라고는 하나, 슐람미 여인의 경우에서 보듯이 어느 편이 더 뜨겁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슐람미 여인이 가슴에 묻어둔 진정한 바램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그의 연인과 한시라도 헤어져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음은 말 할 나위가 없다.

아가서 3장 1-2절에 보면 그러한 적극적인 슐람미 여인의 모습이 역력히 보인다. 그녀는 꿈속에서 애인을 찾아 길거리를 헤맨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아가 1장7절의 끝머리를 다시 읽어보자. 이 말의 뜻을 한 여자의 수줍음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하여, 대낮에 남자들이 많이 오가는 목장에까지 찾아가기를 망설이는 정도의 말로 가볍게 생각해 볼 수도 있으나, 창세기 38장15절에 말대로 낮에 얼굴을 베일로 가리우고 다니는 여자는 창녀들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슐람미가 베일을 쓰고 애인을 찾아 나서는 행동이 얼마나 대담한 일이던가? 그런데도 슐람미 여인은 밤중에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다니며, 순찰대원에게까지 애인의 행방을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도움은 못 주었다. 다만, 3장3-4절의 문맥으로 미루어 보면 전혀 우연히 또는 갑자기, 찾아 헤매던 애인이 눈앞에 나타났고, 그를 만난 기쁨에 어머니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이다. '어머니의 집'이란 (다른 번역을 따르면, 자기가 자라난 곳), 정다운 가족들이 모이는 곳, 즉 심리적인 안식처를 말한다. 그런 곳에서 자기의 사랑을 재확인하려는 뜻이었으리라.

3장6-11절은 그들의 사랑이 결혼식으로 이어지는 장면을 묘사한다. 흔히 결혼을 사랑의 종착점 또는 사랑의 최고봉이라는 말로 표현하지만, 결혼은 사랑의 끝도 행복의 정점도 아니다. 마치 '주검도 삶의 일부분'이라는 말처럼, 결혼전의 사랑은 '서로 바라는 사랑'의 장(場)이고, 결혼후의 사랑은 '서로 섬기는 사랑'의 새로운 장(場)일 뿐이다. 이제 우리들의 예수님과의 사랑의 형편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들의 신앙 생활은 제 3자의 사랑 이야기과도 같은 것인가?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씻는 것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예수를 더 잘 알고자 찾아 다녀 보았는가? 예수에 대하여 물어보았는가? 아! 우리들의 예수 님과의 사랑은 "산장의 여인 (반 야월 작사, 이 재호 작곡)"처럼 짝사랑이던가?

(1)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싸여 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2)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풀벌레만 애처로이 밤새워 울고 있네,

행운의 별을 보고 속삭이던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적막한 이 한밤에,

임 뵈올 그날을 생각하며 쓸쓸히 살아가네.

우리는 실연한 "산장의 여인"처럼 감상에 젖어 울고만 있어서는 안된다. "슐람미의 여인"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감정은 신앙심의 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 것이 전부도 아니며, 길거리를 찾아 헤매며 길을 묻는 것 같은 의심과 회의가 얽힌 지적인 탐구만도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온갖 노력 끝에서 홀연히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믿어 그를 사랑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예수를 어둠 속에 찾아 나서는 첫 발걸음이 있기 전에는 신앙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알게되면, 모든 의심이 가시고 앞길이 환히 열리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앞에는 더 짙은 안개가 끼고, 그 안개 속에서 예수를 더듬어 만나 신앙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삶 속에는 어두운 밤의 한때가 있기 마련이다. 어두운 밤과 깊은 회의의 구름을 헤치고 찾는 신앙은 적든 크든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만난 예수를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도록 소중히 간직하여야 하며 "어머니의 집"으로 함께 달려가는 follow-up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음 달에 또.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