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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비평} 제14호 (1996)
解體主義의 倫理的 含意: 데리다와 롤티를 중심으로
柳 弘 林 (政治學, 서울大)
I. 머리말
최근 한국사회에서의 지적 흐름의 한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는 현상은 탈근대주의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논의의 활성화이다. 우
리는 근대이후 한국의 역사적 현실속에서 많은 사상적 조류의 부침을 발견한다. 한 사회의 의식과 사상의 발전과정은 이른바
"불행한 의식"을 넘어서 진정한 자아정체성을 정초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은 경쟁하는 사상조
류들간의 갈등과 대립, 부침의 역동성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게 된다. 근대 한국의 경우 주로 서구에서 유입된 많은 사상조류들은
현실 이해의 지적 체계로서 또는 현실 극복의 사상적 무기로서 현실 변화와 상호작용하며 득세와 퇴조의 양상을 보여왔다. 이러
한 전체적 조망의 틀을 전제로 80년대 한국의 정신사적 지평의 변화를 살펴보면 큰 특징의 하나가 사상적 논리 및 개념틀과 현
실 간의 극심한 괴리감에서 발원되는 위기의식 또는 지적 공백감이라 할 수 있다. 즉, 세계사적 현실변화와 이에 맞물린 국내 정
치 현실의 변화는 기존의 거대한 사회운동속에 용해되어 갈등하던 사상조류들에 대한 회의와 환멸을 초래하였다. 이에 조응하여
대 중문화의 차원에서는 사상자체에 대한 무관심이 나타나고, 이러한 현실에 대한 "개념적 이해"의 포기는 극단적인
주관 주의와 실용주의의 논리가 대중소비문화의 형태로 한국의 정신문화 깊숙히 침투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다른 한편 한국의
지성 계는 다시금 새로운 사상적 지평을 모색하는 지적 오디세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지식인들--특히
급진 주의적 열망과 의식의 새로운 이념적 기반을 추구하는 이론가들--의 관심 대상으로 부상된 조류가 광범위하게 정의되는 탈
근대주 의이다.
탈근대주의는 기존의 틀에서 탈피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희망감 및 가능성의 기대와 현실에 대한 좌절감으로부터 배
태되는 비관주의가 얽혀서 짜여지는 사상적 분위기를 대변한다. 이른바 해체주의적 탈근대주의는 한편으로 또다른 재구성을 추구
하면서 --탈근대주의의 "윤리로의 전향"에 깔린 문제의식에서 나타난다-- 다른 한편 그에 대한 회의와 망설임을 생래
적인 태도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호성'(ambiguity), 패러독스, 또는 '확정불가능성'(undecidability)이라는 개념들의 강조로
귀결되는 양면성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근대주의의 조류들에 있어 공통적인 문제의식의 하나는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철학(Philosophy)," "현전의 형이상학(metaphysics of presence)" 또는 메타설화의 해체, 파괴, 폭로라 할
수 있다. 사고(의식)의 영역에서 강조되어온 체계(system)는 사상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 있어서의 주변화(marginaliza
tion), 폭력, 억압을 초래하였기 때문에 철학적인 해체작업은 해방의 진정한 의미 이해와 실현에 절대적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
이 탈근대적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듯이 "탈근대적 선회(the postmodern turn)"는 이론과 현실의 다양한 측면에 걸쳐 전개되
고 있기 때문에 일관된 주제설정과 그 내용의 파악이 어려운 형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다면적, 다중적 성격에 대한 논의는 A
ndrew Ross (1988); David Harvey (1989); Roy Boyne &Ali Rattansi (1990); E. Ann Kaplan (1988) 등 참조.
그러나 기저를 이루는 "탈근대주의적 문제틀(the postmodern problematics)" (White 1991)은 탈근대주의 또는 해체
주의의 윤리적.정치적 담론을 이해하기 위한 지침이 된다. 탈근대주의는 상호연관된 다음의 현상들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즉, 1)
근대의 과학, 기술, 정치적 기획과 연관된 메타설화들에 대한 회의; 2) 합리화과정에 수반되는 위험성과 문제들에 대한 각성의
고조; 3) 새로운 정보기술의 폭발적 혁신에 따른 고도정보사회화; 4) 새로운 사회운동들의 출현등이 탈근대적 문제틀의 현실적
배경이 된다. 이러한 현상들은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많은 도전과 딜레마,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며, 이러한 까닭에
불확실성과 불투명성이 현상황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탈근대성"이라는 개념과 현상의 다중성, 복합성,
모호성은 현대의 사회현실이 그러한 특징들로 규정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며, 이에 따라 탈근대주의자들은 현실에 대한 이해
가 기존의 지배적인 인지적 틀에 의해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게 된다.
해체주의적 탈근대주의의 윤리적.정치적 담론의 기저를 이루는 문제의식은 과연 무엇인가? 첫째로, 해체주의의 윤리적 담론은
근대의 휴머니즘, 진보의 역사철학, 역사적 목적론, 존재론등과 같은 기존의 메타설화에 대한 근본적 회의, 즉 근대철학의 해체
에 기반한다. 해체주의의 윤리적 담론은 현대 윤리론의 다양한 갈래 중 윤리적 원칙들의 정식화 시도에 대한 거부 입장을 대변한
다. 즉, 해체주의는 윤리적 원칙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철학적 정당화에도 반대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기초주의(foundationalism
) 를 해체하려 한다. 이러한 경향은 윤리적 규범의 정식화와 이에 기반한 윤리적 공동체의 모색이 필연적으로 타자성에 대한 폭
력 과 억압을 수반한다는 그들의 문제의식을 반영한다. 둘째로, 해체주의는 윤리론을 타자성과 차이에 대한 관심 또는 책임이라
는 차원에서 규정한다. 그 주창자들은 근대 메타설화의 부정이 사상과 현실의 양측면에서 모두 주변화되고 억압된 타자성을 복원
하 고 해방시키는 길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그들은 철학과 이론을 해체하면서 그자신들을 새로운 사회운동과 차이의 정치(the po
lit ics of difference)의 옹호자들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 진정한 윤리적 과제는 "새로운 책임의식"과
새로 운 사회적 삶의 형태를 추구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담론들--롤티의 표현을 빌면 "일탈적 담론들(abnormal discourses
)" --을 형성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해방에의 관심이 니체적이고 하이데거적인 철학적 입장과 통합될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한편
으로 해체주의는 아카데미와 지성의 세계에서 이론적 한계를 극단적인 형태로 극복하려는 과감하고 급진적인 시도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해체라는 철학적 무기는 해체주의자들의 윤리적 관심, 즉 "타자성에 대한 책임(responsibility to otherness)
" 을 정치적으로, 공적으로 표명하기 위해 요구되는 개념적 범주들 자체를 부정하게 만든다. 즉, 철학적 해체와 "타자
성에의 관심"은 철학자 개인의 의식을 넘어서 존재하는 공공영역에서는 상호지지라기 보다는 상호부정의 관계를 노정하게
된다. "타자성에 대한 책임"을 공적 토론의 장에서 이해가능한 형태로 의미있게 개진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입장의 표
명과 연관된 개념적 구분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이러한 구분의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는 경우 해체주의적 윤리는 해체의 미명하
에 해방의 이상을 가치평가하려는 또하나의 보수적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모면할 수 없다 (Habermas 1981; 1987
) .
이러한 비판을 감안해 보면 해체주의의 윤리적 차원으로서 타자성에의 관심과 텍스트의 불확정성에 근거한 자유분방한 해석 사
이에는 갈등과 긴장관계가 성립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데리다와 같은 해체주의적 탈근대주의의 입장에서는 이둘간의 관계가
대립의 관계로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텍스트의 해체는 타자성에 대한 윤리적 관심과 책임의 조건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데
리다의 주장에 따르면 타자성에 대한 책임은 철학과 역사현실을 포괄하는 텍스트에 있어 억압된 측면을 새로운 태도에 입각하여
발굴해내지 않고는 실현불가능하다. 따라서 해체주의적 탈근대주의는 해체와 윤리적 관심을 연결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언어를
만 들어내고 기존의 개념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보다 중요하게는 텍스트의 해체작업 자체가 윤리적 시각
에 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탈근대주의자들의 자기 '정당화'에도 불구하고 해체주의의 한계는 현대의 윤
리적 , 정치적 문제들을 해체주의의 입장에서 다루는 데 많은 제약이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해체주의의 윤리적 담론은 상충
되는 윤리적 주장들을 평가하고 중재하기 위한 기준을 설정하지 못함과 더불어, 해방의 이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윤리적 관심과
사회비 평, 그리고 민주적 책임성등의 문제의식들을 통합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치적 방안들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노정한 다. 아래에서는 해체주의와 윤리의 관계, 보다 정확하게는 양자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의 관계를 조명하기 위하여 데리다(J
acques Derrida)의 "윤리적 전환" (Kearney 1993)의 내용과 롤티(Richard Rorty)의 실용주의적 탈근대주의 또는 탈근
대주의적 자유주의의 주장을 검토한다.
II. 윤리의 해체와 해체의 윤리: 데리다
대부분의 탈근대주의 이론가들은 윤리학을 철학의 한 분과로 인식하고, 따라서 윤리학을 정립하려는 경우 그들이 해체하고자 하
는 논리적 범주와 형이상학적 전제들 또는 존재론적 기초를 필연적으로 수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해체주의와 윤리학의 결합가능
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예를 들어 Harold Bloom et. al. (1979); Rodolphe Gasché (1986); Irene Harvey (1986)등.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 해체작업의 윤리적 차원을 부각시키려는 여러 이론가들의 시도가 점차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Simon
Critchley (1992); Drucilla Cornell (1992); Richard Kearney (1993); Robert Bernasconi (1987) 등.
이들은 해체의 독해에 있어 윤리적 계기는 매우 중요하며 나아가 해체의 목적이 윤리적인 관심의 실현에 있다는 데리다의 기본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데리다의 윤리 또는 윤리학에 대한 개념화는 전통적인 관념과는 다르며, 이러한 차
이는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윤리학에 대한 데리다의 독해를 통해 분명해진다는 점이다. 데리다의 윤리관은 그의 독특한
"이중적 태도(double gesture)"에 의해 특징지어지며, 따라서 우리는 데리다의 해체주의에서 윤리학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와 윤리적 이상에 대한 강한 긍정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한편으로 철학과 문학, 논리와 수사 등의 쟝르간 구분을 파괴함으로써 니체주의적인 비이성주의의 한 형
태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폭력과 형이상학(Violence and Metaphysics)" (1978, 79-153)에서 나타나는 데리다에
대한 레비나스의 영향을 감안하면 해체주의의 새로운 측면, 즉 윤리적 측면을 발견하게 된다. 레비나스의 윤리(the ethical)에
대한 개념화는 데리다가 해체를 윤리적 관점에서 보다 긍정적 작업으로 규정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다. 즉, 레비나스는 윤리를
타자성에 대한 존중 또는 책임이라는 언어로 개념화함으로써 해체를 윤리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레비
나스는 원초적인 윤리적 경험의 묘사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사회적 규범행위와 판단의 기초가 되는 도덕 원리
나 규칙들의 정식화 작업과는 확연히 구별되며, 도덕적 원칙의 타당성을 검증하기 위한 절차와 체계의 구성 노력과도 상이한 성
격을 갖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윤리학의 윤리학(an ethics of ethics)"이라고 규정한
다 (1978, 111). 레비나스 자신은 윤리의 문제를 "타자의 현전을 전제로 나의 자발적 행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Levinas 1969, 43). 이른바 레비나스의 타자성 개념(l'Autre, altérité, extériorité
)은 동일성 또는 동일자(the Same)로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 데리다의 윤리에 대한 개념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레비나스
와 데리다 모두에게 있어 타자의 존재는 윤리의 가능조건이며, 나아가 동일성 내지 정체성의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그들에 따르
면 파르메니데스에서 하이데거에 이르는 서구의 철학전통은 본질상 '존재론적'이고, 이러한 존재론적 전통은 모든 형태의 타자성
을 동일성 또는 동일자로 환원시키고 억압한다.
이러한 점에서 타자성의 동일성에 대한 저항은 '윤리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레비나스의 "the Saying"과 "the S
aid"의 구분에서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Levinas 1981). 레비나스에 따르면 전자는 타자와의 대면이자 철학적
언어와 논리적 이해의 틀을 넘어서는 윤리적 행위이다. 이에 비해 후자는 객관화된 명제이며 주장으로서 그 진위 여부가 철학적
탐구에 의해 규명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레비나스는 전통적 철학이 후자의 영역에 갇혀 윤리적인 것 또는 윤리적 경험
의 구조를 파악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레비나스는 '윤리적'인 것이 체계적 이해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존재론적'
인 언어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음을 충분히 인식한다. 따라서 철학의 존재론적 언어를 해체하는 작업은 곧 '윤리적'인 것을 '존재
론적'인 외피로부터 해방시킴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근거하여 레비나스는 "모든 여타의 구조들의 기반이 되
는 궁극적 구조"로서의 인간 상호관계의 우위성, 즉 '윤리적'인 것의 우위성을 정초하려 한다.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윤리학에 대한 해체적 독해를 통해 해체주의적 윤리의 양면성을 포착하려 한다. 데리다는 윤리적 태도로
서의 해체적 독해는 "두 개의 텍스트, 두 개의 손, 두 개의 시각, 두 가지 방식의 청취법을 동시에 그리고 개별적으로
" 가지고 실행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Derrida 1982, 65). 데리다는 한편으로 '존재론적'인 언어에 대한 '윤리적'인 것의 우
위성을 주장하는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학' 내지 '윤리'라는 용어의 사용을 꺼려하는 니체와
하이데거의 입장에 동조한다. 데리다는 '윤리적' 행위와 '존재론적' 명제 사이의 긴장 관계에 유의하면서 "타자성과의 관계
" 속에서 윤리와 윤리학의 가능성을 추구하려 한다. 이러한 노력은 구체적으로 주어진 텍스트 속에서 타자성의 관점과 위치
를 찾아내려는 해체적 독해의 형태로 나타난다. 나아가 해체가 철학적 근거와 정당화가 아닌 해방적 이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
정에 의해 동기부여됨을 주장하면서, 논리중심적인 텍스트의 해체는 "새로운 윤리학의 개벽"임을 강조한다 (Derrida
1 988, 122).
데리다에게 있어 논리적 개념과 그 배후의 의도와의 간극을 밝히는 작업은 하나의 "윤리적-정치적 의무"로 인식된다
. 그에 따르면 논리중심적 개념성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계몽과 투명성이 보장가능하다는 환상을 낳게 한다. 이러한 환상은 논리
중심적 이성에 의해 표명될 수 없는 타자성을 억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한 논리중심주의는 사회 현실의 차원에서 폭력의 형
태로 전화되어 나타난다. 즉, 타자성은 개념과 현실의 차원 모두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하에 데리다는 논리중심주의
의 해체가 윤리적-정치적 의무라고 주장한다. 해체의 목적은 철학적 및 사회역사적 텍스트가 논리중심주의에 의해 지배되고 있
음 을 인식하고, 그 속에서 타자성의 관점을 찾아내어 그 관점으로부터 논리중심적 개념성과 획일성의 기초를 와해하는 것이다.
데 리다는 이와 관련하여 "해체는 무(nothingness)에로의 귀착이 아니라 타자성에 대한 개방"을 의미한다고 역설한다
(Ke arney 1984, 124). 해체는 서구의 전통적인 논리중심적, 존재론적 철학에 의해 강조되었던 획일성과 동일성에 대항하여 다원
성과 타자성을 부정할 수 없는 전제로 확립하려는 시도이다 (Gasché 1986, 101).
데리다는 텍스트의 획일적, 논리적 해석에 대항하여 해석의 자유와 "확정불가능성(undecidability)"을 강조한다. 그
에게 있어 확정불가능성은 완결의 불가능성을 의미하며, 이는 결정과 윤리적-정치적 책임의 필수조건이 된다 (Derrida 1988, 116
). 즉, 결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계산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초월하는 확정불가능의 영역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다. 이러한 상태에서의 결정만이 도덕적 또는 정치적 책임에 대한 유의미한 논의를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확정불가능성
의 영역은 해석의 자유와 차연(différance), 비동일성의 존재에 의해서만 확보될 수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차연은
"다름아닌 상이한 규정성"이며, 비규정성(indeterminacy)과는 달리 부정성이나 무(nothingness)가 아니며, 동시에 차
연은 완결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Derrida 1988, 149). 이와 관련하여 데리다는 해체가 무조건적인 지상명령에서 비롯된다고 주
장 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해체의 동기로서의 무조건성을 칸트주의적 개념틀로 규정하려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러한 속
성 규정은 필연적으로 해체의 대상이 되는 철학적 언어들(philosophemes)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Derrida 1988, 153). 따라
서 데리다는 그의 윤리적 관심을 새로운 규정성, 새로운 언어의 모색을 통해 표명하려 한다.
데리다는 그의 확정불가능성 또는 망설임의 태도가 규정성과 대립된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양면적 태도, 즉 한편으로
해방적 이상에의 강한 긍정을 표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무조건적, 윤리적 입장을 규정성에 의해 완결시키려 하지 않는
태도는 윤리적 책임성의 전제조건인 확정불가능성에 최대한의 규정성을 보장하려는 태도라고 역설적으로 주장한다. 즉, 그의 해
체적 독해는 규정성이 결여된 "비규정성(indeterminacy)"이 아니라 항상 텍스트 내의 다양한 대립적인 세력들간의 관
계와 차이의 규정들을 전제로한 "확정불가능성 (undecidability)"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가 근래에
이르러 정치적 성격의 문제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과 연관된다. 인종주의정책, 핵전략, 법의 권위, 우애의 정치, 대학
의 기능, 드 망(Paul de Man)과 하이데거의 정치적 참여 등의 문제에 대한 그의 저술은 분명히 정치적 의도와 함의를 갖는다. 따
라서 데리다가 윤리적-정치적 책임의 문제에 대한 논의를 회피한다든가 그의 해체주의가 도덕을 배제하는 무정부주의 또는 탈정
치화된 평온주의로 귀결된다는 비판은 설득력을 상실한다. 보다 적실한 비판의 초점은 그의 해체주의적 정치 분석이 어느 정도
현대 정치현실의 이해와 그 위기의 극복에 기여하는가하는 문제로 모아져야 한다. 요컨대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윤리 주장의 한계
는 확정불가능성 및 차연등의 개념을 포함하는 해체작업이 어느 정도로 정치적 문제에 대한 책임있고 설득력있는 분석을 가능케
하는가하는 관점에서의 비판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
데리다에 의하면 해체는 텍스트에 대한 이중적 독해(double reading)의 형태로 수행된다. 이러한 이중적 독해의 주된 대상은 철
학적 텍스트이지만 "맥락으로서의 텍스트"는 전체 현실세계를 의미한다 (Derrida 1988, 37, 136). 따라서 그는 "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1988, 148)라는 전제하에 해체적 독해는 현실사회에의 개입과 윤리적 주장 을 내
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담론에 내재하는 딜레마는 해체작업에 사용 가능한 언어가 철학의 언어밖 에 없
다는 사실이다. 즉, 이중적 독해의 위험성은 "해체의 대상 속으로 끊임없이 되넘어진다"는 사실이며, 데리다도 이러한
모호한 상황을 "귀속(belonging)과 탈피(not belonging)"의 이중적 과제의 문제로 묘사한다 (Derrida 1976, 14 ).
데리다는 자신이 철학적 비이성주의나 무제한적인 상대주의에 찬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해체주의자들이 진리와 의미
의 안정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자신들의 저작을 인내를 가지고 치밀하게 독해할 것을 타인에게 요구할 수 없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데리다는 우리가 그의 저작을 치밀하게 독해한다면 그 속에서 진리의 가치가 결코 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보다 설득력
있는 형태로 재묘사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이성의 원리: 학생의 눈에 비친 대학(The P
rinciple of Reason: the University in the Eyes of its Pupils)" (1983)에서 데리다는 근대 대학의 이념과 이성간의 밀
접 한 관계를 분석하면서, 대학이 기술적-실용적 고려에 의해 지배되는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성의 원리에 적대적으로
대 항하는 '비이성주의'로 귀의할 필요는 없다"라고 주장한다 (1983, 17). 필요한 것은 새로운 책임감이며, 이러한 책임감
은 기술이나 과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성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 심문에 의해 각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적
심 문은 해체주의적 사고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 데리다의 주장이다.
또한 데리다는 핵전략의 담론이 가지는 수사적(rhetorical) 성격에 주목하여 기술과학적 전문성의 권위에 대한 해체적 독해를
시도한다 (Derrida 1984). 데리다에 따르면 핵 외교 및 정치는 텍스트의 구조를 기반으로 하며, 그 견강부회-수사적(sophistico-
rhetoric) 성격에 의해 의견(doxa)과 지식(episteme)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해진다. 따라서 핵방어전략이 의존
하 는 합리적 계산과 전문성은 그 객관성과 절대성이 보장될 수 없다는 사실이 핵전략 담론에 대한 해체적 독해에 의해 구명될
수 있다. 데리다는 외교의 수사적 차원이 바로 해체주의적 시각에서의 "핵전략 비판(nuclear criticism)"을 가능하게
하 는 조건이 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칸트주의적 비판과 이러한 핵전략 비판 사이에는 상호유사성이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1 984, 30). 데리다는 이성의 원리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핵방어 전략의 '논리' 속에서 그리고 동시에 그에 대
항하 여 사고하는 전략으로서 해체 또는 이중적 독해를 시도하는데, 이러한 그의 태도를 탈근대주의적인 비이성주의의 한 조류라
고 쉽 게 치부하기는 어렵다.. 데리다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Christopher Norris (1987, ch.6)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Norris는
문예비 평가들의 일반적인 해체작업과 데리다의 프로젝트를 구별하면서, 최근의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전략이 방법과 의도에 있어
차이가 있지만 하버마스류의 합리적 재구성의 기획과 수렴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한다.
해체의 독해는 기존의 지배적인 정치 제도와 관행이 확정불가능하고 정당화될 수 없는 전제들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권위와 정당성 주장을 파괴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음은 어느 정도 분명하다.. 예를 들어 Jacques Derrida, "Force of L
aw: The 'Mystical Foundation of Autonomy'," in D. Cornell, M. Rosenfeld, D.G. Carlson, eds., Deconstruction and
the Possibility of Justice(New York: Routledge, 1992), pp.3-67; J. Derrida, "Racism's Last Word," Cri t
ical Inquiry12 (1985), pp.290-299 등 참조.
그리고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에 대한 강조는 논리중심적인 현전의 형이상학의 역사에 의해 억압되고 주변화
된 희생과 배제의 역사에 우리의 관심을 돌리게 한다.
III. 해체주의와 자유주의: 롤티
롤티는 그의 저작들.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 (1979); Consequences of Pragmatism (1982); Co
ntingency, Irony, and Solidarity (1989); Objectivity, Relativism, and Truth (1991); Essays on Heidegger an
d Others (1991) 등.
에서 분석철학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전문적 철학"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원주의적인 "
탈근대주의 부르죠아 자유주의(postmodern bourgeois liberalism)"를 옹호하면서 심미적 자아실현을 하나의 윤리적 이상으
로 강조한다. 롤티에 의한 탈근대 주장의 실용주의적 수용은 반기초주의(anti-foundationalism)의 전개와 밀접한 연계성을 갖는
다. 그의 플라톤-데카르트-칸트주의적 철학전통에 대한 비판은 명목론적이자 맥락주의적인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의
수용으로 연결된다. 롤티는 한편으로 철학의 전통을 해체하는 데리다의 입장을 수용하여 이성중심주의와 음성중심주의의 한계를
폭로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롤티는 탈근대주의를 개인적 완성의 추구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롤티는 탈근대주의자들이 뚜렷한
정치적 이념과 비젼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불편해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하
고, 개인적인 자율성의 추구 노력을 정치의 영역에 투사하여 실현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탈근대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가 될 수 있
다는 것이다. 해체와 타자성에 대한 책임을 결합하려하는 경우 처하게 되는 딜레마에 직면하여, 롤티는 "타자성에 대한 책
임"에 이론적 규정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을 포기할 것을 권고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데리다와 관련하여 롤티의 입장이 가지는 중요성이 발견된다. 롤티는 데리다의 해체 기획을 극단까지 밀고가
면서 "타자성에 대한 책임"을 정치적 또는 철학적 개념을 통해 표명하고 정당화하려는 기획을 무용한 것으로 배제해버
린다. 즉, 롤티는 데리다의 망설임과 이중적 태도가 불필요한 것으로 이해한다. 롤티는 탈근대주의가 개인의 심미적 이상을 정
치 영역에 투사하려는 "새로운 인간형" 창조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는 것을 막으려면 '실용주의적 선회(the pragmatic
tu rn)'를 택하여야 한다고 본다. 롤티에게 있어 탈근대주의의 과제는 모든 형태의 메타설화를 해체하고 자유주의적 입장들을
이론 적 정당화에 근거하지 않고 "매력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롤티의 '실용주의적 포
스트 모더니즘'은 철학의 해체와 니체적 심미주의, 그리고 신실용주의적 자유주의를 결합하려는 시도이다.
{철학과 자연의 거울(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에서 롤티는 철학에 대한 특정한 관념을 비판적으로 와해
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노력은 철학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실용주의의 결과들(Consequences of Pragmat
ism)} 서문에서의 "philosophy"와 대문자 P로 시작하는 "Philosophy"사이의 구분은 롤티의 의도를 분
명 히 한다. 롤티에게 있어 "philosophy"는 삶의 의미를 일상적 상식에 근거하여 파악하려는 노력으로 문제될 것이 없
다. 그러나 "Philosophy"는 플라톤의 그것이든 데카르트의 그것이든 전문화된 철학으로서 매우 심각한 문제의 대상으
로 인식된다. 즉, 이러한 의미의 "철학을 한다(doing Philosophy)"는 것은 위대한 철학자의 지침에 따라 진리(Truth),
선 (Goodness), 합리성(Rationality) 등에 대한 본질적 지식을 추구하고 이에 복종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Rorty 1979, xv).
롤티 가 '주류' 철학에 대해 가하는 비판의 요지는 철학이 모든 지식의 타당성에 대한 권위적 심판자로서 "다른 학문영역들
의 기 초를 제공하는 전범위적 학문"으로 인식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1979, 6). 그 이유는 철학이 과학, 도덕, 예술
, 종교 등에 의해 제공되는 모든 지식들의 인식론적 기초와 정당화의 보편적 기준을 마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과제이기 때문이
다. 그 리고 근대의 재현(representation)이론들은 종교의 대체물에 불과한 "Philosophy"를 더욱 공고화하는 데 기여
하였다는 것이다.
롤티는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듀이 등의 철학적 통찰에 의거하여 철학의 의미와 역할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를 시도한다. 즉
, "구성지향적이기보다는 치유지향적이고, 체계적이기보다는 유익한(edifying),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철학적 프로그램을 제공하기보다는 그자신들로하여금 철학을 공부하는 동기를 자문케하는" (1979, 5-6) 것이 철학의 의미
이자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의미의 철학은 타영역들에서의 지식의 가능성을 정당화하는 전범위적 학문이 아니며, 추구의
대상인 진리도 일치성이 아닌 문맥성의 함수로 인식된다. 나아가 롤티는 쿤(Thomas Kuhn)의 정상과학에 대한 분석을 일반화하여
진리주장들의 평가는 정상담론의 규칙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의존한다는 진리의 합의론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담론의 규칙들
은 지속적인 대화와 사회적 관행에 의해 형성되는 역사적, 문화적 산물로서 보편적이거나 선험적인 기준에 근거하지 않는다. 따
라서 많은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궁극적 정당화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전제에 근거하여 롤티는 근대철학의 확실성과 객관성의 추
구는 데카르트, 로크, 칸트 등에 의해 제시된 철학적 틀의 역사성을 반영한다. 롤티는 철학의 역사적 변화에 주목하여 쿤이 말하
는 "혁명적" 과학에 상응하는 "혁명적" 철학의 시대가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듀이에 의해 개막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에 따라 체계지향적 철학이 추구하던 보편주의적인 인식론 수립의 기획은 더이상 타당성이 인정될 수 없게 되었고,
동일기준에 의한 비교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과 역사성에 대한 인식이 고조됨에 따라 학문영역의 기반과 표현양식의 필연
적 다원성이 "정상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관점에서 롤티는 분석철학은 칸트주의적인 인식론중심 철학의 계승자
로 서 모든 '개념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자기기만적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한다. 인식론중심 철학의 대안으로서
"유익한" 철학은 새로운 형태의 이론구성과 정당화의 체계를 요구하지 않는다. "필요로 되는 것은 기존의 정상적
담론들을 통해 획득된 지식의 유용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비정상적 담론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태도이다" (Rorty 1979,
386). 이러한 태도에 기반하는 유익한 철학은 데카르트의 이원론이나 칸트의 구성주의, 그리고 분석철학의 방법론적 엄밀성으로
부터 탈피하여 철저히 해석학적 입장을 견지한다.
롤티의 근대철학에 대한 비판과 철학적 지평의 변화에 대한 분석은 다소 도식적인 한계를 보인다. 롤티는 논쟁의 목적상 기존
철학의 역사가 획일적이고 그 관심이 폐쇄적이며 인식론중심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철학의 발전사와 관심의 내용을 다소 지나치
게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가 비판하는 대부분의 근대철학자들은 한편으로 이론적 체계화와 정당화에 주력하지만 그들의
사상 전반에 대해 균형감각을 가지고 접근하는 경우 그들의 철학적 관심은 인식론을 넘어 윤리와 규범의 문제, 정치의 문제, 문
화의 문제등과 같은 실천적 문제영역에 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근대철학자들 대부분은 그들 철학의 체계성과
유용성, 보편성과 특수성등 양자사이의 긴장과 조화의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이러한 사실은 근대철학 전통의 풍부한
내용과 역사적 의미를 인내를 가지고 면밀히 검토해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롤티의 근대철학에 대한 비판적 평
가는 설득력을 얻기에 어려움이 있으며, 한편으로 그는 근대철학에 대한 해석에 있어 자가당착적으로 --롤티가 옹호하는 "
유익한" 철학의 견지에서는 "하나의 입장을 택하는(take a position)"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
하나의 입장을 택하고" 있다. 롤티에 있어 "하나의 입장을 택한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주장을 내세움을 의미하며
, 이 경우 필연적으로 철학적 틀을 통한 정당화의 문제가 개입되기 때문에 롤티는 아이러니즘의 입장에서 이러한 태도를 지양한
다. 그러나 그는 근대철학의 전통을 인식론중심적이라고 해석하면서 암묵적으로 자기반성의 계기를 상실한 채 "하나의 입
장 을 택한다."
롤티는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Philosophy"를 거부하는 자신의 태도가 기본적으로 윤리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주장한
다. 이러한 주장은 "철학이 더욱 '과학적으로' 그리고 '엄밀하게' 되면 될 수록 여타의 문화영역과의 분리가 심화되고 의미
를 상실하게 된다"(Rorty 1979, 5)는 문제의식에 근거한다. 또한 롤티는 철학자들이 전통적인 철학의 자기규정의 틀에서
탈 피하여 새로운 역할을 추구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은 그의 정치적 입장을 정립하는 밑받침이 된다.
롤티는 '전문적 철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공공영역에서의 정당화가능성이라는 문제를 실용주의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길을 연
다. 롤티는 "철학에 대한 민주주의의 우위성(The Priority of Democracy to Philosophy)" (1991a, 175-196)이라는 논
문을 통해 듀이와 롤스(John Rawls)를 옹호하면서 정당화가능성과 도덕적 진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롤티는 "듀이
적(Dewyean) 역사주의"의 시각에서 롤스를 옹호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즉 "살아남은 민주주의국가들의 제도와 문화
" 는 철학에 우선하며 철학적 정당화를 필요로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롤티는 한편으로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의 정당화 기
획 을 절대주의로 규정하고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넓은 의미의 공동체주의를 자신과 롤스의 자유주의와 대비시키면서, 자
유 민주주의는 철학적 전제들에 의존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롤티는 "정당화"를
너 무 협의적으로 이해한다. 그는 철학적 정당화 및 근거 제시를 의심할 수 없는 전제들로부터의 연역이라는 의미에 국한시켜 협
소 하게 규정하고 이에 반대한다. 오직 협소하게 정의된 정당화의 의미에서만 자유민주주의는 어떠한 형태의 정당화도 필요로 하
지 않는다. 그러나 정당화에 대한 보다 정교화된 정의를 수용하는 경우. 예를 들어, 롤스의 반성적 균형(reflective equilibrium
)이 나 정당화의 개념을 참조하라. 롤스는 정당화를 "다양한 고려들의 상호지지를 통해 하나의 일관된 견해를 형성하는
" 문제로 이해한다 (Rawls 1971, 21, 579).
롤티의 정당화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진지하지 못한 태도(light-mindedness)"라고 비난받게 된다.
그러나 롤티는 이러한 비난에 대응하여 자신이 전통적인 철학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보이는 "진지하지 않은 심미주의(lig
ht-minded aestheticism)"적 태도는 중요한 도덕적 함의를 내포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태도를 장려하는 것은 그 목적에 있어 전통적인 신학적 문제들에 대해 그
러한 태도를 장려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거대한 시장경제의 출현, 교육의 보급, 다양한 예술 쟝르의 분출, 현대문화의 다 원성
과 같이 철학적 피상성과 진지하지 않은 태도는 미몽으로부터의 각성에 기여하였다. 그러한 태도는 인류가 보다 실용주의적 으로
, 보다 관용적으로, 보다 자유주의적으로, 그리고 도구적 합리성에 보다 순응적으로 되도록 한다 (1991a, 193).
롤티는 도덕적 문제를 지나친 '진지함(the spirit of seriousness)'을 가지고 다루거나 도덕과 미(the aesthetic)를 대립적인
관계로 이해하는 태도는 현실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사회들의 발전 역사를 살펴보면 쉴러(Schiller)가 말
하는 '유희(play)'적 태도와 진지함을 떨쳐버리는 태도가 오히려 도덕의 진보를 가져온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롤티의 이러한 주장은 데리다와 푸코를 포함한 탈근대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해석과 연관된다. 롤티는 특히 데리다의 관심과 저
작의 내용은 사적 영역, 즉 개인의 자율성과 자아완성의 추구에 국한된다고 본다. 롤티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엄격한 구분
에 근거하여 탈근대주의는 니체적인 자기극복(self-overcoming)과 자기창조(self-invention)의 목적을 실현하는 사적 영역과 연
관된다고 해석한다. 그의 논문 "도덕적 정체성과 개인의 자율성: 푸코의 경우(Moral Identity and Private Autonomy: The C
ase of Foucault)" (1991b)에서 롤티는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민주사회 시민으로서의 도덕적 정체성이 개인의
자율성과 지속적인 긴장의 관계에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사적 자율성의 추구가 자아 정체성의 보다 중요한 차원이자 목표임을
강조하면서, 니체적 자기창조는 한 개인의 삶과 연관해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롤티는 개인의 자율성 추구를
정치의 영역으로 투영하려는 무정부주의적 조류나 새로운 인간형 창조의 이데올로기와 자신의 입장간의 차이를 분명히 한다. 또
한 롤티는 푸코를 자유주의자로 부각시키면서도 푸코가 자신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노력을 공공의 영역으로 확대하려함에 대해서
는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비판의 근거는 "자유주의 사회는 무엇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각각의 개인들
이 서로를 침해하지 않고 서로 다른 자신들의 개인적 목표를 가능한한 용이하게 실현하도록 하는 사회" (Rorty 1991b, 196
) 라는 전제이다.
롤티는 탈형이상학적 자유주의 문화와 그 윤리적.정치적 이상을 철학적 논리나 이론을 통해 정당화하려하지 않고 새로운 언어
와 "이야기들(narratives)"을 통해 설득하고자 한다. 롤티의 "이야기들"은 "흥미있는 철학"을 위
한 것이며, 이러한 종류의 철학은 "세밀하게 개념을 분석하고 주장을 검증하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방법론적 전체주의
에 입각하여 실용주의적으로 수행된다" (1989, 9). 이러한 철학을 옹호하는 배후에는 새로운 언어와 "이야기들"
을 수용하는 경우 결과적으로 사고와 행위방식의 변화가 초래되리라는 전제가 존재한다.
롤티는 현대의 자유주의 문화와 그 윤리적 이상을 "자유주의적 아이러니즘"이라는 개념으로 특징짓는다. 자유주의적
아이러니스트들(liberal ironists)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통합을 이론적으로 추구하지 않으며, 자기창조(self-creat
ion)와 타인과의 유대(human solidarity)를 모두 중요시하면서도 양자를 동일시하지 않는" (1989, xv) 사람들을 의미한다.
슈크라(Judith Shklar)의 자유주의에 대한 개념정의에 근거하여 롤티는 "잔학함(cruelty)을 최대의 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 을 자유주의자라고 정의한다. 또한 "아이러니스트"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신념과 욕구의 상황가변성(c
o ntingency)을 인정하는 역사주의적이고 명목론적인 사람"으로서 초역사적이고 선험적인 기초의 존재와 정당화가능성을 부
정 한다.. 롤티는 그의 논문 "개인적 아이러니와 자유주의적 희망(Private Irony and Liberal Hope)" (1989, 73-95)에
서 "아이러니스트"의 조건을 밝히면서, 아이러니스트의 입장에서 자유주의의 도덕적 이상을 옹호하는 것이 어떻게 가
능한 가를 검토한다.
또한 자유주의적 아이러니스트들은 인류의 고통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가 해소될 가능성에 대해 낙관적으로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들은 '왜 잔인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이론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즉, 잔학함이
악이라는 신념에 대해 순환논리적인 이론화를 추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자유주의의 합리적 기초를 이론적으로 정당화
하는 것이 가능하고 필요하다고 믿는 "자유주의적 형이상학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롤티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통합하거나 조화시키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으며 또한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각 영역은 독
자적인 정당성과 임무를 가지며, 따라서 이러한 구분에 불편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적 주장이면서 동 시
에 규범적 주장이기도 하다. "자유주의적 영역(인류의 고통 해소와 관련된 공적 문제)과 아이러니즘적 영역(자기창조와 관
련된 개인적 문제) 사이의 엄격한 구분은 한 개인으로 하여금 자유주의적 아이러니스트가 될 수 있게 한다" (Rorty 1989, 1
98). 롤티의 자유주의적 유토피아는 아이러니즘이 보편화되는 사회이며, 이러한 이상사회에서 인간사이의 유대(solidarity)는 편
견의 제거에 의해 발견되는 사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질적 타인들을 동료로 여길 수 있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실현하여야
하는 목표이다. 즉, 사회적 유대는 반성적 사유에 의해 발견되는 대상이 아니라 타인이 겪는 고통의 구체적 내용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킴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이론이 아니라 민족지학(ethnography), 저널리즘, 만화, 드라마, 그리
고 특히 소설등의 쟝르에 의해 수행되어야할 과제"인 것이다 (Rorty 1989, xvi).
자유주의의 제도와 문화에 대한 급진주의와 신보수주 양진영에서의 '무책임한' 비판에 대응하여 롤티는 자유주의를 "매력
적으로 보이게"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자유주의는 이제 철학적 정당화 및 기초 보다는 설득력있는 자기규정이 필요하
다는 것이다. 롤티에 따르면 18세기 자유주의 정치사상이 계몽주의적 과학주의의 영향하에 진리와 이성에 근거한 기초를 정립하
려 했던 것은 그당시 계몽주의가 가졌던 강한 설득력을 감안할 때 당연한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상황에서는
과학주의적 신념과 전제들은 다양한 학문영역에서 설득력을 잃게 되었고,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접근법에 대한 회의적 태도도 점
증되고 있다. 이에 따라 롤티는 '정당화', '합리화', '과학화'라는 계몽주의적 기획과 대비되는 문화전반의 '시화(poeticization
)' 또는 '심미화(aestheticization)'라는 문제의식에 근거하여 자유주의를 재묘사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는 상황가변성,
역사성, 특수성, 아이러니 등의 개념을 강조하면서 해체주의와 자유주의의 공존을 추구한다.
IV. 비판적 평가
해체주의 사상가들은 理想의 형태로 절대화되는 규범이나 법칙에 저항하는 것이 윤리적인 태도라고 이해한다. 그들은 윤리적 명
령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는 가능하지 않으며, 윤리적 결정은 그 기준을 철학적으로 명시화하지 않고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다. 예를 들어, 리요따르의 "세속적" 윤리가 시사하는 바는 "우리는 옳고 그름에 대해 최소한의 기준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신중한 개인의 입장에 처해 있다" (Lyotard and Thébaud 1985, 14)는 점이다. 또
한 "언어게임들"의 근본적 불가공약성에 대한 강조는 도덕적 판단을 위한 선험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탈근대주의가 동질화, 전체화라는 강압적 권력에 대항하여 차이와 이질성, 주변성 등을 옹호하게 되는 근
거가 된다. 나아가 해체주의적 탈근대주의자들에게 있어 윤리적이라 함은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개인에게 강요되는 유토피아적
환 상들에 대한 회의와 저항도 내포하며, 이와 같이 탈근대주의적 윤리는 소극성과 망설임, 회의적 태도를 우선적 특징으로 한다
.
탈근대주의의 윤리적 담론에서 적극적 대안의 구체적 모습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이 옹호하는 사회형태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심미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급진적인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라 할 수 있다 (Featherstone 1992). 예를 들어
푸코와 같은 경우 그는 니체의 심미적 자기창조를 하나의 이상으로 수용하면서, "우리는 자신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창조
하여야 한다" (Foucault 1984, 351)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근거해 볼 때 탈근대주의의 윤리가 윤리와 정치에 대한 이
론적 설명보다 예술과 문학을 우선적으로 중요시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아가 탈근대주의는 윤리와 정치, 문학, 예술의
구분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며 그 영역의 경계를 불투명하게 만든다 (Carroll 1987).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탈근대주의에 있어
"심미적인 것(the aesthetic)"은 종종 "무아경(the ecstatic)" 또는 "숭고함(the sublime),"
"표명할 수 없는 것(the unpresentable)"과 동일시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윤리적인 것(the ethical)"이
"심미적인 것"과 동일시 됨에 따라 "윤리적인 것"의 내포와 외연을 분명히 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사실
이다.
물론 해체주의적 탈근대주의가 하나의 "유토피아적 윤리"로서 재해석, 재정식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할 수는 없
다 (Cornell 1992). 해체의 동기가 체계의 한계를 폭로하고 타자성의 영역을 부각시킴에 있다면, 그 배후에는 윤리적 열망과 문
제의식이 분명히 존재한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체의 과정에서 윤리적인 것은 "확정불가능"의 영역에 머무르게 되어
규정성을 상실하게 된다. 자유주의의 정치적 이상을 옹호함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이 실현되기 위한 역사적, 정치.사회적 조건들
에 대한 실증적, 사회이론적 규정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러한 면에서 해체주의라는 철학적 기획은 해방적 관심의
실현과 긴장의 관계를 갖게 된다. 즉, 해방적 이상에 대한 관심은 그 이상이 실현되기 위한 역사적 조건의 구체적 규정을 요구하
는데, 이러한 규정은 필연적으로 해체의 대상이 되는 개념적 구분과 해석의 안정화를 전제로 하게 된다.
해체주의적 탈근대주의의 딜레마는 "타자성에 대한 책임" 또는 해방적 관심을 정치(공공)의 영역에서 정치의 언어로
구체화하여 제시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이성과 합리성, 객관성에 근거하는 사회이론과 철학에 대한 근본적 회의에 의해 해
체주의적 탈근대주의는 공공의 담론장에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공적 담론의 한 형태로서의 윤리적 담론의 목적
은 그를 통해 구체적 사회현실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나아가 미래를 위한 비젼을 조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체주의적 탈근
대주의가 강조하는 개념들, 즉 언어사용의 확정불가능성,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 타자성, 차연, 아이러니 등이 얼마나 윤리적
담 론이 추구하는 목적의 달성에 기여하는가는 의문의 대상이 된다. 데리다의 경우 기존의 제도와 담론, 관행이 얼마나 정당화될
수 없는 전제들에 입각해 있는가를 폭로하는 것이 해체의 목적임을 강조하면서도, 타자성의 실체와 주변화되고 억압된 내용이
무엇 인가를 구체화하여 규정함에 있어서는 추상성을 탈피하지 못한다. 또한 해방적 이상에 대한 니체적인 무조건적 긍정을 타자
성에 대한 관심의 표명으로서 강조한다하더라도 그의 정치적 입장을 설득력있게 제시하지는 못한다. 데리다는 물론 이 점을 인정
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해체주의의 급진성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정치적 부호들(codes)이 존재하지 않는다--왜냐하면
기존 의 정치적 부호와 용어들은 좌익의 것이든 우익의 것이든 여전히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이다--는 사실"에서
찾는 다 (Kearney 1984, 119-120). 이와 같이 데리다는 정치적 부호들 자체의 타당성을 전반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해방적
관심 을 공적 담론의 장에서 구체화시킬 수 있는 방편들을 스스로 박탈해버린다.. 맥카시(Thomas McCarthy)는 이와 관련하여 다
음과 같이 말한다. "경계를 구분짓고 한계를 설정하는 작업은 종종 공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하다. 자유, 평등, 정
의, 권리 등에 대한 기존의 관념들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수정할 필요성은 있지만, 재구성없이 그들을 해체하는 경우 소외되고 주
변화 된 타자 집단들은 중요한 의지책을 박탈당하고만다. 요컨대 대안없이 이성과 진리, 정의에 대한 호소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보다 나은 미래의 '약속'을 보장하기 보다는 '무시무시한 변화'의 '위험성'을 증대시킬 뿐이다" (McCarthy 1991, 112).
또한 데리다 자신은 주어진 텍스트의 구체적 규정성에 가장 큰 관심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관심의 실현을 위해 필요로 되는
개념과 범주들이 해체주의의 틀내에서 제공되지 못한다는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이상의 비판을 근거로 데리다의 정치에 대한 이해는 개인의 관점에 국한되어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고립된 한
개인의 입장에서는 윤리적-정치적 책임감에 기인하는 해방적 이상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과 해체의 관점에서 필요로 되는 이중적
태도는 동시에 추구될 수 있다. 그러나 정책의 결정을 둘러싼 이해의 대립과 갈등의 장인 정치의 세계에서 '확정불가능성'과 '윤
리적 이상에의 무조건적 긍정'은 상호배반적인 관계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롤티의 데리다 해석은 적실성을 갖는다. 즉,
롤티에 따르면 데리다의 노력은 정치적으로는 무용한 시도이며, 개인의 자아완성에의 추구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Rorty
1 989, 122-37).
해체주의적 탈근대주의의 윤리적 담론이 가지는 또 하나의 한계는 자기반성적 사고의 부재 문제이며, 이는 롤티의 경우에서 찾
아 볼 수 있다. 롤티는 '정상 담론'에 대한 비판이 정당화와 근거제시에 의존하지 않고 가능하다고 전제한다. 그는 기존의 철학
이 보편성과 객관성에 대한 확신을 포기하고, 철학의 기획이 본질상 문화구속적이고 역사적 특수성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인류의 대화(conversation of mankind)'를 지속시키는 데 철학이 기여할 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의 기저에는 전통적 철학이 사실상 특수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라는 비판적 분석이 존재한다. 그러면 과연 탈형이상학적이
고 철저히 역사주의적인 롤티의 철학관이 형성된 역사적 조건과 배경은 무엇인가? 롤티는 비판의 선험적, 초역사적 기준의 존재
를 부정하기 때문에 그의 기존 철학에 대한 비판의 근거는 역사적, 문화적 조건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러나 롤티는 이러한 역사
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결여하고 있다. 즉, 비판의 문제를 첨예하게 제기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장과
관련한 비판과 극복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반성적 계기의 부재에 따라 해체주의적 탈근대주
의는 애매모호성과 아이러니라는 또다른 추상적 개념의 강조에 이르게 된다. 즉, 해체의 관심에 매몰되어 철학과 이론을 지나치
게 협의로 규정함에 따라, 그 자신들의 윤리적 관심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정치적 맥락과 연관되는 언어들을
통한 규정성의 보장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롤티의 탈철학적인 입장과 관련하여 규명되어야 할 문제는 '철학'이나 '정치적 실천'에 대한 그의 이해의 바탕에 숨어있는 몰
역사적 본질주의이다.. 이와 연관된 비판은 Richard Bernstein의 논문 "Rorty on Liberal Democracy and Philosophy"
(1992)에서도 볼 수 있다.
롤티는 철학을 고정된 초역사적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라고 보아 철학에 대한 본질주의적 해석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다. 또한
정치적 실천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도 그 구체적 모습과 내용이 무엇인지를 역사적으로 고찰하지 않고 있다. 자유주의적 정치
관행의 우선적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그 내용은 자명하게 주어진 것으로 전제함으로써 정치적 실천과 관행의 역사성을 한편 도
외시한다. 또한 정치적 실천과 정당화의 필연적 연관성을 부정하는 측면에서도 이러한 몰역사적 본질주의의 오류가 발견된다. 나
아가 철학과 정치의 구분, 그리고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도 이들에 대한 단순화되고 도식적인 이해에 근거하므로 그 설
득 력이 높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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