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M.Tikhonov, 慶熙大學校 專任講師.
I. 머리말
選民意識 (philosophy of "the elect")이란 東西의 고대 중세의 국가의 성립과 발전을 수반하는 지배층의 하나의 政治的 理念이다. 대부분의 지배 이데올로기들 은 治者의 被治者에 대한 통치와 收取 자체만 합리화하는데 비하여, 選民 意識은 當該 지배 집단의 지배 영역의 비약적인 擴大를 재촉 합당화하는 攻勢의 이념 이다. 선민 의식은 고대 중세의 보편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인 國家 國王의 神 聖性 槪念의 延長으로서 처음 발생되었으리라 믿어진다. 그러나, 자기의 母體인 國家 國王의 神聖性 槪念과 달리, 선민 의식은 기성의 지배 체제의 유지와 안 전을 보장할 뿐만 아니고, 거국적 거족적 통합 총동원에 의한 當該 지배 체 제의 영향권의 도약적인 확장도 加速化시킨다.
계층간의 갈등 등의 사회 정치적 모순을 초월하는 거족적인 총동원은 일반적 으로 종교적인 기반 위에만 가능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에는 선민 의식은 종 교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등의 似而非종교적 (quasi-religious) 성격을 띤다. 특히 어느 민족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이고 絶對的인 眞理를 표방하는 所謂 '高 等 宗敎'는 발생이나 受容 土着化 과정에서 선민 의식을 배태시키는 일이 많 다. 왜냐하면, 特定 民族이 아닌 全人類를 상대로 할 수 있는 '高等 宗敎'야 어떤 민족 (국가;信徒의 집단)이 全人類를 '救濟' (즉, 支配)해야 된다는 사상을 발생시 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사회 정치적 利害關係에 얽매여 있지 않은 新興 高等 宗敎나 公認직후의 外來 高等 宗敎는, 선민 의식의 교리적 기초 (doctrinal basis)를 이루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물론, '高等 宗敎'에 의한 선민 의식의 발 생은, 이 종교의 지도층과 국가의 지배층의 不可分의 관계가 수립되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
當該 사회의 내부적 모순들을 초월하는 종교는 신도들에게 無限한 優越心과 自 負心, 강철과 같은 집단의식, 그리고 이에 의한 용기와 膽力을 줌으로써 성공적인 "聖戰" ("sacred war")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聖戰"의 결과로, 當該 사회의 지배 층의 지배 체제도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되고 지배 영역도 확장되며 문화 수준도 향상된다.
종교적인 선민 의식에 의한 성공적인 "성전"의 事例로, 古代이집트 第18王朝의 近東 經略, 유태족의 팔레스티나 점령, 초기 이슬람敎의 近東 中東 北아프리 카 점령, 스페인 포르투갈系 천주교도의 中 南美洲 점령 등을 들 수 있다. 극 동이나 동남아의 사회 경제적 여건과 정치적 전통은 근동이나 유럽의 그것과 사뭇 다르지만, 중국의 天命 天子 中華 華夷개념과, 佛敎 印度敎에 의해 서 발생된 동남아 諸國의 聖王개념 - 예컨대, 앙코르帝國의 devaraja개념, 마자파 히트의 devaprabhu개념 - 등은, '聖王'을 위주로 한 지배 집단의 지배 영역의 확 대를 합법화하는 데 선민 의식과 공통점이 있어 보인다.
-2-
종교적 (또는 사이비 종교적) 선민 의식은 대개 '我族'/ '我敎' (자신의 민족/종 교)를 '聖' (sanctity)으로, 그리고 '他族'/ '他敎' (남의 민족/종교)를 '俗' (profane)으로 看做, '我族'의 領袖를 위주로 하는 지배 집단의 권력을 절대시 신성시하면서, 領袖 지배 집단의 지도를 받는 '我族' (我敎')의 '使命' (mission)을 강조한다. 이러한 '使命'은 '我敎'의 布敎, '我族'의 理想 社會의 건설 등의 세계 사회의 聖化 (sanctification) 사업으로 인식되지만, 사실상 當該 사회 의 지배층의 권력의 강화 확대를 의미한다. 이러한 '聖化 事業'은 "理想 社會 建設"의 슬러건 밑의 체제 개혁과 같은 평화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일 반적으로는 "聖戰"과 같은 폭력적인 사회적 행위 (social action)로 구체화된다. 北美洲를 改新敎徒에게, 中 南美洲를 天主敎徒에게, 中 近東을 回回敎徒에게 넘겨 준 이 "聖戰"들은 세계 地圖를 크게 변화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한반도 南端의 약소국인 斯盧를 중앙집권적 고대 왕국인 新羅로 만든 뒤에 백제 고구려를 패배시킨 신라 지배층의 國家觀 乃至 世界觀은, 비슷한 규 모의 偉業을 이룬 다른 민족의 選民 意識과 통하는 요소를 포함하지 않았는가? 나아가서 6-7세기 (法興王의 體制 改革 以後 統一 以前)의 신라 지배층의 國家觀 世界觀 자체를 일종의 選民 意識으로 볼 수 있지 않는가? 물론 演繹的 推理 式 으로 기성의 개념을 일정한 사회의 역사에 전적으로 適用하는 것은 그 사회의 特 殊性, 그리고 그 사회의 이념 체제의 複合性을 무시해 버리는 등의 위험을 초래 한다. 그런데 신라의 중앙 귀족의 정신 세계를 '選民'개념의 시각에서 분석해 보 는 것은 신라사 - 나아가, 한국사 - 의 普遍性을 浮刻시키는 장점을 가진다. 또 한 ≪聖經≫ 등의 외국 문헌에서 나오는 '選民'이라는 용어를 한국사 연구에서 사용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하여 의문이 발생될 수도 있다. 그런데 필자는 6-7세기의 신라 지배층의 이념 체제를 '選民 意識'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이 이념 체제
-3-
와 세계사에 보이는 選民 意識을 비교함으로써 신라 왕권의 정신적인 기반을 보 다 다각적으로 규명하려고 한다.
전형적인 '選民 意識'들과 공통의 요소가 보이는 다음과 같은 6-7세기의 신라 의 精神的 複合體 (spiritual complexes)들을 들 수 있다:
II. 選民 意識의 諸要素.
1) 佛國土思想. 安弘 慈藏 등의 6-7세기의 高僧들은, 신라를 前 現世의 佛 菩薩 (迦葉, 釋迦 等)들이 說法하였던 佛國으로, 또는 四天王이 護持하는 世 界 中心 (須彌山, 宧利天)으로 인식하였다. 신라는 西天竺인 印度와 비견할 만한 東天竺으로 인식된 기반 위에, 皇龍寺 丈六尊像과 阿育 (無憂)王을 연결시키는 설 화가 발생되었다. 蛇福설화에서 신라의 茅根下에 蓮華藏世界, 즉 盧舍那佛의 淨 土가 있다는 新羅 本位의 現實佛國土觀이 엿보인다. 신라의 五臺山이 文殊菩薩 의 靈場으로 理解되기도 하고, 신라에서 現身 成佛의 경우가 있었다는 설화도 나온다. 迦葉, 釋迦, 文殊 等의 佛 菩薩, 그리고 阿育과 같은 正法의 王者와 因 緣이 있는 신라의 王族이, 釋迦도 속하였던 刹帝利種 (ksatria)임을 표방하여 불교 식 王名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한마디로, 부처의 나라인 東竺國이 眞種에 의해서 正法으로 다스려진다는 것은 당대 신라 지배층의 신념이 었다. 여기다 彌勒信仰이 加味되어, 신라의 王은 상카와 같은 轉輪聖王으로, 그리 고 신라는 미륵이 下生할 만한 理想國家가 될 나라로 인식되었다. 6-7세기의 신 라
-4-
의 이념 체제의 특징인 佛國土思想 轉輪聖王思想의 融合을 考慮에 두면, 九層 塔의 建塔에 의해서 九韓이 來貢하겠다는 皇龍寺九層塔創塔說話도 지극히 당연하 게 보인다. 九韓의 명칭 중에서 中國, 日本 등이 나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前世 (迦葉) 現世 (釋迦) 未來 (彌勒)의 佛의 有緣國인 新羅가 한반도 뿐만 아 니라 온 天下를 敎化 統一해야 한다는 대담한 抱負는, 이 설화에 깔려 있는 것 이다.
護國과 護法을, 그리고 종교적인 使命 (轉輪聖王 治下의 國家의 建設)과 국가적 인 使命 (國土의 擴張)을 同一視하는 이러한 개념은 전형적인 종교적 選民意識과 사뭇 통한다. 兩者의 경우에는, '我族', '我土', 그리고 '我國'의 統治者가 神聖視 되고, '我國'의 國力伸張과 國土擴張은 종교적인 '淨化事業'으로 인식되고, '我族' 의 天下掌握의 當爲性이 표방된다. 다만 동양적인 '因緣'개념과 聖經的 '選擇'개 념의 차이를 간과하면 안된다.
2) 新羅 中心의 天下觀. 羅 唐聯盟, 新羅 高僧의 西學, 新羅의 중국의 文物 制度 受容 등의 사실을 인정해도, 신라 지배층이 中華 中心의 天下觀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 實은, 6-7세기의 신라의 지배층은 隋 唐의 정치적 비중과 문화 發 展度를 인식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면서도, 新羅 本位의 天下觀을 固守하 였던 것처럼 보인다.
이를 입증하는 자료로, 신라왕족을 '皇', '帝', 즉 天下의 統治者로 稱하는 ≪三 國遺事≫의 史料를 들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 사료의 典據가 확실치 않 으나 新羅의 最古의 ≪國史≫가 찬술된 中古의 天下觀과 無關하지 않다고 보여 진다. ≪三國遺事≫에서 新羅 王族이 天下의 皇帝임을 암시하는 事例로:
衁) 新羅始祖赫居世條에서 赫居世의 誕生을 "今天子已降"으로
遁) 第二南解王條에서 南解 弩禮 脫解 三王을 "三皇"으로
鑁) 桃花女鼻荊郞條에서 眞智王을 "萬乘"의 君主 (天子)로, 그리고 그의 魂을 " 聖帝魂"로
鱁) 天賜玉帶條에서 眞平王을 "抗雍" (중앙에 있는 大學, 즉 天子)로
ꁁ) 太宗春秋公條에서 신라의 統一을 "六合 (天地와 四方, 즉 天下)의 幷呑"로 부르는 等의 글귀들은 보인다. 또한 金石文學的 資料의 경우에는, 中古가 아닌 下 古의 것이지만, ≪聖德王神鐘銘≫의 "尋之帝鄕始制鼓延", 그리고 ≪高仙寺誓幢和 上塔碑銘≫의 "長辭帝闕"과 같은 글귀의 '帝'字는 신라의 王者를 의미한다고 볼
-5-
수도 있다. 위와 같은 史料에서 自國의 王者를 天下를 다스릴 만한 '皇帝'로 봤던
당대 신라 지배층의 自主的 世界觀의 흔적이 보인다고 생각된다. 中古의 獨自的 年號의 사용이나 太宗 같은 廟號의 채택, 그리고 蘇定方에 대한 金庾信의 獨立的 이고 自主的인 태도 等은 결국 이러한 新羅 本位의 天下觀과 무관하지 않은 것 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我國' 中心의 世界觀이 古今의 選民이데올로기들의 중요 한 특징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世界觀은 '他國'에 대한 '我國'의 征服 活 動을 합법적인 '征伐" (즉, '他國'의 '罪目'에 대한 軍事的 膺懲)으로 合當化한다.
3) 護國龍 信仰. 護國神으로서 숭배를 받는 土着神이 몇몇 있었는데, 그 중에 서 龍神 (특히 東海의 龍)이 각별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始祖 赫居世의 妃인 閼英이 鷄龍의 女로, 脫解王이 龍王의 王子로, 萬波息笛이 龍의 선물로, 處容이 龍의 아들로, 明朗의 文豆婁 秘法이 龍의 가르침으로 각각 인식되었다. 死後에 龍으로 되고자 하였던 文武王의 意圖도, 이 護國龍 信仰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겠다.
당대 신라인들은 우주의 모든 '물' (바다, 비, 호수 등)을 다스리는 龍에 의해서 지켜지는 新羅야말로 특수하고 예외적인 위치에 처해 있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 고 보여진다. 龍의 庇護가 신라의 社稷의 保全과 繁榮의 擔保라고 생각되었을 것 이다.
4) 英雄 說話. ≪三國史記≫, ≪三國遺事≫, 그리고 ≪日本書紀≫에서 보이는 朴堤上, 昔于老, 그리고 勿稽子 등의 說話들이 3-5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런 데 ≪三國史記≫ ≪三國遺事≫에 수록되어 있는 朴堤上, 昔于老, 勿稽子의 傳記 는 표현의 특색 等으로 미루어 보면, 高麗時代의 史書에 실리기 전에 新羅 中古 乃至 下古의 史筆에 의해서 일정한 修正이 加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들
-6-
傳記에 담은 思想을 中古 統一戰爭期의 신라 지배층의 理念과 關聯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한 것 같다. 朴堤上과 그의 妻, 昔于老와 그의 妻, 그리고 勿稽子는 각각 中古 統一戰爭期의 신라의 理想人格者의 여러 面을 반영한다. 朴堤上 昔于老 등의 설화의 登場人物들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면, 中古 統一戰爭時期에 理想視되는 人格은, 국가와 國王에 대한 無限한 忠誠心, 國事에 대한 무거운 責任 感, 國事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언제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투철한 犧牲 精神, 그 리고 이러한 自己 犧牲에 필요한 勇氣를 포함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신라의 理 想的 臣下는 자신의 고통과 죽음을 생각 않고 國王과 同心協力하여 王事에만 專 念한다. 신라인의 自我 意識은 定型되지도 않은채 集團 (國家)意識 속에서 남김없 이 溶解되어 버렸다. 國家 國事 國王의 神聖性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존재하 지 않은 한, 國家 意識도 이 정도로 포괄적이고 절대적인 형태로 발전되지는 못 하였을 것이고, 自我 意識도 忠臣 槪念으로 전적으로 代替되지는 못하였을 것이 다. 그런데 위에서 말했듯이 古代 中世의 支配이데올로기 중에서 특히 國家(國 敎) 國王의 권력의 神授說과 이에 의한 國家 國王에 대한 忠誠心 개념은 자 주 選民 意識이 발생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또한 이들 朴堤上 昔于老 등의 傳記에서, 理想人格者인 신라인과 그리고 忠誠스럽지 못한 高句麗人이나 포악 한 倭는, 분명한 對照를 이룬다. 이처럼 人間의 常情인 自我 集中을 극복한 고 상한 人格을 理想으로 삼았던 6-7세기의 신라인들은 적어도 自國의 例外性 特 殊性을 깊이 인식했으리라고 믿어진다.
5) 新羅는 곧 儒敎的 理想社會 ("君子國"). 中古初期에 古代國家官僚體制 의 성립과 같이 수용한 儒敎는 統治개념으로서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7세기중 엽의 신라의 통치자들은 이미 自國을 佛敎的 理想社會 ("轉輪聖王 治下의 나라") 뿐 만 아니라 儒敎的 理想社會 ("君子國")으로도 인식하였다. ≪三國史記≫ 卷
-7-
42 列傳2 金庾信 中에서 저자는 이러한 개념을 다음과 같은 형태로 蘇定方에게 假託하였다: "신라는 인군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여 그 신하는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들이 웃사람을 섬기기를 부형과 같이 하니, 비록 [나라는] 작지만 圖謀할 수 없다". 같은 ≪三國史記≫ 卷42 列傳2 金庾信 中에서 金庾信 자신도 고구려 諜者에게 비슷한 개념을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우리 국왕은 위로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 인심을 잃지 않으매, 백성들이 기뻐하여 모두 자기 생 업을 즐기고 있다". ≪三國遺事≫ 卷1 紀異1 太宗春秋公條에서 當代人들이 當 代를 가리켜 '聖代'라고 일컬었다고 한 것도 같은 '理想國家 개념'을 반영한 것 같다. 當代 신라인의 시각에서는 理想國家가 된 신라와, 사악한 淵蓋蘇文에 의 해서 다스려지는 고구려나 酒色에 빠졌다고 한 義慈王이 다스리는 백제는, 분 명한 對照를 이루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신라를 儒敎的 理想社會로 보는 이 ' 君子國' 관념도 신라의 特殊性 例外性의 개념의 構成部分이었다.
결국 신라를 천하의 중심이 되는 龍의 庇護下 佛有緣國이자 君子國으로, 신라
의 王者를 神聖한 聖王으로, 그리고 신라인들을 용맹 과감한 忠臣으로 보는 것은 6-7세기의 신라 지배층의 國家觀 世界觀의 根幹이었다. 이러한 意識의 起源에 대한 고찰을 다음 기회에 미루고, 여기에서는 다만 이러한 自矜心이 中古 時代의 신라의 飛躍的 사회 정치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과, 佛有緣國 君子國 개 념은 각각 불교 유교의 土着化 과정에서 이들 외래사상 종교와 토착 신앙 사 회제도의 共感帶를 摸索하는 결과로서 발생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점과, 신라의 英 雄說話는 倭의 侵入을 비롯한 무수한 外侵을 擊退한 新羅民의 集團意識의 중요한 要素이었다는 점 등을 강조하고 싶다.
III. 選民 意識의 展開의 諸段階.
-8-
이상에서 新羅 王室의 統治理念의 形態이었던 選民 意識의 여러 要素를 언급한 다음, 이 選民 意識의 形成 成長의 段階들을 시기별로 나누어 簡略하나마 設定 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選民 意識의 成長 複合化는 王權의 强化, 그리고 王室의 必要에 따른 佛 儒敎의 導入과 軌를 같이 하였다.
1) 上古의 國家 意識이나 統治 理念은 결국 하나의 貴族血緣集團이었던 王室의 血緣 祖上意識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上古의 王室은, 其他 貴族家門들과 의 거의 동등한 從前의 관계를 아직까지 淸算하지 못하면서도 王權의 威信을 높이고 자신의 權力을 正當化하는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現在가 過去의 延 長으로 인식되는, 그리고 後孫의 位置가 祖上의 身分에 따라서 자릿매김되는 古 代社會에서는 王室權力의 正當化는 王室始祖의 神性化를 통해서만 가능하였다. 그리하여 上古의 王位를 차지하였던 朴 昔 金 三姓은 각각 그 始祖들의 神聖性 을 입증하는 始祖神話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朴 赫居世의 誕生神話의 경우에 는, 그의
誕生地는 '楊山下蘿井傍'로 되어 있고, 그의 "父母"로서 天馬가 등장하는 등으로 미루어 보면 그를 山神 (楊山), 水神 (蘿井), 天神 (天馬) 등의 주요 自然神들과 연결 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龍神과 연결되어 있었던 王妃 閼英은 神聖王者로 서의 赫居世의 기능을 "보완"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昔脫解는 龍神, 東岳神, 鳥神 (昔氏라는 姓은 鵲字로부터 발생되었다는 연기설화와 탈해신화에서 의 "까치"의 역할을 참고하기를 바람), 그리고 金閼智는 樹神과 鳥神 (金閼智神話 에서 白鷄가 등장함)과 가각 연결되어 있었으므로써 그들의 후손들은 "神으로부 터 물려받은 權力"을 과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당시의 六部의 部族長들은 다 한결같이 자신의 先祖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인물 (즉, 天神의 "分身")이라 주장하 였기 때문에 이러한 三姓의 始祖神話가 그 三姓의 權力基盤을 실제적으로 어느 정도 확대시키고 一般貴族가운데서 그 三姓을 어느정도 부각시켰는지 잘 알 수 없다. 여하튼, 三姓始祖神話에서 보이는 아직까지 상당히 단순한 王權 神授說은 후대의 王室의 選民 意識의 바탕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2) 中古를 新羅王室의 選民 意識의 形成의 本格化의 段階로 봐야 되는 것같다. 먼저 法興王代 (514-540)에 王者의 尊號가 기존의 "寐錦" (中原高句麗碑, 449? 480?), "王" (≪三國史記≫, 503)에서 "大王" (蔚州川前里書石 甲寅題記, 534), "太 王" (蔚州川前里書石 乙未銘, 539)으로 바뀐 것과 法興王을 지칭하여 "聖法興大王 " (蔚州川前理書石 乙卯題記, 535)이라 부른 것은 佛敎 導入과 긴밀한 관계를 갖 는 王權 神聖化 過程을 반영한다.
-9-
그 다음에 眞興王代 (540-576)에 行政體制整備 領土膨脹의 象徵인 巡狩碑들 이 세워졌는데, 이들 碑文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王道와 天道를 동일시하여 王 을 三才 (天,地,人)를 결합시키는 宇宙의 中心으로 보는 中國의 傳統的인 聖王論 은 그때야 비로소 新羅의 統治理念이 되었으리라 믿어진다. 이외에 566年에 완 성된 皇龍寺의 佛殿의 後面에 迦葉佛의 宴坐石 (前佛時伽藍之墟)이 있었다고 한 것은 新羅卽佛有緣國說 (佛國土說의 중요한 一部分)의 嚆矢였으리라 믿어진다. 이 佛有緣國說과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은, 印度의 阿育王이 "인연이 있 는 나라로" 보냈다고 한 쇠와 黃金으로 皇龍寺丈六尊像을 만들고 (574年), 그 金 을 실은 배가 도착했다는 곳에서 東竺寺를 創建하였다는 설화다. 佛國土로서의 新羅 ("東竺")와 印度 ("西竺"), 崇佛王者이자 轉輪聖王으로서의 眞興王과 阿育王 을 연결시키는 이 설화는 新羅의 佛國土說의 本格化를 뜻하였다. 또한 572年에 戰歿士卒을 위한 八關熆會를 열었다는 기록은은 對外戰爭을 "聖化事業" (聖戰) 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리고 上記한 皇龍寺丈六緣起說 話를 통해서 자신과 轉輪聖王의 典刑인 아육왕을 연결시킨 바 있는 眞興王은 王 子들에게 金輪, 銅輪과 같은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轉輪聖王思想을 전적으로 受容 한 것을 선언한다.
결국 眞興王代를, 中國의 道化의 主體로써의 王 ("王化")의 槪念, 印度의 轉輪聖 王思想 등의 본격적인 受容, 公式理念化와 獨步的인 佛國土說의 적극적인 발전 등에 의한 神聖王論, 王族의 選民意識의 發展의 段階로 봐야 한다.
眞平王代 (579-632)에 骨品制度의 完成과 中央集權的官僚制의 整備 등은 國 家의 理念的基盤의 强化를 필요케 하였다. 當代의 眞骨貴族들이 子息의 이름을 지어줄 때 古代 當代 中國思想 神話와 관련된 이름을 상당히 選好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들은 自國을 이미 中國과 어느 정도 동등한 小華로 인식하기 시 작했으리라 짐작된다. 또한 仙桃山母神話에서 보이듯이 眞平王代에 朴赫居世 閼 英 (즉, 신라의 王室)의 "聖母"로 숭배받아왔던 新羅의 土着神인 慶州 仙桃山(西 鳶山)의 女山神을 "中國 皇室의 女"라 潤色함으로써 新羅 王室과 中國 皇室의 聯 關性을 隱然中에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小華論과 관련된 또 하나의 說話 는 眞平王이 "上帝"로부터 新羅의 三寶 중에서 두 번째 國寶인 "天賜玉帶"를 받 았다
-10-
는 이야기었다. 이 說話도 新羅의 王者에게 中國 皇帝만의 "天子"의 名分도 附 與될 수 있음을 暗示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小華論을 가능케 만든 것은, 中原을 統一한 隋의 본을 받아 海東의 三韓을 統一하려는 眞平王의 政治的 意志 뿐더러 金后稷傳이나 大世 仇柒이야기에서 확인되는 新羅에서의 儒 道敎의 急速한 發展이었을 것이다. 또한 佛敎의 분야에서, 大道署의 設置 (624年)는 敎 壇에 대한 國家의 統制力을 더욱 강화시켰고, 安弘法師 (579?-640?)의 活動에 의 해서 新羅卽佛國土說은 한층 더 구체화되었고, 眞智王代 (576-579)의 眞慈의 "大 聖 (彌勒)化作花郞"의 發願이나 金庾信의 龍華香徒의 存在에서 확인되듯이 彌勒思想 (理想社會建設思想)과 花郞徒의 連結은 본격화되었다. 小華論 佛國土說 土着化된 彌勒思想 등을 新羅의 選民意識의 構成要素로 생각한다면, 眞平王代를 이 選民意識의 具體化 多邊化 强化의 段階로 봐야 되지 않을까 싶다.
善德 (632-647) 眞德 (647-654)兩女王代에 비극적인 大耶之役 (642年)이후에 羅
唐聯盟이 본격화되고, 一統三韓을 목표로 하는 對麗 濟戰爭이 加一層 激化되고, 實權을 장악해 가는 春秋 庾信一派에 의해서 總動員의 雰圍氣가 擧國化된다. 이 러한 死活鬪爭의 상황 속에서 前代에 이미 상당한 수준까지 發展된 選民意識은 일단 完成되어 統一戰爭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佛國土說을 集大成한 慈藏에 의 해서 創建된 皇龍寺九層塔 (645年)은 眞種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九韓을 아우를 使命을 띤 佛有緣國이자 世界中心地인 새 新羅의 雄壯한 象徵이었다. 이전부터 土着宗敎의 聖地 ("福地")로서 崇拜를 받아 왔던 慶州 狼山은 선덕여왕대에 와 서 四天王을 거느리는 帝釋의 住處인 須彌山의 宧利天 - 즉, 우주의 중심 - 으로 認識되기 시작한 것도 분명히 이 佛國土說과 무관하지 않았다. 또한 善德王代 에 庾信의 協力者인 듯한 術僧 密本이 大力神 天神들을 마음대로 부렸다는 이야 기도 新羅의 國威를 提高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외에는 新羅 貴族의 唐 國學 入學의 申請 (640年), 唐服 着用 (649年), 太平頌 作成 (650年) 등도 中國과 어느 정도 對等한 文明國家로서의 新羅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결국, 中古의 末期 에 주로 小華論, 佛國土說, 그리고 彌勒思想으로 구성된 新羅 支配層의 選民意識 은 完成된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 같다. 祖上崇拜 土着信仰의 기반 위에 성립 된 이 선민 의식의 主軸을 이룬 것은 역시 儒 道敎思想보다 巫佛習合에 입각한 불국토설이었을 것이다. 이는 中古의 歷代의 王者의 佛名, 圓光이나 慈藏의 政治 的 役割, 金庾信, 金良圖 같은 重臣들의 信佛의 形態 등을 봐도 거의 자명한 것이 다.
-11-
3) 下古를 統治理念의 儒敎化의 시기, 選民 意識의 常識化의 시기, 또는 支配層 의 自我認識로서의 小華論 新羅卽君子國論이 佛國土說을 壓倒한 段階로 봐야 될 것 같다. 주로 慈藏의 노력에 의해서 前代에 完成된 新羅卽佛國土說은 下古에 접 어들며 하나의 독립적인 文化意識보다는 新羅 支配層의 意識世界의 底邊에 깔려 있는 일종의 文化常識이 된 듯하다. 즉, 바로 佛有緣國인 新羅를 佛 菩薩이 陰助 한다는 佛國土說이야 말로 戰勝에 대한 金庾信의 잦은 祈禱, 明朗의 文豆婁道場 에 의한 唐兵退治 (671年?), 金仁問의 歸國을 促進하기 위한 仁容寺 觀音道場 등의 護國佛事의 前提條件이었다. 그런데 皇龍寺의 丈六像 九層塔같은 佛國土의 莊嚴한 象徵들은 더 이상 建立되지 않았고, 王者들이 더 이상 佛名을 가지지 않 은 점으로 미루어 보면, 眞種說도 그 중요성을 어느 정도 잃었던 것 같다. 그 대 신 新羅 儒學의 力量蓄積, 빈번해진 對唐交流 등에 의하여 小華論 新羅卽君子國 論은 急速히 발전하여 그 비중이 커져나간다. 가령, "金山寶蓋"의 化身으로 일컬 어진 義湘은 文武王에게 儒敎的 王道思想에 입각한 諫言을 드리기도 하고, "芬 皇寺의 陳那"로 불리어진 元曉의 아들 薛聰은 儒學者가 되기도 하였다. 儒敎 는 佛僧들도 이를 무시못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고, 國家統治理念으로 서의 儒敎의 새 役割의 象徵은 682年에 세위진 國學이었다. 唐과 동등한 儒敎式 理想國家를 건설하려는 專制王權時代의 王者들은 혹은 父王에게 "太宗"의 諡號를 내리기도 하고, 혹은 堯舜禹의 制度의 본을 받아 全國을 九州로 나누어 固有地名 을 대폭 漢式으로 거치기도 하였다 (757年). 儒敎國民으로서의 新羅人의 優秀性 特殊性을 전제조건으로 한 이러한 정책은 역시 一種의 儒敎的 選民意識에 立脚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러한 選民意識과 前代의 佛國土思想이 사뭇 다르다는 것은 명백히 보인다. 또한 花郞徒의 敎育에는, 儒敎的 要素의 비중이 커짐에 彌勒信仰 의 役割이 상대적으로 축소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竹旨郞에 대한 彌勒化身 說, 耆婆郞의 弟子로 보이는 忠談師의 彌勒世尊崇拜의 사실 등에서 확인되듯 이 花郞徒와 彌勒信仰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下古의 選民意識의 複合的인 모습은 萬波息笛 說話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신라의 王이 만파식적을 불면서 天下를 和 平하게 만들 수 있다는말이 新羅의 王室에 中國 皇室 특유의 "平天下"의 名分 을 부여함으로써 新羅 王室과 中國 皇室의 本來的 同等함, 新羅의 優秀함, 例外性 을 강조하는 신라의 選民意識의 表現이었음에 틀림 없다. 이 說話의 思想的인 要 素 중에서는 土着信仰 (護國龍 天神信仰; 呪物로서의 樂器에 대한 崇拜), 護國佛 敎 (倭兵退治를 위해서 創建된 感恩寺), 그리고 儒 佛敎에서 찾을 수 있는 "以聲 理天下"의 槪念 등이 나타나는데, 이 설화의 思想的인 軸을 이루는 것이 역시 父 王인 文 -12-
武王에 대한 神文王의 崇拜 - 즉, 王朝의 祖上의 崇拜 - 이었을 것이다.
上 中 下古를 통틀어 新羅 支配層 (사실, 이 支配層의 중싱을 이루었던 王室) 의 選民 意識의 歷史的 展開에 대한 결론을 내리면, 國初부터 羅末까지 이 選民 意識의 基盤을 이루었던 것이 土着信仰 (天神, 龍神 등의 自然神의 崇拜)에 입각 한 王權神授說이었다는 것을 먼저 강조해야 된다. 始祖神話에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는 이 王權神授說은 天神 山神을 王室의 "父母"로, 龍神을 王室의 保護神 으로 각각 設定하고 王과 그의 祖上의 精靈의 呪術的 機能을 강조함으로써 一般 貴族에 비해서 王族의 權威를 높였다. 그런데 中古에 접어들어 佛敎를 主軸으로 한 當代 東亞文明에 편입하려는, 그리고 三國統一의 名分을 찾으려는 新羅의 王 室은 中國으로부터 轉輪聖王思想을 받아들여 土着的인 聖地論과 佛敎의 佛國論을 融合시켜 독자적인 佛國土說 佛有緣國說 등을 개발하였다. 이와 동시에 中國의 王化論 등의 統治理念과 理想國家建設理念으로서의 彌勒思想이 받아들여져 庾信 春秋一派를 중심으로 한 眞骨貴族의 統一意志를 북돋우었다. 그런데 統一戰爭 終 熄 이후에 對內外的인 安定을 찾은 專制王權은 佛國土說보다 儒敎에 입각한 王化 論 小中華論 新羅卽君子國說 등을 優位에 두어 儒敎的 先進 國家로서의 面貌 를 誇示하였다. 그러나 그때도 萬波息笛 說話에서 보이듯이 選民 意識의 底邊에 깔려 있었 던 것은 역시 國初부터 綿綿히 내려온 土着信仰 (龍神 王朝祖上精靈 의 崇拜)이었다.
IV. 맺음말
이상과 같은 國家觀 世界觀에서는, 세계사에서 보이는 選民 意識과 構造的인 共通點이 제법 많이 보인다. 결과적으로, 猶太族의 종교적 선민 의식은 古代猶太 王國을, 그리고 아랍族의 回回敎적 선민 의식은 아랍카리피트를 각각 정신적으로 胚胎시켰듯이, 신라 지배층의 이러한 일종의 '선민 의식'도 半島統一의 하나의 原 動力이 되었다. 왜냐하면, 同類의 '선민 의식'을 가진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신라 지배층도 자신의 支配領域擴張을 위한 전쟁을 일종의 '聖戰'으로 인식하였 기 때문이다. "'理想國家'인 신라가 無道無禮한 濟 麗를 膺懲하여, 濟 麗의 인 민의 怨恨을 풀어 주는 것은 하늘이 내려 준 使命이다"라는 개념은, 當代 신라 지배층 - 그 중에서 특히 庾信 春秋 兩金派 -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金庾信이 백제의 災變怪異를 亡兆로 삼아 太宗武烈王에게 '백제가 무도하여 그 罪가 桀 紂보다 더하니, 참으로 하늘의 뜻에 따라 백성을 弔問하고 罪를 칠 때이다"라 고 告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신념을 말해 주는 것이다. 庾信이 濟 麗를 치기 위하 여 天官과 신비스러운 老翁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와, 그리고 백제의 패배 를 天幸 (즉, 天意)로 여긴다는 그의 말은, 다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을 하늘의 뜻에 따른 '聖戰'으
-13-
로 보는 이 신념과 무관하지 않다. 金庾信이 고구려 諜者를 위로하여 돌려 보 냈다는 이야기나 그가 백제 포로를 다 풀어 주었다는 이야기는 金庾信이 혹 시 이 전쟁을 '聖戰'뿐만 아니라 일종의 '解放戰爭'으로 宣傳하고 싶지 않았을까 라는 의심까지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그리고 戰勢가 불리할 때마다 金庾信이 神佛의 陰助를 얻었다는 설화들은 呪術師로서의 그의 기능뿐만 아니라 백제 고구려와의전쟁에 대한 '聖戰' 개념의 존재도 증명해 준다.
그러면 濟 麗와의 戰爭에서의 신라의 승리의 原因은, 唐兵의 援助보다도 이러 한 '選民 意識' ' 使命意識'과 관련된 '聖戰 意識'의 利用에 의한 擧族的 總動員 이 아니었나 싶다. 결과적으로, 고구려나 백제보다 여러모로 후진적이고 落後한 반도 南端의 신라는 물질적인 부족함을 정신적인 優越意識으로 보충하여 强敵을 이길 수 있었다. 신라 지배층은 자기 나라를 佛 菩薩 神靈 龍神이 보호해 주 는 理想國家로 그리고 征服戰爭을 하늘의 뜻에 따른 '聖戰'으로 인식하지 않았으 면, 고구려 백제와 같은 東亞의 강대국을 패배시키지도 못했을 것이고 東亞의 覇者이었던 唐의 세력을 逐出하여 唐의 東漸을 停止시키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신라와 濟 麗의 大決戰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신라의 사회 정치적 '武器'인 강력한 中央集權的 官僚體制와, 그리고 신라의 외교적 ' 武器'인 羅 唐聯盟 등을 고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라의 정신적인 '武器'인 ' 選民' 意識과 '聖戰' 개념을 간과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結論에 부연하여 필자의 한가지 의견을 간단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우리는 토인비(A. Toynbee)와 같이 역사를 인간과 絶對者의 대화로 생각하면 종 교를 이 대화의 언어로 생각해야 하겠다. 그렇다면 종교를 絶對眞理의 탐구의 도 구로 볼 수 있다. 그러한 탈속세적이며 절대적인 가치의 종교가 政治的인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역사적인 면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순수한 종교 정신에서 볼 때는 문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상으로 본다면 新羅 佛國土說 등에 의해서 발생된 신라인들의 '選民' 意識은 정치인에 의해서 국가 정책을 추진하는 데 사용되어졌음을 알 수가 있다. 세계사 에서 볼 수 있듯이 中世 西歐의 統治者들이 사랑을 기본 정신으로 하는 기독교를 정치적인 세력 확장의 구실로 이용하였던 경우가 非一非再하였음을 본다면, 이 사실이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가 인간의 정신
-14-
을 절대적 차원으로 향상시켜 영혼을 구제한다는 종교 윤리적 측면에서 본다면, 역사상의 종교의 정치적 차원이 좀더 다른 시각에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한 확실한 평가는, 현대보다 더욱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는 후세인들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