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와 청년

(사내와 청년이 사내의 노방전도에서 만나 서로를 알아 본
후부터 재구성 함.)

사내와 청년은 서로의 과거가 어떻게 교차되었었는 지를
짧은 순간 다시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청년의 마음은
분노와 살의, 원한, 사내가 행복해 보이는 것에 대한 증오,
자신의 삶에 대한 허무감등으로 거의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는 힘이 빠지는 다리에 간신히 의지하여 이를 악물고
사내를 온 힘을 다해 노려 보고 있었다.

한편 사내는 사내대로 거대한 혼란을 맞고 있었다. 십 수년간
잊고 씻으려 노력했던 과거, 그 동안 쌓아 올린 새로운
삶의 기쁨이 한 순간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보다 나약해 보이는 청년을 어떻게 하면 극구 부인하고
입을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순간 그의 머리를
스쳐 갔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군중들은 심상치 않은
사내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었다. 사내의 귀에는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하고 외치는 예수를 둘러
싼 군중들의 함성이 메아리 치고 있었다. 나는 진실로
구원을 받은 것일까 하는 회의와 무력감이 사내에게
물밀듯 달려들고 있었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여 입술을 가늘게 떨며 그를 지켜 보고 있는
청년에게로 다가 갔다.

청년으로부터 서너 걸음 앞에서 사내는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거의 식별할 수 없는 가는 목소리로
"나를 죽여 주게" 하고 신음하듯 내 뱉었다. 그 둘 주위를
지켜보던 군중들이 녹은 아스팔트가 흐르듯 천천히 에워
쌌다. 소근소근 자기들의 추측을 말해 대는 사람들이
있었다. 청년은 무겁게 "당신 맞소?"하고 내어 뱉었다.
잠시 정적이 이들을 짓누른 후 사내는 어렵게 "그렇네,
나를 죽여 주게." 하고 보다 분명한 그러나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년은 들고 있던 허름한 가방에 손을 넣었다. 가방이
떨어지자 그의 손엔 가늘고 긴 칼이 한 자루 들려 있었다.
시종 사내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고 청년의 얼굴은
창백하였다. 칼을 본 군중들은 모두 몇 걸음씩 뒤로 물러
났고 아낙네들은 슬슬 자리를 뜨기도 했다. "칼이야 칼"
하는 군중들의 속삭임이 있었으나 뛰는 심장의 고동이
몰아쳐 주는 피의 힘으로 윙윙거리고 있는 사내의 귀에는
그 것이 들려 오지 않았다.

사내는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하나님이시여,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의 영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하고 끊임
없이 속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그의 한 섞인 기도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입과 눈 밖으로 나오면서 그는 철퍽
청년 쪽으로 거의 엎드린 자세가 되어 버렸다. 사내의
입에서는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하는 말이 청년의
귀에 들리게끔 새어 나오고 있었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청년이 엎드린 사내의 뒷머리를
향해 비수를 꽂듯이 내어 뱉었다. 사내는 덜덜 떨기까지
하면서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만을 내어 뱉고 있었다.
청년에게 하는 말인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청년은 칼을 든 손에 더 힘을 주면서
왼손으로 사내의 머리카락을 낚아채어 고개를 들었다.

비로소 두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사내는 청년에게 뜻밖의
말을 하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도 용서하여 주실
것이네." 이 말에 청년은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내
어머니를 능욕하고 무참히 살해하고 나의 인생을 이 지경이
되도록 망쳐 놓은 것이 누구인데? "나의 죄?" 내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죄는 바로 내 앞에서 간을 꺼내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이 원수가 다 지은 것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이 작자는 이제 어느 순간이고 내가 든
칼에 심장이던 목이던 찌르고 긋는 것을 끝으로 하여
'자기'의 죄값을 치루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
그런 파렴치한 작자가 내 죄를 운운할 자격이 있는 자란
말인가? 내 죄? 내게는 죄가 없다. 용서 받을 필요가
내겐 없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청년은 어쩔 수 없이 그 질문을 하게 되고 말았다. "내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이요?" 그러나 사내는 그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고 다만 "내가 내 죄를 깨닫고 이날 입때꺼정
한날 한시도 빼 놓지 않고 당신과 당신 어머니를 위해
하나님께 빌었네."라고 대답했다. 사내는 비록 죽더라도,
자신이 중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약속을, 십 수년간
끊임없이 기억하고 지키려한 자신의 유일한 참회의 약속을
이 말 안에 담아 청년에게 전달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청년이 묵묵부답으로 있자 사내는 다시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내 영혼을 구원하시겠다 약속하셨네. 나는
이제 죽어도 천국에 가려니와 나 때문에 큰 죄를 저지르게
될 자네를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을 수 없네.
그러나 하나님은 자네의 죄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리라
믿네."

갑자기 청년은 이 사내가 내가 죽여야 할 그사내인가 하는
것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아닌가
말이다.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내의 말과 눈빛, 그의 표정과 행동에서 단 한가지도
그런 거짓을 읽을 수가 없었다. 십분 전까지만 해도
너무도 확실하게 보였던 악마와 같은 그의 과거의 모습이
점차로 꿈처럼 지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손마디와 손톱이
새하얘지도록 힘을 넣어 쥐고 있었던 칼을 든 손에도
조금씩 힘이 풀리고 있음을 볼수가 있었다. 그의 손은
정지 되었던 피가 돌아 오면서 붉게 변해 가고 있었다.

그 때 청년은 강력한 힘으로 뒤로 밀쳐지고 말았다.
넘어지면서 손에 들었던 칼을 떨어트렸다. 십수년 그의
손에서 복수의 이 순간을 기다리며 한 번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던 칼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대신 그의
팔은 뒤로 비틀어져 수갑이 채워지고 있었다. 힘을 주어
반항해 보려고 했지만 워낙 완력이 센 경찰에게 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끌려가면서도 뒤돌아 사내를 보며 "저 놈은
저 놈인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