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이는 글들

이즈음의 조독투에는 좋아진 것이 하나 있다.
그 것은 좋은 글 찾기가 쉬워진 것이다. 전 같으면 그래도
읽을만한 글을 쓰는 분들이 꽤 있어서 이 글도 읽으랴
저 글도 읽으랴 시간이 많이 들었는데 지금은 건너 뛸 필명이
워낙 자리를 많이 차지하니 읽을 생각이 드는 글은 몇 편
되질 않고 상대적으로 그 분들 글을 찾는 시간도 절약되고
읽는 데 드는 시간도 많이 절약이 되는 까닭이다. 갈 수록
건너 뛰어야 하는 분량이 많아지다 보니 인터넷 중독증이나
조독투 중독증 치유에도 탁월한 차도가 있다.
세상은 보기나름이다.

찬송가 495장 3절 둘째줄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런데 얼마전부터 이 가사가 점점 다음과 같이 변해 들린다.
"예수쟁이 없는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또 다음과 같은 기도가 점점 입에 붙을려고 한다.
"주님, 저 예수쟁이가 가는 곳에 저를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설상가상으로 평소 그 해학과 애국심을 존경하는 박산수님도
기독교 박해에 기치를 드높였다.

이 자리가 누가 더 잘 났는가 못 났는가 경쟁하는 자리가
되었는가? 이벼룩님의 노력과 손영철님의 중재에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중용과 화합, 선의에의 노력이 없는 한
우리들의 미래는 부정적인 것이 되고 만다. 신현광님처럼
'nothing to be serious about' 하는 태도나 조동희님처럼
'everything to get mad about' 하는 'all or nothing' 의
태도가 되지 않을까? D. H. Lawrence는 젊었을 때는 그가
인내심이 매우 박약했었다고 전제한 후 나이가 먹자 그나마도
다 없어지더라고 토로하였다던데...
파괴는 쉽고 건설은 너무도 어려운 길임을 생각해 본다.

나는 이병주씨의 소설을 좋아 하는데 딱히 그 이유를 대기는
어렵다. 그 분의 소설이 이문열처럼 현학하지도 않으나 지혜가
있고 마광수처럼 노골적이 아니나 통속을 피하지 않는 현실적인
소재를 다루며, 무엇보다도 다양한 인생의 이야기들을 그려냄에
있어 관조의 철학이 이면에 깔려 있음을 느낀다. 거대한 시대의
흐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므로 시대상과 현실성이 주요한
요소가 되어 있음에도 촛점은 결국 등장 인물들의 지적,
감성적인 요소 즉, 총체적인 인간성에 맞추어져 있다고
느껴진다. 이런 등장 인물들의 개성은 풍부한 인용과 다양한
관점의 삽입에 의해 중용을 찾는다. 독자는 개개인의 특수한
결정, 행동등을 이런 시공을 궤뚫는 안목을 갖고 보게 된다.
이상의 해석은 추상적으로밖에 쓸 수 없는 과거의 기억에
의한 결과이지만 어쨋건 이병주씨의 글을 읽을 땐 다른 작가의
글을 읽을 때보단 훨씬 마음이 안정됨은 분명한 기억이다.

우린 분명히 말을 하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듣는 사람은 전혀 엉뚱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음과 같은 말에 숨어 있는 모순은 나를 '죽인다.'
"나 네 말 '분명히' 들었어. 근데 그거 무슨 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