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렇지만 독일은 16세기에도 유럽 커피
문화의 리더였다. 커피가 최초로 독일에 들어온 것은 1670년대로
그 후 함부르크를 시초로 계속해서 커피하우스가 생겨났다.
18세기 후반에는 가정에 까지 침입해 부유층과 젊은이들을
매료시켯다.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칸타타 '조용하게, 요란스럽지
않게' 가 만들어진 것은 바로 이때로 1723년이었다.
아
- 커피, 맛있는 것. 천번의 키스보다 황홀하고
마스카트 술보다 달콤하다. 커피-커피-
커피는 멈출수가 없다. 나에게 뭔가를
주고 싶다면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환영한다.
커피를 예찬하고 있는 이 노래는
리스헨이라는 여자가 노래한 아리아의 가사다. 말하자면
커피 찬가인데 이것이 '커피 칸타타' 로 불리게 되었다.
이 노래가 작곡된때, 상업도시 라이프찌히에서는 커피가
대유행이었는데 식자들은 얼굴을 찌푸렸고 의사들은 '여성이
마시면 불임이 된다' '얼굴색이 검어진다'고 하며 반대했다.
이 때문에 삼중창으로 부르는 피날레는 동정심없는 매정한
말로 끝맺고 있다.
고양이가
잡은 쥐를 놓치지 않으려 하고 젊은 처녀는 커피를
마시고 어머니도 커피를 좋아해서 마신다.
할머니까지 자주 마시니까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는다.
베토벤(1770-1827)이
'영웅' , '운명' , '전원' 등의 교향곡을 작곡했던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빈에서는 바하시대의 커피 멸시는 벌써
과거의 일이 되어 시내에는 커피하우스가 성시를 이루며
번창해 갔다. 그러나 꾀죄죄한 베토벤은 신식의 유리로
만든 커피메이커를 사용해 한결같이 집에서 만든 커피를
마셨다. 그의 아침식사는 한 잔에 60알의 원두를 넣어 분쇄한
커피 뿐이었다고 한다.
후배 작곡가 칼 마리아 폰 베버가
베토벤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실내는
온통 난잡했다. 마루에는 악보와 돈, 옷가지들이 흩어져
널려 있고 더러워진 침대에는 세탁물이 쌓여 있을 뿐 아니라
피아노는 뚜껑이 닫힌 채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고 테이블에는
부서진 커피 분쇄기가 놓여 있었다.'
이 당시 베토벤은 아침을 어떻게
해결했을지 의문이다. 또 1816년 여름, 그를 방문한 의사
칼 폰 부르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베토벤은
쓰고 있는 곡 1악장의 오선지 앞에다 커피를 끓이는 유리로
만든 플라스크를 두고 있었다."
위 문장은
마르틴 휴르리맨의 '베토벤 방문' 에 실려 있는 것인데
머리를 쥐어뜯으며 '운명' 과 싸우는 베토벤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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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커피하우스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작업도 하고 토론도 하는 장이었다. 파리의 카페는 북쪽
교외에 있는 몽마르뜨 주면에 발달해 왔는데 치솟는 집값
때문에 파리 시내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몽마르뜨로 몰려 들었다. 피카소 등이 살던 '세탁선'이라
불리는 아파트도 이곳에 있다. 생 뱅상의 묘지 옆에 있는
카페 '라팡 아지르'에는 르노와르, 피카소, 로트렉, 로드리고
등이 매일 모였고 '오드와 마고'는 사르트르와 보봐르가
항상 들렀던 곳이다. '샤놀', '카페 당브랑' , '카페 누벨아테네'
, '카페 라무르' '카페르보와' 등에는 로트렉, 마네, 졸라,
모파상 등이 드나들었다.
"카페가
붐비는 시기는 왠지 집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좀이 쑤시는
인종, 즉 보헤미안 기질이랄까 아무튼 이러한 기질을 지닌
사람들이 나타나는 시기이다. 세기 말의 파리는 바로 그런
장소였다. 파리의 거리가 급격히 성장하고 세계 각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카페는 단순히 음료를 마시는 곳
뿐 아니라 그들의 아지트로서 수다를 떨기도 하고 읊조리기도
하고 음악을 연주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파리의
카페와 캬바레는 지금도 계급, 신분, 직업 구분없이 사람들로
층층마다 꽉 차있고 대부분의 가게는 커피 이외의 음식물도
취급하며 문 밖에도 테이블을 설치해 두고 시간을 제한하는
일도 없다. 대혁명 시절 혁명파에 대항한 왕당파의 무리가
모였던 '카페 드 라페'는 아직도 오페라좌 옆에 있다. Coff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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