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여행

타국서 혼자 맞는 새해 첫날을 덜 우울하게 보내기위해 나는 멋진 유적이 있는 해변 마을 마말라뿌람으로 향했다. LP(여행안내서)에서 추천한 인기 여관에 전화를 해서 방을 예약하고 느즈막히 도착했다. 버스정류장에는 호객꾼을 조심하라는 표지판까지 설치되어있는 것을 보고 미리 방을 예약한 것이 정말 다행스러웠다. 이곳도 꽤 알려진 관광지라서 적잖이 시달 리겠구나 걱정하면서 달려드는 릭샤꾼들에게 "I am going to Laximi Lodge. "I've already booked a room." 하고 소리쳤다. 한 릭샤꾼이 나서서 "I know, I know, I know Laximi Lodge. " 내 배낭을 끌어다 자기 릭샤에 올렸다. " "I've already booked a room. No commission for you, OK? " 하고 말했으나 알아듣는지 못알아듣는지 연신 "No problem, Madam. I know. I know. " 만 반복했다. 락시미 롯지에 도착하여 동글동글한 얼굴에 잘 다듬은 콧수염이 그린 듯 붙어있는 주인장이 활짝 웃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릭샤꾼과 상당히 친한 모양으로 악수를 하고 어깨를 토닥거리며 인사를 나누었다. 배낭을 한쪽 구석에 세워두고 데스크에 갔더니 내 이름과 방 번호가 작은 종이에 씌여져 스카치 테잎으로 붙여져 있었다. 그때의 안도감이란. "I'm Mimi over there. I called and booked a sigle room for tonight. See, there is my name. " 그들은 여전히 내게는 활짝 웃어보이며 그들의 말로 뭔가를 열심히 말했다. 릭샤꾼이 소개 비를 원하는 모양이었지만 난 이미 LP에 소개된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흥정을 해놓은 상태 였다. 주인은 당연히 그에게 돈을 줄 생각이 없었을 게다. 내가 릭샤군에게 줄 소개비를 더 낼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내 눈치를 보며 싸우고 있을동안 난 유유자적 그들을 지켜보 고 있었는데 좀처럼 끝날 기미가 않보였다. 이미 날이 저물어 밖이 깜깜해졌다. 슬슬 피곤하 기도하고 배고프기도 하고. "Excuse me. Why don't you show me my room first? I've been waiting here for a while. I feel tired. " 그러자 주인은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서는 사이즈만 틀리고 국화빵 같이 똑같은 다른 남자를 데리고 나왔다. 둘이 어깨 동무를 하고 귓속말을 하며 나오는데 똑같이 생긴 두 개의 머리 가 다른 높이에 매달린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이제 세 명이 서로 이러쿵 저러쿵 한참을 다 투더니 한명이 내 배낭을 짊어매었다. 드디어 내방으로 안내하려나보다 생각했는데 그는 릭 샤꾼과 함께 나를 데리고 옆집으로 갔다. 한눈에도 서로 다른 집이고 간판까지 버젖이 붙어 있는데 먼저 나를 맞았던 주인이 내게 열심히 설명을 했다. 말인즉, 락시미 롯지는 유명한 곳이라 여러 곳이 있다. 이곳은 락시미 롯지의 자매 호텔이 다. 네가 전화한 곳은 여기이다. 여기 네 방이 있다. 난 피곤한 마음에 락시미에 주기로 한 돈을 똑같이 주기로 하고 빨리 방에들어 쉬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이 안내한 방은 정말 그 돈이 아까운 초라하기 짝이없는 곳이었다. 락시미는 고 급호텔은 아니지만 해변에 위치한 경치가 좋은 곳으로 식당도 좋은 곳이라던데... 이곳은, 이 곳은 정말... 난 갑자기 밀려드는 서럽고 외롭고 피곤한 생각에 눈물이 쏟아졌다. 배낭을 풀 어 세면도구를 꺼내다 말고 나는 튀어나갔다. 릭샤군은 벌써 가버리고 락시미의 주인과 옆 집의 주인 할아버지가 기분 좋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난 버스 여행 뒤 먼지를 뒤집어 쓴 얼굴에 이제 눈물까지 범벅이 되어서는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가며 그들에게 한참 강하게 힘 주어 말했다. 두 사람은 상당히 놀라고 당황한 듯 했다. 엄마에게 혼나는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내말을 듣더니 둘이 싸우기 시작했다. 주인 할아버지는 내게 릭샤꾼이 이미 소개 비를 받아갔으므로 이곳에서 자야한다고 설득했고 락시미의 주인은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 되풀이했다. 내가 주저앉아 계속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으니까 마침내 주인 할아버지가 아 주 불만스런 얼굴로 돈을 내주었다. 난 다시 배낭을 싸서 나와 락시미로 돌아갔다. 키가 큰 주인이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몹시 언잖은 얼굴을 하고 작은 주인에게 또 힘주어 말했 다. 작은 주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난 외국인들이 북적대는 그 좁은 로비에서 커다란 배낭을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저녁을 먹으러 들어오던 손님들 중 히피 차 림의 한 서양 여자가 내게 왜그러냐고 물어왔다. 난 최대한 불쌍하게 그러면서 순진하게 보 이고자 하는 마음이 살짝 들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연을 들은 여자는 내등을 쓸 어주며 상황을 뒤 늦게 들어온 다른 손님들에게 설명했고 그들은 그 다음에 들어온 여행자 들에게 또 설명했다. New Year's Eve에 부모님 속썩이고 여행와서 홀홀단신 존재의 밑바 닥까지 절절하게 고독했던 나는 갑자기 수십 명의 여행자들의 동정과 위로를 받는 입장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키 큰 주인은 손님들에게 "No, problem!"을 외치며 나를 일으 켜 오토바이에 싣고 한참 떨어진 럭키 게스트 하우스에 내려주었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 께서 말씀하시길 울다 보면 자신이 왜 울기 시작했는지를 잊어버린다고, 그저 우는 것이 슬 퍼서 울게 된다고 하셨는데 그런 상황이 바로 이때였다. 괜히 온갖 슬픔이 몰려들어서 눈물 이 끝없이 솟았다. 인도 사람이라기보다 아프리카 사람같은 럭키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은 내 가 우는 것을 한참 지켜보았다. 짜이도 권해보고 내 앞에 앉아서 하얀 이빨이 활짝 드러나 게 웃어보이기도 하면서. 난 그때 괜히 어색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는지도 모른다. 상황 얘기를 하고 내가 인도 여행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 인도가 얼마 나 아름다운지, 그러나 인도인들 땜에 여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두서 없이 주절거 렸다. " I'm sick about their lies. Promise doesn't mean anything in India? Am I wrong to still believe Indians?" 나에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럭키의 아저씨가 인도인이란 이유 만으로 이런 투정을 다 받아줘야했다니 정말 미안하다. 그는 인도인을 싸잡아서 불평하는 내게 "No, no, no, no, not you. They are crazy because of money. " 그리고는 검붉은 두 툼한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모두 보이게 활짝 웃었다. 눈물이 쏙 들어갔다. 할머니 말씀이 울다가 웃으면 어찌 된다지만 난 터져나오는 웃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영수증책을 가 져다 보여주면서 다른 손님들이 더블룸에 150루피를 낸다고 설명하고 나에게 혼자이므로 130루피만 받겠다고 했다. 락시미보다 싼 값이고 방도 나쁘지 않았으므로 난 그러기로 하고 1층 방에 짐을 풀었다.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려는데 정겨운 목소리. 희란이었다. 마이소르에서 헤어졌던 희란이가 벌써 인도의 남쪽 끝인 깐냐 꾸마리를 거쳐 마말라뿌람까 지 온 것이었다. 희란이를 보자 또 눈물이 쏟아졌다. 난 아기처럼 엉엉 울었다. 너무 반갑고 고마워서. 희란이는 나보다 훨씬 어리지만 장애아를 가르치는 특수 교육학과 학생답게 어른 스럽고 따뜻한 친구다. 전공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기 보다 천성이 이러니 그런 길을 걷 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 둘이 방을 같이 쓰겠다고 말하러 주인 아저씨한테 갔더니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She's special. You saw the receipts. It's only her. " 하며 안절부절 하 였다. 무슨 말인지 몰라서 멍 했는데 희란이는 100루피를 내고 내 옆방을 쓰고 있었던 것이 다. 그 상황에서 나를 위로하면서 돈 때문에 사람들이 미쳐서 그렇지 인도인을 다 믿지 못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면서도 그는 내게 방값을 더 받았다니... 궂이 그가 야비해서라기 보다 실제 백인들에게 150루피에서 200루피까지 받았을 것이다. 희란이는 조용 조용 나긋 나긋하지만 알뜰한 대학생 배낭여행자답게 흥정을 잘 한 것이고 난 내 눈물을 말려준 고마 움에 전혀 흥정을 하지 않았을 뿐. 그에게 속았다는 생각도 30루피를 더 낼뻔 했다 해서 분 한 생각도 없었다. 그냥 희란과 내가 아는 사이고 우리가 한국말로 한참을 얘기하니 방값얘기가 나왔을 거라 지레짐작하고 어색한 웃음을 짖는 그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희란이는 한달여 방학기간중 여행와서 유적지가 많은 중부인도를 서둘러 훑고 가는 남들과 달리 남인도를 목표로 여행온 친구였다. 마이소르에서 깨랄라를 거쳐 깐냐꾸마리를 찍고 다시 북으로 올라오는 중이었다. 나는 반대 방향으로 여유롭게 깐냐꾸마리로 향하여 내려가고 있는 중이 었다. 나보다 하루 먼저 왔는데 어두어져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럭키 게스트 하우스서 일하 는 모든 급사들이 나와서 한국여자애가 왔는데 막울고 매우 unhappy하다고 했단다. 그래서 내 방문을 두드렸는데 내가 나와서 심청이 심봉사 만난양 울고불고 했던 것이다. 정신을 차 려보니 청소하는 사람, 밥하는 사람 모두 나와 구경하고 있었다. 창피하게시리.... 희란이와 다시 락시미 롯지로 가서 저녁을 먹기로 하였다. 어쨌든 인기있는 식당이고 New Year's Eve를 맞아 공연을 한다는 벽보를 그 와중에도 읽었기 때문에.... 그렇게 난리궂을 치룬 뒤 다시 찾아간 락시미 롯지는 외국인으로 북적거렸다. 그렇게 사람 이 많으니 나를 못기다리고 내방을 줘버렸을 것이다. 밤이라서 바다는 안보였지만 천막을 친 식당은 맛있는 해물 요리 냄새로 가득했다. 한 통통한 서양 남자가 코를 박고 먹고 있는 음식이 푸짐해 보였다. 그와 가장 비슷할 것 같은 Mixed Seafood를 시키고 앉아있으니 그 곳에서 일을 하는 남자애들이 지나가면서 나를 알은체 했다. 아까 내가 우는 것을 본 모양 이었다." Hey, so you are staying at Laximi II. This is Laximi I. That is Laximi II. Haha. " 나를 비웃는 듯, 실실 웃으며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지들끼리 속닥거리는 것이 영 기분 나빴다. "두고 봐라. 내가 가만 있나. " 두고 봐야 내가 뭘 어쩔 수 있는 것도 없었지만. 희란이랑 둘이 먹기엔 조금 양이 적어 서운했지만 저녁식사를 마칠 즈음 공연이 시작되었 다. 낡고 오래된 전형적인 눈속임에도 모두 전폭적으로 즐기고 호응할 준비가 된 관객들이 있었기에 공연은 상당히 유쾌하게 진행되었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코브라 쇼였다. 길거리에서 보여줄 때는 절대 가까이 가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이 연신 감탄하며 사진 찍기에 열을 올 리니 나도 모르게 그들에 끼어 사진을 찍었다. 난 어찌나 남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지. 나름 대로 줒대 있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여행을 하다보니 내가 얼마나 귀가 얇고 샘이 많고 경쟁심이 많은지 실망스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울었던 일은 다 잊고 희란이랑 깔깔대며 떠들고 공연보고 손 잡고 럭키로 돌아왔다. 그래, 내일이면 난 서른이다. 내가 어렸을 때 생각했던 서른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지금 서울에 있다면 어땠을까? 추운 날씨, 지겨운 직장, 명절 음식 준비하며 집에서 보내야하는 인고의 시간들... 적어도 난 그것들에서 벗어나 내일 내 나이 드디어 서른이 되는 날 남국의 바닷가를 거닐다 서울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바닷가재 먹을 것이다. 가진 것에 감사하자. 그러면 훨씬 행복할 수 있다. 나는 부모님 속 썩이고 시집도 못가고 돈도 많이 없지만 행복할 수 있 다.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할 수 있을까? 2001년 1월 1일 약간 습기가 찼지만 희란이랑 함께 눈뜨는 럭키의 방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오랜만에 써보는 한국말... 희란이는 소원하던 수로유람을 하고 오는 길이라 찬찬히 모든 정보를 주었다. 희란이는 운좋게 뿌네에서 맛사지를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 남매를 만나 더욱 즐겁고 안전한 여행을 했다고 했다. 세상에 어쩌면 그리 할 일이 다양하게 많은지... 난 맛사지를 배울 생각은 죽었 다 깨나도 못했을 텐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당히 전망이 있는 직업인 듯 했다. 마음의 안 정을 위해 심리학적 치료와 병행하는 물리치료의 수준까지 공부해야 하므로 결코 쉽지는 않 겠지만 분명 보람있을 것이다. 위생적이고 깨끗하고 향기로운 환경에서 일할 수 있고 세계 각국 최고로 아름다운 관광지의 일급 호텔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오 누이가 그리 사이 좋은 것은 처음 봤다며 그들과 함께 수로유람을 하며 즐거웠던 일을 풀어 놓았다. 수로 가장자리 나무로 만든 길에 쪼그리고 앉아 엉덩이를 쭉 빼고 물 속에 똥을 싸 빠뜨리던 어린 소년이 배가 지나가자 똥을 싸면서도 손을 열심히 흔들더라는 대목에선 그 장면이 눈에 선해서 둘 다 눈물나게 웃었다. 그래 결심했어. 나도 수로 유람을 꼭 한다. 정희 언니가 알려준 돌조각 가게들은 해변 사원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었는데 전날 희란이 가 와서 흥정을 해 놓아서 어렵지 않게 최저가에 목걸이 줄까지 덤으로 받을 수 있었다. 난 한국의 친구들에게 줄 요량으로 돌고래(Rs15) 10마리를 샀다. 그러나 아무도 이 돌고래를 받지 못했다. 여행이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길 우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에게 하나씩 주었기 때문이다. 미안하다 친구들아. 삼각형으로 세 면에서 다 얼굴이 되는 조각은 내가 기념으로 가지려고 한 개 샀다. 지금도 실에 꿰어 가끔 하고 다닌다. 관광지마다 있는 German Bakery에서 맛난 케익과 함께 라씨를 마시며 한낮의 더위를 피 해 희란이와 많은 얘기를 했다. 마치 내가 대학생이 된 듯 먹고 사는 얘기랑 상관없는 정신 적인, 이상적인 얘기들을 나눴던 것 같다. 이곳 독일 빵집은 옥상식당으로 안쪽에 작은 무대 가 마련되었다. 일하는 사람들은 네팔사람들로 스스로를 뮤지션이라 소개했는데 저녁이면 이곳에서 연주를 하기위해 연습 중이었다. 나른한 오후 간간히 들려오는 기타 소리를 들으 며 선선한 바람이 부는 옥상에서 파라솔 아래 의자에 앉아 세상에 이렇게 착한 사람이 있다 니 감탄스러울만큼 착하고 예쁜 희란이와 달디단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는 내가 태국에 가는줄 아는 가족을 위해 배낭에 넣었던 하늘색 꽃무늬 샬랄라 원 피스를 입고 벼르고 별렀던 바닷가재를 먹으러 나갔다. 희란이도 꼬발람에서 산 노란 블라 우스와 오랜지색 랩스커트를 입고 나왔다. 물론 오랜 인도 여행으로 화장도 못하게 까맣게 탄 얼굴, 바닷바람에 온통 헝클어진 머리, 드레스에 절대 어울릴 수 없는 바타표 조리 슬리 퍼.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내가 차려입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난 서른 살이 된 첫날 거창한 저녁 식사를 위해 최대한 멋지게 차려입고 예쁜척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무지 비싸다는 바닷가재를 먹었다. 큰맘먹고 주문한 바닷가재(Rs500)는 정직하게 껍질채 삶아서 아무런 장식도 양념도 안한 그 본연의 그 모습 그대로 홀로 흰접시에 덩그라니 담겨 나왔다. 그 옆에 흰 쌀밥이 역시 정직한 그 모습 그대로 따라나왔다. 껍질을 쪼개고 나니 역시 먹을 것은 별로 없었다. 꽃게 가 더 맛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는 그닥 오래 걸리지 않았다. 쩝!! 물론 쌀밥이 없었으면 절대 배가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2001년 1월 4일

인도 전문 여행사에서 보았던 다람살라 환타가 이끄는 남인도 팀을 만났다. 첫인상은 좀 뚝뚝하고 세상일에 무관심한 도인 같았는데 만리 타향서 만나니 상당히 친절하고 자상했다. 혼자 여행하며 시달린 얘기를 풀어놓았더니 지겹도록 많이 들은 얘기일텐데도 동정을 표시했다. 희연언니와 경혜씨를 보내고 어쩔까 하던 차에 환타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환타는 내가 게을러서 읽기싫어하는 여행안내서에서 가볼만한 곳을 골라 추천해주었다. 저녁에는 환타와 함께 여행하는 팀원들과 함께 저렴한 바닷가재를 먹고 그들이 묵는 호텔의 옥상에서 수다의 장을 열었다. 학교 선생님들의 애환, 여행담, 어느 여대생의 고백(?)까지 사 람 좋아하고 수다 좋아하는 내가 정말 오랜만에 가져보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별밤 아래 웃고 떠드는 사이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겼다. 혼자 다니면서 해 진 뒤에는 바로 호텔로 돌아가 문 꼭꼭 잠그고 잠을 청했는데... 세상에 이를 어쩌나? 집없는 개들이 사납게 짖어대는 밤길을 되짚어 럭키까지 돌아갈 일을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했지만 워낙 남들에게 신세지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고 불편해하는 성격인지라 혼자 가겠다고 뿌득뿌득 우겼다. 학생들을 아끼는 선생님들과 밤산책을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여대생들, 애꾸눈 강아지에게 매일 달걀을 먹였다는 환타가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원래 나가려고 했던 것처럼 주루룩 나와서 럭키까지 바래다 주셨다. 이후 들은 얘기인데 그날 그들은 해뜨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여러사람 들이 여행하며 마음이 안맞아 고생하는 경우를 많이 봤는데 그렇게 밤새 얘기하고 마말라뿌람 같은 곳에서 일출을 함께 볼 수 있었다니 그들이 정말 부럽다. 럭키는 이미 셔터를 내리고 모두 쿨쿨 자고 있었다. 셔터를 흔들며 꽤 소란스럽게 굴었으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빨리 들어가야 환타와 그 일행이 돌아갈텐데 정말 곤란했다. "Hello, hello, let me in. Anybody there? " 그들이 보는데 영어로 더 떠드는 것도 창피하고. 누군가가 친절하게도 "우리 방에 가서 자야겠다. 그냥 가요."하고 말해주는데 정말 그래야 할까봐 겁이 났다. 나도 모르게 셔터를 앞뒤로 세게 흔들다가 위로 확 잡아 올렸다. 앗! 우리나라 같으면 아래에 의례 자물통을 채웠을텐데 셔터가 스르르 올라갔다. 이렇게 허무할 때가... 럭키의 셔터는 도둑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냥 영업이 끝났다, 우리 모두 잘거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도구일뿐인가보다. 그동안 미련하게 잠기지도 않은 셔터를 흔들며 시끄럽게 굴었던 것이 무안하고 민망하여 난 빨리 인사를 하고 안으로 쏙 들어왔다. 로비를 지나 복도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급사를 깨울까봐 살금살금 내방으로 갔다. 다음날 아침, 팀에서 나와 폰디체리까지 동행을 할 지도 모르는 선생님들을 뵈러 일찍 호텔을 나섰다. 호텔 앞에서 항상 웃통을 벗고 아침 해를 받고 있는 인도 젊은이가 나를 오늘도 어김없이 불러세웠다. 그는 내가 이 호텔에 도착했을때부터 있었고 급사와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아 이곳에서 일하는 줄 알고 호텔에 관련된 것을 물어보았더니 자기도 손님이라며 정색을 했었다. 그 후로 아침 저녁 나를 보면 꼬박 꼬박 인사를 했다. 그는 곱슬머리에 코가 길고 제법 귀엽게 생긴 얼굴을 하고 마른 듯한 몸에 보기 좋게 붙은 근육을 자랑하듯 간편 한 차림으로 어슬렁 거렸다. 인도 남자 특유의 느끼함을 연습하는 단계의 20살 안팎의 애송이였다. 보통 "Good morning, Madam?"으로 시작하는데 오늘은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하고 화난체 하며 물었다. 나는 어이가 없고 당황하여,"What? What do you mean? Didn't I just come out of my room? "했더니 그는 동그란 눈을 가늘게 뜨면서, " When did you come in?"하고 여전히 고자세로 나를 심문하듯 물었다. " I came back about 3 in the morning." 순순히 대답하는 내가 오히려 이상해서 " Why?" 하고 최대한 날카롭게 물었 더니 "I waited for you until 2:30. " "Why?"이번에는 황당함에 내 목소리가 지나치게 높아 지고 찢어졌다. 그랬더니 그는 마치 비장의 카드를 꺼내듯이 이렇게 내뱉었다. "You said see you. " 그리고 멍해 있는 나를 바람난 마누라의 현장을 잡은 야비한 남편처럼 노려보았다. 난 왜 Good morning이라고 대꾸하지 않고 많고 많은 인사중에 See you라고 해서 이런 일을 당할까? 해지면 바로 돌아와 자고 여자들만 만나고 보석 가게서 일하는 현지인이 껄떡 대도 눈길 한 번 안주고 조신하게 다닐때는 내게 간신히 인사 한 마디밖에 못하던 놈이 한국 남자를 만나서 낮에 나가서는 새벽에 들어왔더니 이렇게 나를 쥐잡듯이 하다니... 게다가 그가 가진 근거라는게 겨우 See you라니. "That's just a manner of speech. You cannot be serious. It didn't mean that I was really giong to see you. " 말을 더 하면 할수록 내가 더 구차해지는 것 같고 내가 뭐하고 있는건지.... 그때 럭키 주인 아저씨가 나왔다. 그는 내가 뭔가 불리한 싸움에 말린 것을 알아챘는지 애송이의 등을 찰싹 소리나게 때리면서 인도말로 뭐라고 했다. 그는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아니라도 돈을 내고 묵는 손님도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는 억울한 표정으로 윗도리를 입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럭키 아저씨가 다시 한번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당황스런 맘도 잠시고 생각해보니 쿡쿡 웃음이 새어나왔다. 난 그가 인사외에 할 줄 아는 영어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내나이 서른에 스므살 남짓의 어린애한테 이렇게 말도 안되는 닥달을 당하다니... 게다가 그는 불쾌하지 않게 생겼다. 사실 매끈하고 탱탱한게 꽤 귀여웠다. 추하데도 할 수 없다. 난 기분이 묘한게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결심했다. 되도록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