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PHIADEI
veritasdei
Apologia - To apologize 'Apology'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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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가지 질문되어질 수 있는 사람들의 인식에 대하여서

앞서 언급한 'apologize'라는 것은 영어의 뜻에서는 변명하다는 개념으로 또한 '사과하다'라는 개념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를 하게 되어지는 규정은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라고 함에 따른 인식론적 입장이라고 함에 따른 것입니다.

인식론의 변화라고 함에 있어서는 아폴로기아라는 것이 실재라는 것을 말할 수 없다고 할 때에 정당함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함을 위한 합리성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실재를 말할 수 없는 다만 말하고자 하는 희망에 따른 것으로 사람들의 정적인 정당함을 추구하는 합리성과 동일시 되어지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에 합리성이라고 함을 주장하는 것이 용서를 구하는 사과하다는 그러한 것으로 이 '아폴로기아'를 인식하는 것으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종교개혁때에 칼빈의 실재론에서 비롯되어질 수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접근을 하게 되어지는데 칼빈을 이어받는 자들이 그 실재론을 상식보편적 접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에 대한 것은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재 언급하도록하고 여기서는 여기까지만 언급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이 사실 철학적 입장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그 사실이라고 함 그 존재라고 함은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영미 문학과 신학에서의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은 버틀란트 러셀의 지식론에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이 사물의 본성을 알 수 없다는 것과 그러면서도 직접지라는 지적인 확신은 상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인식론적 문학과 철학을 그리고 그에 따른 신학을 형성해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론적 입장에서는 문학적 어학적 입장에서 반영되어진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 '아폴로기아'라는 이 말도 실재를 말할 수 없다면 용서를 구하는 사과라고 하는 합리성의 개념으로 규정함이 옳다는 그러한 인식을 하게 되었고 지금의 'Apologize'의 영어해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실재론을 말할 수 없는 신학적 개통에서는 '아폴로기아'를 사과하다의 'Apologize'라는 말로 해석하기를 두려워했고 대신 'answer'로 말하게 되었으며 다만 상대적인 변론이라는 개념으로 언급했던 것입니다.
3. 신학에서의 변증학의 위치라고 함의 개념

구 프린스톤 신학에서는 상식보편철학적 입장에서의 변증학을 시도하였고 그러한 가운데서는 진정으로 실재를 말할 수 없는 기본적인 변호정도로 일관하는 점에서 변증학의 입장을 평가절하하였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상대적인 변호라는 것의 실재를 말하지 못한다면 그 변증이라는 개념이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에 두려움과 그것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에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에서 이루어지는 변증학에 있어서는 그 실재론을 달리하는 역사적 사건이 있게 되어집니다. 그것은 메이천이 비록 상식보편적 입장의 변증적 개념을 따르는 변증적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코넬리우스 반틸의 변증적 입장을 취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게할더스 보스의 사상을 따르는 코넬리우스 반틸의 실재론적 접근에서 그 '아폴로기아'를 어떤 실재없는 변명과 사과가 아니라 실재적이며 하나님앞에서의 그 정당함을 따른 바른 증인으로써의 합리적 권세 절대합리론적 입장으로 증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아이러니는 그러한 게할더스 보스의 사상을 존경하였을뿐 그를 이해하는 사람은 적었던 것이며 이것은 역사적으로 인정되어지는 것으로써 웨스트민스터 교수 중에 한 사람이 그를 소개하는 글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신학이라고 함이 청교도적인 개념의 칼빈주의적 개념에서 그 실재론적 입장은 상식보편이라는 개념을 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한 것이 이제는 주님을 사과하는 자리에 서지 않겠다는 그러한 분별없는 언급을 해야하는 자리에 서야 슬픔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에 청교도적인 개념의 칼빈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개혁주의적인 측면에서 실재론을 기반으로한 증거를 하는 종들도 있다고 할 때에 무기력한 신을 세워놓고 인간이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스타일이 아닌 진정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른 가운데서의 합리적 증거의 합당함을 따르는 증거가 또한 있다는 점을 생각하시고 그러한 신학적 배경에서 언급되어지는 비판적 개념이 전부인 것같이 생각하는 어리석음은 우리가 배제하여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함을 입은 자들이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라고 할 때에 그 하나님의 실재론적 그 기반에서의 사실을 말하며 절대 합리적 증거를 그 정당함의 자리에서 스스로 증거하는 자의 모습이라고 함을 말해두겠습니다.

이것은 성경해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때에 성경에 대한 실존적 부인의 입장은 수용하지 못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실존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순환논리적 개념의 개념의 실재를 부정하는 가운데서 자증적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 성경을 근거로한 이 증거의 입장을 비판한다는 것은 액면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해두면서 그것에 대한 합리성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