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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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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21세기 종교 기상도

조선 후기 철학자인 안정복은 당시 밀려들어오던 기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리로 경고했 다. "우리 유교가 자신을 닦는 삶을 추구하고 선을 행하는(修己養生 行善去惡) 이유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따름이지 추호도 죽은 뒤에 복을 구할 뜻은 없습니다. 그런데 서양종교에서는 자신을 닦는 이유가 오로지 천당의 심판을 위한 것이니 이것이 우리 유교와 크게 다른 점입니 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천당과 같은 조건을 바라고 하는 기복신앙은 대중을 미 혹하는 것이라고 안정복은 경고했다. 그는 이같은 점을 염려하면서 기독교는 부흥하지 못할 것 이라고 예측했지만 예상과 달리 기독교는 한국의 주요종교가 되었다. 조선말-일제로 연결되는 과도기에서 대중들은 수양을 할만큼 한가하지 못했다. 현실은 그저 극복하고 싶은 과제였고 극복방법은 없던 시절이었다. 결국 이성이나 현세보다는 감정과 내세 가 대중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마침 시대의 흐름을 읽고 그것을 선교전략으로 삼았던 기독교 는 유교보다 더욱 강한 흡인력을 발휘했다. 안정복의 생각이 미처 그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이처럼 유교가 서구문명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것이 19-20세기 특징이라면 21세기에는 다시 유교가 주요한 종교이념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 종교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여기는 중국 이 21세기 중심국가로 등장하게 될 것이라는 정치적 전망과 함께 유교적 가치관이 21세기에 빛 을 발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함께 묻어 있다. 유교는 교회제도나 교역자 체계를 가진 이른바 제도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유교의 부흥이 소 속 신자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이 말은 유교적 특징들이 21세기라는 시대적 상 황에 더 부합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교회제도보다는 가정중심, 교역자중심보다는 평신도중심, 열광성보다는 엄숙성, 감정적 경건보다는 윤리적 경건, 내세성보다는 공동선의 추구가 21세기 종교 윤리로 자리잡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교적 문화권에 있으면서 기독교의 부흥을 경험한 한국, 특히 교민사회 교회 들은 21세기에 시대정신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19세기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한국인 기독교 지도자를 양성할 때 세 웠던 첫번째 목표는 결코 현지인 지도자(한국인)들을 수준 높게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많 이 가르쳤다가는 그들이 세운 기복적인 선교전략에 차질을 빚게 되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전략이 기분은 나쁘지만 이해는 되는 부분이다. 말했듯이 그 시대는 그러한 세계관이 비집고 들어갈 부분이 있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이다. 아직도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당시 선교사들이 도입했던 감정신앙, 기복신앙, 권위주의를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있다. 게다가 일부 미국교회들의 지극히 미국적인 부흥현상을 한인교회의 부흥기법으로 삼기에 급급한 모습도 보인다. 오히려 사회는 새로운 세계를 가르치 는데, 시대를 앞서 간다고 자처하는 교회는 뒷북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바라 보아야 할 곳 은 하나님의 나라요 예수인데, 서구 기독교와 선교사들에게서 아직도 해법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울 때가 많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했다. 개혁과 변화를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찾았던 종교개혁의 정신도 이와 일치한다. 역사를 보면서 시대를 읽어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드럼과 전자악기로만 교회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외형만 변화하고 의식은 바뀌지 않는 교회의 허약한 체질 은 21세기의 도전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한국일보}(캐나다판) 1998년 3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