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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활과 비움 |
| 지난 94년 조계종정 성철스님이 입적했을
당시 한국사회는 늘 그랬듯이 부의 재분배가 중요 한 사회적
이슈였다. 때마침 성철스님의 입적은 죽음 자체만으로 큰 교훈을
주었다. 남은 것이 라고는 가사(승복) 한 벌과 식기용 목기 하나.
그는 그렇게 갔다. 사람들이 그 죽음의 외적 모습에서 의미를 찾고
있을 때 그가 입적 직전 남긴 한시(漢詩)는 또 한번 관심을 끌었다. {生平欺狂男女群(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였으니) 彌天罪業過須彌(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 산을 지나친다) 活陷阿鼻恨萬端(산채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 구나) 一輪吐紅掛 碧山(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내뱉어서 푸른 산에 걸렸다).}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스님, 아무것도 소유하기를 거부했던 스님이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마 지막 가는 길목에서 지은 시에 그 죄가 수미산(에베레스트산)보다 높아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했을까? 인간의 죄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기독교의 교리로 결론을 내리면 쉽게 이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쉽사리 결론 지을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필자는 당시 기독교 목사로서 이 시에 적지 않은 충격과 도전을 받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구도의 길, 인생을 마감해도 알 수 없는 진리의 길, 그럼에도불구하고 종교 지도자로 지냈던 생을 돌아볼 때 남는 회한, 그러기에 자신의 죽음 뒤에 돌아올 찬사를 예측하면서도 그것 조차도 버거워 비워 버리고자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는 그 겸손의 모습이 도전으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빌립보서 2:5-11은 이른바 케노시스(Kenosis) 기독론의 근거구절이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는 2장 7절의 "비어"라는 말에서 케노시스 기독론이 출발했다. 즉 케노(Keno)라는 말은 "비우다(make empty)", "명예를 없애다(no reputation)"라는 헬라어인데 자신을 비운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등 본체이면서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된 예수님의 모습, 그것도 모자라 결국은 흉악범들에게나 적용되는 십자가 형벌조차도 감수했던 그 분, 그에게는 옷조차 식기조차 무덤조차 남길 것이 없었다. 그 분이 받아야 할 찬사와 존경을 인류의 죄를 뒤집어 쓴 죽음으로 밖에 보여주지 못한 분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의 끝에 부활이 있었다. 결국 케노시스 기독론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극치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겸손이 중요한 종교적 미덕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겸손을 내가 아닌 다른 이에서부터 찾을 때 이미 겸손은 사라진다. 겸손은 삶 속에서 내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의 뜻대로 비워가고 있느냐 하는, 다시말해 나에게서부터 출발하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우지 못하는 종교인들을 보게 된다. 입으로는 순종과 겸손을 외치며 실제로 자신은 신의 지위보다 더 높은 곳에서 군림하려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것은 비우지 않으 면서 남에게만 비우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있다. 마치 구원이 자기 말한마디에 달려있는 것처럼 윽박지르는 사람도 있다. 나는 의인 너는 죄인이라는 도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겸손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다. 부활 역시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다. {한국일보}(캐나다판) 1998년 4월 16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