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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세기말을 버티는 힘 |
| 한국사회에 시한부종말론이 기승을 부리던
92년, 필자는 연구차원에서 그 교인들을 만나면서 이들이 종교적
확신에 가득 찬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대사회에서 소외된" 등등의 상투적인 사회적 평가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필자를 불쌍 히 여겨
휴거에 함께 참여하자고 이끄는 다정함(?)도 갖고 있었다. 1999년,
종말이 회자된다. 10진법을 쓰는 문화권에서 9가 불완전한 숫자라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다. 따라서 노스트라다무스가 자기 시대에서
가장 가까운 1999년을 종말로 지정한 것 은 일종의 숫자놀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기말이라는 시대적 특수성이 어울려
시한부종말 론자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20세기의 종점이 1999년이냐
2000년이냐 하는 설이 분분한 만큼 이들은 앞으로 2년의 여유를 가진
셈이다. 그 2년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업과 가정 과 심지어는
목숨까지 포기할 것인가? "성서에 그날은 아무도 모른다고 쓰여있다"라는 논리로는 이들을 바로 잡아줄 수 없다. 이들도 아무도 모른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자신들의 교주만은 독특한 방법으로 알아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일 종말이 와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접근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으나 이 말은 현재를 사랑하는 인간의 의지가 전제되었을 때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다. 인간의 의지를 중시한 스피노자가 허무주의철학자인 니체와 같은 부류의 철학자로 구분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세에 대한 사랑의 의지를 잃는 순간 사람들은 허무로 빠져들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면서 또 하나 느낀 점은 이들이 성취욕이 강한 사람들이라는 점이 었다. "사과나무를 심기"보다는 천국에 가기 위해 짐을 싸면서 천국이라는 공간을 선점하려는, 종말의 비극을 먼저 예측하고 안전한 곳에 투자하려는 성취욕 강한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기성교회의 책임이 부각된다. 기성교회는 희망이라는 이름아래 얼마나 많은 욕망을 가르쳐 왔는 가? 물질과 출세가 한국교회의 주요한 미래관이었음을 우리는 부인하지 못한다. 교회의 가르 침에 충실했던 교인들이 이 땅에서 소망했던 것들이 모두 채워진 뒤에 찾아온 허무감 때문에 진정한 종말에 관심을 가지면 "아무도 모른다"라거나 "매일 열심히 살면 된다"는 말로 위기를 벗어나려고 한다. 교회는 허무와 상실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한다. 모든 것을 다 가지려는 욕망이 신도들을 헛 된 종말의 벼랑으로 내몬다. 좋지 않은 현실이 다가와도 왜곡과 욕망으로 현실을 극복하기보다 는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며 견뎌야 한다는 진리를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구약성서의 {전도서}는 온갖 허무적인 용어로 쓰여있지만 그 허무 속에서 진정한 희망의 길을 제시한다. 교회가 희망과 욕망을 구별해줄 때 교인들은 세기말을 바르게 버텨 나가는 힘을 얻게 될 것 이다. {중앙일보}(L.A판) 1999년 2월 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