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녀가 거기 서 있는 모습을 바라 보았다


1.

그 때, 그녀는 열일곱 살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거다. 그 날 무대 위에 서서, 내가 흘깃 그녀를 쳐다 보았을 때, 그 잠시 잠깐 동안의 시간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속에 남아 있다.

무대 아래에 가득한 학생들의 환호성이 온통 가득했고, 강당안을 가득 채운 박수 소리가 귀가 멍멍하게 울려퍼졌다. 분명 바람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우리 친한 친구들의 과장된 소란이 많이 섞여 있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들의 즐거운, 그리고 예상 외로 감동에 젖은 듯한 열광은 모두 온전히 우리에게 쏟아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환한 조명이 한가득 우리를 비추었을 때, 우리는 그만큼 가득하게 득의양양히 웃고 있어야 했다.

일단 그 비슷한 표정을 나는 얼굴 위에 만들었다. 그런데, 도무지 그런 표정을 지어도 되는 것인가 싶어서 나는 살짝 민주를 쳐다 본 것이었다. 사실상 우리의 대장이나 다름없는 그녀가 이 상황에서 시원하게 웃을 것인가? 박민주는 살짝 웃는 듯 하긴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조명에 반사되는 탓에 그 물기가 반짝이는 눈동자의 모습은 더 잘 보였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는, 그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은 사람 특유의 기묘한 표정을,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박민주의 얼굴에서 찾으리라곤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손뼉치고 있는 가운데에서 그럴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녀는 진짜, 훅 불면, 산산조각 나면서 모래먼지로 부서져 내릴 것 같았다.

30초 후, 손잡고 무대 인사를 하고 무대 뒤로 들어왔을 때, 박민주는 훅 불지도 않았는데 와르르 무너졌다. 그녀는 털썩 주저앉아서, 꺼이꺼이 소리를 내면서 울기 시작했다. 박민주는 엉엉 우는 소리 중에 간간이, "너희들 한테 미안해. 진짜 미안해." 하는 소리만 완전히 뭉개진 발음으로 섞을 뿐,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넋을 잃고 펑펑 울었다. 그걸 뭐 어떻게 위로해 주면 좋을 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 나는 그 때 참 난감했다. 그렇게 난감한 표정으로 나는 옆에 계속 있었다.

애초에 학교 음악제에서 오페라를 해보자는, 이 이빨도 안들어가는, 안들어가도 어림 반푼어치도 안들어가는, 말도 안되는 시도에 내가 발을 들여 놓은 것도 사실 바로 박민주의 치밀한 계획 때문이었다.

어느 학교를 가든지 노래를 굉장히 잘부르거나, 유행하는 10대 댄스 그룹과 춤을 똑같이 춰서 인기가 있는 아이들은 있기 마련이다. 우리 학교의 음악제 역시 그런 아이들의 활약 덕분으로 나름대로 꽤나 인기있는 행사였다. 그리하여 이 행사는 항상 머라이어 캐리 노래를 기막히게 부르는 친구와, 예술고 학생 수준으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6번을 연주하는 친구가 50 대 50 정도의 비율로 섞인 모양새로 진행되어 나갔다.

당연히, 가끔 집에 가는 길에 중학교 때 유행한 노래 휘파람이나 부는 나는 그런 재주와는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다른 많은 학생들과 함께 관객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다하는 것으로 음악제를 빛나게 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음악제 예선을 2주일 앞둔 날이었다. 날씨가 따뜻하기 그지없는 늦봄의 오후 수업은 굉장히, 심하게, 극도로 졸리다. 따라서 그런 수업이 끝나고 나면, 커튼이 펄럭이는 창가에서 따사로운 봄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가운데, 수많은 아이들이 일제히 책상 위에 업드려서, 그 짧은 쉬는 시간 동안 정신없이 경쟁적으로 퍼질러져 자는 장관을 목도할 수 있다.

비교적 잠이 없는 편인 나와, 항상 나와 헛농담을 주고 받는 상대인 민호는 그 광경을 감상하면서, 포르셰911을 몰기에 어울리는 사람은 서로 자기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박민주와 장난영이 등장했다. 둘은 우리 둘에게 말했다.

"야, 너희 둘 한테 우리가 제안을 하나 할게 있는데."

굉장히 어색한 말투와 단어의 조합이었다. 나는 그 때까지 얘네들과 별로 친하지 않았다. 서먹함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박민주는 남에게 싫은 소리라고는 단 한 마디로 하지 않는 아이로, - 사실, 나와 민호등등의 인간들이 보기에 그런 아이로, - 조금의 서슴거림없이 아주 외교적인 방긋웃는 웃음과 함께 말을 이어갔다.

"음악제?"
"너, 바이올린 좀 배웠잖아."
"배우기야 했지......"
"너도, 피아노 칠 줄 알지 않냐?"
"피아노?"

내용인 즉슨 박민주와 장난영이 학교 음악제에서 오페라를 해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는데, 우리가 끼어들라는 것이었다. 어려운 노래와 연주로 기교를 뽐내는 부분은 자기들이 다 할테니까, 평소에 헛소리 잘 하기로 이름난 우리들은 중간중간 바람처럼 나타나서 웃기는 장면만 좀 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자기들은 베토벤 소나타 16번파인데, 그러면 재미없어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우리가 나타나서 머라이어 캐리 성대 모사 비슷한 것을 잠깐잠깐 하면 완벽하다는 것이었다.

"좀 생각할 시간을 줘."

민호는 그렇게 대답했다. 꼭 영화대사 같은 말을 한다고 왠지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민호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박민주와 장난영이 간 뒤에, 민호가 한 이야기에 따르면 박민주에게는 또다른 공산도 있었다. 학교 교내 잔치인 이런 행사에서 "흥행"을 하는데 꼭 필요한 것 중에 하나는 실력이 아닌 학생 개인의 인기였다. 굉장히 인간 관계가 좋거나 인기가 많은 아이가 나와서 설치면 그만큼 "의리상의 호응"이 크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객석 전체의 분위기가 좋아져서, 결국 환호와 열광으로 연결되기가 쉽다.

그런관점에서 보면, 민호를 섭외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었다. 민호는 인기가 많은 아이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훨친한 미남인 그 녀석은 공부도 무척 잘했고, 또 우리반 반장이었다. 그런 아이는 재수 없어 보일 가능성도 있는데, 워낙에 나와 얼빠진 농담을 하는데 여가시간을 다 쏟는 녀석의 성격상, 또한 넉넉하고 여유로운 구석이 많아 보였다.

더하기, 목소리가 아주 믿음직스럽고 아나운서처럼 착착 와닿았다. 그리하여 매 학기가 바뀔 때쯤이면 후배 여학생들의 편지가 참으로 곳곳에 숨겨진채 발견되었고, 수업시간에 안타까운 눈빛으로 민호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여급우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뭐 내가 알기로 세 명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민호보다 인물은 좀 못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긴 한다만 과학과 수학을 빼면 민호 보다는 꽤 쳐지는 편이다. 반장보다는 주번체질이었고, 쓸데없이 옛날 노래나 많이 흥얼거리고 다니는 놈이었다. 내 나름대로는 참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뭔가 많이 헛소리를 하긴하는데 민호와 몇몇 동지들 외에, 그 천재적인 유머감각을 폭넓게 세상이 이해해 주는 편은 아니다. 한 마디로 나는 민호의 똘마니 비슷하게 보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내가 민호 만큼이나 학교 학생들이 모두 아는 사람이 된 배경은 좀 허무하다. 중학교 때 나는 "사격부"였고, 공기소총 사격을 꽤 잘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항상 내가 고위 공무원이 되어 비서들을 거느리고 다니며 개폼을 잡기를 바랬고, 나의 어머니는 항상 내가 인기 변호사가 되어 벤츠CLS를 몰고 다니며 개폼을 잡기를 바랬다. 당연히 내 아버지는 고위 공무원의 비서고 내 어머니는 로펌의 사무직원이었다. 덕분에 나는 외국어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공기소총 사격은 접었다.

그러나, 전국선수권 대회 소식을 보고 한 번 재미삼아 해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고등학교 1학년때에도 대회에는 나갔다. 지도 교사는 군대에서 저격수로 있었다는 영어선생님이었고, 나는 "생활체육부"라는 특수활동반 소속으로 대회에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그만, 얼떨결에 굉장히 좋은 성적을 올려버렸고, 그 덕분에 놀랍게도 나는 국가 대표팀이 되어 아시안 게임에 한 번 나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아시안 게임에서 나는 8위를 했고, 강초현이나 진종오 같은 어마어마한 총잡이들에 비하면 나는 발가락으로 총을 쏘는 수준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이야기를 쓸데없이 길게 했는데, 결론은 이거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아시안 게임을 하면서 나는 텔레비전에 꽤 오랫동안 나왔던 것이다. 10대 고등학생들에게 그 정도면 전교 차원의 선풍이 될 이유로 충분했다. 대회 전에 연예인 인기순위 12위까지 오른 여자 아나운서가 나를 찾아와 인터뷰를 했던 것은 결정타였다.

뭐, 사실, 인물이 딱히 좋지도 않고, 또 무슨 축구선수나 농구선수도 아니고, 공기소총과 소총복사를 잘하는 사람이, 그것도 외국어 고등학교에서 뭐 오래가겠냐만은, 어쨌거나 그런저런 사정으로 학교에 "사격부"도 생기고 몇몇 성격특이한 후배들은 나를 사격부의 아버지쯤으로 괜히 자기들끼리 추앙하며 몰려다니고 그러기도 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한다고 해서 '오페라'같은게 먹힐까?"
"박민주랑 장난영이 진짜 잘하기만 한다면."
"걔네들 무슨 기획사 연습실 다니지 않냐? 연예인될려고. 나름대로 실력이 있을 수도 있긴 한데..."

민호는 고민 중이었다. 괜히 나간다고 설치다가 예선탈락 해버리면, 그의 빛나는 인기와 경력에 상당한 흠집이 될지도 모르지 않은가. 분명 1학년의 예진이 선영이 은혜 같은 애들이 예선 전날 응원한다면서 떡이나 초콜렛이나 그런 걸 갖다 줄 것인데, 그러고 나서 어림없이 떨어지면 좀 난감하지 않겠는가.

"야, 그냥 해보자. 재밌겠잖어."

나는 그렇게 설득하여, 발을 들여 놓을까 말까하고 있던 민호의 발목을 확 잡아다 끌었다. 우리는 둘 다 고전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었고, 간만에 그렇게 무대위에 올라가서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장난영을 은근히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 쓰고 보니, 아. 음. 쑥스럽다.

박민주와 장난영은 같은 기획사 연습실에 자주 다니는 단짝이었다. 아직 어디 방송에 출연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학교에서 그 아이들의 솜씨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도 아니니, 우리는 둘이 얼마나 굉장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박민주는 꽤 이뻤고, 장난영은 특급 이뻤다는 것이다. 사실 장난영이 이쁘다는 나의 주장에 많은 다른 아이들은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이 되긴한다.

말하자면, 내가 그 때까지 난영에게 한 마디도 진지하게 말을 걸어보지 못했던 까닭은,

"눈이 삐었냐? 뭐 쓸데 없이 난영이 같은 애한테 수작걸다가 채이고 난리냐. 아이고 라식수술 좀 받아라. 라섹도 괜찮고..."

하는 학우들의 맹렬한 비난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난영이야 말로, 가장 전형적이고도 표준적인 미인상이거늘. 도대체 김희선이나 이승연에 열광하는 이 대중의 미적 기호는 얼마나 왜곡되어 있냔말이다. 하여간 그런 이유로, 나는 쓸데 없이 장난영과 관련된 모든 일에 굉장히 어색하게 굴었다. 이를테면, 며칠 전에 과학 숙제가 무슨 요일까지냐고 그녀가 물어보는 데 대해 대답하는 일만 해도 그렇게 긴장될 수 없었던 것이다.

같이 공연을 준비하고 연습하는 것은 훌륭한 좋은 기회일 것이다. 자연스럽게 난영이와 가까워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 고난과 역경을 헤치며 뭔가 멋진 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영화처럼 그럴듯한 사랑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래, 솔직하게 고백하겠다. 박민주가 준비한 오페라 프로젝트에, 나는 명명백백한 흑심을 품고 뛰어든 것이었다. 그것도 멀끔한 내 친구 민호까지 끌어들이면서 말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장난영을 이용해서 내가 민호와 함께 기꺼이 이 일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게 한 것 역시, 박민주가 만든 계획의 일부였다는 의심도 좀 생긴다.

"이게, 악보거든. 니가 피아노를 하고, 민호가 바이올린을 해. 나도 바이올린을 하고, 난영이가 첼로를 하는거지."

그 날 수업이 다 끝나고, 박민주는 우리 앞에 악보를 내 밀었다. 민주는 꽤 자신감에 차 있는 목소리였다. 그녀가 고른 오페라는 오펜바흐의 "호프만 이야기"였다. 굉장히 긴 그 오페라에서 박민주는 올랑피아의 이야기와 안토니아의 이야기를 섞어서 짧고 강하게 줄여 놓았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가 받은 오페라의 내용은, "노래를 하면 고장나서 죽어버리고 마는 자동인형 아가씨와, 이 인형을 사랑하게 되는 불쌍한 남자 호프만"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노래는 이렇게 되고, 그 다음 노래는 여기서 나오는 거지. 그 다음에 너희 둘이 나타나고."

박민주는 음악실에서 피아노로 몇 군데 소리를 짚어가면서 한 20분쯤 되는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그녀의 설명은 굉장히 열정적이었고, 들으면서 보니까, 과연 꽤 그럴듯하게 재미있을 듯 하기도 했다. 노래 가사 또한 깔끔하고 운율이 잘 맞게 번역되어 있었다. 박민주 혼자서 한 일 치고는 대단했다.

"일단 내일 모레 저녁까지 자기 부분을 연습하고, 그 때 만나서 같이 한 번 맞춰보자."

박민주는 민호를 남자 주인공인 호프만으로 지명했고, 자신이 여자 주인공인 올랑피아를 맡았다. 장난영은 올랑피아의 개발자인 미라클 박사 역을 맡았고, 나는 2시간이 넘는 오페라를 20분으로 줄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새로이 창작된 "에이저"라는 인물이 되었다.

그 이틀 후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같이 연습하기 시작했다. 일단 단순하고 시끄러운 옛날 록큰롤 반주를 재미삼아 두들기던 나나, 초등학교 4학년 이후로 바이올린을 때려치운 민호에 비해서 박민주와 장난영의 실력은 월등했다. 박민주의 바이올린은 매끄러웠고, 장난영의 첼로는 사뿐사뿐 딱떨어지게 박민주의 바이올린과 어우러졌다. 아직 모든 노래들이 연습하는 수준이었긴 하지만 기본기가 충분한 박민주의 솜씨는 우리와는 격이 달랐다.

하여간 남은 2주일의 시간 동안 우리는 꽤 열심히 연습을 했다. 수업을 마치고 함께 모여서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하는 것은 재미있기도 했다. 그랬거니와 또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보람도 상당했다.

"그 부분에서 소리를 너무 잡아 끌지 말고, 그냥 그 앞부분을 좀 조용하게 하다가 그 때 요 두 마디에서 확 크레센도로 키우는 거야."

더하기, 박민주의 훈련은 날이 갈 수록 우리의 솜씨를 향상시켰다. 그건 연습하는 우리로서도 바로바로 느낄 수 있는 즐거운 현상이었다.

20분의 오페라 중에 나와 민호는 한 번 나타나서 난리치다가 사라지고, 두 번째 다시 나타나서 난리치고 사라지고, 두 장면을 합해서 한 5분쯤이 된다. 우리는 정신없이 요란한 만담 코메디쇼처럼 오락가락 멜로디를 주고 받으며 빠른 연주를 하게 되는데, 내용 자체도 웃기고 재미있었고, 노래도 아주 신나고 좋았다.

처음에는 어설픈 개그프로그램 모방처럼 보였던 우리의 연주는 연습을 거듭할 수록 장단이 잘 들어맞는 중창이 되어갔고, 말 할 수 없이 궁색하던 나의 피아노 연주도 차츰 개선되어 나갔다.

특히 민호의 활약은 대단했다. 우리가 하는 부분은 전체적으로 농담과 코메디였다. 그 절정부분에서 민호의 바이올린 연주는 나의 막나가는 피아노 코드에 얹혀져서 굉장히 빠르고 힘들게 휘몰아치게 된다.

"이걸 힘들어하고, 실수도 막하고 엉망으로 꼬이게 하면, 잘 하면 굉장히 웃길거야."

박민주는 애초에 그 장면에서 격조 넘치는 턱시도를 차려입은 코메디언이 무대 중앙에 서서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의외로 숟가락 장단으로 "저고리 고름 말아쥐고서~"를 부르는 그런 류의 웃음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민호쯤 되는 건실해 보이기 그지 없는 모범생이 그렇게 망가지면 굉장히 더 웃길 것이라고 본 것이다.

"야... 그걸 내가 어떻게 하냐. 쪽팔리는데..."

민호는 계속 난처해하면서 그 부분의 연습을 미루었다. 그러던 어느날 민호는 집에 가서 테이프를 들으며 연습한 것을 녹음해 왔다고 했다. 민호의 카세트가 돌아가자 우리는 숨죽여 그 소리를 들었다.

매끄러운 솜씨의 CD에서 떠낸 연주가 먼저 흘러나왔다. 우리는 뒤이어 나올 민호의 웃긴 연주를 기다렸다. 그런데 더 이상 아무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테이프는 툭 잘리며 끝이 났다.

"어떻냐?"

민호가 불안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 보았다. 그제서야 우리는 알 수 있었다. CD의 연주였던 줄 알았던 그 소리는, 사실은 민호가 직접 연주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민호는 자기가 연주한 것을 녹음해서 그냥 들려줬는데, 우리는 그 연주가 너무 잘 되어 있어서, 민호가 연주한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저 이 다음에 민호의 "웃긴 연주"가 이제 이어지겠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야, 죽인다."
"오-!"

우리는 정말 감동했다. 민호는 고개를 들고 씨익 웃었다. 예상 외로 민호의 실력이 굉장했기 때문에, 박민주는 그 웃긴 부분을 웃긴 부분이 아니라, 진지하게 멋있는 부분으로 바꾸기로 했다. 잘모르는 내가 듣기에도 민호의 그 때 그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2주일이 지나가고 예선이 다가왔다. 전체 참가한 팀은 20팀이었고, 이걸 A조와 B조로 나누어서 각조에서 두 팀씩이 본선에 나가게 된다. 본선은 2학기초 가을에, 모든 학생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강당에서 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선 본선에는 나가야지 뭔가 재미있게 쇼를 펼쳐본다는 애초의 계획을 달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속한 A조에는 "캐번스"라는 록밴드가 있었다. 4인조 밴드인 녀석들은 일종의 록메들리 같은 것을 기획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캐번스의 멤버 중에서, 진수나 두성이와는 꽤 친해서 대강의 내용을 눈치챌 수 있긴 했다. 하지만 경쟁은 경쟁인지라 구체적인 사정을 알 수는 없었다. 캐번스는 인기도 상당하거니와 솜씨도 거의 교내 최강급이라는 것만은 기정 사실이었다.

우리는 A조의 마지막으로 편성되었다. 심사위원장인 음악선생님과 한 때 밴드활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수학선생님 한 분이 심사를 맡았다. 음악실에서 우리는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모이기로 되어 있었다. 예선을 한 20분쯤 앞두고 나는 진수에게 들은 첩보를 전했다.

"캐번스 애들은 옷도 다 맞춰입고 머리도 염색한다던데."
"걔네들은 원래부터 같이 하던 애들이니까 그냥 하던데로 하면 되겠지."
"뭐, 어차피 예선 때는 무대장치랑 의상같은 건 할 필요 없다고 하셨잖아."
"그래도 그런거 하면 확실히 눈에 뜨일 텐데."
"그러면, 올랑피아가 자동인형이잖아. 자동인형 분장이라도 하면 어떻겠냐?"

그렇게 하여, 불과 20분을 앞두고 나는 정신없이 교무실로 뛰어가서 국어 선생님에게 파우더와 다른 화장품들을 빌려왔고, 그 동안 어딘가에서 민호는 포스터 물감과 붓을 구해왔다. 그리고 우리는 음악실에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구석 으슥한 곳에 모였다.

"자동인형이니까... 눈 감아봐."

나는 핏기없이 하얀 얼굴로 박민주의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물감을 찍어, 기괴해 보이면서도, "인형같아 보이게" 그녀의 얼굴에 붓칠을 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내가 분장을 급조하는 그 순간, 이상하게 우리 모두는 굉장히 조용해졌다. 민주는 예선을 앞두고 나름대로 살짝 긴장되는지 - 갑자기 끼어들어서 노래와 연주연습만 했던 우리와는 달리 그녀는 꽤 긴시간 준비한 것이 엄청 많지 않았는가. - 호흡이 약간 거친 것 처럼 보였다.

우리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파란색 물감을 눈 근처에 다 칠하고 붓을 떼었다. 그녀는 가만히 말했다.

"간지러워"

나는 붓을 손수건에 닦았다.

"말하지마. 실수하면 다 망친다."

곧 마무리 붓질을 좀 더 대어서, 얼굴 분장을 마쳤다. 그녀는 눈을 떴다. 장난스럽게 한 번 웃고는, 눈을 동그랗게 하고 살짝 그로테스크한 "인형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야, 그럴듯하다."
"어, 시간 지났다. 빨리 가자."

내가 민주의 표정에 감탄하고, 동시에 민호는 시계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후다닥 일어나 음악실로 내달려 갔다.

"야, 야, 잠깐만. 화이팅-"

박민주는 우리 등 뒤에다 대고 소리쳤다. 돌아 보니 그녀는 손을 내밀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모여서 박민주의 손등위에 각자의 손을 포개었다. 우리는 손을 모으고 서로의 얼굴을 한번씩 바라 보았다.

"하나 둘 셋,"
"화이팅!"

흥분되면서도 나는 무척 즐겁다는 생각을 했다.

예선에서 연주를 하는 열 팀 중에 두 팀만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좀 실력이 모자라는 팀이 있긴 했지만, 적어도 캐번스는 연주도 굉장히 멋졌고, 내용 구성도 아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다.

캐번스가 한 자리를 차지하면 남은 한 자리를 두고 나머지 아홉팀이 다투게 될 진데, 구성지게 소울 멜로디를 소화해내던 1학년짜리 여학생과 건조하지만 훌륭한 솜씨로 오보에를 불던 친구는 떨어뜨리기에는 아까운 실력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우리는 소울 소녀와 오보에 소년을 넘어뜨려야만 했다. 마침내 우리 차례가 되었다. '잘하자, 잘하자'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우선 박민주와 장난영이 먼저 무대에 나갔다.

"올랑피아, 넌 노래를 해서는 안 돼. 그러면 네 양전자 두뇌는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려 버릴 것이야."
"아, 푸른 하늘이여, 아름다운 데이지 꽃."

두 사람의 현악 연주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매끄럽게 이어져나갔다. 한 2천번쯤은 연습한 듯한 솜씨로 보일만큼 능숙하고도 떨림없이 잘 이어졌다. 박민주의 초점없는 눈과 비틀거리는 인형 연기는 일품이었고, 신경질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박사를 연기한 난영이는 굉장히 귀여워 보였다.

"잠깐, 저기 누가 오고 있어."

장난영이 그렇게 말했다. 나와 민호가 나갈 차례였다. 우리는 바람처럼 들이닥쳤다. 떨림이고 긴장이고 할 새도 없이 정신없이 빠르게 우리는 말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거기에 휘몰아치듯 연주가 끼여들었다.

"사랑이라고? 사랑?"

내 피아노 연주가 "I'm Down" 같은 노래처럼 막 달려나가고, 거기에 따라가서 정신없이 민호의 바이올린이 따라붙었다. 지금까지 들은 민호의 솜씨 중에 최고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연습 때의 실력을 충분히 뽐낸 연주로 민호는 훌륭히 소리를 마무리 했다.

연주가 "고전음악 연주"라고 차례에 적혀 있는 것에 비해서는 기대 이상으로 박진감이 넘치고 신났던지, 그리고 그 누구도 민호가 이렇게 바이올린 연주를 잘 하리라고는 상상한 적이 없어서 놀랐던지, 우리의 첫번째 등장부분이 끝나자, 예선에 참가한 우리의 경쟁자들이 자연스레 박수를 쳐 주었다. 지금까지 관객들이라고는 서로 경쟁자들뿐인 예선에서, 박수가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일단 나는 면피는 했구나 하는 안심을 했다.

그리고, 극적으로, 우리의 예선 공연은 믿기 어려울 만큼 심하게 훌륭한 박민주의 화려한 콜로라투라 노래로 끝을 맺었다.

그녀의 바이올린 연주가 좋기도 했거니와, 노래 솜씨는, 앞서서 고음이 많이 들어간 가곡을 불렀던 합창부 여학생의 솜씨에 조금도 빠지지 않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정말로 자동인형인 듯이 기묘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깜빡하면서 율동감있게 펼치는 연기와 어우러지자, 2주일 동안 연습한 고등학생의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는 뭔가가 나왔다.

'박민주... 다 숨겨둔 비장의 무기가 있었네.'

나는 공연 중에 혀를 내둘렀다. 아마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줄기차게 연습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예선 통과자는 캐번스와 우리의 자랑스런 "호프만 이야기 팀"이었다. 우리 팀 이름이 불려지자, 우리는 주먹을 불끈 쥐며 웃었다. 재능이 뛰어난 소울 소녀와 오보에 소년은 현란한 팀웍으로 무장한 두 떼거리 그룹앞에 아쉬운 고배를 들었던 것이다.

가을의 음악제 본선 참가가 결정되자, 우리는 여름방학 동안 계속 연습을 하자고 결의했다. 사실 박민주가 나서서 밀어붙인 것이다.

"기왕하는거 잘해서 1등하면 좋지 않겠냐? 의상도 만들고 소도구도 어떻게 잘 한 번 해보자."

박민주는 애초부터 1등을 할 계획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 무더운 여름이 찾아옴과 동시에, 우리는 의상 제작에 착수해야 했다.

"종이로 앞 뒤를 만든 다음에 가운데를 옷핀 같은 걸로 집으면 괜찮지 않을까?"
"종이로 하면 되게 고생해서 만들어도 좀 빈티나 보이던데."
"옷은 천으로 해야해."
"그런데 천 떠와서 뭘 한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
"그렇다고 호프만 옷을 종이로 대강하면 그냥 애들 장난처럼 우스워 보일텐데."
"그게 문제긴 하지."

어느새 자연스레, 민호와 나는 단지 중간에 등장해서 잠시 웃기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페라 전체에서 중요한 한 축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민호의 연주가 몰고온 반응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이었고, 또 우리 모두 연습을 하면 할 수록, 실력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냥 우습게 해서 웃기고 마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멋진 연주를 할만한 실력이 있다고 어느새 우리는 믿게 되었다.

박민주는 여름 방학이 시작한 삼일째 되는 날, 채린이라는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내가 도와 줄께."

채린이는 우리의 의상과 소도구를 맡는다고 했다. 미술에는, 정확히 말하면 모든 것의 디자인에 일가견이 있던 채린이는 그 때까지, 나나 민호와는 물론이거니와 민주나 난영이와도 거의 아무런 친분이 없는 아이였다.

아니 사실 채린이와 민주는 좀 사이가 안좋다면 안좋을 수도 있었다. 무슨 사건과 무슨 사건, 혹은 어떤 날과 다른 날의 일을 많이 거론하는데, 내가 보기에 간단히 요약하면, 채린이가 좋아하는 우인 선배라는 사람이 민주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기 때문이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박민주는 채린을 어떻게 섭외해서 우리에게 데려왔던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박민주의 수완이 어떻게든 또 한번 발휘 되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채린이는 굉장히 열성적으로 우리 일을 도왔다.

"종이로 만드는 부분은, 만든 다음에 비닐을 잘라서 씌우면 돼. 그러면 조명을 받아서 반짝반짝반짝 빛나거든. 그럼 종이도 꽤 그럴 듯해 보여."
"오, 반짝반짝."
"반짝반짝 아이디어 좋네."

채린이는 다음날 굉장히 멋진 붓과 물감을 들고 나타났고, 그 다음날은 이상하게 생긴 가위와 작은 재봉틀을 들고 나타났다. 그 다음날은 온갖 화보와 자료집을 들고 나타났고, 그 다음 날은 갖은 철사, 가죽, 솜 등등을 들고 나타났다. 방학이라서 텅빈 교실의 한 사분의 일쯤이 순식간에 온갖 재료들로 가득찼고, 우리는 채린의 지시를 받아 매일 두시간씩 뭘 자르고 붙이고 베껴 그리고 그런 일을 했다.

한 편 연주 연습도 차근차근 진행되어 나갔다. 음악실은 방학중에는 합창부의 연습실로 쓰이고 있었고, 방학때에도 나와서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교실에서 "다이아몬드는 빛나고"를 불러 댈 수는 없었다. 같이 장단 맞추는 부분이 많은 나와 민호 그리고 민주와 난영이는 둘둘씩 어딘가 연습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사라졌고, 그렇게 연습을 하고는 저녁에 모여서 다시 민주의 조언을 듣곤 했다.

나와 민호는 학교 뒷산을 좀 올라가서 돌아간 숲에서 노래를 하기로 했다. 산에 들어가서 노래를 연습한다는 것이, 무슨 대가의 판소리 연마 비슷한 것 같아서 재미있기도 했거니와, 거기서 노래를 하면 산속과 앞쪽의 아파트 단지에 소리가 울리면서 우리가 내는 소리가 상당히 신비롭게 들렸다.

덕분에 그 학교 옆 아파트 단지에는 산에서 귀신 노랫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방학 중반쯤에 같은 반 친구가 자기 어머니가 귀신 노래 들었다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 줄 때, 우리는 무척 즐거워 하면서 그 정체를 설명해 주었다.

방학 동안의 연습은 그렇게 좀 지루하지만 차근차근히 진행되어 나갔다. 그리고 그러면서 우리는 그냥 뭘 해보겠다는 고등학생 무리에서, 정말로 뭘 좀 하는 예술가 비슷한 것으로 조금씩 바뀌어 나갔다.

사실 방학 중에 한 가지 사건이 있긴 했다. 그 시초는 날씨가 너무 더워서 우리가 굉장히 지쳤다는 데서 출발한다. 엄청 더운 날 우리는 여느 때처럼 학교에 모였다.

"민주가 한 삼십분쯤 늦는데. 아는 선배한테 부탁해서 악보 고친거 받아 온다고."

삼십분의 비는 시간 동안 우리는 "오늘 너무 덥다"라는 주제로 늘어져 있었다. 그런 중에, 난영이의 제안이 사건을 발단에서 전개로 가져갔다.

"우리 민주 늦게 온다는데, 그 동안 학교 밑에 내려가서 팥빙수나 한 그릇씩 사먹으까?"
"팥빙수 좋겠다. 가자 가자."

그리하여 우리 셋은 팥빙수를 먹으러 학교 밑에 내려갔다. 팥빙수를 먹고 있는데, 제과점 앞에 버스들이 멈춰섰다 지나가는 것을 보고, 민호가 말했다.

"야, 우리 그냥 오늘 확 땡땡이 치고 시내나가서 영화나 보까?"
"영화?"
"나 우리 아버지한테 받은 공짜표 석 장 있는데. 그 요즘에 벤 애플랙 나오는 영화 있잖어. 그거."
"어. 나 벤 애플렉 되게 좋아하는데."

민호의 제안에 난영이는 그렇게 맞장구를 쳤다.

"야, 잠깐만 그럼 민주는?"
"아.. 몰라몰라. 오늘 더워서 진짜 뭐 하기 싫다."

순간적으로 일탈의 묘미가 우리를 휘감았다. 낮에 이렇게 학교에서 나와서 영화보고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은 왠지 모르게 무척 재미있다. 그게, 멀쩡한 평일 낮에 시내에서 교복입은 아이들을 그렇게 많이 볼 수 있는 이유 아니던가. 그 일탈의 유혹이 이야기를 전개에서 절정으로 끌어가는 원동력이었다. 어느새 우리는 연습이고 의상준비고 다 때려치우고, 하루 놀자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옛부터 내려오는 격언 중에 "미인은 양아치를 좋아한다"라는 것이 있다. 내가 미인에게 별 인기가 없는 만큼, 나는 이런 일을 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게 많은 편이다. 일탈의 묘미만큼이나, 나는 꼭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민주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난영이가 너무 동조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비록 민호가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이긴 했지만, 우리 학년에서 가장 인기 많은 남학생과 난영이를 둘이서 영화보러 가게 해 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는 동참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선배에게 악보를 받아 와서 연습을 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출 박민주를 아주 정면으로 배반하고, 학교가 있는 동네에서 도망치듯 버스에 올랐다. 사실 도망치는 것이었으니까.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백화점을 구경하면서 영화시간을 기다리고, 백사장 근처에 있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았다. 백화점에서 옷구경을 하면서, 난영이가 이것저것 옷을 살 것 처럼 위장하고, 입어 보고, 우리는.

"좀 경박해 보인다."
"그건 좀 아줌마스럽지 않냐?"
"핑크색이 더 좋아."
"그건 멋있는데. 얼마짜리냐?"
"삼십삼만원."
"내가 사 줄까?"
"어."

이 따위 이야기를 하면서 놀았다. 초록색 티를 입은 난영이는 정말로 많이 이뻤다.

막상 영화는 어림없는 액션으로 점철된 영화였는데, 괜히 막판에 쓸데없이 주인공이 죽으면서 모두가 징징짜는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주인공이 어림없이 장렬하게 비틀거리면서, 완전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넘어선 "돌은 해병"처럼 길고 긴 대사를 하는데,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참으로 남는 거 없는 영화였다.

나는 "진짜 말도 안된다"라고 하면서 키득거릴려고 옆 자리에 앉은 난영이에게 고개를 돌렸는데, 난영이는 고개를 빼고 영화에 아주 깊이 몰입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내 머릿속에, 난 영원히 이 아이랑 뭐가 잘 되진 못하겠군. 하는 불길한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영화가 끝나고 나니, 해가 져가고 있었다. 그제서야 우리는 현실감각을 찾았다. 도대체 몇 시간이나 기다리다가 민주는 돌아갔을 것인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단체로 어디로 사라진 우리에게 느낄 그녀의 배반감과 분노는 얼마나 뜨겁게 불타오를 것인가.

"몰라. 뭐 어떻게 되겠지. 그냥 집에 갈래."

민호는 그렇게 손 사래를 치고는 홀연 버스를 타고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난영이에게 정다운 목소리로 잘가라고 했다. 나도 집으로 가려다가, 도무지 이건 아니다 싶어서, 다시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래 나는 박쥐 같은 회색분자다. 소심한 소시민이 뭘 어쩌겠는가.

학교로 가는 그 높은 오르막을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가 보니, 교실에서는 민주는 그 시간까지도 혼자 바이올린을 들고 악보를 보고 뭔가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민주가 나를 보았다. 민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분노 보다는 오히려 황당함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어디 갔다 온건데. 나는 학교 왔는데, 아무도 없고, 연락도 없고, 오후에 채린이 나타나서 둘이서 이거 의상 만든다고......"

나는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몰랐다. 무작정 사과를 한다거나 우리가 나쁜놈들이라고 욕하면, 똑같은 배반자 주제에 민호와 난영이를 다시 한 번 배반하는 꼴이 된다.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해서 내가 민주에게 무슨 이유를 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 않은가.

"하루 종일 이거 붙잡고 있고."

하면서 그녀는 우리를 기다리며 계속 잘라댄 천조각과 종이 뭉치들을 집어 던지듯 들었다 놓았다. "그래도 나 혼자라도 해야지 오늘 하루 건지지" 하고 생각하면서 고군분투하며 그 많은 재료들을 붙들고 있었던 그녀의 모습이 찍히듯 상상되었다. 어색한 관계인 채린이와 둘이서, 참... 그랬겠지.

그 무렵 내가 항상 달고 다니는 농담은 "미안하다고 말을 하지 말고, 돈이나 금은으로 보상을 해라"라는 대사였다. - 재미있지 않은가? - 접대와 로비에 무능인 나는, 도저히 그 상황에서 민주를 달래거나 사죄할 방법이 없어서,

"일단 저녁 먹고 생각하자. 오늘 날씨도 더운데 내가 냉면 사줄께."

라면서 저녁값을 지불하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사과와 유감을 표명하기로 했다.

우리는 굉장히 썰렁한 분위기로, 냉면 가게의 썰렁하리만큼 시원한 방바닥에 앉아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가수출신 연기자 수십명이 단체로 나오는 저녁시간대의 썰렁한 시트콤을 보면서, 냉면을 먹었다. 내가 그 순간을 이렇게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어색한 분위기와 복잡한 당시의 인간관계론적 위상에 비하여, 냉면이 모순적이게도 참 심하게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여름날의 사건은 다음날, 접대와 로비에 능한 난영이가 "민주야~~~ 미안해~~~" 하면서 매달리고 무슨 작은 치즈 케익 같은 것을 사다 나눠먹는 것으로 결말을 짓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이 사건의 본질은 더위 많이 타는 10대들의 하루 일탈이요, 또한 짝사랑을 잃을 두려움에 처한 한 가련한 중생의 방어적인 몸짓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민주는 자신이 "너무 혼자 대장인척 하면서 아이들을 몰아붙였나", "내가 너무 나서고 설쳐서 아이들이 재수 없다고 여기나", 하는 걱정을 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고, 단짝으로 "호프만 이야기"팀의 핵심전력이던 민주와 난영이가 약간은 멀어진 듯 하기도 하여 좀 안타깝기도 했다. 그랬으나, 개학을 하고, 공부할 것이 많아지는 동시에 본선 날짜도 다가오면서 자연히 그 날의 일은 잊혀져 갔다. 적어도 나는 확실히 그랬다.

개학을 하면서, 채린의 특수 장비들은 최대한 그 양을 줄여서 신발장 위에 쌓게 되었고, 연습 시간은 저녁 늦은 시간으로 옮아가게 되었다. 그런 변화들과 함께, 우리의 실력도 새로운 경지로 옮아가 꽤 좋아졌다.

실력이 어느 수준 이상이 되자, 나는 또 진심으로 오펜바흐 오페라에 깊이 빠지게 되기도 했다. 하루 종일 내내 나는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들을 떠올렸으며, 틈만 나면 책상 위에서 손가락을 또각거리며 피아노 치는 연습을 했다.

그러고 나니까 텔레비전에서 잠깐 "뱃노래"의 멜로디가 나온다거나, 어디서 "파리의 즐거움" 노래가 나오기만해도 무척 반갑게 달려가서 한참 끝날 때 까지 듣곤 했다. 혹시 서점이나 도서관에 들를 때가 되게 되면, 19세기 프랑스 오페라나 오페레타에 관한 책들을 꼭꼭 한번씩 찾아 봤다. 굉장히 값어치 없는 선택과목이던 불어를 필요이상으로 신경써서 열심히 하기도 했다.

특히, 버스안에서 깜빡 졸다가, 덜덜거리는 버스 엔진소리가, 꿈결에 절정부분에서 두들겨대는 피아노 코드로 들렸던 일은 상징적이었다. 그 때 나는 내 스스로도 "내가 이렇게 요즘 오페라에 열정적이란 말인가"하고 놀랐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정말이다. 그게 원예고등학교 정류장을 잠깐 지나서, 도심에 있는, 들어서는 문이 멋진 옛 향교 자리 앞에서 버스가 신호대기 할 때 였다.

채린이의 주도로 작업에 들어갔던 의상과 소도구들도 이내 완성되었다. 처음으로 그 그럴듯한 옷들을 내가 걸쳤을 때, 채린이와 민주는,

"어, 반짝반짝."
"반짝반짝"
"야, 진짜 반짝반짝한다."

하면서 아주 좋아했다. 채린이의 손재주는 정말 좋았다. 기대한 것을 훨씬 뛰어 넘는 결과 였다.

공부는 좀 젖혀두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난영이와 일필휘지로 후다닥 숙제를 끝내버리는 민호와 달리, 나와 민주는 공부랑 공연 준비를 같이 하느라 점차로 시간에 쫓기기 시작했다. 때문에 우리는 종종 굉장히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민주의 어머니는 학교 아래로 차를 끌고 그녀를 데리고 왔고, 나는 버스 한 코스를 거슬러 내려가서는 심야 버스를 타고 집에 갔다.

자연히 우리는 집에 가는 길에 몇 번 같이 학교를 내려가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애초에 박민주-장난영등과 별로 친하지 않았다. 또한 이런 관계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걷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가?" 하는 데 대해서도 별 답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랬으므로, 우리는 어색하고도 심심하게 그냥 아무 말도 없이 그 긴긴 내리막을 걸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다만, 그 늦은 밤에 높은 언덕배기에 있는 학교에서 보니, 시내의 야경은 상당히 보기 좋았다.

저 아래에 있는 가득가득한 집들은 온갖 색깔로 반짝거리는 불빛이 되어 있었다. 그 전등 하나하나마다, 나와 똑같은 한 사람의 집이고, 또 어떤 가정의 보금자리일 것이었다. 그리고 그 불빛 하나하나 마다, 나처럼 고민도 있고, 고생도 하고, 즐거울 때도 있고, 노력하기도 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수십만개의 불빛들이 가득한 도시의 밤풍경을 보는 것이 자뭇 숙연한 느낌마저 들게 하였다.

하루는 그런 생각을 하며,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민주와 같이 내려가고 있었다. 민주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어쩌는지, 멀리 야경을 바라 보면서 천천히 걷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다가, 계속 먼 곳에 시선을 둔채, 민주가 말했다.

"야,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람이...."
"어."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남을 이해 해도, 내가 남이 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렇...지..."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항상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하는데.... 그걸 내가 내 몸속에서 밖에 못하고, 남의 마음이나 남 생각속으로 들어가서 다른 사람은 되어보지 못한다는게..."
"......"
"참 어떻게 보면 답답하고 딱 갖혀져 있는거 같지 않냐?"

나는 그 말을 듣고, 문학 참고서의 어느 시 해설에 실려 있는 "인간의 근원적 고독"이라는 어구가 떠올랐으나, 그런 말을 입에 꺼내지는 않았다. 먼 곳을 보고 있던 그녀는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 보았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저편에서 지나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지."

나는 싱겁게 대답하면서 고개를 돌려 다시 멀리 야경을 바라 보았다. 그녀도 가볍게 웃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충분히 안심할 정도로 실력도, 장비도 갖추게 되었다. 캐번스를 꺾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어느 정도 전교생 앞에서 그럴듯하게 보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우리는 약간의 여유도 생겼다. 어느 깊은 밤에는, 운동장에서 연습을 하고 나서 마칠 때 쯤, 난영이가 장난스럽게 "장미의 미소"를 연주했다. 우리는 그 반주에 맞춰서 하나 둘 자기 악기를 갖다 붙였고, 결국 다같이 막춤을 추면서 신나게 노래하며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더위는 완전히 지나가고, 결국 음악제를 하루 앞 둔 리허설이 찾아 왔다. 점심시간 직후가 리허설 시간으로 잡힌 우리팀 중에서는, 나와 민주가 점심을 거르고 미리 강당에 갔다. 민호는 반장들 모임 때문에 좀 늦는다고 했고, 난영이는 채린이와 마지막으로 의상을 한 번 더 손본다고 했다.

강당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면서, 점심시간의 소란스런 학교와는 또 꽤 떨어져 있기에, 무척 조용했다. 민주와 나는 강단문을 열고 정중앙에 들어섰다. 무대쪽으로 걸어나갈때, 우리가 내딛는 발 소리가 강당안에 낭랑히 울려퍼졌다.

민주는 무대 위에 올라갔다. 나는 객석 제일 앞줄 정 가운데에 앉았다. 홀로 무대 위에 선 민주는 "아-"하는 소리로 한 음정을 소리냈다. 나 혼자뿐인 강당 가득히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렇게, 무대에 서 있으면, 뭔가... 그... 막 되게 열정적인 그런게... 나한테 이렇게 화악- 쏟아지는 느낌이 들지 않어?"

민주는 나를 보다가 허공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화악"이라고 말할 때 손을 휘저으며 말하던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반주 없이, 그냥 혼자서 조용히 오페라에서 자기 노래의 한 소절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깨끗했고, 노래 실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좋게 들렸다. 그것은 확실히 그냥 잘하는 수준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남들은 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장난영을 좋아하는 내가, 대중들의 취향을 대표한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이 정도 솜씨라면 곧 그녀가 다니는 기획사 연습실에서 그녀를 밀어 줄 듯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런 생각을 그 때는 별로 하지 못했다. 관객이라고는 나 혼자 뿐인 텅빈 강당에서, 그녀는 눈을 지긋이 감고 속으로 이 곳을 코벤트 가든이라고 생각이라도 하는지, 가장 빼어난 솜씨로 노래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 순수하게 그 노래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좀 민망했든지, 그러다 노래를 멈추고 코메디언들의 성대모사를 흉내내며 무대위에서 혼자 웃긴 쇼를 했고, 나도 장단을 맞추어 주면서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 날, 모두가 모인 뒤의 리허설도 훌륭했다. 우리는 마지막 리허설때까지 우리 비장의 무기를 감추기 위해 채린이 만든 의상과 소도구들은 하나도 공개하지 않았다. 그건 캐번스 놈들도 마찬가지 였다. 분명 준비한 것이 엄청 많을 텐데, 건조하게 교복을 입고 리허설을 했다.

공연을 하루 앞둔 그날 저녁 때 쯤, 나는 민주와 함께 학교 근처 문방구들을 돌며, 만약을 대비하기 위한 종이며 본드 풀 같은 것들을 사 모았다.

학교 주변 아파트촌 옆을 휘감아 도는 강변 도로를 따라 우리는 꽤 긴 길을 걸었다. 강변을 따라 굽어지는 길에는 저녁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 햇빛이 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는 자동차의 유리에 눈부시게 반사되었다. 그날 저녁의 노을은 온 세상을 물들이는 정신나간 듯하게 강한 것이었다.

그 날, 민주와 나는 어느 대학에 무슨 과에 가고 싶으며, 이 다음에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하는 이야기들을 했다. 그리고 서로 몇 번 씩, "우리 내일 정말 잘하자." "그래" 하는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아 왔다. 아침에 나는 사격부 후배들을 불러 모았다. 나는 후배들에게 한 군데 모여 앉지 말고 군데 군데 흩어져 앉으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나올때면 객석 여기저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과장되게 환호하면서 바람을 잡으라고 당부했다.

"저희를 믿으십시오. 선배. 최강사격부 아닙니까."

왜 쓸데없이, 모든 고등학교 모임들은 자기 이름앞에 "최강"같은 수사여구를 쓰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거나, 그 날만큼은 그 후배들이 약간은 믿음직스러웠다. 민호도 예진이 선영이 은혜 등등의 후배들을 불러다 놓고, 바람 잘 잡으라고 당부를 했다. 뭐 당부 안해도, 얘네들은 민호가 등장하면 온갖 난리를 칠 것이 분명하다.

"걱정 마세요. 선배. 저희들이 다 준비한게 있죠."

그러면서 걔네들은 준비한 플래카드를 들어 보여주었다. 민호는 좀 민망해 하는 구석이 역력했다.

음악제가 시작되었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캐번스는 거의 시작 무렵이었고, 우리는 거의 마지막 무렵이었다. 무대 뒤, 대기실에서 우리는 가만히 캐번스 공연을 틈새로 보았다.

"오오-"

캐번스의 비장의 무기는 레이저 조명이었다. 캐번스의 연주는 언제나 처럼 굉장히 신나고 강했는데, 음악제에서는 괜히 비장하고 과시적인 발라드나 메탈 멜로디를 다 없애 버리고, 그저 흥겹고 신나게 이어지는 펑크곡들을 쓰고 있었다. 거기에 그야말로 현란함의 극을 달리는 레이저 조명이 쏟아지자, 얘네들은 무슨 10대가수상을 받은 가수들처럼 보였다.

우리는 살짝 겁을 집어 먹었다. 그리고, 그렇게 겁먹은 다음부터는 우리의 공연 차례가 오기까지, 초조하고 떨리면서도 또한 지루한 시간이 계속 되었다.

대기실에는 이렇게 지루한 대기기간을 기다렸던 우리의 옛선배들이 남긴 옛날 만화책과 무협지가 몇 권 있었다. 민호는 한쪽 구석에 앉아서 말없이 그 만화책들을 읽고 있었다. 난영이는 계속 "아.. 떨려 어떡하지." 하고 있었고, 민주는 그걸 안심시키려고 했다.

나는 그냥 아무 생각없이, 내가 나오는 부분과 나오지 않는 부분의 코드들을 찬찬히 계속 머릿속으로 짚어보았다. 수백번도 더 외웠던 것이지만, 몇 번이고 조심스레 더 읊어 보았다. 어디서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 민주가 이 부분의 음색은 어때야 한다고 했는지 하는 것을 하나하나 되새기면서.

"우리 차례가 다음 다음이야."

난영이가 말했다. 나는 민주를 불렀다.

"올랑피아, 분장하자."

민주는 고개를 끄떡하고는, 내 앞에 와서 가만히 앉았다. 이번에는 국어선생님 것을 빌린 것이 아니라, 가장 적당한 것으로 골라서 산 화장품들이 있었고, 포스터 칼라가 아니라 좋은 색깔을 만들어서 산 특수 물감이 준비되어 있었다. 채린이가 골라준 것들이었는데, 사실 붓질도 채린이가 훨씬 더 잘하겠지만, 애초에 무대 뒤에서 대기할 수 있는 인원은 나, 민호, 난영이, 민주 넷 뿐이었기에, 채린이가 대신 분장을 해 줄 수는 없었다.

나는 붓을 들어 그녀의 감은 눈에 물감을 찍었다. 몇 번을 해 본 일이지만, 부드럽고 연약한 얼굴에 붓을 대고 있으면, 괜히 조심스러워지고 팔이 좀 떨린다. 그렇다고 많이 떨면 붓 끝이 갈라지고 선이 이상하게 되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좀 과감해질 필요도 있다. 항상 간지럽다라던가, 어느 쪽 색깔을 강하게 해달라던가 하는 이야기를 하던 민주는,

"잘 해."

눈 감은 채로, 그 한 마디를 하고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분장은 잘 되었다. 항상 그렇듯이, 분장이 끝나자 민주는 눈의 초점이 없는 인형 표정을 한 번 지어보고는 방긋 웃었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우리는 다시 손을 포개어 모았다.

"잘하자 잘하자."
"화이팅. 화이팅."
"1등하자."
"하나 둘 셋-"

그렇게 손을 포개어 모은 잠시 동안, 긴긴 연습과 여름 동안의 온갖 노력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라고 하면 좀 멋있는 표현이 될 것 같은데, 사실 굉장히 긴장해서 아무 생각도 안났다.

우리 친구들이 주동이 된 환호성과 함께 박수소리가 가득 들리고, 민주와 난영이가 먼저 무대에 나갔다. 둘의 연기와 연주는 연습 때보다도 훨씬 좋은 것 같았다. 예선에서 마지막 콜로라투라 곡을 엄청난 솜씨로 보여주었던 민주는 이 번에는 처음부터 그 수준의 굉장한 실력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상당히 놀라고 또 감동하는 눈치였다. 민주는 무대 전체를 역동적으로 활용하면서 움직였고, 덕분에 그녀의 자동인형 연기도 무척 극적으로 와닿았다. 아무도, 이런 것을 보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오페라가 뭐 재미있겠어" 내지는 "지들이 무슨 오페라를 하겠다고" 하는 많은 아이들의 선입견을 역이용한 것이기도 했다. 우리의 공연은 재미있게 기획되어 있었으며, 민주의 정제된 실력과 그걸 받쳐주는 난영의 연주는 그 기획에 모자람이 없었다.

"잠깐,"

난영이의 대사가 나왔다. 이제, "저기 누가 오고 있어" 하면, 나와 민호가 나갈 차례였다. 민호는 의상을 입고, 분장을 한 얼굴로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나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믿음직스런 웃음이었다. 나도 같이 웃으며 엄지를 들어 화답해 주었다. 좋아, 간다.

"저기 누가 오고 있어."

우리는 달리듯이 성큼성큼 무대 중앙으로 나갔다. 눈부신 조명이 쏟아졌다. 눈살이 반사적으로 찌푸려지려고 했지만, 그럼 표정이 망가지기에 애써 버텼다. 채린이가 심혈을 기울인 놀랍도록 화려한 의상은 정말로 멋지게 "반짝반짝"거렸다. 아이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사실 사격부 놈들이 바람잡는답시고 내는 괴성들은 너무 부자연스럽게 튀고 있긴 했다.

민호는 여유롭고도 신나게 첫 곡조를 뽑았다. 나는 연습때보다도 더 충동적인 몸짓으로 피아노 코드들을 두들겨 나갔다. 우리 노래는 무척 신났으며, 우리가 단체로 영화보러 도망간 여름날에 새로 편곡해온 것들은 예선 때보다 더 듣기 좋았다. 우리 멜로디에 따라, 관객들이 박자 맞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건 예상 못했던 반응이었고, 우리가 친구 바람잡이들에게 지시한 사항도 아니었다.

민호와 나는 굉장히 신이 나서 연주를 했다. 민호의 바이올린 연주는 정말 대단하다고 모두가 감탄할 정도였다. 공부잘하고, 잘생긴, 민호가 숨겨둔 바이올린 실력이 이 정도일 줄은 아무도 몰랐기에 모두가 정말로 놀라고 있었다. 특히 민호를 좋아하던 선생님들의 기뻐하는 모습은 간만에 순수한 제자에 대한 애정과 자랑스러움으로 넘쳐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 왕년의 아시안 게임 사격 선수는, 그렇다. 역시 그 못지않게 무척이나 잘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때 무대위에서 그 어느 연습 때보다도 좋은 연주를 했다. 격정적으로 휘몰아치는 피아노 멜로디를 하나도 틀리지 않았고, 내 피아노 멜로디의 절정 부분에서 나는 감히 한 번도 시도해 본적이 없는 애드립을 마구 섞는 오버를 감행했다. 그런데 그게 내가 들어도 정말 듣기 좋았다.

무엇보다, 나와 민호의 호흡은 완벽하게 어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남철 남성남이나, 서수남 하청일, 영구와 땡칠이, 오성과 한음, 좌청룡 우백호, 로버트 드니로와 마틴 스콜세지가 무색할만큼, 정말 잘 맞았다.

드디어 필살기로 준비된 민호의 바이올린 절정부분이 이어지고, 내 피아노도 정신없이 불타올랐다. 민호의 바이올린 실력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었다. 우리의 내달리는 한바탕 연주가 긴 마지막 코드로 마무리 되자, 장내는 진심어린 환호로 가득했다.

그 짧은 연주였는데도, 민호도 나도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휴-"하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얼핏 표정을 보니 같이 무대에 선 난영이와 민주도 아주 만족한 듯 보였다.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어제 점심 때, 민주가 무대에 서면, 열정이 자기에게 쏟아지는 느낌이라고 말한 것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바로 그런 때에, 운명은 장난을 치는 것이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