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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이빨 1. "니벨룽의 반지"의 마지막날, "신들의 황혼" 공연이 끝나고 나서는 길이었다. 하얗게 서울 시장의 이가 반짝였다. 몇몇 기자들이 몰려들어 세종문화회관을 걸어 나오는 시장을 향해 사진을 찍어댔다. 그 빛나는 플래쉬 불빛에 시장의 웃는 이가 계속 번쩍번쩍 했다. "아주, 훌륭한 공연이었습니다. 지난 번 한국 초연 때보다 월등했습니다. 아무래도 연출을 맡으셨던...." 그래도 서울 시장 아닌가. 나도 괜히 궁금해져서 시장쪽을 넘겨다 보려 하고 있었다. 4시간이 넘는 오페라 때문에 진이 빠진 터라, 더군다나 지난 초연 때보다 몇백배는 박력있는 장엄하기 그지없는 오페라 마지막 장면 때문에, 정신은 약간 몽롱한 상태였다. 물끄러미 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시장과 둘러싼 기자들이 헷갈리게 하는 와중에 갑자기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정보 통신부 건물이 있는 길 맞은 편에서 부터, 왠 남자 하나가 갑자기 길을 건너오고 있었다. 넓은 차로에 차들이 속력을 높여 달리는 곳이었지만, 남자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 넓은 길을 꽤나 빠른 걸음으로 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자동차들이 길게 경적 소리를 내며 주춤주춤했지만, 남자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 자동차 경적 소리 때문에, 세종문화회관 사람들은 일제히 길을 가로 질러 오는 남자를 보게 되었다. 남자는 회색과 푸른색이 교차하는 가로 줄무늬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베이지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조그마한 도시락 가방 같은 것을 하나 들고 있었다. 도대체 이 남자가 왜 갑자기 세종로 한 복판을 횡단해 가는 것인지?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며, 경찰이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 갔다. 경찰은 뛰어가려다가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는 버스에 놀라 움찔했다. 이제는 기자들과 시장도 길을 건너는 남자를 언뜻 보게 되었다. 그는 길을 거진 다 건너 왔을 때 쯤 주머니에서 주춤주춤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장을 보면서 씨익 웃었다. 웃음 때문에 그의 이가 보였다. 그는 치아교정용 보철을 하고 있었다. 그 금속철사가 기자 한 명의 사진기 플래쉬 때문에 번쩍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꺼낸 것을 손에 쥐고 들었다. 총이었다. 웃고 있는 그는 시장을 겨냥했다. 반사적으로 시장 옆에 서 있던 경호원 한 명과, 먼 발치에 서 있던 경찰 하나가 자기 총을 빼들었다. 남자는 방아쇠를 당기는 것 같았다. 총성이 울렸다. 경찰과 경호원의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 올랐다.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다. 시장은 옆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휩싸였다. 시장이 엎드렸다. 기자들은 혼비백산 하며 흩어졌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먼발치 광화문 사거리께에 있던 사람들까지 이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의 의무 경찰들이 시장이 있는 쪽으로 달려 왔다. 나와 함께 왔던 혜옥 선배도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돌리고 바닥에 앉았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의 치아교정기를 한 이가 눈에 들어와서, 그리고 워낙 놀라서 그냥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총을 든 팔 어깨에 시커먼 검은 원이 박혀 있었다. 총 맞은 자국. 검은 피가 철철 흘러나와 반팔 옷을 적시고 흘러서 그의 겨드랑이 있는 곳에 고였다. 남자는 총을 쏘지 못한 듯 했고, 경호원과 경찰이 쏜 총에 맞은 것이었다. 그는 웃는 표정 비슷한 표정이었는데 좀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하여간 치아교정기와 이는 계속 보였다. 그는 도시락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는 꺼낸 것을 던지려 했다. 다시 총성들이 울렸다. 그의 오른쪽 눈 아래에 구멍이 뻥 뚫리면서 무엇인가 퍽 튀어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끔찍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고꾸라졌다. 그가 던지려던 것이 툭하고 떨어졌다. 그것은 도시락이었다. 도시락 뚜껑이 떨어져 깨져 열리면서 안에 있던 김치 국물과 밥알이 흘러나왔다. 아스팔트 위에 검은 피가 가득 흘렀다. 핏물과 김치국물이 섞이기 시작했다. 맹렬히 달려오던 자동차가 급정거하며 선다고 섰는데, 그래도 그 자동차는 엎어져 있는 그의 손을 밟아 버렸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호각소리가 들렸다. 경찰들이 몰려 들었다. 업드려 있던 시장은 경호원들과 경찰들에 휩싸여 황급히 떠나갔다. 경찰들은 "시장님 괜찮으십니까?" "시장님 안 다치셨습니까?" 같은 말을 지줘기는 듯이 반복하며 시장을 따라갔다. 사람들이 모두 서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놀라 눈에 눈물이 괴어 붉은 눈으로 울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소란했다. 그 사람의 모습과 바닥에 흘러나온 피와 김치국물이, 그를 둘러싼 경찰들에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야, 괜찮아?" 쪼그린 듯 엎드린 듯 엉거주춤하게 있던 혜옥 선배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일어나며, 내게 말했다. 이것이 내가 목격한 "세종로 총격 사건"의 모습이다. 혜옥 선배와 나는 둘 다 어벙벙하니 얼이 빠져 있었다. 우리는 다음 약속은 그냥 없던 것으로 하고 서로 안부를 대강 묻고는 바삐 헤어져야 했다. 그 다음 날, 기술 연구소로 출근해 보니, 마침 거한 회식이 계획되어 있었고, 회식자리는 당연히 이 놀라운 뉴스가 화제를 완전히 차지 했다. "제가, 바로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제 두 눈으로 다 봤습니다." 나는 팀장에게 술을 따르면서 말했다. 장담하건데, 오늘 다른 모든 학교와 직장에서도 만나기만 하면, 세종로 총격 사건의 그 남자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이렇게 인기를 얻은 까닭은 아침 뉴스에 나온 더 황당한 진상 때문이었다. 그가 꺼내든 총은 구조와 형태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는데, 사건 직후 일대의 경찰 전병력이 동원되어 검문과 조사에 나선 결과, 그 총은 훔친 총임을 알게 되었다. 그 총의 원래 주인을 찾아 냈기 때문이었다. 그 총의 원래 주인은 롯데 호텔의 한 게임회사 시사회장에 서 있던 모델이었다. 게임은 우주 머나먼 곳의 행성에서, 공주와 왕자가 벌이는 모험을 소재로 한 것이었는데, 그 모델은 공주 복장을 하고는 공주 캐릭터가 사용하는 레이저 총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 레이저 총은 지구에서 820광년 떨어진 별의 최첨단 왕실 레이저 총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인너츠라는 완구회사에서 제작한 플라스틱 장난감이었다. "아니오. 저는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어떤 남자가 나와서 제가 들고 있던 걸 들고 막 뛰어서 도망가더라고요. 옷을 이렇게 입고 시내로 쫓아 나갈 수도 없고 해서..." 아침 뉴스에서 경찰에 잡힌, 외계 행성의 공주가 눈물을 흘리며 겁에 질려 그렇게 말하는 장면은 기가 막혔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경찰들이 "시장 암살 계획"의 공범으로 몰아 붙여서 엄청나게 겁을 집어 먹고 있는 것 같았다. 텔레비전 생방송 카메라가 앞에 붙어 있었지만, 그녀는 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말을 못하다가 그냥 "엄마"하면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앞에 있던 학교가기 전의 학생들과 출근하기 전의 직장인들과 거기에 속해 있지 않은 한국인들과, 인터넷 온에어 서비스로 그 뉴스를 보고 있던 다른 나라 사람들 모두는 재미를 넘어서서 신비함마저 느꼈다. 이게 무슨 사건이란 말인가. 어떤 남자가 갑자기 장난감총을 훔쳐서 시장에게 쏘려고 했다고? 괜히 그런 짓을 했다가 진짜로 쏘는 줄 알고 경호원이 대응사격한 총에 얼굴을 맞고 즉사했다니. 그 무슨 희한한 자살 행위란 말인가. 남자는 즉사했기 때문에,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다만 그에 대한 신고를 모으기 위해 그의 이름과 나이가 방송되었다. 처음에는 "암살범"이라고 하다가, 암살에 실패했으므로 "총격범"이라고 방송에선 떠들었다. 그런데, 결국 그것은 장난감총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났으므로, 방송국에서는 고민 끝에 그를 "테러범"이라고 호칭하기로 했다. 내가 "테러범"을 현장에서 봤다고 말을 마치자 마자, 팀장은 싱긋 웃었다. "굉장하네. 내가 그럼 또 신기한 거 하나 말해줄까?" "뭔데요?"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숙명여대 한매봉 교수님 밑에 있었잖어? 그런데, 그 한매봉 교수님 제자 중에.. 어, 그 테러범이 바로 그 한매봉 교수님 제자였었다고." "예? 정말요?" "자네 한매봉 교수님 아나?" "아... 뭐, 교수님은 절 모르시겠지만, 전 학회에서 몇 번 봐서 얼굴 기억하고 있죠. 굉장히, 잘... 하시는 분이시잖아요." "한매봉 교수님 대단한 분이시지." "그런데, 그 테러범이 옛날 한매봉 교수님 제자였다고요?" "그렇다니까. 처음에 얼핏 사진 봤을 때 그런가 했더니, 이름 보니까 맞어. 그래서 내가 그 테러범 선배 되는 내 친구한 때 엠에스엔 메신저로 물어봤거든, 그러니까 맞데." "야... 이거, 아무리 한국에서는 한 다리 건너 한 다리면 다 아는 사이라지만..." 우리는 그 날 밤 내도록 그 이상한 테러에 대한 이야기만 계속 나누었다. 테러범의 1차 총격이 실패한 뒤에, 그러니까 우주에서 온 공주의 총을 겨누다가 어깨에 총을 맞고 나서, 왜 갑자기 도시락을 꺼냈느냐 하는 것으로 화제가 넘어 갔다. "그것도 일종의 테러 비슷한 거 하려고 그랬던 거 아니었겠어요?" "아니, 무슨 도시락으로 테러를 해?" "그 왜,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도 있었잖아. 사실, 투척용 폭탄 하면, 제일 익숙한 것은 도시락 폭탄 아닌가?" "그러니까, 외계인 공주 총으로 총격 하려다가 실패하니까, 진짜 도시락으로된 도시락 폭탄을 던지려고 했다 이거죠?" "아니, 웃을 일만은 아니야. 정말 그게 그럴듯 하지 않어?" 저녁 회식이 끝나고, 줄줄이 자리는 2차에 3차로 이어지겠으나, 나는 일단 거기를 빠져 나왔다. 회식 자리 따라다니면서 분위기 맞추는 것도 의욕 넘칠 때나 하는 일이지, 이제는 괜히 그런 데 목숨 걸지 않아도 특별히 더 잘풀릴 일도, 더 꼬일 일도 없다는 걸 안다. 대신에 나는 잠실에 있는 한 대형 할인 매장으로 갔다. 할인 매장에는 "Slow Boat To China"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저녁 늦은 시간에 이런 저런 것을 사러 나온 젊은 부부들이 많았고, 갑자기 집에서 이어진 모임에 술이나 안주를 사러 온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에어콘이며 선풍기 같은 전기제품을 전시해 놓은 곳을 향해 갔다. 엄청나게 예쁜, 옛날 "라비린스" 영화의 여자 주인공이랑 비슷한 분위기의 직원 한 명이 눈에 들어 왔다.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 바지로 된 회사 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에어콘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묻는 한 손님에게 카탈로그를 보면서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길을 피해서 옆 진열대 쪽으로 돌아들어간 뒤, 전화를 걸었다. "이 늦은 시간에 너무 열심히 일하는 거 아냐?" "오늘 밤 근무니까. 그래도 이제 한 30분만 더 버티면 끝이야." "오늘은 별 일 없었어?" "응." "오늘도 헬로키티 핀 하고 나간거 아냐?" "아냐. 인제 딴 거 샀어." "그래? 어떤거?" "그냥... 헬로키티 없는 그냥 핀." 나는 그녀 옆에 나타나, 그녀가 하고 있는 헬로키티 핀을 톡 건드렸다. "오, 이건 뭐, 굿바이키티냐?" "어? 여기 어떻게 왔어." 그녀가 놀라는 눈으로 날 봤다. 그 눈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어떻게 오긴. 버스타고 왔지." "유머 감각 업그레이드 좀 하시지." "이미 유머 감각 서비스팩 2 까지 다 깔려 있는데." "그냥 니 유머 감각은 중고매장에 팔고 새거 사야 겠다." 그녀와 나는 같이 매장을 돌았다. 오랫만에 심야 매장 근무인 탓인지, 그녀는 약간 피곤해 보였다. 그래도 웃을 때 보조개가 지는 그 특유의 표정은 여전했다. 굉장히 심각한 표정으로 매장 물건들을 살피다가, 눈을 돌리지도 않고 더듬더듬하여 양복 사이에 뒤집어진 내 넥타이를 바로 잡아주었다. 어디하나 빠질 것 없는 혜옥 선배의 애처로운 구애를 비정하게 져버렸던 그 이유. 그 이유와 근거로 충분한 아이였다. "어제 광화문 거기 있었다며, 어디 다친데는 없어?" "피지칼리 노 데미지, 맨탈리 수퍼 데미지." "와이 멘탈리 수퍼 데미지?" "정신이 멍 하더라. 그 사람 이상하게 풀린눈으로 살짝 웃고 있는데, 총알이 그 얼굴에 확 박히는데..." "으. 고만, 거기까지. 그런 소리 자꾸하면, 생각나서 나 잠 못자." "뉴스 봤지? 사실 그 테러범이 뭐 진짜 무기나 그런 걸 가진게 아니라서 나는 뭐 다칠래야 다칠 것도 없기도 했어." "혜옥이 선배라는 그 사람은?" "어, 뭐, 그 사람도. 다행히 어제 '신들의 황혼' 공연이 좀 많이 감동적이었거든... 끝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거기까지 말하다가 대강 말을 접었다. 이번 "신들의 황혼" 공연은 내가 무척 기대하고 있는 것이긴 했지만, 바그너의 정신 나간 오버쇼 보다는 "별이 빛나는 밤에"를 훨씬 더 좋아하는 그녀와 함께 가기는 좀 뭣했다. 4시간이 넘게 뚱뚱한 아줌마 아저씨 가수들이 번갈아가면서 소리만 지르는 자리에, 굳이 그녀를 앉혀 두는 것은 고문 아니었겠는가? 그래서 그냥 접고 있었는데, 마침 혜옥 선배가 어디서 R석 초대권 두 장을 구해 왔던 것이다. 혜옥 선배가 괜히 긴 편지를 써서 고백을 하니 어쩌니 하고, 비슷한 시기에 내가 지금의 그녀를 만나고 쫓아다니고 하던 때.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런 저런 공연 자주 같이 다니기도 했고, 특히 오케스트라 연주에 대한 평가와 취향은 신기할 정도로 비슷했기에, 나는 같이 공연 보러 가자는 선배의 제안이 아주 반가웠다. 그러나 그녀를 생각하면 또 그렇지 만도 않았다. 안그래도 연구소의 옆 실험실에 혜옥 선배가 긴시간 머물고 있어서 나는 선배와 마주치는 때가 많았다. 그리고, 혜옥 선배팀에서 이번에 만든 화합물 비교 추천 프로그램은 너무 복잡해서 쓸 줄 아는 사람이 우리 팀에서는 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프로그램을 돌리기 위해 혜옥 선배를 찾아가야 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혜옥 선배와 나는 내막이야 어찌 되었건, 자주 같이 일하는 친근한 동료였다. 거기에다 더하기 나는 잘 이해 못하겠지만, 혜옥 선배가 미인이라는 평가가 내 주변 여자들 사이에 돌고 있기에, 말은 안해도 그녀는 혜옥 선배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약간은 경계하는 듯한 눈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혜옥 선배와 본 공연이 무진장 재미있었다는 이야기를 끊어먹고, 말을 돌려야 했다. 나는 매장 옆 진열대에 있는 썬글라스 하나를 써 보았다. "야, 어떠냐? 양복입고 이 썬글라스 쓰니까,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조종사 흉내 내는 거랑 비슷하지 않냐?" "음... 그것 보다는.... 글쎄..." "누구 같냐? '맨인블랙' 윌 스미스 분위기 같으냐?" "눈 안 보이는 사람 같애."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나는 그녀가 마치면 같이 가려고 했으나, 그녀는 매장 일이 끝나고 나서도 정리할 게 꽤 있다고 했다. 그러고 나면, 잠실에서는 집이 한참 떨어진 나는 차가 끊길 시간이었다. 그녀는 괜찮다고 괜찮다고 하면서, 매장에 있는 수박 중에 제일 좋은 수박 하나 숨겨 놨으니까 그냥 오늘은 집에 들어가고 내일 자기 집에 놀러와서 수박이나 먹으라고 했다. "봐. 오늘 처럼 술 많이 안 먹고 회식 일찍 끝내니까 얼마나 예뻐." "겨우 술 몇잔 하고 말고로 나의 예쁨이 좌지우지 될 수 있을까?" "저, 선생님. 그... 잘난척 좀 자제하시는게 어떻겠습니까?" 나는 매장 문 닫는 다고, "So Long" 하는 노래가 나올 무렵이 되어서야 아쉽게 그녀를 떠났다. 매장을 나오는 길에 나는 집에 칫솔과 치약을 새로 사야하지 않던가 하는 생각이 났다. 마침, 그녀와 엊그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니, 시장의 흰 이와 총격범의 치악교정기를 한 이의 모습이 괜히 생생하게 다시 떠올랐다. 자꾸 떠오르는 그 생각이 좀 재수가 없어서, 나는 그냥 내일 연구소에 나가서 찾아볼 논문 생각을 억지로 했다. 그리고 우리 회사 제품으로 치약과 칫솔을 샀다. 매장의 그녀는 쓸데 없이 비싼 치약 말고 그냥 무난한 걸 사서 쓰라고 하지만, 우리 회사 치약은 자랑스런 소비자 평가 1위 아니었던가. 매장을 나오면서, 먼 발치에서 그녀를 다시 한 번 바라 보았다. 아주 잠깐 이었지만, 이상하게 그녀의 눈동자가 좀 멍한 눈빛으로 보였다. 내가 혜옥 선배에게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고 말했을 때, 혜옥 선배의 그 일견 슬프고, 부끄럽고, 또 화난 듯하기도 한 그 눈빛이 거기에 겹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또 그냥 섬뜩하게 죽은 사람 눈빛처럼 그냥 멍한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이상한 눈빛. 술기운. 회식 자리에서의 술기운. 수 많은 사람들과 부딪기며 다시 붐비는 버스를 타고, 잠실에서부터 집까지 머나먼 밤길을 헤쳐 집에 왔다. 타는 버스마다 많은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다. 그 날 밤 따라, 평소에는 신경 거슬렸던, 핸드폰 붙잡고 시끄럽게 잡담하는 대학생 하나 없었다. 큰 차소리만 들리고, 가끔 경적 소리만 들리고. 사람들은 모두다 지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소음은 많았지만 적막한 셈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이를 닦으러, 세면대 앞에 섰다. 문을 닫았다. 바깥과는 차단 되어, 좁은 공간 안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 있다. 폐소감. 술을 좀 마신데다, 확실히 너무 늦은 시간에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다 보니, 버스 안에서 졸던 것이 이어져서 잠이 쏟아져 왔다. 대강 이 닦고 그냥 확 쓰러져 자버려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세면대 물을 틀었다. 치약을 짜고 칫솔을 들었다. 거울을 보니, 거울에 비친 내 등뒤에는 까만 옷을 입은 귀신이 서 있었다. 귀신은 빨간 입술을 하고, 기괴하게 입꼬리가 찢어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빨간 귀신의 입술 아래에, 하얗게, 눈부시게 하얀 치아가 보였다. 까만 옷의 귀신은 그렇게 기분나쁘게 웃으며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칫솔을 든 나를, 그 희번덕 거리는 눈이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주춤거리다가 밖에서 누가 들으면 우스꽝스러울 "으어어"하는 비명소리를 내면서 뒤로 자빠졌다. 귀신에게 나는 끌려드는가 싶었는데, 그냥 꽈당하고 아프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정신차리고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괜히 치약바른 칫솔 입에 넣고 있다가 놀래서, 치약만 삼킨 거 같았다. 술기운에 겹친 잠기운이었다. 너무 일 열심히 했다. 아니 술을 너무 많이 먹었나. 헛것이 다 보이고. 누가 뭐라 그래도 내일부터 한 삼일은 칼퇴근 해야 겠다. 귀신의 기막히게 재수없는 표정 때문에 갑자기 잠이 달아나서 엎치락 뒤치락하는 밤을 보내고, 나는 다시 연구소에 출근했다. 이 날, 칼퇴근하려는 어젯밤 나의 결심 따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팀장이 이렇게 말했다. "여기 보고서에 나온 내용 읽어보고, 뒤에 나온 컴퓨터 주소로 접속해서 자료 좀 다운로드 받아봐요." "예? 그게 뭡니까?" "정리 좀 하고, 거기 나온 물질들 중에 쓸만한 거 좀 골라 달라고요. 이 일을 맡길 사람이 없네." "어디서 난 자료인데요?" "한매봉 교수 하고 왜, 지난 번 팀장하고 같이 공동연구하던거 있잖아. 근데 총격사건 때문에, 한매봉 교수랑 거기 학생들이 조사를 받는가봐. 그래서 그 사람들 컴퓨터 수색당하고 그러면 우리한테 줄 자료를 받을 수가 없게 된다고. 그래서 미리 좀 복사 받아서 보기로 했어." "아니, 그 테러범은 지금 한매봉 교수네 학생도 아니잖아요. 졸업한지 한참 되지 않았어요?" "이 시장, 이 자식이 그때 굉장히 겁먹었나봐. 보나마나 이 놈이 옛날에 나쁜 짓 많이 한거 같어. 지가 찔리니까 혹시 누가 자기 죽일까 겁이 나는 거야. 그러니까 경찰이 보기에... 물론 테러범이 대학원 졸업한 지 꽤 되긴 했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찔러보고 막 조사하는 척 해야 시장한테 잘 보일 거 같으니까 괜히 오바해서 조사하고 그러나봐." "그건.. 좀 이상한 짓 같은데..." "몰라, 내 생각엔 암만 봐도 그냥 낮 술을 왕창 먹었든지 해서 장난감 총 들고 헛짓 한 번 한 거 같은데...... 뭐 경찰이니 정치하는 놈들이니 다 하는 게 그렇잖어?" "그런데. 다 그렇다치고, 왜 한매봉 교수님 자료 정리를, 제가, 왜 제가 해야 하나요?" 라고 따져 묻는 마지막 질문을 달지 못했다. 나도 답을 아는 질문을 그렇게 반항적으로 해 봤자, "그래 그럼 너는 그냥 놀고 이 일은 그냥 날리도록 하지" 할 가능성도 없고, 괜히 그랬다가 욕만 들어먹고 성격 이상한 놈으로 찍히기만 할 뿐이다. 내가 성분 분석일 감독에 손을 대서 몇 번 좋은 성과를 내기도 했을 뿐더러, 사실 옛날 연구과제는 다 정리해버린 지금 우리 연구팀에서는, 그런 생소한 일을 이해할만한 사람은 나 정도 밖에 없었다. 망해먹을, 이 바닥에서는 일 잘해서 능력 좋게 보여 봤자, 괜히 일만 더 많이 할 뿐이다. 괜히 그러다가 진빠져서 헤롱대면 일찍 짤리기나 할거고.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팀장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팀장의 이가 좀 누렇게 더러워 보였다. 나는 왠지 내 이도 저렇게 보이지 않을까 싶어, 갑자기 막 이를 닦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상하게 갑자기 이가 좀 찝찝해 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산더미 같은 일거리를 안아들고, 마치 관 속에 들어가듯 내 자리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늘은 ㅤㅋㅏㅌ 퇴근 해서, 애인 집에 가서 수박 먹으려고 했는데. 이런 옹헤야 쾌지나칭칭 아리아리 쓰리쓰리 닐리리야 같으니. 두 시간 후. 결국 나는 팀장에게 출장계를 내고 수원에 있는 한매봉 교수님 연구실로 와야 했다. 접속할 컴퓨터가 방화벽에 막혀 있고 데몬도 돌아가지 않는 것이 많아서, 인터넷으로 자료를 빼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쾌지나칭칭 옹헤야 닐리리...... 한매봉 교수님 연구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오는지 나가는지, 멀뚱히 보기만 할 뿐, 인사 한마디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어린 대학원생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 친구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는 내가 가져갈 자료가 어느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지 물어 보려고 했다. 그 대학원생은 답하길, "어... 예... 그게... 교수님께 교수님께 물어봐야 하는데요." "교수님이 부탁하셔서 제가 온 거거든요." "그러시면... 옛날 자료는 서현이형 한테 물어봐야 하는데..." "그럼 그 '서현이형'한테 연락할 수 있습니까?" "서현이형은 형사들이랑 상담하러 갔구요... 어... 저... 아... 아마, 경원이형한테 물어보면 될 거 같기도 한데..." "그럼, '경원이형'한테 연락해 주시겠습니까?" 연구실에 남아 있는 그 유일한 학생과 답답하고도 지루한 대화를 약 4분 동안 더 한 끝에, 우리는 그냥 내 마음대로 연구실을 다 뒤져서 자료를 가져 가기로 하였다. 애초에 책상과 책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높다란 파티션들이 그 사이를 가로지른 연구실은 답답해 보였다. 연구실은 나무로 마루를 깔고, 그 위에 신발을 벗고 올라가게 되어 있었는데, 흡사 헌책방의 다락방 창고 같은 분위기였다. 그 중에서도 더 혼랍스럽게 종이무더기들이 쌓여 있는 옆방이, 내가 뒤질 방이었다. 분명히 사들일 때만 해도 수천만원쯤은 되었을 IBM의 워크스테이션들이 먼지만 보얗게 앉아 건드리는 사람 하나 없이 윙윙거리며 도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사이를 아무도 신경도 쓰지 않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지만, 버리면 큰일나는 이상한 종이뭉치들이 그득그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먼지구덩이를 한 참 뒤지고 나서야, 내가 접속할 컴퓨터의 콘솔을 찾아냈고, 연구소의 내 컴퓨터에 접속해서 자료를 전송시켰다. 자료가 올라가는 동안 나는 근처에 있는 선반이며 서랍들을 뒤졌다. 그 밖에 이런저런 서류며 CD들도 좀 챙겨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여기에 뭐가 남아 있으면, 경찰들이 압수 수색을 안한다고 해도, 자료를 건지기는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자료들을 뒤지던 끝에 나는 테러범이 옛날에 쓰던 서랍을 발견했다. 테러범, 이 친구도 한매봉 교수님 밑에서 박사 과정 학생으로 있을 때, 우리 연구소와 무슨 협력 연구를 했다고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의 죽는 모습이 다시 생각나서 섬뜩했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생겨서 - 또한 거기도 분명히 뒤져야 하기도 했기에 - 그 서랍을 열어 보았다. 서랍은 묵직했다. 서랍 안에는 내가 가져가야할 CD 몇 장과, 개봉도 하지 않은 치약이 자그마치 서른 아홉통이 들어 있었다. 서른 아홉통의 치약. 아마 기념품이나 상품으로 나눠 주려고 많이 샀다가, 남은 것을 여기에 보관해 놓은 것이겠지. 누가 쓸데 없이 치약을 수십통씩이나 자기 서랍에 쟤 놓고 쓰랴. 갑자기 나는 이 어두침침하고 공기가 탁하고 비좁아빠진 연구실에서 도망나오고 싶어서 부랴부랴 가방을 싸서 다시 연구소로 돌아 왔다. "미안해. 갑자기 팀장이 일을 맡겨서 오늘 수박 먹으러 못 갈거 같으다." "일 좀 너무 많이 하지마. 좀 째면서 해." "일을 째면서 하라니. 이거 팜므 파탈 스러운거 아니냐?" "팜므 파탈이라니. 다 내가 너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세상에 나만큼 너 생각하는 사람 누가 있니. 그러다가 몸 상하면 말짱 도루묵일세." "그런 의미에서 내일 저녁에 우리 만나서 어디 도토리묵이나 먹으러 갈까." "음. 그 유머감각, 그냥 보상기변 해 버려라." 진심으로 아쉽게 나는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전화를 했다. 아쉬움이 아니라 사실은 강한 분노와 짜증이었다. 사랑하는 여인과 여유로운 저녁 대신, 2시간 마다 한 번 씩 다운되는 컴퓨터 앞에서 먼지 풀풀 날리는 옛날 자료라니. "세상에 나만큼 너 생각하는 사람 누가 있니." 상투적으로 느껴질만한 대사 였지만, 조선 시대 헤어스타일이라기 보다는 그날 따라 가슴에 무척 와닿는, 그녀의 정이 느껴지는 표현이었다. 조선 시대 헤어스타일이 상투적이라. 음. 유머 감각 보상기변 해야 겠다. 나는 전송된 자료들을 하나 둘 읽기 시작했다. 지겨운 내용들이었다. 여기 저기에 쓰이는 촉매나 보조 물질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철판에 금도금을 시킬 때, 한매봉 교수가 개발한 촉매를 좀 더 뿌려주면, 시간을 2시간 30분에서 2시간 28분으로 줄여 줄 수 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읽다보니, 대학원생들이 억지로 결과 만든다고 어줍잖은 솜씨로 실험결과 숫자를 꿰어 맞춘 것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그걸 붙잡고 고민하고 있었을 과거의 그 학생들이 떠오르니, 나는 빙그레 웃음이 떠오를 지경이었다. 테러범 학생이 연구하던 것도 비슷한 것들이었다. 테러범 학생의 이름은 이구일이었다. 이구일의 연구 결과는 딱히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사기와 헛짓으로 점철된 다른 많은 연구들보다는 대체로 나은 편이었다. 그의 연구는 그래도 많은 노력과 정성이 들어 간 것이 보였고, 도금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2시간 30분에서 2시간 28분으로 줄이는 게 "한국 과학 기술력의 경쟁력 강화의 혁신 과제"와 아무 상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연구가 그나마 그렇게 쓸만한 것이었기에, 우리 회사 연구소와 합작 연구를 했던 것도 그 친구가 손을 댄 것이 많았다. 한매봉 교수와는 꽤 긴시간 공동 연구를 했기 때문에, 그 친구가 대학원에서 학생으로 있던 7년 동안 거쳐간 우리쪽 연구원의 숫자도 많았다. 게중에는 박사후 연구원 겸 파견 직원으로 있던 팀장의 이름도 있었고, 지금은 상무가 된 조 박사님의 이름이나, 얼마전에 부사장에서 사장이 된 우리 회사 사장의 이름도 끼어 있었다. 이구일이 우리 회사 사장이랑도 같이 연구한 적이 있단 말이야?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누군가 내 어깨 위에 슬며시 손을 올렸다. 설마, 또 귀신? 하면서 고개를 돌려 보니, 혜옥 선배였다. "넌 또 야근이냐?" "몰라요. 선배 짜증나 죽겠어요." "야, 목소리 낮춰. 팀장 들을라." "들으라 그래. 뭐 내가 짜증 안나고 상쾌한데, 짜증난다 그러나?" "그런즉, 그대의 짜증을 덜어주기 위해 내가 저녁 사주께 나가자." "저녁이요?" "어. 엊그저께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좀 이상하게 마무리했었잖아. 미안하기도 하고 오늘 내가 맛있는 거 사주께." "아뇨. 공연 보여 주셨는데, 저녁은 제가 살께요. 뭐 드시고 싶으세요?" 자꾸 얻어먹기만 하면, 괜히 관계 이상하게 돼서 오히려 그녀에게 더 의식할 분위기만 조성할 뿐이다. 사실 또 내가 저녁 사는게 상식과 조리에 부합하기도 하고. "으음... 가짜 트뤼플 먹으러 갈까?" "그냥 송이 버섯 트뤼플 분위기로 만든거는 어떻습니까?" "안내하시게." 혜옥 선배가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데, 잇몸이 상했는지, 피가 흘러 이가 붉게 보였다. 혜옥 선배도 혀에 그 맛이 느껴지는지, 혀로 이를 닦아내며 고개를 돌려 걸어 나갔다. 날씨는 더운 편이었지만, 해질 무렵이 되자 바람이 솔솔 불어서 길에 내놓은 테이블에 앉아도 나쁘지 않았다. 이 곳 주방장의 솜씨가 오르락 내리락 널뛰듯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다행히 오늘은 음식이 꽤 맛있는 편이었다. "야, 너 뉴스 봤어? 그 테러범 있잖어. 옛날에 시장이 환경부 장관으로 있을 때 막 진정서 같은 거 많이 보냈었다던데." "진정서요? 무슨 진정서?" "몰라. 하여간 괜히 진정서 보내다가 찍혀서 취직도 못하고 그렇게 됐나봐." "그런데 무슨 진정서 껀이길래 진정서 안 받아 줬다고, 벌써 몇 년도 지난 일을 가지고 그런 이상한 퍼포먼스를 펼쳤데요?" "소문에는 자기 연구 결과를 뺏아갔다고 생각해서 그거 찾으려고 그랬다는 거 같던데. 아마 원래 좀 성격이 이상한 사람이었는데... 취직도 못하고 억울한 일도 당하고 그러니까 어떻게 맛이 가버린 거 아닐까?" 혜옥 선배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부드럽게 맞장구 치는 분위기로 가다가 잠시 대화를 세웠다. 오늘 살펴본 연구 기록을 보면, 그 테러범 즉 이구일이라는 사람은 성격 이상한 사람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한매봉 교수님 연구실의 역대 학생 중에서, 그 친구가 제일이라고 하기에는 좀 뭣해도, 사실 그 친구만큼 똘똘하고 정상적인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무슨 사정이 있었겠죠. 사실 그런거 보다는 그냥 다른 일 때문에 자살 하려고 하는데, 그냥 좀 특이한 방법을 택한 거 아닐까요." "그러게 그 나이가 되도록 취직도 못하고 결혼도 못하고 혼자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으니, 뭐가 꼬이면 잘못 마음 먹을 만도 하다. 미친놈만 불쌍한게지." 어두운 이야기를 접고, 좀 밝고 경쾌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웃고 넘어가는 이야기마다 갑자기 손등을 꼬집거나 얼굴에 손을 얹는 혜옥 선배의 동작들이, 이상하게 교감신경을 살포시 자극했다. 아마도 지금 시각에는 사실 수박 먹으면서 저녁 텔레비전을 그녀와 같이 보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혜옥 선배는 종업원에게 물을 한잔 달라고 했다. 핸드백에서 칫솔과 치약을 꺼내더니 갑자기 이를 닦기 시작했다. 식당 테이블 앞에 앉아서 이를 닦다니. 나는 좀 당황스러웠지만, 뭐라고 욕을 하기에는 또 좀 그렇고 해서 그냥 엉거주춤하게 있었다. 꽤 거세게 이를 닦는지, 좀 길게 이를 닦는 선배는, 흰 치약 거품에 또 잇몸에서 나온 피가 섞여 나왔다. 혜옥 선배는 거품을 빈 컵에 뱉고는 입을 헹구었다. "아, 쫌. 보기 그렇지? 미안. 치과에 갔더니 꼭 이를 바로 바로 닦으라고 그래서 말이야." 그제서야 혜옥 선배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보이고 그렇게 말했다. 엑. 무슨 잇몸병이라도 있는 것인지? 그러면서도 지난 번에 술마시고 내 입술을 덥쳤단 말인가. 그만그만 거기까지. 나는 잡다한 생각을 접고, 그냥 오늘 밤에 할 일만 최대한 빨리 끝내고 집에 가는데만 집중하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밤 늦은 길에, 나는 우리 집 근처의 할인 매장에 들렀다. 내일 맛있는 음식을 할 재료를 사 놓고, 집에서 저녁을 해서는, 그녀를 불러 대접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혜옥 선배랑 저녁 먹은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 덜기? 나는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하고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할인 매장을 둘러보는데, 냉장고 매장 있는 쪽에, 꼭 그녀와 비슷한 직원 하나가 있었다. 같은 회사 매장이긴 했지만, 그녀가 근무하는 곳은 저 머나먼 잠실 아니었던가? 이상했지만 나는 그래도 굉장히 반가워서 홀리듯 그 직원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 직원은 멀리서 보니까, 황당하게도, 세워 놓은 냉장고 문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냉장고 안에 애인을 넣는 백 가지 방법? 나는 무슨 짓인가 싶어, 매장 안의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뛰어서 냉장고 앞까지 갔다. 냉장고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그녀도 없고, 다른 직원도 없고 아무도 없었다. 정말로 냉장고 안에 숨은 것인가? 나는 냉장고 안을 천천히 열어보았다. 냉장고 안에는 까만 옷을 입은 귀신이 나를 쳐다 보고 있었다. 귀신은 기괴하게 접혀져 처박혀 있었다. 다만 고개를 처들어 목을 주욱 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빨간 웃는 입술이 귀 아래까지 찢어져 있고, 가지런한 이빨들. "귀이레리크릭-" 나는 "귀신이다" 라고 소리치려다가 그렇게 말을 더듬으며 비틀비틀 했다. 귀신의 노려보는 눈. 덩치가 큰 나는 뒤에 부딪혀 다리미와 헤어드라이어가 걸려 있는 판매대를 밀치며 쓰러졌다. 그 큰 판매대가 기우뚱 넘어지려고 하자,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날렵하게 - 내 생각에는 - 몸을 날려, 그 판매대를 잡았다. 악마 무거웠다. 그러나, 이걸 와장창 다 무너뜨리면, 쪽팔리기도 쪽팔릴거니와 깔려서 깨진 다리미를 물어 내라고 하면 돈도 와장창 깨질 것이었다. 나는 온몸을 바쳐, 도대체 이 상황에서 젖 먹던 빠는 힘을 덧 붙인다고 무슨 도움이 되랴 마는 하여간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겨우겨우 넘어지던 판매대를 세웠다. 그리고 나서 다시 냉장고 안을 보니, 거기에는 냉장고 벽에 때 타지 말라고 발라 놓은 검은 종이와 스티로폼, 비닐 뭉치들이 차 있을 뿐이었다. 이틀 연속으로 망할 놈의 허깨비 때문에 무서워져서 잠을 설친 나는, 다음날 충혈된 눈으로 연구소로 출근했다. 잠이 안 왔으니, 나는 일찍 일어나서 그냥 새벽처럼 나선 것이다. 일찍 나온 만큼 오늘 일은 빨랑 끝내야지. 그래서 일찍 들어가서 정말로 그녀랑 저녁이나 같이 해먹으면서 짝짜꿍해야지. 그러고나면 이상하게 좀 붕뜬 거 같은 요즘 생활도 차분하게 가라 앉을 것이다. 그러나, 칼퇴근은 칼 같이 끊겨 나갔다. 갑자기 유보정 상무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 아닌가. "혹시, 마이애미로 출장 좀 갔다 오겠어요?" "미국 플로리다의 마이애미 말입니까?" "아무렴. 내가 우리 엄마를 마이 맘이면 마이 맘이고, 우리 에미면 우리 에미지, 마이애미라고 하겠어요?" 아무리 상무님이지만, 그런 유머에는 웃을 수는 없습니다. "마이애미...에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 거기, 거기 로열 캐리비안 크루즈라고, 그 앞 바다 쪽에서 배타고 한 3일 파티 하는 게 있어요. 업계 쪽 CEO들하고, CTO들 뭐 그런 사람들 주로 참여하는 행사거든요." "그런데, 제가 거길 왜 가나요?" "아, 그 사장님이 이번에는 경험삼아 우리 연구원들한테 참가할 기회를 주기로 했거든. 그래서, 영어 잘하고, 일 잘해서 평 좋은 사람으로 뽑다 보니까." "그냥 파티만 참석하고 오면 되는 건가요?" "사장님 말씀이... 그냥 부담없이 사람들 만나고 얼굴 익히고, 그런 큰 모임 분위기도 좀 알고 그러라는 거래요." 어제 일 많이 맡겼다고 투덜거린 것 취소. 연구원들을 영구..원들로 아는 이 회사가 이런 일을 다 벌이는구나. 싶어서 나는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워낙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나는 반사적으로 곧 엄청난 후회를 할 말을 내 뱉고야 말았다. "그런데, 제가 요즘 좀 급하게 맡은 일거리가 많아서요, 이게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나는 "어떻게" 까지 말했을 때, 도대체 내가 뭔 소리를 하는 것인지 깨달았건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한 말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회사에서 대서양의 눈부신 해변에서 여유롭게 호화 크루즈를 즐길 기회를 준다는 데, 나는 그 대신 이구일의 곰팡이 핀 연구 보고를 정리하겠다고 한 것이다. Cancel, Undo, Back, Reset, 그런 버튼들이 상무님 어딘가에 달려 있으면 그걸 마구마구 누르고 싶었다. "걱정 말아요. 사장님이 특별히 지시하신 일이니까. 내가 신 팀장한테는 잘 말해 놓을게요." "아하하핫,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웃음을 숨기기 어려웠다. 자리로 돌아와 보니, 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좋-겠다. 크루즈... 난 언제 회사돈으로 그런데 한 번 가보나. 사장님이 지시하셔서 지금 하는 일 멈추고, 일단 출장 준비 하라고 하셨으니까, 자네 후임은 내가 그냥 알아 보지 뭐. 요즘에 야근 많이 했으니까. 괜히 너무 무리해서 억지로 마무리 지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접어." 라고 하는데, 팀장의 표정이 어린 후배 - 나 - 에게 약간의 질투를 느끼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이번에도 반사적으로 후회할 말을 했다. "그래도, 하던거는 대강 정리해 놓겠습니다. 최소한 다른 사람이 뒤이어 맡아도 뭔지는 알게 해 놓아야죠." "그래? 그런가. 그러면 오늘까지 하던거만 대강 마무리해 놔. 그리고 출장에 동반인 1인 데려 갈 수 있으니까 서류 준비하고." 그리하여, 나는 또다시 끝없는 야근의 행렬에 하나의 행과 열을 더 추가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도 뭐, 그래. 오늘 그녀와 저녁을 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전화를 해서 마이애미로 크루즈 여행을 같이 갈 수 있게 되었다고 알려주면 분명 굉장히 좋아할 것이다. 나는 갑자기 확 들떠 버렸다. 다만 나에게 마이애미 행을 제안하는 상무의 표정이 이상하게 요즘 본 귀신의 표정을 생각나게 하는데가 있어서, 좀 떨떠름할 뿐이었다. 이 모든 일들의 결과로 나는 그날 밤, 또다시 혼자 연구소에 남아 컴퓨터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혼자 남아 있으니, 또 그 귀신이 어디서 툭 튀어나오지나 않을까 싶어서 괜히 겁이 났다. 나는 그래서 연구소에 비틀즈의 "Meet The Beatles" 앨범을 틀어 놓고, 볼륨을 좀 시끄럽다 싶이 높였다. 이거 또 이랬다가, 내일 아침에 팀장이, "이보게.... 우리 연구실 컴퓨터에는 사운드카드가 없어...... 그건 귀신이 노래한거야~" 하는 공포스러운 반전이 생기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내일 아침의 반전은 내일 아침이고, 야밤에 혼자 요란한 컴퓨터 냉각팬 소리만 가득한 연구소를 버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서 계속 노래를 틀어 두었다. 나오던 노래가 "This Boy"에 이르러, 노래에서 "Oh~ oh~ that boy~"하는 부분이 나올 때, 나는 이구일의 연구 결과 중에 신기한 것 한 가지를 찾아 냈다. 그것은 2년전 7월 25일자로 일부가 삭제된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는 분명히 완성된 형태로 보존되어서 특허등록을 준비하는 형태였는데, 꼭 일부러 특허 등록에 탈락을 받으려는 듯이 몇 군데를 날려 놓았던 것이다. 그 특허는 "아미노카프로산 촉매"에 관한 것이었다. 이 사람이 특허까지 구상한 것인 만큼, 이 "아미노카프로산"이라는 물질은 금 도금하는 속도를 3분더 단축해 준다든가 하는 것 보다는 훨씬 더 쓸모 있는 것임이 분명할 것이다. 이 사람의 연구 결과의 핵심을 정리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 이 사람이 특허출원을 시도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확인하는 문제는 꽤 중요했기에, 나는 이 사람의 특허출원과 관련된 내용을 특허청에서 다시 검색했다. 그런데, 검색 결과는 점입가경이었다. 이구일이 출원한 특허의 내용, 즉 "아미노카프로산"이라는 물질에 대한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는 특허가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 회사 사장이 옛날에 제출했던 특허였다. 그리고 그 특허는 저 유명한 "낙하산 특허"였다. "낙하산 특허"란 사장이 연구원이었던 시절에 마지막으로 제출한 특허였다. 회장의 네번째 손자였던 사장은, 애초에 연구 실적이 그다지 뛰어나지를 않아서 사장으로 뛰어오를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다. 사실 연구소 사람들은 그의 실력을 좀 무시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떤 특허 하나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물론 특허 내용 자체도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별 내용 없어. 회사에 아무 도움 안되는 거야." 라며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과학적으로 그다지 말이 되는 내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나, 이휘재 진짜 애인과 연구원들 승진운은 아무도 모른다. 그 대단찮아 보였던 특허를 제품에 적용하자, 희한하게도 품질은 급격히 향상되었고 시장을 휩쓸기 시작한 것이었다. 결국, 그 공을 인정 받아 사장은 사장이 될 수 있었고, 우리는 연줄의 힘은 과학마저 뒤엎는 다는 뜻의 농담으로, 그 특허를 "낙하산 특허"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강 떠오르는 시나리오가 있었다. 이구일과 사장은 공동연구를 통해 아미노카프로산 촉매를 개발했는데, 사장이 특허를 독식하고 회사에서 공을 세우기 위해 이구일에게 제안을 했던 것이다. "만약에, 이 특허를 내가 독식하게 해 주면, 졸업한 다음에 내가 우리 회사에 특채하고, 연봉도 좀 얹어 주겠다." 손바닥만한 이 바닥에서, 몇 군데 취직할 구멍이 막히면 바로 장기 실업자가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런데, 특허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기만 하면, 회장의 손자가 취직을 보장하지 않는가. 어차피 대학원생이 특허를 들고 있어 봤자 언제 돈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구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구일은 특허를 사장에게 넘겼던 것이다. 그런데, 사장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구일을 배반했던 것이다. 왜 배반 한 것일까? 연구원 한 명 채용하는데, 서류 몇 통에 면접 몇 번으로, 그 친구가 하늘이 내린 헤르츠나 라부아지에의 환생인지, 아니면 액셀이랑 한글이 유일한 특기인 대학원생인지 판별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가 특허를 빌어올 만한 학생이면 사실 채용해 쓰는 게 옳은 일일 법도 한데, 왜인지 사장은 이구일을 채용하지 않은 것이다. 이구일이 특허를 잘라 준 일을 떠들고 다닐 것을 우려해서 였을까? 아니, 그런 소리 하다가 이구일 자기도 잘릴게 뻔한데, 왜 그러고 다니겠는가. 나에게는 마이애미행 티켓을 보내 주었지만, 사실은 사장이 굉장히 잔인한 사람이기 때문에?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간 이런저런 악감정이 쌓인 이구일은 그 때 부터, 사장을 공격하기 위해 언론사며 정부 기관에 이런저런 밀고를 하고 다녔나 보다. 그 중에서 특히 지금 서울 시장이 장관으로 있던 환경부에 주된 밀고를 했는데, 그 때 너무 무시를 당해서, 한이 맺힌 나머지 세종로에서 그날 그랬던 것이다. 잠깐만, 그런데 한이 맺혀서 하는 짓이 시장 앞에서 목숨을 건 코메디쇼? 잠깐만, 다시. 그런 문제라면 제일 밀고를 많이 해야 하는 곳은 특허청이나 노동부 아닌가? 왜, 환경부에 밀고를 했던 것인가? "Close your eyes, and I'll kiss you-" 거기까지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런 노랫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내 전화벨 소리였다. 전화를 집어드는 데 또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받으면, "나 귀신이다" "헉, 어딨는데요?" "지금 너 뒤에!" 이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열었다. "지금 어딨어?" 전화에서는 그런 말이 들렸다. 그건 내가 물어볼 질문아닌가? 나는 얼떨결에, 내가 "지금 너 뒤에!" 이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바보 아냐?) "여보세요?" 다시 묻는 목소리를 듣고 정신이 들었다. 그녀였다. 온 몸이 나른해지는 듯한 안도감이 몰아닥쳐 왔다. "아,아, 아.. 아직 연구소." "뭐야, 아직도 퇴근 안했어?" "어. 할일이 좀 많아서." "할일이 많아도 이 사람아 정신을 차리고 해야지. 지금 몇신 줄 알어? 열두시가 되도록 거기에 있으면 어떡해." 열 두시가 되면 귀신이라도 나온다는 것인지...? "너 열두시 되면 차끊기잖어.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사니?" "아, 그래 맞다 맞어. 맞아. 어. 야, 아직 한 1분 11초 정도 남은 거 같으다. 빨랑 짐싸서 가야 겠다."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 끊어." 나는 허둥지둥 짐을 챙겨서는 후다닥 사무실 불을 끄며 뛰어 나갔다. 그러고보니, 마이애미로 크루즈 여행 갈 수 있게 됐다는 말을 못했네. 분명히 되게 좋아했을 텐데. 그날은 다행히 금방 잠에 들었지만, 대신 악몽에 시달렸다. 결국 잠을 설치기는 매한가지였다. 아침에 전화 알람 소리에 눈을 뜨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내려 쪼이는 뜨거운 햇빛이 나를 놀리는 듯 했다. 오늘은 도표 작성까지 깔끔하게 끝내야지. 그리고 내일 부터는 마이애미 출장 준비나 해야지. 나는 한매봉 교수와 공동 연구한데서 나온, 도합 34개의 물질을 도표로 정리하기 위해, 혜옥 선배팀의 화합물 비교 추천 프로그램을 돌리기로 마음 먹었다. 34개의 물질을 일일히 조사하고, 성질을 알아내고, 특성을 측정한다는 것은 굉장히 귀찮고 오래걸리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나는 후임자에게 대강의 자료를 넘기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그렇게 정확한 결과는 별 필요가 없었다. 화합물 비교 추천 프로그램은, 어떤 물질을 입력해 넣으면, 최대한 다양한 정보를 계산해서 그 물질과 가장 비슷한 다른 물질을 추천해준다. 그러면, 그 추천된 물질을 토대로 원래 물질의 성질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 프로그램에 어떤 물질을 입력했는데, 사카린과 비슷하다고 결과가 나왔다면, 우리는 그 물질이 달콤한 맛이 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만약에 이 프로그램에 착한 아이 감기약을 입력해 넣는다면, 프로그램은 판피린 에프를 추천해 줄 것이고, 둘 다 비슷한 용도로 쓰이는 비슷한 성질의 감기약임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34개의 물질을 프로그램에 입력해 넣고는, 계산이 완료되기를 기다렸다. 서버에 사람이 몰려 들지 않아서 빨리 계산이 끝난다면 반나절이면 끝날 것이고, 오래걸린다면 내일 아침까지는 걸릴 것이다. 마침 나는 연구소 복도에서 혜옥 선배와 마주쳐 물어 봤다. "혜옥 선배 오늘 추천 프로그램 서버에 사람 없어요? 빨랑 돌아야 되는데... 아참, 저 마이애미로 크루즈 가요." 혜옥 선배는 똑바른 대답없이, 그냥 "어, 잘 모르겠네."하고 지나쳤다. 굉장히 이상한 얼굴 표정이었다.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 다문 입. 그 입에서는 피가 번져나와 흐르는 것 같았다. 어디 아픈 것이든지, 아니면 귀신에라도 씌인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려니 하고 대강 잊고는, 나는 하루 종일 계산 결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쓰잘데 없이 그녀에게 "바보야" 같은 문자 메세지를 보내다가. "맞는다" 같은 답 문자 메세지를 받는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결국 또다시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겨, 해가 지고나서야 계산 결과가 나왔다. 서른 네 개의 연구한 물질들과 비슷한 알려진 물질들과, 그 물질을 토대로 추정한 연구 물질들의 성질 예상값이 도표로 쏟아졌다. 이제 편집해서 붙여 넣기만 하면, 한매봉 교수도, 이구일도, 끔찍했던 총격전 장면의 기억도 안녕이었다. 혼자 남은 텅 빈 사무실에서, 갑자기 나는 다시 뭐가 섬뜩한 것이 나타나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허겁지겁 인터넷을 열고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시장. 환경부 장관. 이구일. 특허. 혜옥 선배. 검색 결과는 생각대로 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혜옥 선배가 있는 옆 사무실로 뛰어갔다. 텅빈 사무실에는 혜옥 선배가 혼자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불을 다 끄고 있었지만, 컴퓨터 화면에 비쳐 그 얼굴은 분명히 보였다. 혜옥 선배는 웃는 표정인 듯 보이는 기괴한 얼굴로 치약을 입에 대고 짜 먹고 있었다. 치약이 흘러나와 상처난 잇몸에서 흘러나온 피와 뒤섞였다. 그것은 징그러운 붉고 흰 색깔을 만들며 입가에 흘러내렸다. 그 피 거품은 목을 타고 흘러내려 선배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선배 옆에 피묻은 칫솔이 널브러진 것이 보였다. 혜옥 선배는 끓는 소리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치약을 꿀떡꿀떡 삼키고 있었다. "선배!" 그 장면은 명백한 증거였다. 눈 앞이 아찔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