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멕시코 속담에 그런 말이 있다. "한번 멕시코의 흙먼지를 맛 본 사람은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그러한 평안함을 잊지 못한다." 굉장히 뒤숭숭한 정신상태로 기숙사에 돌아오니, 재찬은 여느 때처럼 컴퓨터 화면 앞에 붙어 어느 외국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이 나른하고 가라앉은 분위기. 엷게 퍼지는 여유로운 무의미함. 그 모습은 울산바위나 구룡폭포처럼, 마치 수천년 전부터 자연의 일부로서 그 자리에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동영상을 보며 여가시간을 보내고 있는 재찬의 모습은, 바로 그 멕시코의 흙먼지 같은 것이었다. "야, 재찬아 큰일 났다." "왜? 뭐야?" 재찬은 이어폰을 한쪽만 빼서 귀를 열었다. 시선은 화면을 계속 보고 있었다. '스테레오로 들어야 사운드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데, 빨랑 대화를 끝내고 다시 정식 동영상 감상에 돌입하자.' 그런 생각이 텔레파시처럼 나에게 전해졌다. "자전거 타는 거 배우는 데 얼마나 걸릴까?" "그게 뭐 배울게 있냐? 그냥 한 두 시간 타보면 알 수 있어." 전혀 아무런 신뢰감이 생기지 않는 무성의한 어조였다. "나 자전거 사러 가야겠다. 같이 가자." "뭐? 자전거? 왜?" 재찬은 단축기를 눌러 동영상을 일시 정지 시킨 후, 그제서야 의자를 돌려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몰라. 그냥 그렇게 되었다." 그러면서 말을 때우다가, "말해봐. 뭔데. 너 또 뭐 저질렀냐?" "알거 없고." 그렇게 실랑이를 하고는 재찬에게 사실대로 사연을 말했다. 재찬은 몹시도 흥겨워 하며 나를 비웃었다. 자전거 타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리 없었다. 지금 갑자기 자전거 타는 것을 연마한다는 게 좀 뜬금없긴 해도, 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떠벌려 놓은 괴언을 수습할 길은 오직 그것 뿐이었다. 잽싸게 자전거를 한 대 사서 타는 법을 익힌 후에, 다음 주에 영화보러 갈 때 그녀를 만나서는, 익숙하게 십수년 전부터 자전거 타는 법을 알고 있었던 척 하면서 유유히 그녀를 태우고 들어 오면 된다. 그리고 그러고나면, 드디어 나는 자전거 타는 법도 익히게 되고, 또 자전거도 생기게 된다. 그러면 어린시절 이루지 못했던 공백을 하나 깨끗하게 메우는 것이기도 하며, 동시에 이제 하염없이 두 다리로 걷는 대신 남들처럼 날쌔게 자전거를 타고 신속함을 즐길 수 있다. 이러한 부가적인 효과도 있는 좋은 해결책인 것이다. 괜한 말 실수로 쓸 데 없이 신경써야 할 일이 하나 생겼다는 그 원인 자체가 나쁠 뿐이지, 힘들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3시간 후. 나와 재찬은 두 시간째 더위에 시달리며 동네의 자전거포들을 뒤지고 있었다. "더 이상 더 뒤지는 건 바보 짓이야. 그냥 아무거나 사." "저기 저 초등학교 뒤에 있는 집까지만 보고 결정하자." 재찬은 짜증을 냈다. 우선 자전거를 사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녀에게 한 시간 동안 꾸며댄 그 환상속의 자전거와 똑같은, 적어도 비스무리한 자전거를 찾아내야 했던 것이다. 아무렇게나 지어내는 대신 길가에 눈에 많이 띄는 모델을 보고 참고해서 말했으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번도 내 자전거를 갖고 있지 않던 나는, 자전거에 대해서 진지하게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적 역시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내 머릿속 한 구석에 저장되어 있던 자전거의 이미지란, E.T.에서 하늘을 날아오르던 자전거나, 레모나 광고에서 롯데가 내보내는 화면속의 자전거 같은 것들 뿐이었다. 그나마 그게 일관성 있게 하나만 펼쳐지면 다행일 것일진데, 내가 그녀에게 떠들어댔던 모습은 60년대 영화속의 자전거와 지난밤 스포츠 뉴스에서 펼쳐졌던 산악자전거의 모습까지 이것 저것 뒤섞여 있던 모양새였다. 사실 이게 무슨 완전범죄를 기획하는 것도 아니요, - 사실 완전범죄를 기획하려는 것이다 - 그녀가 새로 도입한 기자재 감사하듯 꼼꼼히 목록을 갖고 검사할 리도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그녀에게 말한 내용을 정확하게 따르는 모델을 살 필요는 없었다. 나도 그걸 아는데, 이상하게 내가 상상한 내 자전거의 모습과 대강 닮은 것조차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이건 뭔가 안좋은 조짐이었다. "자전거가 무슨 뭐 그렇게 많이 중요하냐? 그냥 내 자전거 빌려줄테니까 그걸로 연습해. 니 자전거 고장나서 맡겨 놨다고 하고, 그냥 내 자전거 빌려가서 타고 폼만 잡으면서 오면 되잖어." 여섯 번째 자전거포를 나오면서 재찬은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 시나리오 속에서는 다음주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내 자전거를 확보하는 일을 해야 한다. 기왕 그럴바에야 지금 내친김에 내 자전거를 사두는 게 낫다. 게다가, 나는 정말 내 자전거를 갖고 싶었다. 1차적으로 나는 거짓말을 수습하기 위해서 자전거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 곧게 뻗은 길을 달리는 모습을, 나도 한 번 진심으로 만들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달릴 때, 옆 얼굴을 스칠 미풍을 생각해 보라. 그 옅은 바람이 지치고 지나가며 이어져서는, 그대로 그녀의 머리칼을 약간 흐트리며 빠져 나간다. 그러면 그녀는 한손을 뻗어 머리를 다시 만질 것이다. 그런데, 그 때 타고 있는 자전거가 사기치고, 재찬이 자전거 빌려온 것이라면? 이거 얼마나 우중충한 설정인가. 아니다. 나는 정말 내 자전거를 사야 했다. 나는 재찬이에게 오늘 저녁 피자와 맥주를 모두 내 돈으로 사준다고 달래서 결국 네 군데의 자전거포를 더 둘러보고 상상속의 내 자전거와 완벽히 부합하는 모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자전거값 피자값과 맥주값을 합치니 지난 두 달간 틈틈히 지나 봐주고 정애 선배에게 받은 돈이 산산히 흩어졌다. 어쨌거나 그 날 저녁 나는 사상최초로 나의 자전거를 두 손으로 잡고 옆에 끌고 돌아 올 수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탈 줄 모르니까 그렇게 끌고 들오 오는 수 밖에. 그러나 기분은 약간 감개무량하기까지 했다. 다시 기숙사로 걸어들어오는데, 내 자전거가 굉장히 멋있어 보였다. 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모습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왠지 성능도 아주 좋을 듯 했다. 이것이 나의 자전거. 나의 이동수단. 스쿠터 이름을 택트리안이라고 붙였다고? 그러면 나의 이 특급 멋진 자전거는 "바이클스" 쯤의 이름이 어떠한가. 약속대로 피자와 맥주를 먹으며, 또 컴퓨터 게임으로 재찬이와 다섯번 대결해서 다섯번 모두 패하면서 우리는 저녁을 보냈다. 그리고, 나는 재찬이와 함께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으슥한 기숙사 뒷길로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이제 자전거를 배울 차례였다. 나는 재찬의 설명대로 자전거 핸들을 꼭 잡고 페달을 밟을 준비를 했다. 10년전과는 달리 뒤에서 잡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앞으로 쭉 빨리 가버려. 속도가 붙을 수록 안넘어지니까 그냥 쭉 가면 돼. 그게 다야." 재찬은 멀찌감치 뒤에서 보고 있었다. 핸들을 잡은 손에서 약간 땀이 났다. 아무리 친한 친구고 룸메이트지만, 이 나이에 이 덩치로 자전거를 못 타서 자빠지면 꽤나 쪽팔릴 것이다. 나는 용맹하게 땅에 딛고 있던 두 발을 떼고 페달에 발을 딛었다. "괜찮어? 안다쳤냐?" 잠시 후 혼비백산하며 재찬이가 쓰러져 있는 내 옆으로 뛰어 왔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10년전에 공원 잔디밭에서 아버지께 배신당해 쓰러졌을 때보다 다섯배쯤은 더 아픈 거 같았다. 여기는 잔디밭이 아니라 시멘트로 포장된 길바닥이었고, 나는 그 때보다 세 배는 더 덩치가 커져 있었다. 그러니 그 운동량과 충격량은 얼마나 더 컸겠는가. 더군다나 그 때처럼 눈물을 흘리며 분노를 발산할 대상도 없고. 그저 수치심과 육체적 고통만이 마음속 한 가득 메아리칠 뿐이었다. 2차 시도. 3차 시도. 넘어지는 방향과 각도의 문제였지, 출발 10미터를 채 못채우고 굉음과 함께 자빠지는 것은 똑 같았다. 유일한 발전 사항은. "그렇게 자빠지다간 자전거가 부서지겠다. 넘어질 때 몸을 요렇게 돌리면서 다리를 짚어. 그러면 너야 시멘트 바닥에 나뒹굴겠지만 자전거는 그래도 별로 안 상할거 같으다." 라는 재찬의 지적이었다. 매정한 말이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이 자전거를 부숴 먹으면 모든 게 끝이다. 만약에 자전거가 박살이나서 오늘 저녁 자전거를 처음 사서 끌고 들어올 때 치솟았던 희망이 그 좌절감으로 내리 꽂을 때의 심정은 어떠할까. 나는 그 다음부터는 온몸이 멍투성이가 될 지언정 자전거는 지키겠다고 결심했다. 우리는 수십번쯤. 정확한 횟수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 생각에는 한 2천번쯤 나자빠지며 자전거 타기를 연마하다가 결국 철수하기로 했다. 자전거 타는게 뭐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그걸 못해서 우당탕 거리고 있는 나를 보고 재찬은 안타까워 했다. 재찬은 불쌍히 여기다가, 나중에는 자기가 아무리 조언을 해 주어도 아무 변화가 없는 나를 보고 약간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재찬은 나를 보고 놀라며, "너 피나 임마. 으에... 줄줄흐른다. 고만해 고만. 그만하고 방에 들어가자." 라고 했다. 재찬의 만류로, 10년만에 시도한 나의 두 번째 자전거 타기는 이처럼 구슬프게 막을 내렸다.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재찬은 모든 것을 잊고 그냥 케이블 텔레비전의 리얼리티쇼나 보자고 했다. 나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고민을 했다. 실패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나는 어떤 원인에서인지 정확히 의학적으로 지적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감각적인 문제가 있었다. 내가 자전거를 타는 어떤 감각이 좀 둔하다는 게 첫번째 원인이었다. 두번째 원인은 고통에 대한 공포다. 앞서 말했듯이 덩치는 커지고 도로 사정이 아주 안좋아졌기 때문에, 실패할 경우에 받는 외상의 위험과 심리적 타격이 크다. 더 아프고, 더 쓰리고, 더 열 받는다. 때문에 지나치게 신경쓰게 되고 자유로운 반사신경은 굳어 버린다. 그러다 보니 대담하게 균형을 내맡긴채 페달을 밟아야 하는 그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이다. 가장 큰 세번째 원인은 쪽팔림에 대한 의식이었다. 야밤에, 자전거 탈 줄 몰라서 타는 거 연마하고 있는게 나는 부끄럽게 느껴졌다. 특히. "왜 그걸 못하냐... 왜..." 라며 한탄하는 재찬의 목소리는 가슴을 쿡쿡 찔렀다. 재찬은 그나마 낫지. 지나가는 행인1이나 행인2, 혹은 기숙사주민3이 나를 발견한다면 얼마나 더 부끄럽겠는가. 그런 기본 부끄러움을 넘어서서 더 큰 부가 위협이 존재하기도 했으니, 만약 그녀나 그녀의 친구나, 그녀의 친구의 친구에게 이 모습을 들킨다면? 그러면 "들킨다". 그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모든 염원이 깨어지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런 걸 자꾸 걱정하다보니, 자전거에만 집중하는게 아니라 사방을 두리번 두리번하게 되고, 소심해지고, 자세의 개선에 기울이는 노력이 부족해졌던 것이다. 이튿날 일요일. 나는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렸고, 다시 자전거포에 찾아가 무릎 보호대와 헬멧을 샀다. 기껏 자전거 타면서 중세 시대 기사나 킹크랩 같아 보일 보호구를 덕지덕지 입는 것은 바보 같아 보였다. 분명히 쪽팔림이라는 세 번째 원인을 더 가중시킬 것이다. 그러나, 또한 부상의 위험이라는 두번째 원인을 대폭 줄여줄 수 있다. 그러면 일단 절대 연습량을 확 늘일 수 있다. 한 백번이나 이 백번쯤 시도하다보면, 쪽팔림은 점점 줄어들 것이고, 얼굴의 두께는 점점 비후될 것이라는 게 내 계산이었다. 자전거 타기 3차 시도는 월요일 야간에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재찬은 실험3 과목이 밤늦게까지 이어지기에 나 홀로 연습하고 있으면, 끝나는 대로 찾아오기로 했다. 아직 다리와 팔꿈치에 입은 상처가 덜 아물긴 했지만, 어제 산 보호구를 다 두르면 참을만 할 듯 했다. 혼자 나와 있으니 괜히 더 주변 사람들이 보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그리고,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자꾸 뒤를 돌아다 보고 싶어서 더 정신이 사나웠다. 그래서인지 줄기차게 계속 실패만 하고 있는데, 재찬과 그의 실험 파트너인 후배 종욱이 나타났다. "종욱아 너 오랫만이다. 내가 언제 보쌈 한 번 사주기로 했었는데." 괜히 과장되어 반가운척 하며 길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종욱과 재찬은 '말은 그만하고 어서 연습이나 우리 보는 앞에서 똑바로 해 보시지' 하면서 버티고 서있는 분위기였다. 나는 상당한 중압감을 느끼며 종욱과 재찬 앞에서 자전거 위에 앉아서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그건 내가 생각해도 "자전거를 탄다"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한 참 그러고 있자니, 종욱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했다. "저기요. 선배. 안장을 약간 높이고 손잡이를 조금 아래쪽으로 휘면 어떨까요. 그럼 중심이 앞쪽으로 가면서 앞바퀴가 덜 비틀거리고 균형도 잘 잡힐 거 같은데요." 무슨 소리인지. 그러나 재찬의 탄성소리가 뒤를 이었다. "오오.. 맞네. 그러면 훨씬 낫겠네. 맞어. 지금 중심이 너무 뒤쪽에 있어서 자꾸 앞바퀴가 미끌려서 균형이 무너지거든. 그러니까. 종욱이 말대로 하면 좋을 거 같은데." "뭔 말이냐?" "정역학이나 뭐 그런거 배운적 없냐?" "연소공학과에서 무슨 정역학을 배우겠냐?" "그래도 일반물리 시간에 힘의 평형 이런거는 배웠을 거 아냐." 내가 다 까먹고 하나도 기억안남. 이라는 텔레파시를 보내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재찬이 보도 블럭 한 켠에 앉으며 A4용지 한장을 꺼냈다. "이거 봐, 자전거가 이렇게 생겼고, 니가 여기에 이렇게 있으면, 중력이 연직방향이니까 힘이 여기하고 여기에 걸리지?" "그렇다치고." "뭘 그렇다쳐. 맞잖어." "글쎄, 그렇다치고." "그런데, 아까 종욱이가 한 말대로, 여기를 약간 높이면, 니 자세가 이렇게 되지. 그러면 중력 방향이 이쪽인데, 이 벡터를 진행 방향 성분하고, 그 직각 성분으로 분리해 보면, 평형이 이렇게 나오잖아 그치?" "대강." "이걸 정확하게 방정식을 풀면 값이 나오겠지만, 뭐 그게 아니라도 이 그림상에서 보면, 힘의 평형을 생각해면 중심점이 이렇게 앞쪽으로 오잖어. 그러면 무게가 앞바퀴 쪽에 좀 더 실리기 때문에 훨씬 더 균형잡기가 쉬워 질거라고." 날마다 야바위식으로 아슬아슬하게 답만 꿰어 맞추던 일반물리의 기억. 그 기억 되살아나면서 재찬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사실 잘 못알아 들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종욱이가 말한 것이니까 맞을 가능성이 높았다. "믿어 본다. 한 번 해보자." 우리 셋은 기숙사 사감실에 가서, 자전거를 수리해야 겠다며 공구들을 빌려 왔다. 새 자전거라서 아주 튼튼하게 조립되어 있었고 너트와 볼트들을 하나 돌리는대도 엄청나게 힘이 들었다. "너 진짜 수고한다. 내가 내일 점심 때 꼭 보쌈사주께." 실험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이상한 일에 휘말린 종욱이 나는 좀 안되어 보였다. 그러나 지금 현재 아주 중요한 인력이었기에 이러한 당근으로 달랠 수 밖에. 수 시간의 작업 끝에, 균형 강화판 자전거가 완성되었다. 나는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다시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았는데, 의외로 꽤 큰 효과가 있었다. 물론 비틀비틀 하다가 몇 미터 나가지도 못하고 넘어진 것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더 안정적인 느낌과 끝까지 내가 자전거를 조작하고 있다는 통제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큰 진전이었다. 그 날 밤, 두 사람의 응원과 타오르는 나의 노력이 쇠할때까지 넘어지기를 반복할 끝에, 나는 평균 7,8미터 정도를 운행할 수 있었다. 재찬의 표현에 따르면 그건 운행이 아니라, 스타트를 제대로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나마 분명한 발전이었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넘어질 때 그렇게 많이 다치지는 않을 듯 했다. 다음날인 화요일. 이 날은 강의 하나를 빼먹고 애저녁부터 연습에 돌입했다. 계절 학기 과목으로 들은 것은 "19세기 프랑스 오페라의 이해" 였다. 출석 점수가 꽤 높긴 하지만, 시험 점수의 비중이 압도적인 고로 시험만 잘치면 학점은 대강 받을 수 있었다. 나는 CDP에 시험에 나오는 오페라 곡들을 넣어 와서는 그걸 들으면서 자전거 타기 시도에 나섰다. 구슬픈 아리아 가락에 맞춰 넘어질 때는 처량함이 더 강화되기도 했거니와, 힘찬 합창곡이나 유쾌한 기교적인 곡을 따라 페달을 내딛을 때는, 그 아슬아슬한 느낌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절망감의 싹이 돋았다. 갈수록, 19세기 프랑스 오페라에 대해서는 더 잘 이해하고, 곡들을 기억하고, 감상이 정리되었던 반면에, 도무지 자전거는 늘지가 않았던 것이다. "오페라에 정신을 빼앗기는가 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CDP를 옆에 두고 음악을 듣지 않으면서 시도하려고 했다. "잠깐, 누가 CDP를 훔쳐가면 어쩌지?" 요즘 의외로 도서관과 기숙사 근처에는 도둑이 많다고 게시판에서 떠들썩하지 않았던가. 나는 CDP를 기숙사 방에 두고 와야 겠다고 생각했다. "잠깐, 누가 자전거를 훔쳐가면 어쩌지?" 자전거 도둑이야 사람 사는 곳에 항상 있는 고전적인 직업이다. 나는 자전거를 우선 천막안에 묶어 두고, CDP를 기숙사에 두고 오기로 했다. 귀찮은 2단계의 작업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나는 어느 새 이 자전거를 굉장히 애지중지 하고 있었다. 한 번의 개조를 거친 이 자전거는 이제 돈 주고도 구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제외적 이유를 따져 보자면, 내 정념이 투사된 나의 첫번째 자전거가 아니던가. CDP를 갖다 놓고, 자전거를 묶어두고, 나는 다시 돌아 왔다. 방금 전의 진술에서 확인 되 듯, 나는 이 생각 저 생각에 굉장히 정신이 산란되어, 결국 반대로 CDP를 먼저 갖다 놓고 자전거를 방치해 두었다가, 나중에 자전거를 천막밑으로 끌고가서 묶어 놓으려고 했다. 자물쇠에 막 열쇠를 넣으려다가. "가만, 이게 무슷 짓인가." 싶어 자전거를 도로 풀어서 너의 연습 장소, 기숙사 뒷길로 끌고 나왔다. 영구스럽기 한량없다. 그렇게 자전거를 끌고 나타나니, 재찬과 종욱이 어느새 나타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 수 있을 거예요. 선배." "오늘은 적어도 다칠 걱정은 없으니까 진짜 죽도록 연습해 보자." 두 사람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정말로 자전거 타기 연습을 종신토록하다가 인생을 다 보내고 노후를 맞이할 수는 없었다. 나는 지루하고도 맹렬하게 연습을 계속했건만,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나는 심리적으로 완전히 지치고 말았다. "진짜 미치겠다. 에휴." "이게 우리가 자전거 타는 걸 가르친 경험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어요. 수영이나 테니스도 다 강사한테 배우잖아요. 뭔가 경험이 있는 사람한테 배우면 잘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종욱은 그렇게 설득력있는 의견을 하나 더 제시했다. "일단 보쌈부터 먹고 보자." 먹으러 나가는 길에 생각해 보니, 종욱의 말이 과연 맞는 거 같았다. 물론 수영이나 테니스는 강사한테 배우지만, 대체로 말하는 법이나 키보드 타이핑 같은 것은 강사한테 배우지 않고도 익히는 것 아닌가? 거기에 대한 대답을 나는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막막한 상황에서 "그건 다 무슨 차이점이 있을거야"하고 얼버무리고 나는 종욱의 말대로, 자전거 지도의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한 번 배워 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식당에서 틀어준 시트콤을 보며 웃으면서 종욱과 재찬은 보쌈을 먹었다. 그동안 나는 배추잎을 뒤적뒤적하며 곰곰히 고민을 했다.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본 적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나는 얼마전에 조카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줬다는 제어공학과 대학원의 진수 선배가 생각 났다. 진수 선배는 나에게 신세를 갚을 것이 하나 있었다. 진수 선배가 짝사랑하던 자신의 대학원 선배와 그렇게 잘 맺어진 것은 나의 비범한 조언이 탁월한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2주 전 까지만 해도 진수 선배는 사랑의 번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산소 부족과 잠수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나 역시 비슷하게 갑자기 진전된 그녀와의 관계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며칠간 나는 많은 사람들처럼 서점에 깔려 잇는 "여우의 속셈, 늑대의 작전" 같은 책을 보고, 또 "연애 공략법" 같은 만화로 된 버전을 뒤적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나는 그녀와의 애매한 관계를 확정적인 것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불타올라 인터넷을 뒤적거렸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애매한 관계를 어떻게?" 같은 게시물들을 곰곰히 읽었다. 그리고 수없이 읽은 게시물들을 컨트롤C와 컨트롤V를 이용하여 하드디스크에 그 내용을 편집해 저장한 것 또한 물론이다. 인터넷에 퍼져 있는 글들은 굉장히 읽을 것들이 많았다. 심지어 그녀와 비슷해 보이는 인기 있는 얼음 소녀들이 직접: "오히려 그런 남자들은 거부감이 생기죠." "짜증날 것 같은데요." 하면서 덧글을 달아 놓은 사연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다각도로 그녀를 대할 태도를 연구하던 예리한 연구자의 눈에, 바로 그것들의 오류가 드러났다. 그것은 직접 자기 심정을 쓴 글이 올라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의 심정을 직접 써 올리는 것이 인터넷의 글인 만큼, 아무리 익명성이니 자유분방함이니 해도, 거기에는 분명 자기 꾸미기와 폼 잡기가 가득했다. 그게 아니라면 오히려 그 반대로 자극적인 카타르시스를 위한 위악이나 "솔직함의 과장"이 있기도 쉬웠다. 예를 들면, "꽃 선물은 싫어요. 실용적이지도 않고, 잠깐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지 조금만 지나서 시들면 지저분하기만하고..." 이런 글을 읽었다고 치자. 그렇지만, 이것은 꽃을 선물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헛된 치장과 진부한 사랑고백에 질려버렸다는 뜻일 뿐이다. 선물의 종목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좀 더 솔직하고 편안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니면, 반대로 주변에 꽃을 받고 자랑하는 듯한 아니꼬운 친구가 눈에 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진수 선배는 그걸 깨우치지 못하고, 인터넷에 나온 조언을 그대로 따르다가 죽을 쑤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짝사랑녀와의 관계는 균형을 잃고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쯤 내가 새로운 정보의 보고를 발견했다. 보다 솔직하고 직접적인 연애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연애상담 게시판이 아니었다. 그것은 각종 포털 사이트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시댁 식구 이야기 게시판이었다. 포털 사이트 마다, "울컥벌컥 시댁이야기" 라거나 "몰래하는 시댁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개설되어 있는 이 게시판은 의외로 굉장히 활발하게 운영된다. 여기에서 주로 결혼한지, 2,3년차쯤 되는 아낙네들이 이런저런 시댁 식구와 관련된 삶의 무용담들을 늘어 놓는다. "울랑"은 "우리 신랑"이고, "셤니"는 "시어머니"를 지칭한다는 약간의 어휘습득을 마치고 나면, 이 게시판의 게시물들을 면밀히 읽는다. 물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글의 화자인 결혼한 아낙네들이 아니다. 우리가 찾는 핵심 정보는 이 아낙네들이 풀어 놓는 "시누뇬"이나 "짱나는 남푠 동생" 이야기에 있다. 이 글에는 무수히 많은 남편의 동생들과 친척들의 험담이 올라와 있다. 이 험담 중에 상당수를 차지 하는 것은, 시누나 시동생이 바깥에서 어떤 사건과 어떤 연애담에 울고 웃게 되어 심리상태가 오락가락했는지, 그 정보가 솔직하고도 예리하게 분석되어 담겨 있다. 어떤 전화를 받고 즐거워 했는지, 그에 비해 누가 언제 나타났을 때 기분나빠했는지, 그럴듯한 심리분석까지 곁들여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인터넷의 이 숨겨진 심리전의 보물지도를 진수 선배에게 알려주며, 짝사랑녀와 관계를 개선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몇몇 게시물들을 짚어주었다. 기껏해야 "필승의 여인공략법" 같은 게시물이나 외고 있던 진수 선배에게 이것은 신천지요, 별세계였다. 결국 진수 선배는 강 저편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고, 기쁨에 가득차서 격앙된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해서, "나에게도 드디어 봄이 왔다. 진짜 고맙다. 진짜. 내가 술 백번 살께. 백번." 그러면서 떠들어 댔다. 진수 선배의 도움을 얻기 위해, 나와 재찬과 종욱은 심야의 제어공학과 대학원의 연구실로 찾아 들었다. 시간은 자정넘어 새벽으로 가고 있는데, 진수 선배는 연구실에 홀로 불을 밝히고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선배, 안녕하세요." "어? 야- 너 오랫만이다." 사연을 밝히자, 진수 선배는 아주 즐거워 했다. 자신이 짝사랑 때문에 번뇌할 때, 내가 나타나 묘책과 비방을 알려주었는데, 비슷한 상황에서 훨씬 더 바보스러운 시도에 고통받고 있지 않은가? 동병상련인 동시에, 안고수비였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 바빠서 안되겠는데. 처리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어. 일 하는 걸 인제 배우는 입장이니 짬이 안나네." 이미 대다수의 시민들이 곤히 잠을 청하고 있을 심야 중에서도 심심야인데, 무슨 할 일이 많다는 것인지. 나는 도와줬는데, 나를 도와주지는 않다니, 역시 세상은 이렇게 비정한 것인가하는 생각마저 조금 들었다. 그런데 아닌게 아니라 진수 선배는 시달리는 일이 많았다. "지금, 내일 아침까지 여기 소갑이 형 책상이랑 중을이 형 책상 닦아 놔야 하거든. 서병이 형 자리쪽 바닥에 얼룩도 지워 놔야 하고." "에이, 청소 정도야 뭐." "남정이 형이 읽어서 정리하라고 한 논문도 두 편 있고..... 있다가 새벽 두시 반에는 중무 형이랑, 동기 형이랑 만나서 할 일이 있거덩." "무슨 일이요?" "같이 교수님 자동차 세차 다 해야 돼. 그거 모이는 시간에 늦으면 중무형 자다 일어나서 되게 짜증될거다. 투싼... 아... 씻기 힘든데..." "내일 아침에는요?" "아침에는 대경이 누나랑 마트가서 커피랑 녹차 사러 가야지." "틈틈히 시간은 안나시나요?" "틈틈히 시간이 날 때는, 어제 학부생들이 친 시험지 채점!" 나는 잠시 이 대학원생 선배가 약간 두려워 졌다. 그러나 잠깐 더 고민을 하다가 나는 다음과 같이 과감한 제안을 펼쳤다. "저기요. 선배. 저랑 재찬이랑 종욱이가 청소 대신해 드릴 테니까, 그거에 절약되는 시간만큼만 저에게 가르침 내려 주시면 안될까요?" 쌓인 피로로 충혈된 진수 선배의 눈동자는 무엇인가 일을 부탁하기에는 사실 좀 불쌍해 보였다. 그러나, 나에게 사랑을 얻은 은혜를 빚지고 있지 않은가. 본래 진수 선배는 사람이 착하다. 그는 결국 내일 불벼락이 떨어질 가능성을 과감하게 무시하고 연구실을 박차고 나왔다. 그는 우리들과 함께 연습장인 기숙사 뒷길로 향한 것이다. 졸지에 친구따라 나섰다가 청소 용역을 하게된 재찬과 종욱에게는 야식을 사줘서 무마하자. 야식일도 하사불성. "너 키크니까, 다리 땅에 닿지?" "예." "그러면, 자전거에 탄채로 다리를 굴러서 목마타듯이 자전거를 앞으로 굴려나가. 그러다가 어느 정도 관성을 얻으면 그 때부터 페달을 밟는거지." "오호." 진수 선배의 말을 듣고 있던 재찬이가 감탄했다. 어느 정도 속도가 붙어야 균형잡기가 쉬워진다. 그러나, 속도를 붙이려면 그만큼 균형을 잃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페달을 밟으며 달리기전에 도움닫기를 하는 것이다. "그치? 그러고나서, 왼쪽으로 기울어질 거 같으면 오른쪽으로 핸들을 살짝 꺾고, 오른쪽으로 넘어질 거 같으면 왼쪽으로 핸들을 꺾어. 페달 계속 밟아서 속력내고. 간단해." 나는 믿음직스런 진수 선배의 조언대로 자전거를 조작하였다. 그러나 결론은 이론은 되는데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지금 핸들을 오른쪽으로" 간절히 생각은 미치는데, 팔이 제꺽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트리거에서 어커런스까지 가는 시간보다, 트리거 리액션 타임이 너무 크다." "예?" "이해는 하는데 반응이 느리다고." 진수 선배는 자전거를 가만히 쳐다 보았다. 그는 수심에 빠져 있었다. 종욱이 말했다. "저기요. 무게 중심을 앞쪽으로 주려고 핸들을 좀 꺾었거든요. 이걸 약간만 들어 올리면, 반응 시간을 좀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건 그래봤자 너무 마이너할 거 같은데. 지금 중요한게, 조작이 중추반사로 이뤄져야 대응시간이 줄어드는데, 지금 얘는 대뇌판단으로 하고 있다고. 그게 차이가 너무커서 도저히 데드타임으로 안쪽으로 떨어지게 하기가 어렵네." "반사 신경을 키우는 무슨 훈련을 해 보면 어떨까요?" 재찬이 제안했다. 나는 무슨 신형 우주 전투기 파일럿 취급을 받고 있었다. 진수 선배는 근엄하게 꾸짖었다. "상품 설계의 기본은 유저 프렌들리야. 인터페이스를 사용자한테 맞춰야지, 사용자를 인터페이스에 맞추게 하면 백전백패한다." 진수 선배는 고민 끝에 다시 연구실로 돌아가서는 파이프 두가닥이 연결된 알루미늄 드럼세트 같은 것을 가져 왔다. 이미 그는 교수님 차 세차라든가 내일 아침에 커피 사다 놓기 같은 것은 완전히 잊은 거 같았다. "큰 선박 같은거 보면......" "성박이요?" "아니 선박. 배 말이야 배. 배가 파도가 치면 이렇게 막 흔들리잖아. 이거 흔들리는 거 막기 위해서 배에 뭘 달아 놓냐면, 물탱크를 좌우로 크게 달아 놓고, 흔들리는 반대쪽으로 물이 고이게 설계해 놓거든. 그러면 배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면 어떻게 되겠어?" "물이 왼쪽으로 흘러가서 고이겠죠." "그치? 그러면 물이 왼쪽에 많이 모여 있으니까, 배가 왼쪽으로 기울어지려고하면서 지가 중심을 잡는거야." "간단하면서도 신기하네요." "이게, 그거 작은 버전인데. 우리 실험실에서 작년에 무슨 보고서 쓴다고 만들어서 쓰던건데 말이야. 크기가 작아서 그렇지 거의 같은 역할을 하는 거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진수 선배는 그 평형유지 장치 세트를 내 자전거 핸들 앞에 달린 바구니에 담았다. "이 밸브를 좀 조절해보면서 맞춰 보자. 니가 직접 핸들을 돌려서 균형을 맞추기 전에 이 평형유지장치에 몰이 반대로 흘러서 먼저 핸들을 조금 기울어지게 할거거든. 그러니까 분명히 도움이 될거야." "이 밸브쪽이 수위를 쟤는 거고, 요쪽 관으로 물이 왔다갔다 하는거죠?" 눈썰미가 좋은 종욱은 그 드럼세트를 보며 신기해했다. 과연 진수 선배의 예상은 적중했다. 평형장치를 다니까 핸들을 움직여 균형을 잡는게 훨씬 더 쉬워졌다. 자전거가 달리게 되니까 얼굴에 가득 웃음이 번졌다. 달리는구나. 좋아라 하는 순간, 비틀비틀 거리며 나의 자전거는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야, 그래도 이번에 굉장히 좋지 않았냐?" "충분히 좋은 가능성이었어요. 인제 그냥 이대로 한 두 시간만 더 연습하면 완전 익숙해 질 거 같은데요?" 쓰러진 내 곁으로 달려온 세 사람은 모두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쁨과는 달리, 그 이상의 진전은 전혀 없었다. 진수 선배는 끝까지 답답해 하며 뭔가 더 노력 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새벽 두 시 반이 되어 세차하러 모일 시간이 되자 그는 바삐 그의 연구실로 돌아갔다. 다음 날이 밝도록 나는 답답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결국 내 선에서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분명히 두 개의 물탱크 사이의 무게 차이를 이용하는 평형유지장치는 도움이 된다. 항상 자전거가 똑바른 자세를 잡도록 핸들을 조금씩 비틀어주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내가 언제 넘어졌느냐를 검토해 보면, 그러한 평형유지장치는 오히려 커브를 틀 때, 방향을 조절할 때는 큰 방해가 된다. 물이 출렁거리는 느낌과 정상보다 훨씬 더 무거워진 핸들은, 운전을 아주 어렵게 만든다. 그렇게 한 타이밍 어긋나게 핸들을 억지로 꺾으면, 그 때 갑자기 물탱크가 반대로 기울어지면서 중심을 무너뜨리고 자전거는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똑바로 가는데 도움되는 장치 때문에 커브를 못 꺾네." 얄궂은 기술적 아이러니에 좌절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뭘 그렇게 곰곰히 고민하냐?" 바로 그녀였다. 갑자기 생각도 안했는데 그녀의 얼굴이 나타나자 나는 깜짝 놀라서 좀 허둥댔다. 이번에는 정말로 우연히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 같이 점심 먹으러 학교 식당으로 가자고 한 것이다. 그 날은 날씨가 더워서 땀이 좀 났다. "애고고, 덥다." 하면서 얼굴에 손을 저어 바람을 일으키는 그녀를 보았다. 머리칼이 땀에 젖어 뺨에 달라 붙어 있었다. 에잇. "나 너 사실은 정말 좋아하거든. 사실 지금 우리 관계가 좀 어정쩡하잖아. 그래서 좀 어떻게 잘보여 보려고 내가 정말 궁리를 많이해. 그러다 보니까 나 자전거 탈 줄도 모르는데,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주절주절 헛소리만 많이 해버렸어. 어떡해. 미안해."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용솟음 쳤다. 그러나, 분위기가 아니었다. 밥 먹는 도중에 그냥 확 말해 버릴까. 이 빈틈 없을 것 같은 총명한 학생의 한 가지 지적할만한 사항 중에하나는 밥먹을 때의 서투른 동작이었다. 그녀는 젓가락질이 좀 서툴러서 종종 음식을 칠칠맞지 못하게 흘렸고, 오늘처럼 생선이라도 발라먹을 때는 한 점 살을 뜯기 위해 천 번은 생선토막을 통째로 뒤집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생선 한 쪽을 잡아 주었고, 그녀가 눈으로 신호를 보내면 자진해서 생선을 집어 먹기 좋게 해체해 주기도 했다. 굉장히 중요하고 힘든 일을 하는양 얼굴을 가까이 대고 두 손에 젓가락 한 짝씩을 쥐고 생선 앞에 붙어 있는 그녀의 모습.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왠지 사실을 말하기 겁이 났다. 엎친데 덥친 격으로 그녀는 이번 주말에 볼까말까 생각하고 있는 영화의 줄거리를 이야기하면서, "사람을 그렇게 감쪽같이 속여 먹다니." 라고 정직하지 못한 등장인물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표했다. 도둑 자전거의 제 바퀴가 저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뻣뻣하고도 불편하게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나는 언제 그녀를 이런 곳, 이런 시간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도 아니고, 모든 것이 나와 어울리는 천생연분과도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지금과 같은 이 여름과 같은 상황을 오년 후에, 십년 후에 또 만날 가능성이 있을까? 점심을 먹고 오후 수업을 들으러 그녀가 가는 길에, 어디선가 그 생명공학과의 느끼남이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그녀에 들러 붙은 그 놈은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이야기 했다. 내용이 유쾌한 농담이었는지, 그녀도, 그도 소리내어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오늘이 어느새 일주일의 절반이 흐른 수요일이었다. 아직 혼자 제대로 타지도 못하는데. 그녀를 뒤에 태우고 능숙하게 그 먼 학교길을 주행하려면 타는 법을 익힌 후에도 많은 수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오늘이라고 뭐가 더 나아질 가망이 있었는가?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진수 선배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나는 "선배, 전대요. 예. 예. 저기요. 선배. 예. 오늘도 저 자전거 좀 도와주시면 안돼요?" 했다. 그 목소리는 겁에 질린 것 같은 목소리에 가까웠다. 어떻게 들으면 약간 울먹이는 거 같기도 하고. 진수 선배가 괜히 어설프게 연구실 선배의 조언대로 짝사랑에게 데이트 하자고 졸랐다가 매몰찬 거절을 당했을 때, 그 때 모든 희망이 깨어진 그 목소리와 아주 닮아 있었다. 바로 그 마지막 묘사에 해당하는 부분이 진수 선배의 마음을 움직였다. 전화에서 진수 선배 역시 평형 장치 때문에 늘어난 무게와 커브에서 역효과를 감당하지 못해서 넘어지는 거 같다고, 내가 생각한 것과 같은 결론을 들려주었다. 전화기에서 한 동안 어떡한다... 어떡한다... 하면서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할 수 없네. 일단 오늘 저녁에 좌현동에 있는 장주 갈비로 와라." "장주 갈비요?" "거기가면 얼마전에 우리 랩에서 포스닥 연구원으로 계실 때 나 많이 가르쳐 준 분 계시거든. 그 박사님하고 한 번 의논해 보자." "장주 갈비에서요?" "어. 정일환 박사님이라고 못들어봤냐? 에이플러스 불도저 정일환?" "들어 본 거 같기도 하고요......" 이렇게 대화는 전개 되었다. 별 다른 수가 없는 나는 택시를 잡아서 좌현동 장주 갈비라는 곳으로 갔다. 이제는 어쩐지 이 사건에 재미를 붙인 듯한 재찬과 종욱도 동행했다. 에이플러스 불도저라 함은, 정 박사님이 학부 시절에 줄기차게 온통 과목을 에이 플러스로 장식했기에 신화처럼 내려오는 호칭이었다. 에이플러스 불도저, 절대 만점, 소스앤 솔루션. 수리통계학과의 정일환은 무용담도 많았다. 그런데, 그 정일환 박사라는 분에게 조언을 얻기 위해 왜 우리는 장주 갈비라는 곳으로 가야하는가? 그 내막은 이러했다. 학교에서 학부를 마치고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딴 정 박사님은, 한 전자회사 연구소에 취직했다. 그는 전파 동조 코일의 타이밍에 대해서 계산하는 일을 했고, 최고의 실력을 발휘해서 좋은 제품을 만드는데 기여를 했다. 그렇게 한 5년쯤 일했을 때, 이 회사의 연구소에서는 더이상 전파 사업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업부를 철수 개편했다. 전파 사업부의 영업 인력과 재무 회계 업무부분은 다른 부서의 비슷한 부분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어디 갖다 붙일때가 없는, 전문화되고 특화된 개밥에 도토리, 연구부분은 청산처리 되었다. 자연히 정 박사님은 해고 당하였다. 정 박사님은 여기 저기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결국 한 스페인의 이동 통신 회사에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정 박사님은 갑자기 스페인어를 공부하더니, 회사 경연진에게 직접 스페인어로 보고하는 등의 괴력을 발휘했다. 그는 전화위복 오히려 더 많은 연봉을 받고 더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그게 갈비집하고 무슨 상관인데." 내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택시 안에서 재찬이는 답답하여 그렇게 물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다음 이야기에서 갈비집이 등장한다. 그런데, 옛날에 정일환 박사를 해고 했던 바로 그 전자 회사가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 진출했다. 그러면서 이 스페인 이동 통신회사와 경쟁하게 되었다. 특히 중국 시장을 두고 벌이는 두 회사간의 경쟁은 피 튀기는 것이었고, 전자 회사의 전략팀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이동 통신 회사를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정일환 박사는 바로 거기에 걸려 들었다. 정일환 박사는 입사하면서 전자회사와 퇴사후 5년 이내에 같은 업종에 취직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한장 썼다. 그래야만 한 회사에서 일하면서 핵심 기술만 쏙 빼서 배워서 다른 회사로 옮긴뒤 똑같은 복제품을 만들어 내는 일을 막을 수 있으니까. 이 전자회사의 논리는, 정일환 박사가 전자회사의 전파 사업부에 있었고, 지금은 이동 통신 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니, 이것은 같은 업종에 취직한 것이고, 전자회사의 기술을 빼돌린 셈이라는 것이었다. 정일환 박사가 전자회사 전파 사업부에서 연구하던 것은 전파 동조 코일의 타이밍이었고, 통신 회사에서 연구하는 것은 LCD의 불량률에 관한 것이었다. 둘은 아무 상관 없었다. 기술 유출은 얼토당토 않은 억지였다. 정일환 박사는 그런 내용으로 이유서를 제출하였다. "야, 지들이 짜를 때는 언제고, 인제는 짤려서 다른 회사 들어갔다고 소송을 거냐?" 재찬이는 그 대목에서 분통터져 했다. 그러나, 전자회사는 일격필살의 비밀병기, "기술유출방지법"을 갖고 있었다. 전자회사는 법률 고문단을 동원하여 정일환 박사를 국가정보원에 신고했다. 정일환 박사가 스페인 회사에서 일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우리나라의 기술을 돈에 눈이 멀어 외국에 빼돌리려는 비열한 매국노 행위인 것이다! 그리하여, 정일환 박사는 신문지상을 "굴지의 전자 회사 출신 연구원, 이동 통신 핵심기술 팔아먹어" 라는 제목으로 장식했고, 집안은 수사 당했으며, 난생처음 수갑도 차보고, 구치소에 구속 수감도 당해 보게 되었다. 학부 수리통계학과 출신인 그는, 석사과정 학생일 때부터 따져도 11년동안 수리통계만 연구한 셈이었다. 정일환 박사는 결국 전자회사의 변호사들에게 "앞으로 수리통계 연구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구치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실업자로 전전하다가 그 처지를 불쌍히 여긴 제어공학과의 교수 한 명이 진수 선배 연구실의 포스닥 연구원으로 그를 잠시 머물게 했던 것이다. 바로 그 때 진수 선배는 정 박사님을 만났다. 두 사람은 온갖 분야의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같이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면서 많은 것을 같이 배우고 깨닫곤 했다. 지금 정일환 박사는 아무 상관도 없는 자동차 회사에서, 2년전만 해도 이름도 들어 본적 없는 부품에 대해 동력학 연구를 돕는 연구보조원이었다. 계약직으로 취직해서 대졸 초임의 절반 정도를 받고 있긴 했지만, 놀랍게도 에이플러스 불도저는 여전히 시동이 걸리면 사정 없는 것이었다. 다시 처음부터 공부를 시작한 정 박사님은 이 말도 안되게 생소한 분야에서도 충분히 한 사람 몫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 분야의 다른 연구원들은, 그를 이면지 재활용 담당 정도로 무시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몇몇 사람들은 종종 꽤 중요한 문제를 심각하게 그와 의논하곤 했다. "그러니까, 학생들도 취직해서 연구원 생활을 하게 되면, 월급 생길 때마다 조금씩 떼서 모아서 이렇게 갈비집 같은 부업을 빨리 시작해야 돼요. 애초에 내가 여기, 장주 갈비 같은 데 하나만 갖고 있었어봐. 감옥 가기전에 진작에 바로 손 털고 그냥 갈비집이나 열심히 했지." 낮에는 연구보조. 밤에는 갈비집 사장. 눈코 뜰새 없이 손님들 사이를 다니며 고기를 나르고 설거지 거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우리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야기를 듣자, 이 아저씨는, 아이가 처음 줄 위에서 도는 팽이를 보았을 때처럼,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래? 자전거랑 평형장치좀 볼 수 있을까?" "여기 몇 시에 문 닫으세요?" "열한시 정도." "그러면, 끝나는 대로, 저희 기숙사 뒤에 있는 길쪽으로 오세요." "기숙사면 원래 기숙사 이야긴가 아니면, 새 기숙사 이야기인가?" "새 기숙사요?" "왜 원래 기숙사가 서문쪽에 하나 있었는데, 93년도에 새로 기숙사를 하나 더 지었잖어." 우리는 그 부분에서 과연 상전벽해의 벽을 넘은 옛날에 학교 다니던 선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진수 선배가 말했다. "서문쪽에 있던 기숙사는 없어졌고요, 93년도에 지은 기숙사는 지금 창고로 바뀌었거든요. 97년도에 기숙사 건물을 새로 뒷산쪽으로 해서 지었어요." "아 맞어. 그랬다고 했지. 참." 그 날 밤 나는 또 같은 곳에서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제는 지루하거나, 부끄럽거나, 아프기보다는, 그냥 초조했다. 벌써 수요일 밤이었다. 그녀를 만나는 토요일까지는 이제 목요일, 금요일 밖에 없다. 정 박사님은 갈비집 이름이 새겨진 작은 트럭을 한 대 끌고 나타났다. 그 트럭에는 갈비 대신에 몇 가지 공구와 배선이 어지러운 금속 케이스들이 몇 개 있었다. "이게 우리 회사 연구소에서 요즘에 개발한 '멜라니온'이라는건데, 네비게이션하고 연결하면 자동차를 원격 조종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차에 달아 놓으면, 자동차 뒷자리에서 운전할 수도 있고, 뒷차에 탄 사람이 앞에 가는 차를 운전할 수도 있고 그런거죠." "근데 이런거, 연구소 밖에 막 갖고 나와도 돼요?" "이 놈들이 정말 답답해. 이걸 우리 보고 직접 써보면서 문제점을 찾아보고 개선할 점을 리스트로 만들라고 하는데, 그게 말이 되겠어요?" "직접 연구원들 자기 차에 달아서 시험해보라는 이야기예요? "갈비랑 재료 싣고 트럭몰고 다니자면 한 시간이 급한데, 괜히 이 시험 장비들고 이상한 짓 하다가 길에서 사고라도 나면 어쩔거야. 그러니까 연구원들이 전부다 샘플 장비 받아서 집에 그냥 모셔 놓고는, 나중에 보고서 쓸 때는 대강 이도저도 아니게 적당히 지어내서 쓰고 마는 거예요." 정일환 박사의 아이디어는 바로 이 원격 조종 장치 멜라니온을 평형 유지 장치의 밸브에 연결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간다. 그러면 멜라니온 시스템은 센서에서 전달되는 신호를 전송한다. 그러면 이미 자전거를 능숙하게 탈줄 아는 사람이 멜라니온 시스템의 조종장치를 들고 원격으로 평형을 잡는 것이다. 그러면 커브를 틀 때 불안하게 중심이 확 쏠려도 원격 조종으로 균형을 잘 잡아주면 된다. "대강 될 거 같기는 하네요." "밸브안에다 수신기까지 달면 더 무거워지니까 앞바퀴를 약간 앞쪽으로 빼서 무게 중심을 좀 조절하는게 어떨까요." "저울 같은 거 있을까? 이거 무게를 달아 봐야지 앞바퀴를 얼마나 뺄지 계산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정 박사님의 등장으로 분위기는 단숨에 쇄신되었고, 나와 재찬과 진수 선배와 정 박사님은 부지런히 장비를 들고 자전거에 달라 붙었다. "자전거 타고 가는 학생이 서버 쪽이고, 뒤에서 원격 조정하는 쪽이 클라이언트 쪽이예요. 클라이언트 담당은 누가 해야 되려나." "재찬아, 니가 해라." "이거 은근히 부담되는데." 정일환 박사는 세심하게 무선 장비의 강도를 살폈고, 평형장치의 밸브와 연결부위가 튼튼한지도 따졌다. 그러나 멜라니온 시스템의 희망찬 등장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이번에도 역시나 실패였다. "이거 조종하기 너무 어려워요." 재찬이 울상을 지었다. 진짜 울고 싶은 건 나였다. 재찬의 말 그대로였다. 아니 멜라니온 장비 자체가 그렇게 조작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배선이나 모니터용 계측기들은 복잡해 보였다. 그렇지만 송수신기와 연결된 조작부 자체는 자동차 핸들처럼 생긴 간단한 것이었다. 문제는 감각이었다. 자전거 운전은 눈으로 땅과 주변 경치를 보면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전거를 타는 일은 기울어진 정도를 몸으로 느끼면서 그 때 그 때 반사적으로 대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화면에 나타난 영상과 수평계의 수치만을 보고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게 원격 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그것은 비행기를 착륙시키는 일이나 사실 별 다를 바 없는 난이도였다. "이거 심하게 넘어지면 장비 망가지거든. 그러면 큰일나요." 멜라니온이 파손될 위험때문에 마음 놓고 넘어질 수도 없었다. 만약에 너무 심하게 넘어지게되면 나를 붙잡아 주기 위해 종욱이 자기 자전거를 타고 바짝 붙어서 같이 가면서 몇 번 더 시도해 보았다. 그렇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원격 조종하는 사람의 실력이 문제인가 싶어, 진수 선배와 종욱으로 클라이언트 조종사쪽을 교체해 보기도 했지만 좌절감과 함께 낙상을 당하는 나의 비극적 결말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면서 밤은 깊어 갔고, 우리는 철수 해야 했다. 정 박사님은 일이 해결되지 않은 것에 오기가 생겼는지, "장비 그냥 여기다 두고 갈게요. 내일 다시 한 번 해봅시다." 하면서 장주 갈비 트럭을 몰고 돌아갔다. 그리고 목요일이 밝았다. 이제 토요일까지는 불과 이틀이었다. 사실, 그녀를 만나는 시간이 다가오는 것은 아주 반가운 일이었다. 심지어 지금처럼 시간에 쫓기고 상황이 안좋고, 만나면 난처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그래서 두렵고 난감한 마음에 가슴이 답답해도 반가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만난다는 그 단순한 사실 하나의 힘이, 나머지들을 다 덮어버리고, 토요일은 기다려지는 날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 토요일을 제대로 맞이 하려면, 이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그날 하루 동안 진수 선배와 재찬, 종욱으로부터 몇 번씩. "어떡할거냐?" "정 박사님한테 무슨 연락왔어?" "생각 해 봤는데, 클라이언트 입력장치를 핸들 대신에 조이스틱으로 바꾸면 어떨까?" 그런 질문의 전화를 받았다. 나의 대답은 항상, 몰라. 몰라. 몰라. 였다. 그러던 끝에 정박사님의 전화가 다시 왔다. "학교 C동인가 D동에 선형시스템 연구센터라고 있죠?" "있었던 거 같은데요." "거기에 박명아 교수님이라고 인공지능 전공하시는 명예교수님 계세요. 그 분한테 제가 전화드려 뒀으니까 있다가 여섯시에 그 분 방에서 만납시다." 박명아 교수님이라면 나도 아는 분이었다. 9시에 시작해서 10시 30분에 끝나는 수업이면, 항상 9시 00분에 말을 하기 시작해서, 정확히 10시 30분 00초가 되어야 수업을 마쳐 주는 것으로 악명 높은 할머니 교수님이셨다. 학교에서 거진 가장 나이가 많으신 편인 박 교수님은 인공지능이 전공이었다는데, 나이가 드셔서인지 주로 기초 선형대수학 같은 기본 과목을 가르치셨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딱부러지는 수업시간때문에 그녀를 싫어했으나, 강의 자체는 어느 젊은 교수들 못지 않게 정석대로 였다. 나 역시 자진해서 박명아 교수님 강의를 신청한 적은 별로 없었으나, 시간표가 맞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박 교수님의 강의를 듣게 되면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가끔, 광복 직후 혼란기에 과학 공부한 사람들이 맨주먹으로 뭐 해보겠다고 고생하던 때의 이야기 같은 걸 들려주실 때가 있었는데, 그런 이야기들을 나는 참 좋아하기도 했다. "정 박사 왔나? 이 덩치 큰 친구가 자네가 말한 그 자전거 파일럿이고?" 정 박사님과 내가 교수님 방에 들어서니 박 교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원격 조종 장치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요. 교수님. 그런데, 이걸 사람이 조종하려다가 보니까 눈으로 보고 숫자만 보고 조종하기가 너무 힘들다는게 문제거든요." "그럼 내가 자네들을 어떻게 도와 주면 되나?" "연구센터에서 기계 학습 연구할 때 쓰는 워크스테이션 시스템 있잖아요. 그걸 좀 쓰게 해 주십시오." 정 박사님의 말을 듣더니 박명아 교수님은 빙그레 웃으셨다. 돋보기 안경 뒤로 주름진 얼굴의 그녀가 웃는 그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역시, 정 박사구만. 아직도 학부 때, 터미널에다 틱택토 짜 올리면서 장난치던 때랑 별 다를 바가 없네." "이게...... 사람은 수치만 보고 조종하긴 어렵지만, 컴퓨터 신경망 시스템을 돌리면 컴퓨터가 조종을 돕게 할 수가 있을 거 같거든요. 그렇게 되면 입력되는 각도 정보하고 중력 정보를 갖고 연구센터 워크스테이션이 돌고, 그래서 자동 조종으로 자전거 균형을 잡아 주는 거죠. 간단하게 짜넣어도 충분히 될 거 같거든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정일환 박사님의 계획을 알 수 있었다. 원격 조종 장치를 컴퓨터에다 연결해서 인공지능이 균형을 잡도록 하는 것이었다. 클라이언트 자체가 유닉스 기반으로 개발되어 있으니까, 연구센터 워크스테이션에도 쉽게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박명아 교수님은, 어느 학부생의 한심한 도전에서 비롯된 이 황당 무계한 기획을 과연 도와 주실 것인가. 그 답은 도와 주는 쪽이었다. 박명아 교수님은 전적으로 정 박사님을 믿고 있었다. 열 아홉살 소년으로 학교에 입학해서, 30세로 박사학위를 따서 학교를 나갈 때 까지, 박 교수님과 정 박사님은 온갖 분야의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학문의 변경들을 쿡쿡 찌르며 다니곤 했다. 어느 새 나이차이가 50년쯤 나는 학부생들이 수업 늦게 마쳐 준다고 짜증을 내고, 강의가 끝나기 10분전부터 여기저기서 핸드폰이 울어대곤 하지 않는가. 박명아 교수님은 재미난 문제를 갖고 오랫만에 학교를 찾아온 옛 제자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컴퓨터가 세 대가 있잖아. 쿠루 머신, 바이코누르 머신, 휴스턴 머신. 그런데, 쿠루랑 바이코누르는 지금 부팅이 안되고, 휴스턴도 좀 불안해." "아니, 왜 그렇게 됐습니까?" "지난 번에 왜 국가기술과제 한다고 물리과, 화학과 교수들하고 전산과랑 수학과 교수들이, 저기 20억짜리 프로젝트 하나 맡은 적 있잖아." "엔탁(NTAC)이요?" "그 놈 한다고 이 놈들이 순 여기저기 엉뚱한 학회장가서 잔뜩 떠들기만 하고, 이 교수 저 교수 이름 올려 놓고 연구비만 타먹었지 사실 아무것도 몰라. 그냥 그렇게 연구하고 있네, 하고 있네, 하고 어영부영하면서 시간만 끈거야. 그러다가 결과 제출해야 될 때 되니까 수학과 석사 과정 학생하나가 하룻밤 밤새서 만든거 편집해다가 보고서 냈거든." "20억짜리 과제 정도면 그래도 좀 제대로 하지 않나요?" "정박사만큼만 하면 괜찮게. 그래서 허둥지둥 결과 만든다고 이 놈 저 놈 뒤지고 다니다가 워크스테이션들이 다 엉망이 됐어." 나는 다만 할머니가 "워크스테이션"이라는 발음을 아주 멋있게 한다는 생각 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할 수 없죠. 휴스턴 하나만 있어도 되니까. 휴스턴 머신은 뭐가 어떻게 불안합니까?" "이거 봐." 박명아 교수님은 직접 컴퓨터 화면에서 SSH 터미널을 열어서 휴스턴이라는 컴퓨터에 접속했다. 나로서는 잘 알아먹을 수 없는 숫자들을 보여주시다가 박 교수님이 말하셨다. "여기 이 부분 있지. 여기가 가끔 메모리 릭키지가 생겨. 그걸 가만히 놔두면 시스템이 다운 돼 버리거든." "그렇겠네요." "내가 만들어둔 스크립트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이걸 돌려서 직접 손으로 메모리를 돌려줘야돼." 나의 덜떨어진 고정관념 때문이었겠지만, 할머니 교수님이 능숙하게 컴퓨터를 다루면서 지극히 현실적인 이런저런 팁을 알려주는 모습은, 다시 한 번, 아주 인상적이었다. 박 교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컴퓨터를 붙잡고, 버그들과 네트워크 설정에 시달리면서 연구 중인 세대 였다. 하기야, 월급을 받고 가르치고 연구한다는 교수라면, 나이가 좀 들었기로 당연한 일일만도 했다. 박명아 교수님과 나는 정 박사님의 갈비집 트럭을 타고 자전거와 장비들이 있는 기숙사 뒷길로 다시 돌아왔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자기들끼리 연락을 하고는 재찬과 종욱, 진수 선배가 모여 있었다. "네트워크 프로그래밍 해 본 사람?" "저 해 봤는데요." 종욱이 대답했다. "뭘로?" "PHP랑 Java로만 해봤어요." "그 정도면 됐어요. 라이브러리 함수 몇 개만 익히면 유닉스에서 C로도 똑같이 할 수 있거든. 그러니까 학생이 휴스턴 머신에 들어갈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네트워크 부분을 짜요." 정박사님이 노트북을 열고 원격 조종 시스템인 멜라니온의 소스코드를 살피고 있을 때, 재찬이 말했다. "그런데요. 이게 무선 네트워크면 지형이나 거리도 고려해야 되는거 아닌가요?" "그렇..지." 박명아 교수님이 입을 열었다. "목적이......" 박 교수님이 "목적이"로 운을 떼자, 정박사님이 같이 말하며 따라 읊었다. "목적이 불분명한 개발 프로젝트는 반드시 실패한다." 수십년을 같이 공부해 온 스승과 제자다웠다. 나는 기숙사에 올라가서 급히 학교 지도 하나를 프린트해 왔다. "토요일 날,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학교로 진입하면 서문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서문 바로 앞쪽에 저는 자전거를 미리 세워 둘 생각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자전거에 탑승하고, 이 서문 바로 앞에 쭉 뻗은 길을 따라... 바로 여기 여학생 기숙사 앞까지가 우리가 진행해야할 구간입니다." "거리가 얼마 정도 되나?" "한, 팔백 오십, 육십미터쯤 되는 거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 갑자기 정박사님의 표정이 어두워 졌다. "난감한데요. 멜라니온 무선 네트워크 범위가 5백미터가 채 안될텐데요." "그러면 어떡하죠?" 종욱이 물었다. 어제 오늘 어쩌다보니 종욱은 정박사님과 손발이 굉장히 잘 맞는거처럼 보였다. "그러면.... 그러면.... 예,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여기 이 중간, 그러니까 식당 건물쪽에 기지국 역할을 할 수 있는 중계기를 하나 세웁시다. 무선 노트북에 안테나만 하나 달아 놓은 다음에 조금만 손보면 대강 쓸만할 것 같은데요." "내가 이 대학원생 친구랑 같이 만들어 보지." 박 교수님이 진수 선배를 언급했다. 지도를 들여다 보던 재찬이가 말했다. "이거 따져보니까, 그렇게 되면 준비할 게 꽤나 많아지는데요. 우선 팀을 나눠야 합니다. 멜라니온 클라이언트랑 휴스턴 워크스테이션 있는 컴퓨터팀이 있어야 되고, 무선기지국 역할을 하는 식당팀이 있어야 되고요... 그리고, 만약에 일이 잘못되어서 자전거가 넘어지려고 하면 자전거 쪽으로 달려갈 수 있는 구급팀이 있어야 합니다. 이 구급팀이 계속 안보이게 자전거를 멀찌감치서 따라다녀야 합니다." "그러면 팀끼리 연락할 때 쓸 핸드폰 헤드셋 같은 것도 있어야 겠네." 일단 가장 바쁜 것은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핵심 부분인 신경망 가속 알고리즘은 박명아 교수님 연구팀이 예전에 만들어 놓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 핵심부분과 멜라니온의 자동 조종장치를 연결시키는 것도 꽤나 골치 아픈 일이었다. 따라서 재찬이 지도를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벌써 정박사님은 코딩을 시작하고 있었다. 재찬이 다시 말했다. "이거 좀 보시겠어요. 여기 식당 쪽 지나서 꺾이는 부분이요. 그러니까 출발점에서 한 624미터쯤 되는 지점. 여기는 나무가 우거져서 구급팀이 따라간다고 해도 자전거가 넘어지는지 어떤지 잘 안보일거 같은데요." "그러면, 이렇게 하자. 무슨 신호기 같은 걸 들고 가다가 여기서 만약에 위급상황이 생기면 신호를 보내는 거야. 그러면 구급팀이 출동하는 거지." "패시브 시큐리티 시스템으로 하는게 좋을 텐데." "패시브요?" "피동 안전 체계." "피동이요?" "정 박사 말고, 이 중에 피동 안전 체계 아는 사람 없나?" 박명아 교수님. 역시 교수 티를 이럴 때 한 번 내 주신다. 잠시간의 침묵과 정 박사님의 웃음. 답은 내가 했다. "안전이 정말로 중요할 때는요.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신호를 보내는게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기면 신호가 꺼지는 식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만약에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넘어질거 같아서 제가 신호를 보낸다고 합시다. 그런데, 만약에 그때 마침 신호기까지 고장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안되잖아요. 그래서, 대신에 항상 신호를 보내면서 가다가 만약에 무슨 사고가 생기면 신호를 끄게 합니다. 그 꺼지는 걸 보고 구급팀이 출동하는 거죠. 만약에 고장나서 신호가 정 안꺼지면 전원을 내리거나 부숴버려서 알릴 수도 있는거고요. 보통 고장이 심각하게 나면 자연히 신호도 안들어오고 꺼지게 마련이니까 금방 알아볼 수 있죠. 이렇게, 능동적인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 신호를 보내지 않음으로서 위험을 알리는 걸 패시브 시큐리티라고 합니다." 박명아 교수님도 만족스럽게 웃으셨다. 작년 가을학기에, 연소공학과 전공수업에서 발전소 보일러의 안전시스템에 대해서 배우다가 얼핏 들은 것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식당을 지나고 나무뒤로 들어가면서부터는 초록색 레이저 포인터를 켜고 갑시다. 만약에 무슨일이 생겨서 초록색 레이져 불빛이 보이지 않으면 구급팀이 출동하기로 하고요." "초록색 불빛이 멀리서 잘 보이지 않을거 같은데." "제가 천문학과 대학원 다니는 친구한테 천체 망원경을 하나 구해 볼게요. 그걸로 보면 잘 보일 겁니다." 기숙사 뒷길에서 저마다 도구와 장비들을 붙들고 우리 여섯명은 분주히 움직이며 밤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 전날인 금요일이 찾아 왔다. 정박사님과 종욱은 밤새도록 프로그램 짜기에 몰두하느라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나는 재찬이와 함께 헤드셋, 레이저포인터, 천체 망원경, 다른 사람들 심부름 거리 같은 잡다한 것들을 모으고 다녔고, 진수 선배는 박명아 교수님과 함께 무선기지국을 만들었다. 정박사님의 트럭을 식당 벽쪽으로 댄다. 그 트럭을 딛고 올라가서 진수 선배가 식당 지붕 위로 간다. 식당 지붕 위에는, 식당에서 위성 텔레비전 방송을 보기 위해 달아놓은 위성 안테나가 하나 있는데, 이걸 잠시 뜯어내는 것이다. 위성 안테나를 노트북과 직접 만든 회로에 연결해 무선 네트워크 기지국으로 사용하게 된다. 내일. 바로 내일이었다.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온 학교를 뒤집고 뛰어 다니면서 우리는 정신 없이 일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정 박사님의 장주 갈비에서 다같이 저녁을 하게 된 우리팀은 자뭇 비장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 가운데, 성공을 위한 각오를 다졌다. 한편으로는 모두가 재밌어하고 즐거워 하고 있는 거 같기도 했다. "옛날에 해방되고 얼마 안돼서... 그러니까 사십육년도 늦여름, 초가을 쯤일거야. 그 때 경성에 전화망 교환기가 한 번 벼락을 맞고는, 전화망이 아주 통채로 나갔다고.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나니까 그 때 경성 전화망이 뭔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있어야 말아지. 그래서 그 때 나랑 미군정 여군 정보부에 스물 두살짜리 정보 장교 소위 하나랑, 달랑 둘이서 서울 시내 왠갖 곳을 다 돌아다니면서 전화망을 고쳐 보겠다고 다녔다고. 그 때 참 막막했지. 그 소위하고 영어도 잘 안통했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그 막막한 와중에도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는데 그게 재미가 나고, 또 신기하더란 말이야. 결국 그 때 둘이서 서울시내 전화망을 다 다시 짰지. 나도 왜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오늘 그 때 생각이 많이나는구만." 박명아 교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 날 밤, 바로 토요일의 전날 밤에 나는 자전거를 막상 타지 못했다. 신경망 인공지능 시스템의 성능을 높이려면, 자전거를 잘타는 사람의 경험이 많이 입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찬과 종욱, 진수 선배가 줄기차게 자전거를 타고 온 학교를 빙빙 돌아다녔다. 그자들은 참 거칠것 없이 신나게, 내 생애 맨 처음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맨날 넘어지기만한 나 자신이 이 자전거에 수천배의 타격을 입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들이 내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가 어디 망가뜨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었다. 좀 얄미웠던 것이다. 아주 늦은 시각까지, 우리는 내일을 준비했다. 내일, 나는 내 자전거를 타고, 뒤에 사랑하는 그녀를 태운채, 서문에서부터 기숙사 앞까지, 연장 팔백오십사미터를 달릴 것이다. 서문 앞의 직선 구간을 주파하고, 200미터 지점을 지난 커브를 돌고, 그리고 식당 기지국 전파 구역으로 돌입한다. 잠시 후에 외부와 차단된 나무 지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때 나는 내가 안전하게 주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초록색 레이저를 켜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숙사 앞 계단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달리면, 나는 결승선을 통과한 것이 된다. 나는 내일은 필요하지 않을 헬멧과 보호구를 벗었다. 그것들은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았지만, 한 오륙년은 쓴 듯 보이게 헤어져 있었다. 나는 기숙사 방 한켠에 가지런히 그것들을 포개어 두었다. 나는 책상 앞에 조용히 앉았다. 나는 생각했다. 내 미래나 진로, 학업이나 인생에 대한 고민으로 생각이 빠져들기까지 했다. 그렇거나 말거나, 피곤에 지친 룸메이트 재찬은 신나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