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벗꽃 관광기
3월의 마지막 주중에 아내와 나는 아팔라치온 산맥을 넘어서
마파람이 불어오는 남녘을 향해 2박3일간의 워싱턴 벗꽃 관광길에 올랐다.
S 여행사가 벌인 그룹투어에는 안내인을 포함하여 30명이 함께 했다.
일행들은 저마다 설레는 유년의 모습으로 크리스티역에 출발시간인 8시까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모여들었다.
런던에서 새벽길을 달려 약속시간에 도착한 팔순을 넘긴 할머니를 비롯해
우리 모두에겐, 오명처럼 따라 붙던 코리언타임이란 없었다.
날씨는 더없이 따뜻하고 청명해 시집가는 새색시 마음처럼 한껏 부풀고
베레모에 멜빵바지를 한 나는 어느새 나그네가 된다.
"여행을 하라 그리고 뜨겁게 사랑을 하라고 했던가?"
오늘만을 위해 달려온 세월은 아니지만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충실하게
가꾸리라 다짐하며 길을 떠났다.
산을 넘고 강을 가로질러 구비를 돌아서면 산허리를 휘감은
보송보송한 흰구름이 손짓하며 반긴다.
초원에는 파릇파릇한 새싹이 움트고 목장의 가축들은 윤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봄이 오고 있었다.
남행한지 반나절,오후 7시경 워싱톤 근교의 한인식당에 도착하여
얼큰한 생선찌개를 곁들인 식단으로 공복을 채우고
버지니아 매나세스에 소재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첫날은 아름다운 자연, 즐거운 인생을 노래하며 일행들과 얼굴을 익히면서
달려온 하루였다.
이튿 날은 가장 바쁜 날이었다.
가야할 곳은 많고 시간이 모자라 마냥 쫏기는 형국이었다.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이랄 수 있는 '루레이 동굴'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버지니아의 세난도 계곡을 향해 달렸다.
세난도 국립공원안에 만년의 태고적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루레이 동굴은,
1878년 발견된 세계 3대 석회암 종유굴이란다.
지금은 윌리암 캠벨의 손녀가 관리하는 개인 소유의 나선형 수직동굴로서
깊이가 지하 4층쯤 되고 바닥에는 혼례를 치를 수 있는 넓은 광장도 있었다.
세상의 그 어떤 장인의 손길로도 빚어내기 어려울 만큼 아름답고 현란한
색상의 커튼이며, 천정에 매달린 갖가지 석순이 물에 반사되어 조화를 이룬
황금도시(?) '꿈의 궁전'은 마치 인형들이 살고 있는 별나라 같다.
바다의 신이라는 플라토(거대한 백색기둥 모양의 석순)며,
석순이 연출(?)하는 자연의 음악에 나는 소름끼치는 전율마져 느껴야 했다.
어찌 사람도 아닌 것이 그렇듯 신기에 가까운 투명하고 오묘한 소리를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런가하면 밑둥이 잘려 쓰러진 듯한 석순은 빼다박은 거목을 닮아
감탄을 절로나게 한다.
한마디로 자연은 위대한 어머니였다.
창조와 질서,아름다움이 거기에 있었다.
오후 일정에 따라 워싱턴 DC로 돌아온 우리는 정방형의 석조건물들이
고만고만하게 빼곡히 들어찬 도심을 지나 백악관이 보이는
넓은 공원 어귀에 하차하여 앵글을 맞추며 모습을 담느라 애썼다.
그 날따라 유고에 대한 나토의 공습을 항의하는 세르비아계 사람들의 데모가
공원 곳곳에서 한낮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들의 열띤 외침을 들으며 발칸반도의 불길이 하루속히 진화되어
코소보의 분쟁이 종식되기를 지구촌의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빌었다.
국회의사당,링컨기념관,한국참전기념탑 등을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제퍼슨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 주변에는 4천5백 그루의 많은 벗꽃나무가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만개한 벗꽃은 찾아 볼 수 없고 애꿎은 목련만 피어 있었다.
잠시나마 그 화사함에 취해보려 떠나온 여정인데, 옷깃 여미며 돌아서는
여인의 모습처럼 쓸쓸히 발길을 돌려야 했다.
계절이, 그 야속한 계절이 우리들을 울린 것일까?
귀로에 오르던 셋째 날은 아침부터 비가 떨구고 있었다.
일행의 떠남을 아쉬워 함이리라.
비록 벗꽃관광은 실패로 끝났지만 많은 사람들과의 소중한 만남,
정겨운 대화는 있었다.
그 중에는 런던에서 온 82세의 할머니,간호사인 예쁜 외동딸과
여행길에 오른 모녀,형법변호사인 자랑스런 딸을 둔 팀장 아저씨,,
심심할세라 눈깔사탕이며 초코렛을 열심히 나누어 준 정 많은
경북여고 출신 서울아주머니 내외,친정어머니를 대하듯 초면인
팔순의 할머니를 끝까지 보살핀 눈매 고운 스카브로 아주머니,
거동이 불편한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받들며 손 발이 되어 준 칠순을 넘긴 아내,
흥남철수작전의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들려주던 수산업의 산 증인 이선생,
경건한 신앙생활의 불일치를 걱정하며 금연을 계획하고 있는
정선생, 이민을 준비하며 한국에서 방문한 노부부,
나이아가라에서 합류한 어머니와 건강한 세자녀, 그 외 많은 동행인들....
이들 모두는 헤어진지 몇 날이 지나지 않았지만 추억의 사람들,
다정한 이웃으로 기억된다.
특히 관광안내를 맡았던 나이아가라의 기노창씨를 기억하고 싶다.
여느 가이드와는 달리 매끄럽고 분주하지는 않았으나 해방둥이인
그의 둥글둥글한 중년의 모습에서 자유로운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따뜻하게 친절을 베푼 후덕한 마음씀에
우리 모두는 편한함을 느꼈다.
즐겁고 유쾌하게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힘 입은바가 크다.
지면을 빌어 고마움을 전한다.
아울러 오고가면서 차분하게 안전운행을 하며 손님들에게 미소를
잃지 않았던 배불뚝이(?) 캐네디언 운전자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보내고 싶다.
끝으로 긴 여정에 나그네되어 고락을 함께 한 동호인 여러분과
가정에 건강과 화평이 넘쳐나기를 기원한다.
1999.4.7 캐 나다중앙일보
루레이동굴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