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씨다.
빅토리아데이 연휴기간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는 없었다.
아내는 이른 아침부터 야외에서 먹을 음식 준비에 손이 바쁘다.
지난 밤,고사리를 캐러 가자고 꼬드기던 그녀에게 별 생각없이
그러자 해놓고는 쉽게 잊어버렸는데 오늘 아침 신이나서
흥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간밤의 약속을 파기할 용기가 차마 나지 않는다.
몇 해전,무스코카 고홈이라는 곳에서 왕모기에 온몸을 뜯기며 해지도록
고사리를 캐던 기억이 생생하여 빠져나갈 구멍만 있다면 사양하련만
묘책이 안선다.
하여 단서를 하나 붙여 동행하기로 했다.
'작업은 네 시간만 하고 돌아 온다는 것'.
하이웨이11번을 따라 북상하여 관광도 할 겸, 그레이븐허스트라는
아름다운 마을을 찾았다.
사람의 왕래가 잦은 지역이라 특별히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주차장 주변이나 먼지 낀 길섶에서 고사리를 쉽게 발견할 수가 있었다.
계절이 조금은 지난 탓인지 쉬어버린 놈도 많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갓 난 늣둥이며,통통하게 살찐 것들이 수없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고사리는 공기가 맑고 건조한 지대에서 군집하여 자라며, 대개 취나물과
어울려 공생하듯 한자리에 몰려 있다.
따라서 두어군데만 잘 만나면 힘 들이지 않고 노다지(?)를 캐는
행운을 얻게 된다.
또한 같은 시기 동일한 장소에서 고사리와 취나물을 함께 채취할 수가 있 어
일거양득이다.
한국 같으면 깊은 산중에 들어가야만 구경할 수 있는 귀한 것을
이곳은 도시를 약간 벗어난 야산이나 길섶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래서 우리네 아낙들은 오월이면 휴일도 반납하고 고사리를 캐려
즐겨 산과 들을 찾게 된다.
어쩌면 이 계절에 알맞는 취미요,낙이 아닐 수 없다.
오늘도 예전처럼 모기와 파리떼가 극성을 부렸다.
단 피 체질을 가진 사람이 해충의 공격을 많이 받는다고 하더니
그닥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눈두덩이며 정수리를 파고드는 악질도 있고 어깨나 콧잔등을
소리없이 내려앉아 쏘고 달아나는 교활한 놈도 있다.
세상에는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다.
귀하고 맛나는 고사리를 얻으려면 해충들의 성가심도 참아내야 하나보다.
세상 살아가는 이치가 이와 닮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차안에 돗자리를 깔고 준비해간 식단으로 점심을 먹는데 이건 숫째
꿀 맛이다.
평소에는 눈길 한번 주지않았던 반찬도 제 몫을 다하여 미각을 돋군다.
심한 말로 '배 터지게 잘 먹었다'는 말은 오늘을 두고 표현해도 좋을 듯 하다.
정오에 도착해서 네 시간을 작업한 것이 가베지백으로 반을 넘게 채웠다.
꾀도 나고 물린 자리가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다.
약속시간을 둘러대며 그만하고 돌아갈 것을 종용하나
묵묵부답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도그럴 것이 지천에 깔린 나물을 보고 어찌 씨알이 먹혀 들겠는가?
애시당초 지켜지지않을 부부간의 약속임을 간과하고 철없이 따라나선
내가 바보였다.
아내를 질기게 괴롭히던 디스크도 오늘은 겁에 질려 달아났는지
까탈을 부리지 않는 걸 보면 신기하다.
해거름이 되어서야 굽혔던 허리를 펴고 귀가할 채비를 한다.
얼굴에는 아쉬움으로 가득차고 발길을 쉬 돌리지 못한다.
내일 다시 오자며 아내의 어깨를 토닥거려 등을 밀었다.
그제서야 환한 웃음으로 다가서며 '랫츠고'를 외친다.
그렇다. 행복이 별거냐 ?
별나진 않지만 제 하고픈 것 하다가 시름없이 하루를 마감하는
이 작은 순간이 행복임을 아내의 땀에 젖은 얼굴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고맙다.아내여 사랑하는 이여!
1999. 6.1 캐나다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