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비사(1)-가요계의 뒷 이야기

 

 (1)대통령과 대중가수-전두환과 조용필의 독재 서태지와 김영삼의 파격
 

대통령은 민심을, 인기가수는 대중을 무기로 한다면 둘의 지지기반은 겹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서로간 밀월 또는 갈등 관계가 생길 수 있다. 대통령과 대중가수가 벌이는‘애증의 곡예’는 한편으로 대중가수의 영향력이 그만큼 막강해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대중가요란 늘 같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끊임없이 바뀐다. 대중가요가 표현하는 정서는 시공을 초월해 유사한 반면 시대마다 유행하는 색채와 분위기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과거에 세련된 노래라 해도 세월이 흐르면 어쩔 수 없이 퇴색하는 법이다.

긴 시간이 지난 뒤 우연히 옛 노래를 들으면 ‘저 시절이었으니까 저런 노래가 유행했다’는 것을 절감할 때가 있다. 대중가요는 한 시대의 소리감각, 어법, 사랑을 비롯한 세인들의 관심사 그리고 시대정신과 사회적 상황까지 생생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가요는 사운드와 화성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각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사회사’다.

먼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존 레논의 ‘이매진(Imagine)’을 보자. 사람들은 이 곡을 단순히 평화의 찬가로 해석하지만, 사실 이 노래에는 당시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녹아 있다. 이 곡은 나중에 존 레논이 미국의 닉슨 정부로부터 ‘문화게릴라’로 낙인 찍혀 비자 연장신청이 기각되는(다시 말해서 미국 땅에서 나가라!) 빌미가 됐다.

‘사유재산이 없다고 상상해 보라. 물론 상상하기 어려울 거야. 그렇게 되면 탐욕에 대한 필요도 기아도 없지. 형제애만 있을 거야. 모든 사람이 세상을 공유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고.’

서양 사람들은 지금도 존 레논이 닉슨 정부에 대항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존 레논보다 대중음악의 사회사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없을 것이다.

서양에서는 노래의 사회적 성격이 자주 발견되지만 우리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오랜 군사독재로 인해 아티스트의 자유로운 의식표출이 어려웠던 탓이다. 하지만 한국 대중음악에도 이따금씩 사회구조에 저항한 아티스트가 있었다.

김민기가 작곡하고 양희은이 불렀던 ‘아침이슬’은 제3공화국과 유신의 억압적 사회상황에 대한 소묘로 볼 수 있다. ‘아침이슬’은 금지곡이었다. 당국은 이 노래의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부분에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아니 왜 하필 묘지 위에서 해가 뜬다는 거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적 사고와 거기에 반(反)하는 저항의 사고가 있기 마련이다. 존 레논이나 김민기의 음악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역이었다. 하지만 시대에 순응하는 경우라도 시대상황을 드러내기는 마찬가지다. 일종의 ‘역(逆)반영’이라고 할까.

특정한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제1의 통치자’, 즉 대통령으로 대변된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은 각 시대와 통치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정치적·사회적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그 시대의 대중음악을 주도했던 가수를 비교하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온다. 그들의 직접 또는 간접 관계를 통해 당시 대중음악의 사회적 메커니즘을 읽을 수 있다.

▶박정희와 송창식
 

박정희 정권을 압축하는 대중가수를 한 명 꼽으라면 누가 될 것인가. 저항성으로 본다면 당연히 포크의 김민기와 록의 신중현이 먼저 떠오른다. 박정희 정권의 대중문화 억압과 린치의 대표적 희생자였던 두 사람은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시대정신을 견인한 인물로 높은 위상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박정희 대 김민기’, ‘박정희 대 신중현’은 너무도 익숙한 구도다. 이렇게 대립시킬 경우 당시 대중가요의 주류질서가 배제되는 약점이 있다.

70년대의 음악 풍토와 대중의 인기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인물은 송창식일 것이다. 그는 박정희 시대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였다. 그 시대의 빛과 그림자, 광채와 잿더미를 동시에 경험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박정희 시대를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1960년대 말 윤형주와 함께 결성한 듀엣 ‘트윈 폴리오’로 가요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한국 최초의 포크 가수라는 영예를 얻었다. 그럼에도 데뷔 당시에는 자작곡 없이 주로 외국 팝송만 번안해 불렀다. 하지만 이후 한대수의 영향으로 곡을 직접 쓰면서 ‘작곡의 귀재’로 비상한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시대에 그는 1973년 김민기가 노랫말을 쓴 ‘내나라 내겨레’를 부르며 시대에 맞서는 측면을 보였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한다면 그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는 대중가수가 일차적으로 열망하는 ‘대중스타’에 가깝다.

1975년 서슬 퍼런 대마초 사건에서 ‘한잔의 추억’의 이장희, ‘너‘의 이종용, ‘비와 나’의 윤형주, ‘사랑하는 마음’의 김세환, ‘노을’의 석찬 그리고 ‘벽오동’의 김도향(투 코리안스) 등 당대의 포크 스타들이 모조리 쓰러져 갔을 때도 송창식은 유일하게 그 소나기를 피했다. 요즘 말로 하면 ‘서바이벌 게임’의 생존자라고 할까?

동료 통기타 가수들에 대한 숙청이 진행되는 상황에 그는 포크 가수로는 최초로 1975년 MBC 최고가수상, 즉 ‘가수왕’이라는 영광마저 안았다. ‘박정희 시대의 가수’로 우뚝 솟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성공은 그가 쓴 ‘피리 부는 사나이’ ‘한번쯤’ ‘왜 불러’ 등 놀라운 감성이 드리워진 곡들 덕분이었다. 이 곡들은 뒷날 금지 조치된 그의 또 다른 대표작 ‘고래사냥’과 더불어 그 시대 음악의 감수성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물론 이러한 노래는 박정희 시대의 정치성이나 사회성을 투영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송창식이 로커의 이미지가 강한 신중현이나 저항적 색깔이 물씬 풍기는 김민기보다 사회성이 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편에서 암울한 시대가 주는 무게에 짓눌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권력에 대한 최선의 ‘공격력’은 무엇이었을까.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에 관련된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김민기를 도와준 송창식

    당시 김민기는 1977년 군에서 제대해 경기도 부평 근처의 완구공장에 창고 관리직으로 취직했지만, 곧 해고당하고 세칭 ‘노가다’로 연명하던 중에 ‘공장의 불빛’을 녹음했다. 그러나 유신정권에 ‘위험인물’로 찍힌 김민기가 음반작업을 하기는 어려웠다. 이 상황에 그에게 실낱 같은 희망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송창식이었다. 용산 원효로에 있던 자신의 개인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다.

김민기 곁에만 있어도 공범으로 몰릴 수 있는 상황에 그에게 작업실을 내주었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였다. 만약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도 피바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무덤을 딛고 ‘살아남은 자’가 갖는 인간적 죄의식을 해소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송창식은 김민기가 당시 동일방직 사건을 소재로 노래굿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얘기도 있다(만약 알았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지만 당시 최고 가수인 송창식이 기꺼이 스튜디오를 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제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공장의 불빛’을 주조해낸 김민기도 위대하지만 그것을 만들 기회를 마련해준 송창식도 똑같이 위대하지 않을까.

송창식의 개인 스튜디오에서 조원익의 세션으로 녹음하고 이대 라디오방송국에서 노래녹음과 믹싱을 마친 ‘공장의 불빛’은 열악한 기자재로 인해 음질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공장의 불빛’은 한국교회선교사협회 후원으로 제작돼 일부 테이프가 배포되면서 관계당국의 주목을 받았다. 이 때문에 관계기관 대책회의까지 열렸으나 당국은 제2의 김지하 사태가 일어날까 우려해 아예 무시하고 덮어버리게 된다.

김민기는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원본과 두 개의 복사본을 만들어 모처에 숨기고, 고문을 받더라도 실토하지 않기 위해 그 장소를 잠재의식 속에서도 잊어버리도록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잊어라 아주 잊어버려라!). 하지만 그 최면은 너무나도 완벽했다. 정말 원본을 어디다 감추었는지 깡그리 잊어버린 것이다. 이 어인 일? 누구 말대로 지하에서 뿜어 올린 저항성의 불꽃이 다시 지하에 생매장된 셈이었다.

1990년 김민기가 주관한 ‘겨레의 노래’ 음반에 송창식은 다시 ‘공장의 불빛’의 마지막 부분인 ‘이 세상 어딘가에’를 불러 역사적 음반의 오리지널 스태프(?)로서 권리와 의무를 다했다. 피리를 부는 신비한 이 사나이야말로 1970년대를 살아간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내면에서 힘겨운 투쟁을 전개한 인물일 것이다.

▶전두환과 조용필
 

전두환 시대의 간판스타는 누구인가. 이 대목은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다. ‘최고의 가객(歌客)’이자 ‘20세기 대중가요의 영웅’으로 손꼽히는 조용필이다. 그는 정확히 신군부 정권이 탄생할 무렵 전성기를 열었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5공 정권 내내 난공불락의 톱 가수 자리를 지켰다. 물론 겉으로 통치자와 최고가수를 맺어주는 끈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정성과 무관하게 ‘청와대의 주인’과 ‘토토즐의 주인’은 서로를 건드리지 않는 ‘불가침조약’을 맺으면서 시대를 동행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함께 대중전선에 화려하게 등장한 조용필은 유신정권 말기에 출발선을 끊었지만 대마초 파동이라는 장애물에 걸려 불가피하게 트랙에서 중도 하차해야 했다. 이후 뼈를 깎는 가왕(歌王) 훈련으로 내공을 다진 후 정확히 1980년 꽃샘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에 무대로 되돌아왔다.

때는 바로 현대사의 분기점이라는 ‘서울의 봄’. 잠깐 동안 핀 개나리꽃이 5·17 계엄확대조치와 5·18광주의 비극으로 화향(花香)을 잃던 그 시점, 조용필의 노래는 현실에 아랑곳없이 더욱 진한 향을 뿜으며 꽃을 피웠다.

조용필의 컴백 앨범은 기념비적인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를 비롯해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대전블루스’ ‘슬픈 미소’ 등 수록된 전곡이 줄줄이 히트를 기록하는 대박이었다. 이 시점부터 그의 히트 행진은 신군부, 나아가 5공 정권과 운명적 인연을 맺는다. 본인은 절대로 원치 않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신군부 정국의 사운드트랙, 즉 배경음악이 됐다고 할까?

과연 무엇 때문에 이 시대에 조용필의 노래가 그토록 대중의 호응을 얻었던 것일까. 탁월한 가창력과 음색 그리고 획기적인 음향이 가져온 음악의 개가임이 명백하지만, 시대 분위기의 영향도 컸다. 이에 대한 방송작가 구자형씨의 해석은 설득력이 있다.

“조용필의 생명은 외침이라고 봅니다. 팝 가수 로드 스튜어트로부터 그리고 이후 판소리에서 그는 비명이란 영양제를 얻었지요. 그만의 섭생을 통해 생성된 트레이드마크인 절규는 결코 음악적인 것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억눌린 시대라서 사람들의 가슴에 더욱 파고들지 않았을까요. 조용필 아니면 불가능한 한(恨)의 울림이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당시 사람들의 숨막힘과 두려움을 씻어주는 안정제이기도 했지요. 다시 말해 전두환 시대가 조용필의 비명을 더 리얼하게 만든 겁니다.”
 
 

 조용필에 대한 진보진영의 시각

    그렇다면 조용필의 노래도 부분적으로 5공이란 시대적 특수환경에 빚을 진 셈이다. 전두환 정부는 초대형 대중가수의 출현으로서 분위기를 띄울 수 있었고…. 최소한 대중문화 부문에서 삭막함은 사라졌다. 그래서 어쩌면 전두환 정권과 조용필은 희미하게나마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용필은 후대의 서태지를 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소지한 것에 비해 시대에 대한 직접적 발언을 자제했다. 아니 일언반구도 없었다. 대통령이 ‘세금’을 걷어 통치하면서 민생복지로 보답하고, 스타는 ‘사랑’을 얻어 인기를 누리면서 대중의 성원에 보답한다면, 조용필은 분명 ‘애프터 서비스’가 부족했다.

‘오빠부대’ 소녀들의 가공할 히스테리, 당시 운동권이던 안치환마저 훗날 “정말 조용필 같은 가수가 되고 싶었다”고 털어놓았을 만큼 절대적 인기를 누렸고, ‘친구여’라는 노래가 노랫말의 진의와 전혀 무관하게 대학가에서 ‘감옥에 끌려간 친구’를 그리는 진혼곡으로 불렸을 정도의 광대한 흡인력, 80년대 말 이문세와 변진섭이 대학축제에서 학생운동권에 의해 무대를 저지당했던 반면 어느 누구에게도 야유를 받지 않았던 놀라운 카리스마…. 조용필은 이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시대정신을 외면한 채 오로지 음악의 예술성에만 혼신을 다했다. ‘마이 웨이’가 따로 없었다.

그 때문에 386세대로 통하는 당시 진보진영에서 조용필을 보는 눈은 더러 싸늘했다. 당시 운동권이었던 어느 중소기업 판촉부장의 일성.

“조용필은 누가 뭐래도 대중문화의 큰 우산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산 밑에 놓이고 싶지 않았다. 왜 그의 노래에는 ‘떠나자’는 내용이 그리 많은가. 그 시절에 우리는 ‘모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시대를 거꾸로 가는 그의 노랫말에 화가 날 때도 있었다.”

‘미지의 세계를 찾아서 떠나요. 사랑의 노래를 멈추지 말아요. 언제나 끝이 없어라. 알 수 없는 질문과 대답. 저 넓은 하늘 끝까지 우리들의 사랑을 노래해요….’ - ‘미지의 세계’

‘먼동이 트는 이른 아침에 도시의 소음, 수많은 사람, 빌딩 숲 속을 벗어나 봐요. 메아리 소리가 들려오는 계곡 속의 흐르는 물 찾아.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요….’ - ‘여행을 떠나요’

하지만 노랫말조차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그에게 사회성이 담긴 노랫말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였으리라. 그런 상황에 조용필의 음악은 사운드와 녹음수준 등 음악성의 업그레이드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그는 세기적 업적을 쌓았다.

돌이켜 생각해볼 때 어찌 제도권 음악계에서 전두환 시대에 대한 성토가 가능했겠는가? 거기에 편승하거나 드러나게 동조하지 않는 것이 대중가수가 취할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조용필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않았을지언정 ‘아 대한민국’도 노래하지 않았다. 불안한 중도노선에서 중용의 미학을 찾아낸 사람이 조용필이었던 셈이다.

그는 가능한 한 시대에 비켜서서 자신의 음악 세계를 탐구했다. 김민기식의 직접적인 저항은 아니었지만 그의 열창에는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항의’가 저류(低流)하고 있지 않았을까. 저항의 메시지는 꼭 가사로만 전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80년 5월의 봄, 비판의식이 거세된 메시지, 사운드에 대한 집착, 억눌림을 날려보내는 절규, 한 단계 도약한 우리 음반산업 등은 조용필이, 전두환 시대가 낳은 대중음악의 찬란한 광채이면서 옅은 그림자임을 말해준다. 마지막으로 전두환과 조용필의 관계를 대결구도로 본다면 싸움의 승자는 과연 누구인가. 말할 것도 없이 ‘정통성’을 보유한 조용필이다. ‘정치는 짧고 예술은 길다!’

▶레이건과 마이클 잭슨
 

여기서 잠깐 조용필 전성기의 미국을 보자. 한국에 조용필이라면 미국에는 마이클 잭슨이 있었다. 사람들을 춤 열병에 들뜨게 했던 흑인스타 마이클 잭슨은 과연 80년대라는 시대환경의 도움을 받았는가? 팝 시장은 이런 부분에서 우리보다는 명쾌하다.

‘스릴러’ 앨범에서 ‘빌리진’과 같은 지구촌 히트곡을 만들어낸 그는 흑인이지만 세상의 문제점들에 대해 좀처럼 얘기하지 않았다. 백인이 지배하는 미국 지배사회에 대한 저항을 의도적으로 제거한 것이다. 당시는 소련을 ‘악마의 제국’이라 일컬으며 보수적 가치의 복원을 부르짖던 공화당 레이건 행정부의 통치시대. 캐나다판 ‘타임’지라고 할 시사주간지 ‘맥클린’은 1983년과 1984년에 휘몰아친 잭슨 열풍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엘비스 프레슬리, 밥 딜런 그리고 비틀스와 같은 팝 스타들은 관능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현상(現狀)에 도전했지만, 마이클 잭슨은 그들과 대조적인 인물이다. 그의 노래는 레이건의 보수적 이데올로기와 완벽하게 조화되어 있다.’

흑인이면서도 사회성이 배제되어 있는 것도 고마운데 마이클 잭슨은 아예 대놓고 젊은이들을 선도하는 노래를 불러 레이건의 백악관을 기쁘게 했다. 그 노래가 ‘빌리 진’과 더불어 마이클 잭슨의 최대 히트곡인 ‘비트 잇(Beat it)’이었다. 젊은이들에게 음주와 약물의 유혹을 뿌리치라고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네가 정말로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해. 네 삶은 장난치고 있는 거야. 이건 진실이 아냐. 용기도 아냐. 그들은 널 걷어차고 망가뜨릴 거야. 그리곤 그것이 옳다고 소리치겠지. 끊어버려요. 끊어버려요. 나쁜 사람이 되고 싶은가요…’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도 있는 법. 이렇게 반항적 청춘을 격리시켜주는 마이클 잭슨의 협조에 레이건 대통령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이클 신드롬’이 절정에 달한 1984년 5월 그를 백악관에 초청해 공공생활에 기여하고 박애를 실천했다는 명목으로 ‘휴머니티 상’을 수여했다.

마이클 잭슨은 보수노선을 견지한 부시 대통령시대까지 천하를 호령하며 전성기를 유지하지만 1991년 로스앤젤레스 흑인폭동을 기점으로 절정의 인기가도에서 퇴각하게 된다.

▶노태우와 주현미
 

노태우 정부는 미국 레이건 행정부로부터 힌트를 얻었을까? 역대 정부와는 다르게 대중문화의 힘을 인식하고 통치 컬러에 맞는 대중가요를 장려할 의지를 갖고 있었다. ‘날 코미디의 소재로 해도 좋소’라는 노태우 대통령의 한마디는 그가 내세운 ‘보통사람’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반영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앞으로는 대중문화를 격의 없이 예우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럼 그 시대의 가수는 누구인가. 조용필의 인기는 여전했지만 새 시대의 흐름을 탄 주인공은 ‘약사 출신 가수’ 주현미였다.

그는 1980년대 후반 ‘트로트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여가수였다. 김연자 김수희 심수봉 문희옥 등이 맹활약하는 가운데서 주현미는 성인층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음색으로 6공 시대를 풍미했다. ‘쌍쌍파티’라는 ‘뽕짝메들리’로 혜성처럼 떠오른 그의 보컬은 목이 메는 듯 간드러지면서도 상쾌했다.

모처럼 ‘꺾기’ 창법을 회복한 트로트는 그와 함께 이전의 단조에서 장조로 대세가 바뀐다. ‘비 내리는 영동교’ ‘신사동 그 사람’이 그런 곡이었다. 밝은 색깔 때문이었을까? 주현미는 KBS ‘젊음의 행진’과 같이 나이 먹은 가수는 꿈도 못 꾸는 청춘 프로그램에도 출현했고 더러 주말 쇼프로그램에서는 어린 학생들의 연호까지 받았다.

오랜 세월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준 트로트의 노랫말은 6공화국 정부의 보수 이데올로기와 ‘주식 1000포인트’의 들뜬 분위기에 잘 어울렸다.

마침내 주현미는 1988년 연말 MBC 방송대상에서 트로트 가수로는 오랜만에 가수왕의 영광을 안았다. 이때 10대 가수 중에는 갖은 고생 끝에 밤무대 가수에서 제도가수로 떠오른 현철도 포함되어 있었다. MBC는 두 사람의 스페셜 스테이지를 마련해 트로트 르네상스를 공식적으로 확인해주었다.

많은 사람이 이날 프로에서 주현미가 남편을 ‘여보’(텔레비전에서 참으로 간만에 들어보는 말이었다)라 부르고, 현철은 성공에 복받쳐 마치 세수하듯 눈물을 쏟아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조용필의 ‘허공’ 이후 비상을 꿈꾸던 트로트가 바야흐로 부활의 깃발을 들어올리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그 뒤 트로트는 잊혀질 듯하면 나타나던 뽕짝원류에 대한 논쟁마저 잠재워버렸다. 심지어 트로트 진영은 명칭을 통일하는 작업까지 벌였다. 비가(悲歌)와 애가(哀歌) 등이 경합한 끝에 ‘전통가요’가 낙점되었다. 6공화국 들어서 비로소 트로트가 공식 작위를 하사받은 것이다. 그러한 영광의 한복판에 주현미가 있었다.

KBS 라디오2국 김경태 차장은 6공과 주현미의 관련성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주현미는 참 평범한 인상이지요. 못생긴 것은 아니지만 미인도 아닙니다. 화장을 안 한 얼굴을 보면 더 순박해 보이죠. 마치 진행자 허참이 된장 맛을 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어떤 때는 ‘밥집 아줌마’ 딱 그 모습이에요. 그게 노태우 대통령 시대의 코드이기도 했던 ‘보통사람’과 맞아 들어갔어요. 만약 주현미가 더 예쁘거나 세련됐더라면 반응이 덜했을 겁니다.”

남편 임동신과 늘 붙어 다니는 모습, 결코 수다스럽지 않은 스타일, 무대에 서기 직전에야 화장을 하는 털털함 모두가 평범한 사람의 이미지였다. 하지만 6공 정부가 막을 내리면서 주현미와 트로트 역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그것마저 노태우 대통령과 주현미의 이미지 앙상블이었을까. 문민정부의 출현을 앞둔 시점에서 주현미와 트로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대에게 음악시장의 주도권을 내준다.

▶김영삼과 서태지
 

서태지가 ‘난 알아요’로 랩 음악 바람을 일으키며 홀연히 등장했던 때는 1992년 봄. 김영삼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따돌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때가 그해 12월이었으니 시기적으로는 서태지가 8개월 정도 앞선 셈이다. 하지만 서태지의 X세대 돌풍이 몰고 온 변화의 풍향은 정치판에도 밀어닥쳤다. 대선 전부터 민주세력 출신인 신한국당 김영삼 후보와 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누가 대권을 잡든 군사독재를 마감하는 새 시대의 통치자로 떠오르게 되어 있었다.

이 경우는 ‘노래가 정치적 물결의 변화를 예고한다’는 서구 음악계의 속설이 현실로 나타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한 음악이 이미 사회분위기의 변화를 감지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와 새 통치자의 등장에 앞선다는 말이다. 여기서 잠깐 미국과 영국의 사례를 보자.

레이건과 부시 대통령의 12년 공화당 시대를 마감한 민주당 클린턴 대통령이 선거에서 승리하기 직전 미국에는 ‘너바나(Nirvana)’라는 그룹의 강풍이 음악계에 급습했다. 얼터너티브 록으로 일컬어진 이 밴드의 음악은 마이클 잭슨이 제도 음악계를 주름잡던 레이건과 부시 시대를 축축한 지하습지에서 보낸 X세대의 좌절, 허무 그리고 불만의 무한 표출을 핵심 컨텐츠로 삼았다.

일순간에 오버그라운드 스타로부터 무명의 언더그라운드 그룹으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킨 이런 ‘소외된 청춘’의 음악이 거함 마이클 잭슨을 쓰러뜨리고 주류를 장악했던 때는 1991년 가을이었고, 얼마 후 사회분위기가 바뀌었음을 입증하듯 클린턴은 부시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백악관에 입성한 클린턴은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 여성, 동성애자 등 소외된 사회적 소수를 배려하는 정책을 폈다. 단순화하자면 하층민 출신 록 밴드 ‘너바나’의 홀연한 등장이 ‘이번에는 절대 공화당 대통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점친 것이다.

머라이어 캐리가 1990년에 데뷔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머라이어 캐리는 먼저 등장한 휘트니 휴스턴, 나중에 나온 셀린 디온, 토니 브랙스턴 등과 함께 1990년대 중반을 초토화한 여가수 붐, 즉 ‘디바’ 현상을 견인한 주인공이었다. 클린턴 정부의 출범에 앞서 음악적으로 홀대받는 ‘여성들의 반란’이 있을 것임을 암시한 것이다. 정말 클린턴 시대에는 록밴드도 그렇지만, 여가수가 어느 대통령 때보다 많이 나왔다.
 
 

 음악이 통치자를 점친다

    영국도 다르지 않았다. 대처와 메이저의 보수당 시대를 종식하기 이전 영국의 음악은 젊은 밴드 중심의 이른바 ‘브릿팝(Brit-pop)’이 기승을 부려 뭔가 정치분위기가 달라질 것임을 시사했다. ‘브릿팝’의 약진은 미국 정복에도 성공한 화제의 그룹 ‘오아시스’가 진두지휘했다. ‘오아시스’는 철저히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에 밀려 위기에 처한 영국음악을 구출하면서 전통의 음악강국인 대영제국의 위신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

그들의 급부상은 곧바로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부가 출현할 수 있는 길을 닦았다. 기존 노동당의 정강에 보수 색채를 덧입혀 이른바 ‘제3의 길’을 표방해 정권 탈환에 성공한 토니 블레어 시대의 뉴 컬러와 부합했던 것이다. 그만큼 ‘오아시스’의 음악은 덜 심각하고 덜 지적인 노동자의 스타일을 실감나게 반영했다.

1997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노골적으로 ‘브릿팝의 대사’인 ‘오아시스’에 구애작전을 폈으며 새 정부 출범 뒤에도 공식적으로 당시 영국의 록을 듣는 젊은 인구, 그들 말대로 하면 팝 키즈(pop kids)의 지지에 힘입어 집권이 가능했다고 발표했다. 1998년 영국의 그래미상이라고 할 브릿 어워즈에 존 프레스콧 부총리가 참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보은 행사였다. 이에 앞서 토니 블레어 총리도 영국 음악산업의 성공을 치하하기 위해 런던 10 다우닝가에서 연 개인 파티에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를 초청했다.

영국의 노동당과 미국의 민주당이 경험한 바와 같이 우리의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과 김대중 양김 후보에게 서태지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당연히 두 후보진영이 서태지로 대변되는 신세대들을 유인하려는 방편으로 방송사의 취재경쟁을 방불하게 하는 ‘서태지 모시기’ 전략을 짰다.

이 상황은 1997년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한나라 이회창 후보의 격돌 때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물론 미국에 은둔한 서태지는 두 후보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다. 뜻대로 되질 않자 김대중 후보 진영은 대타로 ‘서태지가 좋아한다’는 마이클 잭슨을 골랐다(솔직히 이미지 면에서 맞는 궁합은 아니었다). 이런 일 때문인지 서태지는 YS와 DJ 시대를 관통하는 느낌을 준다.

김영삼 문민정부 초기의 정치현장은 마치 모든 것을 혁명적으로 바꾼 서태지의 음악세계와 궤를 맞춘 듯 꽤나 흡사했다. 고위공직자가 잇따라 정치판에서 쫓겨난 재산공개의 사정과 개혁 한파와 마찬가지로 서태지 현상은 음악계에 무서운 개혁의 회오리를 몰고 왔다. 트로트를 비롯한 성인음악 시장의 퇴각을 종용했고 대형 레코드사들을 겁주었다. 이전까지 펄펄 날던 발라드도 ‘팽’을 당했다. 이제 음악판은 10대의 독점적 소유였고 소형 음반사도 힘을 얻게 되었고 흑인 댄스음악이 천지를 주무르게 되었다.
 
 

 김대중 시대의 가수는 누구?

    서태지도 개혁이었고 김영삼 정부도 개혁이었다. 단지 공식 슬로건이 있고 없는 차이일 뿐이었다. 서태지의 개혁 행군은 ‘발해를 꿈꾸며’와 ‘교실 이데아’가 수록된 세 번째 앨범에서 절정에 달했다. ‘발해를 꿈꾸며’의 경우는 서태지 본인도 밝혔듯이 당시 추진중이던 남북정상회담이란 시의성을 노렸다. 또한 ‘교실이데아’는 공교육을 비판하는 곡이었으나 그것은 어쩐지 현 김영삼 정부가 아닌 이전 시대를 질타하며 당시의 ‘바꿔’ 무드를 고양시키는 ‘개혁 사운드트랙의 주제곡’으로 들렸다.

이 무렵 서태지는 ‘가수 아닌 사회적 인사’로 솟아오르면서 국내 가수, 아니 전체 연예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소리를 듣기에 이른다. 신문지상에는 ‘10대 대통령’ 또는 ‘문화대통령’이란 말이 줄기차게 등장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총독부 건물을 걷어내는 ‘역사 바로 세우기’ 과업을 수행하고 있을 때 서태지의 콘서트 현장에는 ‘서태지가 대중음악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피켓이 걸렸다.

청와대에 김영삼 대통령이 있었다면 거리와 교실은 서태지라는 비제도권 대통령이 통치하는 형국이었다. 당시 어떤 여론조사기관에 의한 ‘대한민국을 떠받드는 인물’ 리서치에서 김영삼이 1위였을 때 서태지도 위풍당당 7위에 올랐다(2위부터 6위까지는 정·재계 인물이었다).

IMF가 대중문화시장을 압박해 음악 소비심리를 위축시킨 탓일까. 김대중 시대를 상징하는 국가대표 음악가는 아직까지 없어 보인다. 문화대통령과 ‘국민의 정부’를 표방한 것을 감안할 때 ‘국민의 가수’가 없는 것은 약간 의아한 일이다.

대중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히스테리의 관점에서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올해 컴백과 함께 다시 한 번 떠들썩한 소동을 일으킨 김영삼 시대의 가수 서태지가 다시 타이틀 벨트를 찰 수도 있다. ‘김영삼-서태지’가 아니라 ‘김대중-서태지’가 더 그럴 듯한 듀엣(?)이라고 강변하는 사람도 있다.

혹자는 음반판매량으로 서태지를 누른 조성모가 ‘국민가수’에 가장 가까이 간 가수라고 주장하며, 일각에서는 그래도 H.O.T.가 적합하다고 고집을 부린다.

특기할 사항은 미국의 클린턴 시대에 여가수가 우후죽순 쏟아져 나온 것처럼 김대중 시대에 와서 S.E.S. 핑클 엄정화 박지윤 김현정 이정현 등 이전까지 소외된 ‘여가수들의 반격’이 거세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 중 현재 노태우 시대의 주현미처럼 영향력을 갖고 있는 가수는 없다. 최악의 경우 여자든 남자든 김대중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가 없을 가능성도 있다. 아직까지는 의견일치를 볼 수 없을지라도 후대의 역사가 합당한 인물을 골라낼지도 모른다. 아직은 더 기다려볼 필요도 있고….

대통령과 대표가수는 때로 긴장과 갈등의 관계로, 때로 호혜와 협력 관계로(또는 국내 유신과 5공 시대처럼 두 패턴이 결합된 형식으로) 한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지배한다. 1960년대의 경우 미국의 닉슨 정부와 록 팬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기타주자 지미 헨드릭스의 관계는 적대적 갈등이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과 포크의 영웅 밥 딜런의 관계나 영국의 해럴드 윌슨 총리와 비틀스의 관계는 상호선린의 커넥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각각 신좌익의 68세대, 민권과 반전운동, 비트의 공습이라는 새 역사의 물꼬를 튼 사회적 흐름의 심장부에 섰다.

대통령은 민심을, 인기가수는 대중을 무기로 한다면 결국 둘의 지지기반은 겹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서로 밀월 또는 갈등 관계가 생길 수 있다. 어떤 경우든 대통령과 대중가수가 벌이는 ‘애증의 곡예’는 한편으로 대중가수의 영향력이 그만큼 막강해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제 전세계에 걸쳐 국가를 대표하는 톱 가수는 ‘문화대통령’이나 다름없다.
 
 

(2) 길보드 차트를 통해 본 한국 대중가요- 길보드에 망한 ‘담다디’ 길보드로 웃은 ‘존재의 이유’
 
 

 이상은의 ‘담다디’는 리어카 음반상을 오늘날의 ‘길보드’로 뿌리내리게끔 만들어준 가수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상은은 ‘길보드’의 폭발적 인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시밭길을 걸었다. 이상은과 정반대로 김종환은 백번이라도 길보드에 절을 해야 할 처지다. ‘존재의 이유’가 길보드를 강타하면서 그는 무명 세월을 청산했다.
 

 대한민국의 음반시장 규모는 과연 세계 몇 위쯤 될까. 놀랍게도 세계 10위에 올라 있다. 국제음반연맹(IFPI)이 음반매출액을 기준으로 공식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물론 공식집계라기보다는 추산에 가깝지만) 1993년부터 90년대 내내 약 4000억~5000억 원 규모로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 이어 세계 11위를 유지해왔다.

과거 패티김의 ‘이별’과 남진의 ‘님과 함께’가 음반판매량 10만장을 넘어섰다며 놀라던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음반시장은 90년대 들어 기적에 가까운 급성장을 거듭했다.

한국 음반시장이 비약적 성장을 이룩한 것은 1991년부터였다. ‘내 사랑 내 곁에’의 김현식, ‘보이지 않는 사랑’의 신승훈, 이듬해 봄 ‘난 알아요’의 서태지와 같은 ‘큰 가수’가 출현하면서 예전엔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벌어졌다.

이후 김건모 룰라 조관우 H.O.T. 조성모 등이 나타났고 국내 음악팬들은 인기가수의 앨범 100만장 판매고를 그다지 신기한 뉴스로 여기지도 않게 되었다. IMF라는 직격탄을 맞아 문화수요가 줄어들면서 현재는 우리 음반시장이 세계 17위 혹은 21위로 추락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하지만 아직까지 어떤 나라든 한국 음반시장을 무시하지 못하고 있다.

외국 음악 평론가들은 한국 시장을 표면적 규모보다 더 크게 본다. 세계 11위가 아니라 너끈히 7~8위는 된다는 분석이다. IFPI 보고대로 한국 음반시장의 단순한 외형은 5000억 원일지 몰라도 실제는 6000억 원에 이른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왜 1000억 원이 불어난 것일까?

이 부분이 바로 불법 복제시장 또는 리어카 판매시장으로 얘기되는 ‘길보드’ 매출이다. 공식 매출에다 무시할 수 없는 비공식 시장이 존재하므로 한국 시장은 예상보다 더 무게가 나간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한국 음반시장이 서너 계단 위로 평가되는 것은 길보드 덕분(?)이다.

길보드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리어카에서 판매되는 불법 복제음반시장이며 다른 하나는 ‘길거리의 인기순위’다. 한국에서 길보드란 조어(造語)가 생겨난 것은 후자의 의미 때문이다.

길보드는 미국의 유명한 인기가요순위 차트인 ‘빌보드’에서 따왔고 보드 앞에 붙은 ‘길’은 순우리말이다. 결론적으로 ‘길거리의 빌보드’인 셈이다.

그런데 미국의 빌보드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은 음반 판매량과 방송횟수를 정확하게 포착하여 음악의 인기흐름에 관한 한 ‘공신력’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1990년 중반에는 마이클 잭슨과 머라이어 캐리처럼 일주일 만에 신곡이 차트 정상에 오르는, 과거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제작사의 강제적 마케팅에 오염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음악팬들은 여전히 빌보드 인기순위가 공정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결국 길보드는 비록 길거리가 매기는 판매량과 인기서열이지만 상당히 믿을 만하다는 인식이 내재돼 있다. 따라서 그것은 결코 불법 시장이라는 나쁜 의미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길보드엔 길거리의 위력을 높이 쳐주는, 미화(美化)적 이미지마저 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매기는 가요 인기차트와는 다른 시정(市井)의 별도 차트라는 것 말고도, 거리라는 이미지가 주는, 제도권의 과장과 형식주의와는 선을 긋는 실제적 ‘진실’이 있다고나 할까. 다시 말해 길보드가 방송보다 더 공신력이 있는 인기흐름을 반영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 때문에 길보드는 불법이라는 낙인 속에서 폐지 여론이 들끓고 있음에도 모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정부나 가요계 해당기관이 대대적 단속을 펼쳐 곧 없어질 것 같은 데도 늘 살아 있다. 항상 위태로우면서도 동시에 맥박의 간격은 일정하다. 참 신기하다. 마치 잡초처럼 목숨이 그렇게 질길 수가 없다.

1970~80년대 이른바 ‘빽판’의 바통을 이어받아 80년대 중반 생겨난 이 리어카 시장의 생명력을 그토록 길게 부지시켜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불법 시장에서 음반을 사는 사람이 꾸준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요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길보드는 노점이나 리어카를 넘어 하나의 음악매체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신문에서도 대놓고 길보드를 언급한다. 인기가수 유승준의 경우를 보자. 지난 1998년 유승준이 ‘나나나’로 히트를 치고 있을 때 한 신문은 ‘유승준, 길보드 강타!’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이쯤 되면 거의 실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셈이다.
 
 

 뿌리칠 수 없는 무한매력

    왜 음반 소비자들은 일반 레코드 가게를 놔두고 길보드에 기웃거리는가? 첫째, 음반이 너무 저렴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테이프가 주력이었으나 지금은 CD도 막강하다. 테이프의 길보드 판매가는 1500원에서 2000원이며 CD는 3000원이다. 레코드에서 음반을 사는 것에 비해 3배 정도 싼 셈이다. 합법적 음반매장에서 테이프는 5000원에서 6000원, CD는 1만원이 기본 가격이다.

문화비용 지출에 인색한 국내 수요자들 처지에서 보면 너무도 고마운, 일종의 사은품이다. 자기가 아무리 미치도록 좋아하는 인기가수라도 누가 CD를 3000원에 사고 싶지 1만원짜리를 내고 싶겠는가? 그래서 길보드는 보편화된 우리의 에누리 정서, 싼것을 밝히는 인지상정과도 잘 부합한다. 테이프의 경우는 물론 음질이 좀 나쁘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 우리가 언제부터 질(質)을 운운했나.

길보드의 매력을 알기 위해 1997년에 나온 한 길보드 제품의 수록곡을 보자.

‘그녀를 위해’(이정봉), 비련’(구피), ‘소원’(일기예보), ‘사랑을 위하여’(김종환), ‘무아지경’(DJ. DOC) ‘A Lover’s Concerto’(사라 본) ‘사랑해 누나’(유승준)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H.O.T.) ‘결혼해 줘’(임창정) ‘송인’(쿨) ‘수필 러브’(주주클럽), ‘배신감’(젝키),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김경호)….

언뜻 봐도 당시 쟁쟁했던 최고 가수의 인기가요가 모두 들어 있다. 음반 제목도 ‘최신 다운타운 톱 가요’로 붙어 있다. 길보드가 왜 거리의 인기차트인지를 실감나게 한다. 아마 당시 공중파 TV 인기가요 순위라고 해도 틀림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히트곡 레퍼토리가 한 장에 몽땅 실려 있다는 것이다. 아마 소비자로서 이 모든 곡을 정품으로 구하려면 각 아티스트의 독집을 모두 다 사야 할 것이다.

아티스트 독집 30장의 현 히트곡을 골라내 하나에 담았으니 음반 소비자는 앨범 30장 살 가격을 한 장 값으로 그것도 아주 싸게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다. 정품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히트곡 컬렉션이다. 아니 정품은 이렇게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비록 음질은 열악하지만 그 속에 담긴 다양한 레퍼토리는 입이 벌어지게 한다. 길보드는 바로 이런 불가능에 가까운 ‘히트곡 총집합’ 전략으로 우리 음반산업의 어두운 뒤안길을 불 밝히며 든든하게 터를 잡았다.

또 다음과 같은 이점도 있다. 음반 구매시장이 합법과 불법이라는 두 채널로 존재하면서 소비자는 두 가지 음반구매 패턴을 병행할 수 있게 되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은 ‘정품 CD’로 사고 ‘한번 그냥 들어볼까’ 하는 가수의 음반은 ‘리어카의 테이프’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팬으로서는 기분 좋은 ‘구매패턴의 이각(二角)화’다.

종로 2가에 자리를 튼 한 음반 리어카 상은 말한다.

“지난 1993년 서태지가 ‘하여가’ 2집을 냈을 때 서태지와 경쟁하던 다른 인기가수의 테이프가 먼저 나왔어요. 그 테이프 참 무지하게 많이 팔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서태지 테이프가 나왔지요. 당연히 많이 나갈 줄 알고 서태지 테이프를 많이 깔아놨어요. 그런데 서태지 것이 생각 밖으로 안 나가는 겁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애들이 서태지 앨범은 우리 테이프가 아니라 정품 CD나 LP로 사려는 심리가 있었던가 봅니다. 기다렸다가 레코드 가게에서 정품을 사서 소장하겠다는 거죠. 그래서 다른 가수 것은 많이 나갔는데 서태지 것은 나가지 않았던 겁니다.”
 
 

 길보드를 뛰어넘은 서태지

    당시 위용이 하늘을 찌르던 서태지 팬들이 ‘우리 오빠’의 앨범은 정품으로 소장하고 다른 가수의 앨범은 한번 들어보기 위해 길보드 제품을 샀던 셈이다. 지금은 MP3로 곡을 공짜로 듣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지만(그래서 길보드도 근래 불황이다!) 아직도 리어카 테이프를 살 때 ‘한번 사서 들어보고 좋으면 정품 CD를 산다’는 전제로 구매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때로 가수를 웃기고 울리기도 하는 것이 길보드다. 그것에 덕 보는 가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가수나 제작자를 아주 고단하게 만든다. 이상은을 보자. 1988년 ‘담다디’라는 곡으로 혜성처럼 떠올랐지만, 나중에 국내 가요계를 떠나 일본에서 활동하는 등 전전하다가 지금은 대중가수보다는 ‘마니아 가수’가 된 ‘꺽다리’다.

당시 강변가요제를 주관한 MBC 라디오국의 프로듀서들은 “‘담다디’는 방송되는 그 순간 떴다”고 표현한다. 당시 10대 팬들의 반응은 정말 광풍에 가까웠다. 이상은은 여가수 최초로 억대 가수로 가치가 상승했다. 실제로 계약하진 않았지만, 그때 지구레코드사는 개런티 1억8000만원을 제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상은의 ‘담다디’는 리어카 음반상을 오늘날의 길보드로 뿌리내리게끔 만들어준 가수로 평가된다. 강변가요제 실황은 테이프로 불법 복제돼 그 다음날부터 리어카에서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당시 판매열풍을 기억하는 한 음반 리어카 판매상은 “모르긴 몰라도 100만장은 나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품 LP(그때는 LP시절이었다)는 2주일이 지나서야 출시됐다. 이미 길보드에서 수요가 완전 소화됐기 때문인지 정품의 판매량은 시원치 않았다. 길보드가 다 팔아버렸으니 제 아무리 화려한 디자인으로 LP를 내봤자 살 사람은 많지 않았던 것이다.

MBC는 앨범이 늦게 나온 걸 원망할 수밖에 없었고 이상은도 기형적인 음반시장에 혀를 차야 했다. 이상은은 뒷날 독집 앨범을 발표하고 당당한 인기가수로 활동하면서 ‘사랑할꺼야’ ‘해피 버스데이’ 등의 히트곡을 냈지만, 어쩌면 이때부터 ‘괴상한’ 국내 음악계에 정이 떨어졌는지도 모른다.

아티스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주지 않는 상황, 아티스트를 조종하려만 드는 가요계가 도무지 수긍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인기 절정의 시점인 1991년 이상은은 최고 스타의 자리를 박차고 혈혈단신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고 그 후 일본에서 4장의 음반을 발표하는 등 아예 활동터전을 옮겨버렸다.
 
 

 ‘담다디’ 이상은의 고통

    그는 한 신문에서 “난 음악을 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가요계와 팬들은) 음악은 뒤로 제쳐놓고 ‘사내 같다’ ‘키가 크다’고 해서 좋아하는 현상에 토할 것만 같았다. 집에 돌아오면 베갯잇이 노래지도록 울기만 했다”며 당시의 괴로운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상은의 그런 역경과 고통을 가져온 배경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길보드에 이르지 않을까? 길보드를 기원으로 해서 우리 음악계와의 관계가 꼬이기 시작한 것 아닐까?

조금 과장하면 길보드는 이상은이란 거름을 통해 덩치를 키웠고 그러면서 그의 기를 빼앗아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다. 길보드는 그렇게 이상은의 현재 모습을 간접적으로 결정했다.

이상은과 정반대로 김종환은 백번이라도 길보드에 절을 해야 할 처지다. 많은 음악관계자들은 1990년대 후반 최고의 ‘길보드 히트곡’으로 김종환의 ‘존재의 이유’를 꼽는다. 이 노래는 고교 졸업 후 통기타 가수로 다방과 클럽을 전전하고 새벽 의류시장에서 디스크자키까지 해야 했던 무명의 그를 일약 ‘업타운 스타’로 만들었다.

이 앨범은 16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면서 우리 음악계에 모처럼 ‘아줌마 부대’를 출현시켰다. 그는 다음 앨범 ‘사랑을 위하여’로 다시 11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심지어 ‘그가 나오면서 위축됐던 성인음악에 햇빛이 들었다’는 평까지 나왔다.

그의 인기는 다름아닌 1993년 길보드에서 불이 붙었다.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리어카 음반판매대에서 세차게 울려 퍼진 ‘존재의 이유’는 감상적인 멜로디와 중간의 대사에 힘입어 곧바로 팬들의 귀를 잠식했다. 이 곡이 길보드가 배출한 대박이라는 것을 당시 한 스포츠신문 기사가 밝히고 있다.

“젊은이들이 모이는 거리를 10분만 걷노라면 요즘 뜨고 있는 노래가 무엇인지 대번 알 수 있다. 유행에 민감한 길거리 리어카 판매상들이 최근 들어 가장 즐겨 트는 인기가요는 제목도 생소한 ‘존재의 이유’라는 곡이다. 특히 20대 여성들이 줄지어 찾는 이 노래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기다려 달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호소력 짙다.”

방송국 라디오 프로그램도 이 곡을 틀어 거리의 공습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최수종이 주연한 당시 KBS TV의 인기드라마 ‘첫사랑’도 이 곡을 극중에 삽입했다. 신세대 노래에 기죽어 있던 기성세대는 ‘우리 것이 생겼다’는 듯 연일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불러댔다.

길보드는 이상은의 운명과는 다르게 김종환의 기를 살려주는 수준에서 기능을 멈춘 것으로 보인다. 수요를 바닥내기는커녕 오히려 길보드의 중요한 기능인 ‘바람잡이’ 노릇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정품 테이프의 수요로 연결된 것이다.

리어카가 어느 정도 팔면서 붐을 조성해주고 일반 레코드점도 그 덕에 음반을 더 팔고…. 적대적인 두 상업집단의 동반상승 효과다. 이 경우는 착한 길보드?
 
 

 히트의 보고, 길보드

    김종환이 길보드 망을 뚫고 정품으로 선전한 것에 대해 이런 분석이 가능하다. 김종환 이전에 길보드가 낳은 전설적인 성인음악 스타로는 1980년대의 김연자와 주현미가 있다. 연달아 스타가 나오자 이후 비슷한 가수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렇게 되자 택시기사를 비롯한 주요 구매층은 길보드가 제공해주는 비슷비슷한 메들리 음악에 질려버렸다. 이 시점부터 성인들이 슬슬 리어카 판매상에 등을 돌렸다.

1990년대 들어 신세대 발라드와 랩 댄스가 등장하면서 길보드는 젊은이들 판이 돼버려 성인 구매자들의 퇴각을 한층 종용했다. 이후 어른들은 음반을 사고 싶어질 때 ‘체면’ 때문이라도 합법적 음반매장으로 가야 했다. 그래서 나중에 김종환과 같은 성인음악이 나왔을 때 길보드에서 바람이 불긴 했지만, 기성세대 구매자들은 정품시장에서 테이프와 CD를 샀다는 것이다.

길보드가 히트의 보고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한다. 리어카 판매상들은 근래의 대표적 히트곡으로 김종환의 ‘존재의 이유’를 전후해 김종서의 ‘대답 없는 너’, 김정민의 ‘슬픈 언약식’, 박지윤의 ‘하늘색 꿈’, 김현정의 ‘그녀와의 이별’, 벅(Buck)의 ‘맨발의 청춘’, 클리프 리처드의 ‘Early in the morning’, 디바의 ‘왜 불러’, 컨츄리 꼬꼬의 ‘오 가니’ 그리고 유승준의 ‘나나나’ 등을 꼽는다.

1999년 이후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신바람 이박사’가 일으킨 트로트 신드롬이다. 이박사 역시 길보드가 초기에 바람을 잡으면서 일약 방송광고에도 나올 만큼 인기 스타로 떠올랐다.

솔직히 리어카 음반시장이 자리잡게 된 1980년대 초부터 상기한 곡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 가요의 절대다수가 어느 정도는 길보드 히트곡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어떤 히트곡이든 길보드는 그 곡이 인기조짐을 보이는 시점에 연일 틀어대며 바람을 잡았다.

길보드의 빼놓을 수 없는 대박(?) 히트작이 있다. 이번엔 노래가 아니라 그 노래를 만들어낸 덩치 큰 레코드사다. 1993년 국내에 직접 배급을 개시한 대형 음반유통회사 BMG가 바로 그 히트작이다. 그 무렵 BMG는 탐색에 나서던 참이었다.

이것저것 상황을 재고 있던 때 한국에서는 1990년 최고 영화이자 최고 음악의 히트 블록버스터가 터졌다. 케빈 코스트너와 가수 휘트니 휴스턴이 주연한 영화 ‘보디가드’와 그 영화의 주제곡으로 삽입된 곡 ‘I will always love you’였다. 멜로디는 물론이요, 휘트니 휴스턴의 절창에 감동한 팬들의 반응은 거셌다.

영화 속의 노래가 인상적이면 대중은 음반을 통해 다시 듣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다. 천하의 길보드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당시 리어카는 완전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로 도배됐다.

리어카 판매상들은 지금도 “그때만큼 테이프를 빠르게, 또 많이 팔아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족히 100만장은 나갔을 것으로 추산한다.

BMG는 충격을 받았다. 한국이 ‘길보드의 나라’인지 몰랐던 것이다. 이 곡이 마구 불법으로 팔려나가는 데 광분했고, 그러면서도 한국 음반시장이 그렇게 크다는 사실에 놀랐다. 사실 BMG측은 시장 규모와 관련해 한국 진출을 그리 낙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길보드에서만 100만장이 팔려나가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와, 이거 안되겠구나!’ 불법에 대한 문제제기는 나중 문제고, 바로 눈앞에서 돈을 날리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거리의 제작자들에게 수입을 뺏기는 게 아까워서라도 하루라도 빨리 직배를 개시해야 했다.

BMG는 직배하자마자 서둘러 영화 ‘보디가드’의 사운드트랙을 출시했다.

자, 이 상황에서 합법으로 출시된 이 앨범은 과연 잘 팔렸을까? 길보드가 다 빼먹어 이것은 잘 나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또한 음반시장 현대사의 미스터리 하나가 추가된다. 공식적으로 나온 음반도 자그마치 120만장이나 팔렸다.

직배관계자들은 길보드와 일반 음반매장에서 공히 100만장을 판 앨범은 팝과 가요를 통틀어 이 앨범 하나밖에 없다고 단정한다(물론 길보드야 공식 집계가 될 수 없어 순전 느낌에 의한 것이지만). 판매량도 그렇거니와 BMG라는 막강한 세계 음반사의 직배를 재촉한 이 ‘사건’만큼 길보드의 가공할 위력을 입증해주는 사례도 없을 것이다.

길보드에 대한 방송 제작자 아티스트 레코드사 등 모든 음반관련 집단의 시선은 한결같다. 지금 당장 초토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명백한 불법을 놓고 가타부타 이야기하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는다. 길보드는 엄연한 범죄다. 그러나 들끓는 ‘길보드 섬멸론’은 이 리어카 시장의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작자들도 나쁜 줄 알지만 길보드가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전체 음반매출에서 길보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떤 사람은 40%(연간 2500억원 가량)에 달한다고 주장하지만 대략 20% 이상으로 보인다.

“길보드는 제작자의 뼈를 갉아먹는 암적인 존재입니다. 두말할 필요 있습니까. 없애버려야죠. 그런데 길보드의 도움을 받은 곡도 많은 게 사실이에요. 리어카가 뽑은 곡 중 나중에 히트한 게 어디 하나둘입니까. 아예 거기서 나와서 거기서 팔린 노래도 있잖아요. 그 사람들 정확해요. 아주 빠르고 그들이 지금까지 괜히 살아 있는 건 아니지요. 그래서 가벼이 볼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대충 단속해 가지고는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베테랑 제작자인 조성국씨(장스튜디오 이사)의 말이다. 그는 길보드가 히트에 관한 한 나름대로 ‘전문가 집단’이라고 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길보드를 통해 어떤 곡이 뜨고 있는지, 뜰 것인지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길보드가 이처럼 ‘히트의 바로미터’가 되면서 방송 홍보가 여의치 않은 신인 제작자나 가수들은 그것에 의해 인세가 탈취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때로 부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내 노래도 저기에서 흘러나왔으면…’

만약 길보드에 노래가 나온다면 그것은 곧 ‘팔리는 음악’, 아니면 ‘팔릴 것으로 보이는 음악’으로 ‘인정 절차’를 획득한 것이다. 수천만 원의 제작비를 쏟아붓고서라도 히트곡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제작자, 더 많은 대중에게 다가가고 싶은 신인가수들한테 ‘드러낼 수는 없지만’ 내심 기분 좋은 일이다.

바람잡이 기능, 바로 이것 때문에 가요계에선 더러 방송사 섭외가 용이하지 않은 일부 제작자들이 리어카 판매상에게 접근, 노래를 틀어 줄 것을 요구한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고 있다.

확인된 사실은 아니되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이쯤 되면 길보드는 길거리 차트를 넘어 ‘길거리 방송사’가 되는 셈이다.

지금 우리 음반시장을 보면 유난히 모음집 음반이 많이 눈에 보인다. 영어로 ‘컴필레이션’ 앨범으로 불리는 이 음반은 팝송에 많지만 근래에는 가요 모음집도 잇따라 출시되고 있다. 모음집 앨범의 강점은 좋은 곡을 대량 수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음집 음반의 유행

    가요나 팝송 할 것 없이 다다익선의 효과는 절대적인 것이어서 컴필레이션 앨범들은 스타 앨범을 빼고는 웬만한 독집 판매량보다 많다. 한두 직배사가 연합해 만들어낸 ‘나우(Now)’나 ‘맥스(Max)’의 경우는 시리즈로 계속 발매되고 있으며 잘 나가는 것은 50만~60만장을 거뜬히 팔아치운다.

하지만 컴필레이션 팝 앨범이 이처럼 호응을 얻은 것도 얼마 되지 않은 일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는 팝 모음집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여러 곡을 모은 음반은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사는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음악 팬들이 선호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수의 독집이었다. 그래서 레코드사들도 굳이 컴필레이션 앨범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 컴필레이션은 길보드의 전유물이었다. 사실 길보드는 1980년대에는 팝송 모음집을 주요 메뉴로 내놓았다. 하지만 길보드의 컴필레이션 효과가 나타나면서 마침내 그것에 시큰둥하던 레코드사의 방침까지 바뀌고 있다.

지금 보면 결과적으로 레코드사가 길보드를 따라온 셈이다. 많은 음악관계자들은 현재 컴필레이션 앨범 제작 붐은 길보드가 씨를 뿌린 것임을 드러내놓고 인정한다. 길보드는 참 만들어낸 것도 많다!

그런데 컴필레이션 앨범에 대한 비판이 이만저만 아니다. 곡 위주로 편집되어 있기 때문에 아티스트의 참맛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귀를 만족시켜주는 수준이므로 진정한 음악청취 자세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길보드도 똑같은 지적을 받는다. 하긴 조상이 나쁜 피인데 어찌 후손이 욕먹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길보드 히트곡은 하나도 없다?

    길보드가 히트의 보고라는 사실에 코웃음치는 사람들도 있다. 길보드 섬멸을 주장하는 이들은 “지금까지 길보드가 낸 히트곡은 단 한 곡도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MBC 라디오국 이우용 부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종환의 ‘존재의 이유’를 길보드가 만들어낸 히트곡이라고들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길보드가 먼저 띄운 곡이 결코 아니에요. ‘존재의 이유’는 김종환이 일하던 의류상가에서 먼저 바람이 일었어요. 길보드는 그 바람을 반영했을 뿐입니다. 길보드가 골라낸 보석처럼 얘기하는데 전적으로 잘못된 겁니다. 신바람 이박사도 그렇고 김종서 신승훈 유승준 다 마찬가집니다. 다 이전에 어떤 인기 조짐이 있었고 길보드는 그것을 빨리 캐치했을 뿐이지요.”

이부장은 “길보드는 현상(現狀)만을 반영하는 판매차트 또는 판매예상차트에 불과하다는 점에 주목해달라”고 강조한다. 그들이 판매전문가들이지 음악전문가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판매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지 자발적으로 새로운 음악흐름을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길보드가 히트곡을 만들어낸다는 견해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길보드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기초에 대한 역행’, 즉 반(反)질서의 표본인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음악의 잠재력을 파손시킨다는 점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토록 무수한 사람들이 떠들어댔는데도 결론은 ‘깊은 뿌리만 확인하는 역부족’으로 나타나야 하는가에 있다.

길보드도 문제지만 길보드를 버젓이 살아 있게 만드는 우리가 더 문제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우리 문화의 현주소라는 생각이 든다.

‘비판과 무관심’ ‘단속과 방치’라는 적대적 요소들이 번갈아 교대하며 결과적으로는 묘하게 공생하는 가운데 빌보드는 처형을 면하고 활보한다. 그 왜곡과 모순의 사회현실에서 오늘도 음악의 어두운 공룡 길보드는 호흡한다.
 
 

 (3)‘국가대표 가수’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본격적인 TV시대가 열리기 전 극장 쇼는 대중가수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수많은 스타가 숱한 에피소드를 만들어 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남진과 나훈아는 각각 윤복희, 김지미를 만나 결혼했다. 또한 한국 가요사에서 가장 완벽한 음을 구사했던 ‘천재가수’ 배호는 마지막 순간까지 열창을 뿜어냈다.
 

   지금이야 대중음악의 중심지가 방송이지만 TV의 힘이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1960~70년대 가수들의 주요 활동무대는 극장 쇼였다. 압도적인 인기를 누렸던 ‘10대 가수 쇼’를 비롯, 스타의 이름을 내건 ‘리사이틀’이 전국 극장이나 야간업소에서 열려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 시절 가수와 관객은 무대에서 직접 만났다. 어떤 측면에서 지금보다 인간적 냄새가 물씬 풍겼고 그만큼 많은 일화를 쏟아냈다. 1960~70년대 극장 무대를 주름잡던 쇼단으로는 김영호 단장이 이끈 ‘AAA’와 최봉호 단장이 주도했던 ‘777’이 꼽힌다. 한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스타들은 거의 이곳에서 배출됐고 그 유명세를 등에 업고 TV로 진출했다.

그러나 텔레비전에 아무리 얼굴을 많이 내밀어도 결국 수입원은 극장 쇼였다. 그래서 트로트 가수든 포크 가수든 극장 쇼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원로가수나 음악관계자들이 이때를 ‘가요의 황금기’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다. 당시 쇼 무대 사회자들이 털어놓는 스타들의 비화(秘話)를 통해 그 시절 가요계로 돌아가 본다.
 
 

 ‘열대지방 펭귄’ 최희준

    극장 쇼의 전성기를 이끈 가수로 먼저 묵직하면서도 안정된 저음으로 ‘하숙생’ ‘나는 곰이다’ ‘진고개 신사’ 등을 히트시킨 최희준이 있다. 그는 간혹 외국 쇼 단체가 내한공연을 가질 때마다 한국을 대표해 마이크를 잡았던 ‘국가대표’ 가수였다. 학벌과는 인연이 멀었던 당시 가요계에서 서울대 법대라는 간판은 그에게 누구도 갖지 못한 위세를 제공해주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가요계 신사’였고, 이러한 후광은 1990년대 들어 국회의원으로 그를 견인하는 밑거름이 된다.

하지만 무대 뒤에서 최희준이 보여준 면모는 영락없는 ‘코미디언’이었다. 작은 키, ‘능글맞은’ 유머, 위트감각 때문이었다. 기성세대들은 지금도 그가 TV에 나와 능숙한 말솜씨를 뽐내던 순간을 기억하겠지만, 무대 뒤에서도 그의 언변은 가요계가 알아주는 수준이었다.

1970년 그가 가수분과위원장이었을 당시 쇼 무대 유명 사회자였던 고(故) 최성일씨와 입씨름이 벌어졌다. 최성일씨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 “참, 너도 딱하다. 법대를 나왔다는 놈이 코에 땀내면서 노래나 부르고 있냐? 지금쯤 재판소를 차렸어야지, 가수는 무슨 얼어죽을 가수냐? 참, 한심하다 야!”

그러자 최희준은 여유 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반격했다. “성일아! 너는 그래 공대(工大)를 나와 가지고 공장을 짓거나 하다못해 ‘자전거포’나 차려야지. 사회자? 그거 순 이빨만 가지고 벌어먹는 거 아냐? 그래도 난 마이크나 들고 다니지만, 도대체 넌 가진 게 뭐 있냐?”

그러나 최성일씨는 사실 공대를 졸업하기는커녕 대학 문도 두드려보지 못한 인물이었다. 최희준은 말하자면 최성일의 자존심을 한치도 건드리지 않은 채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수준급의 카운터 펀치를 날린 셈이었다. 그는 이처럼 약을 올리면서도 상대방의 기를 살려주는 유머에 능했다.

최희준에게는 별명도 많았다. ‘신사’ 외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찐빵’은 1969년 코미디언 구봉서씨가 ‘은방울 금방울’이란 코미디 쇼에서 아들역으로 나온 최희준을 보더니 대뜸 부른 뒤 히트를 쳐서 오랫동안 유행했다. 최희준은 때로 ‘웨이터’나 ‘열대지방의 펭귄’으로 불리기도 했다. 후자는 사시사철 검정 양복, 흰 와이셔츠, 검은 넥타이 차림에다 조금만 열창해도 코에서 땀이 수돗물처럼 나오는 모습에서 비롯됐다.

실수가 없고 딱 부러지는 생활태도를 가진 최희준이 아무리 ‘짜다짜다’ 했어도 커피 인심은 넉넉했다. 누구를 만나도 “커피 한잔 드세요”가 그의 인사였다.
 
 

 ‘잔소리의 여왕’ 이미자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는 인정이 많았다. 경찰의 검문검색이 많았던 그 시절 행여 쇼단원 가운데 누군가가 경찰서에 끌려가면 부리나케 달려가 사정을 호소해 풀어주게 한 일도 있었다. 쇼 무대의 사회자였던 이대성이 나중에 텔레비전의 톱 코미디언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미자의 도움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969년 장안의 화제였던 TBC 코미디 ‘웃음의 파노라마’의 연출자였던 고 김경태씨에게 틀림없이 잘 해낼 것이라며 이대성의 출연을 알선해준 사람이 바로 이미자였다.

그는 연예인위문단 시절인 1962년, 그러니까 최숙자가 한창 인기 정상을 구가할 때 홀연히 가요계에 등장했다. 데뷔 무렵 그에 대한 팬들의 열화 같은 호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공연에서 톱스타 최숙자가 앙코르로 한 곡을 부를 때 유망주에 불과하던 이미자는 2곡을 불렀을 정도다.

하지만 이미자는 ‘국가대표 여가수’로 부상한 이후에도 거의 지방공연을 다니지 않고 중앙무대에서만 활동했다. 어쩌면 이것은 인정이 많은 대신, 대수롭지 않은 일에 시도 때도 없이 투덜거리는 까다로운 성품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미자만큼 잔소리 많은 사람도 없었다고 당시 쇼 무대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 시절 이미자의 별명은 그래서 ‘쨍쨍이’였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대놓고 말하기 무서워했지만, 최희준만은 가끔 ‘쨍쨍이’라고 부르며 이미자를 약올렸다. 그가 한참 공연을 다니던 1968년 연예인에게 필요한 물품을 팔던 30대 아주머니가 있었다. 외상값을 받으려고 졸졸 따라다녀서 그 아주머니의 별명도 ‘쨍쨍이’였다. 최희준은 그 아주머니가 나타나면 이미자 들으라고 “쨍쨍이 아줌마 왔어요?” 하며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그때마다 이미자의 표정이 일그러지곤 했다.

1970년 서울 동대문극장 공연에서 사회를 맡았던 ‘원맨쇼의 개척자’ 남보원은 본의 아닌 실수로 이미자의 원성을 산 적이 있다. “이미자!”라고 소개해야 되는데 그만 “조미자!”라고 해버린 것이다(당시 실제로 조미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여가수가 있었다). 여기에 심사가 뒤틀린 이미자는 노래를 마치고 무대 뒤로 돌아와 “아니, 저 놈 실성한 것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성을 바꿔?” 하며 듣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핀잔을 퍼부었다.

그의 직설적인 성격은 어쩌면 노래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었는지도 모른다. 히트곡이 많다 보니 이미자는 공연중에 객석으로부터 보통 20곡이 넘는 리퀘스트를 받았다. 그러면 보통 사회자나 악단은 손님들이 많이 요청한 곡을 준비하기 마련인데, 그때마다 이미자는 다른 곡을 부르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결과는 악단이 판단한 곡보다 이미자가 선택한 곡이 항상 많은 박수를 받았다. 어느 곡이 그 순간에 가장 알맞은가를 예측할 줄 아는 ‘무대의 천재’가 바로 이미자였다.

그의 천부적인 센스에 대해 당시 이름을 날리던 작곡가 고봉산씨의 평. “이미자는 그날로 곡을 받아서 단숨에 가사를 외우고 취입에 임할 수 있는 가수다. 국내에 그런 능력을 갖춘 가수는 이미자 한 사람밖에 없다!”
 
 

 마지막 잎새처럼 떠나간 배호

    이미자라면 모르지만 누가 배호 앞에서 가창력을 논하랴. 사망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노래방에서는 줄기차게 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돌아가는 삼각지’ ‘누가 울어’가 불린다. 특히 그의 노래는 더러 저음 부분이 모창됐지만, 저음에서 급격히 고음으로 치솟는 ‘멀티 옥타브’라서 실은 완창이 어려운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당시 최고가수였던 최희준도 배호의 환상적 음역과 음색을 내심 크게 두려워했으며, 만약 그가 더 살았더라면 남진과 나훈아도 그의 사후 곧바로 이어진 독점적 라이벌전을 전개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가수 가운데 가장 먼저 금테안경을 끼고 언제나 단정한 싱글차림이었던 배호는 얼핏 말붙이기가 어려운 인상이었지만, 실제로는 의외로 소탈하고, 장난기도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1969년 서울시민회관(현재 서울시의회회관)의 ‘10대 가수 쇼’에서 문주란이 굵직한 목소리로 배호를 흉내내자 배호는 이에 뒤질세라 문주란의 툭 튀어나온 윗입술을 흉내내며 성대모사를 해 관객들을 웃겼다. 그것도 손가락으로 자기 윗입술을 앞으로 잡아당겨 문주란의 노래를 부른 것이다.

당시 ‘안경 낀 사람은 깐깐하다’는 속설과 달리 그는 이것저것 가리는 법이 없었으며, 식사도 닥치는 대로 잘 먹는 그야말로 ‘천골’이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호주머니에서 ‘소화제’를 꺼내 마치 디저트인 양 먹곤 했다. ‘하루 세 차례 소화제 복용’은 예외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건강한 몸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배호는 1970년 12월 광주 태평시네마 공연에서 급기야 무대에 서기도 전에 쓰러졌다. 무대에는 10대 가수가 다 등장했으나 배호는 분장실에서 신음소리로 “노래할 수가 없다”며 누워버렸다. 사회자 이대성과 최성일은 객석에 양해를 구했으나 관객들은 막무가내로 “우린 배호를 보러왔다! 안 나오면 돈 물어내라!”며 아우성쳤다.

객석의 상황을 전해들은 배호는 “그럼 무대에 나가야지요” 하며 최성일씨에게 “좀 부축해주세요”라고 부탁했다. 배호는 최성일의 등에 업힌 채, 이대성이 들고 있는 마이크에 대고 눈물을 흘리며 노래했다. 관객들의 코끝이 찡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 무렵 배호의 인기가 어땠는지는 이른바 ‘땅콩세례’가 잘 말해준다. 어디서나 그랬지만 극장손님 중에는 술집 아가씨가 많았으며 그들은 공연 구경을 와서 스타가 등장하면 상습적으로 땅콩을 무대로 던졌다. 어떤 가수는 그 땅콩에 눈을 정통으로 맞아서 곤욕을 치르기도 했는데 배호가 등장하면 마치 소나기가 퍼붓듯 땅콩이 무대 위로 뿌려졌다. 공연 뒤 빗자루로 쓸어보면 땅콩이 대두 한 말이나 됐다는 것이다. 요즘은 관객들이 꽃을 던지지만, 당시 쇼 스타를 위한 팡파르는 땅콩이었다.

병든 배호는 오랫동안 땅콩 쇼의 환호를 누리지 못했다. 1971년 경기도 문산의 사흘 공연 중 마지막날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배호는 끝내 무대에 서지 못했고, 서울로 급송되어 세브란스병원에 3개월간 입원했다. 하지만 퇴원하자마자 무리하게 용산 성남극장 무대에 나서는 바람에 건강은 더 악화되었고, 사경을 헤매며 대기실에 누워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그럼에도 배호는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불굴의 집념으로 마이크만 잡으면 ‘기침 한번 없이, 음 하나 흔들림 없이’ 열창했다. 그의 마지막 공연에서 피날레 곡은 운명의 장난처럼 ‘마지막 잎새’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11월7일 그는 병원에서 서울 삼양동 자택으로 옮기는 도중 차에서 기어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31세 젊은 나이의 요절이었고, 사인은 과로로 인한 신장염이었다.

배호는 정말 ‘신은 천재를 시기해 일찍 저세상으로 데려간다’는 속설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그가 죽은 지 올해로 정확히 30년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의 업적을 기리는 음악계의 어떤 추모 움직임도 없다. 가요사에 획을 그은 그를 생각할 때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배호가 활약하던 시기의 10대 가수는 여자 이미자 최숙자 이금희 현미 문주란 조미미, 남자는 배호를 비롯해 김상국 최희준 위키리 박형준이 단골이었다. 명단에 나타난 것처럼 당시 가요는 트로트와 서양 재즈(스탠더드 팝)풍 가요가 겨루는 형국이었다. 여가수 가운데 후자를 대변했던 인물이 현미였다. 그가 우리 가요발전에 주춧돌 구실을 한 ‘미8군 무대’의 무용수 겸 싱어였다는 사실, 그리고 당시로는 격조가 높았던 ‘밤 안개’ ‘떠날 때는 말없이’ 등의 노래가 미8군 무대에서 공력을 다진 소산이었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여걸’ 현미와 문주란

    춤도 서양식으로 잘 추고 노래에 대한 자신감이 누구 못지않았기에 현미는 다른 가수들이나 악단들을 비웃기도 했다. 그래서 가수가 악단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악단이 현미를 따라가면서 연주하는 양상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의 자신감은 곧잘 오만함이 아닌 호탕함으로 나타났다. 성격이 시원시원해서 누구든 상대하기가 편했고 웃음소리도 ‘호호호’가 아닌 ‘껄껄껄’이었다.

1970년 현미를 간판스타로 내세운 파월장병 위문공연 때의 일이다. 월남의 사이공, 나트랑, 다낭 지역을 순회한 대규모 공연에서 어느 날 현미가 숙소에 돌아와서 가방을 열어보니 소지품이 없어졌다. 그런데 요상한 것은 액세서리 등 귀중품과 현금은 그대로 있는데 팬티만 고스란히 사라진 것이었다(현미는 남들보다 팬티를 많이 갖고 다녔다고 한다).

현미는 “아니 지저분한 팬티를 대체 뭐 하러 훔쳐갔지?” 하며 흥분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실된 팬티는 그 연대의 장병들이 훔친 것으로 밝혀졌다. 이유를 캐보니 ‘전쟁터에서는 여자의 팬티가 행운을 가져온다’는 ‘미신’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실 현미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공연에 참가했던 여자단원들이 빨래를 해서 널어두기만 하면 유독 속옷만 도둑을 맞는 일이 계속되었다.

까다로운 성격의 여자라면 더 화를 낼 수도 있었겠지만, 현미의 반응은 ‘껄껄껄’이었다. 정말 현미는 ‘만약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장군감’이었을 인물이다.

배호가 극구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매력적 저음의 가수 문주란도 현미에 못지않은 ‘여자 얼굴을 한 남자’였다. 우선 남자를 부르는 호칭부터가 ‘선생님’이나 ‘오빠’가 아니라 당시로는 파격적이라 할 ‘형’이었다. 현미야 그래도 당당한(?) 몸집이었지만 문주란은 155㎝ 남짓한 왜소한 체구였기에 처음 대하는 사람들의 ‘문화충격’은 더했다. 당장 나오는 소리가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였다. 사실 텔레비전으로 볼 때보다 더 작았기 때문에 관객들은 문주란을 옆에 놔두고도 “아직 문주란씨 안 왔어요?”라고 묻는 일이 허다했다.

문주란은 지나칠 정도로 남자다웠다. 스피드와 스릴 광(狂)이었다는 사실이 그 일면을 말해준다. 여가수 중 가장 먼저 자가운전을 한 그는 핸들만 잡으면 동승한 사람이 후회할 만큼 난폭한 운전으로 일관했다. 커브 길을 돌 때 삑 하는 마찰음을 스릴로 여길 정도였으니, 같이 탄 사람은 생명선이 끊기는 듯한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차를 몰았으니 온전할 수 있었겠는가. 1985년 ‘홀리데이 인 서울’ 공연에서는 급기야 얼굴을 완전히 ‘짜깁기’한 상태로 무대에 나섰다. 사회자 최성일씨가 물으니 문주란은 넉살좋게도 “자가용의 차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큰 교통사고를 당해서 82바늘이나 꿰맸다”고 말했다.

보나마나 난폭 운전 때문이었다. 최성일씨는 그때 문주란을 이렇게 놀렸다. “얼굴 평수가 작았기에 망정이지 더 큰 얼굴이었다면 꿰맨 바늘 수가 더 많았겠지!”

‘눈물을 감추고’ ‘미련도 후회도 없다’와 같은 히트곡을 남긴 위키리는 현미나 문주란과 정반대였다. 현미와 같은 미8군 무대 출신으로 훤칠한 키에 늘 정장 차림이었던 그는 언제나 신사의 품위와 격조를 유지했다(나중에 KBS ‘전국노래자랑’ MC로 맹활약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신사’ 위키리, ‘악동’ 김상국

    1974년 강원도 황지 공연 때 그는 탄광지역에 유난히 즐비했던 요정으로부터 거의 매일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옆에 있는 남자들이 김샐 만큼 그는 술판이 끝날 때까지 흐트러짐 없이 신사다운 매너를 지켰다.

덩달아 따라간 사람들은 호스티스들과 질탕 놀이를 즐기는데도 막상 주빈(主賓)인 그는 한치도 짓궂거나 추잡한 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결과 한없이 길어질 수도 있는 술자리가 일찍 끝나버리는 민폐(?)를 끼치기도 했다. 신사도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코미디언을 웃기는 가수’로서 ‘쇼 무대의 명물’로 통했던 가수 김상국은 위키리와는 딴판이었다. 그는 반대로 ‘악동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입증한 인물이었다. 도를 넘어선 짓궂은 행동으로 사람을 골탕먹였지만, 때로는 ‘기행’으로 배꼽을 잡게 했다. 쇼 무대 사회자들은 지금도 주저없이 “김상국이야말로 앞에서나 뒤에서나 사람을 즐겁게 한 진정한 의미의 엔터테이너였다”고 말한다.

그는 공연단원들 앞에서 놀다가 신이 나면 성원에 보답이라도 하듯 자신의 신체까지 ‘속속들이’ 드러냈다. 한술 더 떠 여자단원 숙소에 슬그머니 다가가 방문을 슬쩍 열고 자신의 ‘물건’만 불쑥 집어넣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여자들이 대경실색하여 “어머나! 이게 뭐야?” 하며 괴성을 내질렀음은 말할 것도 없다.

1971년 서울 시민회관 공연에서 나타난 그의 악동기질은 유명하다. 멀지 않은 곳에 분명히 화장실이 있음에도 그는 무대 뒤에서 실례를 했다. 당시 시민회관 무대감독이던 배영달씨는 격노해 그를 다그쳤으나 김상국은 “시간이 촉박해서 그러는 거요” 하며 전혀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응수했다. 결국 김상국이 사과를 해서 말다툼은 끝났지만, 예의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아 김상국은 또 무대 뒤에서 소변을 봤고, 배영달씨도 마침내 두손 들고 포기하고 말았다.
 
 

 숙명의 라이벌 남진과 나훈아

    남진과 나훈아는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 초반 숙명의 라이벌로서 가요계를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군 인물들이다. 아마도 국내 대중음악 사상 본인들이나 팬들이나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며 긴장하고 갈등했던 가수로는 이 둘밖에 없을 것이다. 방송에서 행여 둘이 함께 소개되면 두 사람은 카메라 앞에서도 시큰둥한 채 서로 인사를 나눴으니까.

게다가 두 사람은 당시 야당 정치의 치열한 경쟁자였던 DJ와 YS처럼 목포와 부산 출신이었다. 그리하여 남진과 나훈아의 격전에는 ‘지역성’마저 개입, 한층 팬들의 관심이 증폭되었다.

고지를 선점한 남진은 가히 1980년대의 조용필이 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그의 리사이틀이 열리는 곳은 전지역 주민들이 술렁거렸고, 공연이 끝나면 극장 앞은 물론이고 숙소에서도 그를 만나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자연히 남진은 인파를 피해 별도의 여관에 투숙해야 했고 그 덕에 공연단 숙소에서는 엉뚱한 사람들이 ‘포식’을 했다. 여성 팬들이 남진이 머무는 줄 알고 정성 들여 만들어온 음식을 쉴새없이 넣어주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옛이야기가 돼버렸지만 1970년대 남진 하면 윤복희와의 열애와 결혼을 빼놓을 수가 없다. 1977년 전남 완도 공연 때 사랑병을 앓고 있었던 그는 여관방에서 잠도 자지 않고 미국에 있는 윤복희와 전화통화에 열을 올렸다. 통화가 얼마나 길었냐 하면 그날 공연에서 번 돈을 전화 통화료로 몽땅 날려버렸을 정도였다.

이 공연의 사회자였던 김태랑씨의 회고담. 하루는 미국에 있던 윤복희가 남진 모르게 전남 완도에 잠입했다. 무대에서는 한창 코미디 ‘최진사댁 셋째 딸’이 벌어지고 있었고 남진이 칠복역을, 상대역 셋째 딸은 홍화숙이란 무명가수가 맡아 연기했다. 윤복희는 잽싸게 분장실로 들어가 홍화숙의 의상을 빼앗아 입고 무대로 걸어나갔다.

이를 까맣게 모르는 남진은 맞절 연기를 하고 신부의 얼굴을 보는 순간, 파랗게 질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갑자기 쇼는 3분이나 중단되었다. 진상을 알고 있는 김태랑씨와 분장실 요원들은 낄낄 웃어댔지만, 관객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쥐죽은듯 조용했고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신성한 공연까지 그르칠 만큼 두 사람은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나중에 갈라설 때 기자회견에서 했던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이 설득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훈아의 경우는 영화배우 김지미와의 로맨스가 걸작이다. 두 사람도 역시 공연 중에 그 관계의 실체를 드러냈다. 1974년 박종구씨가 단장이었던 ‘라이온스’ 쇼단 주최로 시민회관에서 나훈아 리사이틀이 열렸을 때였다. 이 무대 사회자였던 최성일씨가 나중에 밝힌 이야기. 1회 공연을 마치고 분장실에 돌아와 있는데 갑자기 사과와 배 한 궤짝이 들어왔고 박단장은 나훈아가 사는 것이라며 많이들 먹으라고 했다. 단원들이 나훈아에게 감사표시를 하고 한참 먹고 있는 도중 난데없이 김지미씨가 나타났다.

김지미씨가 “수고들 하셨어요” 하고 인사를 하자 나훈아는 “뭘 이렇게 많이 보내주셨어요? 정말 잘 먹겠습니다” 하며 얼굴을 붉혔다. 사람들은 바쁘고 위세 높은 대스타가 남의 쇼에 와서 먹을 것까지 사온 것에 의아해했고,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의 눈빛이 여느 사람과는 크게 달랐다. 아닌 게 아니라 얼마 뒤 매스컴에는 ‘나훈아와 김지미의 열애’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마침내 둘은 웨딩마치를 울렸다. 이를 목격한 최성일씨의 한마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지 않고, 연기 나는 곳에는 반드시 불이 있다!”

전성기 시절 남진은 특유의 장난기로, 나훈아는 ‘소도둑’이란 별명과는 다르게 스스럼없는 인정으로 많은 뒷이야기를 남겼다. 남진은 공연이 끝나면 자가용도 보내버리고 한사코 삐걱거리는 공연단의 전세버스를 탔다. 이유는 사람들과 떠들고 술 마시는 분위기가 좋아서였다.

1972년 경북 안동 대한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어렵사리 숙소를 구했는데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방이었다. 이마에 빗방울이 떨어지자 남진 특유의 악동기질이 발동했다. 대뜸 ‘물이야!’를 ‘불이야!’로 바꿔 소리치며 방을 뛰쳐나왔다. 정말 화재가 발생한 줄 알았던 단원들은 한바탕 대소동을 벌였다. 구석에서 남진은 신난다며 낄낄거렸다. 그는 “공동체랄까, 너도 나도 웃고 즐겼던 그 순간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며 상대적으로 낭만이 메마른 지금의 가요 풍토를 꼬집는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괴짜’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

나훈아는 뒤끝이 없는 성격이었다. 1983년 그가 서울 천호동 은성카바레를 경영했을 때 과거에는 같이 자리하기조차 꺼렸던 남진을 출연가수로 섭외, 함께 무대에서 정답게 노래했다. ‘당사자 해결’ 차원에서 관계개선의 기회를 나훈아가 마련하고 남진이 선뜻 응한 것은 ‘휴머니즘’을 체험한 그 시절 스타들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장면인 듯하다.
 
 

 김세레나의 피날레 욕심

    공연관계자들은 김세레나 하면 ‘신민요의 여왕’이란 사실에 앞서 가히 국보급이라 할 무대 욕심을 꼽는다. 신인 때부터 그의 의상 가방은 컸다. 쌀가마니만한 크기의 궤짝을, 그것도 두 보따리씩이나 들고 다녔다. 뭔가 특별한 것을 보여주려는 의욕, 남들을 꼭 이기려는 욕심 때문에 무대에 임하기도 전에 주변사람들은 백기를 들었다.

1969년 부산극장에서의 에피소드.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김추자와 함께 공연(共演)했던 이 쇼에서 주최측은 가장 인기 있는 가수가 나서는 피날레의 주인공으로 김추자를 결정했다. 김세레나와 김추자의 인기는 막상막하였지만 김세레나가 민요가수였기 때문에 현대적인 김추자를 마지막 순서로 택했던 것이다.

그러자 분장실에서는 김세레나의 언성으로 한바탕 난리가 났다. “피날레 아니면 안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짐 싸서 서울로 올라가버리겠다!” 그의 고집에 김추자가 양보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김추자와의 자존심 싸움에서 결국 김세레나가 ‘승리의 피날레’를 장식한 셈이었다.

그 무렵 대구 만경관 극장공연에서는 바로 앞 순서였던 펄 시스터스가 사정이 생겨 펑크를 내자 김세레나는 그 시간을 자신이 메우겠다고 자청했다. 그리고는 무대에 올라가 단 1분도 쉬지 않고 논스톱으로 열아홉 곡이나 노래를 부른 일도 있다. ‘무대는 나 없이 안 된다. 내가 다 책임진다!’는 자세가 아닐 수 없다.

같이 누가 노래하든 꼭 자신이 마지막 순서를 장식해야 한다는 고집과 철칙은 국제무대에서도 여전했다. 1987년 일본에서 열린 ‘동경가요제’에서도 그는 제일 끝에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김세레나의 무대 욕심은 ‘국제적’이었다. 1980년대 그러니까 그의 인기가 상당히 퇴조했을 무렵에도 그의 고집은 변함이 없었다.

서울 장안평의 스탠드바 ‘스카이’에 출연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출연을 알리는 그의 선전포스터가 이주일 조영남 뒤에 걸려 있었다. 그러자 김세레나는 계약금 800만원을 고스란히 반납하고 그 자리에서 계약포기를 선언해버렸다. 한창 이런 말이 돌았다.

‘만약 포스터에 김세레나가 두 번째나 세 번째에 걸려 있으면 그의 모습은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제일 크게 그의 사진이 붙어 있는 업소가 있다면 그곳에는 김세레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온다!(물론 맨 마지막에)’

그는 욕심이 많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인정미로도 명성을 날렸다. 1983년 서울 ‘카네기’에 출연했을 당시 그가 무명가수들과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거기에는 문영주라는 무명가수가 있었고 그의 눈에 김세레나의 화려한 무대의상이 탐날 정도로 멋지게 비쳤다. 그가 김세레나 옆으로 다가가 재롱피우듯 “언니 드레스는 참 예뻐요! 언니하고 너무나 잘 어울려요” 하며 말을 걸었다.

그러자 김세레나는 그 옷을 벗더니 “그래? 그럼 너 가져!” 하며 즉석에서 그 비싼 드레스를 문영주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무대에는 평상복을 입고 올라갔다.

만약 그가 남자였다면 틀림없이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렸을 것이다(엘비스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면 자동차고 현금이고 마구 주는 큰 통으로 유명했다). 김세레나는 실제로 노인정, 나환자촌, 학교 등에 아낌없이 위문품을 전달하는 ‘숨은’ 자선사업가였다. 김세레나의 격의 없는 이웃돕기는 근래 톱 가수들 사이에 유행처럼 퍼지고 있는 미디어를 통한 선전용 자선사업과 그 동기의 순수성에서 차이가 있다.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김세레나가 무대 욕심의 여왕이라면 김추자는 ‘무대장치 욕심의 여왕’이었다. 노래는 기본이고 조명, 마이크 상태 그리고 무대배경 등 장치에 무서울 정도로 집착했다.

특히 ‘부분조명’에 목숨을 걸다시피 해 ‘이 노래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얼굴만 비추고 이 대목에서는 가슴만 비추어달라’ 등등 세세하게 조건을 따졌다. 김추자의 무대철학은 “조명, 마이크와 같은 노래 외적인 요소의 뒷받침이 완전해야 노래가 살아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대장치 욕심과는 달리 타이틀이나 위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1974년 서울시민회관의 김추자 리사이틀 때, 많은 외국인들이 벌떼처럼 그에게 몰려와 사인을 요청했다(김추자는 유독 국내거주 외국인 팬이 많았다).

그 무렵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추자의 전성시대’였다. 내국인 팬들이라 할지라도 감사의 제스처를 보이는 것이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스타의 당연한 자세였지만, 그는 미소도 짓지 않고 단 한마디 말도 없이 그저 냉정하게 외국인들에게만 사인 해주었다. 그래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관계자들이 도리어 민망해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남진 나훈아에 뒤지지 않는 폭발적 인기를 누려 능히 ‘방송 10대 가수상’을 받고도 남을 가수였지만, 김추자는 단 한 번도 10대 가수에 들지 못했다. 그런 상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늘 혼자 있기를 좋아했고, 주변의 지원도 내켜하질 않았다. 늘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나 혼자 개척해서 최고 가수가 되겠노라”고 스스로 되뇌곤 했다.

그의 ‘나 홀로’ 버릇은 가히 미스터리였다. 외부와 접촉을 차단한 채 언제나 혼자서 조용하게 처신했다. 심지어 분장실도 별도로 썼다. 분장실에는 당연히 거울을 걸어야 했다. 그래서 김추자 공연을 준비한 극장측은 극장 사장의 거울을 떼다가 그의 전용분장실에 달아주기도 했다. 터질 듯한 율동과 내지르는 가창이 그의 상표임을 감안할 때 그런 무대 뒤의 ‘폐쇄성’은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노래도 절창이었지만 신들린 요정과도 같은 그의 춤은 하나의 전설이었다. 마치 무척추 동물처럼 휘면서 추는 춤, 그리고 하체의 굴곡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만큼 몸에 딱 달라붙는 판타롱 바지는 한때 ‘노 팬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을 정도로 전국의 화제였다.

1973년 부산 보림극장에서 열린 김추자 리사이틀에서는 한 남자 관객이 느닷없이 ‘와! 노 팬티다!’ 하고 소리쳐 객석이 크게 술렁인 적도 있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김추자 공연 때는 평소 뒷자리에 앉는 남자들이 ‘뭘 보려 했는지’ 무대 앞으로 대거 몰려나오기 일쑤였다.

그러고 보면 김추자는 이 시대를 수놓고 있는 이른바 ‘비주얼 댄스가수’의 선구자였다. 지금 가수들은 모든 게 요즘 새로 생겨난 것이라고 강변할지 모르지만, 따지고 보면 다 뿌리와 계보가 있는 법이다.

보여주는 댄스가 판을 치는 상황에서, 더욱이 ‘님은 먼 곳에’를 비롯한 그의 히트곡이 잇따라 재조명되는 시점에서, ‘비주얼의 원조’인 김추자의 컴백소식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시 돌아와 예전처럼 세심하게 신경 쓴 무대장치와 함께 보여줄 그의 환상적 열창무대가 기대된다.

김추자를 말하면서 같은 ‘신중현 사단’이며 댄스음악 붐을 일으켰던 배인순 배인숙 자매, 바로 ‘펄 시스터스’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가요계 최고의 듀엣이었던 이들은 다른 가수들과 달리 극장 쇼의 인기를 업고 방송으로 진출한 게 아니라 반대로 텔레비전의 인기를 가지고 무대로 뻗어간 예였다. 이것은 그들이 요즘 말로 ‘오디오 비디오 겸용가수’이며 나아가 ‘비주얼 시대’의 효시임을 말해주는 단서다.
 
 

 그리운 세기의 듀엣 진주자매

    TBC 쇼프로 ‘쇼쇼쇼’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조금 과장하자면 펄 시스터스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들의 가창력 율동 그리고 미모라는 3박자가 던진 충격파는 컸다. 고(故)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사석에서는 물론 방송현장에서도 곧잘 입에 올린 한마디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펄 시스터스는 정말 한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불세출의 재목이다!”

1969년 발표돼 그들을 최고 스타로 만들어준 ‘님아’에 대한 MBC 라디오 김기덕 국장의 말도 되새길 만하다.

“내가 관찰한 우리 가요사에 사람들이 일제히 노래의 주요 부분을 길거리에서 소리 높여 따라 부르며 유행시킨 곡은 세 곡밖에 없다. 산울림의 ‘아니 벌써’와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가 그랬으며 그보다 앞선 곡이 펄 시스터스의 ‘님아’였다.”

펄 시스터스는 방송으로 데뷔해 스타덤에 올라 곧바로 쇼 무대에도 진출했다. 하지만 지방리사이틀은 그다지 많이 하지 않았고 주로 서울 ‘시민회관’ 무대에만 섰다. 그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1970년과 이듬해에 20차례 공연이 열렸는데 그들이 18회 출연했을 정도였다.

그들이 쇼 무대에 나왔을 때는 어렸고 순진했던 탓에 누가 뭘 물어봐도 이구동성이었다. 화장실을 가도 함께 가야 했을 만큼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이 때문에 공연 관계자들은 다정한 자매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꾀를 부렸다.

“인숙아. 네 언니가 그러는데 무대에서 제스처하면서 너무 과장이 심하다고 남들 앞에서 흉보더라. 왜 그랬니? 좀 잘하지, 언니한테!”(이 말을 들은 동생 인숙은 한번은 뭐가 그리 서러운지 손에 얼굴을 파묻고 슬피 운 적도 있다)

“인순아. 넌 화면이 안 되겠더라. 어쩌면 동생하고 그렇게 얼굴이 차이가 나냐, 그래? 인숙이보다 얼굴이 너무 커!”(이 말에 언니 인순은 ‘미모의 평등화’를 위해 어머니와 상의해 성형수술을 할까 고민했다는 뒷얘기까지 나왔다)

자매 사이는 돈독했음에도 공연 관계자들간에는 자매를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무슨 유행처럼 번져 있었다. 본인들은 다정한 자매요, 남들에겐 라이벌이었던 셈이다. 특히 ‘누가 더 예쁘냐? 누가 더 마음씨가 고운가? 누가 시집을 더 잘 갈까?’가 주요 화제였다. 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결론.

“동생이 마스크는 더 낫고 성격은 언니가 더 원만하다. 언니는 동양적이고 동생은 서양적이다.”

펄 시스터스는 늘 모범이었다. 직접 빗자루를 들고 지저분한 분장실을 청소했고 꽃병과 화분을 갖다놓기도 했다. 또 누가 풀이 죽어 있으면 마치 자기 일처럼 ‘어디 아프세요?’ 하며 함께 걱정했다. 실력은 물론 인간미 때문에 진주자매를 지금도 그리워하는 가요계 원로가 많다.

최성일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펄 시스터스는 스타가 되어 돈을 벌겠다 해서, 또는 연예인 끼가 있어서 가요계에 뛰어든 유형의 가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노래하는 게 좋아서 가수가 된 사람들이었다.”
 
 

 ‘양아치 클럽’의 검문 비화

    펄 시스터스와 후라이보이도 그랬지만, 과거 연예인 가운데는 유난히도 영어로 예명을 지은 사람이 많았다. 신카나리아 쓰리보이 패티김 자니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고 1960년대 초반부터 극장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청바지의 대명사 트위스트김(金)도 있다. 당시 유명한 쇼 단장이었던 박영태씨는 트위스트김과 한패거리였던 ‘뜨거운 안녕’으로 유명한 가수 자니리(李), ‘땅벌’의 이태신, ‘허무한 마음’의 정원을 한데 묶어 ‘양아치클럽’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양아치클럽 사이에 발생한 재미난 사건이 있었다. 1969년 마산 제일극장 공연을 마치고 동네 유지로부터 초대를 받아 크게 한잔 걸친 양아치클럽은 술자리를 마친 후 부산으로 향하다 김해 검문소에서 통행금지에 걸렸다. 그런데 그들을 검문했던 경찰은 하필 연예인에 대해선 전혀 무관심하고 오로지 경찰직무에만 충실했던 사람이었다.

경찰=(트위스트김에게) 이름이 뭐죠?

트위스트김=트위스트김입니다.

경찰=뭐요? 토스트김? (이번에는 쓰리보이를 보고) 당신 이름은?

쓰리보이=전 쓰리보이예요.

경찰=예? 쓰리꾼이요? 지금 당신들 장난치는 겁니까? (이번에는 자니리를 가리키며) 당신 이름은 뭐예요?

자니리=자니립니다!

경찰=뭐? 자○리? (입에서 남성 심벌의 명칭이 툭 튀어나왔다)

공연 관계자가 정황을 설명해 이들은 곧 풀려났지만 그래도 경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여러분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국적이 다릅니까? 생긴 건 다 국산(國産)인데 왜 이름은 다 꼬부랑 말씨가 섞인 겁니까? 참 이상한 사람들이네요.”

요즘 그룹과 가수들은 그 이상으로 하나같이 영어이름을 내걸어 때로 어른들과 여론의 지적을 받곤 한다. 양아치클럽 사건이 말해주듯 과거에도 그랬으니 신세대 연예인이 영어를 남발한다고 그리 나무랄 건 없을 것 같다.

일반인들은 모르겠지만 쇼 무대에만 널리 퍼져 있던 에피소드나 유머가 많았다. 1966년과 67년 내리 ‘경상도 청년’ ‘대머리 총각’을 히트시키며 ‘국제적 지성의 가수’로 통했던 가수 김상희와 관련된 얘기. 고려대 법대 출신으로 뭐니뭐니 해도 가요계 여자학사 가수 제1호(남자가수는 물론 최희준)인 그는 보기 드문 교양의 소유자로 말이 없고 감정절제가 두드러진 가수였다. 하지만 뜻밖에 쇼 무대에서 통한 별명은 ‘다섯째 첩의 딸’이었다. 무슨 영문이었을까?

농담하는 것을 좀처럼 보기 힘든 그였지만 야간업소 사회자로서 쌓은 되받아치기의 저력을 발휘, 한번 공연 관계자들은 크게 웃겼던 적이 있었다. 1972년 전남 여수의 ‘10대 가수 쇼’를 위해 당대 최고 스타들이 기차를 타고 한 칸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들은 서로 본명을 공개했다.

김상희의 본명은 ‘최순강’이었으며 동성(同姓)이었던 사회자 최성일씨는 즉각 “어디 최씨냐?”고 물었고 김상희는 해주 최씨라고 답했다. 최성일은 머릿속으로 족보를 따져 농으로 “흥! 다섯째 첩의 딸이구먼!” 하고 시비를 걸었다. 그랬더니 김상희도 “최성일씨는 어디 최씨죠?” 하고 물었다. 최성일이 수원이 본(本)이라고 하자 김상희는 수원 최씨가 파벌 중 세력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는 숨도 쉬지 않은 채 “흥! 열셋째 첩의 아들이군!” 하고 응수했다.
 
 
 

 김상희가 다섯째 첩의 딸?

    발군의 카운터 펀치. 동료가수들은 김상희의 KO승으로 판정했고 이 사건 이후 김상희에게 최성일은 ‘열셋째 첩의 아들’이 되었고 최성일에게 김상희는 무조건 ‘다섯째 첩의 딸’로 통했다. 그리고 이 별명은 당시 공연 관계자 사이에 꽤나 유행했다고 한다.

가수 조영남과 코미디언 이주일, 두 사람의 미남(?) 경쟁에 관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말 받아치는데 아마 이 두 ‘걸작품’을 능가할 연예인은 없을 것이다. 조영남이 지난 1987년 서울 장안 최고 인기 야간업소인 ‘홀리데이 인 서울’에 출연했을 때 가끔 어린아이에게 말을 걸어 객석의 폭소를 자아내곤 했는데 한번은 어린애가 울어버려 뜻대로 못한 때가 있었다. ‘못생기기도 했지만 더 큰 비극은 험악하게 생긴 것’이라는 세인의 말대로 아이가 조영남의 무서운(?) 얼굴에 그만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이 광경을 보고 다음 순서에 출연한 당대 ‘추남계의 정상’ 이주일은 굳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애가 울어버리는 참사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내 생김새가 아무리 엉망이지만 조영남이보단 잘생겼습니다. 날 깔보지 마십시오. 난 정말 조영남이 하나 바라보고 삽니다.”

재미는 덜하지만 조영남의 멋진 반격. “못생긴 것만 가지고 무대에서 떠드는지 정말 속상합니다. 주일이 형과 내가 못생겼지만 우리보다 더 못난 사람들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이 못생긴 것을 좋다고 보러 왔으니까요!”(그가 90년대에도 TV 토크쇼의 사회자로 명성을 날린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가요비사2

 
홈 /수필과칼럼 / 인포캐나다 /뉴스미디어/가판대 /잡동사니/ 사설.칼럼/시사만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