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일도 안심했던 추남 조영남
조영남에게는 잊혀질 수 없는 ‘역사적 해프닝’이 있다. 지난 1975년 고 박정희 대통령과 많은 외국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청와대 경호실에서 연예인 위문공연이 열려 김상희 현미 김세레나 조영남 등 당대 최상급 가수들이 참여했다. 조영남은 노래 1절을 마치고 간주 부분에서 갑자기 양복 안주머니에서 쇠붙이 같은 것을 꺼내려 했다. 느닷없는 그의 행동에 깜짝 놀란 경호원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즉각 조영남을 가로막았다.
참석한 귀빈은 물론, 이를 지켜보던 대통령까지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조영남이 꺼내든 것은 권총이 아니라 그가 가끔 노래 도중 부는 연주용 소도구 바로 하모니카였다. 경호실 전체가 ‘휴’ 하는 안도와 더불어 곧 평온이 회복되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싸늘함이 감돌았다. 노래하다가 콧물이 나와도 손수건을 못 꺼내는 것이 가수가 지켜야 할 덕목이라면 사전에 귀띔없이(더욱이 청와대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것은 어처구니없는 돌발사태였던 셈이다. 이 사건은 연예계에 길이 남을 역사적 비화로 남았고 당사자 조영남은 훗날 “지금도 그 하모니카만 보면 그 사건이 생각나 간담이 서늘해진다”고 회고한 바 있다.
조영남의 별난 점은 하나둘이 아니지만 별일 중의 별일은 ‘히트곡 하나 없이 정상의 인기를 누렸던 가수’라는 사실이다. 그의 레퍼토리는 대부분 가곡을 포함해 남의 노래 재취입곡 아니면 외국 번안곡이었으며 시원하게 히트시킨 오리지널 곡은 없었다. 그래도 언제나 그는 무대의 톱 클래스 자리를 지켰다. 언제나 ‘비교우위’를 주장하는 이주일은 공연중 조영남을 겨냥했다.
“가수가 본업이 아닌 나도 히트송 ‘못생겨서 죄송합니다’가 있지만, 조영남은 히트곡 하나 없이 20년 동안 버티는 가수다. 생긴 거나 노래로 보나 아무래도 내가 한수 위 아닙니까?”
‘백발의 인기 MC’로 잘 알려진 박상규는 조영남과 달리 ‘조약돌’과 ‘친구야 친구’라는 확실한 히트곡을 둘이나 갖고 있는 1970년대의 톱 가수였다. 그는 76년 ‘조약돌’(그해 방송사 최고 히트가요였다)의 빅히트로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았고 마침내 이듬해 작고한 백봉호 단장이 주최하는 전국 리사이틀에 나섰다. 처음이자 마지막 리사이틀이었던 이 순회공연 때의 일이다. 부산 영도극장은 유난히도 건달이 많아 난장판이 되기로 유명했다. 박상규 공연 때도 도대체 그가 쇼를 하는 건지 무대 밑의 주먹패가 쇼를 하는 건지 분간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었다.
건달을 누인 박상규의 주먹
첫 리사이틀을 갖는 박상규는 무척 신경이 곤두섰고 마침내 극장 앞에서 사회자 김태랑씨와 식사를 하던 도중 일이 터지고 말았다. 찡그린 얼굴로 한마디 말이 없던 박상규가 수저를 들 찰나 극장에서 대장 노릇을 하던 거구의 건달 하나가 불쑥 식당에 나타났다.
“상규! 밥 묵네. 보소, 나도 밥 한 그릇 사주소! 누군 입이고 누군 주둥인기요?”
김태랑씨가 말을 받으려 하자 박상규는 아무 말도 말라고 되레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 불량배는 더 기세가 등등해져 “와, 아니꼽나? 밥 한 그릇 못 사줄 형편이믄 내가 사주까? 정말 보니까 진짜 ‘조약돌’만하네!” 하고 시비를 걸었다.
작은 체구와 히트곡이 동시에 능멸을 당하자 그때까지 침묵하던 박상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오른손 주먹에 전 체중을 실어 필살의 일격을 날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방 맞은 건달은 마치 고목이 쓰러지듯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버렸다.
코앞에서 현장을 본 김태랑씨는 “그것은 쿵푸영화의 이소룡보다 훨씬 비호 같은 동작이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박상규는 뒤에 “그 친구가 워낙 약체였으니까 한방에 간 거지 뭐” 하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김태랑씨의 느낌은 달랐다. “작은 고추는 맵고, 짠물 먹고 자란 인천 주먹은 역시 강하다!”(박상규는 인천 출신이다)
박상규는 괴팍스러운 애주가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밤 공연이 끝나면 공연단 일행은 숙소로 들어가서 라면 한 그릇으로 허기를 때우곤 했는데 순회공연 60일간 단 하루도 건너뛰지 않고 라면 한 그릇에 소주가 곁들여졌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은 라면이 익으면(더러는 덜 익혀서) 바로 먹는 게 이치였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라면이 퉁퉁 불 때까지는 절대 소주병을 따지 않았다.
보기 흉할 정도로 라면이 불어야 그것을 안주 삼아 술을 들이켰다. 김태랑씨는 “라면이 불 때까지 옆에서 말동무 노릇을 해주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 라면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은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박상규의 별난 라면 식(食)습관이 널리 퍼져 따라하는 사람도 있었다.
박상규가 남자다웠다면 1970년대의 인기가수 이수미는 여자다웠던 가수로 기억된다. 그런 이미지에는 빅 히트곡 ‘여고시대’ 또는 ‘내 곁에 있어주’가 주는 청순함과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가련함이 크게 작용했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 무대 뒤의 이수미는 치마만 둘렀지 행동이나 씀씀이는 완전한 남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노래의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공연할 때는 아찔한 ‘겁탈미수 사건’도 많았다.
1975년 경북 구미 공연 때 술취한 손님이 이수미 방에 잠입해 난동을 부렸고 이듬해 1976년 울산공연을 마치고 부산 태화관광호텔에 묵었을 때도 웬 남자가 급습했다. 숙소인 6층까지 찾아온 그 치한이 하도 거칠게 공격해오는 바람에 이수미는 다급해서 그곳에서 뛰어내릴 각오까지 했다고 한다. 그때 아래층에 자고 있던 동료가수 ‘잘 있어요’의 이현, 배성 등이 올라와 그를 내쫓아서 겨우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사건이 말해주듯 이수미는 여러 스캔들로 사생활은 불행했던 편이다. 아마 그의 사적(私的)인 이미지가 잘 보호됐더라면 더 많은 히트곡을 냈을지도 모른다. 전성기가 훨씬 지난 87년 그가 김태랑씨에 한 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정말이지 수미라는 이름이 좋지 않나 봐요. 영화배우 오수미 언니도 평탄하지 못하잖아요? 이름부터 자꾸 걸려요.”(오수미는 얼마 후 사망했다)
“무슨 소리야? 그럼 김수미씨는?”(그 때 김수미는 MBC 드라마 ‘전원일기’의 일용 할머니 역으로 절정의 인기를 과시했다)
“하긴 김수미씨가 잘 되면서 나도 속이 좀 풀렸어요. 이제부터는 나아지겠지요.”
이수미의 사례는 당시 연예인들이 악성 루머나 스캔들에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말해준다. 신문에 연애설 밀애설 등이 보도되면 치명타라도 맞은 듯 ‘도저히 낯을 볼 면목이 없어서’ ‘두려워서’ 약속된 공연마저 나오지 못하는 가수들도 있었다. 지금의 연예인들은 웬만한 메가톤급 스캔들에도 까딱하지 않는 것은 물론 그것을 도리어 자신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전술로도 활용한다. 어찌 보면 근래 가요계의 풍경이 한마디로 ‘순수의 상실’은 아닐까?
재떨이에 맞은 하춘화
이미자에 이은 1970년대 트로트의 별 하춘화는 ‘운 좋은 가수’였다. 1972년 12월 2일 연예계의 대사건 서울 시민회관 화재가 있었다. 본인의 말대로 뒷문으로 가까스로 빠져나와 목숨을 건졌으며 이후 1976년 이리 폭발 참사사건 때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처럼 공연중이던 그를 코미디언 이주일이 200m를 등에 업고 달려나와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다. 이주일은 훗날 “만약 그때 내가 업고 빠져나오지 못했으면 하춘화는 천장의 대들보가 떨어져 맞아 죽었을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그는 명동의 야간업소 ‘라데빵스’에서 노래부르던 도중 취객이 던진 유리 재떨이에 발을 맞아 닷새나 출연하지 못했던 일도 있었다. 사회자 최성일씨는 이 사건도 만약 그가 다른 곳을 맞았더라면 치명적일 뻔했다고 하면서 “하춘화는 유독 죽을 뻔한 위기를 여러 차례 당했고 모두 불행 중 다행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긴 가수”라고 말했다.
하춘화는 어릴 때 하도 노래를 잘해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최무룡의 혼을 뺀 일로도 유명했다. 심지어 최무룡 리사이틀을 회고하면서 지금도 쇼 관계자들 모두가 ‘딱부리(개구리눈이라서 붙은 별명) 하춘화’를 기억할 정도. 쇼 무대에 입문한 꼬마가수 하춘화의 노래를 듣고 홀려버린 최무룡은 공연장에 도착하면 어김없이 하춘화를 붙잡고 노래를 시켰고, “햐! 고놈 참 신들린 것처럼 잘 부르네!” 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한다.
부산 공연의 단골숙소이면서 ‘이 집 밥을 먹지 않은 사람은 1960·70년대 스타가 아니었다’는 ‘남이엄마집’에 여장을 풀면, 대부분 한잠 자거나 목욕을 했지만 최무룡은 주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춘화를 무릎에 앉혀놓고 깜찍한 어린애의 노래를 감상하곤 했다. 박수를 치며 웃는 모습이 남 보기에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훗날 하춘화의 출세를 가장 먼저 인도한 사람은 다름아닌 최무룡이었던 셈이다(그러고 보면 옛날 어른들은 애들한테 노래나 트위스트 춤을 시키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또한 하춘화는 고 삼성 이병철 회장이 가장 좋아했던 가수로도 유명하다.
세상물정에 훤했던 혜은이
‘당신은 모르실꺼야’ ‘감수광’의 혜은이(본명 김승주)도 어릴 적부터 무대에 섰던 소녀가수였다. 그녀의 아버지 고 김성택씨는 변사 출신으로 195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낙랑쇼’의 단장이었고 가수 고봉산 안다성 윤복희, 코미디언 이기동 남성남 등 쟁쟁했던 연예인들이 바로 이 단체에서 배출되었다. 역시 ‘소녀가수’였던 윤복희가 아버지 윤부길씨와 한창 낙랑쇼단에서 노래했을 때만 해도 혜은이는 갓난아이였다. 젖먹이 시절 혜은이는 전형적인 ‘울보’로 아무리 젖을 물리고 달래도 마냥 앵앵거리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 김성택씨는 가끔 열 받은 나머지 “저걸 그냥 갖다 버려!” 하며 호통을 친 적도 있었다. 공연 관계자들은 혜은이가 나중에 톱 가수로 성장한 비결로 “어려서 많이 울면 커서 가수 된다”는 속설에서 찾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탓에 비스킷을 주면 좋아할 것 같은 어리고 착한 혜은이였지만, 실제로는 남의 심정을 깊이 헤아리고 세상물정에 훤한 ‘애어른’이었다고 전해진다. 최성일씨가 즐겁게 기억하는 혜은이 회고담. ‘혜은이=관객동원’이던 1979년 제주 시공관 혜은이 리사이틀에서 공연이 끝난 후 그는 단원을 위해 성큼 수고비를 내놓았다. 그런데 사회자 최성일씨한테는 밴드 전체에 준 돈과 맞먹는 거액을 슬그머니 손에 쥐어주었다는 것이다.
최성일씨가 “왜 나만 이렇게 많이?”라고 묻자 그 답변이 걸작. “에이 아저씨두. 모처럼 제주도에 오셨잖아요. 그러니까 술 한잔에 식사도 푸짐하게 하시구요. 또 으음…. 여자구경도 하세요.” 아마 산전수전 거친 오랜 경력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인간적인 처세 아닐까.
하춘화의 경우도 흡사하다. 17세이던 72년 하춘화는 파월장병 위문차 월남 순회공연에 나섰다. 이 공연에서 그가 겪은 어려움은 노래가 아니라 노래가 끝난 뒤 반드시 술이 있는 ‘파티’였다. 으레 고위장성급이 많은 이 자리에서 그는 귀찮을 정도로 ‘춤 한번 추자’ ‘술 한잔하라’는 요구에 시달렸다.
춤도 못 추고(그는 댄스가수가 아니었다) 술도 전혀 못 하고 또 그러기에는 어리기도 했지만 하춘화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자신을 지켜가면서도 이런 부탁을 다 들어주는 ‘탄력적 프로’였다고 한다. 춤추러 플로어에 나가서는 파트너의 발을 슬쩍 밟고 재빨리 내려왔고 술은 마시는 척하면서 남몰래 엎지르는 교묘한 전술을 동원했다. 최성일씨는 그것을 “흥겨운 판을 깨지 않고 분위기를 타면서 자신도 무리하지 않는, 아무리 어렸어도 캐리어가 쌓이지 않으면 해내지 못할 능숙한 솜씨”라고 표현했다.
하춘화와 혜은이는 70년대 연예계의 중심이 ‘자기 아닌 남’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관록이란 바로 남(대중)을 헤아리는 데서 나온다. 조금이라도 떴다 싶으면 자기 챙기기에 바쁜 지금의 연예계와는 근본적으로 그림이 다르다. 요즘의 자기중심 세태에 관록이 푸대접받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무대를 지키는 하춘화(얼마 전 데뷔 40년 기념공연을 가졌다)와 혜은이를 본 사람들은 너도 나도 “이 가수들의 무대를 보면서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바로 푸근한 관록의 향기”라고 입을 모은다.
윤복희의 오빠 윤항기는 가요사에 획을 그은 인물이다. 역사적으로는 신중현이 이끈 ‘애드포’가 한국 최초의 록그룹으로 기록되지만 일반인들도 아는 최초의 대중적 록그룹은 엄연히 ‘키보이스’였고 이 그룹의 일원이 바로 윤항기였다. 그는 나중에 솔로로 독립하면서 ‘나는 어떡하라고’를 크게 히트시키며 74년에는 가수라면 누구나 탐냈던 KBS ‘가수왕’에 등극했다. 그러니까 윤항기는 한국 록이 배출한 최초의 대중스타였던 셈이다(물론 노래는 포크에 가까웠지만).
이러한 점에 비추어 정작 놀라운 사실은 어릴 적에 그는 코흘리개 철부지에, 자기의사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던 ‘말더듬이’였다는 점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나이가 들면서도 더듬는 버릇은 여전해서 남들 세 마디 할 때 겨우 한 마디밖에 못했다고 한다. 그와 대화를 나눌 때 그가 하고픈 말을 미리 해주면 손뼉을 치면서 ‘맞아! 맞아!’ 하며 기쁨을 나타내는 것은 그를 아는 사람들은 흔히 목격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도 그가 뒷날 한 시대를 풍미하는 가수가 되리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윤항기는 1964년 군에서 제대한 직후 차도균, 김홍탁, 옥성빈 그리고 작고한 차중락과 함께 록그룹 키보이스를 결성했다. 하지만 그 시절 록그룹이란 말부터 일반인들에게는 낯설고 괴상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록 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생생하게 말해주는 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