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능 엔터테이너 윤항기
키보이스 멤버들이 서울 녹번동의 윤항기 사촌누나 집에서 한창 연주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난데없이 집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동네 주민들로부터 신고를 받았는데 신고한 이유는 “하루종일 ‘상여 나가는 소리’가 찢어지게 들리는데 귀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조용한 동네에 한 사람만 목청을 높여도 많은 가구가 괴로웠던 시절에 무려 다섯 명이나, 그것도 악머구리 끓듯 악기를 두드려댔으니 그게 얼마나 주민들 듣기에 소란스러웠겠는가. 그래서인지 “한국에 록이 늦게 정착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우리의 ‘가옥구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런저런 난관을 딛고 윤항기는 가련한 말더듬이에서 일약 ‘한국 록그룹의 창시자’로 각광을 받았다. 또한 윤복희의 ‘여러분’이란 노래가 말해주듯 탁월한 싱어송라이터에, 전성기에는 부전자전이라고 아버지 윤부길씨의 재능을 이어받아 무대 연출에도 능했고 공연 기획과 작품각색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고 한다. 일례로 1975년 윤항기가 윤복희와 그때 매제였던 남진이 함께 했던 ‘3인 리사이틀’이 크게 히트한 것은 그의 훌륭한 작품구성에 힘입었다는 것이다. 이런 게 인간승리 아닐까.
송창식은 윤항기 이상으로 가요사에 남긴 업적이 지대한 인물이다. 윤항기가 록 출신이었다면 그는 통기타 포크음악이 배출한 MBC 가수왕이었다. 포크의 거성이었던 것은 물론 ‘토함산’이나 ‘가나다라’가 입증하듯 포크와 국악의 접목을 시도한 개척자였다.
가수로서 송창식은 이처럼 분명한 존재였지만 당시 ‘인간 송창식’은 정녕 알다가도 모를 불분명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그를 본 공연 관계자들의 이구동성이다. 막말로 하자면 ‘괴물’이고 좋게 말하면 기인(奇人)이었다고 할까? 자기 좋을 대로, 멋대로 살아갔고 원체 ‘어벙’했던 까닭에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스타일이었다.
최성일씨는 “우선 어떻게 해서 가요계에 나오게 됐는지 모르겠다. 명동에서 윤형주와 만나 트윈폴리오를 조직해 데뷔한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어떤 꿈을 가지고 연예계에 진출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먼저 그의 괴벽 가운데 하나는 철저한 ‘올빼미’였다는 사실.
1976년 서해 5도의 군부대 순회공연 때였다. 그중 백령도 공연에서 행사가 끝난 뒤 군인들 숙소에 가수의 잠자리가 마련됐고 모두 곯아 떨어진 한밤중에 그는 취침할 생각은 하지 않고 연신 기타 줄을 퉁겨댔다. 보초가 득달같이 달려와 취침시간임을 경고했지만 그는 “알았습니다” 해놓고는 잠시 후 또 기타를 쳐댔다. 옆방 여자숙소에서 자던 가수 옥희는 혼자 신경질을 부리다 못해 “이제 그만 치고 제발 잠 좀 잡시다!” 하고 통사정을 했다. 그러나 송창식의 기타소리는 하염없이 밤하늘에 메아리쳤고 이 때문에 옥희는 아예 뜬눈으로 날을 새웠으며 상당수 군인들도 귀중한 잠시간을 빼앗기는 피해를 당했다.
그는 또 세수, 손톱과 발톱 깎기, 빗질 그리고 양치질 등 기본적인 공중생활 에티켓과도 인연이 멀었다. 옷차림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항상 티셔츠 등 허름한 캐주얼 차림이었고 정장 입은 모습을 본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래도 75년 가수왕으로 선정되던 순간에는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맸으니 상이 대단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공연 관계자들은 “그가 옷을 다려 입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구두도 한번 광을 낸 것을 못 봤다”고 증언한다(가수왕 맞아?).
게다가 엄청나게 무감각 무관심 무혈(無血)한 사람이 송창식이었다. 언젠가 공연 관계자들 앞에 굴곡이 어지러운 멋진 몸매의 다방 아가씨가 휙 지나갔다. 당연히 대다수 남자들은 “와, 끝내준다!” “아가씨, 더 쉬었다 가, 응?” 하며 짓궂게 시비를 걸었다. 이때 송창식의 반응. “왜들 그래요? 여자가 지나갔어요? 남자가 지나갔어요?”
좋게 말해서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할 만큼 대인관계에서 사리사욕을 차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무대 욕심만은 알아주었다고 한다. 객석에서 단 한 사람이 앙코르를 해도 신명나게 노래를 부른 사람이었다.
분명한 가수, 불분명한 인간 송창식
지난 1980년 서울 신사동의 야간업소 ‘88서울’에 출연했을 때 그는 세 곡을 부르게 돼 있었지만 앙코르 요청이 있자 다음 출연자에 대한 배려를 잊은 채 계속 불렀다. 다음 순서를 기다리던 ‘돌아와주오’ ‘내 단 하나의 사랑은 가고’의 가수 임희숙은 “바빠 죽겠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사회자 최성일씨가 무대로 나가 송창식의 옆구리를 찌르며 “그만해! 다음 가수가 기다려!” 하며 퇴장 신호를 알렸건만 그는 여전히 기타를 치며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답답하고 속 터질 노릇이었다.
송창식이 살았던 그리고 지금도 살고 있는 세상은 남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는 너무나 다르고, 그가 사는 세계는 이기심이나 공명심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영역이었다. 그런 괴물에, 목석에, 멋없는 가수가 일세를 풍미했다는 사실은 지금으로선 믿어지지 않는다. 만일 요즘 가수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가수왕은커녕 데뷔조차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1970년대 우리 음악계에 송창식이 있었다는 사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위대한 유산이다.
마지막으로 ‘리사이틀 시대의 마지막 스타’ 조용필이다. 조용필 얘기를 하면서 술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빼놓을 수는 없다. 1980년 12월 제주 코리아극장 공연 때였다. 공연이 시작된 날 운수 사납게도 폭설이 쏟아져 제주행 비행기가 결항돼버리는 바람에 조용필은 꼼짝없이 김포공항에 묶여 오후 2시에 개막될 제주공연은 물건너갔고 오후 6시쯤에야 제주에 도착, 즉시 밤 공연에 임했지만 흥행은 완전히 망해버렸다.
공연 주최측이었던 ‘삼천리연예공사’의 김만두 단장은 허탈해하는 조용필을 위로하려고 룸살롱에 데려가려 했다. 그러자 조용필은 “돈도 못 번 마당에 무슨 고급 술집입니까? 굳이 가려면 포장마차나 갑시다”고 했다.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그는 도리어 공연 주최측 사람을 위로하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마치 마른 논에 물들어가듯 소주를 마셔댄 조용필은 단 3시간 만에 소주 한 상자(그러니까 20병)를 ‘거의 혼자서’ 깨끗이 비워냈다. 이때 사회자였던 김태랑씨의 증언. “공연을 치르면서 애주가는 무수히 목격했지만 조용필처럼 가공할 두주불사(斗酒不辭)의 폭주가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도 그가 다음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거뜬히 공연에 나서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음악에 관한 한 엄청난 욕심과 인간미가 공존하는 인물이 조용필이었다. 절대로 악기는 빌려주는 법이 없었지만 남들 공연에 기꺼이 그의 밴드 ‘위대한 탄생’을 지원할 줄 알았다. 다른 가수들의 공연에 연주해줄 밴드가 없어서 공연 주최측이 제주도 현지에서 조달하려고 하자 조용필은 “경비를 절약하라”며 ‘위대한 탄생’의 지원을 자청했다. 그리하여 자신과 하등 관계없는 무명가수의 공연에 밴드가 ‘무료로’ 무대에 올랐고 자신은 무대 뒤 커튼이 쳐진 구석에서 열성으로 기타를 연주했다고 한다.
3시간에 소주 20병 마신 조용필
무대 뒤쪽에서의 조용필은 워낙 분주했던 탓인지 시간만 나면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물론 깨어나면 술이었다. ‘눈감으면 잠, 눈뜨면 술’은 그의 유명한 생활방식이었다. 다시 술 얘기지만 술은 꼭 소주, 안주는 김치찌개, 술집은 포장마차였다(나중에는 당연히 양주, 과일, 고급술집으로 바뀌었겠지만).
그는 여간해서 자신의 ‘내면’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고 오로지 남의 얘기를 진지하게 경청했다. 언젠가 만난 한 연예기자의 조용필 인간론.
“그는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그 열쇠는 가슴에 깊이 보관한 인물이다!”
조용필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이주일이다. 같은 매니지먼트 회사(최봉호 사장) 소속이기도 했지만 ‘인간적 온도’가 서로 맞는 사람들이었다. 인기 위세 그리고 수입에 있어 쌍벽이기도 했고…. 당연히 가까운 사이였고 그런 이유로 서로 툭탁툭탁 잘 다투기도 했다.
둘이 함께 술을 마시다가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이주일이 먼저 “용필아! 니가 스타냐?”고 시비를 걸면 조용필은 “그럼 형님은 스탑니까?” 하고 꼬치꼬치 응수하며 대드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니, 이 자식이?” “아무리 형이지만 말야!” 하며 제법 살벌한 말다툼으로 번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음날 술이 깨면 마치 짜고 한 듯 “우리가 싸웠어?” 하고 ‘끊긴 필름’을 부정한다. 이 정도면 숙명의 동반자라 하겠지만 한 사람이 가수고 한 사람이 코미디언이었기 망정이지 만약 분야가 같았더라면 두 사람은 아마 대권을 놓고 으르렁거리는 견원지간이 됐을지도 모른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필요하다면 무조건 배우려는 열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대 완벽주의로 공연 관계자들의 혀를 내두르게 하는 프로기질, “무대에서 노래하다가 쓰러져 죽는 게 소원”이라는 진정성은 조용필을 논할 때 빼놓아선 안 되는 요소들이다. 그런 것들이 50세가 넘은 지금도 공연만 하면 유료티켓 판매율 90%를 상회하는 유일한 국내 가수라는 위치를 낳은 밑거름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용필이 가요의 방송시대를 열면서 극장 쇼와 리사이틀 시대는 역사의 뒤켠으로 물러났다. 이곳에서 활동했던 음반 제작자와 매니저들도 1980년대 들어서는 KBS와 MBC 방송국으로 주무대를 옮겼다. 그러나 음악 흐름의 중심이 방송으로 이동하면서, 다시 말해 가요가 산업화하면서 가요계는 그 시절의 인간적 온기(溫氣)를 상실했다. 누구 말대로 지금은 ‘인간적 예술인’은 간 데 없고 오로지 ‘스타’만 존재한다.
극장 쇼와 리사이틀은 바로 공연을 말한다. 우리 가요계가 무수한 역기능에 시달리는 것은 어쩌면 공연이 아닌 방송출연이 음악의 주(主)가 되면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음악은 공연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음악예술의 향기’와 ‘음악산업의 위용’이 화학작용을 만들어낼 것이다. 극장 쇼의 푸근한 뒷얘기들이 지금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던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임진모 <음악평론가> *신동아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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