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눈이 안 종아져서 고향의 할머니 댁에 가있을 때의 할머니의 얘기와 옆집의 연실이 아줌나(삼촌)의 대화를 생각나는대로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할머니는 북한의 김일성과 같은(1912년)해에 제주도 시흥
에서 2남 1녀의 딸로 태어나셨다.
아버지의 남다른 사랑으로 한글과 한문을 배우셨다.
당시 왜정시대에서도 흔치 않는 일로 추정된다.
어릴때 얘기는 별로 없으셔서
여기에 적을순 없고,
당시 제주도의 성산포는 일본의 어느 항구와 뱃길이 있었나보다.
할머니는 처녀적에 일본의 오오사카(대판)에서
군복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당시의 남편(나의 할아버지)을 만나
결혼을 하셨다.
나의 할아버지는 당시에 쇳물을 다루는 압연공장에 다닌것 같다.
왜냐하면 그때에 일본으로 건너간 많은 제주도 청년들이 그런 일에 종사하였고
나의 외할머니의 얘기로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우리 할머니는 2남 2녀를 두셨는데,
6.25 사변만 아니었으면 아들 하나를 더 나셨을거라 말씀하시곤 했다.
왜냐하면 아들 딸 아들 딸 순으로 보아
분명 다음에 자식을 두면 그 차례가 아들이라는 논리셨다.
할머니 말씀으론
우리 할아버지의 성격은 술 담배를 많이 하고
. . ...
의외로 좀 가정적이셨던 것 같다.
우리 아버지가 소학교를 일본에서 다니시다가
제주도로 돌아 왔다가
현재에 인천의 국민학교 동창회에 나가시는 걸로 보아
할머니와 가족들은 일본의 대지진이 있은 후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 온 것같다.
가족들이 제주도에 있다가 인천의 압연공으로 나의 할아버지의 직장을 쫓아
인천으로 온 것이 틀림없다.
할머니의 말로는
당신이 할아버지에게 땅이 흔들리는
나라에서 살기 싫으니 돌아가자고 그랬다고 하셨다.
물론 그때에는 2남 1녀를 두고 계셨는데,
막내 고모는 한국에서 태어나신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어쨋든 인천의 생활도
6.25의 날리 속에 1.4 후퇴 그즈음 나의 할아버지는 돌아 가셨다.
가족들은 제주도로 피난시키고 나의 할아버지만이 인천 집을 지키고 계셨나 보다.
그 난리통에도 할아버지의 형제중에서
동생의 누군가가 와서 충청도에 있는 형수님이 오라고 하신다 해서
충청도에 내려 가셨다 한다.
나중에 운태 아버지에게서 들은 얘기인가보다,
당시의 친북단체인 대한 청년회의 죽창에
나의 큰 할아버지(남섭이 삼촌 아버지)가 충청도에서 돌아 가셨다 하며
3째 할아버지인 황섭이 삼촌 아버지는
북한으로 끌려 가셨다한다.
물론 그 이후의 일은 알 길이 없고...
그 다음에 우리 할아버지는 당시 1950년 12월과 1951년의
그 혹독한 추위와 식량의 부족으로 그 전쟁에 돌던 이질에
걸려 운명하시었다.
그 당시의 주민들 말로는 방안에 피 똥 얘기를 하더라고
시골의 영철이 아버지의 증언으로 알 수 있다.
영철이 아버지는 그 당시 해병대의 일원으로 참전중에 우리 할아버지의 시신을 확인하고 우리 할머니에게
알렸나 보다.
할아버지 제사는 음력 일월 말인데,
나의 할머니는 할아버지 시신을 제주도 온평리로 거두기 위해
배를 빌려 배안에 미역을 싣고 인천으로 와서
그것을 판 비용으로
할아버지 운구를 싣고 고향땅으로 가셨다 한다.
얼마나 기막힌 이야기인가?
그 때 할머니 나이는 40살이었구나!
그럼 86살에 돌아 가셨으니 46년동안 수절 한 것이리라.
그건 그렇고 전쟁의 한 미망인으로 4명의 자녀를 어떻게 키운단 말인가?
당시의 할머니는 그리 넉넉하지 못했나 보다.
어째든 나의 아버지는 성산 중학교를 졸업했고 무슨 고등학교를 중퇴하였다.
온평리 9SS번지는 어떻해서 우리 할머니가 살게되었나.
그러니까, 일본에서 부부가 번돈을 시댁으로 송금하면서
땅을 사달라고 했는데,
땅을 사 두긴 했었는데(난산리밭 포함), 시부모가 팔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땅을 돌려달라고 시부모에게 얘기하자,
결과야 어쨋든 현재 온평리 9XX번지를 우리 할머니에게 주었다고 했다.
시 부모가 판 것은 시골 집에서 바라보이는 현기만 형님네가 살고있는
바로 그 집터와 우리 할머니가 받은 집사이의 밭터를 합쳐서이다.
어느덧, 나의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가정형편상 졸업하지 못하고
인천으로 올라와
목장일이나 두부장수와 같은 일을 하다가
군대가기전에 우리 어머니와 혼약을 하고
그랬나보다.
총각때, 아버진 번돈의 일부를
제주도로 보내어 동생들의 학비와
생계에 도움을 준 것이다.
아버지가 군대를 가고 얼마 안 있어,동생(수광)은 다니던 학교를
더이상 다니지 못해 한 학년을 쉬었다는 얘기로 미루어보아서.
나의 어머니에게 군 시절에 보낸 편지는 엄마의 친구에 의해서
읽혀지고 그 친구의 도움을 받아 서신이 오갔나보다.
사실 어머니는 이름 석자외엔 잘 모르시는 분이다.
어머니의 기억은 예닐곱살에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를 걷고 있다가,
나의 외 할머니에게 발견되어
양녀로 자라났다.
학교를 갈 생각은 엄두도 못 내었으나,
야학도 못 다니게 하셨으므로
어린나이때부터
물질과 농사를 거드셨다.
당시 외할머니도
일본에서 일하던 남편이 회사에서
불의의 사고로 한쪽 팔을 잃게 돼서
보상금과 치료비를 받고 온평리로 돌아와,
매일 술만 먹다가 일찍 삶을 마치었으므로,
외할머니는 그 당시 아들 (현공영) 만 바라보고
우리 엄마와 이모 (양녀 현갑순)를 데리고
그 험한 세상을 살아가셨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나의 할머니, 큰할머니 그리고 외할머니는 86세에 운명하셨다.
큰 할머니가 돌아 가실땐,
나도 시골에 있었는데,
난 눈이 안좋아 문상도 못갔다.
(바로 윗집인데)
큰 할머니는
부자집의 딸이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며느리에게도 좀 엄격한 시어머니셨고,
할머니의 동서들에게도 큰 언니 노릇을 좀 한 것 같다.
말년에는 작은 아들 집에서 시골로 와서
남섭이 삼촌과 운구 이렇게 살다가
아들이 먼저 죽고
운구하고만 살았다.
아마 죽기로 작정을 하셨는지,
일체의 식사를 마다하고 계속 술만 마셨다.
보름이상 술만 먹을때,
나의 할머니가 매일 찾아가
여러가지로 이러면 안된다고 말리셨지만,
죽기로 결심을 하지 않고서야...
다 그러겠지만
아직 20살 정도의 운구가
그 수발을 할 순 없었다.
그 당당하시고 놀기와 술 좋아하시던
큰 할머닌 그렇게 가셨다.
어쨋든 우리 외할머니댁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보상금으로 땅을 사고 열심히 일 한 것 같다.
외할머닌 여자중에서도 힘이 장사인 분이셨고,
일하기를 마다 하지 않고 아들만 바라보고 일을 많이 하셔서
결국 먹을만한 재산을 이룩하셨다.
어머닌 충청도와 경상도 일대의 바다로 물질을 다니셔서
돈을 모으셨나보다.
그 당시의 온평리 처녀들은 모두들 그랬던 것 같다.
우리 어머닌 못 배운대신에 돈을 벌어 외할머니에게 맡겨
시집 갈 밑천을 준비하셨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와 중매가 오고
서울가서 돈 많이 번 사람인 줄 알았는데,
와보니 불알 두쪽만 있는 정도라고 했다.
결혼식 하던날,
아버진 말타고 어머닌 가마 탔단다.
어머닌 시집 올 때 밭 이천평도 갖고왔는데
나중에 측량해 보니 1800평이란다.
물론 어머닌 그 밭을 자신이 죽었을 때 묘를 벌초 할,
소분 밭이라 했다.
우리 어머닌 닭 얘기를 많이 하셨다.
어머니가 친정에 갔다가 온평리 집에 와보면 어머니가 없을 때 만
닭을 잡아 먹었다는 뭐
그런이야기다.
그 당시는 달걀 하나도 귀한 시절이었는데,
우리 할머닌 은근히 시집살이를 시킨 건 사실인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머니에게서 들은 얘기를 흘려버렸음은 마땅한데,
어머니는 가끔 한스럽게
그 얘길 하셨다.
작은 어머니도 결혼해서 온평리 집에 신혼살림인가를 시작했는데,
할머니가
동트기 무섭게 일어나 불을 지피며,
그 불쏘시개 작대기로 벽을 두드리며
이제 그만 일어나라고
했다는 얘길 나에게 했다.
난 생각했다.
말 하는 숙모랑 우리 할머니랑...
하여튼 그래서 숙모는 자신의 친정집 도움으로 동남에 가게를 차려 나오게 됐다고 말 하셨다.
숙모는 50세도 못된 49세 되던 해 돌아가셨다.
암 진단을 받기전에
목구멍이 뜨거워 항시
찬 얼음을 입에 넣어 식히며
목이 굳는 것 같다고 했는데
서울대 병원에서 유방 절제를 하고
투병생활을 하시다 눈을 감으셨다.
나도 인천에서 기창이의 도움으로 문상을 당연히 갔지만,
생각해 보니 큰고모 초상때는 가 보지도 못했다.
부의금으로 30만원 보냈는데 다시 그 부의금이 되돌아왔다.
마음대로 부의금도 못 내는 나!!
자, 외할머니 얘기로 돌아가자.
내가 눈 때문에 제주도 온평리 초가집에서
환자굿을 할 때
와서 이것저것 일을 하시던 생각이 난다.
그런데, 그 때이던가!
우리 아버지가 결혼해서 얼마 안되어
장모인 외할머니를 찾아와서
우리 엄마가 벌어놓은 돈을 달라고 했단다.
그래서 할머니가 궤에서 그 때돈으로 약20만원을 주었다고 했다.
그 돈으로 육지로 가서 셋방 얻고 살림살이
장만했다고 나에게 전해 주셨다.
어쨋든 그 외 할머니가
86세 때에 추석을 지내고 얼마 안되어
돌아 가셨다.
난, 가보지도 못하고...
그 후 이 삼년이 안되어
나의 외삼촌도 위암으로 돌아 가셨다.
자! 우리 할머니 얘기를 더 해 보자.
내가 어릴때,
은주가 태어나던 그 때(1968년 1월초),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 집에 우물이 있는 정씨라는 성을 가진 주인 집에 살았다.
할머니가 어머니의 산후조리를 해 주기 위해 제주도에서 올라오셨는데,
고부간에 갈등이 있어 그런지,
할머니는 3일만에 내려가신다고 아버지께 말했고
아버지는 며칠만 더 해달라고 말해서..;
하여튼 시골에 무슨 일이 있었던지 금방 내려가셨다.
도림2동 이문식 아저씨네 살때 내가 국민학교 5학년 겨울방학 즈음,
막내 고모가 결혼 한다고 해서
우리집 식구 모두가 시골에 갔다.
당연히 고모와 할머니는
돈이 없었고
나의 아버지가 대부분의 비용을 내 놓은 것 같다.
(당시의 큰 오빠 노릇을 제대로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할머니가 나의 큰 동생 은숙이를 시골에
남겨두라고 엄마한테 말했나 보다.
당연히 은숙이 본인한테 물어봤을테고,
누구나 그러하듯, 엄마와 떨어져 할머니와
살겠다는 어린아이는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할머니는
아버지가 서울에서 자취하며 직장도 다녔다가 옷장사도 해보고
이리저리 힘든 삼촌을 시골로 내려가라는 형의 말에
내려온 삼촌과 할머니는 함께 살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한전 전기 수금사원하면서 작은 어머니를 만나 결혼도 하고 했던 아들내외가 동남에 나가 살 때까지;
그 후 할머니는 우리 아버지 내외가 시골로 내려간 (1993년 말)
그 때까지 초가집에서 혼자 살으셨다.
1994년도에 아버지 퇴직금과 나의 삼익아파트 판돈을 합치어 그리고 빚까지 얻어
현재의 집을 지었다.
조금 더 거슬러 되 돌아가서 그 할머니가,
우리가 인천시 부개동에 살때 올라오셨다.
내가 대학을 마치고 회사를 다니다
방위 근무중인 때이다.
할머닌 내가 밥을 다 안먹고 남기면,
물을 확 부어서
어쩔 수 없이 다 먹게 하였다.
난 이런 할머니가 싫었다.
맨날 집에만 있으니
답답하기도 했으리란 생각은 나는 못 하고,
할머니 시골 내려가세요.
그런 말만 했다.
그래서 손주한테 이런 말을 들으니 상심해서
시골로 가서
손주놈의 나쁜 언행을 주위분에게 전하신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난 그 후 오년도 안되어 눈이 아프고 안보이기 시작했다.
할머니, 그 때 잘못했습니다.
못나고 못난 이 손주 용서해 주세요.
우리 할머니는 동남으로 간 작은 아들집에 빈번히 가셧다.
가서 지체장애인인 운일이도 봐주고 여러가지로...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작은 며느리는 매일 오는 시어머니를 걱정하는 투로
매일 온다고 ...
그런 말들을 늘어 놓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매일 동남 작은 아들네로 갔다.
나도 할머니한테 매일 동남에 가지 말라고 한 것 같다.
그러나 나이드신 분의 일상생활이 그건데..
그걸 깨닫기에는 나도 시간과 시일이 필요하고 나이를 먹어서야 알게되었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알게 되는 것들이 있나보다.
내가 맹인학교를 다니던 해에 1995년 음력 12월 말에
이현주의 손을 잡고 고향엘 갔었는데
할머닌 그당시만 해도 마루의 밥상 앞까지 나오셔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해 1996년의 내가 맹인학교 2학년 때,
여름방학을 해서 가보니
방안에 누워계셨다.
물론 누워만 계셔서 그랬을테지만,
욕창으로 냄새와 ...
그래도 정신은 말짱하셨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일하러 간사이에
한번 일으켜 달라고 해서
난 일으켜드렸지만
겨우 앉아있으시다 누울 수 밖에 없었다.
아마 이때 삶을 포기 하셨을게다.
난 서울에서 내려온 이현주와 함께 올라 왔다가
얼마후에 할머니의 부고를 받았다.
사인은 파킨스병이엇다.
장사는 나흘장으로
온평 마을 청년회의 도움으로
공동묘지에 누우셨다.
돌아와 아버지 형제와 어머니는 재산문제로 일시적 언쟁이 있었다.
재작년에 폐암으로 돌아가신 큰 고모께서 밭이라도 나눠 달라는 얘긴 것 같았는데
결국 그러질 못한 것이다.
큰 고모는 울면서 나에게 용돈하라고
십만원을 주셨다.
큰고모 아들인 철범이도 무슨 시계인가 잃어 버려서 찾지 못한 어수선한 상황에서
난 안 받을려고 힘껏 사양한 것은 물론이지만 결국 받았다.
마을 공동묘지엔 할머니 묘와 우리 어머니 그리고 작은어머니
묘가 옹기종기 있다.
찬바람 불고 뜨거운 태양아래서라도,
서로를 아껴주며 용서하시고 고히 잠드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