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넓은 지상에는 인간의 생활을 지탱해주는 보편적 체계와 기술의 총애인 문명이 집중적으
로 일어나는 장소가 있었다. 옛 중국 대륙도 그런 장소 중의 하나였다.
이 대륙은 주변의 다양한 생활양식을 가진 민족이 끊임없이 흘러들어 왔다. 농업밖에 몰랐
던 대륙 민족 사회 속으로 목축을 전업으로 하는 민족이 들어오자,장화를 신고,동물의 힘줄
을 말려 활시위를 만들고,간육을 만들어 먹고, 유제품을 먹는 변화가 일어났다. 유목민족은
주로 전쟁의 형태로 농경민족에게 접촉해 왔다.
또 다른 구체적 풍경으로,야금 기술을 가진 이민족의 유입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이 들
어오면서 화살촉이 금속으로 바뀌었고, 그와 동시에 수렵 생산고가 높아졌다. 또한 나무로
만들었던 쟁기와 곡괭이를 금속으로 대체하면서 농업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졌고, 그에
따라 지배자의 통치 영역도 넓어졌다. 즉, 광역국가가 출현하였다. 광역국가는 통치의 수단
으로서 문자를 필요로 했고, 문자를 구사하는 관료를 만들어냈다. 문자는 사상이나 표현의
도구로서 널리 쓰이게 된다. 그런 야금 기술과 문자를 가진 민족으로, 청동유물과 갑골문자
를 남긴 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은 다음에 일어난주터는 원래 서방의 초원에 있던 나라였다. 그들은 초원의 주인이었던 강
족과 혼재하여 살았는데, 야금 기술은 은보다 뛰어 나지 않았지만, 기마 민족으로서 뛰어난
전쟁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 한 전사나 농민을 수량적으로 파악하는 추상적인 사고력이
있었고, 그것을 목적 달성을 위해 멋지게 활용하는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고대의
민족은 현대의 민족 개념과는 달리 생활양식에 따라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명이란 다양한 생활양식을 가진 여러 민족이 서로의 이질적인 문화를 한 장소에서 녹여
내는 조건이 갖추어진 곳에서 일어났다. 적어도 중국 대륙의 경우는 그랬다. 물론 그 거대한
용광로는 농업을 기반으로 했다. 필자가 속하는 사회 또한 중국 문명의 주변 지역에 속한
다.
초목이 무성한 고대의 이 섬 지방(일본)은 모음을 길게 늘어뜨리는 언어를 가진 소박한
채식생활자들의 근거지였다. 그 곳에 벼농사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왔다. 비금속 계통이지
만 쟁기와 곡괭이 같은 도구와 새끼, 멍석, 짚신과 같은 짚 가공품과 더불어 벼농사에 관련
된 의례도 하나의 세트로 들어왔다. 누구든 그 문화를 세트로 받아들이면 벼농사 생활을 할
수 있었으므로 나름대로 보편성을 가진 문명이라 할 수 있는 데,중국대륙처럼 다양한 생활
양식을 가진 민족들이 혼입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에 문화적 단일성이 강한,
즉 단순한 고대사회가 형성되었다.
항우·유방이 본격적인 활약을 펼친 시대는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춘추와 전국
시대를 거쳐 중국의 고대문명이 형이상학적 사상과 기술문명을 숙성시켰을 때였다. 성숙기
에 든 그 문명에는 근대적인 요소도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다. 전 시대에서 물려받은 사상들
이 사회 속에 뿌리를 내리고, 제각기 교단을 만들어 인재를 양성했다.
사라는 개인도 성립하였다. 사는 사상과 뜻을 가지고 자주적으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는
개인을 가리켰다. 그런 한편으로.정어리 알처럼 균등하고 몰개성적으로 부족이나 가족에 예
속된 고대적인 상태가 바다처럼 널리 퍼져 있었다.
사란 그런 바다와 관련을 맺으면서도 그 현실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는 개성을 가리키는 말
이다.
진 제국을 붕괴시킨 힘은 유민이었다. 그 힘에 방향성을 부여하고 추진시킨 지도자들의 측
근에는 노장사상의 후예와 병가, 유가의 후예 ,또는 종횡가라는 외교 기술자들이 있었다. 적
어도 표면적으로 법가가 없었던 것은 법가주의를 쓰러뜨리겠다는 의식이 잠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1977년 5월에 낙양으로 갔다. 당나라 시대부터 이 거리의 명물이던 목단(모란)도 시들
어가는 계절이었다. 낙양의 구 시가지 민가들은 청회색 벽돌로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그
시가지의 철로 곁 체육관처럼 큰 건물에는 거대한 곡물 저장용 굴이 보존되어 있었다. 1969
년,여기에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지질을 조사하다가 땅 속에서 글이 새겨진 벽돌 하나가 발
견되었다 한다. 그 벽돌에는 '함가창' 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굴은 직경이 11미터, 깊이 7미터. 창이라고는 하나 건물이 아니다. 황토층을 깊이 파고(황
토층에는 물이 나오지 않는다),그 벽에 제습제를 바르고 다진 다음 곡물을 쏟아 붓는다. 그
곡물은 양자강 부근에서 거둔 조세로서 배로 옮겼다. 운하를 타고 황하로 들어가 낙양까지
운송되는 것이다. 쌀은 5년, 조는 7년 보존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구덩이는 하나가 아니
다. 낙양에서만 함가창이 261개나 발견되었다. 나는 그 구덩이 앞에 서서 중국 문명의 즉물
적 발상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나라 현종 시절, 관중의 장안에 흉년이 들자 황제는 그 가족과 백관을 거느리고 이 낙양
으로 온다. 곡물을 나르는 것보다는 황제가 그 구덩이가 있는 곳으로 옮겨간 것이다. 구덩이
의 곡물을 먹어치우는 광경이 생생하게 뇌리에 떠오른다. 현종 때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
다. 그는 낙양을 점령하고 이 곡물창에 집착하여 정세가 악화되어도 이 곳을 떠나지 않았다.
수십만에 달하는 병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
마치 거대한 사발을 묻은 듯한 함가창을 들여다보면서.유방이 항우와 결전을 벌이던 말기에
필사적으로 황하 변의 성고 영양을 고수하려던 그 행동의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특히 진
제국은 영양성 서북에 있는 오산에 벌집처럼 구멍을 뚫어 곡물을 저장했다. 오산의 곡창을
총칭하여 오창이라 한다. 유방은 항우의 맹렬한 공격을 받으면서도 그 오창을 포기하지 않
았다. 유방의 승리 원인을 회화적으로 단순화하면, 이 오창의 고수에 있었다 할 수 있다.
함가창을 바라보면서 유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중국 대륙의 역사를 보면 몇백 년에 한
번 정도 심한 기근이 일어난다. 파란 풀 한 포기 찾아 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마을 전체가
유민이 되어 다른 마을을 습격하고,습격 당한 마을은 또 유민이 되어 다른 마을을 습격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이른바 영웅이란 그런 상황 속에서 태어난다. 어디 어디5000 명 정도는
먹여 살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모두 그 아래로 모여든다.
이윽고 그 수령이 5000명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게 되면. 사방으로 눈을 돌려 5만 명을 먹
여 살릴 수 있는 수령을 찾아 그 휘하에 들어간다. 마지 막에는 100만의 생활을 보장하는
자가 가장 큰 세력을 거느리게 되는데 이런 존재를 중국에서는 영웅이라 한다.
중국 정치의 1차적인 목적은 인민을 먹여 살리는 데에 있다. 왕조가 멸망할 때 유민이 대거
발생하고,그 동란 속에서 유민을 먹여 살리는 수령이 나타나 옛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만든다. 다시 말해.먹여 살릴 능력을 잃어버린 왕조에 대해서는 천명을 바꾸어버린다
(혁명).그리고 다른 능력자에게 천명을 내리는 것이다. 영웅이라면 실제로 먹여 살리지는 못
하더라도 먹여 살리려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자세에서 중국사는 수많은 정
치철학과 정책론을 만들어 왔다.
항우는 초나라 사람이다. 초나라 사람들은 오랜 세월 양자강 언저리에서 벼농사를 주로 하
며 살던 민족으로 중원 사람들과는 언어가 다르다. 일 설에는 고대 타이어를 사용했다고 한
다. 넓은 의미에서 초 민족의 일파인 오와 월은 이미 항우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양
자강 하류의 오월 문화권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쪽과 일본 규슈 지방에 벼농사를
전파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초 민족의 민속과 기질은 같은 벼농사 문화를 가진 탓인지는
몰라도 고대의 일본 민족과 비슷한 점이 많다.
중국의 고대문명이 다양한 문화를 가진 민족의 혼재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는 가정이 타당하
다면,초는 중원에 대한 최후의 이문화였다. 다만 이 시기에 이미 중원에서 발명된 문자와 문
장표현을 그대로사용하였고. 반쯤은 중원문화에 동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원과는 생산양식
이 다르고 왕조 제도도 다르며, 농민의 문화나 기질도 크게 달랐다. 이러한 초나라 사람들이
항우의 지도 하에 홍수처럼 황하유역의 중원 지역을 도발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을 것이
다. 그런 의미에서 중원문명이라는 거대한 용광로 속에 초 민족의 벼농사문화와 어업문화를
던져 넣은 행위라 할 수 있고,그런 의미에서 항우의 활약과 그 허망한 멸망은 이 대륙의 고
대문명 형성의 마지막 정리이면서 범중국적 문화의 첫 출발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항우
는 BC 202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시대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던 시기에 사마천이란 역사 기록자가 나타났다. 그는 송대
이후의 학자보다도 더 오늘날에 가까운 감각으로 사람과 사물을 관찰하고 분석했다. 아마도
그가 20세 때였을 것이다. BC 126년경에 천하를 여행하였다. 이 여행에서 그는 역사의 현장
을 방문하여 기록과 민속과 전승을 직접 보고듣고 채집하였다. 그가 현지에서 적극적인 취
재활동을 벌였음은 『사기』에 빈번히 등장하는 속어로 상상할 수 있다. 관념어와 개념어를
배제하고 그 지역 노인들의 어투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이 여행에서 한 · 초의 사람과 말이 서로 뒤엉켰던 파현, 설현, 패 성현도 그는 방문했다.
양자강 하류와 강남과 같은 초의 근거지로 가서 이질적인 가옥, 풍습, 인정을 접하고 친근감
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멸망한 초나 항우에 대한 감정이입이 농후하다는 것도 그 문장
의 위기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문명을 하나의 광원 이라 생각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 광원을 활용한다. 활용할 수 없
는 것은 문명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대중국 사회는 이미 정신적 문명의 발원이었다. 그
러므로 외국사람인 나 또한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그런 친밀감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다만 먼 시대의 일이라 사람과 사건을 일일
이 조사할 수 없어 사기와 한서를 참고로 하여, 사람들을 둘러싼 풍습, 공통적인 사고방식,
윤리적 습관 등을 나름대로 상상하고 추정해 보았다. 이 작품은 소설 신초에 「한의 바람,초
의 비」라는 제목으로 연재(1977년 1월호∼1979년 5월호)한 것이다. 단행본으로 출판하면서
제목을 바꾸었다.
1980년
시바료타로
// 나는 이 소설의 저자 후기를 먼저 읽어 봄으로써
오행에서 "금"이라는
얘기를 시작하려 한다.
금은 쇠를 의미한다.
인간의 역사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지략도 중요하지만
상대방보다 강한 무기가 필요한대,
그 대부분의 무기재료는 철로 만들어져 있다.
철을 제련하고
응용기술을 가진자 또는 국가만이
앞서나가고 물질적 풍요로움을 가질수 있다.
우리나라의 신라가 금관가야와 대가야를 흡수하여
창검을 만들수 있는 자원을 확보하지 않았던들
삼국통일의 주역은 그리 쉽지 않았고,
임진왜란의 쓸라린 고초는
결국 철의 응용 산업기술이
일본에게 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도 우리나라의 기계공업이
일본에 뒤져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맞는 말일것이다.
///
한의학에서 오행의 금에 해당하는 장부는 폐경 과 대장경 이다.
금기(金氣)가 태과한 해에는 마른 기운이 유행하며 간이 나빠지고 복통이나 안질이
생기고 가슴이 아프며 등줄기가 당긴다.
기(氣)를 많이 받으면 초목이 오그라들고
파랗게 말라 버린다.
다음은 철에 대한 여러가지를 정리해 보았다.
글 마지막에는 이것에 대한 출처를 밝혀 놓았다.
1. 철의 기원
고고학에 의하면 철의 기원은 인류가 불을 사용하여 철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가공온도를 갖고 있는 청동을 가공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철은
부식하기 쉬운 성질 때문에 오래된 유품이 별로 없고 따라서 정확한 철기문화의
시작시기를 추정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신석기시대의 인류는 돌을 갈아서 무기나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나 그 후 불을 사용하여 동, 청동을 가공하여 돌을
대신하여 사용하였다. 이후 청동보다 강하고 날카로운 날을 세울 수 있는 철의
사용이 시작되었다.
최초로 철을 알게 된 것은 청동기 시대에 철광석을 동광석으로 착각하여 용해로에
장입, 용해하는 과정에서 발견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한편으로는 고대 원시림의
산불에 의해 철광석이 환원되어 반용융상태로 굳어진 것을 산불이 지나간 후에
장인들이 채취하여 철기로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고대 희랍인들은 철을
'와에베'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것은 '하늘의 산물'이라는 뜻으로 '운석'을
의미한다고 한다. 운석은 철(Fe)과 니켈(Ni)의 합금으로 되어 있다. 운석을 분석해
본 결과 그 안에는 철 이외에도 니켈성분이 4-20% 함유되어 있고 코발트(Co) 성분이
0.3-1.6%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되어 있다.
고대 중국에서도 기원전 14세기의 유물에서 청동기의 칼날 부분에 운석을 붙여
사용한 제품이 나온 것으로 알려져 인류가 최초에 사용했던 철은 운석이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설에 의해 철이 탄생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철을
광물에서 제련하게 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왜냐하면 이전까지 철을 녹이기
위한 온도를 쉽게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鐵器時代 Iron Age
인류물질문화 발전 단계에서 연모를 철기로 만들어 썼던 시기.
철은 다른 금속에 비해 원료가 흔하지만 원석으로부터 철을 추출하는 데는 높은 열을
필요로 하므로 어느 정도의 기술발전 없이는 만들기 어려운 만큼 청동에 비해서 늦게
사용되었다. 한편 초기철기시대는 본래 자체적으로 제작하기에 앞서 밖으로부터
철기를 들여다 쓰기 시작한 시대를 말한다.
철의 발상지는 서남아시아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알려져 있고 그곳에서 BC
3000년경부터 철기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때는
자연철(自然鐵:隕鐵)을 이용해 두드려 만든 것으로 철기의 생산은 소규모였다.
그후 BC 15세기 무렵에 건설된 히타이트 제국에서 철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게
되었는데 철을 독점 생산하여 강한 무기로 무장한 전투력을 갖고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BC 12세기에 히타이트 제국의 멸망과 함께 철생산 기술이 서아시아 여러
나라로 전해짐으로써 철기가 널리 보급되었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에서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인 BC 5세기부터 철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서아시아로부터 전해온 것인지 또는 중국이 자체적으로
제철기술을 발전시켰는지에 대해 논란이 많다. 그런데 서아시아의 철기는 단조(鍛造)
방법으로 만드는 데 비해 중국에서는 처음부터 주조(鑄造)에 의해 만들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자체적으로 철기를 만들어 쓴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의 철기시대
북쪽지방의 철기시대 유적에서 명도전(明刀錢)이 나온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철기문화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명도전은 중국 북쪽에 자리잡고
있던 연(燕)나라에서 만든 금속화폐로 연나라와의 교역관계를 보여주는 증거물인데,
그 출토지가 산둥[遼東] 반도에서 시작하여 압록강 중류를 거쳐 청천강 유역에까지
이른다.
2. 철의 역사
철을 제련하는 방법은 처음에는 광산에서 캐낸 철광석 덩어리 위에 장작을 태워서
얻은 열로 녹이는 단순한 방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장작대신 목탄을 쓰게
되었으며 온도를 높이기 위하여 풍구를 이용하거나 또는 간단한 노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철의 역사는 철광석을 녹여서 철기를 만들었던 기간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선철이나 강철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4세기 초에 처음으로 목탄을 사용하는 용광로로 이용하여 선철을 만들기에
이르렀으며 18세기에 비로소 목탄 대신에 코크스(Cokes)를 사용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 낸 선철은 단단하기는 하지만 잘 늘어나거나
펴지지가 않았기 때문에 두드려서 일정한 형태의 모양으로 만들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철을 좀 더 여리게 하는, 즉 기계적, 물리적 성질을 향상시키는 여러 가지
방법이 연구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석탄을 사용하여 선철을 연하게 하는
교련법(Puddle Process)이 1784년 영국의 헨리 코트(Henry Cort)에 의해 발명되었다.
이후 1856년에 영국의 베세머(Henry Bessemer, 1813-1898)는 용해된 선철에서 강철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전로(Converter)를 개발하였다. 1864년에는 영국인
지멘스(Wilhelm Siemens, 1823-1883 / Friedrich Siemens, 1826-1904) 형제가
평로제강법을 특허로 얻은 것을 프랑스인 마틴(Pierre Martin, 1824-1915)이 이를
더욱 발전시켜 19세기 후반에 1,600℃이상의 고온에서 정련된 강을 대량으로 제조할
수 있는 근대적 제련법의 기반이 확립되었다.
그 후 제강기술이 급속히 발전하여 1954년 오스트리아의 린스(Linz)와
도나비츠(Donawitz) 두 개의 공장에서 산소전로(두 공장의 머리글자를 따서
LD전로라고도 부름)가 상업화 됨에 따라 근대적 제련법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3. 제철기술의 발달과정
철로 만들어진 도구가 출현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1100년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그
당시 제철기술은 내화성이 있는 돌로 만든 연로(Bloomery)에서 숯불로 철광석을
환원시켜 철을 녹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가열온도가 지금처럼 높은 상태로
만들기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당시 만들어진 철은 철광석이 반쯤
용해된 상태로써 두드려서 철 이외의 성분을 제거, 단철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오랜기간이 흘러 14-15세기 무렵 유럽 독일지역에서 목탄을 원료로 하는
고로가 만들어졌는데 수차를 이용하여 바람을 일으켜 고로 안에 강한 바람을
불어넣어 온도를 높여서 선철을 만들어냈다. 선철은 탄소를 1.7%이상 함유하며 보통
3-4%를 차지하고 있고 순철의 용융점이 1,520℃인데 반해 선철은 1,200℃까지
낮아진다. 이렇게 하여 선철을 쉽게 만들수 있는 용광로(고로)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선철은 탄소성분이 높아서 주조는 가능했으나 단조는 어려움이 많앗기 때문에
목탄고로에서 만든 선철을 연로속에 목탄과 함께 넣고 다시 연소시켜 탈탄하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이것을 정련로라고 하는데 이와 같이 고로에서 선철을 만들고
정련로에서 탈탄시켜 가단철을 만드는 2단계 제철법이 현재 제철법의 기본이 되었다.
그 후 이 제철법은 유럽대륙에서 영국으로 넘어가면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영국에서 고로에 의한 제철소는 물동력 이용과 자재운반의 편리성 때문에 강의
물줄기를 따라 세워졌고 셰필드(Sheffield)가 그 한 예이다. 그러나 목탄을 사용하는
고로는 목탄공급이 큰 문제였다. 영국 잉글랜드지역에서 석탄이 많이 나왔고
16세기부터 석탄을 일반연료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석탄을 제철원료로 이용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제철원료로 석탄이 사용되기 어려웠던 점은 석탄속에 함유된 유황(S)성분이 철에
흡수되면서 철이 물러져 못쓰게 되기 때문에 유황성분 제거가 문제가 되었다. 또한
석탄은 목탄보다 연소가 힘들고 회분이 많은 것도 있기 때문에 고로내부가 막힐
염려가 있었으며 고온에 견디는 노의 건설도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점은 1709년
에이브라함 레비 I세(1677-1717)가 처음으로 코크스를 사용한 고로제철에
성공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코크스로 제조된 선철은 인(P)과 유황이 아직도 많이 함유되어 주철로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목탄철에 비해 품질이 떨어졌다. 1735년 레비 II세는 단철용 선철제조에
성공했으며 1776년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원리를 이용하여 기존 수차를 대신하여
강한 바람을 고로에 불어 넣을 수 있게 되었고 같은 해 헨리 코트에 의해 정련법의
대혁명인 퍼들법이 발명되면서 코크스고로는 점차 증가되어 18세기말에는
코크스고로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철제품을 만드는 원료인 단철은
그 때까지도 선철을 목탄으로 정련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고로에 코크스를 사용했어도
전체적으로는 목탄소비가 많았었다.
18세기 이후 주철주조에 반사로에서 주철을 재용해하는 기술이 상업화되어 철주조에
많이 이용되었고 콜부룩데일(Coalbrookedale)제철소의 기술자였던 크레이니지(G.&T.
Cranage)와 오니온(Peter Onions)에 의해 반사로에서 석탄을 사용하여 선철을
정련하는 방법이 기초되었고 1784년 헨리 코트가 이 선철정련기술을 완성시켰다.
노내부의 선철은 화염의 반사열로 용해되므로 석탁과 직접 접촉되지 않으며 용해한
선철은 화염의 산소에 의해 탄소가 산화되어 제거되는 한편 철은 탄소를 잃으면
용융점이 높아져서 유동성을 잃게 되어 쇳물이 스스로 섞여지는 능력을 잃게 되므로
휘저어서(Puddling) 반응을 진행시켰다. 따라서 이러한 방법을 퍼들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헨리 코트는 이 정련법을 종래의 두드림에 의한 단조가 아닌 증기기관에
의한 압연공정과 결합시켜 판이나 봉을 강력한 롤러사이로 여러번 통과시켜 단조하는
방법을 확립시켰다. 퍼들법에 의해 정련된 단철은 품질이 우수해 퍼들철 또는
연철이라고 불리우며 주철 대신 구조물에 많이 사용하게 되었고 1850-1860년 이후 약
50여년동안 연철의 시대를 누렸다.
19세기 접어들어 유럽의 제철은 영국을 선두로 각국이 코크스고로, 퍼들압연법 등을
도입하면서 급속히 발전했고 유럽내 철도의 확장에 의해 더한층 가속화되었다.
1828년 닐슨(James B.Nielson)은 종래의 냉풍을 대신해 열풍을 이용한 고로조업법을,
나스미스(James Nasmyth)는 증기해머를 발명하여 제철규모는 더욱 확장되었다.
그러나 철생산에 커다란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즉, 고로는 냉풍대신 열풍으로
이용하게 만들 수 있었으나 이 고로와 압연기 사이에 있는 퍼들로는 더 크게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퍼들로의 작업은 사람의 손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고로와 같은
진보는 불가능했었다.
이러한 문제점은 1856년 베세머에 의한 전로의 발명으로 해결되었다. 퍼들법은
정련의 특수성 때문에 일반적으로 탄소성분이 적은 연철이 제조되었으나 베세머
전로는 노밑에서 공기를 계속 불어넣어 얻어지는 높은 정련온도에 의해 탄소성분이
높은 선철을 만들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탄소성분이 적은 단철도 쉽게 만들 수
있었다. 베세머전로의 발명은 고로와 더불어 정련로를 원하는 크기로 만들 수 있게
하였고 이후부터 고로, 제강로, 압연기 등이 갖추어진 근대제철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 후 평로가 발명되었다. 강의 정련을 위해 기존 퍼들법으로는 1,500-1,600℃까지
올리지 못했다. 1864년 마틴은 1856년 런던에서 지멘스형제가 발명한 축열로를
이용하여 강을 제조하는 지멘스 마틴법, 즉 평로법을 발명했다. 전로법과 평로법은
근대 제강법의 두 축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해결이 안되는 것이 인(P)이었다. 인은
철강에 함유되어 품질을 저하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인이 많이 함유된 유럽의
철광석은 퍼들법으로도 정련되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를 재판소 서기직으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화학을 공부한 토마스(Sidney Gilchrist Thomas, 1850-1885)에 의해
해결되었다. 토마스는 돌로마이트(Dolomite)와 타르(Tar)로부터 내구성있는 염기성
내화재 제조에 성공했던 것이다.
이 내화재를 전로내부에 붙여 정련할 때 석회를 넣어 슬러지를 강한 염기성으로
만들면 노바닥으로부터 공기가 뿜어나와 용철이 강이 되고 탄소가 줄어들면서 강중의
인이 단번에 슬러지에 흡수되어 석회와 결합하게 된다. 토마스는 이 연기성 내화재,
연기성법 및 후취 등 세가지를 결합하여 새로운 제강법으로 탈인을 해결했으며 이
방법을 토마스법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19세기초부터 강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인류역사의 각 단계는 노동에 사용되는 도구를 만드는 재료에 의해서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관습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도 당연히 철기시대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구조용 재료의 90% 이상이 철을
기본소재로 사용하여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철광석은 보통 30 ~ 70%의 철분(Fe)을 함유한 광석을 의미한다. 좋은 철광석이란
철분이 풍부하고 황(S), 인(P), 동(Cu)과 같은 유해성분이 적으며 크기가 일정한
것을 들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이상적인 철광석은 그리 흔하지 않고 원산지에 따라
품질, 성분, 형상이 각기 다르므로 그대로 고로에 투입할 수는 없다. 따라서
고로조업에 투입하기 전에 품질을 고르게 하고 철광석 가루를 일정한 크기로 만들어
내는데, 이를 소결공정이라 한다.
[석탄(원료탄)과 코크스 공정]
코크스는 석탄을 코크스로(爐)에 넣어 1,000 ~ 1,300℃의 고온으로 장시간 구운
것으로 철과 산소의 화합물인 철광석을 고로내에서 녹이는 열원인 동시에 철분을
철광석에서 분리시키는 환원제로서 필수 불가결한 역할을 한다.
[제선공정]
고로(용광로)는 제철소의 상징이며 심장으로 일컬어 진다. 철광석(소결광), 코크스,
석회석은 고로 윗부분에 넣어져 서서히 아래로 떨어진다. 이때 코크스는 고로
밑부분에 유입되는 열풍에 의해 연소되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산화탄소(CO)가
철광석과 환원반응을 일으키면서 쇳물이 생산된다. 즉, 코크스는 철광석을 녹이는
열원으로서의 역할과 산화철인 철광석에서 산소와 쇳물을 분리시키는 역할을 한다.
고로에 장입된 철광석이 쇳물로 나오기까지는 5 ~ 6시간 정도가 소요되고, 이때
쇳물의 온도는 1,500℃ 정도이다.
[제강공정]
고로에서 생산된 쇳물(용선)은 탄소(C) 함유량이 많고 인(P), 유황(S)과 같은
불순물이 포함되어 있어 부스러지기 쉽다. 이러한 쇳물을 강인한 강(鋼)으로
만들려면 탄소의 양을 줄이고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러한 과정이
제강공정에서 이루어진다. 제강공정은 용선예비처리, 전로제강, 2차정련이라는
세가지 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용선예비처리는 쇳물에 포함된 불순물 인과 유황 성분을 제거하는 공정이다.
둘째, 전로제강공정은 전로에 쇳물을 부은 후 고압, 고순도의 산소를 불어넣어
탄소를 태우고 불순물을 없애는 공정으로서 철강의 기본적인 품질을 결정하는
공정이다. 마지막으로 2차정련은 최종제품 내부품질(성분, 재질 등) 요구조건에 맞게
제어하는 공정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철기시대가 금세기
초에 끝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철의 본격적인 발전은 19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사실상
1800년대의 연간 세계 철의 생산량은 50만톤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말에는 약 350만톤이 되었으며 앞으로 2000년에는 연간 약 8억-9억톤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현재 철의 용도는 수력발전소, 송전탑, 고층건물의 철골, 선박, 자동차, 비행기 등은
물론 수도관, 송유관, 가스관, 하수도관 및 화학공장의 반응탑 등에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또한 철은 모든 공업의 핵심이 되는 금속가공용 공구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사용하는 통조림통, 칼, 못, 바늘 등 어디에서도 사용된다. 그러나 철은
전차, 대포, 기관총, 군함, 로켓 등 군사용 무기에도 사용되어 많은 파괴와 살인을
자행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한 국가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주요 재료인
철의 생산량에 의해 결정되어지고 있다.
지구상에는 철의 매장량이 77경 5천조톤 이상이라고 추정되어지고 있다. 향후 철을
부분적으로나마 대체할 수 있는 재료들, 즉 비철금속, 합성수지, 신소재합금 등이
등장하고 있지만 철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재료가 나오기까지 상당기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며 그 때까지는 철의 시대는 계속될 전망이다.
자료 제공:
포항공대 철강대학원
이것은 시각장애인을 위해서 서적과 다른 홈페이지를 참고하여 일부 내용을 발췌하여 정리 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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