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아니하는가
  우리도 그치지 마라 만고상청하리라.
  (도산십이곡 중에서)

퇴계의 문제 의식

퇴계(1501-1570)는 도학을 일으키는 것을 일생의 사업으로 삼았다. 그는 자기 시대를 말세라 생각했고 그런 까닭에 도학을 일으켜야 하는 사명은 더욱 저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런 시로써 자신의 문제 의식을 밝혔다.

  말세에도 천도는 바뀌지 않나니
  우리 동방은 성인이 살고자 했던 곳이다.
  노나라의 기풍은 오히려 변할 수 있으나
  기자의 가르침은 어찌 헛되어 없어지겠는가.


  앞사람은 문장을 꾸미는 것에만 뛰어났고
  지금의 사람도 술업이 성글기만 하다
  어느 누가 능히 스스로 분발해서
  도를 샐행하며 경서를 향할 것인가
  (퇴계집)


퇴계가 말하는 말세는 중국에서 시작된 것이다. 당시에 명나라에서는 주자가 완성한 성리학의 도통이 끊겼다. 나흠순이 나와 심학을 제창하였고 왕양명이 시작한 양명학이 성행하였다.
이것은 퇴계의 견지에서 보면 비판하고 경계해야 할 사태였다.
공자의 나라인 노나라의 기풍으로 유학의 종통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중국이 이렇게 변하였으니 퇴계는 이제 동방이 도학의 본고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퇴계는 우리 나라를 가리키는 '동방'이 옛날에 공자가 와서 살고 싶다고 한 곳 (이 말은 논어에 나온다)인 데다 기자(기자 조선의 시조)의 가르침이 남아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능히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비록 말세라 하더라도 천도는 바뀌지 않았으니 어디에선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는 신념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퇴계는 동방에서도 도학이 올바르게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고 생각하였다. 앞의 시에서 '앞사람은 문장의 꾸밈'에만 뛰어났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선비로서 문장에 힘을 쓰고 문장에 탁월한 실력을 보인 예는 적지 않았지만 퇴계는 문장을 꾸미려는 태도야말로 도학을 해치는 원흉이라고 보았다.
퇴계는 또 선비라면 마땅히 학문에 힘쓰고 도를 실행하여 경서의 근본에 도달해야 하는데도 그 모범을 보인 이가 많지 않고 그나마도 온전히 이루지 못하여 '성글다'고 한탄하였다.
퇴계는 유학을 공부했던 사람으로 이색, 정몽주, 권근, 김종직, 조광조, 서경덕 들을 꼽고 그들의 노력을 치하하면서 그 뒤를 잇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이루어야 할 것을 온전하게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불행하게 죽었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크다고 생각하였다.
이색은 스스로 불교에 반대한다면서도 불교를 다룬 글이 많고 또 자세한 반면에 유학에 대해서는 적확하지 않는 말이 많아 문장에 환설이 많다고 퇴계는 비판하였다.
유학에서는 불교를 비판하는 것이 우선적인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종직에 대해서는 "학문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종신토록 힘쓴 것은 문장의 꾸밈이었다는 것은 문집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비판하여 문장에 힘쓰는 것을 불교 다음으로 배격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강조하였다.
정몽주는 절의를 실행하기는 하였으나 저술을 남기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고 권근은 '입학도설'을 통하여 천인 합일의 원리를 보여주기는 하였으나 무리하게 끌어댄 점이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조광조가 뜻을 펴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해서는 아주 애통하게 생각하며 불행한 일이라고 하였다. 또 서경덕에 대해서는 사물의 원리를 꿰뚫어보는 데에는 이르렀지만 성현의 생각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선배 학자들의 한계는 퇴계가 자신의 길을 정하는 데 지침이 되었다.
그는 동방에서 도학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여겼고 그 사명을 수행하는 것을 자기의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퇴계는 공자부터 주자까지 이어진 성현의 가르침을 돈독하게 믿고 따르리라고 다짐하면서 무리하게 끌어대거나 성현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나가지 않으려 하였다. 또 스스로 안다고 자부하지 않고 항시 겸허하고 신중한 태도를 지켰다.

사화의 시대

퇴계가 일생의 사업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일으키겠다고 한 도학은 인간 윤리의 내면을 밝혀 인간의 도리를 극진히 하는 것을 본령으로 삼는 것이다.
즉 권력이나 이해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한 인간의 본성을 구현하여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정치적인 이상을 이룩하려는 것이다. 이익보다는 의리를 앞세우고 도심(양심)을 높이고 인욕(욕심)을 누르는 표준을 세우려는 것이 도학의 정신이다.
그러자면 끊임없이 인격을 수양하고 학문을 연마할 필요가 있었다. 이처럼 도학의 정신은 단순한 윤리 차원을 넘어서 일종의 종교적 정서마저 내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퇴계가 살았던 시대는 사화로 얼룩진 시대였다. 권력 투쟁과 사화로 정의와 불의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퇴계가 출생하기 3년 전에 무오 사화가 일어나고 퇴계가 4세 되던 해에는 갑자 사화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또 19세 때에는 기묘 사화가 일어나 혁신 정치가 조광조가 죽음을 당하였고 그가 벼슬길에 올라 활동하던 시대에도 이러한 사화의 후유증이 뿌리깊게 남아 있었다.
45세 때에는 을사 사화가 일어나 퇴계의 바로 웃형이 죽음을 당하였고 퇴계 자신도 연루되어 관직을 잠시 박탈당하였다.
퇴계는 과거에 급제하여 환로에 올라 벼슬이 대제학까지 이르렀으나 사화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 정계에서 뜻을 펴려고 애쓰기보다는 물러나 학문에 몰두하며 교육에 힘쓰는 것이 더욱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50세 이후의 말년에는 은퇴하여 고향인 도산에 머물면서 학문에 몰두하며 도학의 명분을 밝히고 더 나아가 인재를 교육하며 의와 이가 혼돈된 사회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분명히 하여 학문적으로 진리를 밝히고 가치 체계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는 어둡고 험한 사회를 진리의 빛으로 밝혀 만민을 도탄에서 구하려는 결의와 사명감에 불타 진리 탐구와 영재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한 수양이었고 스스로가 완벽한 도를 실현하는 이상적인 인격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의 밑바탕에는 적극적인 학문과 교육을 통하여 진리의 표준을 높이 드러내고 사회를 바로잡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는데 그런 의지야말로 퇴계 학문의 근본적인 동기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퇴계의 학문이 인륜 도덕을 바로잡기 위한 경 사상의 수양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성인의 학문을 배워 성인이 될 것을 목적으로 하다

한국 성리학의 특징은 한국의 전통 사상인 하늘과 하나인 인간을 전제로 삼아 하늘의 큰 성질을 체득하여 인간에 깃들인 천지의 기운과 만물의 이치를 마음에 포용하여 운용하는 것인데 퇴계의 사상에는 한국 성리학의 이러한 발전 과정이 압축되어 있다.
철학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삶 자체를 문제삼을 때 동양에서 가장 중심적인 문제로 등장하는 것은 '죽음'의 문제 즉 인간의 핑연적인 한계의 문제이다.
그런데 유학에서 문제삼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인 삶이고 또 이러한 사회적 삶을 온전하게 할 수 있는 학문(유학에서 학문이라 함은 대학 즉 철학을 말한다)과 수양이다.
유학에서 '죽음'의 가치는 바로 삶의 내용과 가치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죽음보다는 삶이 중요하며 또 삶의 내용과 질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말하자면 삶의 질로써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것이다. 개인으로 볼 때 최고의 삶은 이상적인 인격자인 성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인이 되는 것이야말로 모든 유학자의 최고의 이상이었다.

퇴계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의 죽음을 보고 세월을 탐내어 한탄하고 학문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세속의 비루한 생각이다. 주자는 옛 친구의 부음을 들으면 언제나 더욱 뜻을 가다듬어 학문에 정진하였다고 한다(퇴계집)
퇴계의 생각에 의하면 정진해야 한다는 학문의 목적은 '죽음에 대한 슬픔'의 극복이고, 이는 곧 성인이 됨을 뜻한다.
퇴계는 "학문을 함에 그 방도를 알고 노력을 중단하지 않고 오래도록 익혀 완성해 나가면 거의 인생의 일대 환희사를 얻을 수 있다"고 하여 학문의 완성을 일생 일대의 환희사로 추앙하고 있다.
또 "기에는 생사가 있고 이에는 생사가 없으므로" 이를 잘 배워 이에 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요컨대 퇴계는 학문의 완성을 가장 기쁜 일이자 죽음을 뛰어넘는 일로 본 것이다.
생사가 없다고 한 이는 물론 '영원 불변의 진리'를 뜻하고 생사가 있다는 기는 일희 일비하는 인간 세상의 일을 말한다.
학문은 자신의 마음과 이가 하나가 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즉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고 달리 말하자면 도를 깨우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룬 사람이 바로 성인이다.
퇴계는 더운 여름철에도 방문을 닫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에 몰두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더위에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염려하면 "이 책을 연구하니 마음이 시원해지는데 더위 같은 것이 무슨 걱정이겠소" 하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다.
퇴계는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태극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이어서 본래는 성인과 우매한 인간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우매한 인간들이 인간사에 얽매여 그 본성을 빼앗겼기 때문에 어리석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본체(양심)를 온전히 하여 이와 일체가 되면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 학문에 정진하고 마음을 닦아야 한다. 퇴계는 '도산십이곡'에서 이렇게 읊었다.

  당시에 녀던 길을 몇 해를 바려 두고
  어듸가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온고
  이제나 도라오니 년뒤 마음 마로리(후육곡 4)

'당시에 가던 길'이란 물론 성인이 되는 학문의 길이고 '어디가 다니던 길'은 정치에 참여했던 일을 말한다.
이 시에서 퇴계는 잠시 학문의 길을 중단하고 정치에 참여했던 것을 후회하며 이제 돌아왔으니 다른 마음 먹지 않고 오직 성인이 되는 학문의 길에 전념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퇴계학은 성인이 되기 위한 과정이고 거리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수양이다.

자연의 도에서 사회 인륜의 도를 세우다

성인이 되는 것을 학문의 목표로 세운 퇴계가 배우고자 했던 것은 이였다.
그는 '이는 귀하고 기는 천하다'고 생각했다.
퇴계는 도덕적 당위로서 이가 확고한 근거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을 철학의 주된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언제나 이가 기보다 선행하고 능동적인 작용을 한다고 하였다.
즉 당위가 존재보다 우선할 뿐 아니라 중요하다는 것이다.
퇴계가 열두 살 때였다. 그는 숙부에게서 '논어'를 배우고 있었다.
한번은 이 '논어'에 나오는 '이'라는 글자에 대하여 문득 환한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숙부에게 물었다.
"숙부님 '이'라는 글자의 뜻이 무엇입니까?"
"글쎄, 잘 생각해 보아라. 무엇을 뜻하겟느냐?"
그러자 퇴계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일의 타당한 것이 '이'입니까?"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숙부는 크게 기뻐하며 이미 글 뜻을 이해하고 있다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퇴계의 말을 빌자면 이란 '옳은 것' 그리고 '지당한 것'이다.
즉 '영원 불변의 진리'를 말한다. 천지 자연은 무심히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는 식으로 운행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만드는 까닭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자동차를 밖에서 보면 저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 운전자가 잇는 것처럼 천지 자연을 움직이는 운전자가 있고 그것이 바로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는 바로 사람의 내면에 있는 이치이고 사람이 지켜야 할 바른 도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퇴계는 이를 배워 이에 도달하는 것을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는 형체도 색깔도 냄새도 없기 때문에 직접 인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현이 이라고 한 것이 이이다.
그래서 퇴계는 사물을 직접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자부하지 않았고 또 설사 안다 해도 오직 성현을 따르는 것이 가장 온당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맥락에서 퇴계는 말했다.
"어리석고 고루하며 소견이 막혀서 다만 성현을 독실히 믿을 따름이다"라고.
율곡은 퇴계를 가리켜 "주자를 한결같이 따랐다"고 하였다.
퇴계가 견지한 학문하는 방법을 본받는 것 즉 의양이라고 한다.
원래 송대 성리학의 이기론은 천명을 인식하기 위한 우주론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인데 이 이기론이 우리 나라에 수입되면서 인간학적으로 해석된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의 전통 사상에 따르면 '하늘과 내가 이미 하나'이므로 따로 하늘을 알기 위한 인식론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하늘의 큰 성질이 내포되어 있는 인간의 내면 구조를 밝히고 내면의 수양을 통하여 심성의 이를 밝혀 실현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심선의 이가 바로 성인데 성의 내용은 인의예지이다.
그러나 이 인의예지는 우리의 본성에 구비되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형이상학적인 이이기 때문에 감각이나 의식으로는 파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수양의 대상은 인의예지가 직접 드러난 네 가지 마음으로 옮겨간다.
어진 마음인 인이 발현된 '측은지심'(불쌍히 여기는 마음), 의로운 마음인 의가 발현된 '수오지심'(부끄러워하는 마음), 질서를 존종하는 마음인 예가 드러난 '사양지심'(사양하고 양보하는 마음), 지혜로운 마음인 지가 발현된 '시비지심'(옳고 그를 것을 가리는 마음)이 바로 그것인데 본성의 네 가지 측면이 마음의 단서로 나타났다 하여 '사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심성의 이는 사단의 마음과 사사로운 마음이 개입되지 않은 도심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쉽게 말하면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양심'이다.
이 양심을 잘 지켜 확충해 나가고 인간의 일곱 가지 정인 희노애락애오욕을 잘 다스려 욕심을 제거하자는 것이 그의 사상의 핵심인 '경'사상이다.
그러므로 퇴계의 사상에 따르면 경견한 태도로 마음가짐을 성실히 하면 영원 불변의 진리요 당위인 이는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이는 실제로는 윤리적인 당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이 이가 있으니 군신이 있기 전에 군신의 이가 있고 부자가 있기 전에 부자의 이가 있다"고 한 그의 말의 이는 곧 죽어도 지켜야 하는 윤리요 당위였다.
그리고 사단의 마음이나 도심도 모두 윤리적으로 꼭 지켜야 하는 성질의 것이었다.

어진 성품 고매한 인격

퇴계는 경상 북도 안동 도산 출신이다.
이름은 황이고 퇴계는 호이다.
고향 마을 토계 앞에 한서암이라는 작은 암자를 짓고 공부하면서 토게의 이름을 퇴계로 고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아버지 이식은 진사 벼슬을 하였으나 퇴계가 난 지 일곱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 채 홀어머니의 엄한 가르침 속에서 성장하였다. 퇴계의 어머니는 늘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글공부를 한다고 글이나 잘 외고 짓는 것만을 능사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보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다"
퇴계는 어머니의 그러한 가르침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너무도 어진 마음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였다.
퇴계가 여덟 살이 되던 해의 일이다. 퇴계의 형이 칼을 갈다가 손을 베었다.
피가 흐르는 것을 본 퇴계는 형 옆에서 눈물을 철철 흘리고 있었다.
이것을 본 어머니가 "형은 손을 베고도 울지 않는데 왜 네가 우느냐?"
하자 퇴계는 울먹이면서 "형이 비록 울지는 않지만 저렇게 피가 흐르니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어머니는 그의 어진 성품을 기쁘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워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벼슬을 하여도 조그만 시골의 원님쯤 하는 것이 좋겠다. 만일 조정의 높은 벼슬을 하다가는 그 어진 성품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는지 걱정이다"
23세에 성균관에서 공부를 시작한 퇴계는 24세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연달아 세 번을 낙방하였다. 그리고 27세에 비로소 진사 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다른 사상가들이 그들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퇴계는 천재성으로 이름을 날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여러 번 시험에 낙방하는 유례없는 전례를 남겼다. 그러나 그는 늘 "학문은 세상의 이치를 깨치고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찾아내는 데 목적이 있다"면서 공부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오히려 즐겼다.
또한 퇴계는 매사에 검소하기로 유명하다.
세숫대야도 질그릇을사용 했으며 베옷을 입는 것에 만족하였고 나들이할 때도 칡으로 삼은 신에 죽장을 짚고 소박하게 차리고 다녔다 한다.
한번은 영천 군수가 그의 서재에 찾아왔다.
그리고 그의 서재가 너무도 초라한 것을 보고 놀라, "이렇게 좁고 누추한 곳에서 어떻게 견디십니까?" 하니 "오래도록 습관이 돼서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네"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답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서재에는 이런 글이 걸려 있었다.
'번거러움을 바로잡는 데에는 고요함만한 것이 없고, 졸렬한 것을 바로 잡는 데에는 부지런함만한 것이 없다'
그는 또, 늘 자기 한 사람의 이익보다는 다른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우선하였다.
이것은 이보다는 의를 중시하고 사보다는 공을 우선하는 그의 철학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가뭄이 심한 해였다. 물이 모자라 논바닥이 갈라질 정도였다. 마침 퇴계의 논은 위쪽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논물을 먼저 댈 수 있었다.
퇴계는 말하였다. "우리 집은 아직 굶주리고 있는 형편이 아니다. 우리 논이 말라 밭이 되는 한이 있어도 밑에 있는 다른 논에 먼저 물을 대 주어라"
그러자 하인들이 "남의 사정만 봐 주다가 굶어 죽겠습니다" 하고 못마땅해하면서
"나리께서 장사를 하시면 밤낮 밑지기만 하겠습니다" 하고 핀잔을 줄 정도였다.
퇴계는 가난하게 사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장남 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가난함은 선비의 예사로운 일이다. 무엇을 개의할 것이 있겠느냐 아비는 평생에 이로써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많았다. 너 스스로 몸을 수양하여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퇴계가 말하는 천명은 바로 영원 불변의 진리인 이이다.
끊임없는 수양과 학문 연마를 통해 이치를 터득하여 만물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게 된 퇴계는 여간해서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가 68세 되던 해였다.
광나루를 건너 한양으로 들어가는데 광풍이 일어 배가 뒤집힐 지경이었다.
배에 탄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안절부절못하였다.
"침착하게 가만히 앉아 계시오. 이리저리 뛰면 오히려 배가 뒤집히고 맙니다.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가다듬고 비바람과 싸워야 합니다. 죄지은 사람은 이 배 안에 없는 듯하니 두려울 것 없습니다. 걱정 말고 사공의 지시에 따릅시다"
퇴계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이렇게 타일렀다. 어찌 보면 너무 터무니없는 믿음을 확고하게 가진 듯하지만 그는 하늘의 명이 언제나 변함없이 관철된다는 신념을 마음 깊은 곳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비바람은 가라앉고 배는 무사히 강가에 닿을 수 있었다.
비바람을 이겨내고 한양에 당도한 퇴계는 선조 앞에서 강의를 하는 자리에서 기묘 사화로 죽은 조광조의 사람됨과 그의 학식 행적 등을 바른대로 아뢰고 기묘 사화가 남곤 등의 참소에 의한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조광조에게 오히려 상을 내려야 한다고 상소하여 조광조의 복권을 이루어내었다.
또 암행 어사가 되어 탐관 오리들을 떨게 하고 왜구의 약탈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참신한 제안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퇴계는 학문의 세계뿐만 아니라 정치 활동과 일상 생활에서도 높은 인품과 어진 마음으로 널리 존경받고 흠모받게 되었다.

만인의 스승이 되다

퇴계는 벼슬이 예조 판서 대제학 등에 이르렀으나 50세 이후에는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명종이 성균관 대사성, 이조 판서 등의 요직을 내리면서 불렀으나 퇴계는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이에 명종은 '현인을 불러도 오지 않음을 한탄함'이라는 시를 짓고 몰래 사람을 보내어 퇴계의 고양인 도산을 그리게 하여 둘러 놓고 조석으로 퇴계를 흠모하였다고 한다.
퇴계는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는 선조에게 임금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적은 '무진육조소'(이것은 어진 일과 효성을 다할 것부너 시작하여 정성되게 몸과 마음을 살피고 닦아 천명을 받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끝이 나는 여섯 조목으로 된 임금으로서 힘써야 할 시급한 문제를 다룬 글이다.
특히 선조에게 이러한 배려를 한 것은 선조가 명종의 적자가 아니기 때문에 왕가의 어른을 각별히 섬겨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와, '성학십도'(성학이란 성군의 학문이고 십도는 열개의 그림이라는 뜻이다. 유학의 근본 원리와 실천 방법을 상세하게 밝힌 글이다)를 올렸다.
당시 퇴계는 왕을 가르치는 경영관으로 있었는데 그것을 마지막으로 퇴계는 고향으로 완전히 돌아갔다.
그것들은 그의 마지막 저술이자 그의 최대의 역작이 되었다.
선조는 이 '성학십도'를 열 폭의 병풍으로 만들어 둘러 놓고 볼 정도로 퇴계를 스승으로 존경하고 흠모하였다.
고향으로 내려온 퇴계는 고향인 도산에 도산 서당을 짓고 학문 연구와 제자 교육에 나섰다.
그러자 멀고가까움을 에아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와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 때마다 퇴계는 상대편이 아무리 젊은 사람이더라도 '너'라고 부르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사람을 대할 때 늘 겸손과 경의를 잊지 않았고 자리에 마주않으면 반드시 가족의 안부부터 물었다.
제자가 질문을 하면 비록 대단치 않은 이야기라도 잠시 생각하였다가 대답을 하였지 당장 무어라 대꾸하는 법이 없었다. 토론중에 동의할 수 없는 대목이 나오는 경우에도 단번에 부정하지 않고 천천히 오직 사리가 이러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꿈속에서까지 제자의 신변을 걱정했다. 또 제자에게 서신을 통하여 가르친 것은 모두 기록하여 가르친 바에 스스로 위배됨은 없었는지 늘 반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저술된 것이 '자성록'이다.
'자성'이란 스스로를 돌아본다는 것이다.
퇴계는 서재에는 책이 가득하였으나 늘 흩어짐이 없었고 벼루에 먹을 갈 때도 항상 똑바로 갈았다. 새벽에 일어나 향을 피우고 바로 앉아 날이 밝도록 글을 읽되, 한번도 흐트러진 태도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어쩌다 몸이 고단해지면 눈을 감고 그대로 단정히 앉아 고요히 자신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를 '산부처'라고까지 일컬었다.
퇴계는 점잖았고 절도를 존중했다. 자기를 내세울 줄 모르고 모든 일에 조심하였으며 자신의 잘못을 알면 곧 고치기에 힘썼다.
그러한 그에게서 제자들은 엄격한 스승의 면모를 보면서도 늘 포근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다.
퇴계의 그러한 면모는 제자인 기대승과 벌인 '사단 칠정논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 논변은 퇴계가 59세이고 기대승이 33세일 때 시작되었다.
그리고 서신을 통한 긴 논쟁이 8년 동안 지속되었다.
발단이 된 것은 정추만(1509-1561)이란 학자가 '천명도설'이라는 책을 지어 자문을 구하자 퇴계가 사단은 이가 발현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고 한 데서 연유한다.
기대승은 이에 반대하여 발현되지 않은 것은 '성'으로서 이라 할 수 있으나 사단이나 칠정은 모두 발현한 것이니 똑같이 '정'이다.
그러므로 모두 기가 발한 것이라고 반대 의견을 내었다. 퇴계는 곧 자신의 잘못을 시정하고 사단이나 칠정은 모두 '정'이라는 제자의 견해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사단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양심이고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은 외부의 사물과 접촉하여 움직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의 마음은 잘 보존하여 발현되도록 지켜야 하는 것이고 칠정은 잘못될 수도 있으므로 잘 다스려서 치우치지 않도록 수양해야 하는 것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이처럼 논쟁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논변을 정당화하기 위한 치밀한 논구와 분석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성과불들은 한국 성리학이 중국 성리학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깊이를 갖추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퇴계는 세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 자기의 학문에 잘못이 있음을 깨우쳤으면 바로잡기를 서슴지 않았고 그런 잘못을 지적해 주는 제자들이 있음을 더없이 기뻐하였다.
심지어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날까지도 제자들을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어 제자들조차도 퇴계의 몸이 불편한 줄을 모를 정도였다.
도량이 그러했기에 큰 학문을 이룰 수 있었고 또 큰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언행록'에 의하면, 한 제자가 "퇴계 선생에게는 성현이라고 할 만한 풍모가 있다"고 하자, 또 다른 제자가 "풍모만 훌륭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언행통술'에서 정자중은 이렇게 말하였다.
선생은 우리 나라에 성현의 도가 두절된 뒤에 탕생하여 일정한 스승 없이 초연히 도를 획득하였다. 그 순수한 자질, 정밀한 견해, 넓고 큰 마음, 고명한 학문은 성현의 도를 한몸에 계승하였고 성인의 학문을 후학들에게 베풀었다.
이러한 분은 우리 동방에서 오직 한 분뿐이다.
또, 조호익이라는 제자는 이렇게 말했다.
주자가 작고한 뒤, 도의 바른 맥은 중국에서 끊어져 버렸다.
퇴계는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이렇게 퇴계는 제자들에게 성현의 예우를 받으며 임금을 비롯한 만인의 스승으로 그 정신을 남겼다.
70세 되던 해의 어느 날 우환이 악화된 퇴계는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 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제자들과 만나는 최후의 자리에서 자네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어리석고 게을러서 변변치 못한 일뿐이었다.
하고 탄식하면서 간단한 유언을 남겼다.
자신의 묘에 비석을 세우지 말고 간단한 비문만 새기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언대로 비석을 세우지 않고 작은 자연석에 '진성 이공의 묘'라 새긴 비문만을 세웠다.
죽은 후 4년 만에 도산 서당 위에 도산 서원이 세워져 사액 서원이 되었고 문순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 학문이 세계를 향하다

퇴계는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 중 철학과 관련된 대표적인 것으로는 '자주서절요', '계몽전의', '송계원명이학통록', '논사단칠정서변', '자성록', '성학십도' 등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퇴계집'(전 68권)에 실려 있다.
그는 수많은 인재를 육성하여 제자들 가운데 승상을 역임한 자만도 10여 명에 이르고 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은 자가 30여 인 대제학을 지낸 사람도 10여 명에 이른다. 유명한 학자로는 조목, 이덕홍, 정구, 유성룡, 김성일 등이 있다.
그의 학문을 계승한 제자들이 영남 학파를 이루어 율곡을 계승한 기호 학파와 더불어 한국 성리학의 두 산맥을 이루었다.
퇴계의 철학 사상은 국내뿐 아니라 널리 국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임진 왜란 때 일본에 전해진 퇴계의 학문은 후지와라 세이가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어 그로 하여금 일본 자자학을 창시하게 하였고 그 뒤로도 일본 유학을 대표하는 구몬 학파와 구마모토 학파에 큰 영향을 끼쳐 두 학파 사람들은 퇴계를 대대로 신명처럼 받들었다.
기몬 학파의 창시자인 야마자키 안사이는 퇴계를 '주자의 직제자나 다름없는 조선의 제일인'이라고 평가하였고 그의 제자 사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의 학문이 이룬 바는 월등하여 원명의 학자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또 1926년에 중국에 북경 상덕 여자 대학에서 대학 기금을 모으기 위해 퇴계의 '성학십도'를 목각 병풍으로 만들어 널리 반포할 때, 양계초는 '아득하신 이부자님이여'라는 시를 지어 거리낌없이 퇴계를 성인이라고 불렀다.
현재 일본의 동경과 대만에 퇴계학 연구소가 있으며 워싱턴, 뉴욕, 하와이 등에 퇴계 연구회가 조직되어 있다.
1976년에 국제 퇴계 학회가 창설되어 거의 해마다 국제 학술 회의가 열려 세계의 석학들이 모여 진지한 토론을 거듭하고 있다.
퇴계는 명실 공이 세계적인 철학자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한국의 철학에서 20세기를 들어서면서 유학과 퇴계의 위치를 살펴보기에 제한된 목적으로 한국사상 논쟁에서 발췌한 글이다.

해방 후 남한에서는 동양 철학 전문 연구자들에 의해 강단 동양 철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강단 동양 철학은 종래와 같이 주로 훈고와 해석에만 매달리는 경향적 방법을 벗어나서, 서양의 근대적 학문 방법론 위에 자리를 잡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이 과정에서 동양 철학은 서양 철학에 의한 격의의 과정을 불가피하게 거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결과로 동양 철학은 '현대'란 특성을 부여받지만, 한편으로는 이전과는 다른 '격의 동양 철학', 곧 서양 철학의 세례를 받은 동양 철학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동양 철학이 지역의 한계를 뛰어넘어 세계 철학, 보편 철학 속으로 편입되었음을 의미하며, 이와 동시에 동양 철학 본래의 모습으로부터 그만큼 멀어졌음을 의미한다.
동양 철학에 대한 이러한 현대화 작업은 중국에서는 이미 192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
따라서 해방 후 우리 나라의 현대 동양 철학은 주로 중국의 학문적 성과를 받아들이는 데 주력하였다.
해방을 맞으면서 동양 철학은 먼저 일제 강점이라는 절망적 현실을 맞아 전통 철학, 특히 유학에 가해졌던 비판들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비판적 정리와 함께 긍정의 단초를 마련하는 작업이 필요하였다.
다음으로 일제 강점 동안에 전개된 식민지 학풍의 잔재를 청산하고 극복하는 것이 과제로 대두되었다.
여기에서 식민지 학풍이란 주로 경성제국대학의 다카하시 고 교수 등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한국 철학, 사상의 부재론이나 정체론 등을 가리킨다.
일제 강점기 당시 많은 지식인들은 국망의 책임을 논하면서 그 많은 부분을 조선 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던 주자학으로 돌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개명 지식인들은 주자학뿐만 아니라 유교와 전통 일반을 모두 봉건적 잔재란 이유로 청산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청산의 빈 자리에는 민족 허무주의밖에 남을 것이 없었다.
일제의 관변, 어용 학자들은 바로 이 빈 자리에 민족성이나 뭐니 하면서 식민지 사관에 물든 내용물을 채워 넣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유교 지식인들은 그들과 달리 유교에 대한 비판적 반성과 아울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철학, 근대 철학으로의 변모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비판적 반성 과정에서 비판의 표적이 주자학과 유교의 말폐에 집중되었으며, 신채호 같은 경우는 부분적으로 유교의 본질적인 부분에까지 비판의 화살을 겨누기도 하였다.
해방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환경을 만나면서 이제 이 문제에 대한 재고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유교에 대한 부정 일변도의 입장에서 벗어나 긍정의 단초를 가능한 한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작업에는 단절된 전통을 다시 잇는다는 의미와 더불어, 이 전통 시기의 철학을 엄연히 살아 있는 철학으로서 자리 매김한다는 의미도 함께 들어 있었다.
한국 현대 동양 철학의 개창자라고 할 수 있는 현상윤과 그에 이은 이상은 등이 이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한편 이 시기에는 식민지 학풍의 비판과 극복에도 많은 노력을 쏟았다.
여기에서 일제 관변, 어용 학자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논파하는 작업도 이뤄졌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연구 작업을 통해 저들의 주장을 발전적으로 극복하고자 한 점이다.
1949년 현상윤은 "조선유학사"를 발간하였는데, 이 책은 종래 학통 및 연원사 중심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철학 사상을 중심으로 씌어진 철학사이다.
현상윤을 한국 현대 동양 철학의 개창자로 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종래 부정적으로만 평가되던 주자학을 한국 유학과 철학을 대표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조선 주자학이 지니는 역사적 공과를 떠나 순수히 철학적인 측면에서 평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이황의 철학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평가를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이황의 철학을 한국 유학의 최고봉으로 이해했음을 의미한다.
한국 유학 사상이 지니는 병폐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던 이황의 철학이 이제는 정반대의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현상윤이 이황의 철학에 주목한 데 뒤이어 많은 학자들이 그에 대한 정리와 재평가 작업을 집중시킴으로써, 지금에 이르러서는 바야흐로 '퇴계학의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도통 의식과 문중 의식 등 부정적인 측면이 뒤섞여 있음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동양 철학 연구자들이 늘어나고, 정신문화연구원과 같은 연구 기관이 설립되어 활발한 연구 활동이 행해짐에 따라 동양 철학의 연구 대상이 확장되었다.
이황 이외의 여러 주자학자들, 나아가 양명학, 경학, 실학, 서학 등에 대해서 심층적인 연구가 이뤄짐으로써, 고착성이니 종속성이니 하는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논의의 대상으로 다뤄질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은 남한 학계의 동양 철학은 대체로 민족주의 역사관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크게 세 부류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중국과의 차별성과 내재적 발전에 주목하는 부류이다.
그들은 먼저 퇴계학을 위시한 한국 주자학을 중국의 그것과 비교하는 가운데 차별적, 발전적 부분에 착안하면서, 바로 그 부분을 한국 철학의 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양명학, 경학, 실학 등에 대해서는 반주자학이라는 관점에서, 실학은 주자학과 질적으로 다른, 한국 유학이 이룬 내재적 발전의 총아로 보았다.
특히 그들은 실학 사상 속에서 근대의 모습을 그려 냄으로써 근대로의 주체적인 이행 가능성을 말하기도 하였다.
둘째는 유교 본원주의 입장에 선 부류이다.
이들은 우리 전통 사상의 본령은 유교이며, 그 유교는 이미 중국의 은, 주 교체기인 기원전 12세기 기자에 의해 전래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주로 성균관이나 정신문화연구원 및 재야 계통의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견해로서, 한말 장지연의 '유교종주국설'을 잇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역사적 사실성 여부를 떠나 한말과 일제 강점하에서는 나름대로 긍정적 의미를 지닐 수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그와 같이 긍정적으로만 평가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쉽사리 배타적 도통주의, 문화 일원주의, 극단적 민족주의와 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고유 사상론에 선 사람들이다.
이들은 유교는 우리의 고유 사상이 아니라고 본다. 유교는 불교나 도교와 더불어 모두 외래 사상일 뿐이고, 시간적으로 이것들보다 더 오래 전에 형성되었으면서 이 후 전래해 온 외래 사상을 끊임없이 우리의 것으로 변질시키는 힘을 지는 고유 사상이 있다는 것이다.
일찍이 신채호는 우리의 고유 사상으로 선교를 말한 적이 있다.
신채호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는 일제 관변, 어용 학자들의 고유 사상 부재론에 맞선다는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도리어 우리 사상을 볼품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릴 우려가 있다.

위의 세 주장은 서로 겹치기도 하고 다른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어느 것이나 나름대로 민족주의 역사관 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러나 이것들은 지나치게 문화론적 입장에 치우쳐 있으며, 철학사를 관념의 자기 전개 및 발전의 역살 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특정 철학이 특정 시대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을 확보하지 못하고, 또한 다른 철학으로 옮아갈 때 상호 철학간의 구체적인 연관성도 밝혀 내지 못한다.
다만 전통 철학을 온전한 형태로 복원해야 한다는 과제만 껴안은 채 강단 철학으로 일관하고 말았다.
이 모두는 '분단 시대'라는 역사적 성격이 남한 철학계에 부과한 과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80년대에 이르면 특정한 역사적 조건을 바탕으로 남한에서는 민족민주 운동이 드세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민족민주 운동의 열기는 동양 철학계에도 영향을 미쳐 이들에게 실천적 요구를 하게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개혁, 개방의 시대를 맞은 중국의 동양 철학 연구물들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하고, 아울러 북한 학계의 연구물도 소개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좀더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며 실천적으로 동양 철학을 연구하는 연구자 집단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 ... . ... . ... .

退溪 이황 先生님의 건강 수칙   전 항목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