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 스트레스, 신체리듬

생리학자들은 동물에게 스트레스를 주면 매우 빨리 노화된다는 사실을 50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생쥐를 전극 위에 놓고 전기충격을 가하면, 치명적인 수준으로 전압을 올리지 않아도 죽어 버린다. 임의적인 간격으로 약한 충격을 가하기만 해도 쥐는 스트레스 반응을 보인다. 그럴 때마다 쥐의 몸은 조금씩 허물어져 간다. 그런 식으로 며칠간 스트레스를 받으면 쥐는 죽어 버리고, 그 조직을 해부해 보면 노화가 촉진된 많은 징후를 발견할 수 있다.
충격 자체는 약했으므로 죽음의 원인은 외부의 스트레스가 아니라 쥐의 반응 때문이다. 쥐의 신체는 스스로를 죽인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인간도 환경으로부터 주어지는 과도한 스트레스를 견뎌 낼 수 있지만 너무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의 스트레스 반응은 자신의 신체에게로 방향을 돌려 정신적·육체적 파괴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극도로 높은 스트레스가 지속되는 상황인 전쟁에서는, 최전방의 군인은 전투에 너무 오래 시달리면 모두 기억상실증이나 전투치매증에 걸려 버린다. 이 두 가지 증후군은 모두 신체의 저항 메커니즘이 한계를 넘어섰다는 신호이다.

인간의 두뇌는 그 옛날 우리의 조상들이 호랑이를 대적했던 때와 근본적으로 똑같은 방식으로 모든 스트레스에 대처하도록 프로그램된 원시기억을 지니고 있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총구를 들이대고 쏘겠다고 위협하면 당신의 상태는 즉시 극적으로 전환하여 극도의 경각상태가 된다. 만반의 태세를 갖춘 방위반응fight-or-flight reaction이 몸 전체로 팽창하여 행동을 준비하게 한다.
대뇌로부터 보내진 경고의 메시지가 부신피질로부터 아드레날린을 뿜어나오게 하며, 그것은 혈관을 타고 흘러서 신체의 평상적인 상태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체세포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재생을 위해서 보낸다.
즉, 약 90퍼센트의 세포 에너지는 새로운 단백질과 DNA, RNA 등을 만들어 내는 데 쓰인다. 그러나 대뇌가 공포를 인식하게 되면 물질을 새로 만들어 내는 일은 뒷전으로 미루어진다.
방위반응의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기로 결정하든 간에 우리의 몸은 근육을 발동시키기 위해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요구한다.
이것이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신체를 조직하는 정상적인 대사방식, 소위 동화작용은 그와 반대로 역전환되어 조직을 파괴하는 이화작용으로 바뀐다.

아드레날린은 반응의 연쇄작용을 촉발한다. 즉, 혈압이 오르고 근육은 긴장하고 호흡은 약해지고 빨라진다.
성욕과 식욕은 억제되고 소화작용이 멈춘다. 두뇌는 초긴장하여 감각들이 극도로 예민해진다. (전쟁과 같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병사들은 자신의 호흡 소리가 풀무질 소리처럼 크게 들리고 접근해 오는 적군의 눈이 접시만큼 커져 보인다.) 일시적인 방편으로서 스트레스 반응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적당한 시기에 끝나지 않으면 이화작용의 결과는 재난을 불러온다.
스트레스에 의한 각성상태는 그것이 오래되면 특정한 장애를 야기한다.

***) 반응 - 결과로 오는 병 (***

에너지 동원 피로, 근육 파괴, 당뇨병
심근 에너지 증가 스트레스성 고혈압
소화부진 궤양
성장부진 심인성 왜소발육증
재생부진 발기불능, 성욕상실, 월경불순
면역반응 부진 발병위험 증가
지각과 사고가 예민해짐 신경세포 손상, 혹은 사망

스트레스의 장기적인 결과가 우리를 놀라게 하는 점은, 이것을 전체적으로 보면 노화현상과 아주 비슷하다는 것이다.
고혈압, 위궤양, 발기불능, 근육쇠약, 당뇨병 등은 노화의 일반적인 신호이다.
노인들은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하며, 노쇠현상은 대뇌의 신경세포 손상이나 상실과 직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것들이 서로 관련이 없는 증상들로 보이지만 이들은 스트레스 반응의 극단적인 결과로 귀결된다. 스트레스를 연구한 사람들은 각성상태가 스트레스가 시작될 때에만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위협에 대한 노출이 없어지지 않으면 각성상태는 기진상태로 바뀐다. 왜냐하면 신체는 자신이 조직과 에너지를 비축하는 정상적인 신진대사 작용으로써는 회복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노인들은 삶의 고투에 너무 시달린 나머지 기진하여 전투치매증 환자처럼 되어 버린다.

노화가 진행될수록 스트레스 반응이 점진적으로 약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스트레스로부터 회복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고 강한 스트레스를 잘 견디지 못하게 된다. (예컨대 젊은 사람이 슬픔으로 죽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런 경우가 많아진다.) 이처럼 반응이 약화되는 경향은 직선적인 저하가 아니라 지수함수적으로 배가된다.
즉, 늙어서 한 해의 나이를 먹는 것은 중년에 두 해의 나이를 먹는 것만큼이나 스트레스 반응의 퇴화가 심하다는 것이다. 나이가 매우 많은 사람의 경우에는 여섯 달과 맞먹게 될 수도 있다. 결국 균형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본능이 완전히 와해되어 아주 미약한 스트레스―한 차례의 감기를 앓거나, 가볍게 넘어지거나, 돈을 조금 잃어버리거나 하는 등―에도 극히 견디기 어렵게 된다.

스트레스가 우환의 원인으로 거론될 때마다 사람들은 성급하게 문제는 스트레스가 과도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사실상 문제는 신체의 방어체계에 숨어 있다. 너무 많은 충격 때문에 죽는 쥐가 좋은 예이다.
만일 쥐에게 충격에서 회복할 시간을 주었더라면 쥐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충격의 빈도가 생리기능에 과도한 무리를 가했고 결국은 정상상태로 되돌아갈 능력을 소모시켜 버린 것이다.

한스 셀리에Hans Selye는 1930년대에 스트레스라는 개념을 도입했을 때, 육체적인 손상이나 굶주림, 열기나 냉기에 노출되는 것, 혹은 수면부족과 같은 강한 외부적 스트레스 요인은 그것이 가해질 때마다 동일한 스트레스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두 마리의 원숭이에게 오랫동안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이들의 몸은 글루코코르티코이드glucocorticoid라고 하는, 지금은 우리에게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잘 알려져 있는 물질을 분비함으로써 이에 반응한다. 굶주림에 몹시 지치면 원숭이의 몸은 생존을 위해서 근육을 분해하기 시작해야만 한다.
그러나 한 원숭이에게 영양가가 전혀 없는 인공감미료를 탄 물을 먹이면, 영양을 섭취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원숭이의 글루코코르티코이드치는 올라가지 않는다. 원숭이는 상황이 개선되었다고 '인식'한다. 원숭이의 몸에는 이것이 굶주림의 위협은 지나갔다는 충분한 신호가 되는 것이다.
여러 면에서 스트레스에 대한 연구는 이 놀라운 발견의 충격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였다. 어떻게 가짜 음식이 진짜를 대신할 수가 있는가? 내 생각에는, 이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원숭이가 영양을 섭취했다고 속으로 느꼈고 원숭이의 몸은 그러한 만족스러운 인식을 음식으로서 받아들인 듯하다는 것이다.
스트레스의 이론은 심신의 상관관계를 포용하도록 수정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해석이나 믿음, 태도 등이 스트레스 반응의 실제 작용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하게 관여하기 때문이다.

스트레스의 단계

스트레스를 경험할 때 우리의 반응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1)스트레스를 주는 사건
2)그에 대한 우리의 평가
3)우리 몸의 반응 같은 것들이다.
스트레스 반응을 다루기 힘들게 하는 것은 그것은 일단 시작되면 마음의 지배권을 벗어나 버린다는 점이다.
차가 밀리는 길에 멈춰 서 있거나, 근무중에 잔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전혀 부적절한 상황에서, 스트레스 반응을 의도대로―맞서 싸우거나 달아나거나 ―실천할 수 있는 가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스트레스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현대인의 생활은 피할 수 없는 외부적 스트레스로 둘러싸여 있다.
도시는 본질적으로 과속, 과밀, 범죄, 불친절 등과 함께 소음과 매연을 뿜어 내는 하나의 거대한 스트레스 기계이다. 널리 퍼져 있는 소음공해라는 단일 스트레스만 보더라도, 연구결과에 따르면 많은 손상 효과를 가져옴을 알 수 있다.
공항 부근의 항공로 아래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정신병의 발생률이 증가한다. 로스엔젤레스 공항 주변에 사는 아이들은 평균 혈압보다 높은 혈압을 보이고 있고, 어쩔 수 없는 소음 곁에서 사는 사람은 이쯤이면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든 후 오랜 시간이 지나도 수면장애가 계속된다.
소음이 심한 근무환경에서는 폭력이나 거친 태도를 보이는 일이 빈번히 발생한다.
손상을 입힐 정도가 되기 위해서 소음이 반드시 커야 할 필요는 없다. 신경을 건드리는 잡음이 걷잡을 수 없이 계속 반복해서 들리면 스트레스 효과가 나타난다.

이것은 스트레스를 제 2단계, 즉 평가의 단계에서 대처해야만 하는 부담을 준다. 스트레스를 주는 사건이나 그에 대한 신체의 반응은 통제할 수 없다고 해도 그에 대한 평가, 즉 사건과 그에 대한 반응 간의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는 평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겉에서 보기에는 똑같이 보이는 상황이 그에 대한 해석을 달리 하면 강한 스트레스로 바뀔 수가 있다.
범죄자에게는 범죄현장에 나타나는 경찰이 엄청난 공포의 대상일 수도 있지만 희생자에게는 크나큰 안도가 되는 것이다.
암이라는 진단은 환자를 걷잡을 수 없는 스트레스로 몰고 가지만 의사에게는 그렇지 않다.

모든 사건들을 개인이 어떻게 여과시키는가에 따라 그 사건들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주느냐가 결정된다.
기본적으로는 외부적인 스트레스가 촉발요인이다.
촉발됨을 느끼지 않는다면 스트레스는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스트레스 속에서도 잘 살아간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들은 높은 스트레스의 한계선에서 최고의 성과를 올리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생리적으로 그런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몸에서 코르티졸(부신피질 호르몬의 일종)과 아드레날린이 계속 분비되면 아무도 잘 살지 못한다. 이 호르몬들은 알다시피 조직을 해체하는 작용을 하며 이것이 과다하게 분비되면 질병이 온다.

그러므로 스트레스를 다룬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문제임을 알수 있다. 어떤 상황에 대한 개인의 해석은 기본적으로 그의 기억 속으로부터 투사되는 것이며, 새로운 상황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언제나 과거의 경험들에 의해 채색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각의 새로운 상황들을 새로운 눈으로 평가하는 대신, 낡은 개념의 범주에 빠져 버린다. 이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며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 밖에 있다. 당신이 생굴을 싫어한다면 그것을 보기만 해도 구역질을 일으킬 것이다.
억울하게 이혼당하여 피해를 입었다고 느낀다면 길거리에서 상대방과 마주치면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오를 것이다.
이 과거의 인상들을 중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스트레스에 대해 통제력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주는 사건은 자동적으로 당신의 반응을 유발해서 당신을 포로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 불행한 상태는 '절망상태 또는 무력상태'라고 하여 광범위한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늙는다는 것은 이 두 가지 상태를 깊이 느끼게 하므로 이 연구는 매우 가치가 있었다.
생리학의 고전적인 실험으로서, 두 마리의 생쥐를 서로 매어 놓아 한 마리는 자기 마음대로 먹고, 자고, 돌아다니고, 활동하도록 하고 다른 한 마리는 수동적으로 따라다니기만 하도록 한 실험이 있었다.
두 마리의 쥐는 이내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선택의 자유를 가졌던 쪽은 여전히 튼튼하고 건강했으나 자율성을 잃어버린 다른 놈은 멍청해지고 병에 잘 걸렸으며 겉늙어 버렸다.
끌려 다니던 쥐는 아무런 물리적인 학대를 당하지도 않았지만 선택의 자유를 잃어버린 것만으로도 그 몸에 무수한 파멸적 반응을 촉발시키기에 충분할 만큼의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방법을 이용하여 실험용 동물들에게 실제적으로 어떤 종류의 질병이든지 생기게 만들 수도 있다. 혹은 화학적으로 유발한 종양과 같이 어떤 병을 생기게 한 후에 그것을 훨씬 더 빠르게 진척시킬 수도 있다.
빈민굴에서처럼 쥐를 서로 복닥거리며 살도록 하면, 이들의 면역체계가 약해지고 고혈압, 노이로제, 우울증, 무감각증 등의 징후가 나타난다.
새끼 원숭이를 어미한테서 떼내어 영양공급을 끊어 버리면 방향감각 상실, 활동항진증活動亢進症, 내향성內向性, 여러 가지의 학습기능 장애 등의 증상을 나타낸다.
쥐나 토끼 등에게 스트레스를 주면 일반적으로 암의 전이가 촉진되고 심장발작이 유발된다는 사실도 발견되었다.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그러나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큰 위협을 인식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예측가능성 결핍
통제력 결핍
욕구불만의 배출구 결핍

이러한 요인들이 있을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상황이 때때로 그 실제적인 자극보다 훨씬 더 심한 스트레스를 주는 것으로 변할 수 있다.
고속도로에서 비틀거리는 차를 따라가는 것은 신경쓰이는 일이다.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타고 갈 비행기가 무기한 연발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두 가지 상황이 모두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요인을 가지고 있다.
차를 밖에서 잠가 버렸을 때 열쇠 전문가가 오기를 한 시간 동안이나 기다려야만 하게 되면 극도로 짜증스러워진다.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평상시에는 늘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자동차가 지금은 갑자기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던 중에 상대방이 갑자기 나의 주장에 승복을 해 버리면 아주 김이 빠진다. 비록 내가 이기기는 했어도 화를 분출할 구멍이 갑자기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일상 생활 속에서 이와 같은 상황은 허다하게 일어난다.
그런 일들이 쌓여 가는 동안에 우리는 이들에 대한 기억을 내면화하여 틀에 박힌 반응을 고착시킨다. 스트레스 연구가들은 일련의 정밀한 실험을 통하여, 스트레스를 주는 외부의 사건이 없이도 단지 예측불가능성이나 통제력 결핍, 그리고 욕구불만의 탈출구가 없다는 '인식'만으로써도 스트레스 반응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밝혀 냈다.
이 실험 중에는 생쥐를 작은 철장 속에 가둬 놓고 여러 가지 조건에서 전기 충격을 가해 본 실험도 있다.

예측 불가능성: 전기 충격을 가하기
전에 붉은 등으로 경고표시를 해준 생쥐는 아무런 경고 없이 충격을 가한 생쥐보다 스트레스 반응을 적게 보였다. 경고 신호는 쥐가 충격을 예상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럼으로써 불안이 없어지자 쥐의 몸은 안심하고 쉴 수 있었다.
예측이 불가능한 충격을 받은 쥐는 늘 경계심을 풀지 못하고 있었고 그러한 경계심이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통제력 결핍:전기 충격을 받는 두 마리의 쥐 중에 한 마리에게는 손잡이를 누르면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장치를 해 주었다.
반면에 다른 쥐는 그냥 고스란히 충격을 입고 있었다. 이 쥐는 상황에 대해서 아무런 통제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같은 정도의 전기충격에도 더 높은 스트레스 반응을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한 가지 기발한 변화를 주었던 바, 한 마리에게 충격을 피할 수 있는 손잡이 장치를 해주었다가 나중에 손잡이를 못 누르게 하면 '충격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스트레스 반응을 보인다.
전에는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만 해도 스트레스 상황이 일어나는 것이다.

욕구불만의 배출구 결핍:쥐에게 전기 충격을 가할 때 갉을 나무토막을 주거나 다른 쥐를 공격할 수 있게 해주면 스트레스 반응을 덜 보인다.
먹을 것이나 물을 주거나 타고 놀 쳇바퀴 같은 것을 주어도 같은 결과를 보인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너무나 짜증스러운 생활의 스트레스를 벗어나는 유일한 희망으로서 과식이나 음주에 매달리고, 전체 사회는 다른 나라를 공격함으로써 불행에서 벗어나 보려고 애쓴다.
분쟁은 국외자가 보기에는 사소한 문제로 시작된다.
그러나 욕구불만이나 통제력의 결핍은 참기가 매우 고통스러운 조건이다. 가까운 사람이 갑자기 죽었을 때는,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슬픔이 보이지도 않게 완강하게 달라붙는다. 죽음을 예상할 수도 없었고 그것을 멈출 수도 없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그런 상실과 자포자기 상태의 울적한 기분을 실컷 표출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자신의 기분을 하소연할 상대가 바로 그 죽은 사람일 경우에는 이것은 특히 고통스러운 일이 된다.
의학적으로 표현하면, 이러한 요인으로 야기된 병은 그 대가가 크다.
로체스터 대학의 정신의학자인 조지 이글George Eagle 박사는 의학적으로 원인 규명을 할 수 없는 갑작스런 사망의 경우를 160건 조사해 보았다.
그 중의 58퍼센트는 가까운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났거나 실패를 겪은 순간에 발생했고 35퍼센트는 공포의 순간에 일어났다. 단지 6퍼센트만이 즐거운 시간과 우연히 일치되었다.
죽음을 부르는 것은 스트레스 그 자체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은 실패와 공포를 겪고도 견뎌 내기 때문이다. 죽음을 부르는 것은 스트레스를 견뎌 내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 취약점이 육체적인 요인보다 우선한다.
예컨대 심장마비로 사망한 50대 미만의 사람들 중에 반수는 심장질환의 고전적인 위험인자 ―고혈압, 콜레스테롤치 상승, 흡연 등―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한다. 흡연은 미국인들에게 흔한 폐암과 직결되어 있는 바,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순전히 욕구불만의 배출구로 삼는 하나의 습관으로서 쥐가 갉을 나무토막을 붙잡듯이 사람들이 붙들고 매달리는 하나의 오락이다.

실험실 조건에서 쥐보다 진화가 덜 된 동물(예컨대 개구리 같은)은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 요인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다.
핵심은 기억인 것이다.
원시적 기억능력만 지니고 있는 동물은 어떤 상황과 다른 상황 간의 차이를 식별하지 못한다. 생쥐는 전기충격을 받을 때의 불쾌한 느낌을 기억한다. 그래서 쥐는 그 되풀이되는 느낌을 피하기 위해서 손잡이를 누르도록 길들일 수 있다.
또한 쥐는 손잡이를 없애 버리면 다음의 전기 충격을 예상할 만큼의 기억력을 지니고 있다.
쥐는 예상도 할 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치과 의자에 앉아 있다가 드릴 소리만 듣고도 펄쩍 뛰는 소심한 환자와도 같다. 소리만 들어도 고통을 예상하게 하고, 그것이 통증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예상되는 것은 스트레스를 주는 대상이다.
이것은 노화에 관해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리는 모두가 자신 속에 하나의 세계, 곧 우리의 과거 세계를 품고 다닌다. 우리는 이 세계와 그 위에 새겨져 있는 마음의 상처에다 비추어 봄으로써 자신의 스트레스를 만들어 낸다.
스트레스에 대한 기억이 없으면 스트레스도 없을 것이다. 어떤 것이 우리를 두렵게 하고 화나게 하는 것인지를 지시하는 것은 우리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쩔 도리도 없고 짜증만 났던 과거의 일을 너무 비슷하게 떠올리게 하는 상황을 만날 때 어쩔 도리 없어지고 짜증이 난다.
기억의 저주는 우리를 안에서부터 늙어가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세계는 점점 더 늙어가고, 우리를 결코 늙지 않는 실재로부터 차단시킨다.

인간 기억력의 완벽성은 놀랍다. 정신분석학의 개척기에 프로이트는 그의 환자가 과거를 무의식 속에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는 우울증 환자로 하여금 두 살 때 편도선 수술로 엄마품을 떠나 하룻밤을 보냈던 일 따위의 과거의 정신적 충격의 기억으로 거슬러올라가도록 안내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기억이 모든 것을 분명히 드러내기를 꺼려했다.
흐릿한 장막과 부인否認이 버림받았을 때의 첫 느낌을 막아서서 가리고 있었으나, 환자에게 충분한 용기만 있다면 그런 장막들은 서서히 다시 벗겨 놓을 수가 있었다.
환자는 극도로 명료하게 그날 밤 병원에서 일어났던 일을 정확히 기억해 내었다. 세세하고 미묘한 느낌들뿐만이 아니라 자세한 실제 상황―예컨대 시계 바늘이 가리키고 있던 시간, 수술실로 가는 계단의 층계 수, 간호사의 머리 색깔―까지도.
하지만 우리는 왜 그처럼 세세히 기억해 낼 수 없을까? 그 기억들은 마이크로칩처럼 우리 위에 각인되어 있으면서, 출력될 것들을 장차 일어날 모든 사건들에다가 덧붙인다.
인간의 삶에는 간단한 스트레스가 거의 없다.
왜냐하면 하나의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면 당장 옛 기억의 흔적이 되살아나서 우리가 예상하는 종류의 스트레스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스트레스와 호르몬

스트레스 반응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신체가 손상을 입기 전에 반드시 차단해야만 할 강력한 화학물질의 분비를 수반한다.
내분비학자들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클루코코르티코이드로 분류한다.
이것은 스트레스하에서 신체가 높은 경각상태를 요구할 때 그 일환으로서 부신 피질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글루코코르티코이드의 기능은 동화작용을 이화작용으로 전환시키는 일이다.
특히 글루코코르티코이드는 신체가 필요에 따라 쓸 수 있도록 간에 저장되어 있는 저장 에너지의 일종인 글루카곤glucagon을 분해한다.
이 글루카곤이 다 소모되면 글루코코르티코이드는 계속하여 단백질을 분해한다.
굶주림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는 신체는 혈당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근육을 소비하기 시작하여 아사餓死를 막아 낸다. 이때도 역시 이 일을 맡는 화학물질은 클루코코르티코이드이다.
글루코코르티코이드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코르티졸cortisol인데, 이것은 특히 태평양 연어와 같은 특정 생물의 노화에 숨은 역할을 하는 물질이다.
부화된 어린 연어는 첫 네 해를 바다에서 보내고 신비롭게도 수천 마일을 헤엄쳐서 자신이 태어난 민물 호수로 정확히 돌아온다. 급류와 인공댐을 거슬러서 영웅적인 여행을 한 후에 성어가 된 연어는 산란를 하고는 거의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린다.
이 고기를 하룻밤 만에 쇠약한 존재로 늙어 버리게 만드는 것은 단지 탈진 때문만이 아니라 이들의 DNA 속에 들어 있어서 산란기까지 견디다가 부신피질로부터 다량의 코르티코이드 호르몬을 일시에 분비되게 하는 내부의 '노화 시계' 때문이다.
코르티졸은 모든 동물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스트레스 호르몬으로서 연어에게는 이것은 죽음의 호르몬이다.
죽음을 부르는 이 호르몬의 분비는 연어를 그 격렬한 이주여행 이전에 잡아서 최고의 컨디션에서 산란하게 해도 일어난다.
노화 시계는 주변환경은 무시한 채 자신의 고유한 시간표를 따른다.
강을 거슬러올라가는 연어를 잡아서 적당한 먹이를 주고 모든 스트레스로부터 보호해 준다고 해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연어의 생체 시계는 산란을 마치면 죽음을 맞이할 적당한 때가 왔다는 것을 안다.
'적당한'이라는 말은 자연계에서는 매우 융통성이 많은 단어이다.
하루밖에 못 사는 하루살이도, 100년이 넘게 사는 큰 대합조개도 제각기 '적당한' 수명을 가지고 있다.
자연은 한 생물이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많은 구성요소가 그 생물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균형을 맞추어 준다. 다른 요인들 중에서도 크기, 무게, 신진대사율, 음식물 공급, 잡아먹는 동물, 새끼를 낳는 나이, 그리고 새끼의 수 등이 노화가 언제 시작될 것인지에 영향을 미친다.

쥐는 야생 상태에서 1년 미만을 산다.
그러나 그 1년 동안에 이 동물은 성장하고 교미하여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아 종족을 유지시킨다. 자연의 균형 속에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떤 종이 늙어서 죽기 전에 그 숫자를 유지할 수 있으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동물에 있어서 노화의 시작은 육체적인 진화와 관계가 있다.
각 동물 종들은 생존에 가장 알맞는 일정한 수명으로 진화해 왔다.
쥐가 100년을 살면서 해마다 수십 마리씩 새끼를 낳았다면 이 세상은 쥐와 그것을 잡아먹는 육식동물로 뒤덮여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그런 식의 조잡한 불균형이 발붙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종들은 각기 고유한 수명의 범위에 맞게끔 살고 있고 자신의 고유한 노화패턴을 따르고 있다.
가끔은 자연의 의도가 무엇인지 해독하기 힘들 때가 있다.
예컨대 작은 갈색박쥐는 왜 12년이나 살며, 반면에 같은 체중에다 같은 신진대사율을 지닌 들쥐는 고작 몇 개월을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가 등이다.
수명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너무나 복잡미묘해서 동물이 어떻게 노화하는가를 설명하기란 힘든 일이다.
이에 답하기 위해서 현재 300가지가 넘는 이론들이 갑론을박하고 있다.

노화 시계는 상상에 혼란을 준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동물들이 자신도 모르게 내부에 안고 사는 시한폭탄, 즉 자기파괴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많은 생물학자들이 인간의 DNA는 노화 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연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유동성 있는 것임이 틀림없다.
인간의 사망은 극도로 광범위한 연령범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인간의 평균 기대 수명이 28세였다.
오늘날 그것은 미국에서는 75세로 올라갔고 세계 최장수국인 일본에서는 여성의 경우 82.5세이다. 이러한 수명 증가는 인간을 다른 하등동물과 구별짓는 특징, 즉 자유의지에 의해서 달성되었다.
우리가 죽는 순간은 탄생시부터 결정되지 않는다.
인간은 비바람을 피해서 집을 짓고 굶주림에 맞서서 농사를 지으며 질병을 치료하는 의술을 개발함으로써 운명을 물리친다.
그러나 우리가 몸 안에 지니고 다니는 생화학적 유산은 끊임없는 위협을 가한다. 태평양 연어처럼 우리의 신체는 우리 의지의 통제 밖에서 다량의 호르몬을 분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두려움에 떠는 상황에 처할 때마다 치사량에 못 미치는 소량의 코르티졸이 분비된다.
많은 생리학자들은 이 사실이 우리의 신체가 현대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근육소모, 당뇨병, 피로, 골다공증, 피부박화, 지방질 재분배, 면역기능 억제, 정신기능 장애 등 일단의 다른 파괴기능을 지닌 글루코코르티코이드의 작용 또한 우리 의식의 지배 밖에 있다.
위에 열거된 것들은 스테로이드 중독의 징후들이다.
이것은 다량의 스테로이드를 너무 오랫동안 투여받은 환자에게도 나타나는 위험들이다.
스트레스 반응을 멈추지 못하거나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에 그의 신체는 미량의 스테로이드 중독 증상을 보인다.
그렇게 되면 부적당한 스트레스가 반복될 때 일어나는 위험성은 치명적인 스트레스 하나의 경우보다 훨씬 더 커진다.

명상이 생리적 연령을 낮춘다

노화와 스트레스 호르몬 간의 연계성은 명확히 드러났다.
그러나 이러한 호르몬들을 어떻게 제어하느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스트레스 반응은 아무 예고도 없이 순간적으로 유발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분자군 자체를 제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새로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기억된 스트레스를 풀어 버림으로써 스트레스의 뿌리로 직접 접근하는 심신상관 기법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명상이다. 오랫동안 명상을 한 사람은 코르티졸과 아드레날린의 수치가 종종 낮게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의 대항기제coping mechanism는 보통 사람들보다 거의 언제나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을 보인다.
1970년대 초반 이전까지는 사람들은 명상이 그러한 이점을 지니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케이스 월리스R. Keith Wallace라는 이름의 UCLA의 젊은 생리학자가 명상이 영적인 의미 이외에 신체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전까지 명상은 서양 의학계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다.
월리스는 연구활동의 일환으로서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일련의 실험에서 대부분이 대학생 연령으로 TM(초월명상) 수행자인 자원자들을 그들이 명상하는 동안 신체의 중요 기능들을 시험하는 모니터에 연결해 보았다.
이 젊은 자원자들은 평온감과 내면적 침묵상태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여태까지 깊은 명상상태에 들어가는 것은 여러 해의 수행이 요구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지만, TM 기법은 매우 신속하게 호흡, 맥박수, 혈압 등에 중요한 변화와 깊은 이완효과를 가져왔다.

초월명상 기법은 특정한 산스크리트어인 만트라를 속으로 외는 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 만트라 소리의 진동은 마음을 평상시의 사고작용으로부터 서서히 끌고 나와 사고의 배후에 깔려 있는 침묵 속으로 인도한다.
이처럼 만트라는 신경계에 삽입되는 매우 특별한 메시지인 것이다.
인도에서는 만트라가 수천 년 동안 사용되었으므로 그것이 생리에 미치는 정확한 효과는 요가(합일合一을 의미한다) 과학의 일부로서 잘 알려져 있다.
요가의 목적은 생각하는 마음을 순수의식 속의 그 근원과 합일되게 하는 것이다.
현대적 용어로 말하자면 '순수의식'은 모든 물질과 에너지의 자궁인 정적 속의 텅 빈 공허, 즉 양자공간을 의미한다. 순수의식은 생각과 생각 사이의 틈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일어나는 모든 정신 작용의 변하지 않는 배경이다.
우리는 보통 그런 상태가 존재하는지를 의심해 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깨어 있는 의식을 채우고 있는 생각, 바람, 꿈, 공상, 감각 등으로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고대 인도의 현인들은 마음으로 하여금 양자의 심연 속에 있는 근원을 보게 하기 위해서 명상이라는 특정한 기법을 고안해 내야만 했던 것이다.

월리스가 연구에 착수했을 당시에는 명상의 메커니즘에 관한 과학적인 이해의 수준은 보잘것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명상에 들면 신경계가 '편안한 각성' 상태, 즉 신체가 깊은 이완상태에 빠지지만 마음은 깨어 있는 상태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최초로 보여 준 사람이다(월리스는 이것을 생리학 용어를 빌어서 '대사저하적 각성상태 hypo-metabolic wakefulness'라고 불렀다.
이것은 명상하는 사람의 의식은 깨어 있지만 신진대사가 줄어든다는 것을 뜻한다).
처음 발견했을 때 이 편안한 각성의 상태는 의학계로부터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휴식상태와 각성상태는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수면은 산소 소모량이 감소하고 심장박동수가 줄어들고 의식이 희미해지는 신진대사저하 상태이다.
반대로 각성상태는 산소 소모량이 높고 심장박동수가 빠르며 마음이 깨어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월리스는 이 상반되는 상태가 명상상태에서는 통합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의 TM 실험대상자들은 초월상태(순수의식의 체험을 느끼는 상태)에 들어갈 때마다 단추를 누를 수 있을 만큼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수면보다 두 배나 깊은 휴식상태에 빠져들었다.
게다가 우리가 수면중에 가장 깊은 이완상태에 도달하려면 4~6시간이 걸리는 데에 비해서 그들은 매우 빨리, 보통 눈을 감은 지 10분 만이면 할 수 있었다.

1978년부터 월리스는 명상이 인간의 노화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편의상 전반적인 노화상태를 손쉽게 측정할 수 있는 지표로서 세 가지 생리적 노화현상, 즉 혈압, 근시력, 청력범위 등 늙을수록 점차 약해지는 기능들을 택했다.
그는 이 모든 지표들이 장기간의 초월명상 수련을 통해 개선되어서 생리적 노화현상이 실제로 역전된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었다.
TM 기법을 5년 이하의 기간 동안 규칙적으로 수련한 사람은 평균적으로 시간적 연령보다 다섯 살 젊은 생리적 연령을 나타내었다. 5년 이상 명상한 사람은 시간적 연령보다 평균 열두 살 젊은 생리적 연령을 보였다.
이러한 결과는 젊은 사람에게나 늙은 사람에게나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 이후에 단체보험에 가입된 2,000명의 명상가들에 대한 전반적 건강상태 조사를 해 본 결과, 그들이 모든 연령대에서 눈에 띄게 양호한 건강상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TM 수행자들은 병원에 드나드는 횟수가 대조군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열세 가지의 주요 건강지표에서는 대조군보다 심장질환이 80퍼센트 이상 적고 암이 50퍼센트 적은 것을 비롯하여 전반적으로 상태가 좋았다.
특히, 65세 이상의 명상가들은 상태가 가장 많이 호조되었다.
10년 후에 나는 이러한 이점들이 내가 노화의 주요 지표로서 논해 왔던 종류의 호르몬들과 정확히 연관되어 있는지를 조사하는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나는 1980년부터 환자들에게 TM 수행을 권하고 나 자신도 수행을 계속해 왔다. 1980년대 말에 동료인 제이 글레이저Jay Glaser 박사가 매우 흥미로운 스테로이드의 일종인 DHEA (dehydropiandrosterone)라는 물질에 관한 자신의 연구에 나의 참여를 권해 왔다.
DHEA는 부신피질에서 분비되는 풍부하지만 잘 연구되어 있지 않은 물질로서 에스트로겐estrogen,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 등의 성호르몬보다도 수천 배나 많은 양이 혈류 속에 순환되고 있는데, 이것이 신체 내에서 정확히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글레이저 박사는 DHEA의 성질 중에서 그것이 노화와 함께 직선적으로 감소되는 유일한 호르몬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연구를 해 보기로 하였다.
DHEA의 양은 25세를 전후하여 절정이 되었다가 갱년기 이후에는 가속적으로 떨어져서 말년에 가서는 최고치의 5퍼센트로 감소된다.
DHEA는 아드레날린이나 코르티졸과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의 선구先驅물질로 알려져 있었다.
이것은 신체가 이러한 호르몬들을 만들어 낼 때마다 체내에 탄생시부터 저장되어 있던 DHEA의 일부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DHEA가 시간이 감에 따라 양이 감소해 가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감소 자체가 노화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은 다만 생애에 걸쳐서 계속 누적되고 있는 스트레스를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말에 템플 대학의 생화학자인 아서 슈바르츠Arthur Sch-wartz는 DHEA를 생쥐에게 투여하여 눈에 띌 만한 노화의 역전현상을 관찰함으로써 굉장한 흥분을 일으켰다.
늙은 생쥐는 젊음의 활력을 되찾았고 털은 매끄럽고 윤기나는 모습으로 되돌아왔으며 저절로 발병한 것이든 인공적인 방법으로 발생시킨 것이든 간에 초기증상의 암이 사라져 버렸다.
뚱뚱한 놈들은 정상 체중으로 돌아왔고 면역반응이 증가되었으며 당뇨증을 가진 쥐는 증상이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모든 호르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부작용의 위험성이 있고 소화과정에서 분해되어버리기 때문에 DHEA를 경구제로 복용하는 것은 거의 소용이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DHEA 분자의 변형물질에 대한 특허권 경쟁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와 마찬가지로 글레이저는 DHEA가 신체의 스트레스에 대한 노출도를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스트레스가 가중됨에 따라 글루코코티코이드가 증가하여 DHEA의 비축량도 동시에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편으로 DHEA치가 높은 것은 관상동맥 질환, 유방암, 골다공증 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감소되는 것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노인성 장애들이 과도한 스트레스 반응과 관련되기 때문에 이것은 개연성이 있다.
높은 DHEA치는 또한 긴 수명과 노인성의 모든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 감소와 관계가 있다.
이 사실에 대한 그 이상의 증거로서,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의 코르티졸치가 눈에 띄게 올라간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수술 이튿날에도 코르티졸치는 그대로 유지되고 DHEA가 약간 상승한다. 2주일이 지나면 코르티졸치는 아직도 그대로이나 DHEA는 떨어져 있다. 이것은 DHEA 비축량이 스트레스에 의해 소모되었다는 이론을 뒷받침해 준다.

이 증거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논리적 결론은 DHEA치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신체가 스트레스를 견뎌 내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고 스트레스 반응이 적어짐으로써 노화도 지연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TM 수행자들이 생리적 노화현상을 적게 보인 원인에 대한 단서일까? 분명히 그렇다.
글레이저는 328명의 경험 많은 명상가들의 DHEA치를 1,462명의 일반인들의 것과 비교해 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호르몬인 DHEAS(dehydropiandrosterone sulfate)를 관찰한 것이었다.)
그는 조사 대상자들을 연령과 성별로 구분했다. 여성의 경우 모든 그룹에서 명상하는 사람들의 DHEA치가 높았다. 남성의 경우에는 열한 개의 그룹 중에서 여덟 개의 그룹이 같은 결과를 보였다. 젊은 사람들일수록 높은 DHEA치를 보이므로 글레이저는 이것을 생리적 노화가 TM 수행의 결과로 감소된다는 증거로 보았다.
흥미롭게도 나이가 많은 대상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차이가 나타났다.
45세 이상의 명상가들은 남성의 경우 23퍼센트, 여성의 경우 47퍼센트나 더 많은 DHEA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 인상적인 결과는 식이요법이나 운동, 알코올 섭취, 체중 등과 같은 요인들과는 상관이 없었다.
글레이저는 전체적으로 명상가들의 DHEA치는 그보다 5 내지 10년 젊은 사람의 것과 동일한 것으로 평가했다.

정신, 육체, 영혼의 연결

DHEA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중요한 것으로 밝혀지든지 않든지 간에 명상과 반反노화와의 이러한 연관성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이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명상은 영적인 수행이다.
그것은 인도와 전체 동양권 사람들의 목표이다. 수백만의 서양인들은 이 때문에 명상을 뭔가 머리 속에서만 하는 비물리적인 일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사실 그 어떤 것도 단지 머리 속이나 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양에 초월명상법을 소개한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를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한 가지 압도적인 논점으로써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즉, 영성은 육체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질병과 노화는 육체가 그 본질적인 목표에 도달할 능력, 즉 완전하고 충족스럽게 정신과 합일될 능력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영적인 성장의 모든 단계에서 가장 큰 협력자는 자신의 육체이다.
이 말이 당신에게 놀라운 것인가? 우리들 대부분은 육체와 영혼이 존재영역의 반대쪽 끝에 서로 떨어져 있다고 믿는다.
허기나 갈증, 고통이나 쾌감 등의 육체중심적인 감각을 느낄 때 우리는 그것을 영적인 체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육체적인 쾌락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는 감각적인 것들은 영혼이 도달할 수 있는 높이에 비해서 저급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영성도 마찬가지로 감각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영적인 사람은 현재의 순간 속에 완전히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체 속에서 완전히 사는 것을 뜻한다.
마하리쉬는 나로 하여금 명상을 노화를 물리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은 정당한 영적 목표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문화는 인체가 자체의 지능 없이 움직이는 비활성 물질의 덩어리, 즉 하나의 기계라고 결론짓는 실수를 범했다.
이러한 잘못된 관념은 우리를 제 2의 오류로 인도했다.
즉, 가장 영적인 사람이란 육체를 버리고 그것의 열정을 부정하는 사람, 혹은 최소한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육체에 대한 이런 식의 선입견은 자연이 우리를 만들어 놓은 취지와는 정반대이다.
자연은 정신과 육체와 영혼에 우리의 개아적 현실의 공동 창조자로서 균형을 부여하였다.
사랑에 빠지는 것에서부터 기도를 하는 것, 당분의 한 분자를 대사시키는 것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가지 일도 우리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육체는 어떤 경험이든지 밝은 대낮의 빛 속에 한데 어루어지게 하는 플랫폼이다.
그것은 신의 실체를 깨닫는 것처럼 심오한 과정을 망라하며, 매순간 진행되고 있는 수백만 가지의 분리된 과정들의 3차원 투사체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영혼이란 근본적으로 자신과는 따로 떨어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육체는 음식, 공기, 물 등을 영혼이 없이도 너무나 완벽하게 처리한다. 정신은 영혼과 접촉하지 않고도 수백만 가지의 일들을 거침없이 생각해 낸다.
우리는 영적인 생활을 한쪽 구석에 미뤄 두는 것은 쉬운 일임을 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어떤 도약을 함으로써 일상의 생활로부터 좀더 고양된 영역으로 가게 되기를 기다린다.

현실의 모든 단면들은 한 가지 신비, 즉 만물을 지배하는 온전히 하나로 이어진 전체wholeness, 존재라는 총체성의 일개 파편이다.

원자, 분자, 바위, 별, 그리고 인체 등은 존재의 물질적 표현이다.
고통과 쾌락은 존재의 심리적인 표현이다.
연민과 사랑은 존재의 영적인 표현이다.
이 물질적, 심리적, 영적 영역들이 서로 균형있게 조화되면 삶은 한 덩어리가 된다.
그리고 이 합일은 위안감과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우주 속의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느끼기만 하면 우리는 자신이 끊임없이 일렁이는 창조와 파괴의 과정 속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과 대면하기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엔트로피를 하나의 물리적인 힘으로써 물리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엔트로피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깨달음의 경지로 올라갈 수가 있다.
가장 심오한 차원으로 내려가면, 지능은 쇠멸에 대한 면역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 몸의 세포는 생겼다가는 없어지지만 세포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육체의 지식은 그대로 남아 대대로 이어져 내려간다.
DNA가 체화시켜 놓은 진화의 지능은 많은 차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우리의 과업은 그 모든 차원을 경험하고 그것을 모두 우리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일이다.
변화의 한가운데에는 엔트로피가 도달할 수 없는 다섯 가지의 깨달음이 있다. 그것은 모든 영적 전통 속에 표현되어 있으며, 시대를 가로질러 개인적인 진화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다.

1. 나는 영혼이다.
2. 이 순간은 그래야만 할 그대로의 순간이다.
3. 불확실성은 사물의 전반적 이치의 일부이다.
4. 변화 속에는 불변성이 주입되어 있다.
5. 엔트로피는 조직력을 가진 무한한 힘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에 위험하지 않다.
이러한 깨달음들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창조와 파괴의 싸움 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이원성의 세계를 뛰어넘게 하기 때문이다.
당장에는 아무리 고통스럽고 비참한 일이라도 모든 일이 지적이고 사랑에 넘치며 질서정연한 한 가지 목적에 바쳐진 것이 되는 일체一切의 경지가 있다.
이러한 통일적인 관점은 그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강요될 수가 없다.
당신이 자신의 고통 속에 갇혀 있고 자신의 삶이라는 드라마 속에 빠져 있다면 그것이 당신의 관점이며 당신은 그에 대한 권리가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고통과 환란의 종식을 원하며 개인적인 진화의 어떤 지점에서 이 다섯 가지의 깨달음이 마음으로 하여금 고통을 벗어나는 길로 인도하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각각의 논점을 새로운 패러다임의 언어로 옮겨 보기로 하자.

1. 나는 영혼이다.

나의 육체적 존재는 시간과 공간 속에 한정되어 있지만 나의 의식은 그것에 제한받지 않는다. 나는 창조와 파괴의 유희인 전체 장場을 자각하고 있다.
물질과 에너지는 하루살이 벌레처럼 존재 속에 깜박거리면서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러나 모든 사건들은 만물을 관철하는 심오한 지능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서로 엮어져 있다.
나는 그 지능의 한 측면이다.
나는 국부적인 사건들 속에 자신을 펼치고 있는 장이다. 나의 영혼은 인식의 렌즈를 통해서 물질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설령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더라도 나는 여전히 나 자신, 즉 의식의 영원한 현존이다.
실질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외부의 어떤 사건도 자아의 느낌을 흔들어 놓지 못할 때 이러한 자각은 현실이 된다.
자신이 영혼임을 아는 사람은 결코 경험의 한가운데에 있는 경험자의 시각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의 내면의 진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유한한 생 가운데서도 영원불멸의 의식을 지니고 있노라."

2. 이 순간은 그래야만 할 그대로의 순간이다.

현재의 이 순간은 영원한 연속체 속의 시공간적 사건이다.
그 연속체는 바로 나이므로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일도 나의 밖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나의 더 큰 자아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 하나의 세포가 신체의 전반적인 작용을 반영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다른 순간들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자각은 자신의 현실을 어떻게 해 보고자 하는 욕구를 버릴 때 생겨난다.
이러한 욕구는 과거의 고통이나 욕구불만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현재를 조작하고 미래를 예상하도록 몰아부치는 것은 지나간 정신적 충격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통일성 속에서는 모든 순간들이 그래야만 할 그대로이다.
과거의 그림자는 오직 현재의 순간 속에서만 가능한 충만함을 깨뜨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매순간은 당신 앞에 펼쳐지고 있는 바와 똑같은 희열과 인식의 가능성을 안으로 받아들이는 깨끗한 유리창과도 같다.
내면의 진실의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욕망은 이 순간의 일부이며,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 주어져 있노라."

3. 불확실성은 사물의 전반적 이치의 일부이다.

확실성과 불확실성은 우리 본성의 두 가지 단면이다.
한 차원에서는 사물이 분명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질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다른 차원에서는 사물은 불확실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움이란 없을 것이다.
진화는 갑작스러운 사건에 의해 전개된다. 가장 건전한 태도는 '미지의 것'이란 '창조'를 달리 표현한 말일 뿐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은 우리를 공포로부터 구해 준다.
공포는 불확실성에 저항할 때마다 일어나는 것이다.
통일성 속에서는 사람은 불확실성의 지혜로움을 본다.
그는 바로 다음의 호흡, 다음의 맥박, 혹은 다음의 생각이 전혀 예측불가능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러한 전적인 개방성으로 해서 질서는 여전히 유지되는 것이다. 반대되는 것들은 공존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실제로는 우리는 모든 상반되는 것들을 우리 자신 속에 안고 있다. 마치 양자의 장이 두 가지의 너무나 상반된 것, 즉 엔트로피와 진화를 포용하고 있듯이. 통일성의 의식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사물의 불확실성은 아무런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확실하기 때문이다.
내면에 있는 진리의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미지를 포용하노라. 그것은 나의 새로운 단면을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에."

4. 변화 속에는 불변성이 주입되어 있다.

생명은 영원한 춤이다.
춤사위의 움직임은 우리의 의식을 통해서 안무된다.
우리의 욕망과 주의력이 우리를 성장의 길로 인도한다. 주의력은 언제나 흘러가는 것이므로 춤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삶의 핵심이다.
매순간이 이 춤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공간의 사건은 의미있고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혼돈 속의 질서이다.
우리가 이 변하지 않는 틀 속에 안전하게 들어 있음을 깨달으면 자유의지의 환희가 솟아날 것이다. 우리의 자유의지가 불확실성과 사고와 재난을 가져올 것을 두려워하면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가 없다.
그러나 통일성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 하나의 선택이 전체의 패턴 속에 받아들여진다.
우리가 갑을 선택하면 장이 우리에게 그것을 마련해 주기 위해 복종한다. 우리가 을을 선택하면 장은 설령 을이 갑과는 정반대의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복종한다.
장은 모든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정의에 의하면 장이란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목소리는 내면으로부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기 상대성 속에서 놀면서 절대성과 친숙해지고 있도다."

5. 엔트로피는 조직력을 가진 무한한 힘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다.

우리의 신체는 혼돈과 질서의 동시성을 반영한다.
혈액 속을 소용돌이치는 음식과 공기와 물의 분자들은 혼란스럽게 움직인다.
그러나 세포 속에 들어가면 그것들은 정확한 질서 속에 사용된다.
대뇌 속에서 깜박거리는 신경세포들은 혼란스러운 전기신호의 폭풍을 일으킨다. 그러나 거기서 나타나는 것은 의미있는 생각들이다. 그렇다면 혼돈이란 단지 하나의 시점視點일 뿐이다.
제한된 의식으로는 무질서하게 보이는 사물도 의식이 확장되면 각기 완벽하게 제자리에 들어선다. 통일성 속에서는 쇠멸과 분해와 파괴를 향하는 모든 발걸음이 질서의 새로운 패턴을 조직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당신의 인식이 소멸 속에서 솟아나오는 탄생을 볼 수 있게 되면 내면의 진리의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득과 실, 정靜과 동動, 생과 사가 교차되는 발걸음을 내딛으며 나는 영원불멸의 길을 가노라."

이것은 단지 설명일 뿐이다.
종이 위의 말이 각자에게 펼쳐지는 그대로의 깨달음(내가 내면의 목소리라고 부른)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본능적으로 불편함을 없애고자 하며, 그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또한 왜 여기에 존재하여 그 내면의 불만족을 종식시키고자 하는가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요구한다.
생명은 그 진정한 본질상 편안하며, 강제되지 않으며, 본능적으로 올바르다.
이것은 자아를 깨달은 상태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임을 뜻한다. 누적된 스트레스는 그것이 일으키는 노화현상과 함께 긴장과 불편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우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한 삶은 하나의 투쟁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고 과거의 두려움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다루어 보려고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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