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교 과정

 (6) 학교의 위치

 초창기에는 학교의 위치가 일정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수송동 94번지에 위치했다가 봉익동 12번지(현재 단성사 옆)로 이전하였다. 물론 이 당시에는 학교의 건물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남의 집 사랑채를 얻어 학생들을 가르친 장소였을 뿐이었다. 그 후 신당동으로 다시 가회동 208번지로 위치를 옮겼다. 가회동에서는 나름대로의 학교 건물이 있었다. 현재 재동국민학교 뒤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고창한 선생의 집을 헐고 새로 지은 것이었다. 종로구 계동 36번지로 옮긴 것은 5년제 대동상업학교 인가를 받은 1934년도였다.

 본교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예로부터 유명한 곳이었다.

 가회동 208번지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기 전에는 이 자리에 계산 보통학교가 있었고, 현재의 본관 3층 건물을 반분하여 동쪽으로 약 4 미터 높이의 대지 위에 목조 2층 건물 (교실 약 10여개 정도가 있었음)이 있었다. 그리고 학교 앞은 산이 가로막혀 있었다.

 계산보통학교의 운영자는 강준(姜 駿) 씨였으며 독립운동가로서 김 구 선생에게 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송금하는 책임자였다. 그는 당대의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특히 서복조 여사(김구 선생 가족보호 책임자),이 인 氏, 박순천 여사, 임영신 여사 등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의 비밀집회 장소는 공평동 (公平洞) 3번지였다.

강준 氏는 사정에 의하여 학교를 제3자에게 넘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적당한 인물이 없었다. 그 무렵 그는 뜻밖의 소식을 접하고 황당하였다. 일본인 종교 단체인 초동(草洞)의 西本願寺에서 그들의 신을 모시는 神官을 이 자리에 건축하기로 하고 총독부에 압력을 요청한 사실을 알게된 것이다.

 이 때에 이인(李仁)씨 (변호사)와 김일봉(金日鳳)씨(인력거협회장)가 강 준씨에게 고창한 선생을 소개하였다.

"고창한씨는 현재 가회동에서 자기의 집을 헐고 校舍를 건축하여 보성소학교를 운영하면서 무산자와 극빈자에게는 무료로 교육사업을 하고 있으나 정소가 협소하여 애를 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조카 광수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에서 활약하고 있고, 고창한씨는 우리 민족의 교육을 위하여 사재를 전부 희사하여 교육 사업을 확장하려고 합니다. 계산학교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고창한씨밖에 없습니다."

 강 준씨는 이 인씨(해방 후 법무장관)에게 고창한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듣고 즉시 공평동에서 동지들과 전체회의를 소집하여 만장일치로 계산학교의 운영권을 고창한 선생에게 넘기기로 하였다.

 후에 이 인씨는 자신의 회상록 (한국일보, 73년 4월 3일)에서 그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서울 장안의 인력거꾼 800명이 조선관에서 고창한씨의 사회 사업을 축하하면서 성대히 축하연을 하였다."

 계산학교를 인수한 고창한 선생은 즉시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우선 재단법인 대동학원과 대동상업학교를 설립하는데 필요한 당국의 인가 관계는 이인(李 仁)씨와 보성보통학교장 김만수씨가 책임지기로 하였다. 그리고 인가(認可) 받는데 필요한 법인의 기본 재산은 고창한 선생의 전재산(全財産)으로 하기로 하고, 허가가 나오면 즉시 가회동 208번지의 가옥을 매도하여 본관 3층 건물(현재의 본관을 반분하여 서쪽에 있는 건물을 말함)을 신축하고, 아울러 강당도 건축하기로 하였다.

 당시 본관 앞에는  왕모래山이 가로막혀서 운동장으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인접해 있는 집을 매입하여 운동장을 확장해야 할 형편 이었다. 그리고 그 때에는 계동과 원서동으로 통하는 고갯길이 운동장 남쪽 끝에 있었다. 그러나 6.25 직후 현재의 아래 운동장에 위치하고 있던 이왕직(李王職) 재산관리사무소를 매입하여 운동장을 연결하고 고갯길은 폐쇄하였다.

 학교의 설립 허가도 받고 인력차부(人力車部)와 물장수협회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교사(校舍) 신축공사도 완성되었다. 이렇게 하여 오늘날의 대동의 보금자리가 계동 36번지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운동장 공사는 아직 미완성이었다. 학교 관계자들의 모든 관심ㅇ느 이제 운동장 확장 공사에 기울여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