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테너에 대하여

 

 

3대 테너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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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ido Domingo-플라시도 도밍고  (1914∼)


 우리 말로 ‘즐거운 일요일’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플라시도 도밍고. 그는 가끔 ‘20세기 후반의 테너 중 누가 가장 뛰어난가’를 가리는 논쟁에서 파바로티와 함께 늘상 도마 위에 오른다. 이 경우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발언을 잘 들어보면 개인적인 선호를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파바로티와 도밍고는 세부적으로 나눠볼 때,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이 서로의 전문 분야를 나눠서 점하고 있다. 같은 작곡가의 경우라도 좀더 리릭한 작품은 파바로티가, 드라마틱한 작품은 도밍고가 나은 것이 당연하다. 파바로티가 천부적인 미성과 시원스런 고음의 뻗침을 자랑한다면, 원래 바리톤이었던 도밍고는 이런 점에서는 밀리지만 탁월한 극적 표현력과 드라마틱한 가창을 장점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밍고는 자신의 의지로 고음을 점령한 인물이다. 그래서 더욱 그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탁월한 배역 소화와 뛰어난 연기라는 측면에서도 도밍고를 능가할 인물은 드물다.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8세 때 멕시코로 건너간 도밍고의 부모는 스페인의 민속 오페라, 사르수엘라 가수 겸 극단장이었다. 멕시코 시티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배우다 나중에 성악으로 전향한 그는 16세가 되던 57년, 사르수엘라 극단에서 바리톤 가수로 데뷔해 젊은 스타 가수로 인기를 모았다. 20세가 되던 61년, 멕시코 시티 가극장에 역시 바리톤 가수로 데뷔했고, 같은해 ‘라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 역으로 테너로서도 데뷔했다. 파바로티와 같은 해에 본격적인 테너가수로 데뷔했으니 활동기간으로 치면 두 사람이 같은 꼴이다. 하지만 도밍고는 당분간 바리톤도 병행했다. 62년부터 67년까지 텔아비브·마르세유·뉴욕 등의 극장들을 전전하던 그는 68년에 이르러 기회를 잡게 되었다. 프랑코 코렐리의 역으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의 마우리치오 역으로 데뷔해 대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이후 베르디가 창조한 돈 카를로·오텔로·라다메스 등의 역할, 푸치니 및 베리스모 주요 작품, 프랑스 레퍼토리들에서 빛을 발하며 메트와 빈 국립 가극장·스칼라 극장·로열 오페라 극장 등을 누볐다. 따라서 도밍고는 파바로티보다 레퍼토리 면에서 폭이 넓다고도 할 수 있다.

사르수엘라에도 계속 출연했고, 리사이틀도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80년대 들어서는 어린 시절 잠시 공부했던 지휘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 오페라뿐만 아니라 교향악단의 지휘대에도 섰다. 90년대 들어서는 ‘라 토스카’ ‘라 보엠’ 등의 오페라 지휘 중심으로 선회했다. 90년에는 아바도 지휘의 빈 국립 가극장 무대에 로엔그린으로 등장하며 바그너에까지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바그너로 선회한다는 것은 성악 역사상 드문 일로 마치 무슨 금기를 깨는 것처럼 받아들여졌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도밍고는 의욕적으로 바그너에 도전, 91년 메트에서 레바인이 지휘하는, 그리고 빈 국립 가극장에서는 홀스트 슈타인이 지휘하는 ‘파르지팔’에 출연했다. 급기야 92년에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데뷔해 레바인 지휘의 ‘파르지팔’에 출연했고, 이는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현재 ‘발퀴레’와 ‘트리스탄과 이졸데’에까지 도전한 상태다. 도밍고의 ‘오텔로’와 ‘아이다’ ‘돈 카를로’ 등은 역시 어떤 것을 들어보아도 수준급이다. ‘오텔로’는 정명훈 지휘로 바스티유 극장에서 녹음한 최근의 음반(DG)이 있다. 아바도 지휘로 스칼라 극장에서 녹음한 ‘돈 카를로’(DG)와 ‘아이다’역시 오래되지 않은 녹음. 영화배우 같은 외모, 연극배우 같은 연기를 과시하는 영상물도 많은 편이다. 그중에서 마젤 지휘, 프랑스 국립 가극장과 함께한 비제의 ‘카르멘’이 가장 유명하다.

 

 


Luciado Pavarotti-루치아노 파바로티(1935∼ )


 파바로티는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테너`서 첫손가락에 꼽혀온 가수다. 성악은 목소리가 악기이기에 그 무엇보다도 타고난 목소리의 탁월함을 필요로 한다. 목소리의 양감, 질감, 색감이 뛰어나고, 고르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면 일단은 훌륭한 가수가 되는 데 지극히 유리하다. 파바로티는 일단 멀리 뻗어나가는 고르고 큰 성량과 목소리의 고운 질감, 맑고 깨끗한 색감 면에서 누구보다 뛰어나다. 테너로서 갖춰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요건─테너 성부의 고역을 노래할 때, 위와 같은 성 질들이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더욱 빛난다는 장점을 갖고 있으므로 그가 ‘최고의 테너’로 꼽히는데는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그는 카라얀과 더불어 20세기 후반에 가장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클래식 음악가다.

1935년 이탈리아의 모데나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한 살 어린 미렐라 프레니와 같은 유모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유모에게서 섭취한 영양분이 특수했던 탓일까. 두 사람은 모두 훌륭한 목소리를 지니고 화려하게 성악계에 등장했다. 프레니가 63년 스칼라에 데뷔한 것에 비한다면 파바로티가 스칼라 무대를 정복한 것은 조금 늦은 감이 있는 1965년, 그의 나이 30세 때의 일이었다. 그 이전인 61년, 레초 에밀리아의 아키레 페리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같은 도시 가극장에서 로돌포를 불러 오페라 가수로서 데뷔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가 20세기 후반을 풍미하는 대가수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63년에 빈 국립가극장에 역시 로돌포 역으로 데뷔했고, 코벤트가든에는 디 스테파노의 대역으로 역시 로돌포를 불러 데뷔했다. 연주활동 초반에 ‘라 보엠’의 로돌포역은‘바로 파바로티 그 자신’으로서 인식되었을 정도다. 97년 3월호‘객석’이 선정한 ‘최고의 로돌포’도 역시 파바로티였다. 이렇게 먼저 이탈리아 밖에서 인정을 받고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64년에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 65년에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 데뷔한 그는 이후 정상급 무대에 뒤늦은 데뷔를 보상이나 받으려는 듯, 거의 철인적인 활약을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에 어울리는 리리코 배역은 물론, 리리코 레지에로까지 자유자재로 소화하며 빛나는 목소리로 가는 곳마다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당시의 주요 레퍼토리는 로돌포를 비롯, 에드가르도(‘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알프레도(‘라 트라비아타’), 만토바 백작(‘리골레토’), 핑커튼(‘나비부인’), 이다만테(‘이도메네오’) 등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 도니제티·벨리니·베르디 등, 거의 모든 벨 칸토 오페라의 배역을 소화하다시피한 그는 80년대 들어 좀더 무게 중심이 낮아진 목소리를 바탕으로 드라마틱한 역까지 자신의 레퍼토리 영역으로 끌어 당겼고, 베리스모 오페라까지 손을 뻗쳤다. 81년 필라델피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콩쿠르를 창설한 그는 90년대 들어서 몇십만, 몇백만 규모의 대군중을 동원하는 야외 공연의 개념을 확립해 나갔다. 상업적이라는 이유로 구설수에도 올랐던 이 공연은 월드컵, 그리고 다른 두 테너와 결합해 ‘스리 테너’로서 모습을 바꿔 이어지고 있다. 그의 음반은 거의 모두가 데카에서 나온 것들이다. 프레니와 함께한‘라 보엠’(72년, 카라얀-베를린 필)이 역시 대표적인 음반으로 꼽힌다. 메타 지휘의 런던 심포니, 그리고 서덜랜드와 함께한 푸치니‘투란도트’도 좋다. 역시 서덜랜드와 함께한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70년), ‘람메르무어의 루치아’(71년)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벨칸토의 명반.

 

Jose Carreras-호세 카레라스(1946∼ )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그는 전형적인 리리코였다. 바르셀로나 음악원에서 배운 그는 68년 바르셀로나의 리세오 가극장에서 도니제티의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로 데뷔했다. 상대역은 역시 스페인 출신의 소프라노 몽세라 카바예였다. 71년 베르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그는 무척 바쁜 일정을 보내며 빠르게 성장했다. 30대에 이르기 전인 75년, 벨리니·도니제티·베르디·푸치니의 레퍼토리를 거의 다 소화하고 스칼라에 등장했을 때는 ‘디스테파노의 재래’로 평가받았다. 30대 이후 목소리에 힘이 붙은 그는 당시에 이미 확고히 자신의 영역을 굳히고 있던 파바로티·도밍고에 비견되며, 또 다른 테너의 전성시대를 이끄는 ‘3두 마차’ 체제를 구축했다. 76년 카라얀의 눈에 띄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돈 카를로’에 출연했고, 77년 ‘라보엠’, 78년 ‘운명의 힘’ ‘돈 카를로’로 스칼라에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나머지 30대는 코벤트가든을 중심으로 ‘나비부인’‘사랑의 묘약’ ‘라 보엠’ ‘롬바르디아 인’ ‘가면무도회’ 등의 완성도 높은 공연을 이끌며 국제적인 명성을 공고히 했다. 79년에는 잘츠부르크에서 카라얀 지휘의 ‘아이다’에서 라다메스 역으로 출연할 정도로 목소리에 중량감이 붙었다. 41세가 되던 87년, 한창 뻗어나가던 그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파리에서 ‘라 보엠’의 영상 촬영 도중 쓰러진 그는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팬들이 기증한 골수를 이식하고 최고의 의료진이 달라붙어 치료한 결과 이듬해 기적적으로 회생했다. 하지만 목소리를 잃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지만 예전의 목소리를 완전히 회복할 수는 없었다. 이후로는 무대에 서는 횟수를 줄이고 꼭 필요한 공연에만 집착해 좋은 결과를 낳았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실질적인 음악감독 역할로 큰 공로를 세운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이후 ‘스리 테너‘ 공연의 성공을 이어오고 있지만 최근에는 체력적인 한계가 눈에 띈다. 카레라스의 목소리는 신선한 청량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정통 벨 칸토와는 약간 다른 듯하면서도 배역에 따라서는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과의 베르디 ‘돈 카를로’(EMI , 78년), 콜린 데이비스 지휘, 코벤트가든에서의 마스네 ‘베르테르’(필립스, 80년) 등도 좋지만 카라얀, 아그네스 발차, 베를린 필과 공연한 비제의‘카르멘’은 명연(DG, 82년)으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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