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사랑과우정사이...

  3. 사랑과 우정사이 ...

또다시 한 달이 지났다.

재수생들에게도 봄은 왔다.

J 학원 주위엔 여러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그 동안 반에선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

반장의 사회아래, 아침 자습시간에 자기소개 시간이 있었고,

지난주 토요일엔 학원 옆의 호프집을 빌려 단합대회도 열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반 아이들은 차츰 서로 친하게 되었고,

교실도 초반의 삭막하고 썰렁한 분위기에서,

부드럽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들도 오로지 공부만 하는 샌님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도 친구를 한 명 사귀게 되었다.

울산에서 올라 온 태욱이라는 친구인데, 태욱이도 매일 늦게 등교를 해,

같이 뒷자리를 앉으면서 친해진 것이다.

나랑 비슷한 점도 많고, 무척 재미있는 녀석이기에 우린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어느날 쉬는 시간에 옥상에서 떡볶이를 같이 먹을 때였다.

" 너 혹시 우리반에서 관심 가는 여학생 있니 ? "

태욱이가 물었다.

" 하~ 아니~ 누가 여자인지도 잘 분간 못하겠던데 뭘.."

" 그래 ?     그렇구나..... "

" 너 마음에 드는 애가 있구나.... ? "

" 응....   개강초 부터 쭉 지켜봤는데..... "

" 하하하 ~~    그래 ?    누구야 ? "

" 이름은 정은원 ...   "

" 글쎄...잘 모르겠다.. 근데 얘기는 해봤어 ? "

" 지난 번 단합대회 때.... 서로 소개 정도 ...... "

" 음..그렇군... 좋겠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 난 심각하단 말이야.... "

" 잘해봐라.... 태욱이 화이팅.... "

이날, 떡볶이를 먹으며 웃으면서 주고 받았던 얘기.....

훗날, 밤새 술을 마시며 눈물을 흘리면서 나눠야 했던 얘기..

봄비가 내리는 어느 토요일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9시가 거의 다 되서 학원에 도착했다.

긴 머리 그 여학생과도 변함없이 교실 앞에서 마주쳤다.

나는 현수가 맡아 놓은 뒷자리에 가방을 놓으며 앉았다.

태욱이는 그 은원이라는 아이를 찾아 갔는지,

앞 쪽의 여학생들이 몰려 앉는 자리 뒤쪽에 앉아 있었다.

' 후후 ~   저기 앉을 정도면 새벽 6시엔 일어 났을 껄 ? '

수업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들어 오셨다.

아이들이 바삐 교실로 들어 와서 자기 자리로 찾아 갔다.

그 때, 깜짝 놀랄 일이 발생했다.

그 긴 머리가 내 옆자리에 앉는 것이다.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앉은 듯, 책을 꺼내 놓고 필기를 했다.

수업 시간 1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지긴 처음 이었다.

쉬는 시간이 되었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있는 나를 계속 물끄러미 쳐다 봤다.

나는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국, 그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 안녕하세요 ~~~ "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 예 ?   예... "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 저번에 단합대회 안 나오셨죠 ? "

그녀가 물었다.

" 예 .... "

" 같은 반인데 우리 알고 지내요 ..... "

" 예 ?   예..... "

" 제 이름은 세희예요,,, 한세희...... "

" 저는 요..   저 ~~   박 건우 라고 해요.... "

" 재수시죠 ... ? "

" 예 ? 무슨 소리예요 ? "

" 올해 고등학교 졸업했죠 ? "

" 아~   예.. "

" 저도요...    그러니까 말 놓죠....."

" 예... 그러죠 "

전혀 재수생 같아 보이진 않았다.

약간 화장을 한 듯 했고, 그렇게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 있고, 끌리는 매력이 있었다.

앞 자리 여학생 몇 명이 오더니 그녀와 함께 웃으면서 교실 밖으로 나갔다.

괜히 내 얘기를 하면서 비웃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둘째 시간이 끝난 후 .....

그녀는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었고,

나는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 혹시 이 노래 제목 아니 .. ? "

그녀가 이어폰을 건내며 물었다.

몇 번 들어 본 것 같았지만, 잘 모르는 노래였다.

" 글쎄.. 잘 모르겠는데.... "

" 내가 좋아하는 노랜데, 제목을 모르겠어...

졸업식때 친구가 녹음해서 선물로 줬거든......

근데, 케이스를 잃어 버려서... 제목도 모르고 가사도 모르겠어. "

" 그래...? "

" 가사가 좋은 것 같은 데... "

" 내가 듣고, 가사 적어줄까 ? 이런거 많이 해봤어..."

나는 그녀에게 카세트를 빌려,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옮기기 시작했다.

' 머리를 쓸어올리는 너의 모습...

  시간은 우리를 조금씩 갈라 놓는데....

  어디서부턴지 무엇 때문인지...

  작은 너의 손을 잡기도 난 두려워 ......

  어차피 헤어짐을 아는 나에겐...

  우리의 만남이 짧아도 미련은 없네.....

  누구도 널대신 할 순 없지만...

  아닌건 아닌걸 미련일뿐.....

  ...........    '

그땐 아무 생각없이 받아 적었던 이 노래의 가사는

훗날, 읽고 또 읽으며 그 의미를 가슴에 새겨야 했던

한 편의 슬픈 시가 되어 버렸다.



4. 비에 젖은 마로니에 ....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돈도 돈이지만, 모의고사 성적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반 인원 97명중에 94등.....

그나마 2명은 시험을 안 봤다고 한다.

오늘부터는 수업 끝나고 남아서 자율 학습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한가지 걱정거리가 생겼다.

저녁밥을 먹어야 하는데, 현수는 새로 사귄 친구들하고

같이 밥을 먹기로 했다고 하고, 태욱이는 하숙집에서 밥을 먹고 온다고 한다.

할 수 없이 혼자 식당으로 올라갔다.

오늘의 메뉴는 미역국이었다.

' 음... 이거 먹고 또 미끄러지란 소린가..? '

식당 한쪽 구석에 앉아 막 숟가락을 들려고 할 때였다.

" 건우야 ? "

세희였다.

" 아 ~~ 세희구나 .... "

" 웬일로 너 이 시간까지 학원에 남아 있니? "

" 응 ... 오늘부터 자율 학습하기로 했어 ... "

" 그렇구나... 그런데 왜 밥을 혼자 먹어 ? "

" 응... 그냥 아는 친구들도 없구... "

" 그래 ? 우리랑 같이 먹자.. 이쪽으로 올래 ? "

" 응 ?   우리라니 ? "

식판을 들고 세희를 따라갔다.

' 에고고.. 이런... '

그 자리엔 우리반인 둣 한 여학생 2명이 앉아 있었다.

또다시 팔다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 우리반 친구들인데 잘 모르지 ? "

" 응 ... "

" 그럼, 서로 소개해.... "

서로 간단한 소개가 있었다.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학생이 태욱이가 좋아한다는 은원이었고,

앞에 앉아 있는 아이는 '최소진'이라 했다.

여자 3명에 둘러싸여 밥 먹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밥이 제대로 넘어갈 리가 없었다.

국을 뜬 숟가락이 자꾸 흔들려서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들에게 말했다.

" 속이 안 좋아서 많이 못 먹겠다. 먼저 갈께.... "

그러나 이후에 더 큰 사건이 일어났다.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그만 팔이 떨려서 미역국을 쏟은 것이다.

그 후 한 여학생의 처절한 비명 소리....

미역을 머리에 뒤집어쓰게 된 사람은 바로 은원이었다.

이 미역국 사건은 그들과 우리가 친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태욱이와 현수도 그 여학생들과 친하게 되었다.

쉬는 시간에 모여서 재미있는 농담을 하기도 했고,

가끔 매점을 같이 가기도 했다.

언제 부터인가는 저녁밥은 우리 여섯명이 항상 같이 먹게 되었다.

주로 학원앞의 분식집을 갔는데, 가끔가다가는 가까운 신촌쪽으로 놀러가,

노래방, 오락실 등을 거치며

자율학습시간에 가까스로 맞춰 들어 온 적도 있었다.

자율학습 시간은 저녁 6시 부터인데...

거의 5시 59분에 뛰어 들어오는 스릴감을 느끼는 것도 꽤나 재미있었다.

태욱이의 입은 늘 찢어져 있었다.

급기야 태욱이는 은원이의 옆자리에 앉은 기쁨을 누리게 되었고,

은원이가 덥다고 하면 옆에서 계속 부채질을 해주며,

은원이의 관심을 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런 와중에 나에게도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세희의 모습이 무척 예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세희의 긴 머리, 티없이 맑은 눈동자...

웃을 때 살짝 보이는보조개, 하얀 얼굴.....

무엇보다도 세희는 너무나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세희를 보고 있으면, 결코 나의 재수 생활이라는 힘들지만은 않을 것 같았고,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씩 여름이 다가 오고 있었다.

6월초의 어느 토요일 오후.....

공부가 잘 안된다며, 태욱이가 날 이끌고 복도로 나왔다.

우리는 복도 창가에 기대앉았다.

" 정말 은원이가 없다고 공부가 안 되는 거냐 ? "

" 응..괜히 기분이 이상하고,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

" 으그 .. 수능 시험이 얼마나 남았다고...."

" 그러게 말야..."

" 근데.. 태욱아... "

" 왜 ... ? "

" 그 사랑이란게 말야... "

" 사랑 ? "

" 응..막연히 그 사람을 바라보면 괜히 기쁘고..뭐 그런 거야 ? "

" 글쎄...... 나도 말로는 잘 표현 못하겠다.... 사랑이 어떤 건지... "

" 그렇구나... "

" 너 누구 좋아하는 애 생겼구나 ? 소진이 ? 세희 ? "

" 하하 아냐.... "

" 설마 은원이 아니야..? "

" 응... 은원이야.. "

" 뭐야 임마 ! 너 죽을래 ? "

" 에고 농담이야..농담... "

한 참 얘기하고 있을 때, 교실문이 열리면서 소진이와 세희가 나왔다.

" 왜들 공부 안하고 나와서 놀구 있니 ? "

소진이가 물었다.

" 응... 태욱이가 공부가 잘 안된데..."

" 왜 ? 은원이가 없어서 ... ? "

" 엉 ? "

태욱이와 나는 깜짝 놀랐다.

" 농담이다..농담.. 왜 그리 놀라니 ? "

세희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 그나저나 우리도 공부 안 되서 나왔거든..

주말인데 우리 어디 놀러 가자..... "

다른 약속이 있다는 현수를 남겨 두고,

우리 4명은 버스를 타고 세희가 잘 안다는 E여대 앞 카페로 갔다.

그 카페 이름은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다.

' forget-me-not '

그곳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진지한 얘기를 나눴다.

대학에 떨어진 후 재수를 하기까지의 힘들었던 나날들...

성적 얘기... 친구 얘기 .. 희망하는 전공에 대해서도.....

세희의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그녀가 마시던 체리주스의 빛깔에 점점 빠져들 것 만 같았다.

비가 몹시 내리던 일요일.....

폭우로 인해 1호선이 한강을 건널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일찍 귀가하라는 학원 안내 방송이 나왔다.

자습을 하고 있던 우리는 가방을 싸서 학원 밖으로 나왔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없다며,

현수가 오랜만에 술이나 마시러 가자는 제안을 했다.

세희와 은원이, 그리고 소진이 모두가 좋다고 했다.

물론 태욱이와 나도 그렇게 하자고 했다.

우리는 가방을 지하철 사물함에 넣어서,

재수생 티를 벗어 버린 후, 대학로로 향했다.

먼저간 곳은 소주방이었다.

술이라면 냄새도 맡기 싫어하는 나였지만, 레몬 소주는 향기가 좋고,

맛도 좋아서 계속 홀짝거리며 마셔댔다.

몇 잔 쯤 마셨을까 ?

난 금방 취하고 말았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현수가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하면, 일제히 웃곤 한 것 같다.

2차로 지하에 있는 어떤 큰 호프집으로 갔다.

현수가 각자 첫사랑 얘기를 하는게 어떠냐고 했다.

술에 많이 취해 있던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좋다고 했다.

현수가 먼저 고 3때의 추억을 회상하며 얘기를 시작했고,

뒤를 이어 태욱이는 울산에 있을 때 사귀었던 여자 친구 얘기를 했다.

소진이는 국민학교때 같은 반 반장을 좋아했었다고 해서

우리들의 야유를 받았고,

은원이는 고등학교때 국사 선생님을 짝사랑했지만,

유부남이어서 포기를 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드디어 세희 차례가 왔다.

나는 자세를 바로하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 난...   첫사랑이 좀 늦어....    "

" 늦다니 ? "

태욱이가 물었다.

" 후후.... 조금 챙피한데 .. 난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어 .....지금... "

태욱이와 현수와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여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그리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 설마 나를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닐까 ? '

세희가 말을 이었다.

"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어.....

아니....아마 나라는 존재조차 잘 모를 꺼야.... "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순간 분위기가 숙연해 진 듯 했다.

나는 두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 후.... 얘들아 미안하지만, 난 아직까지도 사랑이 뭔지도 몰라.. "

조금 전에 비가 멎은 듯했다.

촉촉이 젖어 있는 마로니에의 밤을 걸으면서,

어쩌면 나보다 더 큰 고통을 지니고 있을 세희를 생각하며,

나의 슬픔은 지워 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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