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운명의 시작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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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엄마. 빨리 나와 보세요!"
소란은 청죽소의 안채로 들어오자마자 급히 그녀의 어머니를 찾았다.
" 또 어떤 일인데 그렇게 안절부절 못 하니?"
소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곧 방문을 열고 삼십대 초반의 소부가 걸어나왔다. 그녀는 그렇게 뛰어난
미인이라고는 말 할 수 없었지만 맑은 눈망울에 약간 검은 피부를 가진 나름대로 정이 가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소란이 시끄럽게 떠드는 모습조차 못내 귀여웠는지 입가에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 엄마, 지금 누가 왔는지 알아?"
소란은 마치 큰 비밀을 알아냈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물었다.
" 호, 글쎄. 누굴까? 이렇게 소란이가 좋아하는 것을 보니 분명 대단한 사람일텐데............."
두청옥은 이미 총관인 장유권(張柔拳)에게 그녀의 남편이 돌아온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소란을 위해 마치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 엄마, 빨리 맞추어 봐."
소란은 두청옥이 곤혹스런 표정을 짓자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대답하기를 재촉했다.
" 글쎄............소란이가 이 정도로 좋아할 정도면 몇 명 안 되는 사람 중 에 한 명이
분명한데................음.......혹시........"
" 혹시...............?"
소란은 두청옥의 다음 말을 기대하며 얼마나 긴장했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 혹시...........혹시 말이다 네 아버지 아니니?"
" 어, 엄마. 어떻게 알았어?"
소란은 단번에 두청옥이 운광의 귀환을 알아채자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그것은 말이다................................비밀이란다."
두청옥은 소란의 표정이 재미있었던지 웃음을 지으면서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 에이. 그러지 말고 엄마 말해 줘. 정말 어떻게 알았어?"
" 하하하, 또 소란이가 어리광을 부리나 보군.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다 큰 숙녀라고 자랑하더니 그것이
아니었나?"
어느새 운광이 궁과 함께 안채로 들어서면서 소란이 두청옥에게 매달려 응석을 부리는 것을 보고는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 어...........? 그러고 보니 아빠가 나보다 먼저 엄마한테 왔구나!"
소란은 대충 짐작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허허, 소란이 네가 먼저 출발했는데 이 아빠가 먼저 왔다는 누명을 씌 우다니 정말 너무 하구나."
운광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 어, 그럼 아니야?"
" 물론!"
운광의 단호한 부정에 소란은 다시 어리둥절해 졌다.
" 그러면 엄마는 어떻게 알았지?"
" 소란아,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니?"
궁은 소란이 너무 심각하게 고민을 하자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응, 얼음 삼촌. 소란이는 너무 궁금하단 말야."
" 하하하, 하지만 소란아. 너의 어머니도 내가 누구인지는 모르니 다행이지 않느냐?"
궁은 그때서야 소란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을 일깨워주었다.
"어, 그러고 보니...........................엄마, 이 아저씨가 누구인 줄 알아?"
소란은 궁의 말에 금새 의기양양한 얼굴로 두청옥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것은 절대 모를 것이라는 의미로.
"글쎄.....................그것만은 이 엄마도 모르겠는데...................저 아저씨가 누구인지 우리 소란이는 아니?"
예상대로 두청옥은 궁이 누구인지 몰랐고 또 소란이가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에 대하여 상당히 궁금한
표정이었다.
"흥, 엄마도 모르는 것이 있구나! 내가 알려줄게. 이 얼음 삼촌은 얼마
전에 아빠 동생이 된 사람이야. 응........그러니까.............그것이 무엇이었지.........에이, 모르겠다. 그냥
아빠의 동생이니까 엄마의 동생이야."
소란은 궁과 두청옥의 관계가 잘 생각나지 않자 대충 말을 하고는 무엇이 못마땅한지 얼굴을 찡그리면서
밖으로 달려나갔다.
아마 누군가에게 그 두 사람의 관계를 물어보려고 가는 것 같았다.
"허허허, 소란이가 또 누구를 괴롭히려고 ........................."
운광은 소란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짓고는 천천히 정이 듬뿍 담긴 얼굴로 두청옥을 바라보았다.
"청옥, 그 동안 잘 있었오?"
"운광 당신도 잘 다녀왔나요?"
두청옥 역시 소란이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정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덕분에. 당신도 잘 있었나 보군."
그 둘은 궁의 존재를 망각했는지 둘 만의 대화에 빠져 있었다.
"험험!"
보다못한 궁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였다.
"하하하, 이거 아우에게 미안하군. 내가 자네를 잠시 잊고 있었네."
운광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리 당황한 모습은 아니었다.
"허헛. 형님은 정말 대단하군요."
궁은 그런 운광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저 방금 소란이가 제 남편과 의형제를 맺었다고 했는데 성함이 어떻게 .....................?"
두청옥은 한때 청죽소의 우두머리 역할을 할 정도로 여장부였으므로 일반적인 예의에는 구애받지 않았다.
"하하하, 제가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의 성은 전(全)이고 이름은 외자인 궁(宮)입니다. 앞으로 형수님의 신세를
많이 질 것 같으니 많은 도움을 바랍니다."
궁 역시 예의하고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라 곧 호탕하게 자신을 소개하였다.
" 저는 두청옥이라고 해요."
두청옥은 서슴없이 궁에게 손을 내밀면서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역시 형님의 아내다우십니다."
궁은 내심 두청옥의 남자 못지 않은 호탕함에 상당히 놀랐지만 곧 호쾌하게 그녀와 손을 맞잡고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고향이 어디인가?"
"예?............."
갑작스런 두청옥의 남성스런 하대에 궁은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허허허, 아우 놀란 모양이군. 하지만 자네가 이해하게. 워낙 이 사람은 자존심이 강해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거나 신분이 높지 않으면 절대 말을 높이지 않는다네."
운광은 혹시라도 궁이 오해하지 않게 자세히 그녀의 성격을 설명해 주었다. 그제서야 궁은 얼굴 표정을 풀고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 아닙니다. 제가 형수님보다 나이도 한참 어리고 또한 형님의 아내대시는 분께 어찌 .....................더구나
형수님이 하대하시는 것이 저 역시 편합니다. 후후, 워낙 예의하고는 담을 쌓고 살아와서 그런지 누군가에게
존댓말을 듣는다는 것이 낯간지러워서."
"호호호, 역시 운광의 아우답게 호탕하군. 좋아, 내 오늘은 특별히 전 아우를 위해 직접 음식을 만들어 대접할
것이니 사양하지 말게."
이제는 아주 궁을 자신의 동생처럼 생각하는 듯 스스럼없이 두청옥은 그를 대하였다.
` 휴우, 아무리 오랫동안 남자들을 지휘해왔다고 하나 정말 대단하시군. 더구나 나를 본 지가 얼마나 됐다고
저렇게 좋아하시니 ................'
궁은 두청옥의 성격에 놀라는 한편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찡 해 오는 것을 느꼈다. 궁은 아직까지
살아오면서 운광과 두청옥처럼 처음부터 그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대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너무나 감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궁은 그동안의 삶이 너무 험난했고 고생이 심했기 때문에 전혀 그런 마음을
나타내지 않고 잔잔히 미소를 지으면서 고마움을 표했다.
"형수님께서 저를 위해 음식을 마련하신다니 정말 다시없는 영광입니다. 그럼 수고를 끼치겠습니다."
"호호호, 아우를 위해 음식을 장만한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나? 자네는 어서 운광과 함께 안에
들어가 있게. 우선 간단한 주안상을 마련해서 우리의 만남을 축하하세."
오랫동안 남자들과 어울려 생활하다보니 그녀의 말투도 거의 남성화 되어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그녀의
태도가 궁에게는 아무런 거부감도 들지 않게 하였다. 비록 설미라는 소녀로 인해 여자들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없어졌지만 내심으로는 꺼려하는 점이 적잖이 있던 궁으로서는 두청옥의 남성스런 말투에 전혀 거리감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허헛, 청옥이 이처럼 남자에게 잘 대해주는 것은 정말 처음이군. 나에게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운광은 아내의 태도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약간 질투가 어린 시선으로 두청옥을 바라보았다.
"호호호, 그때야 소란이가 워낙 귀엽다 보니 당신이 눈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두청옥은 그녀답지 않게 애교가 섞인 목소리로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허허, 할 말이 없군."
운광은 그녀의 말에 일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형님도 참 생각이 없으십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질투를 다 하시다니. 잘 생각해 보십시오.
형수님이 저를 대할 때의 어투와 형님을 대할 때의 어투를............"
이러다가 부부싸움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스럽던 궁은 대뜸 한마디하였다.
"어, 그러고 보니..................."
그때서야 운광은 아내의 어투가 궁에게는 남성스런 반면 자신에게는 한없이 여성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흥, 이제야 그것을 깨닫다니 정말 당신이라는 사람은...................."
이번에는 두청옥이 화가 난 표정으로 운광을 한번 째려보고는 곧장 주방으로 들어갔다.
"청옥, 그것이 아니라..........."
운광은 그녀의 태도에 당황하여 얼른 그 뒤를 따라가며 그녀를 불렀다.
"흥, 그게 아니면 무엇이예요!"
어느새 두 사람은 주방에서 싸움아닌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그것이 아니고, 나는 다만 당신이 너무 아우에게 잘 해주는 것 같아서 농담삼아 그런 것인데 당신이 그렇게
화를 낼 줄 몰랐소. 정말 미안하구려."
"흥, 그래도 당신이 첫 눈에 반해 아우를 삼을 정도의 남자라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나도 잘
대해주려고 한 것뿐인데 무슨 남자가 그런 것도 모르고 샘을 내요!"
"청옥, 그것이 그냥 농담이었다니까 . 설마 내가 당신의 마음을 모르다 고 생각하는 것이요?"
운광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지라 약간 처량한 표정으로 계속 변명을 하였다.
"흥!"
그런 그의 모습에 두청옥도 마음이 풀렸는지 가벼운 콧소리만 낼뿐 더 이상 무엇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제 좀 마음이 풀렸오?"
운광은 곧 부부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고는 속으로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흥, 어서 나가요! 남자가 칠칠맞게 주방이나 기웃거리고.........당신 동생이 무엇이라고 하겠어요!"
"허허, 알았소. 그럼 이제 화가 풀린 것으로 알고 가겠으니 수고하시오. 나는 동생과 함께 이 곳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오겠오."
운광은 두청옥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몰라 그녀의 말에 재빨리 대답하고는 얼른 밖으로 나왔다.
"후후후, 역시 소문대로 형님은 형수님 말이라면 꼼짝을 못하시는군요."
"아우, 다 들었는가?"
운광은 멋쩍은 표정으로 궁을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하하, 저는 듣고 싶지 않았으나 워낙 형수님의 목소리가 크셔서 어쩔수 없이 듣게 되었습니다. "
"들었다니 할 수 없군. 자,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밖으로 나가세. 어짜피 음식을 만들려면 시간이 걸리니 내
청죽소의 인물들을 자네에게 소개시켜 주겠네."
운광은 궁의 옷자락을 잡고는 그의 아내가 주방에서 나와 또 어떤 트집을 잡을까 두려운 표정으로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허허허!"
궁은 그런 운광의 태도에 어이없다는 듯이 웃고 말았다.
"자, 이곳이 우리 청죽소의 사람들이 사는 죽인거(竹人居)라네. "
운광은 궁을 그들 부부가 사는 집에서 약 두 마장 정도 떨어진 상당히 커다란 집으로 데려와서는 자세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실상 청죽소에서 사람이 사는 곳은 이곳 죽인거와 운광 가족이 사는 집이 전부였다. 그리고 나머지 땅은 모두
식량을 재배하기 위한 곳으로 이곳은 워낙 천가집에서 미운을 받는 곳이라 농사 이외에는 그들의 생계를 유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었다.
"대장님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그들이 죽인거에 들어가자마자 턱수염이 더부룩한 장한이 나오면서 운광에게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를
하였다.
"오, 유관형. 그 동안 잘 계셨오?"
운광은 그를 보자마자 그의 몸을 힘껏 안고는 반가움을 표시했다.
"하하하, 저야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분이 소란이가 말한 대장님과 의형제를 맺으신
분이신지.......?"
"아, 미안하네. 이보게, 전 아우 인사하게. 이곳의 총관이자 나의 친구인 장유관(張柳寬)이라네. "
"만나서 반갑습니다. 전궁이라고 합니다."
궁은 비록 턱수염으로 인해 얼굴이 반정도가 보이지 않았으나 사내다움이 물씬 풍기는 유관에게 첫눈에
호감을 느꼈다.
"하하하, 만나서 반갑소. 나는 천가집의 골칫덩어리인 청죽소의 총관을 맡고있는 장유관이라고 하오. 보아하니
꽤 높은 무공을 익히신 것 같은데 앞으로 많은 지도 부탁드리오"
유관 역시 이 냉면의 사나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덥썩 궁의 손을 잡고는 정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제가 그렇게 대단하겠습니까? 오히려 유관형의 무공이 상당한 수준이신 것 같으니 제가 마땅히
부탁드려야지요."
궁은 안광이 번뜩이는 그이 눈을 보고는 나직이 감탄을 하면서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유관형이라? 정말 마음에 드는 친구군. 이 곳 사람들은 워낙 예의를 차리는 것을 싫어하는데 혹시 이
곳에 오기 전에 무슨 말이라도 들었소?"
"이 곳이 초행인 저에게 누가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원래 저 역시 그런 자질구레한 예의 따위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 부디 탓하지나 마십시오."
"하하하, 자네는 말을 나눌수록 내 마음에 쏙 드는군. 역시 대장님이 의형제를 맺을 만한 인물일세. 자, 우리
이러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 내가 다른 사람들도 소개시켜 주겠네. 대장님도 어서 오시지요."
장유관은 궁의 성격이 마음에 쏙 들었는지 연신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내 평생 나에게 이렇게 좋은 감정을 품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는데 정말 이 곳 사람들은............................'
궁은 청죽소의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게 좋은 감정으로 대하자 내심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떠나있던 고향집으로 돌아온 기분이라고 할까.
"하하하, 어서 오게.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하나?"
장유관은 궁이 제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곧 그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아, 예."
그제서야 궁은 감상에서 깨어나 멋쩍은 얼굴로 장유관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죽인거는 생각보다 아담한 곳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사방이 대나무 숲이었고 집이라고 해야
토담에 대나무로 겉을 꾸민 것이 전부였다.
"아우, 생각보다 초라해 실망했나?"
궁의 놀라는 모습에 운광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하하, 아닙니다. 생각보다 멋있는 곳입니다. 정말 생각 같아서는 이런 곳에서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
유난히 대나무를 좋아하는 궁에게는 죽인거가 너무나 마음에 드는 장소였다.
"하하하, 역시 자네는 안목이 있는 친구군. 이런 정취를 알고 있다니."
장유관은 궁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마음에 드는지 연신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 와, 운광 아저씨다."
공터에서 놀던 아이들은 운광 일행이 나타나자 일제히 환호를 지르면서 운광에게 달려 들었다.
"어이쿠! 이 놈들. 일 년 사이에 많이도 컸구나! 그래 어디 보자. 웅이는 그사이 덩치가 불었고 상하는 어느새
키가 소란이보다 더 커졌구나!
어, 청하는 벌써 동생이 생겼구나. 하하하, 이거 축하주를 마셔야 겠군."
운광은 일일이 자신에게 안기는 아이들을 살펴보면
서 한마디씩 하였다.
` 아, 바로 내가 바라던 삶이 저런 것이었는데...........................'
궁은 운광과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말 할수 없을 만큼의 부러움을 느꼈다. 아직까지 삶이 온통 죽음과 피의
행진이었지만 실상 그는 이런 전원적인 삶을 늘상 꿈꾸어 왔었다. 하지만 사랑하던 연인과 친구, 그리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여 세상에 대해 증오심을 키우다보니 이런 생각도 마음 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있었는데 지금 다시 죽인거의 삶을 보면서 잃어버렸던 꿈을 되찾은 것이었다.
"하하하, 자네 많이 부러운가 보군. "
궁이 말없이 아이들과 운광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만 보고 있자 장유관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 부럽지요. 저런 것을 늘상 꿈꾸어 왔었으니까.................."
"자네 괜찮은가?"
그렇게 활달하던 궁이 약간 침울한 어투로 말하자 혹시 자신이 잘못 말했나 하여 장유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이 아저씨는 누구에요? 얼굴이 꼭 얼음같네요. "
궁이 유관에게 미처 무엇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운광에게 안겨 있던 아이들이 모조리 궁에게 몰려와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는 신기한 듯이 그를 살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아저씨가 소란이 언니가 말한 그 얼음 아저씨구나. 아저씨 반가워요. 저는 청하라고 해요. "
아이들 중 예쁘게 댕기 머리를 한 소녀가 악수를 하자는 듯이 자그마한 조막손을 내밀었다.
"어...... 어 그래. 반갑구나. 나는 전궁이라고 한다."
궁은 어떨결에 자신도 손을 내밀면서 청하와 악수를 하였다.
"하하하, 그 애가 바로 내 딸이라네. 그리고 그 아이 등에 업혀 있는 아이는 내 아들 황이고."
장유관은 자신의 딸이 대견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자식들을 소개하였다.
"아, 그러고 보니 유관형을 많이 닮았군요, 특히 아드님은 정말 아버지를 쏙 빼다 박은 모습입니다."
"하하하, 그럼. 나를 닮아 얼마나 멋있고 사나다운 놈인데."
장유관은 이제 돌이 될까말까 하는 자신의 아들을 보며 자랑스럽게 대답하였다.
"피이, 아빠가 뭐가 사내다워. 항상 엄마한테는 쩔쩔매면서......."
청하는 어림없다는 듯이 혀를 샐쭉 내밀면서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험험!"
장유관은 내심 당황하여 가볍게 헛기침을 하였다.
"하하, 청하 역시 소란이와 막상막하군요."
궁은 청하의 당돌함에 어이없다는 듯이 웃고 말았다.
"얼음 삼촌! 그것이 무슨 뜻이예요?"
어느새 다가왔는지 소란이가 그의 옆에 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이런, 소란이가 있다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군.'
궁은 일순간 당황을 했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 변명을 하였다.
"흠흠, 그러니까 그 말이 말이다.............음, 우리 소란이와 청하가 모두 예쁘고 귀엽다는 말이란다."
"호호호, 그런 뜻이었어요. "
역시 어린 나이의 소란이는 궁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얼굴을 붉히면서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으, 질렸다. 어떻게 친어머니도 아닌데 저렇게 형수님과 성격이 똑같은지....'
궁은 내심 소란이의 태도에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운광과 유관을 바라보았다.
"............."
하지만 그들도 할 말이 없는지 괜히 엉뚱한 곳을 바라보면서 궁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휴우, 두 분 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하하하, 뭐 그런 것 같고 그러나!"
장유관은 궁의 말에 사정도 모르고 짐짓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곧 운광이 그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얼굴을 찌프리자 그제서야 웃음을 멈추고 멋적은 표정을 지었다.
"으음, 그러니까 말일세. 내 말은.............."
"휴유, 되었습니다. 제가 이 곳에 적응을 해야지요."
궁은 유관이 미처 무엇이라고 하기도 전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그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하하하, 이거 처음부터 못난 꼴을 보였나 보군. 이러지 말고 우리 안으로 들어가세. 사람들이 형님과 자네를
위해 술자리를 마련해 놓았다네."
유관은 되도록이면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서 궁과 운광의 손을 잡고 아이들을 피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 아빠 어디가? 또 술 먹으려고?"
청하와 소란이가 동시에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허, 어린 놈들이 이제는 어른들 하는 일에 일일이 간섭을 하려고 들다니. 너희들은 이제 그만 저리가서
놀거라. 운광 아저씨와 이 아저씨는 안에서 어른들과 할 말이 있단다. 어서."
아직까지 아이들에게 쩔쩔매던 장유관이라고 보기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험악한 얼굴로 화가 난 듯이 말하자
소란과 청하등의 아이들은 금새 아무말도 못하고 일제히 놀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들도 유관이 웃을 때는
한없이 좋은 사람이지만 일단 얼굴이 굳으면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같이 생활하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순순히 사라진 것이었다.
"호, 유관 형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궁은 전혀 새로운 그의 모습에 놀란 어투로 말했다.
"하하하, 이래보아도 이 곳의 총관인 내가 일개 어린 아이들 하나 다루지 못하면 체면이 어떻게 되겠나? "
"하하하, 그 말이 맞네. 유관 자네야말로 부드럽게 대할 때와 엄하게 대할 때를 잘 아는 대장부 아닌가?"
운광 역시 유관의 그런 수완을 인정한다는 어투였다.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는 모르는 일이군.'
궁은 내심 유관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면서 그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대장님 어서 오십시오. 그 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안에 있던 이십 여명의 사람들이 그들이 들어오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운광에게 인사를 하였다.
"하하하, 개인적인 일로 일년 동안을 밖에서 보낸 저를 이렇게 대해주시니 정말 고맙소이다. 안색들을 보니
모두 편안하셨던 같군요. 참 그리고 청하 어머니 축하드립니다. 아드님이 정말 씩씩하게 잘 생겼더군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더구나 대장님 부인께서 많이 도와 주셔서 그렇게 어려운 일은 없었습니다."
운광의 말에 앞에서 세 번째 자리에 있던 삼십대 중반의 후덕한 인상의 여인이 가볍게 사의를 표하였다.
"하하,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을 가지고 그러십니까? 어서 모두들 앉으십시다. 아, 참 이 사람은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이번에 저와 의형제를 맺은 전궁입니다. 이제부터 한 식구이니 모두 잘 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전궁이라고 합니다. 고향은 수심해이고 나이는 올해 24살입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 부탁드립니다."
궁은 사람들에게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하였다.
"수심해라면 아름다운 호수가 마을 한가운데 있는 남쪽 지방을 말하시는 것입니까?"
사람들 중에 약간 마른 체격의 사십대 장한이 궁에게 확인하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맞습니다. 그런데 형장께서는 어떻게 그곳을 아시는지....?"
"그 곳이 맞다면 저도 한 일년 정도 살았던 적이 있지요. 참 아름다운 곳이었는데........"
"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실례가 아니라면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하하, 이런 제가 실수를 했군요. 저는 한창황(韓彰晃)이라고 합니다."
한창황이라고 밝힌 장년의 사나이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궁에게 가볍게 사과를 하면서 자신을 소개하였다.
"아, 한 형이었군요. 이런 곳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그런데 혹시 철포삼 종류의 외공을
익히셨습니까?"
궁은 한창황의 두 손이 새까맣게 변해 있는 것을 보고 외공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하하, 역시 대장님의 아우답게 나의 무공도 잘 알고 있군. 맞네. 나는 철묵신공(鐵墨身功)을 익히고 있다네."
한창황은 이제부터 궁 역시 한 식구인지라 서슴없이 그에게 말을 놓았고 자신의 무공도 특별히 감추려 하지
않았다.
"오, 철묵신공이라면 과거 백 년전 흑사황(黑死皇)의 호신기공 아닙니까! 그 무공은 이미 사라진 줄 알았는데
한 형께서 익히고 계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하하하, 운 좋게도 이십 년 전에 비를 피하다가 우연히 어느 동굴에서 썩은 시체 한구를 발견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흑사황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지."
원래 성격이 솔직한 것인지 아니면 이제부터 궁을 한 식구로 생각해서 그런지 한창황은 자신의 무공내력도
솔직히 말해주었다.
"아, 그런 행운이 있으셨군요. 그런데 그 무공을 십 성 이상 연마하면 온 몸이 새까맣게 변한다는데 그것이
정말입니까?"
궁 역시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철묵신공을 익힌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것은 사실이예요. 마치 하루종일 숯 덩어리에서 구는 것과 같이 온 몸이 새까맣게 변해서 정말 보기 싫어요."
어느새 한창황의 옆에는 삼십대 후반의 약간 뚱뚱한 여자가 창황을 보면서 징그럽다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어허, 이거 동생들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군. 그러는 당신은 그 빙옥수(氷玉手)인지 빙옥수수인지 모를 괴상한
무공을 익혀 양팔이 핏줄이 보일 정도로 새하얗게 변해서 얼마나 소름끼치는지 아시오?"
창황은 그의 아내의 빈정거림에 그도 지지않는다는 듯이 그녀의 무공을 비웃었다.
"뭐, 뭐라구요! 다시 한 번 말해 보세요!"
"하하하,형수님 진정하십시오. 어디 한 형님이 나쁜 뜻으로 말하셨겠습니까?"
운광은 안되겠다는 듯이 한마디 하였지만 그녀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흥, 대장님은 가만있으세요. 그렇지 않아도 언제가는 이 사람의 버릇을 고쳐주려고 했어요."
한창황의 아내 주홍란(株紅蘭)은 이제는 숨까지 씩씩거리면서 곧장 창황에게 덤벼들 기세였다.
"저, 형수님의 성함을 제가 여쭈어 보아도 되겠습니까?"궁은 운광이 서슴없이 형님 형수님 하자 자신 역시 같은
호칭을 사용하였다. 더구나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궁을 제외하고 제일 어린 사람이 이십대 후반이니 그가 말을
놓을 상대는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한창황이 이 중에서 가장 연장자라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호호호, 이거 내가 대장님의 아우에게 처음부터 못난 꼴을 보였군요. 나는 이 새까만 사람과 같이 살고 있는
주홍란이라고 해요. "
홍란은 언제 자신이 화를 냈냐는 듯이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궁에게 자신을 소개하였다.
"그러시군요. 만나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그런데 한 형님 말로는 형수님께서는 빙옥수를 십일성의 경지까지
익히신 것 같으신데 정말입니까?"
궁은 조금전 그녀의 불같은 성격을 보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말문을 열었다
"호호호, 그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러는지 모르지만 사실이예요."
`생각보다 더 무서운 곳이군. 백 년 전의 무공을 익힌 사람을 벌써 두사람이나 알게 되다니.'
궁은 이미 이 곳에 들어오는 순간 상당한 고수들이 모여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정작 궁이 놀란 것은 이들이 자신들의 무공을 마치 자랑하려는 듯이 궁에게 말해 준다는
것이었다. 보통의 무림인이라면 자신의 무공을 어느 정도 감추기 마련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이 곳의 사람들은
너무 솔직했다.
"저 이런 말을 드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너무 믿으시는 것 아닙니까? "
궁은 이런 말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어느 누구도
불쾌해 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이런 일을 많이 겪어 보았다는 듯이 오히려 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하하, 아우가 놀란 모양이군. 하지만 이 곳에서 서로에게 무공을 숨길만큼 솔직하지 못한 사람은 없다네.
더구나 나는 나의 눈을 믿는다네."
"형, 형님!"
궁은 운광의 말에 감격을 금치 못했다. 자신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신뢰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운광의
확신한다는 태도에는 무엇인가 궁의 심금을 울리는 그런 것이 있었다.
"어, 이것 섭섭하군. 아우는 그럼 나를 자신의 동생하나 못 믿는 못난 놈으로 알았나?"
궁이 그의 말에 감격을 하자 짐짓 화가 난 듯한 어투로 운광은 궁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악의가 담겨 있지는
않았다.
"아,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저는 다만 지금껏 저에게 이렇게 잘 대해주시는 분들을 만나지 못 했기
때문에 너무 감격을 해서........................"
"하하하, 자네도 꽤 고생을 하였나 보군. 자, 이제 우리 그런 말은 그만 하고 자리에 앉지. 언제까지 자네 때문에
이렇게 서 있어야 하겠나?"
장유관은 궁의 태도에서 그의 과거 삶이 그리 평탄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자신 역시 좋지 못한
과거가 생각나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모두들 서 있었군. 모두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합시다."
이윽고 운광의 말에 모두 자리에 앉자 그제서야 궁은 본래의 표정을 되찾고 쑥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사과를 하였다.
"형님, 형수님들 모두 저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하셨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하하하, 별 것도 아니니 신경 쓸 것 없네. 그보다 오늘은 대장님도 일 년만에 돌아오셨고 새로운 식구도 생겼고
하니 모두 마음껏 마시면서 이 기쁨을 즐기세."
한창황의 말에 모두 자신의 앞에 있던 술잔을 들고는 기쁨의 축배를 들었다.
"그런데 전 아우는 어떤 무공을 익혔나?"
창황은 궁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는 필시 대단한 무공을 익혔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넌지시
물었다.
"형님과 형수님들이 모두 솔직하게 말하셨으니 저도 그러겠습니다. 저는 과거 백 년 전의 고수셨던 유검(唯劍)
어르신의 검술과 어느 무명 노인께 공력을 전수받았습니다."
"오, 유검 어른이라면 평생을 검에만 바친 일세의 검객으로 그 당시 검으로는 적수가 없으셨던 분이 아니신가!
더구나 공력을 전수 받았다면 필시 자네의 내공도 대단할 터인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창황 형님과 형수님의 무공도 백 년 전부터 무림인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
아니었습니까. 더구나 저는 아직 십성의 경지에 밖에 이르지 못해 그리 자랑할 만한 것도 안 됩니다."
순간 모여 있던 사람들은 궁의 말에 일제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궁의 말대로라면 이미 검에서는 절정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닌가!
"허, 정말 대단하군. 말이 십성이지 그것 역시 이르기 어려운 경지 아닌가? 듣자하니 현 무림 최고의 검객인
검미광(劍美狂) 선배의 검술이 과거 유검 어르신의 검술에 필적한다는데 정말 자네가 그런 경지라니 놀라울
따름이네."
"아무리 제가 유검 어르신의 검술을 익혔지만 어찌 검미광 선배와 비교하겠습니까. 더구나 백 년동안 검술도
많은 발전을 하여 지금의 검술과 백년 전의 것을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궁은 어디까지나 겸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내심 자신의 무공 내력을 완전하게 밝히지는 못했다. 나머지
무공 내력까지 밝힌다면 그의 과거 신분이 밝혀질 것이고 그러면 그 순간부터 어쩔 수 없이 피의 행진을 또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도 지금까지의 그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버리고
그를 적대시 할 지도 몰랐다. 더구나 그도 이제는 이 곳의 사람들처럼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가정도 갖고
아이도 기르고.......................
`그러고 보니 백 소저가 잘 있는지 궁금하군. 혹시 내가 말없이 떠나 슬퍼하는 것은 아닌지...........................'
궁은 어느새 자신의 가슴 속 깊이 새겨진 청순한 설미의 영상을 떠올리며 걱정을 하였다.
"아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
궁이 설미의 생각으로 잠시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있자 운광이 궁금한 듯이 물었다.
"아, 아닙니다. 잠시 어떤 사람이 생각나서.............."
"허허허, 아우가 생각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누구인지 정말 궁금하군. 필시 고강한 무공을 지닌 사람이겠군?"
" 아닙니다. 그 사람은 무공의 무자로 모르는 연약한 사람입니다. 더구나 불치의 병으로 인해 거동하기도 매우
불편한지라........................."
문득 설미의 절증이 생각나자 그녀와 한 약속이 생각났다. 삼 년 안에 반드시 자신을 찾아 와 달라는 애절한
목소리와 함께.
"으음, 그런 불쌍한 사람도 있었군. 그런데 아우와 그 사람과는 어떤 관계인데 그렇게 걱정스런 얼굴인가?"
운광은 궁이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궁금한 것이 많아졌고 그가 자신의 아우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도 그때서야 깨달았다.
" 그 사람은 바로 제 생명을 구해 준 구명지은(求命之恩)의 은인입니다."
"으음, 자네가 걱정할 만하군. 그런데 어떻게 자네처럼 대단한 무공의 인물이 그런 위급한 경우를 당했나?"
창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어투로 궁에게 물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십성의 유공 검술의 소유자에 공력 또한
대단한 궁이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그것은 제 평생 다시는 생각하고도 싶지 않은 일인지라 차마 말씀드리지는 못하겠고 다만 크게
믿었던 친우들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저런! 그런 사람같지도 않은 놈들이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짓을.......!"
궁이 말에 신의를 중시하는 청죽소의 사람들은 일제히 분노했다. 그들의 머리로는 도저히 생각지도 못하는
끔찍한 일을 궁이 겪었다니 화가 나고 놀랄 만도 할 일이었다.
"맞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습니까? 전 아우 그들이 누군가?
우리들이 그 원한을 갚아 주겠네."
유관 역시 궁의 말에 얼굴을 붉히면서 금새라도 뛰어나갈 기세였다.
"이렇게 제 일에 나서주시니 정말 무엇이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제가 직접 그
대가를 치르게 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어서 술을 드시지요. 괜히 저 때문에 좋은 분위기를 망치는
것 같아서 너무 죄송합니다."
"전 아우, 감사라니! 앞으로 우리들 앞에서는 그런 말을 쓰지 말게. 이제는 모두 한 식구이니 당연히 자네 일은
우리의 일이 아닌가? 정말 섭섭하군. 하지만 다행이 자네가 원한을 갚았다니 그것은 축하하지 않을 수 없군.
자, 이제 전 아우 말대로 술을 들면서 오늘의 좋은 일들을 축하합시다."
운광은 짐짓 화가 난 얼굴로 궁에게 한마디하고는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의 앞에 놓여진 잔을 들어 먼저 술을
마셨다.
"형님,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자, 어서 드시지요."
궁은 얼른 주위를 둘러보면서 사과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청죽소와 우리 모두의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새로 식구가 된 전 아우를 위해서! 자, 마십시다."
창황의 말에 궁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술잔을 들어 건배(乾杯)를 하였다.
"하하하, 오늘은 정말 기쁜 날입니다. 이렇게 저를 아껴주시는 여러 형제들이 생기고 또 멋있는 형님까지
얻었으니 아마 제 생애 최고의 날일 것입니다."
궁은 운광이 따라주는 술을 받고는 기쁘다는 어투로 말하면서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일일이 인사를 하면서 그들에게 술을 권하고 또 받으면서 그 기쁨을 마음껏 즐겼다.
"하하하, 좋아, 좋아. 앞으로 잘 지내보세."
"호호호, 저에게도 아우가 생기는 날이 있군요."
여러 사람들과의 인사 속에서 궁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술을 마셨고 청죽소 사람들 역시 평소에 호탕하다고
자랑한 것과 같이 여자들까지 정말 마음껏 취하도록 술을 마시면서 그 기쁨을 즐겼다.
그리고 어느새 날이 어두워 졌고 한 두 사람 씩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어느덧 자리에는 운광과 유관 그리고 궁만
남게 되었다.
"하하하, 형님 도대체 이 곳에는 고수가 얼마나 있습니까? 도대체 만나는 사람마다 무공이 모두 뛰어나니
소제는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비록 술에 취해 물어 본 것이지만 궁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 무림에
나가면 일류 고수 소리를 들을 정도로 무공이 뛰어나 가히 한 지방을 주름잡을 만큼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아우가 놀란 모양이군. 하지만 이 곳에서 무공을 익히고 있는 사람은 여기 모여있던 사람들과 형수님
밖에 없다네. 더구나 우리는 누가 청죽소를 건드리지 않는 이상 어느 누구와도 싸울 마음이 없다네. 또한
인원수가 너무 적기 때문에 무림에 나간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지. 다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무공을 익혔고 이왕 익히는 것이면 일류 소리는 들어야 한다는 자존심으로 아직까지 꾸준히 익히고
있는 것뿐이라네."
유관은 궁이 말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금새 알아차리고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렇군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만약 저에게 이런 고수들이 있었다면 당장 무림에 뛰어들어 이름을 날렸을
것입니다."
"하하하, 전 아우는 젊으니까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일일지 모르지. 하지만 이 곳에 있는 형제들은 모두
한 번씩의 큰 좌절을 겪어 보았고 이미 젊은 시절을 모두 보냈다고 할 수 있어서 피비린내 나는 무림의
삶보다는 이처럼 평화스런 전원적 삶을 더 원하지."
운광은 잠시 회상에 잠긴 목소리로 궁의 말에 응답을 하였다.
"으음, 형님 말에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하루라도 피 냄새가 가시지 않는 무림보다야 이 곳의 생활이 백 배
낫지요."
궁 역시 처절했던 과거가 생각나자 인상을 찡그리면서 나직히 중얼거렸다.
"흥,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래 내가 음식을 준비하고 기다린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고작 여기에서
술주정이나 하고 있어요! "
"형, 형수님!"
"어, 당신이 여기에는 웬 일이오?"
어느새 왔는지 두청옥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방에서 도망치듯 나가는 유관의 등을 한참 쏘아보다가 궁과
운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순 새파랗게 빛나는 두청옥의 눈빛에 궁은 찔끔했지만 이미 술에 취한 운광은
그런 것에 신경쓸리 만무했다..
"헛, 웬 일이오? 나 참 기가 막혀서. 내가 몇 시진 전에 전 아우를 위해 음식을 장만해 놓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사람이 이 곳에서 죽치고 앉아 술을 퍼마시고 있어요! 오, 그러고 보니까 일 년 동안 밖에 나가 있었다고
제가 우습게 보이나 본데, 어디 오늘 그 버릇을 반드시 고쳐놓고 말겠어요."
두청옥은 이제는 얼굴까지 새빨갛게 변하여 날카롭게 손을 세우고는 운광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왔다.
"형, 형수님! 잠시 고정하시고 제 말을 좀 들어보십시오. 실은 제가 너무 기쁘다 보니 형님을 지금까지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제가 이렇게 빌겠습니다."
궁은 두청옥의 양 손목이 새파랗게 변하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란 얼굴로 재빨리 그녀를 만류하면서 사과를
하였다.
"헉! 청화장!"
순간 운광의 놀라움에 찬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아이고, 형수님이 청화장(靑火掌)을 익히고 계실 줄이야!'
궁은 두청옥이 익힌 무공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순간부터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청화장(靑火掌).
오십 년 전에 마도에 화가 나기만 하면 손목이 새파랗게 변하는 여고수가 있었다. 그녀가 익힌 무공이 바로
청화장인데 이것의 특징은 시전하는 자가 화를 풀지 않는 이상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적으로
상대방에게 장력이 발출된다는 점이었다. 더구나 횟수가 반복될수록 그 위력은 배가 되는 무공이어서 궁 역시
만만하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시전자의 심기를 그 원천으로 하는 무공이었기 때문에 반 시진 이상
계속적으로 시전하면 심기가 고갈 돼 바로 죽음으로 이어지는 무서운 마공이었다.
오십 년 전의 마도 여고수 역시 아들의 비명횡사에 분노가 폭발해 원흉을 찾다가 그 당시 무림 서열 십 위 안에
들었던 다섯 명의 고수들과 엄청난 접전 끝에 마지막에는 함께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당시 그녀의 무림 서열이
삼십 위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안다면 청화장이 얼마나 무서운 무공인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일단 화가 나기만 하면 시전자조차 감당할 수 없는 무공인지라 정말 상대하기 난감한 것이었다.
"여, 여보 우리 말로 합시다. 아무리 화가 난다고 청화장까지 쓸 것은 없지 않겠소?"그제서야 술이 확 깬 듯한
어투로 운광은 더듬거리며 두청옥에게 사과를 하였다. 그 역시 청화장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고 아직까지
그것 때문에 아내에게 제대로 대들지 못해왔기 때문에 감히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물론 그의 무공으로 그녀를
제압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렇게 되면 그녀의 화는 더더욱 폭발해 결국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운광이 공처가라고 불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엄마, 배고파!"
어느새 소란이가 방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뒤에 서서 그녀에게 투정을 부렸다. 소란은 두청옥의 뒤에 서 있었기
때문에 미처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해서 그런 행동을 했지만 만약 청옥의 얼굴을 보았다면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 만큼 두청옥은 화가 끝까지 치민 상태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소란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두청옥의 양 손목은 원래의 색을 되찾았고 얼굴마저 편안하게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오, 이 엄마가 깜빡 했구나. 그래 우리 소란이가 많이 배가 고팠던 모양인데 미안해서 어쩌지? 우리 아빠와
삼촌은 이 곳에 놓아두고 둘이만 맛있는 것들을 먹자꾸나."
일순간 궁은 그녀의 놀라운 변신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제까지 죽일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던
두청옥이 맞는지 오히려 의심이 들 정도였다. 더구나 두청옥은 소란이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게 말을 했으나
궁과 운광을 바라보는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 없었으니 실로 이해 할 수 없는 여인이 바로 두청옥이었다.
`휴우, 이럴때는 소란이가 너무 부럽군. 그토록 사납던 형수님을 말 한마디로 가라앉히다니. 아무튼 다행이야.
잘못했으면 과거 마도 여고수의 비극을 되풀이 할 뻔 했으니.'
궁과 운광은 어느 정도 두청옥의 화가 가라앉았다는 것을 알자 속으로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해요! 정말 그 곳에서 밤을 세울 거예요! '
"아, 아니오!"
"하하하, 형수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궁과 운광은 두청옥의 날카로운 전음에 깜짝 놀란 얼굴로 밖으로 뛰어 나왔다
"호호호, 삼촌도 역시 엄마에게는 꼼짝 못하는구나."
소란은 궁의 허둥대는 것을 보고는 어느 정도 상황을 짐작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
소란의 웃음에 궁의 얼굴이 단숨에 새빨개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두 모녀가 저렇게 똑같단 말인가! 앞으로 고생문이 훤하군! 훤해.'
궁은 운광의 멋쩍은 표정을 보며 앞으로의 생활을 생각하자 머리가 아파오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