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무직 선생의 최종결론
----------------------김 영 관 (Yeungkwan Kim)
비오는 서울, 오후의 겨울. 박무직에게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제 더
이상 학교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이름은 박무직.
전에는 선생이었다.
원초적 뒤틀림, 자연적 고독과 우수, 본능적 외로움이 뒤엉켜 있는 현재의 박
무직에게 독자들이 얻을 수 잇는 것은 없다. 작가고 선생이지만 둘다 하잘 것 없
는 돈이다. 여기에 술과 담배마저 없다면 도대체 박무직이 하루를 견딜 수 있었
던 날은 거의 20대까지였다.
지금은 나이 마흔, 마흔에 자기의 얼굴에 책임을 지라고 링컨(이제는 이런 기
억마저 어사무사하다)이 말했지만, 박무직의 찌든 얼굴을 독자들은 보지 않고 그
냥 이 글이 재미 있다면 읽어 주시면 고맙겠다. 혹 박무직이나 내가 독자들에게
실례된 말을 해도 다 꾸며낸 이야기니 용서하시기 바란다. 소설이란 또 그래야
재미가 있는 게 아닌가?
난 내가 생각해도 지금부터 박무직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 가야할지 사실 막
막하다. 될 수 있는 대로 간단명료하게 좀 재미있게 쓰려고 하지만 어디 그게 뜻
대로나 되는가? 그러니까 독자 여러분은 지금부터 참자, 참자, 참자를 세 번만 말
해 주길 바란다. 박무직이나 나나 한심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니 아애 맞춤법 따위
는 이 글에서 맞나 안 맞나 보지 않는 게 좋다. 그거 따지려면 차라리 독자들께
서는 신춘문예 당선작을 보시는 게 훨씬 유리하다.
박무직은 참 공룡으로 변신하고 싶었다. 언젠가는 자신이 티라노사우라스로
변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력이 나쁘지만 냄새 하나만은 기가
막히게 잘 맡는 놈, 그래서 공룡들의 세계를 지배했던 놈....
"티라노사우라스가 제일 힘 세지?"
"힘 세다고 왕이 되는 거 아니야?"
그런가? 현실이 그런가? 힘 세고 간사하면 다 다스리는 사람이 되는 거지..
제기랄!
이번에는 고릴라를 그려 달라고 왔다. 그래, 차라리 고릴라가 우직하지, 그래
왕이라면 좋겠다. 착하니까.
이쯤에서 독자 여러분은 박무직이 아까 티라노 사우라스가 되고 싶다고 한 것
에서 이제 고릴라가 되고 싶어졌구나 하고 생각해도 좋다.. 왜냐하면 그는 그 만
큼 흔들리고 있으니까.....
나는 일단 이 글을 쓴 사람이라고 보면 맞고 박무직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보시면 맞다. 그거 누가 모르겠나고 하시겠지만, 독자의 수준을 우롱하느냐고 하
시겠지만 그게 좀 읽다가 보면 헷갈린다. 나도 그런 골치 아픈 소설을 읽어 보았
지만 재미 있는 것 하나 없었다.
박무직은 아까도 말했듯이 티라노사우라스나 고릴라가 되고 싶은 사람이다. 차
라리 인간이길 포기하고 하고 싶은 심정이다. 티라노사우라스가 된다면 포악한
동물이 되는 것이고 고릴라가 된다면 우직무식한 동물이 되는 셈이다.
콘크리트 벽 동물원에 갇혀 그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이 인간들의 세계를 다시
공롱들이 차지하면 어떨까? 박무직은 갑자기 만화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 대통령 선거라고 난리는 아니다. 조용한 겨울, 침통한 한국의 겨울.
박무직은 도무지 사람 만나는 게 아니 부닥치는 게 겁이 났다. 굳은 얼굴,
애시당초 싸울 듯한 언행, 정말 저게 사람일까 싶을 정도의 몰상식한 운전...
이게 1990년대의 서울이었다.
정말 살기 위한 투쟁만이 온 도시를 뒤덮고 있다. 자연은 없다. 자연스러운
것도 없다. 비정과 이기주의, 도대체 친절하고 우수한 우리의 종족들은 다 어디
있다는 말인가? 분명 혈통이 살이 있긴 있을 텐데 아예 밀림 속으로 그 자취를
감추기라도 했단는 말인가???
제기랄!
드디어 대통령 선거일..
박무직은 무료를 달래기 위해 투표장으로 갔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자포자기한 사람들...
질퍽한 학교 운동장.. 흐린 겨울 하늘은 끝내 박무직을 즐겁게 하지 않았다.
아무 할 일이 없는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서양식 합리주의의 부산물처럼
느껴져 박무직은 몸 둘바를 몰랐다. 싱거운 선거... 시금던한 인생.. 실업..
돌이켜 본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아내의 약을 사러 홍릉 쪽으로 갔다.
아내가 약을 사는 동안 박무직은 홍릉에서 기다렸다. 비내리는 홍릉..
비운의 조선 왕 영친왕의 아들 진의 묘가 있는 숭인원과 영휘원에도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공을 찼다. 그리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도 했다.
아내는 찬 비에 손이 저려 오고 있었다.
마냥 웃을 수만도 없는 세상에 박무직은 고독과 우수, 그리고 유머를 원했다.
왜? 강자의 여유를 찾기 위해, 불의를 평정하기 위한 수단이 박무직에게는
한발 물러선 것이 유머였다.
이야기가 맞지 않는다고? 그럴 수도 있겠지...
겨울 바람이 분다. 서울 1997년 12월 10일 아침 영하 10도. 한 낡은
작가는 이렇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박무직이라는 사람에 대해 소설을 쓰고
있다. 박무직이 곧 그라면 더 쉽게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독자들은 생각을
하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박무직이 지금 이 글을 쓰는 작가건 아니건 그건 전혀
상관없다.
돌아온 저녁, 아이들이 붓글씨를 쓴다고 야단이다. 아버지의 벼루, 먹, 붓.
온 손에 먹물을 묻히고 옛날 사람 글씨를 쓴다고 아직 잘 쓰지도 못하는
한글은 뒤로한 채 한자만 써달란다.
어제의 겨울비가 오늘은 첫눈으로 나렸다.
"아빠! 아빤 눈이 좋아, 비가 좋아?"
빤한 물음을 빤하게 묻는 둘째의 말에 박무직은 잠시 시름을 잊는다.
그야 눈이 좋지... 온 세상을 깨끗하게 덮어 주니까..
아이들과 눈싸움을 했다.
손이 시려워도 마냥 즐거운 아이들. 아내는 감기와 손이 여전히 저렸다.
박무직은 또 속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낮잠을 자고나면 늘 속이 뒤틀리는 것이었다. 점시밥을 먹고 금방
잔 것도 아닌데 늘 속이 더부룩하고 답답했다.
움직이면 피곤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담배에 과식에 늘 소화불량 꼴이라니.
비오는 날이면 일요일이면 그 증상이 더했다.
"보고서는?"
"아직 안 썼는데요."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 밤을 새워 쓴 사람 있으니까 다음 주까지 두 번
더 써서 내도록."
박무직의 이런 튼튼한 조치 앞에 제 아무리 약삭바른 학생들도 더 이상
속이려 들지 못했다.또 한번은,
"전 내년에 또 듣죠, 뭐."
요즘 대학생들 대단하다. 군사부 일체라고 이야기했다간 코웃음 치는 소리를
흥, 쳇,하는 여학생들의 건방진 발랄함을 피할 수 없다.
왜 레포트 안 냈느냐는
박무직 선생의 말에 이번
학기 학점으로 낙제하고 다음에 또 듣겠다는 반항적인 농담으로 대드는 소리인
것이다.그래서 박무직은,
"음, 그래.. 하기야 어학은 반복하는 게 좋아."
하고 말했다. 그러자 강의실은 웃음 바다가 되었으니 아까 그렇게 말한 학생도
얼굴이 좀 붉어졌다.
자고 나면 비참해진다는 것, 그렇다고 피곤해 쏟아지는 낮잠을 피할 수도
없었다. 지난 마지막 겨울 학교, 천 명에 가까운 학생들의 답안지와 출석부를
박무직은 혼자서 하나하나 써 넣었다. 대단한 시간과 우선 힘을 요구했다.
그러나 더 절망적인 인생에서 더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박무직은 모든 굴욕과 힘을 참아냈다.
그러나, 박무직은 이제 학교를
그만 두었다.
재미도 없고 그렇다고 돈도 많이 버는 것도 아니도 선생으로서 사명감도
교육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도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박무직 선생이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은 식구들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생각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현실이란 무서운 법이다.
20대와는 다른 강박관념이
현실에 존재한다. 주위를 좁혀드는 하이애나의 무리를 의식해야 하는
것이다.
사자나 호랑이나 들개나 하이애나의 무리는 위협적인 악이다. 선과
고립으로만 지켜나갈 수 없는 동물의 세계, 사람 또한 동물의 근본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후각이 퇴화했지만 우리는분명 동물의 감정으로 사람을
매일 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자 몇이나 될까?
박무직 선생은 지금 운전면허 정지 중이다. 그게 또 그가 학교를
그만두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벌점 40점에 40일간 운전면허 정지, 10월 24일까지 면허증을 00경찰서
교통과로 반납하시오! 정말 청천 하늘 날벼락 같은 소식에 박무직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밥맛을 잃었고 잠도 오지 않고 오로지 하루종일
생각에 고뇌에 빠져 온몸이 저려오곤 하였다.
고속도로 갓길 위반 30점, 버스전요차선 위반 10점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처녀가 애를 배도 하 말을 있다고,이유 없는 무덤없다고 박무직
선생에게도 까닭은 있다. 누가 위반하고 싶어서 위반하겠는가. 더구나
학교 선생이. 나 원 참!
고속도로 갓길 위반은 이렇다.
그러니까 한 보름 전에 박무직 선생은 다음 강의를 위해 숨 고를 겨를도
없이 차를 몰아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판교를 지나 죽전쪽으로 향하고 있을 무렵 이건 차가 인산인해,
아니지 차산차해가 아닌가!! 첩첩첩산중, 설상가상, 갔다나 늦는데 이렇게
차까지 막혔으니 박무직 선생은 오금이 저려 왔다. 숨이 콱콱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서 연신 물과 담배를 먹었지만 길은 뚫리지 않았다. 교통 방송을 틀었다.
그랬더니 이건 왠걸, 죽전 휴게소 지나 고속도로 4차선 가운데 2차선을
막고 공사를 하고 있다나! 아휴, 박무직 선생은 욕이 자절로 튀어 나왔다.
3시 강의인데 지금이 3시였다. 박무직은 혀가 타고 가슴이 꽉 막혀 왔다.
눈앞은 가도가도 보이는 데까지 트럭과 승용차와 고속버스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시계는 이제 3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박무직은 그렇게 쉽게 간단히 갓길로 들어 설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강의
시간이 훨씬 지나고 마음은 점점 조급해지고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이
가물가물 떠오르면서 갓길,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갓길이 아니라
버스나 트럭이 정류장으로 들어서는 길이다.
박무직은 갓길로 들어갈 수 있었으나 들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인내도 한계에 이르렀다. 드디어 전조등과 비상 깜박이를 동시에 켰다. 그리고
그 버스, 트럭 진입로로 들어섰다.뭔가 느낌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바로
다음 순간...
수많은 차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경찰차가 저멀리서 움직이고 있었다.
제기랄!
무슨 영화에 나오 듯 경찰차가 내 차 앞에 가로 막으며 섰다. 마치 도주를
못하게 막 듯 말이다. 박무직은 이미 일이 틀려 버렸다고 느끼고 있었다.
사정해 봐야 안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은 그런 일에 아주 서툴다는
것..
"학교 선생이니 한번 봐 주시오."
박무직은 사정해 보았다.
"안 바쁜 사람 어디 있어요!"
끝에 요, 자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이럴 때는 그렇게 말하는 그 경찰의 그
인상도 그야말로 나쁘게 보이는 구린내 나는 것이었다.
박무직은 이럴 때 맥없이 순종하곤 만다, 바보처럼, 전의를 잃고 마는
것이다. 도무지 인간적인 동정이라고는 안 보이는 속에 눈곱만큼도 없는 그런
인간은 있는 것이다.
박무직은 순순히 면허증을 내주었다.
연약한 박무직의 가슴 속에는 벌써 눈물이 줄줄 나려했다...못난 놈...
학생들은 이미 다 가고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가슴 속에 품고 온 6만원의 과태료 딱지만 박무직을 아리게 했다. 정신도
없이 현기증이 났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지만 다시 그 광란의
비인간적인 고속도로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정말 주저 앉아
실컷 울고 싶었다. 다 큰 어른이....
그런 이유와 또 다른 박봉이라는 이유, 또 자신이 못 났기 때문에, 라는 아주
간단한 이유로 박무직은 학교 선생질을 그만두었다. 몇년간 생활이 그러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식구들에게는 너무 일방적인 것이기도 했다.
오직 진정한 지성만이 세상의 아픔의 이치를 아는 것 아니겠는가? 마음이
가난한 자, 지성으로 죽어 가는 자만이 오늘도 괴롭다는 것을 박무직 선생은
알고 있었기에 지친 몸과 마음을 오직 집에 붙들어 두고 쉬고 싶었다. 그 외
아무 딴 이유도 없었다...
이제 학교를 떠나니 시원섭섭했다. 그러나 학교도 더 이상 박무직의 고전은
아니었다. 박무직을 살아 있게끔 느끼게 해주는 곳은 아니었다. 박무직은 원래
누구보다도 싱싱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었건만 학교는 그에게 더 생기를 불어
넣지는 못했다.
고등학교 선생님보다 더 많은 강의량, 일주일에 27시간.. 하루 종일 서서
말하고 이 대학 저 대학으로 옮겨 다녀야 하는 생활에 박무직은 늘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그 피로에 지성도 사도도 진정한 학생도 선생도 사라지고 있었다.
환멸과 좌절감뿐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박무직은 명랑하고 재미있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박무직
자신은 하루하루 살얼음 위를 걷듯 세상을 살아 가고 있었다. 무서운 세상, 뭐
능력과 평등, 자유가 있다고? 웃기는 소리,약육강식의 동물 세계가 바로
사람이라는 동물이며 인간다운 인간보다 그렇지 않는 사기꾼과 나쁜 놈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원래 강인한 정신력, 이런 것들이 모자라는 사람이 있다. 좀 덜 고생한 사람
가운데서 흔히 보이는 이런 나약한 사람이 박무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이미 약삭 빠른 주새끼 같은 놈들과 힘만 무식하게
센 불곰 같은 사람들이 이미 다 장악해놓은 것에 불과하다. 겨우 한
자리를 차지한 선생질에서도 박무직은
지금은 물러난 상태다. 거기에도 이미 강자와 약자가 사도 이전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선생다운 선생님은 거의 찾아 보기가
힘들었다. 혹 있다고 해도 모두 박무직처럼 지쳐 있었다.
너무너무 힘들어서 그만둔 선생질... 그러나 더 힘들게 하루를 생존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지 않는가? 박무직은 침묵했다. 거기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지식은 생존 앞에 언제난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법..
거짓말쟁이와 가짜가 진짜로 판치는 세상,가짠 금방 깨질 법도 한데 오래도
간다. 그러나 가짜는 분명 가짜다. 그것이 진짜에게 자리를 물려 줄 날은
멀지 않다. 진짜 고려청자의 빛은 가짜와는 다르다. 비록 지금은 헛간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다 하더라도, 박무직은 그렇게 가짜를 미워했다.., 지금
이 나라, 이 강산이 온통 가짜가 진짜처럼 행세하고 있다고...
가난한 지성....
이제 무얼 하나?
박무직은 그저 쉬고 있으면서도 안절부절했다.
시골로 따나나? 그대로 머무르나?
도피는 아닌가?
더 시련을 견디어야 강인한 것인가?
차거운 가을 밤바람이 서늘한 박무직의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박인환님의 시(맞나?), 서늘한 내 가슴에 있네...서늘한 내 가슴...
초나라 왕이 장자에게 벼슬을 주려 했다. 그러나 장자는,
"초나라에 귀한 거북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거북이가 죽어 비단에 쌓인 채
옥 상자에 있는 것보단 살아서 진흙 속을 기는 게 낫지 않겠소."
하고 그 자리를 거절했다고 한다. 박무직은 이 글을 오늘 한국일보에서 읽고
몹시 혼돈에 빠졌다. 거북이가 살아만 있다면 비단 속에 쌓여 옥 상자 속에서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장자는 벼슬 자리 자체를 이미
죽은 자리로 보고 있다. 그래서 진흙이더라도 사람 속에 살이 있는 것이
좋다고 했다....박무직은 다시 착잡해졌다.
돌발적이고 돌진적인 정의의 기사, 이게 박무직에게 어울리는 꾸밈말이다.
그러나 돌아서면 그리움과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 들었다. 삐져 나갈
썰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찬란한 백사장, 가을의 바다, 박무직은 고독처럼
쓴 술을 마시곤 했다. 다 '내가 못나서 그런 것..'
박무직은 이제 새로운 일을 뭔가 찾아서 해야 했다.
무얼 하나?
하루하루의 지친 초상만이 초상화처럼 머리에 자꾸 그려질 뿐, 안타까운 날은
흐르고 있었다.
게다가 나라 경제는 파산 상태고 부도를 낸 꼴이니 아이엠에프가 뭐
좋아서 선뜻 몇 백억 달라를 빌려 주겠는가? 물가는 더 비싸지고 실업자는
즐비해지고 남의 돈 빌려 쓰는 조건이 그렇다고 한다.
하기야 박무직은 좀 더 일찍 실업자가 되었으니 더 잃을 것도 없다. 그 점
안심해도 디는 것이다.
한숨만 나오는 서울 도시라는 생활. 땅은 좁고 사람과 차는 많고 그러니
더럽고 답답할 수밖에... 박무직은 이제 겨울 방학이 아닌 겨울울 맞고 있었다.
늦가을, 오늘처럼 비라도 이렇게 주룩주룩 내리면 좀 덜 하지만 그렇지 않고
바짝 메마른 날은 찬 가을 바람이라도 모질게 불어 주기를 바랐다.
아,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인생을 사는 게 잘 사는 것인가?
부는 가을 바람 따라 나 저멀리로 가리?
비 오는 밤, 가을 낙엽, 풍경 소리. 푸른 오후...
외쳐 보았자 공허안 울림.
소리 없는 깃발,
사라지는 아득한 풍선의 비상.
마지막 시험.
학생들은 여전히 책상에 미리 써놓은 것을 베껴 쓰기에 몇몇은 눈치를 본다.
그런 학생들은 대개 얼굴빛이 불고 여학생들은 긴 머리를 눈 앞으로 흥클어지도록
가리게 마련이다. 집에서 수필을 외워 그대로 써라는 박무직의
이상하고도 쉬운 시험에도 몇몇 학생들은 병적인 칸닝을 한다.
정도를 넘어선 흔들리는 상아탑. 하기야 선생인 박무직도 이렇게
흔들리는 판에 감수성 예민한 아직 안정을 찾지 못한 학생들이 오죽
하라!! 그러나 그러나 초소한의 부끄러움과 학생이기에 선생에게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는 갖추어야 하지 않는가? 그게 요즘
학생들에게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 끝난 일이다.....
눈보라, 겨울에 시험치 뭉치를 가득 안고 회한에 젖은 채 돌아서는 발길엔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지 않고는 걸을 힘조차 나지 않았다. 다 소용없는 짓이야...
멀리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뛰어 오고 있었다.
아이들과 성탄절 트리를 만들었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한다. 난 사실 그때도
담배가 피우고 싶은 것을 참고 마지막 꼬마 전구에 불을 켜주었다. 샅타로
분장한다고 솜으로 수염을 단 아이, 솜으로 눈을 만들어 트리에 얹어 놓는 아이...
그런데 그게 하루는 태양이 눈부시게 내리 비치던 날, 박무직은 실직에서 돌
아오는 거리에서 인파에서 그리고 쏜살같이 저만 잘 났다고 무지막지하게 쌩쌩
달리는 미친 자동차와 매연 속에 휩싸이면서 그만 길거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앞
길이 막막하기만 했던 그 긴 시끄럽고 긴 길에서 박무직은 쓰러진 것이다. 밥맛
을 잃은 지 옛날, 어제 저녁부터 먹는 둥 마는 둥 한 탓일까...
박무직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주위가 왁자지껄 했다.
한 마리의 거대한 공룡, 티라노사우라스가 이 땅에 나타난 순간이기도 했다.
119가 오고 온 사람들이 겁에 질려 하면서도 20세기의 영악한 인간들은 티라
노사우라스 앞에서도 호기심을 잃지 않았다.
머리는 사람이면서 몸만 공룡으로 변한 비극이 자신에게 닥쳐 왔다는 것을 박
무직은 깨달았다. 슬퍼할 수도 없는 기막힌 변신이었다. 바로 자신이 변하고자
바랐던 고릴라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때는 이 티라노사우라스를 동경하지 않았던
가?
파충류..... 알을 낳고 햇빛에 체온을 높이는 외온동물...흉칙한 두 눈과 이
빨....긴 꼬리.... 아,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지만 박무직은 이 처참하
고 저기서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는 인간들의 구경거리가 되어야 할 신세...
여기서 독자들에게 먼저 한가지를 밝히고 넘어 가겠다. 독자 자신이 착하거나
아주 지성적이거나 아니면 소설에 아주흥미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여기부터는 읽
지 말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지성이 아닌 자들은 가라.
진정한 지성이 아닌 자들은 가라.
박무직이 공룡으로 변신한 가장 큰 이유도 무자비한 야만의 풍습의 가진 인간
들에게 지쳤기 때문이다. 불쌍하지 않는가? 학교 선생이며 작가인 박무직이 오죽
했으면 자신의 몸이 차라리 티라노사우라스로 변신하길 바랐겠는가!
이제 몸이 흉칙한 공룡의 모습으로 변한 이상 그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자존심
은 두뇌밖에 없다. 그러나 머리 좋다는 공룡 이야기를 들어 본적은 없다. 하기야
공룡 몇 마리박에 나오지 않게 돈 덜 들여 가며 겨우 몇 분 나오는 쥐라기 공원
영화에서 영악한 공룡이 총을 쏘는 사람의 뒤를 기습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
만 그건 영화다.
이건 적어도 지성을 가진 작가가 선생이었으며 또한 나와 같은 소설가 이야기
를 쓰고 있는 소설이니 그런 공룡 도 몇 분 안 나오며 돈 만 비싸게 받는 영화와
는 다르지 않는가!
별로 다르지 않다고 미천한 소설이라고 여기지는 애독자들도 여기서 더 이상
이 글을 읽지 마라 달라....
하여간에 박무직은 그날 그 채피와 모멸감을 이겨내면서 겨우 남산의 한 줄기
자락이 펼쳔진 옥수동 뒷산으로 몸을 숨겼다. 그 인간을 구출하는 119 구급대가
얼마나 집요하게 박무직을 다라오든지 정말 사람 구출하는데는 112보다 한 수
위였다. 경찰은 총만 소기만 했지 119처럼 자신을 감히 생포하려고는 못했기 때
문이었다.
'우리 아이들도 저 119를 좋아 했었지..'
이제 공룡이 된 박무직은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아이들을 생각했다. 특히 사
내아이는 티라노사우라슬 좋아햇지...나를 보고 겁내지나 않을까? 이게 제 아버지
인 줄 알기나 알까?
박무직은 그런 생각을 하며 기온이 뚝둑 떨어지는 겨울밤을 얕은 산자락에 몸
을 숨긴 채 벌벌 떨며 보내고 있었다. 곰처럼 겨울 잠을 잘 수도 없고 공룡 체면
에 이렇게 숨어서 긴긴 겨울밤을 보내야 하다니 참 목욕적, 아니 이제 공룡이 인
간의 발음조차 잘 되지 않는구나.. 하여간에 몸은 공룡인데 두뇌가 사람의 것이
라는 것이 차라리 고통이라니....
옥수동 아랫쪽은 내일 해 뜨면 시작할 생포 작전을 위해 요란하던 싸에렌 소리
가 점차 사그라 들고 있었다. 아, 여기서 멀지 않는 곳에 박무직의 보금자리 집
이 있었건만 가지도 못하고 하기야 이렇게 큰 몸으로 들어간다면 아내부터 놀랄
것이다. 아이들도 만화나 영화나 장난감 티라노사우라스가 아니 실제 공룡이 나
타난다면 제 아무리 사내 녀석이라고 해도 기겁을 할 것이다. 원래 겉으로만 허
풍 떨고 용감한 척 하는데는 제 아비 뺨 칠 녀석이니까...
박무직은 공룡으로서는 별 걱정을 다 하고 있었다.
이제는 이 모든 것들이 끝났다.
언젠가는 그리울 것이다.
날이 새고 있었다. 밝지도 않는 서울의 태양.... 티라노사우라스는 그 햇빛에
억 년의 동질을 맛볼 수 없는 인간 공룡이 아닌가...
박무직은 다시 눈물이 솟아났다. 밤새 자기가 돌아올 것을 기다렸을 식구들을
생각하니 더 가슴이 쓰려 왔다.
'산을 내려 가자..'
박무직은 거대한 티라노사우라스의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찰과 군인, 119, 병원 응급차들이 이 거대한 공룡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무직은 마지막으로 말을 하고 싶었다.
'식구들이 보고 싶다!'
그러나 그건 머리 속에서만 맴돌 뿐 침을 질질 흐리는 사납고 붉은 입으로
는,
"크악! 킁 카악!..."
하는 공룡의 울부짖는 소리만이 하늘과 땅을 울리고 있었다.
무차별 사격!
언제 우리 나라에서 이런 희기 동물 보호한다고 애써 생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무조건 잡아 몸보신하기 바쁘지... 그런 우리 나라 인간들의 습성에서
박무직은 그대로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
원시의 거대한 공룡도 20세기의 총알 앞에서는 붉은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있
었다.
'아,'
박무직은 마지막 바람과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두 아이의 모습만이 구름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끝 199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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