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달리 저임금을 주고 나이 차별하는 한국에서 살아 남을수 있을까? 한국에 고층 아파트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아무 유산도 물려 받은게 없는 내가 집을 장만할수 있을까?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을 찾는 법이다. 다들 찢어지도록 가난하게 살던 옛날에도 잘먹고 잘살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가난한 환경에서도 자수성가하고 유학까지 갔다. 나도 배달 운전, 학원 강사등 기술직을 갖거나 아니면 학원에다 미국인 강사를 소개하는등 개인 사업을 모색(궁리) 해보도록 하자. 저임금을 받을지라도 모아서 장사를 해라. 일단 성공을 하고 나면 한국 아니라 중국에 살지라도 미국에 사는것 못지 않게 잘 살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 생산을 하기 시작하면 그렇게 많던 실업자들이 일자리를 갖게 되고, 또한 빈곤한 나라가 생필품과 자동차를 갖는등, 풍요로움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노년에 생활 걱정 안하고, 자녀에게 의지하는 대신 유산을 물려주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정강진
본죽 사장 김철호
이용태
[나의 이력서] <47> 학원강사 시절
1954년 '장안의 名강사'로 美유학 꿈
대학 복학 후 학비마련 위해 학원 투신
인기 좀 닦은 뒤에 안현필 원장 찾아가
1952년 가을 서울 종로구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건물 계단에서 학우들과 포즈를 취했다. 왼쪽 두 번째 바바리 코트를 입은 친구가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 세 번째는 김호길 전 포항공대 총장, 네 번째가 나다. |
물리학과에 합격한 나는 고학 등에 따른 건강 악화로 1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그리고 고향 경북 영덕에서 1년 동안 요양을 했다. 그 사이 캠퍼스는 서울로 다시 옮겨졌다.
54년 봄 복학한 나는 학비 마련을 위해 고계고(현 장충고)의 전임 교사가 됐다. 일주일에 24시간 정도 수학을 가르쳤는데 이는 견딜 만 했다. 그러나 학급 담임까지 맡다 보니 내 공부하러 학교에 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큰 뜻을 품고 있던 내겐 여간 고통스런 일이 아니었다.
당시는 대학생들에게 징집을 연기해 주었다. 대신 학교에서 출석을 매우 까다롭게 점검했다. 나로서는 참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래서 궁리해 낸 게 학원 강사였다. 학원 강사는 저녁 6시 이후 가르치면 되니까 낮에는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또 강의만 잘 하면 고교 교사보다 수입이 훨씬 더 나았다. 내겐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때 마침 내 친구 이동승(서울대 명예교수)이 서울 관철동의 상록학원에서 독일어를 가르쳤다. 나는 친구 소개로 어렵지 않게 상록학원의 수학 강의를 맡게 됐다. 54년 가을 무렵이었다. 나는 중학교를 1년 밖에 다니지 않았다. 고등학교도 6개월 밖에 다니지 않고 독학을 했다. 독학 경험은 남을 가르치는 데 매우 유용했다.
독학을 하다 보면 모르는 게 많이 생기고 혼자 낑낑대며 해답을 찾아야 한다. 고생스런 그 과정은 머리 깊숙이 남는 법이다. 때문에 어느 부분이 이해하기 어렵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해답이 나오는 지를 내 경험을 바탕으로 쉽게 전달할 수 있었다.
‘나는 이 문제를 푸는데 3일을 고생했는데 5분 만에 해법을 가르쳐 주니 너희들은 얼마나 행복하냐’고 생각하면서 매 시간 열성껏 가르쳤다. 그 열정은 학생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나는 곧바로 인기강사가 됐고 강의실은 학생들로 꽉 찼다. 수입도 만만치 않았다.
그때 인생의 장기 계획을 세웠다. “일단 학교 공부는 1년 정도 소홀히 하더라도 장안의 명 강사가 되자. 그러면 세 사람이나 되는 동생 공부 밑천은 물론 내가 미국 유학을 떠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을 굳힌 다음 당시 서울에서 가장 유명했던 EMI학원의 안현필 원장을 찾아갔다. ‘3위 1체’로 유명한 그는 1,000명이 넘는 수강생이 몰릴 정도로 인기 있는 영어 강사였다.
이왕이면 제일 큰 학원에서 강의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나는 안 원장에게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수학 교사가 되겠다고 약속 드릴 수는 없지만 가장 열심히 준비하고 가르치는 선생이 될 터이니 기회를 달라”고 말했다. 그는 새벽 6시 타임의 고교 기하학 강좌를 하나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내 판단은 크게 잘못된 거라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됐다. 상록학원은 내게 골든 타임에 인기 과목을 배정해 주었다. 게다가 학생들에게 일주일 정도 강의를 들어보고 등록하게 하는 제도를 도입, 쉽게 많은 학생을 붙잡을 수 있었다. 반면 EMI학원은 학생이 안 오는 시간에 인기 없는 기하학을 내게 맡겼다. 수강증이 없으면 아예 강의실을 들어갈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단 3명의 학생을 놓고 한달 동안 떠들 수밖에 없는 처지가 돼 버렸다.
입력시간 : 2004/11/18 19:13
[나의 이력서] <48> 학원 강사 시절의 교훈
IT계의 선구자 이용태
입시에도 '작전'이 중요하다
기본적인 요점파악이 성패의 관건
수험서 출간·3년간 라디오 강의도
1964년 1월 부친 회갑연 때 온 가족이 고향인 경북 영덕 나라골에 모여 기념 사진을 찍었다. 나(뒷줄 오른쪽 끝)는 50~60년대 당시 공부를 하면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수학 문제를 갖고 있는 교사라고 자부했다. 더 나아가 서울대 도서관과 국립도서관, 시립도서관 등을 샅샅이 뒤져 수학의 역사와 수학자의 전기, 수학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모아 노트에 정리했다.
학원 수강생들은 대학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 합격하는 게 최대 목표였다. 때문에 나는 기출 문제를 수 없이 검토하고 채점 교수들로부터 성적 분포를 알아 보았다. 이때 내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다. 서울대에 지원한 학생 중 수학 과목에서 30점만 맞으면 꽤 잘한 편에 속하고 웬만한 학과는 거뜬히 합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학생들이 괜히 어려운 문제를 많이 푸는 것 보다 기본적인 문제 해법을 제대로 익히는 게 더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서울대 시험에서 100점을 목표로 준비하면 20점도 맞기 힘들지만 기본적인 요점을 확실히 파악해 50점만 맞겠다고 작정하면 30점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수험생들은 반대로 생각했다. 어려운 문제를 많이 풀어봐야 고득점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시험에서도 작전은 매우 중요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너무 어렵고 까다로운 문제는 신경 쓰지 말고 대신 내가 가르쳐 주는 요점만 철저히 파악하면 합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나는 명강사가 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하려고 애썼다.
우선 수학 참고서를 썼다. 이지흠(李之欽)이라는 필명으로 21권을 출간했다. 수학의 강의, 입시수학의 분석연구, 해석대전, 기하대전, 중학수학대전 등이다. 그런데 베스트셀러로 만드는 데는 하나같이 실패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는데 나중에야 깨달았다.
나는 고교 수학을 완전히 분해, 나름대로 다시 조립하고 독학으로 얻은 경험을 살려 ‘이지흠식’ 설명을 붙였다. 베스트셀러가 되려면 많은 학교에서 부교재로 사용해야 하는데 고교 선생들이 봤을 때 내 책은 순서도 다르고 설명 방식도 영 딴판이었다. 이런 까닭에 기존 교수법을 바꾸지 않는 한 내 책을 채택하기 힘들었다.
나는 여기서 한가지 교훈을 얻었다. 베스트셀러를 만들려면 과거의 책에 비해 10% 정도만 좋으면 되지, 50% 이상 개선하려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베스트셀러 참고서를 써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나는 또 기독교방송(CBS)의 새벽 시간에 전국의 수험생을 상대로 대입 수학강의를 했다. 수학을 라디오를 통해 가르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1956년부터 3년간이나 라디오 강의를 이어갔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내 책을 읽으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점을 강조하고 요점을 지적해 주면서 강의를 진행했다. 그때 CBS의 박화목 편성국장은 내 강의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 박 국장은 국민 애창곡인 보리밭이라는 노래를 작사한 시인이다.
입력시간 : 2004/11/21 19:22
[나의 이력서] <49> 학원 설립
학원 성공…渡美 후 찾아온 배신
운영 맡긴 동업자 고작 月 83弗 송금
문서로 계약 안한 것을 나중에 후회
이화여대 전임 강사 시절인 1964년 가을 교정에서 학생들과 포즈를 취했다. 나는 유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학원을 세워 돈을 버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
학원 강사로서는 성공해 나름대로 확고한 명성을 쌓았지만 미국 유학 계획은 차일피일 미루게 됐다. 그래서 나는 일정 기간을 정해 학원 강사 생활을 끝내고 유학을 떠나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학원을 설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965년 초로 기억한다. 학원을 세우려면 자금을 마련하고 강사를 모집하는 두 가지 일이 가장 중요했다. 자금 모집은 동업자를 선정하되 경영은 그에게 맡기는 방식이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장차 미국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만해도 나는 비즈니스의 세계를 몰랐던 터라 동업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큰 실수를 했다.
나는 문서로 계약을 맺어 권리ㆍ의무를 규정하는 것보다 말로만 약속해도 절대 어기지 않을 사람을 찾았다. 성북고 교사였던 친구 김석진이 그 학교 교감 H씨와 함께 나를 찾아왔다. 나는 김석진에게 “이 사람은 말로 한 약속을 절대 어기지 않고 끝까지 신의를 지킬 사람이냐”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 김석진은 H씨는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라며 적극 추천했다. 이렇게 해서 H씨와 동업을 하기로 했다.
학원의 성패는 인기 강사를 몇 명 확보하느냐에 따라 판가름 났다. 학생들은 영어는 누구, 국어는 누구 하는 식으로 유명 강사의 이름을 꿰고 있었다. 수강생들은 학원을 보고 오는 게 아니라 강사를 따라 몰려 다녔다. 수학 과목에 세 명의 강사가 있다면 가장 유명한 선생에게는 1,000명이 몰리고 두 번째는 200명, 세 번째에게는 30명 정도밖에 오지 않는 게 통례였다. 그래서 유명 강사가 학원을 옮기면 수많은 학생들이 그를 따라 이동했다. 그만큼 유명 강사를 모으는 게 중요했다.
나는 직접 강사를 찾아 나섰다. 각 과목마다 가장 잘 나가는 강사를 만나 한 사람씩 설득했다. 다행히 그들은 첫 만남에서 거의 모두 우리 학원으로 오겠다고 약속했다. 국어 선생만은 두 번 만나 설득을 하고서야 응낙했다. 내가 학원 강사를 하면서 그래도 인심을 잃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흐뭇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국어의 정 철, 독일어의 안사균, 사회생활의 선우형순, 영어의 박찬세 등은 당시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명강사였다. 수학은 물론 내가 맡았다.
이렇게 출발한 학원이 J학원인데 오픈 직전 불이 나 한달 가량 개강이 미뤄졌다. 그러나 개강 첫 달부터 흑자가 나고 3개월 만에 투자비 전액을 회수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나는 홀로 미국으로 떠났다. 우리 가족 생활비는 물론 학원이 책임지기로 돼 있었다.
나는 66년 4월부터 4년간 미국에서 공부했는데 H원장이라는 사람은 우리집에 한 달에 3만원밖에 주지 않았다. 당시 환율이 1달러에 360원이었으니 3만원은 83 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H원장 자신은 고층빌딩을 지어 학원을 옮기고 세계 유람을 돌아다닐 정도로 큰 부자가 됐다. 나는 그와 문서로 계약을 하지 않은 걸 무척 후회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입력시간 : 2004/11/22 18:36
[나의 이력서] <50> KIST 전자계산실 근무
귀국… '5%의 비교우위'로 승부
연구소 급료만으론 빠듯 학원사업 재개
강사 처우 개선·수강생 대상 서비스 강화
미국 유학 시절인 1967년 가을 내(왼쪽)가 은사인 이규태(가운데) 박사 부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이 박사는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로 화학과 물리학의 경계에 있는 이론 화학에 관한 세계적인 석학이었다. |
나는 시중에서 가장 흔한 사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흔하다는 건 수요가 많다는 뜻이다. 또 흔하다는 건 뛰어난 두뇌와 비상한 노력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얘기기도 하다. 시내를 걷다 보면 가장 흔한 게 다방과 식당과 학원이었다. 그런데 나는 학원에 대해서는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다방이나 식당 대신 그 길을 택했다.
나는 이 같이 흔한 사업을 하는 데는 두 가지 전략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하나는 경쟁자보다 광고를 두 배 하는 일이다. 두 번째는 주요 항목 세 개를 택해 경쟁자보다 5%씩 잘하면 된다. 선전을 남보다 많이 하면 우선 사람들이 와 볼 것이고 다른 경쟁 업체와 비교해 5%만이라도 뛰어나면 사람들은 그 쪽으로 몰려들게 마련이다.
남보다 10% 더 잘하려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고 20% 잘하려면 천재적인 두뇌가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5% 잘하는 건 보통 사람도 마음만 먹으면 해 낼 수 있다. 사람의 감각은 5% 더 나은지, 10% 더 좋은지는 구별하지 못하지만 누가 못하고 잘하는 지는 아주 민감하게 구별할 수 있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낫게 한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곰탕 집이 아주 잘 돼 끼니 때면 사람들이 줄을 섰다. 그 가게 주인에게 비결을 물었더니 "나는 고기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산다. 그래서 우리 고기는 경쟁자보다 질이 좋다. 그리고 곰탕에는 고기를 30% 더 넣는다. 그랬더니 손님이 모여들었다"고 말했다.
그 주인의 말도 내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나는 강사들에게 다른 학원보다 5% 더 잘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실천에 옮겼다. 당시 학원 강사는 수강료의 절반을 가져가게 돼 있었다. 그런데 학원에서는 보통 100명의 학생이 오면 90명분으로 나눠 주었다. 여러 기관에서 청탁이 와 무료 패스를 발행, 실제 등록한 학생이 수강생보다 적었기 때문이다.
청소 등 허드레 일을 하는 고학생에게도 무료 패스를 주었다. 나는 필요에 따라 발행한 무료 수강증을 접대비로 처리하고 수강생 수의 100%를 강사들에게 배당했다. 다른 학원보다 10% 정도는 강사를 더 만족시킨 게 분명했다. 또 다른 학원에서는 강사료를 그 다음달에 지불했다. 하지만 나는 강의료를 받아 그 달 5일에 3분의 1을 주었다.
학생들에게도 5% 더 잘해줄 묘안을 짜냈다. 무료 패스를 받은 학생 중 일부는 수강증 검사와 청소를 맡았는데 불친절하고 청결 상태도 엉망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식 직원을 채용, 제복을 입히고 수강증 검사를 시켰다. 청소는 전문용역 회사에 맡겼다. 이것도 수강생에게는 다른 학원과 구별되는 기분 좋은 서비스였다.
입력시간 : 2004/11/23 18:14
[나의 이력서/이용태] <51> 학원 사업 재개
祖父에게서 배운 '동업자 원칙'
"네가 지고 밑져라" 항상 일깨워
신입사원 대상 "양보는 저축" 강조
1960년대 중반 나(가운데)와 부모님, 그리고 아이들이 함께 야외 나들이에 나섰다. 나는 어릴 적 한학과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할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
돈 문제가 걸리면 세상 인심이 야박해진다고도 했다. 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나름대로 결론을 얻었다. 동업을 하면 최대 주주가 사업을 주도하게 된다. 대개의 경우 그 사람은 소액 투자를 한 파트너의 입장은 개의치 않고 자기 마음대로 운영하기 쉽다. 나는 그 반대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원칙은 간단했다.
내가 주도하되 양보하고 손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1970년 여름 학원 설립을 준비하고 동업자 모임을 가질 때마다 비용을 모두 내가 부담했다. 초기에 고생한 직원들에게 보상을 해 줄 때도 내 지분보다 많은 몫을 냈다.
그랬더니 매우 바람직한 풍토가 조성됐다. 동업자들은 내가 조금 손해 보더라도 동업자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다고 믿게 됐다. 내 결정을 적극 지지했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모두 나서 힘껏 도와주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실수를 해도 그 동기가 내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고 한 게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에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만일 그때 여러 가지 소소한 비용을 모두 회사에 청구하고 최대 주주로서 내 이익만 챙겼다면 사람들은 색안경을 쓰고 보았을 터이다.
또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내가 왜 저 사람을 도와줘야 하느냐며 외면했을 게 분명하다. 나는 어릴 때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반복해서 내게 이렇게 가르쳤다. "사람들과 더불어 사귀거나 일을 할 때는 네가 지고 밑져야 한다." 나중에 기업을 하면서 신입 사원들을 모아 놓고 훈시를 할 때면 나는 반드시 이 말씀을 풀어서 이야기 했다. “여러분은 학교를 다니면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교육 받았다. 또 그렇게 해야 경쟁 사회에서 살아 남을 수 있고 그것만이 여러분의 인생에 이익을 가져 다 줄 것이라고 배웠다.
나는 우리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새로운 도리를 일깨워 주고자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익을 얻으려고 노력하는데, 만일 여러분이 당장 최대 이익을 거두려면 권총을 들고 은행에 가야 한다. 이는 극히 짧은 시간과 좁은 범위에서 최대 이익을 거두려는 행동이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수 천년 이라는 시간을 두고 전 세계라는 공간을 통해 최대 이익을 거두려면 공자나 석가나 예수처럼 해야 한다.
그렇게는 못 하더라도 여러분이 일생을 통해 접촉하는 사회 내에서 최대 이익을 거두려면 남을 도와주어야 한다. 남을 돕는다는 건 자기가 손해 본다는 것과 같은 얘기다. 그러나 손해를 보는 게 아니라 남의 마음속에 저축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생을 통해 보면 그 저축은 큰 이자가 붙어 자기에게 되돌아 온다. 세상에는 혼자 되는 일이 없다. 만약 여러분이 매사 자기 이익만 챙긴다면 주위 사람들이 좋아할 이유가 없다.” 나는 학원을 시작하면서 이 원칙을 처음부터 지켜나가기로 했다.
입력시간 : 2004/11/24 19:47
[나의 이력서/이용태] <52> 박찬세 원장
無간섭 원칙…"믿으면 맡긴다"
강사 추천·과목 배정 등 청탁 배격
나중 동업자에 상당 지분 분배도
D학원 설립 초기인 1970년 겨울 나와 박찬세 원장, 김종순 부원장(뒷줄 왼쪽부터)이 야외 나들이에서 포즈를 취했다. D학원은 크게 성공, 장안의 명문으로 발돋움했다. |
때문에 학원 운영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했다. 나는 ‘원장에게 맡긴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지금은 손을 뗐지만 나는 30년 넘게 학원을 운영했다. 그 긴 세월 단 한 명의 강사도 추천한 적이 없다. 강사의 강의 시간을 한 번도 조정한 적이 없다.
학원 강사의 수입은 어느 강의실에서 어떤 시간에 무슨 과목을 배정 받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이런 이유로 학원 설립 초기인 1970년 여름에 강사들이 학원주인 내게 찾아와 청탁을 시도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아무리 청을 해도 소용없다. 잘 하건 못 하건 모든 걸 원장에게 맡겼다. 절대 간섭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 원칙은 나와 원장에게 모두 득이 됐다. 나는 학원 운영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좋고, 원장은 소신 대로 일할 수 있었다. 강사들이 내게 원장을 바꿔야 한다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원장이 이런 결점이 있고 저런 잘못을 했다는 말에 전혀 놀라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다 장점과 단점이 있다. 하지만 원장은 사심이 없다. 학원 운영을 소명으로 알고 밤낮없이 그 문제에 골몰해 있다. 자잘한 잘못 때문에 원장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고 타일렀다.
박찬세 원장은 나의 오랜 벗이다. 52년 부산에서 친구 소개로 인연을 맺은 그는 아주 독특했다. 애주가라 술을 즐겼는데, 알코올만 들어가면 걷잡을 수 없는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기 일쑤였다. 대낮에 술에 취해 원장실 집기를 집어 던져 부수고, 수업중인 강사를 끄집어 내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본심이 맑고 공명정대한 사람이었다.
내 생각에 원장의 첫 번째 자질은 훌륭한 강사를 발견해 마음 놓고 강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또 수입이 적고 곤란한 말단 강사를 인간적으로 도와주고, 학원이 본질적으로 사람을 교육하는 곳이라는 기본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 점에 관해 박 원장은 더 보탤 게 없는 적임자였다. 그는 매사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학원과 강사들을 위해 일했다.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로 그를 깊이 아는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부터 좋아하고 공경했다. 술 먹고 난동을 부리는 일은 당연히 결점이다.
그러나 그가 원장을 하는데 치명적인 하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적용한 원칙은 원장과 부원장에게 경제적으로 응분의 보상을 하는 일이었다. 나는 많은 회사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일을 맡겨왔다. 맡은 사람들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태도를 보였다. 한 타입은 회사를 전적으로 맡겼으니 고맙다, 그러니 열심히 일해 보답하겠다는 사람이다.
반면 모든 일은 내가 했고 대주주는 한 일이 없으니 이 회사는 실질적으로 내 것이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박 원장과 김종순 부원장은 분명 두 번째 타입에 속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밉지 않았다. 그래서 상당한 비율의 지분을 나눠 주었다.
입력시간 : 2004/11/25 18:49
[나의 이력서/이용태] <53> 절정 오른 학원사업
위기 때 더욱 빛나는 '원칙 경영'
시련 있어도 묵묵히…명문 발돋움
"공교육 붕괴 주범" 비난에 열의 잃어
6월 제주 신라호텔에서 포항공대 교직원들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교육’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나는 학원 강사 경험 덕분에 제법 명 강사로 소문나 있다. |
내가 1970년 8월 문을 연 D학원도 몇 차례 쓰러질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확신이 있었기에 그대로 밀고 갔다. 예상만큼 수입이 생기지 않아 3년 가까이 자금난을 겪은 게 첫번째 시련이었다. 문을 닫든지 빚을 얻든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나는 동업자들을 모아 놓고 “현재 학원은 추가 증자를 하거나 빚을 얻어야 한다. 나는 사업이 성공할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빚을 내기로 했다. 이 빚은 모두 내가 책임 지겠다”고 약속했다.
이 같은 결정에는 남과 더불어 일할 때는 희생하고 손해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교훈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동업자들은 나를 더욱 신뢰하게 됐고, 내가 하는 일에 협력을 아끼지 않는 분위기가 싹텄다. 결국 학원은 크게 성공해 장안의 명문으로 떠올랐다. 여세를 몰아 나는 두 번째 학원을 만들었고 89년에는 세 번째, 네 번째 학원을 차렸다. 장안의 학원가를 모두 휩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멈췄다. 원래 학원을 통해 부자가 되려고 시작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많은 동종 업자를 쓰러뜨리고 혼자 잘 사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 뒤 나는 학원 사업에 별로 열을 올리지 않았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우선 공교육이 무너지면서 사회적 비난이 사교육 쪽으로 몰려들었다. 학원 사업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해를 거듭함에 따라 싸늘하게 변해갔다. 이 기회에 한국 교육 당국의 정책이 크게 잘못됐음을 지적하고 싶다.
고액ㆍ비밀 과외가 생겨서 교육이 비뚤어지게 된 원인을 따져 보면 그 잘못을 쉽게 알 수 있다. 교육 정책은 한 가지 작은 잘못 때문에 막대한 피해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그런데 당국은 그걸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70년대 초로 기억한다. 당시 문교부 장관인 M씨는 재학생 학원 출입금지령을 내렸다. 금지령은 이 때부터 나와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다 80년 7.30 조치로 단속을 더 강화했다. 정부는 매번 고등 학생들이 학원에 나가기 때문에 학교 교육이 정상화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달았다.
어이가 없는 얘기였다. 재학생을 학원에 못 가게 하면 비밀과외로 옮겨 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자기 자식 공부를 남보다 더 잘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국 부모들의 욕구는 아무도 못 말린다. 당시는 비밀과외, 고액과외라는 게 있지도 않았고 생각조차 못한 시절이다. 대신 골목마다 블록마다 학원이라는 게 있었다.
그 학원의 등록금은 매달 버스비 보다 적어 그다지 큰 부담이 아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부족한 점이 있다든가 경쟁에서 이겨야 겠다고 생각하면 학원에 갔다. 그런데 재학생의 학원출입을 금하고 난 뒤부터 전에 없던 그룹지도와 개인지도가 사방에서 붐을 이루었다. 또 스타강사가 탄생하면서 경쟁적으로 과외비를 올리는 현상이 빚어졌다. 한국의 공교육이 무너진 건 여기에서 비롯됐다.
입력시간 : 2004/11/28 18:47
[나의 이력서/이용태] <54> 교육현장서 느낀 점
세계최고 교육열…효율성을 높여라
입시·경쟁 위주 현시스템으론 지식정보사회서 낙오 불보듯
1998년 10월 숙명학원 이사장 취임식에서 내(오른쪽 두 번째)가 내빈과 악수를 하고 있다. 오른쪽 세번째는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 네번째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다. |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을 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지금 거대 국가 중국의 출현에 따라 중대한 고비에 처해 있다. 수 많은 공장이 중국으로 옮겨가면서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제조업을 대체할 새로운 산업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은 지식정보화 산업일 수밖에 없다. 지식은 교육을 통해 만들어지는 만큼 지식정보화 사회를 건설하려면 교육이 먼저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이건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교육에너지가 가장 풍부한 나라다. 학부모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어떤 희생도 달게 감수한다. 교육 열기가 외국에 비해 더 뜨겁다는 정도가 아니다. 외국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높다. 우리나라의 젊은 어머니 중 자녀 교육을 위해 남편과 떨어져 미국에 가 있는 사람이 수 만 명에 달한다. 이런 교육 풍토를 외국인들은 감히 상상도 못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 인들은 교육에 ‘미친’사람들이다.
그런데 큰 문제가 하나 있다. 이 엄청난 교육에너지가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활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기차가 달릴 때 석탄을 아무리 많이 때도 엔진 효율이 떨어지면 속도가 붙지 않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교육시스템이라는 엔진은 워낙 효율이 나빠 쏟아 붓는 에너지에 비해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시간과 돈은 어느 나라보다 많이 투입되지만 대부분이 헛김으로 새버려 국가 발전에 그다지 기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런 이유로 교육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에너지가 효율적으로 활용돼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개인이 일생을 살아가는 좋은 밑천이 돼야 한다. 그래서 나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에 보탬이 되고자 애썼다.
현재 우리나라 교육 제도는 지식 중심, 입시 위주, 경쟁 위주의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는데 큰 문제가 있다. 학생이나 부모들도 일류 대학에 들어 가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이는 교육의 본질을 무시하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교육자는 사회가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하는지 깊이 따져보고 거기에 맞는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선 맹목적인 암기만을 강요한다.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인재는 첫째 남과 더불어 협력할 줄 알아야 하고, 둘째 합리적으로 생각해 문제를 풀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자기 자신을 관리할 수 있고, 자기가 맡은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지식을 갖춰야 한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 사회에는 무수히 많은 세일즈맨이 있는데, 이들을 위한 교육은 전혀 없다. 또 여자들은 대부분 가정 주부와 어머니가 되는데, 가정 주부의 역할을 잘 하기 위한 교육과 훌륭한 어머니가 되기 위한 방법을 가르치는 학교는 없다. 이런 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입력시간 : 2004/11/29 19:57
[나의 이력서/이용태] <55> 박약회 회장 승계
할아버지와 손자가 통하는 사회를…
"도덕국가 재건" 故 김호길 총장 설립
감동과 교훈 담긴 서적 출간 계획
나(왼쪽)와 박약회 회원들이 10월 중국 취푸에서 공자 탄신을 기념하는 제사를 드리고 있다. 박약회는 도덕 사회 재건을 기치로 내건 유림 단체다. |
우리는 바로 그 현장에서 중국인들이 잃어버린 전통 문화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성균관에서 매년 봄 가을 공자를 위한 향사(享祀)를 지내는데, 공자 탄신 2,555주년을 맞아 성균관에서 한 것과 똑 같은 제물과 예복과 절차로 예를 올렸다. 박약회는 전국에 4,000명 정도의 회원이 있다. 원래 이 모임은 김호길 전 포항공대 총장이 중심이 돼 1987년 7월 만들어졌다.
그런데 김 박사가 94년 4월 갑작스레 세상을 등져 내가 회장직을 승계했다. 박약회는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과 행실을 본받아 도덕 국가를 재건하자는 취지로 설립됐다. 지금은 퇴계 뿐 아니라 모든 선현들의 학행을 연구, 계승하는 것으로 목표를 넓혔다.
우리나라에는 성균관과 유도회, 담수회 등 여러 유림 단체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느 단체와 다른 새로운 일을 찾아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박약회가 주요 사업으로 가정 교육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들은 지금 세상이 도덕적으로 무너져 가고 있는 걸 개탄하면서 그 책임을 정부나 학교, 방송 등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젊은 세대나 어린 아이들이 문제가 있는 건 바로 우리 책임이다. 남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부터 자녀를 올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요즘 할아버지들은 대개 손자와 떨어져 산다. 할아버지는 시골에, 손자는 서울에 사는 경우가 많다. 또 다 같이 서울 하늘 아래 있다 해도 조손(祖孫)이 따로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어릴 적 할아버지 옆에서 자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는 내 인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이 소중한 기회를 잃고 있다. 모처럼 할아버지와 손자가 만나도 썰렁하다. 할아버지가 들려줄 수 있는 가르침의 밑천이 5분이면 바닥나기 때문이다. “공부 열심히 하느냐, 어떤 대학에 갈 수 있느냐” 등을 묻고 나면 대개는 더 이상 이끌어낼 화제가 없다. 이런 환경에서는 아이들이 도덕적으로 성숙하기 힘들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라는 책을 만들기로 했다. 한 사람이 5분씩 이야기를 만든다고 가정하고 100명의 글을 모으면 500분 짜리 책을 꾸밀 수 있다고 계산했다. 이렇게 해서 책을 만들어 봤더니 문제가 생겼다. 내용이 너무 재미없고 딱딱해 아이들에게 흥미와 감동을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방식을 궁리하고 있다. 사례 중심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모으기로 했다. 흥미 있게 듣는 사이 감동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그 감동과 가르침이 마음속에 새겨지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책이 완성되면 박약회 회원 중에서 남 앞에 나서 교육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고를 작정이다. 이들을 통해 전국의 초ㆍ중ㆍ고생 학부모들에게 책을 나눠 주고 강습을 시킨 다음 어머니들이 자녀를 직접 가르치도록 할 요량이다. 우리 회원 각자가 이 책으로 자기 손자들을 가르쳐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입력시간 : 2004/11/30 18:38
[나의 이력서/이용태] <56> 500년 종가의 종손
5代개 함께 살아 행복했던 어린 시절
항일운동 조부 "왜놈된다" 학교 안 보내
열살까지 논어·중용 등 한학공부 매진
1997년 5월 재령 이씨 영해 입향 500주년 기념식에서 내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나는 재령 이씨 영해파의 19대 종손이다. |
내가 태어난 인량리도 마을 사람들에게는 나라골이라는 이름이 훨씬 더 친숙하다. 뒷산이 학의 날개처럼 생겼다고 해서 나래골이라 부르다 나라골로 변했다. 이 나라골은 뒷산을 파면 신라 토기가 나올 정도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이 산 곳이다. 이십대 이상 내려온 큰 종가들이 한 마을에 여덟 개나 모여 있는 특색 있는 동네다. 옛날에는 한 마을에 같은 성(姓)을 가진 일족이 모여 사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니 여덟 개의 종가가 있었다는 건 매우 색다른 경우라 할 만 하다.
우리집은 이 여덟 종가 중 하나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집 당호인 충효당(忠孝堂)을 따서 충효당 종가라고 불러왔다. 나는 이 충효당의 주인이고 재령(載寧) 이씨 영해파의 19대 종손이다. 영해파의 시조인 18대 할아버지는 당신의 삼촌이 영해부사로 계실 때 경남 함안에서 영해로 따라 왔다고 한다. 1494년 일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가를 들어 정착, 영해파가 시작됐다.
할머니는 만석꾼의 무남독녀로 친정의 재산을 모두 물려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집안은 처음부터 넉넉한 형세로 출발했다. 97년 5월에는 영해 입향 500주년 기념식을 치렀다.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집에는 고조모, 증조부, 조부모 그리고 부모님이 계셨다. 나까지 5대가 한 집에 살았다. 나는 할아버지 회갑 때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 집으로 봐서는 아주 늦게 얻은 손자였다. 그 당시엔 환갑이면 증손자를 얻을 나이였다. 내 어린 시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하다.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특히 할아버지는 나를 조석으로 거느리며 정성껏 가르쳤다. 그 어른은 1955년에 돌아가셨지만 18세기식 사고방식을 끝까지 고집하셨다. 할아버지는 영남 대표로 일본 시찰단에 끼여 도쿄 등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회유에 굴하지 않고 항일운동을 하다 투옥돼 3년형을 언도 받았다.
한때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하와이로 망명할 계획까지 세웠으나 어른들이 말리는 바람에 단념하신 일도 있다. 할아버지는 일제 치하에서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내가 학교에 가는 걸 반대했다. 학교는 왜놈을 만드는 곳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대신 내가 말을 배울 무렵부터 한문을 가르쳤다.
나는 입본(立本), 동몽선습(童蒙先習), 계몽편(啓蒙篇) 소학,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시경 등을 공부했다. 그때의 공부 방법은 지금과 달랐다. 일어나자 마자 새로운 문장을 배웠는데 먼저 그 문장에 나오는 한자의 뜻과 음을 일일이 익혔다. 그리고 붙여 읽으면서 문장을 해석한 다음에는 큰소리로 스무 번 정도 외었다. 아침을 먹고는 붓글씨를 쓰고 또 배운 문장을 스무 번 정도 다시 큰소리로 읽었다. 저녁에도 똑 같은 일을 반복했다. 이처럼 나는 열살 때까지 한문 공부에만 매달렸다.
입력시간 : 2004/12/01 18:18
[나의 이력서/이용태] <57> 할아버지의 교육방식
"밑지는 게 사람과 더불어 사는 도리"
종손 불구 강요 없는 '자율의 가르침'
수단·방법 안 가리는 사회 미래 없어
1993년 초겨울 서울 평창동 집에서 아내와 함께 붓글씨를 썼다. 어릴 적 배운 한학과 할아버지의 가르침은 내 인생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
흔히 옛날 서당에서는 배운 걸 외우지 못하면 목침 위에 올라 종아리를 맞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나는 단 한번도 맞아 본 적이 없다. 할아버지의 교육 방침도 야단스러운 게 없었다. 큰 선비 또는 도덕군자가 되라든가 문장 명필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큰 뜻을 품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가르친 적도 없다. 할아버지는 선비로서 인생을 달관한 어른이었지만 손자 교육에는 요즘 말로 ‘자율’을 중시한 것 같다.
대신 내게 언제나 “반듯한 인격으로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할아버지는 실제 있었던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내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인격이 갖추어지기를 바랬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들에게 공손한 사람들과 우리 조상들의 얘기도 많이 들려 주었다.
그 중 이런 얘기가 있다. 국가에서는 500년의 역사를 지닌 시골 우리집을 주요 민속문화재로 지정했다.
우리집은 두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옛날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솟을대문이 우리 집엔 없다. 안 사람이 거처하는 정침의 큰 마루에도 앙토를 바르지 않았다. 집을 지을 때는 석가래 위에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고 기와를 얹어 바깥 모양을 완성한 다음 방 안쪽으로 천정의 흙을 바르는데 이 흙이 앙토다.
이를 두고 할아버지는 “우리 조상은 힘이 있다 해서 그 힘을 다 쓰지 않고 여유를 두며 살았다. 재물이 있다고 해서 과시하지 않고 검소해야 한다는 교훈을 자손들에게 일깨워주는 예”라고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사람들에게 지고 밑지는 게 사람과 더불어 사는 도리”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가르침은 나의 생활 철학으로 뿌리를 내렸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젊은 사람들에게 들려 주면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공자님 말씀’으로 흘려버린다. 요새 사람들은 으레 경쟁력을 길러 남한테 이겨야 성공할 수 있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남을 밟아야 내가 산다”는 식의 말을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듣고 자란 젊은이들은 직장에 들어간 뒤에도 절대 남에게 손해보지 않으려고 한다. 어떻게 해서라도 남보다 먼저 승진해 출세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나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나름대로 현대식 해석을 붙여 보았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혼자서는 되는 일이 없다. 다른 사람과 협동해야 하는데 남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스스로 베풀 줄 알아야 한다. 그 때 그 때 짧은 시간으로 보면 손해가 될 지 모르나 한 평생을 놓고 보면 그게 가장 현명한 처사라는 걸 깨우쳐 줘야 한다.
이러한 교육방법은 우리집 만의 특유한 자랑이 아니었다. 당시 이웃들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방식이다. 나의 처가는 퇴계 이황 선생의 종가인데 그 집의 교육 방법도 우리와 비슷했다.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스스로 깨달아 공부를 하게 했다. 집안 분위기나 문화적인 배경 때문에 늦고 빠른 차이는 있으나 결국에 가서는 스스로 공부를 해 자기 앞가림을 할 줄 알았다. 뿐만 아니라 그 중에서 특출한 인물이 나오기도 했다.
입력시간 : 2004/12/02 20:21
[나의 이력서/이용태] <58> 나의 학창시절
편향된 '이념 늪'에서 탈출하기까지
中1때 좁은 세계관에 갇혀 左경도
어린 학생들에 이념 주입은 안될 말
1998년 6월 모교인 유타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뒤 버니 매친(왼쪽) 총장과 포즈를 취했다. 나는 중학교 중퇴 등의 시련에 굴하지 않고 미국으로 유학,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해방 후 나는 6학년에 편입, 이듬해인 46년 졸업을 하고 안동중학교에 입학했다. 권중동 전 노동부 장관과 유혁인 전 공보처 장관 등이 입학 동기다. 그러나 안동중학도 2학년 때 중퇴했다.
나는 중1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사회 모순’ 이라는 조그만 팜플렛을 보고 공산주의에 빠져 들었다. 원래 독서를 좋아한 나는 해방 직후 물밀 듯 들어온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비롯한 공산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중1 짜리가 사상가가 된다는 건 누가 봐도 웃을 노릇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꽤 심각했다. 한쪽에선 굶어 죽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나라 갑부인 민모씨는 쌀값을 올리기 위해 인천 앞바다에 쌀을 버렸다는 것으로 시작하는 팜플렛의 선전 문구에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이 사회는 모순이 가득하고,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해방 직후인 당시엔 좌ㆍ우익 싸움이 격렬했다. 중도는 설 자리가 없었다. 좌익 세력이 정당 뿐 아니라 각급 학교와 직장, 가정까지 퍼져 있었다. 시골 마을 중학교 1학년 교실에서도 좌익과 우익 학생이 갈라져 싸웠다. 공부 잘하는 학생 중 상당수는 사회를 넓게 보는 안목이 없는 상태에서 좌경 서적만 읽어 한쪽 방향으로 머리가 굳어 버린 경우가 허다했다.
나는 데모도 하고 삐라도 뿌리며 열심히 활동하다 경찰에 두 번 잡혀가 흠씬 얻어 맞기도 했다. 급기야 교장은 나를 부르더니 “너는 빨갱이기 때문에 반장 직을 내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학교를 다니기란 무척 힘들었다.
결국 나는 어린 나이에 공산주의의 술책에 넘어가 아까운 시절을 덧없이 보냈다. 공산주의의 잘못은 사회 현상 중 좁은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그 모순을 지적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나쁜 것으로 선전하는데 있다.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등 큰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그 사회 전반의 우열을 비교하는 게 옳다. 작은 동그라미 속에서 한번 모순을 찾아보라. 인간이 사는 곳치고 모순이 없는 사회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모두가 평등하고 고루 잘 살자는 공산주의는 도덕적이고 이상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사리사욕이 없는 성인이라야 실현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내 경험상 공산주의자들이 꿈꾸는 이상 사회의 실현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도 이런 시각에서 사회를 보는 사람들이 가끔 눈에 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도 작은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들여다보면 모순 덩어리로 보일 수 있다. 중학교 1, 2학년 아이들을 모아놓고 작은 동그라미만 보여주고 ‘몹쓸 사회는 두들겨 부셔야 한다’고 반복해서 세뇌를 하면 무서운 어린 공산주의자들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들은 어린 학생들을 올바로 가르체는데 힘써야 한다. 부모들도 혹시 교사들이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걸 막기 위해 가정에서 예방 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입력시간 : 2004/12/05 20:13
[나의 이력서/이용태] <59> 물리학도 되다
4當 5落…독학으로 서울大 科수석
중학 중퇴 등 굴곡 많았던 대입 과정
고향 어머니 생각하며 죽을 힘 다해
1952년 봄 내(앞줄 오른쪽)가 서울대 물리학과 입학 동기인 김호길(윗줄 왼쪽) 전 포항공대 총장 등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수학과 물리를 특히 좋아한 나는 대입 검정고시에 떨어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대에 합격했다. |
합격통지를 받고 곧바로 고향에 연락했다. 등록금 때문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좁쌀과 보리쌀을 팔아 만든 돈을 실로 묶어 보내왔다. 어머니가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겪은 고초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중대 결심을 했다. 그 돈을 어머니에게 돌려주고 대입 검정고시를 보자, 그러면 학비를 아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교 3년 과정을 1년 내지 2년에 끝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감은 늘 차고 넘쳤다.
그런 다음 매일 도서관에 다녔다. 지금 롯데백화점 자리엔 국립도서관이 있었다. 도서관은 항상 꽉 찼다. 자리를 얻으려면 문 열기 서너 시간 전에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나는 돈암동 성신여고 앞에 살았다.
이른 새벽 돈암동 종점에서 전차를 타고 종로 4가에서 내린 뒤 소공동까지 걸어갔다. 그 때 국립도서관은 오후 6시면 문을 닫았다. 반면 시립도서관은 밤 늦게까지 문을 열었다. 그래서 점심, 저녁 도시락을 2개 싸 가지고 국립도서관이 끝나면 시립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시립도서관은 파고다(탑골)공원 앞과 한국은행 뒷편 등 2개가 있었다.
그땐 검정고시와 관련한 문제집은 커녕 대부분의 과목들이 참고서 조차 없었다. 수학과 물리, 화학 등을 집중 공부했던 나는 ‘이영민에 대해 쓰라’는 식의 문제를 보고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영민은 야구 선수였다. 또 ‘J 벤덤에 대해 논하라’는 문제도 있었는데 그 사람이 철학자인지는 정말 몰랐다.
수학도 출제범위 조차 모른 채 무조건 파고 들었다. 편미분과 중적분, 미분방정식 등 고교 범위를 넘는 부분도 죽을 힘을 다해 공부했다. 화학도 일본의 대학교 1학년 생 수준인 이론화학, 무기ㆍ유기화학 등과 씨름을 했다.
대입 검정고시에서 요구하는 범위나 수준보다 휠씬 높은 걸 가지고 죽을 고생을 하며 독학을 한 셈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마치 지도 한 장 없이 무작정 배를 몰고 가는 것과 다름 없었다. 내가 학원 강사 시절 수강생들에게 “너희들은 얼마나 행복한 지 아느냐”고 얘기한 것도 다 이 같은 고생을 겪은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요즘은 검정고시가 그렇게 어렵지 않아 웬만큼 공부하면 대개는 붙는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시험칠 당시는 전국에서 1년에 3,4명 붙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시험에 붙기만 하면 수재 소리를 듣던 시절이었다. 검정고시는 한 과목만 낙제(40점 미만)해도 떨어졌다. 나는 하루에 4시간 밖에 안 자고 공부했지만 불행히도 첫번째 도전에서 낙방했다. 내 생각에 수학 등 주요 과목은 굉장히 좋은 점수를 받았는데 무슨 과목에선지 낙제를 한 것 같다.
그러는 사이 전쟁이 터졌다. 6.25전쟁이 나자 나는 시골 고등학교에서 3학년에 편입, 한학기 정도 다니다 대학시험을 치게 됐다. 나는 서울대 물리학과에 수석 합격, 52년 3월 입학식에서 물리학과 신입생 선서문을 낭독했다. 아마도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엄청 높은 수준의 수학ㆍ물리 문제 등과 씨름 한 덕분인 아닌가 싶다.
입력시간 : 2004/12/06 20:16
[나의 이력서/이용태] <60·끝> 정보화를 위하여
반듯한 교육·선비정신 복원이 꿈
미디어밸리 프로젝트 아쉬움 남아
IT전도의 대장정 멈추진 않을 것
60회에 걸쳐 나의 인생사를 두서없이 적어보았다. 귀중한 지면을 할애해 준 한국일보에 감사한다. 솔직히 나의 보잘 것 없는 이야기가 독자들의 시간만 빼앗지는 않았는지 두렵기도 하다. 살다 보면 하고 싶은 말을 끝내 꺼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나 또한 삶을 돌아보면서 가능한 솔직해 지고 싶었지만 그냥 남겨둔 사연도 적지 않다.
만약 사람들이 내게 일생을 어떻게 살아왔느냐 라고 묻는다면 나는 “전력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무엇을 위해 살아왔느냐고 묻는다면 “정보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죽을 힘을 다했다”고 대답하고 싶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하면 선진국이 될 수 있을 지 진지하게 고민했고, 이를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쳤다. 나는 정보화를 위한 전도사 노릇을 해왔다. 전도사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가 자기가 믿는 걸 남에게 권하는 게 임무다.
1997년 6월 최기선(왼쪽) 당시 인천시장, 고 건(가운데) 서울시장과 함께 미디어밸리 문제를 논의했다. 내 인생엔 아쉬운 사연도 많지만 앞으로도 힘 닿는데 까지 정보화 전도사의 사명을 수행해 나갈 생각이다. |
나 자신을 전도사라고 생각할 때 싱거운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괜히 이 동네, 저 동네 기웃거리며 콩 내놔라, 팥 내놔라 떠들고 다녔으니 말이다. 1970ㆍ80년대에는 정보산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외쳤다. 80ㆍ90년대에는 대학 입시에 컴퓨터 과목을 넣어야 정보화 사회를 빨리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90년대에는 정부가 국비로 도로를 포장했던 것처럼, 국비로 초고속 정보통신망을 깔아 모든 사람들이 공짜로 일정기간 사용토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80년대 이후에는 소프트웨어 산업을 수출산업화해야, 제조업이 경쟁력을 후진국에 빼앗겨도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정책 결정자들에게 역설해 왔다.
이러한 노력의 하나로 나는 97년 6월 소프트웨어 수출 단지인 미디어밸리를 세웠다. 정부한테 아무리 소프트웨어 수출단지를 만들라고 사정해도 반응이 없어 민간 스스로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 직접 만들었다. 당시 한 회사 당 9억원 정도 출자케 해서 모두 166억을 모았다. 그리고 지방자치 단체들에게 토지를 제공할 용의가 있는지 물었다.
지자체들은 열렬히 호응, 치열한 유치 경쟁을 벌였다. 그래서 우리는 인천 송도 매립지의 100만평을 인천시로부터 얻어 미디어밸리를 구축키로 했다. 우리가 기대했던 정부로부터의 후원은 끝내 얻어낼 수 없었다. 유치 단계에서는 장밋빛 약속을 내놓았던 인천시도 막상 사업이 시작되자 거북한 요구 조건들을 내걸어, 이 사업은 햇볕도 못 본채 접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정부가 나서 송도를 첨단 사업단지로 만들겠다며 외국계 투자를 모으고 있다. 그때 일을 생각해 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앞으로는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를 바꾸기 위해 노력할 작정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교육열이 높다. 교육제도만 반듯하면 이 교육열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돼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 또 하나의 소원은 선비정신을 되살리는 일이다. 이는 유교의 근대화를 통해 이루어 질 수 있다.
고희를 넘긴 내 친구들은 거의 다 정년 퇴임해 편하게 지내고 있다. 그들은 나보고 이제는 물러앉아 편히 살라고 충고한다. 그래서 나도 가능하면 글씨도 쓰고 운동도 하고, 고서도 읽으면서 여유를 찾아보고자 한다. 하지만 전도사의 고질병은 끝내 고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입력시간 : 2004/12/07 19:38
[나의 이력서/이용태] <14> 각계 유닉스 도입 반발
[나의 이력서/이용태 회장] <17> 전자계산기 국산화 연구실 See below.
[나의 이력서/이용태] <18> '최고의 마이크로컴퓨터' 꿈
[나의 이력서/이용태 회장] <19> 자동학습기·컴퓨터단말기 개발
[나의 이력서/이용태 회장] <20> 연구원 100명 지원계획 무산
[나의 이력서/이용태 회장] <21> 박태준 회장과의 사연
[나의 이력서/이용태] <22> '10조 투자 플랜' 좌초
[나의 이력서/이용태회장] <24> 전자기술연구소 프로젝트
[나의 이력서/이용태] <26> 삼보컴퓨터 창립 See below.
[나의 이력서/이용태 회장] <17> 전자계산기 국산화 연구실
LSI개발 소식에 인생 항로 바꿔
삼보컴퓨터의 탄생 과정을 얘기할 차례다. 나는 1969년 말 미국에서 돌아와 이듬해 초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전자계산실에 근무했다. 나는 미국 유타대에서 통계 물리학을 전공했는데 그때 컴퓨터에 푹 빠졌다. 컴퓨터를 잘 활용한다면 물리학의 새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귀국해서 나는 사람들이 컴퓨터를 잘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전세계 컴퓨터 역사상 매우 중대한 사건이 그 해 발생했다. 그건 내게도 큰 충격이었다.
미국의 인텔이라는 조그만 반도체 회사가 최초로 고밀도집적회로(LSI)칩을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다. LSI는 신문지 절반 크기의 전자회로를 손톱 만한 크기로 압축한 것이다. 이 LSI에 기억장치를 집어넣은 걸 메모리 칩이라고 부른다. 또 LSI에 컴퓨터의 계산기능을 넣은 것을 마이크로프로세서다.
1970년 여름 내가 KIST연구원들에게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응용에 관해 강의하고 있다. 인텔이 LSI를 개발한 건 내겐 일대 사건이었다. |
내가 흥분한 이유는 “우리나라에서도 내 손으로 컴퓨터를 만들 수 있겠구나”하는 자신감 때문이다. 단군이래 처음으로 한국 사람이 세계 최첨단 기술을 이용한 최고의 제품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믿었다.
이유는 이렇다. 초기의 컴퓨터는 아이 주먹 만한 진공관을 몇 만개 사용했다. 그 기계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큰데다 엄청난 열이 발생, 고장이 빈번했고 다루기도 매우 힘들었다.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뒤에는 진공관이 콩알 크기의 트랜지스터로 바뀌어졌고 열의 발생도 현저히 감소하는 등 실용 상태가 됐다.
그렇지만 장롱 만한 크기의 컴퓨터 속에는 수십만 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갔다. 각 트랜지스터에는 세 개의 발이 달리는데 그 발 하나마다 전선이 연결됐다. 이처럼 옛날 컴퓨터를 뜯어보면 수백만개의 철사 줄이 엉켜있었다. 이렇게 복잡한 컴퓨터를 우리가 만든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마이크로프로세서 칩을 쓰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 칩만 잘 적용하면 세계에서 가장 좋은 컴퓨터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LSI는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꿔 놓은 크나큰 계기가 됐다. 그로부터 나는 우리나라를 컴퓨터 선진국으로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30년 넘게 컴퓨터와 희비고락(喜悲苦樂)을 함께 했다.
그 당시 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다녔다. “마이크로 분야에서만은 한국이 세계 최고의 컴퓨터 개발 및 생산 수출국이 될 수 있다. KIST나 정부에서 내게 연구원 100명만 지원해달라. 그러면 3년 내 세계 최고의 컴퓨터를 만들어 내겠다.”
불행하게도 내 주장을 이해하기는커녕 귀 기울이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내가 로켓을 타고 별나라에 가겠다는 얘기쯤으로 취급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은 보잘 것 없었다. 일본이 버린 한물 간 기술을 얻어 싼 인건비로 라디오나 TV를 만들어 수출하는 정도였다.
삼성그룹만 해도 삼성도시바나 삼성NEC 등은 일본의 도시바와 NEC와 합작해 기술을 얻어오는 단계였다. 그나마 끈질긴 설득 끝에 나는 겨우 KIST로부터 전자계산기 국산화연구실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연구원은 100명이 아니라 고작 10명이었지만 말이다.
입력시간 : 2004/10/07 17:17
[나의 이력서/이용태] <26> 삼보컴퓨터 창립
청계천 小가게서 정보산업 첫 발
나는 정보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벤처 기업을 만드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때 구상한 벤처 비즈니스 모델은 이랬다. 회사 하나 차리는데 필요한 자본금을 1억원 정도로 볼 때 한 구좌에 1,000만원씩 열 개만 모이면 하나의 회사가 탄생한다.
(1990년 당시 대졸 기술자 연봉은 1,000만원을 밑돌았다. 그러므로 1980년엔 더욱 큰 돈이었다. 그러나) 출세한 사람에게 1,000만원은 그리 큰 부담이 아니다. 투자자는 대신 한 달에 한번 정도 모여 회사와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는 등 일종의 동호인 클럽을 형성한다. 다른 한편에선 젊은 기술자들에게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놓게 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골라 회사를 맡긴다.
나는 이를 실천에 옮겼다. 3년도 안돼 5개의 회사가 탄생했다. 우선 마이크로컴퓨터를 생산하는 삼보컴퓨터를 세웠다. 벤처라는 말 자체가 생소한 1980년 7월이다. 이어 마이크로컴퓨터를 파는 엘렉스, 이 컴퓨터에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한국소프트웨어연구소(KSI), 기술개발을 위한 큐닉스, 컴퓨터 이용자 및 기술자 양성을 위한 코콘 등 4개 회사를 잇따라 만들었다. 이중에는 내가 처음부터 일으킨 회사도 있고 기존 회사를 인수한 것도 있다.
2000년 7월 삼보컴퓨터 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 내(왼쪽 두번째)가 강진구 초대 부사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왼쪽은 판매를 맡았던 이윤기 사장이다. |
예를 들어 삼보는 청계천에 있는 조그만 가게를 인수해 시작했다. 처음부터 직접 사람을 뽑고, 장비와 부품을 구하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창기라는 사람의 가게를 인수, 사업에 나섰다. 백씨는 원래 음향장치 회사인 ‘기쁜 소리사’에서 일했다. 기술이 뛰어났던 그는 청계천에 직접 가게를 차린 뒤 주로 비디오 게임기를 조립해 팔았다. 하루는 그가 일본 샤프에서 나온 마이크로컴퓨터를 카피해 나를 찾아왔다. 마이크로컴퓨터 사업의 장래와 타당성을 상의하러 왔다고 했다.
나는 당시 컴퓨터 회사 차릴 궁리에 골몰해 있던 터였다. 그래서 윈윈 전략을 세웠다. 내가 그 가게를 인수하면 시간을 절약하면서 창업의 디딤돌로 삼을 수 있었다. 백씨도 빡빡한 가게 운영에서 벗어나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삼보컴퓨터가 세상에 나오게 됐다.
나는 책상 머리에 앉아 일일이 컴퓨터를 조립하고 팔러 다니는 대신 정보산업이라는 큰 틀에서 사업 영역을 개척하기로 했다. 실제 업무는 젊은 일꾼들을 찾아 뜻을 펼치게 했다.
생산 부문은 금성사 공장장 출신인 김종길씨에게 맡겼다. 판매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전자계산실에서 함께 일했던 이윤기씨가 적임자라고 여겼다. 그래서 두 사람을 대표이사 사장으로 임명하고 업무를 갈라주었다.
개발 분야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통신연구실에 근무하던 강진구씨를 영입하려고 마음 먹었다. 나는 강씨와 만나 “우리나라 기업은 사장과 부사장 등 경영진을 우대하는 게 관례다. 그들은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를 인정 받는다.
반면 연구실에 틀어박혀 기술 개발에 몰두하는 사람은 무시당하는 일이 허다하다. 나 자신 기술자 출신인 만큼 기술자가 신나게 일할 수 있고 대우 받는 회사를 함께 만들어 보자” 고 함께 일할 것을 제의했다.
강씨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두루 통달했다. 특히 개발은 물론 생산 기술에도 노하우를 지닌 당시 최고의 엔지니어였다. 그는 흔쾌히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기술 중심 벤처 기업의 부사장이 됐다. 그러나 대우는 사장과 똑같았다. 경영 못지 않게 기술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입력시간 : 2004/10/20 1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