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토미히데요시는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와 같은 지역인 오와리(尾張:지금의 나고야)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의 이름은 키노시타토오키치로오(木下藤吉郎)라고 했다. 눈이 톡 튀어나오고 원숭이와 같은 못 생긴 인상(선교사 프로이스의 평)때문에 사루(猿)라는 별명이 붙어 그의 주군인 노부나가(信長)도 그렇게 부르고 때로는 「대머리 쥐새끼(はげねずみ)」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한 미천한 신분에서 출세한 배경을 전해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토오키치로오(藤吉郎=秀吉)가 노부나가의 마굿간에서 일하던 때의 일화이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새벽에 노부나가가 긴급출동하기 위해 갑자기 신발을 신었는데 훈기가 배어 따뜻한지라 이유를 물은 즉, 마굿간 당번인 히데요시가 밤새 품 속에 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했다. 이렇게 하여 노부나가의 눈에 든 것을 계기로 그는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아시가루(足軽)라는 말단 步兵이 되었는데 점점 노부나가에게 인정을 받아 [주임상사]격인 아시가루(足軽)隊長에 올랐다. 1566년 축성과 관련된 난공사의 임무를 부여받은 토오키치로오(藤吉郎)는 놀랄 정도로 단기간에 훌륭하게 완성하여 그 재능을 인정받은 것을 계기로 각광을 받은 후, 군사적으로도 수완을 발휘하여 드디어 참모로까지 승진했다. 그는 신분상승에 맞추어 1573년에는 성과 이름을 하시바히데요시(羽柴秀吉)로 바꾸었다. 즉 상관인 니와나가히데(丹羽長秀)와 시바타카츠이에(柴田勝家)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할애받았다고 한다. 그 후 전공과 더불어 승진을 거듭함으로써, 마침내 상관들을 누르고 서열 5위 안에 들 정도로 부상했다. 그러던 중 [혼노우지의 난]이 일어나자 라이벌인 아케치미츠히데(明智光秀)를 반역자로 토벌하여 명분을 축적한 후, 후계자 경쟁에서도 시바타가츠이에(柴田勝家)를 패사시키고, 노부나가의 아들 오다노부카츠(織田信勝)를 굴복시켜 명실공히 제1인자가 되었다. 그 후 천하를 통일한 그는 옛날의 하시바히데요시(羽柴秀吉)가 아님을 과시하기 위하여, 이번에는 천황으로부터 姓을 하사받는 형식을 빌어 하시바(羽柴)에서 토요토미(豊富)로 개성을 했다.
<키노시타(木下藤吉郎) -> 하시바히데요시(羽柴秀吉) -> 토요토미히데요시(豊富秀吉)>
히데요시는 지혜가 출중한 지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전법은 정공법보다는 간접적인 공격 즉 水攻,火功,餓死作戰,지연작전등의 전략을 구사하여 자기편의 손실은 극소화하면서 상대편이 항복하고 나오게 한 예가 많다.
일본 역사상
히데요시와 비슷한 인물이 300년 후인 19세기에? 있다.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이다.
두 사람이 똑같이 아시가루(足軽)라는 말단 무사에서 출발하여
太政大臣과 総理大臣이라는 최고위직에 올라, 일본인에게는
전형적인 입신출세의 영웅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천한 신분 출신에 대한 열등감도 공유하여 이름을 바꾼
점도 같다. 이토오(伊藤)의 경우에는 원래의 이름인 슈운스케(俊輔)를
히로부미(博文)로 바꿨다. 또한 그들은 시대의 간격을
두고 한반도를 침략한 원흉이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