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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락 수난시대

 

2000년 10월 3일 화요일 187일째
팔레스타인 자치구에서 12살짜리 아이가 죽었다, 이스라엘군이 쏘았음이 분명한 총알을 맞고서.
흰 벽 앞의 흰 돌덩이 뒤에 숨어서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쳤다.
"여기 아이가 있어요, 쏘지 말아요!"
아이는 아버지 등에 달라붙어 오돌오돌 떨고 아버지는 팔을 마구 휘두르며 외쳐댔다. 아무리 몸을 동글려도 돌덩이에 다 가려지지 않는 다리와 몸뚱이를 자꾸만 옹그리며 그들은 울부짖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투다다닥- 총알이 쏟아지고 아이가 아버지의 무릎으로 고꾸라졌다. 다리에 총알 세례를 받은 아버지는 벽에 기댄 채 넋을 놓고 있었다. 그렇게 아이는 제 아버지의 무릎에 상체를 얹어 놓은 채 죽었다.
그 모든 모습이 TV에 방송됐다. 잔인한 언론!
죽일 놈들, 이스라엘군에 저주를!
이건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리라. 기독교인들이 성지라고 여기며 찾아드는 그 이스라엘 땅에서 나온 그들, 그들 속의 악마를 저주한다. 그 악마를 이용해 돈을 벌고 있는 무기장사들도, 그들의 우두머리들도, 또 그들을 맹종하는 무리들도 모두모두 증오한다.

10월 4일 수요일 188일째
어제 TV에서 본 장면이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마치 악몽처럼 계속 따라다닌다. 전세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참하게 죽어간 그 아이의 마지막 말을 병실에 누운 아이의 아버지가 전했다.
"아버지, 두려워 마세요. 누군가 우릴 구해줄 거예요..."
아무도 그 아이를 구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총알을 퍼부었을 뿐이다. 도대체 인간들은 왜 이리도 잔인하고 무도하단 말인가.
아이는 천국에 갔을까? 아이는 제가 죽을 줄 몰랐을까?

도윤이는 예방주사를 맞았다. 소아마비, DPT 3차, 뇌수막염 2차. 많이 울었다. 그러고는 힘들었는지 내내 잠을 잤다. 9.1㎏, 71.4센티.

10월 5일 목요일 189일째
'어-, 어우-' 하며 놀던 도윤이가 어느 순간 갑자기 조용해져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면 문득 몹시 두려워진다.
'어디로 사라진 거 아닐까?'
까닭모를 불안감에 얼른 아이를 찾아보게 된다.
보행기 위에서 다음 놀잇감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는 아이. 그러다 칭얼칭얼, 같이 놀아달라고 보챈다.
기어다니기 시작하면서 수난을 당하고 있는 양 엄지발톱은 자주 뒤집혀서 고민거리다. 그래서 맘놓고 기어다니게 할 수도 없다. 그러자니 같이 놀아 주어야 하는데 참 마땅한 놀이가 없다. 망설이다 안 봐주거나 내가 제 시야에서 벗어나면 제법 '으-음-마!' 하고 마치 나를 부르는 듯 소리지르며 운다. '어-음-마!', 그 소리가 듣고 싶어서 괜히 기다려보기도 한다.

10월 6일 금요일 190일째
도윤이는 제 힘으로도 잘 앉아 있는다. 기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가도 끌어당겨 놓은 다리 위에 엉덩이가 올라간 채로 팔의 중심이 흩어져 앉아 있기도 한다.
동그랗게 옹그린 몸과 무언가 장난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초롱한 눈은 장차 개구쟁이가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엎드렸을 때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욕구를 가로막는 육체적인 한계 때문에 양발로 끊임없이 바닥을 굴러댄다. 그러다 급기야 며칠 전엔 오른쪽 엄지 발톱이 찢겨져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다. 저도 아프겠지만 보는 나도 마음이 몹시 불편하다. 찢겨져 갈라진 발톱 귀퉁이가 솟아 있어서 길 때마다 걸려 아플 것 같은데 어떻게 손써줄 방법도 없고, 아이도 아픈지 치료조차 못하게 한다. 오른족 발만 잡아도 잽싸게 뿌리치는 바람에 광대뼈만 얻어맞았다. 제법 아프다.

10월 7일 토요일 191일째
2000년 가을, 내게는 도윤이라는 존재가 있고, 이 아이가 내 인생의 한때를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품에 안겨 젖을 물고, 그 젖을 온 팔로 감싸고 눈을 감은 채 평온히 먹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서 나는 나를 증명하고 있다.
아이가 내게 눈웃음을 보내고 하얀 아랫니 두 개가 훤히 보이도록 입꼬리를 올리며 활짝 웃어 줄 때도, 내 얼굴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으로 벌개진 얼굴로 울고 있을 때도 충분히 증명된다, 내 존재는.

10월 8일 일요일 192일째
도윤이에게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다. 비록 가까운 인천이었지만, 영종도에 가서 회를 먹고, 새우를 사왔다. 내내 자기만 하던 도윤이. 배를 타고서 잠시 깨어 갈매기를 구경하고는 또 자고... 바닷내음, 바닷바람, 바다 위에 누운 하늘, 도윤이가 그것들을 느꼈을까.

10월 10일 화요일 194일째
도윤이는 매일 바깥공기를 쐬주어야 한다. 하루 종일 집안에만 있으면 몹시 답답해하고 칭얼댄다.

10월 11일 수요일 195일째
드디어 도윤이가 엄마한테 엉긴다. 놀면서 내 다리를 부여잡고 기어오르고 얼굴을 비벼대면서 엉겨붙는다. 너무나 사랑스럽다. 안겨서는 목을 휘어감고 손으로 목을 꽉 누르는데 그때마다 내 목에 손톱자국이 난다. 짜릿한 통증, 그러나 기분 나쁘지 않다.
엄마한테 엉길 줄 아는 아이, 이제 제 응석을 받아주고 먹이를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다. 내 몸에 달라붙는 그 보드랍고 살폿한 느낌이 이 아이 속에 들어 있는 나에 대한 사랑이려니 싶다. 그러다가 팔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 온몸을 뒤로 확 젖힐 때면 갑자기 놀라게 되는데, 이때는 '아, 아이가 하나의 독립된 개체임을 내가 잊을 뻔했다' 하고 상기하게 된다.
목욕할 때도 잠시도 가만히 못 있는 도윤이. 비록 힘은 들지만 힘세고 힘찬 기운으로 온몸을 건강히 움직이는 아이를 보면 그저 고마울 뿐이다.

10월 12일 196일째 내 사랑 전화선
비틀거리다 다리를 꼬고, 꼬인 다리를 어쩌지 못해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 그것이 도윤이가 스스로 앉는 방법이다. 그렇게 어렵사리 앉아서는 어느새 중심을 잃고 툭- 넘어진다. 기는 것도 능숙하지 못해서 몇 발짝 못 가는 것 같은데 '선'만 보면 아주 빨라진다. 침대 머리맡에서 놀다 전화선을 발견하면 순식간에 기어가 발치에 있는 전화선을 잡고 끌어당겨서는 입에 물고 논다. 어느 손이 먼저였는지, 어느 다리가 먼저였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부지런히 기어가서는 선을 잡고 논다. 배를 바닥에 대고서. 거실에선 전선을 잡고 놀려고 하는데 냉장고 옆 전선을 아예 테이프로 붙여 놓았더니 테이프 위를 만지작이다 이제는 포기한 듯하다.

10월 14일 토요일 198일째 서랍 여는 도윤이
어젯밤엔 왜 그리 잠이 쏟아지는지 일을 제대로 못했다. 그리고 오늘 오전에도 맘대로 할 수 없었다. 도윤이는 자꾸 내 손을 필요로 하고, 토요일마저 퇴근이 늦는 남편.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일까지 끝내야 하는 일 때문에 화가 났다. 나는 가사와 육아로 일을 못하고 있는데, 남편은 회삿일 때문이라면 이 두 가지에서 온전히 놓여날 수 있는 것이다.
5시가 넘어서야 퇴근해 온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바람을 쐬러 갔다. 그저 조금 돌아다니고 나면 마음이 가라앉을 듯했다.
제과점에 가서 케이크 한 조각을 먹으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30분이나 지났을까, 머릿속이 분주했다. 'TV 밑 서랍장 커버를 만드는 게 좋겠다. 힘 좋은 도윤이가 벌써 서랍을 여는데 좀더 시간이 지나면, 아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서랍을 버럭 열테고 잘못하면 다칠지도 모른다. 상도 커버를 하는 게 좋겠다, 같은 색으로. 화장대도 서랍이 열리면 다칠 테니까 커버를 해야겠다. 내가 쓸 때만 사용할 수 있는 지퍼를 달아 놓으면 그리 불편하지는 않을 거다.'
참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지금 내겐 엄마라는 직업이 가장 크니까.

10월 16일 월요일 200일째 짚고 서기에 성공한 도윤이
3층 아주머니가 블록을 한 보따리 주셨다. 지금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이 쓰던 건데 도윤이에게 필요할 것 같다며.
그 블록을 욕실에서 씻고 있는데, 욕실 앞까지 기어 온 도윤이. 도윤이가 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며 잘 놀더니 어느새 한 손을 척, 욕실 문턱에 올려놓는 게 아닌가. 어라! 이제 겨우 기는 녀석이 벌써 한 손을 떼서 높은 곳을 잡네?
기특해서 한참 지켜보는데 한 손만 올려놓고 비틀비틀대던 도윤이가 급기야 '으앙-'. 껴안고 도닥여주는데 내 목을 꼭 껴안은 도윤이 어깨뼈가 손에 느껴진다. 이렇게 단단해져가는구나. 말랑말랑하기만 하던 몸뚱이가 어느새...
오늘은 도윤이가 앉았다 엎드렸다 하며 잘 놀아주어 많이 편했다. 아침엔 욕실 문턱에 한 손밖에 못 올리던 도윤이가 저녁엔 양손을 척척 올리고 꿈틀거리며 엉덩이가 요동치더니 드디어! 엉덩이를 들고 다리를 폈다. 용한 녀석. 제 힘으로 버티고 선 것이다.

10월 17일 201일째
비가 와서 외출을 못하니 도윤이가 몹시 힘들어한다.
오늘부터는 이유식을 하루에 두 번 먹이기로 한다. 조금씩이지만 어른들처럼 제대로 식사하는 습관을 길러주기 위한 것이다.

10월 18일 수요일 202일째 똑바로 선 도윤
상 앞에서 도윤이를 앉혀 놓고 뒤에서 감싸안은 채 일을 하고 있는데 어느틈에 도윤이가 상을 잡고 일어섰다. 똑바로 꼿꼿이. 그러더니 밤에는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흔들의자를 잡고 일어선 것이다. 제대로 선 자세. 참 아이 자라는 건 놀라운 일이다. 성장과 발육이 얼마나 빠른지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경이롭고 신기하다. 이제 아이는 손을 잡고 걸으려 들고 앉아서 노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한 가지 행동을 터득하면 바로 전의 단계를 싫어하는 거다. 앉기 시작할 때는 기는 걸 좋아하지 않더니 서고 싶어서 앉아서 노는 걸 즐기지 않는 거다. 이제 좀 있으면 걷고 싶어서 울어대겠지...

10월 19일 목요일 203일째
도윤이는 딛고 일어서서 오래 버틴다. 보행기에서는 눈에 띄는 것, 손에 잡히는 건 모두 잡으려 하고, 물려들고. 뭔가 말하려는 듯 아- 아- 소리를 질러댄다.

10월 20일 금요일 204일째 윗니가 난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우리 도윤이, 윗니가 나오고 있다.
밥상까지 기어와서는 밥상을 잡고 일어서고, 밥상에 놓은 제 밥그릇을 잡아 입으로 가져가서는 이로 갉아댄다. 사기그릇에선 싹-싹-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난다. 밥상에 거의 엎드린 채 노는 도윤이는 내가 한 팔만 잡아주어도 배를 상에서 떼고 똑바로 서 있는다. 참 빠르다. 기기 시작한 지가 얼마 안됐는데 벌써 서려고 하고, 최대한 팔을 뻗어 뭐든 잡으려 한다.
젖을 먹을 때는 손으로 엄마 젖가슴을 꼭 부여잡고 꼭꼭 누르며 힘을 주고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처음엔 벌컥벌컥, 조금 지나면 음미하듯 먹는다. 매우 평화롭게. 꼭꼭 누르는 그 손짓은 아마도 제 힘을 자랑하고픈 모양이다. 걸핏하면 내 목을, 허벅지를 꽈악 움켜쥔다. 당시에는 몹시 아픈데, 그 통증은 이내 사라진다.
도윤이는 피부가 몹시 건성이다. 9월 초에 얼굴의 귀 앞쪽에 벌겋게 오통도톨한 것들이 나더니 처음엔 땀띠 같던 그것이 없어지지 않고 오래 가며 결국엔 허옇게 살갛이 일어났다. 아토피인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의사에게 상담했지만 비슷한 거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할 뿐이다. 다리는 더 심하다. 일주일 전에 발긋발긋하더니 지금은 마치 긁힌 자국처럼 양쪽 종아리가 갈라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