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여행

한비아의 글을 읽었더니 잘 나가던 직장을 관두고 여행을 떠난 이유가 절대 이러이러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바람직하지 못한 이러이러한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 내 경우와 꼭 맞아떨어져서 창피할 지경이었다. 나이는 먹고 (난 당시 29살로 두달 후엔 드디어 30살이 되고야 말 상황이었다) 직장은 지긋지긋하고(학원강사로 낮밤이 바뀌어 일하 느라 심신이 황폐해져 있었다) 상대적 빈곤감과 노처녀의 외로움이 극에 달해 있었다. 같은 직장에 다니던 언니가 "내 친구를 만나보시겠습니까? 난 천사를 믿지 않지만"이라는 책을 빌려주었다. 켈커타서 봉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읽고나서는 밤새 꺼이 꺼이 울었다. 남들에게 뒤쳐질까 불안해하며 정신없이 살아온 내게는 몇 달씩, 혹은 몇 년씩 그곳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천사였다. 내가 이제껏 내 시간과 돈을 들여 다른 이를 위해 무 엇인가 도와줄 여유가 있었던가? 돈의 여유가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없이 살아온 내가 부끄 러웠다. 그런데 소라(가명)언니는 평생 숙원이었던 인도여행을 단행하는데 같이 떠나자고 했다. 언니는 인도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고 이미 가고 싶은 곳을정해서 일정을 짜고 오랜 준비를 한 상태였다. 언니의 계획에는 켈커타도 들어있었다. 난 97년도에 마음이 극도로 복 잡한 것을 핑계로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그 고단하지만 뿌듯한 재미가 그리웠다. 눈치 볼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성공하고 싶은 직장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벌어놓은 약간의 돈과 튼튼한 배낭이 있었으므로 두 달간 인도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적어도 친척들 모여서 시집가라 잔소리하는 명절의 고통을 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난 영어강사였고 언니는 수학강사였으므로 우리는 환상의 콤비가 될 수 있었다. 난 숫자와 이름에 젬병이었으므로 언니가 모든 지출과 일정을 맡았고 난 통역만 하면 되었다. 인도 여행 최적 시즌인 10월 우리는 사표를 냈다. 여행사에서 주체하는 배낭여행 설명회도 참석하고 우간다라 불리는 여행 안내서와 복대도 구입하였다. 막연히 인류의 4대 문명 발상 지이고 타지마할이 있으며 우리보다 조금 못사는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인도를 여행하려고 하니 생각치도 못했던 주의사항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비위생적인 환경, 성추행, 사기꾼, 대마초까지... 그래도 철저히 준비한 언니가 있으니까. 세계사책에 나 오는 멋진 유적지도 많으니까.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으니까. 이미 사표를 냈으니 까. 부모님께는 직장이 너무 힘들었다고 말해서 동정심을 불러일으킨 뒤 여행사 팩키지 관 광으로 태국을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렸다. 차마 두 달이나 못사는 나라를 여행하겠다고 말씀 드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첫 번째 불길한 조짐은 여행사에서 비행기 티켓을 살 때부터 나타났다. 인도로 가는 가장 저렴한 비행기는 아나항공의 2개월 오픈 티켓이었는데 그 가격이 50만원대에서 시즌을 맞아 60만원대로 올랐다. 로열네팔 항공사의 1년 오픈 티켓은 79만원이었다. 게다가 인도여행 전문가인 여행사 직원은 언니가 심혈을 기울인 일정이 비현실적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인도는 계획대로 되는 나라가 아니고 우리가 가보고 싶어하는 곳을 다 보려면 2달은 너무 짧다는 것이다. 이왕 간김에 계획한 곳은 모두 돌아보자고 합의하고 우리는 1년 오픈 티켓 을 샀다. 하지만 내가 1년씩이나 여행할 거라고는 아무도 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다.

위험한 인도의 특성상 여행사 직원을 따라갔다가 우리끼리 더 다니는 방법을 권했으나 난 단체관광은 질색이어서 유럽배낭여행의 경험을 내세워 언니를 안심시켰다. 훗날 이 일에 대 해 두고 두고 언니에게 미안했다. 인도에서 영어가 통한다는 말만 철썩같이 믿고 난 앞으로 닥칠 일들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백수가 시간도 많겠다 비자를 받으러 직접 인도대사관을 찾아갔다. 남산으로 가는 오르막길 을 따라 가난한 나라의 작고 초라한 대사관이 죽 늘어서 있고 맨 끝에 인도대사관이 있었 다. 책에는 세 가지 종류의 비자가 있다고 했는데 신청은 6개월 멀티비자밖에 안된다고 했 다. (지금은 그나마 2개월이란다. 가끔 인터뷰에서 사정하거나 간곡한 편지를 써가면 6개월 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 인도의 인기가 날이 갈수록 높아진다더니 과연 비좁은 대사 관 로비가 꽉 차게 많은 사람들이 비자신청을 하고 있었다.

인도인에 대한 첫인상은 기다림 을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이었다. 그때는 답답한 공무원의 관료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기다림에 관대하다.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도 자신이 기다리는 것도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특이하게도 아버지 이름이나 남편이름을 써야하는 비자신 청서를 대문자로 적어가지고 인터뷰를 봤다.

"Good afternoon, Sir." 좋은 인상을 주려고 한마디 건낸 것이 사단이었다.

"Oh, you speak English. "

"Yes, I do. Just a little. " "What is your profession?" (직업이 무엇입니까?)

"I used to teach children English, but not now for this trip.(애들 영어 가르쳤는데요 이번 여행을 위해 관뒀죠.)

"Who do you think the best English speaker?" (누가 가장 영어를 잘합니까?)

"Excuse me, sir?" (뭐라구요?)

"Which country people speak English best?" (어느 나라 사람이 영어를 제일 잘 하냐구 요?)

"I haven't met many people from other countries. " (다른 나라 사람들을 별로 만나본 적 이 없는데요.)

"But since you are a English teacher, you can tell me that. Among Austrailan, American, English, Newzealander, Indian, who is the best English speaker grammatically?" (그래도 당신은 영어선생이니까 알 수 있을 거요. 호주인, 미국인, 영국인, 뉴질랜드인, 인도인 중 가장 문법에 맞게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누군가요?)

"I am afraid that I am not really in the position to judge anybody's English. To be honest with you, I am not a native speaker. I am still learning. "(다른 사람의 영어를 평가할 위 치가 아닌데요. 저는 솔찍히 원어민도 아니고 저도 아직 배우고 있는데요.)

"But you are a teacher, aren't you?" (당신은 선생이잖아요.)

"Just for kids." (애들 가르쳤는데요.)

"That is the basic. That's important, isn't it?" (그게 기본이죠. 기초가 중요하지요.)

"I guess so."(그렇긴하죠.)

"Monday 4 p.m." (월요일 4시)

"Pardon?"(네?) "Come Monday 4 p.m." (월요일 네 시에 오세요.)

"Thank you, sir. Good day.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비자비 영수증과 번호가 적힌 작은 쪽지를 받아들고 나왔다. 난 이런 인터뷰를 기대했었다.

"Why do you want to go to India?" (왜 인도를 가려합니까?)

"Just for a tour. I've read a lot of India. You have such a beautiful culture." (관광이죠. 인도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정말 아름다운 문화더군요.)

"Oh, yes. That's right." (그렇지요.) 로비에서 기다리던 언니는 사색이 되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길게 해? 나 어떻게?"

"인사하지 마!"

수학 강사였던 언니는 들어가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나왔다. 이정도로 황당한 인터뷰는 인도 여행 이후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인도다운 일화에 지나지 않지만 당시에 나는 벙 쪘 다.

다음주 월요일 정해준 시간보다 1시간 일찍 도착하였다. 나를 인터뷰했던 인도 아저씨는 두 명의 인도 여자와 함께 인테리어를 상의하는 모양이었다. 벽에 걸린 낡은 사진을 떼어 내어 이리 저리 옮기고 이 방 저 방 왔다 갔다 했다. 인도의 전통 무용과 타지마할 등의 유적지 사진이었는데 원래는 컬러 사진이었겠지만 색이 다 바래서 거의 푸른 색밖에는 남지 않았 다. 재활용하기는 무리가 있는 사진인데도 계속 자리를 바꿔서 여기 저기 걸어보고 있었다. 20대로 보이는 한 여자는 서양식 옷을 입고 있었고 나이가 많아 보이는 다른 여자는 고급스 런 실크 천을 두른 사리를 입고 머리는 길게 땋아 늘어뜨렸다. 풍성한 허리살을 드러낸 차 림이 가을날씨에 불안스러웠는데 나갈때는 화려한 꽃무늬가 있는 숄을 둘둘 감고 나갔다. 난 인도 아저씨와 눈을 맞추며 여러번 불쌍한 표정을 지었는데 시간이 될 때까지 결코 업무 를 시작하지 않았다. 나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속속 와서 로비가 점점 붐비는데도 그는 딴전을 피웠다. 차를 마시고 전화를 하고 다른 인도인과 껄껄 웃으며 담소를 나눴다. 드디어 시 간이 되자 그는 책상위의 종이 상자에 든 여권들을 살펴보며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언니 와 내 쪽지를 건냈더니 내 여권을 먼저 펴보고 사진을 보고 비자를 붙친 곳을 보았다. 내 여권 바로 옆에 언니의 것이 있어 손으로 가르치며, "There it is. "(거기 있네요.) 했더니 그는 아주 신경질적으로 "I know, I know! Don't worry!" (알아요. 알아. 걱정마요.) 하며 여전히 천천히 하나씩 살펴보고 건내주었다. 참을성 없는 한국인의 모습을 보인 것이 부끄러워 난 서둘러 대사관을 나왔다.

그로부터 3일 뒤 난 비행기를 탔다. 성수기라서 비행기표를 구하기 힘들다고 하더니 막판에 급하게 구해져서 갑자기 떠나게 되었다. 델리로 들어가서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방콕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티켓이었으므로 여름옷부터 겨울옷까지 다 필요했다. 언니의 계획에 따르 면 인도의 사막에서 낙타사파리를 하고 네팔에서는 유명한 히말라야 트렉킹을 해야하고 방 콕서는 스킨 스쿠버를 하기로 되어있었다. 유럽여행에 가져갔던 배낭에 햇반부터 라면까지 여름옷부터 겨울옷까지 꾹꾹 눌러담았더니 14Kg이었다. 부모님이 절대 공항에 나오지 못하게 하고 혼자서 큰 배낭을 매고 지하철을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티켓을 샀던 여행사에서 유학생의 짐을 가져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델리서 공부하는 아들을 위해 전기장판등을 한 짐 싸가지고 공항에서 만난 모대학 교수님은 나중에 알고보니 학교때 감명깊게 읽었던 소설의 작가이기도 했다. 유학생이 공항으로 마중 나올 것이며 이후 한인교회에서 운영하는 숙소에 묵을 수 있도록 주선해주셨다. 셈이 밝은 언니가 운반비까지 받아서 우리는 델리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사먹기로 했다. 이 분들을 기다리느라 조금 늦게 책크인을 했더니 언니랑 나는 따로 떨어진 좌석에 앉아야했 다. 게다가 비행기가 두 시간이나 연착되었다. 마침내 비행기에 올랐을 때 내 옆자리에는 거 구의 할아버지와 그에 못지않은 할머니가 간난 아기를 데리고 앉아계셨다. 터번을 두르고 푹신한 스웨터를 입은 할아버지는 무뚝뚝했고 풍만한 허리살이 드러난 사리를 입은 할머니 는 커다란 팔을 내자리에 턱 걸치고 있었다. 나는 벌써 인도로 가는 길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아기는 울거나 웃거나 아주 큰 소리를 냈고 아주 잠깐 동안만 잠을 잤다. 해외여행이 처음인 언니의 옆자리에는 온통 금부치로 치장한 중년여인이 앉았는데 쌀쌀맞아 보였다. 아시아나 항공의 담요는 때타도 잘 모르는 회색에 가볍고 따뜻했다. 배낭여행자에게는 매우 유용한 물 건이라며 언니가 가져가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래도 놓고 가라고 써있는 것을 가져가려니 마음에 걸려서 결국은 승무원에게 최대한 귀엽게 웃으며 가져가도 되냐고 물어보았다. 얼굴도 예쁘고 적어도 나보다 5살은 어려보이는 그녀는 그러시라고 말하며 살짝 웃었다. 한국서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운운하며 고상한 척 해놓고 두 장의 담요에 이렇게 비굴해지고 또 이렇게 기쁠 수 있다니. 여행은 평소에 하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게 하는 데 역시 그 의의가 있다. 기내식이 나왔다. 난 원래 뭐든 잘 먹기 때문에 기내식도 남기는 법이 없다. 작은 꼬마 김치 가 나왔는데 가방에 챙겼다. 옆자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안고 있던 아기를 발 밑에 뉘여놓 고 식사를 했다. 버스보다 흔들림이 덜한 비행기지만 그래도 발 밑에서 간난아기가 버둥거 리는데 밥을 먹기란 상당히 불편했다. 승무원이 그것을 보고 놀라서 새 담요를 2장 더 가져 다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아기 밑에 깔아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독특한 냄새가 나는 노란 커리와 밥을 먹는데 열중하였다. 식사후에 라디오를 듣다가 영화를 보다가 잠을 청해보려고 노력하다가 화장실도 갔다오고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언니를 찾아가 씩 한번 웃어주고 또 라디오를 듣다가 뒤척이다가... 드디어 뉴델리공항에 도착하였다.

비행기가 연착되어 기다리던 유학생들은 몹시 지친 모양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임에도 후끈한 공기가 느껴졌다. 여행사에서 어찌나 겁을 줬던 지 상상했던 것보다 공항은 깨끗하고 쾌적했다. 휘황찬란한 최첨단의 느낌은 없었지만 인도 식의 장식물이 걸려있고 그다지 역한 냄새도 나지않았다. 짐을 기다리는 동안 화장실에 갔 더니 말로만 듣던 바가지(container)가 있었다. 변기 앞에 수도꼭지가 바로 있고 그밑에는 물이 가득 찬 깡통이 있었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는 알았지만 난 그때 한국에서 가져간 부드러운 티슈를 이용했다. 유학생들과 함께 공항을 나서자 깜깜한 어둠속에서 갑자기 시 커먼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유학생들은 익숙한 듯 그들을 무시하고 프리페이드 택시 를 잡으러 갔다. 지저분하고 낡아 보이는 택시들과 남루한 옷차림의 운전사들, 릭샤꾼들도 있었다. 언니와 나는 그 혼란한 장면 앞에 졸음이 확 달아나서 공항 밖으로 나가던 발걸음 이 멈칫해졌다.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길은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었다. 다만 가로등이 침 침하고 커다란 나무들이 시커멓게 보였다. 동행한 유학생 중 한국에서 인도어를 전공했다는 여자분은 운전사와 유창한 인도말로 대화를 했다. 유학생의 아파트에 먼저 들러 짐을 내려 놓았다. 작은 아파트인데 깨끗하고 현대적이었다. 남학생 혼자 사는 자취방치고 너무 깔끔하 게 정리되어 있어서 칭찬했더니 빨래랑 청소를 해주는 아주머니가 온다고 했다. 워낙 값싼 노동력이 많아서 한푼이라도 아껴가며 생활해야하는 유학생들 형편에도 웬만하면 파출부를 쓸 수 있다고 한다.

2. 첫날 - 사치스런 택시 관광

우리가 머물게 될 숙소는 한인 교회에 손님들이 왔을 때 묵을 수 있도록 마련된 아파트 였는데 고 3 학생인 은영(가명)이 유학 준비차 와서 머물고 있었다. 한참 단잠을 잘 시간이었는데 우리 때문에 깨어서 미안했다. 우리는 이렇게 운 좋게 깨끗한 곳에서 편안하게 인도의 첫날밤을 보낼 수 있었다. 대부분의 배낭 여행자들이 혼잡한 파하르간지에서 숙소를 찾아 헤매는 것으로 인도여행을 시작하는 것에 비하면 천국같은 달콤한 시작 이었다. 다음날 아침 어리지만 의젓하고 용감한 은영이가 차린 아침 상이 우리를 감동시켰다. 끓인 우유, 인도 식빵, 쨈, 파파야, 콘 플레이크 등이 식탁에 가득 차려져 있었다. 우리보다 며칠 먼저 뭄바이를 통해 인도에 온 주연(가명)이는 간호학과 학생으로 켈커타에서 봉사 를 하고 싶다고 했다. 요즘 젊은이들의 당차고 목표의식 분명한 똑똑한 모습을 두 사람에게 서 볼 수 있었다. 처음 만났지만 아침을 다 먹기 전에 벌써 친해져서 오래 만난 사람들처럼 편안했다. 식사후 설거지는 나랑 언니가 궂이 우겨서 했다. 어린 친구들에게 얻어 먹은 것이 미안해서... 그리고 목사님댁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 기독교 신자인 언니는 밤마다 성경을 읽고 자는 만큼 그 분위기에 잘 적응하였다. 사목님께서는 우리가 학원 강사였다고 하니까 따 님 공부를 봐 줄 수 있겠다며 좋아하셨다. 두 분 모두 친절하게 인도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고 남쪽 해변이 아름답다고 하셨다. 언니의 일정에 남인도가 없었는데 내가 귀가 얇은 관계로 흥분해서 무작정 가자고 졸랐다. 사목님의 권유에 따라 택시를 하루 빌려서 시 내 관광을 하기로 했다. 원래는 흰 색 엠베서더 택시가 오기로 되었는데 검은 색 일반 택시 가 왔다. 파업중이어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마일리지를 종이에 써서 확인하고 6시간에 600 마일 Rs500라고 했다. 가이드 북에 있는 관광지를 둘러보았다. 대통령 궁, 인디아 게이트, 코넛 플래이스. 편안하게 이동하는 것은 좋았으나 택시의 주차료를 따로 지불하고 괜히 급 한 마음에 사진만 찍고 다음 장소로 바삐 이동하여 전형적인 관광객 같아서 좀 씁쓸했다. 운전사는 점잖은 할아버지였는데 친절하고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었다. 두고 내린 물건을 다 챙겨주고 우리가 뭘 해야할지 잘 몰라 우왕좌왕해도 화내지 않았다. 점심을 먹으러 책에 나 온 식당에 데려다 달라고 했는데 이곳은 인도에서 내가 간 최초의 식당이자 최고급이었다. 테이블보가 천으로 된 곳은 비싼 곳임에 분명하다. 웨이터의 차림새도 심상치 않았다. 터번에 금빛 장식을 달고 깔끔한 유니폼과 특이한 신발까지. 메뉴는 영어로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었는데 읽어도 사실 무슨 음식인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래도 우리보다 인도에 먼저 온 은영이의 도움으로 가장 인도다운 음식을 시켰다. 버터난과 밥, 몇가지 커리를 주문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지극히 평범한 인도 음식이었다. 음식이 나올동안 식당 안을 살펴보며 우리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즐거웠다. 다른 테이블에 앉은 인도인 가족이 있었는데 고급스런 사리를 입은 뚱뚱한 인도 여인들과 하얀 펀자비 옷을 입은 남자들이 중국음식을 먹고 있었다. 모두 수저와 포크를 사용해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우리를 힐끔 쳐다보기는 했지만 특별히 신경쓰지 않아서 고마웠다. 붉은 구리빛의 반짝반짝 잘 닦은 멋진 그릇에 담긴 인도 음식은 딱 내 입맛에 맞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앞으로 날마다 먹어야 한데도 충분히 견딜 수 있을 만큼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줄줄이 화장실에 다녀와서 탄성을 질렀다. 노란색과 분홍색 화장지가 걸린 깨끗한 화장실에 감동하며 한사람 앞에 200루피(한화 6,000원)정도 나온 계산서에 만족하며 식당을 나왔다.

우리가 택시로 향하는데 어디서 몰려왔는지 10살 안팎의 아이들 대 여섯명이 구걸하였다. 만국 공통의 바디랭귀지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입으로 음식을 가져가는 시늉을 하고 다른 손 으로 배를 두들이며 처량한 몸짓을 계속했다. 백번 듣고 백번 각오하고 백번 준비해도 일단 닥치면 어떻게 반응해야할지는 알 수가 없다. 먼저 꼬질 꼬질한 얼굴에 머리는 중구난방 헝 클어지고 솔기마다 터진 누더기를 걸친 아이들이 몰려드는데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을 꺼내 줄 정신도 없었고 일단 그들과 거리를 유지하고 싶었다. 택시로 뛰어들어가 문을 닫았는데 반쯤 열린 유치창으로 여자아이가 안고있던 아기를 들어올려 들이밀었다. 아기가 문사이에 낄까봐 겁이 났다. 순간 한 남자 아이가 여자아이를 밀쳐내고 얼굴을 창에 딱 붙 이고 입을 크게 벌렸다. 다른 아이들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싶었는데 그 아이는 혀가 없었다. 까만 피부와 대조적인 흰 이빨이 동그랗게 테두리처럼 둘러있고 가운데 목구멍이 까맣게 뚫려있는데 입안에 빨간 살이 뚝 끊어져서 혓부리만 아주 짧게 남아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얘는 혀가 잘렸나봐." 라고 누군가가 말했고 우리는 망연자실했다.

"언니 빨리 돈 좀 줘."

나는 거의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언니가 동전을 던져줬던 것 같다. 운전사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털어내고 택시를 출발 시켰다. 한동안 우리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아주 잠깐은 언니를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왜 인도로 오자고 해서 평생 지워지지 않을 끔찍한 장면을 보게 했는지. 하지만 너무 놀라서 넋이 나간 언니의 얼굴을 보고 금방 그런 생각이 들었던마저 미안해졌다. 인도는 아름다운 것만 볼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세상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은 모두 그럴 것이다.

첫날 구경한 곳 중 대통령궁은 멋진 건물이었지만 철문이 굳게 닫혀있어 내부를 구경할 수 없었다. 넓은 광장 땡볕 속을 걸어가 겨우 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책에서 읽은 코넛 플레이스가 생각 나서 무작정 가자고 했는데 현대적인 쇼핑가로 일정 시간을 계약한 택시관 광에 포함시키기에는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우선 너무 넓고 복잡했다. 택시가 기다리고 있는데 여유롭게 쇼핑하고 다른 곳에서는 찾기 힘든 세련된 카페나 패스트 푸드점을 즐길 수가 없었다. 이후 델리를 여러번 다시 찾았는데 그때마다 코넛플레이스에서 영화도 보고 에어콘이 시원한 아이스크림집에서 책을 읽거나 현대적인 가게에서 비싼 물건들을 실컷 구경하였다. 레드포트는 입장료가 하필이면 우리가 인도에 오기 직전에 끔찍하게 오른 관광 유적지였는데 $5나 내고 들어가라고 남들에게는 차마 권할 수 없겠다. 외부는 붉은 성이 제 법 멋진 곳이었는데 그 성벽 안에 더 멋진 무엇이 있을 줄 기대했지만 안에서도 볼 것은 성 벽밖에 없었던 듯하다. 외국인 보다는 인도인이 더 많았는데 그들은 입장료가 Rs5밖에 되지 않았다.

훵한 성안의 정원에서 물 마른 연못과 분수를 지나 다람쥐가 많은 잔디밭을 걸어다니다가 인도인 가족을 만났다. 할머니 할아버지 손자 아들 며느리 모든 가족이 구경을 나온 모양이었다. 그들은 멋진 색색의 터번을 쓴 시크교도들이었는데 기꺼이 우리와 사진을 찍었다. 은영이가 우리 중에는 인도에 가장 먼저 왔지만 교회와 집, 학교외에는 가본 곳이 별로 없어서 빨간터번에 멋진 수염을 기른 아저씨를 보자 꼭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은영이랑 둘만 찍어줄려고 했는데 아저씨가 부인을 부르고 부인이 할머니를 부르고 할머니가 다른 아들을 부르며 식구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들어와서 결국 11명이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 되었 다. 어린 아이와 젊은 여자들은 한사코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했다. 윗도리가 허벅지를 푹 덮는 펀자비 옷을 입은 아주머니가 내 옆에 섰다. 노오란 순금 귀걸이, 코걸이, 팔지, 목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까맣고 매끈한 피부에 또렷한 이목구비 때문인지 전혀 어색하거나 부담스럽지 않고 그 많은 장신구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여행 내내 화려한 장신구를 좋아하는 인도 여인들이 반지 하나없이 혼자 여행을 하는 나를 종종 불쌍하게 생각했고 기꺼이 팔찌를 하나씩 빼주기도 했다.

저녁에는 올드 델리의 이슬람 사원을 구경했는데 좁고 복잡한 도로 때문에 택시에서 내려 사원 앞까지 싸이클 릭샤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처음 타보는 싸이클 릭샤위에서 떨어질까봐 불안하고 자전거 패달을 맨발로 힘겹게 돌리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였다. 그 상황에서도 은영이와 주연이가 탄 릭샤를 따라가며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우리는 모두 인도 초짜, 아직 관광객이었으므로 매 순간이 신기하고 인상적이었다. 계단 위에 높여 지은 사원 주위는 사방이 시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신발을 벗고 사원내로 들어가야 했으므로 우선 나랑 언니가 먼저 들어가고 동생들은 신발을 지키기로 하였다. 사원은 아름다운 모자이크 문양과 돔형의 지붕을 가진 멋진 건물이었다. 해 질때가 가까워오자 모여드는 흰옷을 입은 무슬림들이 경건하고 진지해보였다. 그 분위기에 한껏 취해 있었는데 허연 수염에 터번에 흰 옷을 입은 할아버지가 회초리 같은 막대기를 휘두르며 우리는 내쫓았다. 하필이면 동생들이 기다리는 문과 반대편 문으로. 우린 신발도 없이 계단을 내려와 복잡한 시장 사람들을 헤치고 먼길을 돌아 처음 들어갔던 입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신전 앞에서 구걸을 하던 아이들이 앞장서서 신이 난 듯 길을 안내했고 어김없이 돈을 달라고 했다. 언니가 동전을 좀 쥐어줬던 것 같다. 우리가 반대편으로 나온줄도 모르고 은영이랑 주연이는 신발을 지키면서 사원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얗고 화려한 돔지붕을 지닌 사원 뒤로 석양이 지고 흰 옷을 입고 흰 모자를 쓰고 수염을 기른 사람들이 서둘러 밀려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신전을 들어가기 전에 허리를 굽혀 손을 문턱에 댄 뒤 이마와 입으로 가져가며 기도를 했다. 그 모습은 진지하고 숙연했다. 그러면서도 일상적이었다. 특별한 날 특별한 각오와 준비를 하고 나온 사람들이 아니라 그냥 일상의 모습으로 생업에 종사하다가 시간맞춰 사방에서 모여드는 사람들...

난 더러워진 양말을 벗고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너무 말라서 미안한 할아버지가 불편해 보이는 안장에도 앉지 못하고 일어서서 패달 을 밟는 사이클 릭샤를 타고 복잡한 시장길을 빠져나왔다. 택시운전기사는 우릴 보자마자 담소를 나누던 다른 아저씨와 빨리 인사를 나누고 차를 빼서 우리를 태웠다. 그는 수다스럽 지 않고 공손했으며 끝까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했다. 그는 콜택시를 부르는 사람들의 수준 을 맞추어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후로 난 서비스 정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릭샤 운전수들을 주로 상대해야했기에 종종 그의 무표정하면서도 공손한 얼굴을 그리워했다.

여행 선배들이 인도의 매력에 대해 한 말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인도에서는 무엇이든 가 능하다. 돈만 조금 더 지불하면 100년 전에나 가능했던 시중을 받는다는 것이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아무리 선진국이라도 돈을 얼마나 쓰냐에 따라 물론 대우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인 도만큼은 아닐 것이다. 아주 못사는 나라같으면 돈이 있어도 그만한 시설이나 그런 서비스 를 제공할 사람들이 없겠지만 인도는 마하라자라는 봉건시대적 귀족과 극빈자가 공존하는 나라기에 선진국에 있는 모든 부자들의 사치품과 그들의 취향을 충족시킬 수 있는 편의 시 설은 물론 인권이 보장되는 나라에서는 절대 돈으로 살 수 없는 대우를 받을 수 있다.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 들러 은영이가 좋아하는 파파야를 샀다. 신기한 열대 과일들이 많 았는데 난 그다지 모험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어서 누군가가 먹어보고 권해주기 전에는 별로 먹어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편하고 사치스런 전형적인 관광을 하고 나서도 나와 언니는 상당히 피곤했다. 저녁을 먹고는 그냥 쓰러져 잤다.

2000년 11월 18일

이튿날, 언니와 나는 용감하게 우리끼리 나가 보겠다고 나섰다.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 는데 우리가 묵고있는 한인교회 숙소는 상당히 부자동네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택이라고 불릴만한 으리으리한 집들과 정원, 정문앞에 예외없이 졸고 있는 경비원들... 은영이가 다니 는 영어학원의 학생은 부자집 마나님과 그 자식들인데 번쩍번쩍한 보석을 두르고 와서는 외 국여행 다니는 얘기만한다고 했다. 큰 길까지 멋진 집들을 구경하며 가끔 깨어나는 경비원 들과 인사를 하며 걸어나와 릭샤를 잡았다. 아니리끼딴에서 후마윤의 무덤까지 가는데 릭샤 꾼이 부르는 돈은 천차만별. 우리는 아직 초짜 티가 너무 나나보다. 결국 30루피에 합의를 봤다. 가로수도 우람한 뉴델리의 대로를 릭샤로 달리는 기분은 택시보다 불편했다. 온갖 매 연과 소음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고 폭주족 출신인듯한 운전사의 아슬아슬한 곡예운전으 로 충돌사고라도 나는 날엔 공중으로 튀어올라 뜨거운 아스팔트에 뭉개질 것이 확실했다. 인도 각지와 파키스탄, 태국등지를 다녔지만 뉴델리 릭샤가 제일 낡고 더럽고 위험했던 것 같다.

후마윤의 무덤에서 $10나 하는 입장료를 아끼기 위해 인도 북부의 작은 주인 마니뿌르인이 라 공갈을 쳤으나 아무도 믿지 않아 실패했다. 패션너블한 노란 스노보드 복을 위아래로 입 은 언니와 어색한 미국식 억양을 지닌 나는 누가 봐도 인도인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도인 은 10루피밖에 안하는 입장료를 외국인에게 바가지 씌우는 것이 얄미워서 그냥 한 번 해본 것이지만 막상 실패하고 $10을 내고 들어가려니 어찌나 창피하던지... 뒤에서 경비원들이 느 끼하게 비웃으며 하는 말. "헤이 재패니. 곤니찌와. " 다른 때 같았으면 "안녕하세요? 코리안."하며 생글거렸을 언니도 이번만큼만은 궂이 고쳐주 지 않았다. 멋진 건물과 정원이 있는 곳이었는데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는다. 불편한 마음에 빨리 보고 나가자는데 언니와 의견일치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립박물관까지 20루피를 내고 릭샤를 타고 갔다. 박물관도 외국인에게는 150루피나 받았지 만 그나마 달러를 요구하지 않아서 고마울 지경이었다. 상당히 넓은 곳이었는데 폐관시간까 지 얼마남지 않아서 천천히 꼼꼼하게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다보니 점 심을 먹지 못해서 박물관 구내식당에 가서 먹을 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짜이와 사모사라는 튀김을 300원도 못되는 가격에 사먹으며 가격대비 최고 만족도를 즐기고 있을 때 정겨운 한 국말이 들렸다. 해외나오면 다 애국자 되고 동포를 만나면 눈물나는지라 한국떠난지 만 2일 만에 만난 한국인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무역 박람회를 보러 오신 남자분 두 명과 통역을 맡았다는 유학생 언니가 따뜻하게 초짜 여행자들에게 여러 가지 충고를 해주었 다. 특히 고맙게도 자이쁘르 아그라를 잇는 황금의 삼각지라나 하는 관광코스에 동행할 것을 선뜻 권해주셨다. 신세지는 것을 싫어하는 언니는 그렇지 않아도 안락한 교회 숙소를 나와 진정한 우리끼리의 배낭여행을 하루 빨리 시작하고 싶어했고 나는 사업상 온 아저씨들을 따라다니면 좀 더 고급스런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어 무척 기뻤다. 일이 않될려고 그랬는지 운이 없었는지 결국 연락이 되지 않아서 그들을 다시는 볼 수 없었지만 여행자 들이 주로 모인다는 파하르 간지와 저녁때 돌아 다니는 여자는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사고 를 가진 인도인들에 대한 얘기를 해준 것은 어쨌든 참 고마운 일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달라드는 거지들에게 기분좋게 5루피나 박쉬쉬 했다. 은영이와 주연이에게 마니뿌르 해프닝과 300원짜리 점심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2000년 11월 19일 일요일

한인 교회에서 예배를 봤다. 초등학교때 성탄절 몇번을 빼고 교회라고는 다녀본 적이 없었기에 조금 어색했지만 울면서 기도하는 곳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한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성금을 얼마나 어떻게 내는 것이냐 였는데 난 어떻하든 우리가 돈을 냈다는 것을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이름을 쓰는 봉투에 담아서 하자고 했고 언니는 액수가 크지 못할 텐데 그러지 말자고 했던 것 같다. 어쨌든 돈은 언니가 모두 관리하기로 했으므로 언니가 알아서 했다. 예배가 끝난후 청년부에 가서 염치없지만 맛있는 점심을 먹은 후 황송하게도 목사님과 사목님께서 배려해주셔서 교회에 속한 차를 타고 로디 가든에 갔다. 사목님께서 추천해 주신 공원인데 넓고 깨끗한 잔디밭과 커다란 나무들이 런던의 센트럴 파크같고 입장료도 없으면서 유물이랄만한 건물이 군데 군데 있었다. 공원앞에서 교복을 입은 제법 깔끔한 애들이 다가와 기부금을 달라고 졸라서 조금 곤혹스럽긴했다.

" Madam, we are not beggers. Read this, and give us some donation as much as you want. "

당당하고 똘똘해 보이는 애들이 내미는 색종이에는 얌전한 영어글씨로 적십자 활동의 일환으로 빈민층 아이들에게 식량과 교육을 제공하기위한 기부금을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많이 돈을 냈다고 보여주는 리스트에는 들쑥 날쑥한 아이들 글씨로 사람들 의 이름과 돈의 액수가 나란히 적혀있었다. 이런 말을 일일이 들어주고 상대하고나서 돈을 주지 않는 것은 참 힘들었다. 깨끗하든 더럽든 돈을 달라는 아이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그때 마다 줄 수는 없었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서둘러 공원으로 들어갔다.

일년 내내 무럭 무럭 자라는 나무들이 울창한 공원은 땅 넓은 나라인만큼 넓직하고 시원 스러웠다. 휴일이여서인지 가족들끼리 자리를 깔고 싸온 음식을 펼쳐놓고 소풍을 즐기고 있 었다. 넓은 잔디밭에서 공놀이를 하거나 우리에게 생소한 크리켓을 하는 소년들도 많았다. 숲길을 따라가다 보니 오래된 건물이 있었다. 표지판이 없어서 어디에 쓰던 곳인지 모르겠 지만 크기나 장식으로 보아 신전이나 궁전의 잔해같았다. 관리를 잘했다고 할 수 없는 건물 상태로 봐서는 그다지 중요한 문화유산은 아닌 듯 했으나 유럽 어느 공원에서 본 풍경보다 운치있고 멋있었다. 옥상에서 사람들이 아래를 내려다 보기에 우리는 작은 돌계단을 찾아 기어코 올라갔다. 위에서 내려다 본 풍경은 그야말로 화사하고 평화로운 오후의 공원이었다. 거지도 각다귀떼같은(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모기떼) 릭샤꾼들도 없는 아주 편안한 휴식 의 공간이었다.

"아-- 좋다, 역시 인도에 오길 잘했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옥상의 구석구석에는 남녀가 쌍쌍으로 남의 눈을 피해 서로에게 무척 열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네 명의 외국 여인들이 방해꾼일 뿐이었다. 슬슬 눈치가 보여서 서둘러 내려가려는데 돌계단으로 내려가는 어두컴컴한 좁은 통로에서 한 인도 남자가 .... 여학교 앞에 자주 출몰하는 수퍼맨, 또는 아담은 아무리 많이 봐도 익숙해지기 힘든 광경이다. 게다가 이국타향에서 아름다운 공원 안, 남자들도 많은 이런 공공 장소에서 왜,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건지. 한 호들갑하는 나도 외마디 비명조차 삼키고 돌아서서 "언니, 지금 못내려가겠다. " 서로에게 열중하던 남녀들도 드디어 내려가려나보다 했던 우리들이 계단 입구까지 들어갔다가 스프링처럼 튀어나오는 모습을 보고 무엇인가 아는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