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옥(氷獄)속의 광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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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펼쳐진 눈밭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만일 없다면 이 곳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꿈에도 그리던 장소일 것이다.
세상이 온통 새하얗게 변했다고 느낄 정도로 보이는 것은 온통 눈 뿐이고 남쪽으로 난 끝을 알 수 없는
절벽으로 인해 천연적으로 조석(朝夕)으로만 햇빛을 받을 수 있는 이 곳은 도저히 인간이 살 수 없는 장소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인간은 신비한 동물이므로 종종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
이 곳만 하더라도 새하얀 눈뿐일 것 같았는데 조그만한 초가집이 덩그랗게 눈 위에 놓여져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남쪽 절벽에서 이십 장(二十 丈) 가량 떨어진 자그만한 연못가에 절벽을 등진채로 외로이 서
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집 앞에는 백작약(白芍藥), 백일초(白日草), 백합(白合)등 전혀 날씨에 어울리지도
않는 꽃들이 만발해 있었고 연못에는 얇은 얼음 조각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혹시 누군가가 이런 모습에 이상하다고 여겨 연못가로 가 본다면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연못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수초(水草)조차 눈에 띄지 않았고 더군다나 물고기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가끔씩 뜨거운 수증기만 허공으로 솟아오를 뿐이었다. 즉, 이 연못은 죽은 연못이었다.
"할아버지, 빙옥에 갈 시간이예요."
갑자기 초가집 문이 활짝 열리더니 스물 두, 세살 정도 돼 보이는 묘령의 소녀가 양팔에 광주리를 들고서
안에다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목소리가 너무나 부드럽고 간미로워서 크게 외친것이 오히려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옥음(玉音)으로 들렸다. 더군다나 나물이 가득차 있는 광주리를 들고 약간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백의 소녀의 모습은 너무나 귀여워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다만 눈에 초점이 없는 점이 옥에 티라고라
할까?
"허허허, 설미(雪美)가 빙옥에 가는 일에 재미를 단단히 붙힌것 같구나. 이 할아비보다 더 서두르니."
백의 소녀의 외침에 집 안에서 허연 수염을 휘날리며 장대한 기골의 노인 한명이 걸어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노인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검상이 나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
심장이 약한 사람이 본다면 그 끔찍한 모습에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황천길을 떠날 것이다.
그러나 백의 소녀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할아버지였고 할머니와 함께 세상에 둘도 없는 유일한 혈족이었다.
`쯥쯥쯥. 어쩌다가 실명지체(失明之體)로 태어나 저런 고생을 하는지. 정말 하늘도 무심하구나. 저렇게 깨끗한
심성을 가진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구.'
노인은 자신을 보고 웃고 있는 소녀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아니 그녀를 볼때 마다 그런
생각이 항상 떠올랐다. 비록 그는 장님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고통을 충분히 알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할아버지 무엇을 그렇게 생각하세요? 얼른 가요."
비록 소녀는 장님이었지만 그런 것에 익숙할만큼 익숙해져 청각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 따라서 할아버지가
가만히 서서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아-아니다. 그러나 저러나 너는 그 빙옥속의 광인(狂人)이 무엇이 좋다고 이렇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음식을
날으려고 하느냐? 더구나 그는 너의 정성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정신이 들자마자 너를 죽이려고 하였지
않느냐? "
"그래도 그 사람은 불쌍하게도 그 추운 빙옥속에서 살고 있잖아요. 더구나 그 사람은 가끔 ........아니,
아니예요."
백의 소녀는 무엇인가를 말하려다가 얼른 중단하였다. 그러나 노인이 그것을 놓칠리 없었다.
"설미야, 그가 가끔 무엇을 한다는 말이냐?"
"아니예요. 할아버지 빨리 가요. 그 사람 꽤 배가 고플 거예요. 호호호호."
백의 소녀는 은방울이 짤랑거리는듯한 웃음소리를 내며 얼른 앞으로 걸어갔다. 비록 그녀는 장님이었지만
빙옥으로 가는 길에 익숙한 듯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 발걸음으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허허, 그래도 마음을 붙힐 곳이 생겨서 다행이군. 그 광인이 오기전까지는 웃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아무튼 잘된일이야. "
노인은 얼른 백의 소녀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내딛었다.
빙옥은 남쪽 절벽 바로 밑에 뚫여있는 커다란 동굴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말이 동굴이지 이상하게도 밖보다 더 추운 곳이 바로 빙옥이었다. 안은 온통 얼음투성이고 투명한
얼음속으로 약간 붉은 빛을 띈 바위가 은은하게 비치어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었다. 그러나 이 곳은 사람이
살만한 곳은 아니었다. 아무리 뜨거운 물이라도 땅에 떨어지는 즉시 고드름이 되는 추위를 지닌 곳이 바로
빙옥이기에.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런 추위속에서 꼿꼿이 앉아 있는 산발 괴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미동을 하지 않은채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새빨간 바위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 자세 그대로
얼음 조각으로 변한것 같고 또 다시 살펴 보며 득도(得道)한 선인의 모습과도 비슷했다.
"크크크크. 천협의 기다려라. 이제 칠일 후면 너는 죽지도 살지도 못할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그때는 천월화
그대 역시 아주 괴로운 생활을 하게 될 것이요. 크하하하하.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백도 멸망도 이제 멀지
않았다!"
갑자기 미동도 하지 않던 괴인은 아주 음산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천협의라면 현
백도 쌍협 중에 한명으로 일년전 마도 타도의 선봉에 섰던 백도 명숙(白道 名孰)이 아닌가? 그런데 이 괴인은
그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 그를 포함한 백도 전체를 그렇게 저주하는 것일까?
"아저씨! 또 벽을 보고 있어요? 제가 채소를 약간 가져왔으니 어서 드셔 보세요. "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괴인의 새빨갛던 눈빛이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영원히 움직일
것같지 않던 그의 몸이 서서히 돌아섰다. 그의 눈 앞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일년 남짓 보아온 스무 개의
만년한철 (萬年寒鐵) 기둥으로 그것이 바로 빙옥을 밖의 세상과 격리 시키는 장애물이었다. 기둥과 기둥사이의
거리는 두 손바닥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웬만한 무림 고수의 축골공(縮骨功)으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이었다.
"크크크, 백소저가 나같은 놈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이 곳에 오니 정말 이해할 수 없군."
광인은 만년한철 기둥 앞에서 음식을 넣고 있는 백의 소녀를 보면서 꽤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방금까지 있던 광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저 여자는 꽤 순수한 편이다. 후후, 세상 여자 모두를 미워하려고 했는데 삼일도 안되어 저 여자로 인해
결심이 무너지다니. 하지만 만약 천월화처럼 자신의 병이 고쳐진다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
"아저씨, 주무시세요?"
광인은 백의 소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녀의 말에 생각을 멈추고 현실로 돌아왔다.
"아니오. 그런데 왜 그대의 할아버지는 밖에서 들어오지 않소?"
광인은 미약한 숨소리를 느끼며 이렇게 물었다.
"어, 아저씨가 어떻게 할아버지가 밖에 서 있는지 아세요? 나는 말한 적이 없는데. 혹시................"
"크크크, 아니오. 그대의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혹시 백리청야술(百理聽野術)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소?"
"백리청야술?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백의 소녀는 한동안 곰곰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갑자기
광인은 달려가 안고 싶은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하지만 그는 곧 마음을 가다듬고는 다시 차가운 말투로 말문을
열었다.
"무공을 모르는 그대가 알수는 없을 것이요."
"아, 그것이 아저씨가 말하던 무공이라는 것이군요."
"그렇소. 백리청야술은 말 그대로 소리가 귀에 들리는 범위가 백리에 이른다는 것이요. "
"와, 그런것이 가능하다는 말이예요? "
백의 소녀의 음성에는 무공에 대한 동경이 가득 배여 있었다.
`정말 안 된 일이군. 저렇게 순진한 처녀가 무슨 죄가 있다고 실명지체라는 운명을 주었을까? 더구나
만년빙백삼(萬年氷白蔘)을 복용한 덕분에 만약 만년화왕삼(萬年火王蔘)이나 그것에 버금가는 정순한
열화강기(熱火强氣)를 흡수 할 수 없다면 생명이 삼 년 남짓 밖에 남지 않았다. 정말 안 된 일이군. 내가
열화강기를 익혔다면 어떻게 해보겠지만 나의 무공은 열화강기처럼 강하지 않으니. 모든 것이 운명이다. 내가
만길 낭떠러지에서 살아난 것과 같이.'
"아저씨, 무엇을 그렇게 생각하세요? 설미는 재미없어요."
설미는 한동안 광인이 말이 없자 심심하여 투정 비슷한 것을 부렸다. 어떻게 보면 나이에 비해 너무 순진한 것
같고 또 어떻게 보면 백치와도 같아 보였다.
사실 설미가 이곳에 온 이유는 광인을 보는 일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바로 광인이 조금씩
말해주는 바깥세상 이야기였다. 태어나서 이 설곡(雪谷)을 벗어난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 지도 모른다.
"크크크, 백소저가 무림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말이군."
"역시 아저씨는 제 마음을 잘 아시네요."
백설미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을 하고는 귀를 바싹 기울였다.
"좋소.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요. 아마 다시는 나의 얘기를 듣지 못할 것이요."
"예? 그것이 무슨 말씀이세요?"
백설미는 광인의 난데없는 말에 깜짝 놀라서 약간 언성을 높였다.
"설미야! 무슨 일이냐? "
밖에서 설미를 기다리고 있던 노인은 그녀의 외침에 곧장 다섯 장이 넘는 거리를 달려오더니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아저씨가 더 이상 무림이야기를 해 주지 않는데요. 그 동안 너무 재미있었는데."
소녀는 매우 실망한 기색으로 말하더니 곧 눈가를 적시기 시작했다.
"얘야. 그것은 저 아저씨가 이제는 너에게 해줄 말이 없기 때문이니 너무 실망하지 말거라. 대신에 이
할아버지가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매일 들려줄 테니 너무 그렇게 슬퍼하지 말거라. "
노인은 그녀의 눈물을 보고는 어찌 할 바를 몰라하면서 그녀를 위로했다.
`내가 너무 갑작스런 말을 했나 보군. 아직까지 한 번도 이곳을 나가본 적이 없는 저 아가씨에게 나의 이야기가
많은 재미를 주었을 텐데. 하지만 나도 언제까지 이곳에 갇혀 있을 수만은 없다.'
광인은 미안한 기색을 감추며 곧 조금 전의 차가운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한이 처절하게 박힌 얼굴로.
"백 소저, 미안하오. 하지만 나도 더 이상 당신에게 이야기 해 줄 것이 없오. 거의 삼백일 가량이나
무림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들려 줄 것이 없다오."
하지만 광인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는 무림의 멋진 풍경이나 선대 영웅 이야기만을 해주었을 뿐 추악하고
비정한 무림의 또 다른 단면은 전혀 말하지도 않았다. 세상에 대한 원한과 미움이 가득찬 광인에게는
백설미라는 소녀가 지금의 청순하고 깨끗한 심성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 있어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런 이야기는 피한 것이었다.
"좋아요. 그렇지만 다음에 제가 올때에는 다른 이야기를 해주셔야 해요."
백설미는 곧 실망한 기색을 감추면서 광인이 앉아 있는 곳으로 얼굴을 돌렸다.
`후후후, 마지막 이별의 선물을 무엇으로 하였으면 했지만 그대의 얼굴을 보니 좋은 선물이 생각나는군. 비록
나의 내공이 얼마정도 없어진다고 해도.'
광인은 뜻모를 미소를 지으면서 눈을 감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백소저, 그럼 무림 이야기를 해 주겠으니 잘 듣기를 바라오."
"자, 이제 아저씨가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이 할아버지는 다시 밖으로 나가야 겠다. 그럼 무슨 일이 있거든
즉시 소리치거라."
백 노인은 약간 매서운 눈초리로 광인을 바라보고는 재빨리 동굴 입구로 사라졌다.
"크흐흐흐, 백소저는 좋은 할아버지를 두었소. 그대가 여기에 올때마다 밖에서 불어오는 설풍(雪風)을 막기
위해 그대의 할아버지는 저렇게 힘들 기울이니."
광인은 사라지는 백 노인을 바라보면서 약간 부럽다는 투로 말을 했다.
"맞아요. 저희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분이세요. 하지만 ......... 저는 알아요. 만약 할아버지가 설풍을
막아주시지 않으시면 저는 영원히 눈을 뜰 희망이 없어진다는 것을 ."
"크흐흐흐, 알고 있었오? 당신이 만약 이 동굴안에서 설풍을 맞는다면 만년빙백삼의 음기가 너무 왕성해져 이
세상에서 그 기운을 억누를 약초를 전혀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광인은 아주 담담하게 말은 했지만 내심 백설미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저는 알아요. 설풍을 맞지 않는다고 해도 제가 광명을 되찾을 희망은 아주 희박하다는 것을. 그래서
저는 할아버지에게 미안해요. 저 때문에 매번 힘들게 장력을 내뿜으시니."
백설미는 정말로 죄송한지 또 다시 눈가에 눈물 방울이 맺혔다.
"크흐흐흐, 그럼 모든 것이 내 탓이군. 내가 무림 이야기만 하지 않았어도 소저가 이 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고,
그대의 할아버지가 밖에서 저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을. 미안하게 됐소."
광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연민의 눈빛으로 백설미를 쳐다보았다.
"아니예요. 아저씨가 아니었으면 저는 매일 집안에서 죽을 날만 기다렸을 것이예요."
"그,그것도 알고 있었오!"
광인은 처음으로 놀라움을 표했다. 그만큼 백설미의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 아저씨가 이 곳에 온지 열흘 정도가 지나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말씀하시는 것을 우연히 듣고 알았어요.
앞으로 삼년 이상을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저는 어짜피 죽을 운명이라면 제가 보지
못했던 세상에 대해 말로라도 듣고 싶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