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옥 속의 광인(2)
"그렇게 된 일이군.
괴인은 안됐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백설미를 측은한 눈빛으
로 바라보았다.
"좋소. 어짜피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더 이상 그 이야기는 하지 않
겠소. 자, 이제는 내가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무림에 대해 말해주겠
소."
그의 말이 끝나자 마자 설미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현 무림에는 마도와 백도 그리고 아주 작은 집단으로 이루어진 여
러 단체들이 있소. 그 중에는 사악한 무리들도 있고, 공명정대한
집단도 있소. 그럼 마도에 대해서 우선 말하겠소. 마도는 정확하게
언제 창설됐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소.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 진
지는 500년이 훨씬 지났소. 초창기의 마도와 지금과는 그 뜻은 같
으나 실제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오. 초창기에는 마도인이라고 하
면 아주 난폭하고 잔인한 사람들을 말했고 그 말이 사실이었오. 하
지만 지금의 마도인 중에는 절반가량이 본성이 아주 착한 사람들이
고 그들이 하는 일도 정정당당한 일이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마
도에 대한 생각이 굳혀져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마도인에 대
한 생각은 아주 나쁘다오. 그래서 마도인들 중에는 단지 마도에 몸
을 담고 있다고 해서 불의의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소. 물론
그 중에는 나도 포함되오."
"아저씨도 마도인이세요?"
"후후후, 그렇소. 한때 마도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지금
은 모두 잊어버린 이야기요."
"왜요?"
"모두가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때문이었다고 말하면 대답이 될 것
이요. 물론 내가 과거에 잘못한 일도 있고."
".............."
"소저는 지금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요. 하지만 언제가는 나의 마음
을 알 날이 있을 것이요. 자, 이제는 백도에 관해서 이야기 하겠소.
백도도 마도와 마찬가지로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는 일이오. 다
만 마도가 생기면서 백도도 생겼다는 것이 지금 무림에서 가장 확
실시 되고 있오. 백도는 원래 정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을 가르키는 말이었고 지금도 그 뜻에는 변함이 없소. 하지만
지금 백도인들 중에는 세월이 흘러가면서 명예에 집착하는 사람들
이 생겨났고 그들 중에는 온갖 방법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있오. 하지만 그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오. 선
한 집단에 오직 선한 사람들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아무튼 지금 마도와 백도에는 선악의 인물들이 섞여 있는
상태요. 그리고 거의 모든 무림인들의 싸움은 각 집단의 악한 인물
들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요. 그것은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이루어 지고 있는 상황이고, 예전에 내가 말했던 마백대전(魔白大
戰)도 마도와 백도의 어떤 특정한 인물들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만약 소저가 무림에 나가는 일이 생긴다면 절
대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믿지 마시요. 무림에는 겉모습과 속마음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수두룩하니 절대 한번 보고 사람을 믿지 않
는 것이 아마 소저의 신상에 이로울 것이요."
"그럼 아저씨도 믿으면 안되나요?"
백설미는 약간 장난투로 물었다.
"물론이요. 특히 나같이 냉혹한 사람을 만나거든 우선 피하고 보시
요. 그런 류의 사람들은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한 절대 상대방을 건
드리지 않으니.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잘못 건드리면 목숨이 위태롭
게 되오. 그리고 무림에서는 아주 잘생기거나 예쁜 남녀를 보면 우
선 경계하여야 하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천인공노(天人共怒)의 짓
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천인공로라는 것이 무슨 뜻이예요?"
"하늘과 사람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노한다는 뜻이요."
"그런 사람들이 정말 있어요?"
백설미는 괴인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저, 세상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좋은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오. 그건 그렇고 이제 무림 곳곳에 있는 여러 단체들에 대
해서 말해주겠오. 현 무림에는 과거 마백대전에서 싸우다 간신히 목
숨을 건진 고수들이 자신들이 속해 있던 마도나 백도에 회의(懷疑)
를 느끼고서 각자의 무공을 내세우면서 만든 작은 단체들이 여러
곳에 있오. 그 중에는 사악한 무리들도 있고, 정의를 추구하는 단체
들도 있오. 하지만 그들은 상위 계층을 제외하고는 별로 강하지 않
기 때문에 크게 무림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 하고 있오."
".........................."
"그리고 무림에는 단독으로 행동하는 무공 고수들도 많이 있고 그
들 각각은 모두 독특한 무공으로 무림에서 이름을 떨치면서 무림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소."
"그럼 그들 중에도 악인이 있나요?"
"물론이요. 세상 어디에나 악인과 선인은 항상 있는 법이요."
"그럼 아저씨는 악인(惡人)이세요, 아니면 선인(善人)이세요?"
"그, 그것은...................."
갑작스런 질문에 괴인은 상당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백설미가 그
런 질문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왜 대답을 못 하세요?"
설미는 괴인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크흐흐흐. 웬 일인지 소저 앞에서는 거짓말을 하기 싫군. 나는 선
인일 수도 있고, 악인일 수도 있소."
"피이.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설미는 말도 안된다는 투로 말했다.
"후후후, 내 말은 선인에게는 선인이고, 악인에게는 악인이라는 말
이요."
"선인에게는 선인이고, 악인에게는 악인이요?"
"후후, 그렇소. 선한 사람에게는 나도 선하게 대하고 악인에게는 나
도 악하게 대한다는 것이요."
"아, 그런 말이었군요."
그제서야 설미는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소저에게 더 이상 들려줄 무림 이야기는 없오. 그러니 다시는
이 곳을 찾지 말기 바라오."
갑자기 괴인은 음산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설미에게 다가갔다.
"예? 갑자기 왜 그러세요? 무림 이야기는 해주지 않겠다고 하셨지
만 이 곳에 오지 말라는 말은 하시지 않으셨잖아요?"
설미는 갑작스런 괴인의 말에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느끼지
못하면서 울상을 지었다. 그동안 괴인에게 정이 많이 들었는지 그녀
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많이 섞여 있었다.
' 백 소저 나도 그대와 같이 성결(聖潔)한 사람과 함께 있고 싶소.
하지만 나에게는 할 일이 많이 있다오. 그러니 눈물은 절대 흘리지
마시요. 왠지 당신의 눈물을 보면 나의 독심(毒心)이 순식간에 무너
지니.'
"소저, 사람은 한 번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있오.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 말고 나의 선물을 받으시요."
어느새 괴인은 창살 가까이에 접근해 있었다.
"소저, 내 선물을 받을 마음이 있으면 등을 뒤로 돌리고, 없다면
이제 그만 이 곳을 나가시오."
" 알았어요. 아저씨의 말은 이해가 잘 되지 않으나 듣겠어요. 그 대
신 한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삼 년안에 꼭 저를 찾아오겠다는 것을
말이예요. "
"좋소. 약속을 지키도록 노력은 해 보겠오."
"좋아요. 그럼 선물을 주세요."
소녀는 괴인의 말에 기뻐하면서 얼른 등을 괴인쪽으로 돌렸다. 그녀
의 행동에는 남을 의심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만약 무림에서 자
신을 죽으려고 했던 사람에게 등을 돌리다면 그 사람은 완전히 미
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상대에게 등을 맡긴다는 것은 곧 죽음
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녀는 지금 괴인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녀의 그러한 행동에 괴인은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아무런 의심없이 등을 돌릴줄이야. 정
말 세상에서 보기 드물게 순수한 소녀이다.'
"아저씨, 얼른 주세요."
설미는 선물을 받는다는 것에 금새 마음이 풀려서 약간 어리광을
부렸다.
"좋소. 자, 그럼 이제 선물을 주겠으니, 약간 가슴이 뜨겁더라도 참
기 바라오."
괴인은 말을 끝내자마자 곧장 설미의 등 중앙에 두 손을 대고는 진
기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자, 이제 가슴이 약간 뜨거워 질것이니 참기 바라오. 하앗!"
괴인은 우렁찬 고함을 지르고는 자신의 진기를 설미의 몸속에 주입
하기 시작했다. 순간 설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
시, 곧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평온을 되찾기 시작했다.
반면 괴인의 턱 밑에는 굵은 땀방울이 계속 흘러내렸다.
"허헉헉! 소저 이제 조금씩 눈을 떠 보시요. 그러면 나의 선물이 무
엇인지 잘 알것이요."
괴인은 힘이 드는지 목소리가 작아졌다.
설미는 괴인의 말에 약간 이상함을 느끼면서 늘 감고 다니던 눈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윽."
설미는 조금 눈을 뜨다가 강렬한 눈의 통증에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소저, 아마 한 번에 눈을 뜨기는 힘들 것이요. 하지만 노력해 보시요.
내가 이러고 있는 것도 일각(一刻)에 불과하니."
괴인은 힘겨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더 이상 말문을 열지 않았다.
"알았어요. 노력해 보겠어요."
설미도 괴인의 목소리에서 힘겨움을 느꼈는지 다시 눈을 뜨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눈이 너무나 따가와 곧 눈을 다
시 감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했다. 그렇게
반각(半刻)의 시간이 흘렀다.
"소저, 이번 한 번만 다시 시도해 보고 또 다시 눈이 부시면 더 이상 노
력하지 마시요. 아무래도 당신에게는 무리인 것 같소."
굉인은 설미가 계속 눈에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이 약해
져 더 이상 강요하지 못 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진기를 주입할 수 있
는 시간도 반각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알았어요."
설미는 괴인의 말에 힘을 얻어 마지막으로 눈을 뜨려고 다시 눈꺼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가 노력할수록 눈의 고통은 점차 적어지고
있었고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앗! 이럴수가!"
그녀가 약간의 아픔을 감수하며 눈을 완전히 뜨자 놀랍게도 그녀의 앞
에 투명하다 못해 영롱한 얼음 동굴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내, 내가 세상을 볼 수 있다니?"
설미는 자신이 아주 뚜렷하게 앞을 볼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듯 계
속 눈을 더듬어 보았다.
'후후후, 바로 이것이 내가 소저에게 주는 작별의 선물이요. 소저가죽기
전에 세상의 빛을 보여주고 싶었오.'
"설미야! 무슨 일이냐?"
밖에 있던 설미의 할아버지는 그녀의 외침에 깜짝 놀라서 순식간에 괴
인이 앉아 있는 자리로 날아왔다.
"이,이 이놈! 감히..........네 놈이!"
노인은 들어오자 마자 괴인의 양손이 자신의 손녀의 등 뒤에 있는 것을
보고는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으윽!"
설미는 노인의 목소리에 갑자기 가느다란 피줄기를 흘렀다.
'으음. 저 노인은 무공을 숨기고 있었군. 비록 짐작은 했지만 오 장이 넘
는 거리를 단숨에 날아올 정도로 내공이 뛰어날 줄은 '
괴인은 노인의 외침에 작은 신음소리를 내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설미야!"
그녀가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서야 노인은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고는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ㄱ찮으냐?"
"할,할아버지?"
"그래. 할아버지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상처가 많으실 줄은 몰랐어요. 비록 전에 듣기는 했
지만........."
설미는 비록 내상을 입기는 했지만 꿈에도 그리던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에 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손녀의 뜻밖에 말에 노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소저, 이제 시간이 별로 남아 있지 않소. 그러니 어서 보고 싶었던 것을
보시요."
괴인은 상당히 힘이 빠진 말투로 중얼거리고는 얼른 눈을 감고 천기행
공(天氣行功)이라는 운기법을 취하기 시작했다. 천기행공이란 보통 운기
법보다 기운을 되찾는데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뛰어난 심법이었다.
거의 백년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무림인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이 심법이 놀랍게도 바로 지금 괴인으로부터 시전되고 있는 것이었다.
"설미야, 혹시 내가 "
노인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설미의 눈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지금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여요!"
설미는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자신의 할아버지의 얼굴을 자세
히 더듬어 보았다.
"어떻게 내가?"
노인은 믿을수 없다는 표정으로 설미의 눈을 쳐다보았다.
" 이제야 생각이 났군. 혹시 노인 어른신의 별호와 성함이 검마 백상천
(劍魔 白上天)이 아니십니까?"
괴인은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물었다. 하지만 그의 말투
에는 어느새 반말이 사라지고 경어(敬語)를 사용하고 있었다.
"어, 아저씨가 어떻게 저의 할아버지의 성함을 아세요?"
설미는 노인이 미처 무엇이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
다. 하지만 그녀는 괴인이 등뒤에서 공력을 넣어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하하하, 역시 과거 오십 년전에 마도 장주셨던 검마 선배님이 맞군요."
"으으윽!"
괴인은 자신이 지금 내공을 주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가 기혈이 들끊는 것을 느끼고는 신음성을 내뱉었다. 그
리고는 본능적으로 설미의 등뒤에서 두손을 떼어 냈다.
'내가 방심을 하다니 ..........'
괴인은 이제까지 쌓아왔던 모든 수고가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놀랍게도 조금 시간이 지나자 들끊던 기혈이 편안하게
가라앉으면서 심신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백 선배님 고맙습니다."
괴인은 자신의 장심에 손을 맞대고 있는 검마를 보면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인사는 그만두게. 나는 다만 내 손녀때문에 생긴 일이라 도와준것 뿐
이니."
노인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걱정스런 눈초리로 설미를 바라보았
다.
"어, 할아버지의 모습이 흐려져요!"
설미는 괴인이 손을 떼었는지 모르고 할아버지의 모습이 다시 보이지
않게 되자 놀라서 소리쳤다.
"설미야, 진정하고 내 말을 잘 듣거라. 방금 네가 이 할아버지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저 아저씨의 내공 때문이란다. 하지만 내공이란 너도
알다시피 무림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이란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네
몸에는 이십 년 가량의 내공이 잠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만큼
저 아저씨의 내공이 없어졌고. 설미는 영특하니 이제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떻게 된일인지 알겠지?"
노인은 측은한 시선으로 손녀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아저씨가 저 때문에..............."
"그럼 셈이지."
"후후후, 미안해 하지 마시요. 어짜피 내가 원한 일이니. 그리고 나는 특
이 체질이라 이십년 공력쯤은 금방 복구할 수 있소. 그러니 그렇게 얼굴
을 찡그리지 마시요."
괴인은 약간 휴식을 취하고는 이렇게 말하면서 시선을 노인에게 돌렸다.
"검마 선배님을 이렇게 뵐 줄을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제 생애의 영광입니다."
괴인은 노인을 바라보면서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너는 누구이기에 노부의 과거를 알고 있느냐? 오십 년 전에도 노부의
얼굴을 알고 있는 인물은 단 네 사람뿐이었는데."
검마 백상천은 갑자기 살기를 띈 목소리로 물으면서 괴인을 자세히 바
라보았다.
그러나 전혀 기억에 없는 인물이었다.
"저를 알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그 당시 저는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그럼 너는 어떻게 노부의 과거 명호를 알수 있었지?"
"과거에 한 번 선배를 비난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누가 제 할아버지를 욕해요?"
어느새 마음을 진정시킨 설미는 괴인의 말에 노기를 띈 목소리로 외쳤
다.
"허허허, 소저 진정하고 내 말을 끝까지 들으시요.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과거 마도에 오랜 세월동안 있었소. 그러다보니 과거의 일도 많이 듣게
되었소. 그 중에서 바로 소저의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
고 있었던 것이요. 그런데 이것 하나는 알아 주시요. 나는 그대의 할아
버지를 개인적으로 나의 부모님 다음으로 존경하고 있오."
"왜요?"
설미는 괴인의 말에 흥미를 느끼고는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검마 역
시 괴인의 말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도 인간이었기 때문에 자신
을 존경한다는 말에 크게 관심이 쏠리는 것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자신
을 이야기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내가 소저의 할아버지를 존경하는 이유는 바로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
때문이요."
"사랑이요?"
".........으음. 어떻게 네가 그것을 .........."
설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검마는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그렇지 오십 년 전에 자신이 무림에서 자취를 감춘 이유를 아는
인물은 단 두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대의 할아버지는 그 당시 상당한 지위와 명예를 가지고 있었소. 하
지만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림을 떠나서 영원히 은거할 만큼 그대의
할아버지는 한 여인을 너무나 깊이 사랑했오. 하지만 그 여인은 검마 선
배의 지위를 보고는 한 마디로 청혼을 거절했오. 그 당시 검마 선배의
곁에는 많은 여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요. 하지만 그것은 검마 선배가 색
한이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준수했기 때문이었오. 오죽했으면 검마 선
배의 또 다른 별호가 극절미공자(極絶美公子)였겠오."
"하지만 그 당시 검마 선배님은 동정(童情)의 몸을 가지고 있었오. 그리
고 그 많은 여자들 중에 사랑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오. 그리고 자
신의 청혼이 거절되자 검마 선배는 주위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여자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려 어떻게 하면 청혼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물었오."
"그래서요?"
설미는 점차 괴인의 말에 끌려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할아버
지인 검마는 놀라운 눈초리로 괴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새삼 그
의 신분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는 한가지 조건을 내걸었오. 그것은 즉시 마도에서 영원히
떠나서 단 둘이만 은거하자는 것이었었오."
"와, 우리 할머니는 참 대단한 분이셨네요."
설미는 괴인의 말에 감탄을 하면서 다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소. 당시 소저의 할머니의 요구는 큰 댓가를 치러야 이루어 지는
것이었오. 첫째가 당시 검마 선배의 지위는 무림에서 서열 삼위 안에 드
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그 지위를 포기할 경우 마도의 법에 따라 오 인
의 장로들과 무공 대결을 펼쳐 모두 이겨야 됐오. 그것도 한번도 쉬지
않고."
"두번째 것은 너무 불공평해요!"
설미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저, 죄송해요."
설미는 자신이 말을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사과를 하였다.
"후후후, 괜찮소. 내가 생각해도 그것은 잘못된 일이었오. 하지만 당시의
마도 법은 너무나 엄격해 어떠한 누구도 어길 수 없었오. 그렇기 때문에
검마 선배는 하루 밤낮을 매우 심각하게 고민했오. 사실 그가 걱정한 것
은 첫번째 이유가 아니고 두번째 것 때문이었오. 당시의 지위를 버리는
것은 크게 아쉽지 않았으나 두번째 조건은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
는 것이었오."
"그래서요?"
설미는 결과는 알고 있었지만 괴인의 이야기가 너무나 흥미로워 계속
재촉을 하였다.
"험험. 설미야 그 다음 이야기는 내가 직접 해 주마."
백상천은 더 이상 괴인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했는지
서서히 말문을 열기 시작햇다.
"그 당시 나는 많은 생각을 해 본 결과 오인의 장로들과 한번 겨루어
보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그 전에 나는 너의 할머니에게 한가지 다짐을
받았다."
"그것이 무엇인데요?"
"그것은 만약 내가 결투 후에 크게 다치거나 죽더라도 나를 버리거나
잊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받은 후 나는 장로들과
겨루었고, 그들 중에 도마(刀魔) 공손상후(恭遜上后)에게 보다시피 이 얼
굴을 크게 상하고 그 당시 마도 제일의 장공(掌功) 달인 한주공(韓宙功)
이라는 인물에게 내상을 입은 채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너의 할머니
와 함께 이곳에 정착한 것이란다."
"와아, 할아버지 정말 대단하네요."
설미는 검마의 말이 끝나자 나직한 감탄성을 터뜨렸다.
"그렇소. 소저의 할아버지는 아직도 마도에서 신화적인 인물이요. 아직까
지 마도 장로들과 겨루어 살아서 돌아간 인물은 검마 선배가 처음이니
까. 그러나 그것보다 더 존경스런 것은 바로 목숨을 건 사랑이었오. 그
때 이후 마도 장주가 혼인을 할 때는 검마 선배의 초상(肖像) 앞에 사랑
을 맹세하는 관습아닌 관습이 생겼고, 10년 전부터는 영원한 연인들의
우상으로 생각되어 지고 있오."
"우와, 정말 대단하네요."
"으음, 그런 일이 .........."
두 사람의 내심 생각은 달랐으나 놀라움은 마찬가지였다.
"후후후, 나의 사랑이 그렇게 유명할 줄이야. 그럼 도마와 한주공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나 보군."
백상천은 놀라움속에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그 분들은 절대 약속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에 오직
마도 장주에게만 이야기 했을 뿐입니다."
"그럼 장주가 이야기 했다는 말이냐?"
"아닙니다. 그 분 역시 임종 전에 그 다음 장주에게만 이야기 했을 뿐입
니다. 그리고 우연히 그 옆에 제가 있었고 그 이야기를 다른 마도 연인
들에게 이야기 했을 뿐입니다. 화가 나신다면 용서해 주십시요."
"으음, 그럼 너의 마도에서의 지위는?"
"한때는 부장주 지위에 있었습니다."
괴인은 솔직하게 말하고는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으음. 그래서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군. 좋다. 한때 나도 마도에 있었던
정을 생각해서 그 이야기를 누설한 죄는 묻지 않겠다. 어짜피 오래된
이야기니."
"할아버지 그런데 왜 그 이야기를 하면 안되나요?"
설미는 괴인과 할아버지의 대화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
다.
"그것은 .........으음. 아, 설미야 너도 사람사이에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
고 있지? 그것처럼 이 할아버지 역시 남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비
밀이 있단다. 그리고 그런 비밀은 누가 알고 이야기했다는 것은 상당히
화가 나는 일이란다."
"그렇지만 그 일은 비밀로 할 것은 없잖아요. 그렇게 자랑스런 일을."
설미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지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허허허, 세상 일이 모두 네 생각과 같은 것은 아니란다. 그보다도 이제
듣고 싶은 이야기는 다 들었으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할머니가
기다리겠다."
"예, 할아버지. 그럼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설미는 비록 보지는 못하지만 괴인이 앉아 있을 만한 자리를 바라보면
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검마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하였다.
'백 소저, 만약 목숨이 위급한 일이 생기거든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것
을 기억했다가 사용하시요. 우선 단전에 힘을 주면 따뜻한 기운이 느껴
질 것이요. 그럼 그것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힘껏
양 손을 앞으로 내밀으시요. 그럼 한 번 정도는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
이요. 그럼 내가 이야기한 것을 잘 기억했다가 하루에 한 번씩 마지막
단계를 제외하고 연습하시요. 그럼 건강에도 좋을 것이요.'
괴인은 괴상하고 간단한 내공구결을 전음으로 전하고는 말문을 닫았다.
그러나 설미가 그의 말을 듣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놓치지 않
고 보았다.
"후후, 이로써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군."
괴인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천천히 운기행공을 취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주위에서 얼음이 녹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그가 앉
아 있던 자리에서 얼음 대신 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그것도 잠시 후에는
모조리 증발하였다. 그리고 약 일각 정도가 지나자 괴인의 감겨 있던 눈
이 번쩍 뜨여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괴인의 눈은 아직까지와는 달리
강렬한 안광이 뿜어지고 있었다.
"크하하하, 드디어 내공을 모조리 회복했다. 기다려라! 천협의! 이제 내
가 일년 전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너를 찾아가마. 하하하하!"
괴인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만년한철의 창살로 다가갔다.
"흐흐흐, 천월화 당신도 아마 응당의 댓가를 받게 될 것이요."
괴인은 창살에 도착해서는 다시 한번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고는 조
용히 내공 구결을 외우기 시작했다.
"크흐흐흐."
그런데 이럴수가? 괴상한 신음소리와 함께 괴인이 몸이 놀랍게도 점점
말라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축골법(築骨法)을 한단계 능가하는 만변
체공술(萬變體功術)이라는 수준 높은 내공술이었다.
"크흐흐, 드디어 이 지겨운 감옥을 빠져 나왔군."
어느새 몸이 겨울의 나무 가지를 연상케 할 정도로 얇아져 창살 사이를
가볍게 빠져 나온 괴인은 서서히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후후후, 검마 선배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백 소저의 그 순
수한 모습도 영원히 기억하겠오. 그럼 안녕히."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괴인은 금새 감옥 밖으로 나와서는
눈발이 퍼붓는 벌판 속으로 달리는가 싶더니 곧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