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난추(駟馬難追)
'駟馬'는 말 네 필이 끄는 수레로써 엄청나게 빠른 것을 비유한다.
'駟馬難追'는 이런 駟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難追)로 빠른 것이니, '입조심을 하라'는 뜻이다. '발 없는 말[言]이 천리 간다'는 우리 속담과 같다.
선거철에 상대를 비방하는 流言과 비어(蜚語)의 퍼지는 속도가 TGV(떼제베)보다 빠른 것을 생각할 때 실감나는 警句이다.
原文은 '一言旣出 駟馬難追'(입에서 나온 말은 四頭 마차[駟馬]도 따르기 어렵다)이다. '駟不及說'(駟馬는 혓바닥을 따르지 못한다)도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또, 말이 많은 것을 千言萬語, 그 반대를 一言半句라고 하며, 여러 말을 한 마디로 잘라 말할 때는 一言以蔽之라고 말한다. 孔子는《詩經》에 실린 詩 3백篇에 대해 '一言以蔽之 曰思無邪(한 마디로 나쁜 내용이 없다)'라고 하였다.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고 한다. '자나 깨나 입조심'을 잊지 말자.
사면초가(四面楚歌)
사면이 모두 적에게 포위된 경우와 고립된 경우를 이르는 말.
항우는 곧 초나라의 도읍인 팽성[彭城 : 서주(徐州)]을 향해 철군(撤軍) 길에 올랐으나 서쪽의 한중[漢中 : 섬서성(陝西省)]으로 철수하려던 유방은 참모 장량(張良) . 진평(陣平)의 진언에 따라 말머리를 돌려 항우를 추격했다. 이윽고 해하[垓下 : 안휘성(安徽省)]에서 한신(韓信)이 지휘하는 한나라 대군에게 겹겹이 포위된 초나라 진영(陣營)은 군가사 격감한 데다가 군량마저 떨어져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밤중에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 소리[四面楚歌]'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초나라 군사들은 전의를 잃고 그리운 고향의 노랫소리 에 눈물을 흘리며 다투어 도망을 쳤다. 항복한 초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한 장량의 작전이 주효(主效)했던 것이다.
항우는 깜짝 놀라서 외치듯 말했다.
"아니, 한나라는 벌써 초나라를 다 차지했단 말인가? 어찌 저토록 초나라 사람들이 많은가?"
이미 끝장이라고 생각한 항우는 결별의 주연(酒宴))을 베풀고는 사랑하는 虞美人이 '四面楚歌'의 애절한 노래를 부르자, 비분강개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힘은 산을 뽑고 의기는 세상을 덮건만
때는 불리하고 추( )도 나아가지 않누나.
추가 가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우(虞)야 우야 그대를 어찌할 거나.
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 不逝
不逝兮可奈何 虞兮虞兮奈若何
[ 동의어 = 사면초가성(四面楚歌聲) ]
사이비(似而非)
① 겉은 제법 비슷하나 속은 전혀 다름.
② 진짜같이 보이나 실은 가짜임.
전국 시대, 아성(亞聖)으로 불리던 맹자에게 어느 날 만장(萬章)이라는 제자가 물었다
한 마을 사람들이 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한다면 그런 사람을 어디를 가든 훌륭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어찌하여 그들을 가리켜 '향원[鄕原:지방의 토호(土豪)]은 덕(德)을 해치는 도둑'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맹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을 비난하려 해도 들어서 비난할 것 없고, 공격하려 해도 공격할 구실이 없으나 세속에 아첨하고 더러운 세상에 합류한다. 또 집에 있으면 충심(忠心)과 신의가 있는 척하고, 나아가 행하면 청렴결백한 척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스스로도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들과는 더불어 요순(堯舜)의 도(道)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공자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느니라.
'사이비한 것[似而非者]을 미워한다…‥말 잘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정의를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정(鄭)나라 음악을 미워하는 것은 아악(雅樂)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다…‥향원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덕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다…‥
사족(蛇足)
뱀의 발. 곧 ① 쓸데없는 것. 무용지물(無用之物)의 비유. ② 있는 것보다 없는 편이 더 나음의 비유. ③ 공연히 쓸데없는 군일을 하다가 실패함의 비유.
전국 시대인 초(楚)나라 회왕(懷王) 때의 이야기이다. 어떤 인색한 사람이 제사를 지낸 뒤 여러 하인들 앞에 술 한 잔을 내놓으면서 나누어 마시라고 했다. 그러자 한 하인이 이런 제안을 했다.
여러 사람이 나누어 마신다면 간에 기별도 안 갈 테니, 땅바닥에 뱀을 제일 먼저 그리는 사람이 혼자 다 마시기로 하는 게 어떻겠나?
그렇게 하세.
하인들은 모두 찬성하고 제각기 땅바닥에 뱀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뱀을 다 그린 한 하인이 술잔을 집어들고 말했다.
이 술은 내가 마시게 됐네. 어떤가, 멋진 뱀이지? 발도 있고.
그때 막 뱀을 그린 다른 하인이 재빨리 그 술잔을 빼앗아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발 달린 뱀이 어디 있나!
술잔을 빼앗긴 하인은 공연히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후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주" '사족'은 제(齊)나라를 방문한 진(秦)나라의 사신 진진(陳軫)이 제나라 민왕의 요청으로, 초나라 재상 소양(昭陽)을 만나 제나라에 대한 공격 계획을 철회하라고 설득할 때 인용한 이야기임
사불급설(駟不及舌)
한 번 내뱉은 말은 네 마리가 끄는 빠른 마차로도 따라잡지 못한다는 뜻으로, '말을 삼가야 한다'는 말.
자공(子貢)을 보고 극자성(棘子成)이 물었다.
"君子는 그 바탕만 있으면 되지 어찌해서 문(文)이 필요합니까?"
이 말을 듣고 자공은 이렇게 말했다.
"안타깝다. 그대의 말은 군자답지만 사(駟)도 혀[舌]에 미치지 못한다. 문(文)이 질(質)과 같고 질이 문과 같다면,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이나 개와 양의 가죽이 같다는 말인가?"
惜乎夫子之說 君子也 駟不及舌 文猶質也 質猶文也 虎豹之 猶犬羊之 .
唐나라 때의 명재상인 풍도(馮道)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口是禍之門 舌是斬自刀.
《明心寶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입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끼요, 말은 혀를 베는 칼이니, 입을 막고 혀를 깊이 감추면,
몸이 어느 곳에 있으나 편안할 것이다."
口是傷人斧 言是割舌刀 閉口深藏舌 安身處處牢.
살신성인(殺身成仁)
절개를 지켜 목숨을 버림.
이 말은 춘추시대, 인(仁)을 이상적 덕목으로 삼는 공자(孔子)의 언행을 수록한《논어(論語)》<위령공편(衛靈公篇)>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仁'을 저버리지 않으며
스스로 몸을 죽여서 '仁'을 이룬다.
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공자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仁'의 도는 제자인 증자(曾子)가《논어(論語)》<이인편(里仁篇)>에서 지적했듯이 '충(忠)'과 '서(恕)'에 귀착한다.
부자(夫子)의 道는 '忠', '恕'일 뿐이다.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충(忠)'이란 자기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정신이고, '서(恕)'란 '충(忠)'의 정신을 그대로 타인에게 미치게 하는 마음이다. 曾子는 孔子의 '인(仁)'이 곧 이 '충서(충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삼고초려(三顧草廬)
중국 삼국시대에 유비가 제갈량의 초려(草廬)를 세 번이나 찾아서 마침내 그를 군사(軍師)로 삼은 일.
후한(후한) 말엽, 유비(劉備)는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의형제를 맺고 한실(漢室) 부흥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군기를 잡고 계책을 세워 전군(全軍)을 통솔할 군사(軍師)가 없어 늘 조조군(曹操軍)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어느날 유비가 은사(隱士)인 사마휘(司馬徽)에게 군사(軍師)를 천거해 달라고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복룡(伏龍)이나 봉추(鳳雛) 중 한 사람만 얻으시오."
"대체 복룡은 누구고 봉추는 누구입니까?"
그러자 사마휘는 말을 흐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 제갈량(諸葛亮 : 字는 孔明, 181-234)이 복룡인 것을 안 유비는 즉시 수레에 예물을 싣고 양양(襄陽) 땅에 있는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하고 없었다.
"전번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그 자는 아직 나이도 젊은 새파란 애숭이라던데…."
"그까짓 제갈공명이 뭔데. 형님, 이젠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다."
마침내 수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다.
"다음엔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아라."
관우와 장비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길에 나섰다. 그 열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의 군사(軍師)가 되어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유비는 그 후 제갈량의 헌책에 따라 위(魏)나라의 조조,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三分)하고 한실(漢室)의 맥을 잇는 촉한(蜀漢)을 세워 皇帝를 일컬었으며, 지략과 식견이 뛰어나고 충의심이 강한 제갈량은 재상이 되어 후주(後主) 유선 때까지 2조(二朝)를 섬겨 후세 충신의 표상이 되었다.
[ 동의어 = 초려삼고(草廬三顧), 삼고지례(三顧之禮) ] [ 유사어 = 삼고지우(三顧知遇) ]
삼년불비 우불명 (三年不飛又不鳴)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훗날 웅비(雄飛)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음을 이르는 말.
춘추시대 초엽, 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혔던 초(楚)나라 장왕(莊王:B.C. 613∼591)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장왕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선언했다.
앞으로, 과인을 간하는 자는 사형(死刑)에 처할 것이오.
그 후 장왕은 3년간에 걸쳐 국정은 돌보지 않은 채 주색(酒色)으로 나날을 보냈다. 이를 보다 못한 충신 오거(五擧)는 죽음을 각오하고 간언(諫言)할 결심을 했다. 그러나 차마 직간(直諫)할 수가 없어 수수께끼로써 우회적으로 간하기로 했다.
전하, 신이 수수께끼를 하나 내볼까 하나이다.
어서 내보내시오.
언덕 위에 큰 새가 한 마리 있사온데, 이 새는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사옵니다[三年不飛又不鳴].' 대체 이 새는 무슨 새이겠나이까?
장왕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3년이나 날지 않았지만 한번 날면 하늘에 오를 것이오. 또 3년이나 울지 않았지만 한번 울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오. 이제 그대의 뜻을 알았으니 그만 물러가시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으나 장왕의 난행(亂行)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대부 소종(蘇從)이 죽음을 각오하고 이전에 나아가 직간했다. 그러자 장왕은 꾸짖듯이 말했다.
경(卿)은 포고문도 못 보았소?
예, 보았나이다. 하오나 신은 전하께서오서 국정에 전념해 주신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알았소. 물러가시오.
장왕은 그날부터 주색을 멀리하고 국정에 전념했다. 3년 동안 장왕이 주색을 가까이했던 것은 충신과 간신을 선별하기 위한 사전 공작이었다. 장왕은 국정에 임하자마자 간신을 비롯한 부정 부패 관리 등 수백 명에 이르는 반윤리적 공직자를 주살(誅殺)하고 수백 명의 충신을 등용했다. 그리고 오거와 소종에게 정치를 맡겨 어지러웠던 나라가 바로잡히자 백성들은 장왕의 멋진 재기를 크게 기뻐했다.
삼십육계 주위상계(三十六計走爲上計)
서른 여섯 가지 계책 중에서 피하는 것이 제일 좋은 계책이란 뜻으로, 일의 형편이 불리할 때는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
남북조 시대, 제(齊:南齊, 479∼502)나라 5대 황제인 명제(明帝) 소도성(蕭道成)의 종질(從姪:사촌 형제의 아들)로서 고제의 증손(曾孫)인 3대,4대 황제를 차례로 시해하고 제위를 찬탈(簒奪)한 황제이다. 그는 즉위 후에도 고제의 직손(直孫)들은 물론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잡아 죽였다.
이처럼 피의 숙청이 계속되자 고조 이후의 옛 신하들은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개국 공신인 회계(會稽) 태수 왕경측(王敬則)의 불안은 날로 심해졌다. 불안하기는 명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대부 장괴(張壞)를 평동(平東)장군에 임명하여 회계와 인접한 오군(五郡:강소성 내)으로 파견했다. 그러자 왕경측은 1만여 군사를 이끌고 도읍 건강(建康:南京)을 향해 진군하여 불과 10여 일 만에 건강과 가까운 흥성성(興盛城)을 점령했다. 도주에 농민들이 가세함에 따라 병력도 10여 만으로 늘어났다.
한편 병석의 명제를 대신하여 국정을 돌보던 태자 소보권(蕭寶卷)은 패전 보고서를 받자 피난 준비를 서둘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왕경측은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단장군(檀將軍)의 '서른 여섯 가지 계책 중 도망가는 것이 제일 좋은 계책[三十六計走爲上計]'이었다고 하더라. 이제 너희 부자(父子)에게 남은 건 도망가는 길밖에 없느니라.
이 말은 '단장군이 위(魏:北魏)나라 군사와 싸울 때 도망친 것을 비방한 것이다'라고 주석을 붙인 책도 있다.
그 후 관군에게 포위 당한 왕경측은 난전중(亂戰中)에게 목이 잘려 죽었다.
"주" 단장군 : 송(宋:420∼479)나라 무제(武帝:420∼422)의 건국(建國)을 도운 명장 단도제(檀道濟)를 가리킴.
삼인성호(三人成虎)
[ 동의어 = 시유호(市有虎), 시호삼전(市虎三傳), 삼인언이성호(三人言而成虎). ]
[ 유사어 = 증삼살인(曾參殺人), 십작목무부전 ]
세 사람이 짜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말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하면 곧이듣는다는 말.
전국 시대, 위(魏:梁)나라 혜왕(惠王) 때의 일이다. 태자와 중신 방총이 볼모[人質]로서 조(趙)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으로 가게 되었다. 출발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방총이 심각한 얼굴로 혜왕에게 이렇게 물었다.
전하, 지금 누가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전하께서는 믿으시겠나이까?
누가 그런 말을 믿겠소.
하오면, 두 사람이 똑같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어찌하시겠나이까?
역시 믿지 않을 것이오.
만약, 세 사람이 똑같이 아뢴다면 그땐 믿으시겠나이까?
그땐 믿을 것이오.
전하,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 사실이옵니다. 하오나 세 사람이 똑같이 아뢴다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 되옵니다. 신은 이제 한단으로 가게 되었사온데, 한단은 위나라에서 저잣거리보다 억만 배나 멀리 떨어져 있사옵니다. 게다가 신이 떠난 뒤 신에 대해서 참언(讒言)을 하는 자가 세 사람만은 아닐 것이옵니다. 전하, 바라옵건대 그들의 헛된 말을 귀담아 듣지 마시오소서.
염려 마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과인은 두 눈으로 본 것이 아니면 믿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방총이 한단으로 떠나자마자 혜왕에게 참언을 하는 자가 있었다. 수년 후 볼모에서 풀려난 태자는 귀국했으나 혜왕에게 의심을 받은 방총은 끝내 귀국할 수 없었다고 한다.
"주" 방총 : "韓非子"에는 방공(龐恭)이라고 되어 있고 "戰國策"에는 방총이라고 되어 있음.
삼천지교(三遷之敎)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가르치기 위해 집을 세 번이나 옮긴 일.
전국시대, 유학자(儒學者)의 중심 인물로서 성인(聖人) 공자에 버금가는 아성(亞聖) 맹자는 공자처럼 생이지지(生而知之)했다고 추앙되지도 않았고, 태어나자마자 걸음을 걸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存)이라고 했다는 신화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스승이 유명한 분도 아니어서 증자(曾子)의 문인(門人)에게서 사숙(私淑)했다는 것을 보면, 기초는 스승에게서 배웠으나 그의 독특한 이론인 성선설(性善說), 사단설(四端說), 호연지기설(浩然之氣說)은 다 그의 독학에서 얻은 독창적인 것이다.
맹자는 독학자였기에 노력과 의지 못지 않게 교육 환경이 중요했고, 이 교육 환경 조성을 위해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씩이나 이사를 한 것이다.
상가지구(喪家之狗)
'상갓집 개'(속담) ① 초상집 개, 주인 없는 개. ② 여위고 기운 없이 초라한 사람을 빈정거리는 말.
춘추시대 말엽의 대철학자요 사상가로서 유교의 비조(鼻祖)인 孔子에 관한 이야기이다.
노(魯)나라 정공(定公)때 대사구(大司寇)로서 재상의 직무를 대행하고 있던 孔子는 왕족인 삼환(三桓)씨에게 배척을 당하여 노나라를 떠나고 말았다. 그후 공자는 십 수 년간 자신이 이상으로 삼는 '도덕 정치'를 펼 수 있는 나라를 찾아서 6-7개국을 순방했으나 받아 주는 군주(君主)가 없었다.
한 번은 정(鄭)나라를 찾아갔던 공자(56세)가 제자들을 놓쳐 버리고 홀로 동문(東門) 옆에 서서 그들이 찾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스승을 찾아나선 자공(子貢)이 한 행인에게 孔子의 인상 착의(人相着衣)를 대면서 혹시 보지 못했느냐고 묻자, 그 행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동문(東門) 옆에 웬 노인이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마는 요(堯)임금과 같았고, 목은 순(舜) . 우(禹)임금과 같았으며, 어깨는 명재상(名宰相) 자산(子産)과 같았소. 그러나 허리 아래로는 우(禹)임금에게 세 치쯤 미치지 못했고, 그 지친 모습은 마치 '상갓집 개[喪家之狗]'같습디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동문으로 달려간 자공은 공자를 만나자 방금 행인에게서 들은 이야 기를 고했다. 이야기를 듣고난 공자는 웃으며 말했다.
"용모에 대한 형용은 들어맞는다고 하기 어려우나 상갓집 개와 같다는 표현은 딱 들어맞는 말이다."
그 후 정(鄭)나라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한 공자는 그야말로 상갓집 개와 같이 초라한 모습으로 기운 없이 노나라로 다시 돌아갔다.
孔子適鄭 與弟子相失 孔子獨立郭東門 鄭人或謂子貢曰 東門有人 其類似堯 其項類皐陶 其肩
類子産 自然腰以下 下及禹三寸 若喪家之狗 子貢以實告孔子 孔子欣然笑曰 形狀末也
而似喪家之狗 然哉然哉.
새옹지마(塞翁之馬)
인생의 길흉화복은 늘 바뀌어 변화가 많음을 이르는 말.
옛날 중국 북방의 요새(要塞) 근처에 점을 잘 치는 한 노옹(老翁)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이 노옹의 말[馬]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났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애석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福)이 될는지?"
몇 달이 지난 어느날,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駿馬)를 데리고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치하(致賀)하자 노옹은 조금도 기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화(禍)가 될는지?"
그런데 어느날, 말타기를 좋아하는 노옹의 아들이 그 오랑캐의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슬픈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날, 오랑캐가 대거 침입해 오자 마을 장정들은 이를 맞아 싸우다가 모두 전사(戰死)했다. 그러나 노옹의 아들만은 절름발이었기 때문에 무사했다.
그러므로 인간세상에서 福이 禍가 되고 禍가 福이 되는 것은 그 변화가 너무 깊어 측량할 수가 없다.
近塞上之人 有善術者 馬無故亡而入胡 人皆弔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福乎 居數月 其馬將胡駿
馬而歸 人皆賀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禍乎 家富良馬 其子好騎 墮而折其 人皆弔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福乎 居一年 胡人大入塞 丁壯者引弦而戰 近塞之人 死者十九 此獨以跛之故 父
子相保 故福之爲禍 禍之爲福 化不可極 深不可測也.
[ 원 말 =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 ]
[ 동의어 = 새옹마(塞翁馬), 북옹마(北翁馬) ]
[ 유사어 = 새옹득실(塞翁得失), 새옹화복(塞翁禍福), 화복규승(禍福糾繩) ]
서시빈목(西施目)
서시가 눈살을 찌푸린다는 뜻. 곧 ① 영문도 모르고 남의 흉내를 냄의 비유, ② 남의 단점을 장점인 줄 알고 본뜸의 비유.
춘추 시대 말엽, 오(吳)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월왕(越王) 구천(勾踐)은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절세의 미인 서시(西施)를 바쳤다. 그러나 서시는 가슴앓이로 말미암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녀는 길을 걸을 때 가슴의 통증 때문에 늘 눈살을 찌푸리고 걸었다. 이것을 본 그 마을의 추녀(醜女)가 자기도 눈살을 찌푸리고 다니면 예쁘게 보일 것으로 믿고 서시의 흉내를 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질겁을 해서 집 안으로 들어가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아무도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장자(莊子)"〈천운편(天運篇)〉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원래 반유교적(反儒敎的)인 장자가 외형에만 사로잡혀 본질(本質)을 꿰뚫어 볼 능력이 없는 사람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으로 실로 의미심장(意味深長)하다.
춘추 시대 말엽의 난세(亂世)에 태어난 공자가 그 옛날 주왕조(周王朝)의 이상 정치(理想政治)를 그대로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 재현시키려는 것은 마치 '서시빈목'을 흉내 내는 추녀의 행동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서제막급(臍莫及)
[ 동의어 = 후회막급(後悔莫及) ]
배꼽을 물려고 해도 입이 미치지 않는다는 뜻. 곧 기회를 잃고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음의 비유.
기원전 7세기 말엽, 주왕조(周王朝) 장왕(莊王) 때의 이야기이다. 초(楚)나라 문왕(文王)이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에 있었던 신(申)나라를 치기 위해 역시 하남성에 있었던 등(鄧)나라를 지나가자 등나라의 임금인 기후(祁侯)는 '내 조카가 왔다'며 반갑게 맞이하여 진수성찬으로 환대했다. 그러자 세 현인(賢人)이 기후 앞으로 나와 이렇게 진언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머지 않아 저 문왕은 반드시 등나라를 멸하고 말 것이옵니다. 하오니 지금 조치하지 않으면 훗날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기후는 펄쩍 뛰며 듣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어느 날, 문왕은 군사를 이끌고 등나라로 쳐들어왔다. 이리하여 등나라는 일찍이 세 현인이 예언한 대로 문왕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선시어외(先始於외)
먼저 외부터 시작하라'는 뜻으로, 가까이 있는 나(너)부터 또는 말한 사람(제안자)부터 시작하라는 말
전국 시대, 연(燕)나라가 영토의 태반을 제(齊)나라에 빼앗기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즉위한 소왕(昭王)은 어느 날, 재상 곽외에게 실지(失地) 회복에 필요한 인재를 모으는 방법을 물었다. 곽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신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사옵니다. 옛날에 어느 왕이 천금(千金)을 가지고 천리마를 구하려 했으나 3년이 지나도 얻지 못했나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잡일을 맡아보는 신하가 천리마를 구해 오겠다고 자청하므로 왕은 그에게 천금을 주고 그 일을 맡겼나이다.
그는 석 달 뒤에 천리마가 있는 곳을 알고 달려갔으나 애석하게도 그 말은 그가 도착하기 몇 일 전에 죽었다고 하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죽은 말의 뼈를 오백 금(五百金)이나 주고 사 오자[賈死馬骨]' 왕은 진노하여 '과인이 원하는 것은 산 천리마야. 누가 죽은 말뼈에 오백 금을 버리라고 했느냐'며 크게 꾸짖었나이다. 그러자 그는 '이제 세상 사람들이 천리마라면 그 뼈조차 거금으로 산다는 것을 안 만큼 머지 않아 반드시 천리마를 끌고
올 것'이라고 말했나이다.
과연 그 말대로 1년이 안 되어 천리마가 세 필이나 모였다고 하옵니다. 하오니 전하께오서 진정으로 현재(賢才)를 구하신다면 '먼저 신 외부터' 스승의 예를 받도록 하오소서. 그러면 외 같은 자도 저렇듯 후대를 받는다며 신보다 어진 이가 천리 길도 멀다 않고 스스로 모여들 것이옵니다.
소왕은 곽외의 말을 옳게 여겨 그를 위해 황금대(黃金臺)라는 궁전을 짓고 스승으로 예우했다. 이 일이 제국(諸國)에 알려지자 천하의 현재가 다투어 연나라로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조(趙)나라의 명장 악의(樂毅)를 비롯하여 음양설(陰陽說)의 비조(鼻祖)인 추연(鄒衍), 대정치가인 극신(劇辛)과 같은 큰 인물도 있었다. 이들의 보필을 받은 소왕은 드디어 제국(諸國)의 군사와 함께 제나라를 쳐부수고 숙원을 풀었다.
"주" 매사마골 : 쓸데없는 것을 사서 요긴한 것이 오기를 기다린다.
쓸데없는 것이라도 소중히 다루면 현인은 그에 끌려 자연히 모여든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
선즉제인(先則制人)
선손을 쓰면(선수를 치면) 남을 제압할 수 있다는 뜻.
진(秦)나라 2세 황제 원년(元年:B.C. 209)의 일이다. 진시황(秦始皇) 이래 계속되는 폭정에 항거하여 대택향[大澤鄕:안휘성 기현]에서 9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궐기한 날품팔이꾼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단숨에 기현을 석권하고 진[秦:하남성 회양(河南省淮陽)]에 입성했다.
이어 이곳에 장초(張楚)라는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오른 진승은 옛 6개국의 귀족들과 그 밖의 반진(反秦) 세력을 규합하여 진나라의 도읍 함양(咸陽)을 향해 진격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강동(江東)의 회계군수(會稽君守) 은통(殷通)은 군도(郡都) 오중[吳中:강소성 오현(江蘇省吳縣)]의 유력자인 항량(項梁)을 불러 거병을 의논했다.
항량은 진나라 군사에게 패사(敗死)한 옛 초(楚)나라 명장이었던 항연(項燕)의 아들인데, 고향에서 살인을 하고 조카인 적[籍:항우(項羽)의 이름]과 함께 오중으로 도망온 뒤 타고난 통솔력을 십분 발휘하여 곧 오중의 실력자가 된 젊은이다.
지금 강서 지방에서는 모두들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는데, 이는 하늘이 진나라를 멸망코자 하는 시운(時運)이 되었기 때문이오, 내가 듣건대 '선손을 쓰면 남을 제압할 수 있고[先則制人]' 뒤지면 남에게 제압당한다고[後則人制] 했소. 그래서 나는 그대와 환초를 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일으킬까 하오.
은통은 오중의 실력자일 뿐 아니라 병법에도 조예가 깊은 항량을 이용, 출세의 실마리를 잡아볼 속셈이었으나 항량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거병하려면 우선 환초부터 찾아야 하는데, 그의 행방을 알고 있는 자는 오직 제 조카인 적뿐입니다. 그러니 지금 밖에 와 있는 그에게 환초를 불러오라고 하명하시지요.
그럽시다. 그럼, 그를 들라 하시오.
항량은 뜰 아래에 대기하고 있는 항우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이렇게 일렀다.
내가 눈짓을 하거든 지체 없이 은통의 목을 치도록 하라.
항우를 데리고 방에 들어온 항량은 항우가 은통에게 인사를 마치고 자기를 쳐다보는 순간 눈짓을 했다. 항우는 칼을 빼자마자 비호같이 달려들어 은통의 목을 쳤다. 항량과 항우가 은통에 앞서 '선즉제인'을 몸소 실행한 것이다.
항량은 곧바로 관아를 점거한 뒤 스스로 회계 군수가 되어 8000여 군사를 이끌고 함양으로 진격하던 중 전사하고 말다. 뒤이어 회계군의 총수가 된 항우는 훗날 한왕조(漢王朝)를 이룩한 유방(劉邦)과 더불어 진니라를 멸망시켰다(B.C. 206). 그러나 그후 유방과 5년간에 걸쳐 천하의 패권을 다투다가 패하여 자결하고 말았다(B.C. 202)
성하지맹(城下之盟)
적국에게 항복하고 맺는 치욕적인 강화(講和)의 맹약(盟約).
환공(桓公) 12년(BC 700), 초나라가 교(絞)로 쳐들어가 성의 남문에 진을 쳤을 때, 막오 (莫敖)라는 벼슬에 있는 굴하(屈瑕)가 환공(桓公)에게 말했다.
"교(絞)의 사람들은 편협하고 경솔합니다. 경솔하면 도모함이 적은 법이니, 청컨대 땔나무를 취하는 인부를 호위를 붙여 내놓아, 이로써 그들을 유인하면 어떨까요?"
이리하여 그 계교대로 하자, 교(絞)의 군사들은 첫날 초(楚)의 인부 30명을 사로잡았다.
다음날 교(絞)의 군사들은 초나라 인부들을 쫓아 산속으로 달려갔다. 초나라 군사들이 그 북문을 지키고 산 아래에 매복하였으므로, 크게 패하여 성 아래에서 맹세하고 돌아갔다.
楚伐絞 軍其南門 莫敖屈瑕曰 絞小而輕 輕則寡謀 請無 采樵者以誘之 從之 絞人獲三十人
明日絞人爭出 驅楚役徒於山中 楚人坐其北門而覆諸出下 大敗之 爲城下之盟而還.
성혜(成蹊)
샛길이 생긴다는 뜻. 곧 덕(德)이 높은 사람은 자기 선전을 하지 않아도 자연히 사람들이 흠모하여 모여듦의 비유.
진한 6대 황제인 경제(景帝:B.C. 157∼141)때 이광(李廣)이라는 명장이 있었다. 당시는 북방 흉노족(匈奴簇)과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때인 만큼 이광의 무용담(武勇談)도 자연히 흉노족과의 전쟁과 결부된 이야기가 많은데 이 이야기도 그중 하나이다.
어느 날, 이광은 불과 100여 기(騎)를 이끌고 적 후방 깊숙이 쳐들어가 목적한 기습 공격에 성공했다. 그러나 곧 적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광은 부하 장병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침착하라. 그리고 말에서 내려 안장을 풀어라.
적은 깜짝 놀랐다. 그 행동이 너무나 대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표를 찔린 적은 필연 뭔가 계략이 숨겨져 있을 것으로 믿고 주춤했다. 이때 이광은 10여 기를 이끌고 질풍처럼 적진에 돌입하여 한칼에 적장을 베었다. 그러자 적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달아났다. 이리하여 이광은 한 사람의 병사도 잃지 않고 개선했다. 그 후에도 많은 무공을 세운 이광을 칭송하여 사마천(司馬遷)은 그의 저서《사기(史記)》〈이장군 열전(李將軍列傳)〉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장군은 언변은 좋지 않았으나 그 덕과 성실함은 천하에 알려져 있었다. 복숭아와 오얏 꽃은 아무 말 하지 않아도[桃李不言:덕 있는 사람의 비유] 그 아름다움에 끌려 사람들이 모여들므로 '나무 밑에는 자연히 샛길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下自成蹊]
소년이로 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말.
이 말은 남송(南宋:1127∼1279)의 대유학자(大儒學者)로서 송나라의 이학(理學)을 대성한 주자(朱子:朱熹)의《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권학문(勸學文)〉에 나오는 시의 첫 구절이다.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
[少年易老 學難成(소년이로 학난성)]
순간 순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
[一寸光陰 不可輕(일촌광음 불가경)]
연못가의 봄풀이 채 꿈도 깨기 전에
[未覺池塘 春草夢(미각지당 춘초몽)]
계단 앞 오동나무 잎이 가을을 알린다
[階前梧葉 已秋聲(계전오엽 이추성)]
송양지인(宋襄之仁)
지나치게 착하기만 하여 권도(權道)가 없음을 이르는 말.
춘추시대인 주(周)나라 양왕(襄王) 2년(BC 650), 송(宋)나라 환공(桓公)이 세상을 떠났다.
환공이 병석에 있을 때 태자인 자부(玆父)는 인덕(仁德)이 있는 서형(庶兄) 목이(目夷)에게 태자의 자리를 양보하려 했으나 목이는 굳이 사양했다. 그래서 자보가 위(位)에 올라 양공(襄公)이라 일컫고 목이를 재상에 임명했다.
그로부터 7년 후(BC 643), 춘추(春秋)의 첫 패자(覇者)인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죽고, 송나라에는 운석(隕石)이 떨어졌다. 이는 패자(覇者)가 될 징조라며 양공은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여섯 공자(公子) 간에 후계 다툼이 치열한 제나라로 쳐들어가 공자 소(昭:孝公)를 세워 추종 세력을 만들었다. 이어 4년 후에는 송(宋), 제(齊), 초(楚) 세 나라의 맹주(盟主)가 되었다. 목이(目夷)는 '작은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것은 화근(禍根)'이라며 걱정했다.
이듬해 여름, 양공은 자기를 무시하고 초나라와 통교(通交)한 정(鄭)나라를 쳤다. 그러자 그 해 가을, 초나라는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하여 대군을 파병했다. 양공은 초나라 군사를 홍수(泓水:河南省)에서 맞아 싸우기로 했으나 전군(全軍)이 강을 다 건너왔는데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 목이가 참다못해 진언했다.
"적은 많고 아군은 적사오니 적이 전열(戰列)을 가다듬기 전에 쳐야 하옵니다."
그러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
"군자는 어떤 경우든 남의 약점을 노리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 법이오."(君子不困於 )양공은 초나라 군사가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숫적으로 열세(劣勢)였던 송나라 군사는 참패했다. 그리고 양공 자신도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은 것이 악화되어 이듬해 죽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두고 '송나라 양공의 인(仁)'이라며 비웃었다.(世笑以爲宋襄之仁)
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는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로 향한다는 말로써,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일컫는 말.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殷)나라를 멸하고 주(周)나라를 일으킨 여상(呂尙) 태공망(太公望)은 제(齊)나라에 있는 영구(營丘)에 봉해졌는데, 계속해서 다섯 대(代)에 이르기까지 주(周)의 호경(鎬京)에 반장(反葬)했다.
군자께서 이르시기를 음악은 그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바를 즐기며 예(禮)란 그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옛사람의 말에 이르되, 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바르게 향하는 것은 인(仁)이라고 하였다.
太公封於營丘 此及五世 皆反葬於周 君子曰 樂樂其所自生 禮不忘其本 古之人有
言曰 狐死正 丘首仁也.
수서양단(首鼠兩端)
진퇴,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
전한 7代 황제인 무제(武帝 : BC 141-87)때의 일이다. 5代 문제(文帝)의 황후의 조카인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孀)과 6代 경제(景帝)의 황후의 동생인 무안후(武安侯) 전분(田 )은 같은 외척이었지만 당시 연장자인 두영은 서산 낙일(西山落日)하는 고참 장군이었고, 전분은 욱일 승천(旭日昇天)하는 신진 재상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두영의 친구인 관부(灌夫) 장군이 고관 대작(高官大爵)들이 모인 주연(酒宴)에서 전분에게 대드는 실수를 범했다. 사건의 발단은 관부가 두영을 무시한 한 고관을 힐책(詰責)하는데 전분이 그 고관을 두둔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관부가 한사코 사죄를 거부하자 이 일은 결국 조의(朝議)에 오르게 되었다. 양쪽 주장을 다 들은 무제는 중신들에게 물었다.
"경들이 판단컨대 어느 쪽에 잘못이 있는 것 같소?"
처음에는 의견이 둘로 나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영의 추종자로 알려진 내사(內史) 정당시(鄭當時)조차 우물쭈물 얼버무리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어사대부(御史大夫) 한안국(韓安國)도 명확한 대답을 피했다.
"폐하, 양쪽 다 일리가 있사와 흑백을 가리기가 심히 어렵나이다."
중신들의 불분명한 태도에 실망한 무제가 자리를 뜨자 조의는 거기서 끝났다. 전분은 화가 나서 한안국을 책망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좌우를 살피는 쥐[首鼠兩端]'처럼 망설였소? 이 사건은 시비곡직(是非曲直)이 불을 보듯 훤한 일인데…. 그대와 더불어 대머리가 벗겨진 늙은이를 해치우려 했는데, 어찌하여 애매한 태도를 취했는가?"
與長孺共一禿翁 何爲首鼠兩端.
[ 동의어 = 수시양단(首施兩端) ] [ 유사어 = 좌고우면(左顧右眄) ]
수석침류(漱石枕流)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뜻. 곧 ① (실패를 인정하려 들지 않고) 억지를 씀. 억지로 발라 맞춰 발뺌을 함. ② (남에게 지기 싫어서 좀처럼 체념을 안하고) 억지가 셈의 비유.
진(晉:265∼317)나라 초엽, 풍익 태수(馮翊太守)를 지낸 손초(孫楚)가 벼슬길에 나가기 전, 젊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사대부간에는 속세의 도덕 명문(名聞)을 경시하고 노장(老莊)의 철리(哲理)를 중히 여겨 담론하는 이른바 청담(淸談)이 유행하던 때였다. 그래서 손처도 죽림 칠현(竹林七賢)처럼 속세를 떠나 산림에 은거하기로 작정하고 어느 날, 친구인 왕제(王濟)에게 흉금을 털어놓았다.
이때 '돌을 베개삼아 눕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는 생활을 하고 싶다[枕流漱石]'고 해야 할 것을, 반대로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漱石枕流]'고 잘못 말했다. 왕제가 웃으며 실언임을 지적하자 자존심이 강한데다 문재(文才)까지 뛰어난 손초는 서슴없이 이렇게 강변했다.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는 것은 옛날 은사(隱士)인 허유(許由)와 같이 쓸데없는 말을 들었을 때 귀를 씻기 위해서이고, 돌로 양치질한다는 것은 이를 닦기 위해서라네.
[ 동의어 = 침류슈석(枕流漱石). ]
[ 유사어 = 견강부회(牽强附會), 아전인수(我田引水), 추주어륙(推舟於陸), 궤변(詭辯) ]
수어지교(水魚之交)
아주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사이
유비에게는 관우와 장비와 같은 용장이 있었지만, 천하의 계교를 세울 만한 지략이 뛰어난 모사(謀士)가 없었다.
이러한 때에 제갈공명(諸葛孔明)과 같은 사람을 얻었으므로, 유비의 기쁨은 몹시 컸다.
그리고 제갈공명이 금후에 취해야 할 방침으로,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눌러서 그 곳을 근거지로 할 것과 서쪽과 남쪽의 이민족을 어루만져 뒤의 근심을 끊을 것과 내정을 다 스려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실리를 올릴 것과 손권과 결탁하여 조조를 고립시킨 후 시기를 보아 조조를 토벌할 것 등의 천하 평정의 계책을 말하자 유비는 그 계책에 전적으로 찬성하여 그 실현에 힘을 다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유비는 제갈공명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어 두 사람의 교분은 날이 갈수록 친밀해졌다. 그러자 관우나 장비는 불만을 품게 되었다. 새로 들어온 젊은 제갈공명(이 때 공명의 나이는 28세)만 중하게 여기고 자기들은 가볍게 취급받는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이 이리 되자 유비는 관우와 장비 등을 위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제갈공명을 얻은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 즉 나와 제갈공명은 물고기와 물과 같은 사이이다. 아무 말도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하자, 관우와 장비 등은 더 이상 불만을 표시하지 않게 되었다.
於是與亮情好日密 關羽張飛等不悅 先生解之曰 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願諸君勿復言 羽飛乃止.
수적천석(水滴穿石)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는 뜻.
곧 ① 물방울이라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종내엔 돌에 구멍을 뚫듯이, 작은 노력이라도 끈기 있게 계속하면 큰 일을 이룰 수 있음의 비유.
② 작은 것이라도 모이고 쌓이면 큰 것이 됨의 비유. 큰 힘을 발휘함의 비유.
북송(北宋:960∼1127)때 숭양 현령(崇陽縣令)에 장괴애(張乖崖)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관아를 돌아보다가 창고에서 황급히 튀어나오는 한 구실 아치를 발견했다. 당장 잡아서 조사해 보니 상투 속에서 한 푼 짜리 엽전 한 닢이 나왔다.
엄히 추궁하자 창고에서 훔친 것이라고 한다. 즉시 형리(刑吏)에게 명하여 곤장을 치라고 했다. 그러자 그 구실 아치는 장괴애를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건 너무 하지 않습니까? 사또, 그까짓 엽전 한 푼 훔친 게 뭐 그리 큰 죄라고
이 말을 듣자 장괴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네 이놈! 티끌 모아 태산[塵合泰山]이란 말도 못 들었느냐? 하루 한 푼[一文]이라도 천 날이면 천 푼이요, '물방울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돌에 구멍을 뚫는다[水滴穿石]'고 했다
장괴애는 말을 마치자마자 층계 아래 있는 죄인 곁으로 다가가 칼을 빼어 목을 치고 말았다. 이 같은 일은 당시 상관을 무시하는 구실 아치의 잘못된 풍조를 고치려는 행위였다고 "옥림학로(玉林鶴露)"는 쓰고 있다.
"주" '수적천석'은 우리 나라의 속담(俗談) '낙숫물이 댓돌[臺石]을 뚫는다'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고사 성어임.
[ 동의어 = 점적천석(點滴穿石) ]
[ 유사어 = 우공이산(愚公移山), 적토성산(積土成山), 적수성연(積水成淵), 산류천석(山溜穿石) ]
수주대토(守株待兎)
변통할 줄 모르고 어리석게 지키기만 함.
송(宋)나라에 어떤 농부가 밭을 갈고 있었다. 갑자기 토끼 한 마리가 뛰어오다가 밭 가운데 있는 그루터기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는 것을 보았다.
덕분에 토끼 한 마리를 공짜로 얻은 농부는 농사일보다 토끼를 잡으면 더 수지가 맞겠다고 생각하고는 농사일은 집어치우고 매일 밭두둑에 앉아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가 오기만 기다렸다.[守株待兎]
그러나 토끼는 그곳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며 농부 자신은 송(宋)나라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밭은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농사를 망친 것은 물론이다.
한비자(韓非子)는 요순(堯舜)을 이상으로 하는 왕도(王道) 정치는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수주대토(守株待兎)의 비유를 들었다.
그는 시대의 변천은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라고 보고 복고주의(復古主義)는 진화에 역행하는 어리석은 착각이라고 주장하면서 낡은 관습을 지키며 새로운 시대에 순응할 줄 모르는 사상 또는 사람에게 이 수주대토(守株待兎)의 비유를 적용한 것이다.
수즉다욕(壽則多辱)
오래 살면 욕된 일이 많다는 뜻으로, 오래 살수록 망신스러운 일을 많이 겪게 된다는 말
전국시대를 살다간 사상가 장자(莊子:莊周)의 저서《장자(莊子)》〈천지편(天地篇)〉에는 다음과 같은 우화가 실려 있다.
그 옛날 성천자(聖天子)로 이름 높은 요(堯) 임금이 순행(巡幸)중에 화(華)라는 변경에 이르자 그곳의 관원이 공손히 맞으며 이렇게 말했다
장수하시오소서
그러자 요 임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장수하기를 원치 않네
그러시면 부자가 되시오소서
부자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네.
그러시면 다남(多男)하시오소서
그것도 나는 원치 않네. 다남하면 못난 아들도 있어 걱정의 씨앗이 되고, 부자가 되면 쓸데없는 일이 많아져 번거롭고, '오래 살면 욕된 일이 많은 법이네[壽則多辱]
이 말을 들은 관원은 실망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대듯 말했다.
요 임금은 성인이라고 들어 왔는데 이제 보니 군자(君子)에 불과하군.
아들이 많으면 각기 분수에 맞는 일을 맡기면 걱정할 필요 없고, 재물이 늘면 는 만큼 남에게 나누어주면 될텐데…‥. 진정한 성인이란 메추라기처럼 거처를 가리지 않으며 병아리처럼 아무 생각 없이 잘 먹고, 새가 날아간 흔적 없는 자리처럼 자유 자재이어야 하는 법.
그리고 세상이 정상이면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그 번영을 누리고, 정상이 아니면 스스로 덕을 닦고 은둔하면 되지 않는가. 그렇게 한 100년쯤 장수하다가 세상이 싫어지면 그때 신선이 되어 흰구름을 타고 옥황상제(玉皇上帝)가 계시는 곳에서 놀면 나쁠 것도 없지…‥.
관원은 말을 마치자 마자 그 자리를 떠났다. 허를 찔린 요 임금은 좀더 이야기를 들어보려 했으나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수청무대어(水淸無大魚)
물이 (너무) 맑으면 큰 물고기가 (물을 숨기지 못해) 살 수 없다는 뜻으로, 사람이 너무 결백하면 남이 가까이하지 않음의 비유.
후한 시대 초엽, "한서(漢書)"의 저자로 유명한 반고(班固)의 동생에 반초(班超)라는 무장이 있었다. 반초는 2대 황제인 명제(明帝)때(74년) 지금의 신강성(新疆省) 타림 분지의 동쪽에 있었던 선선국[누란(樓蘭)]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끊임없이 활약한 끝에 서쪽 오랑캐 땅의 50여 나라를 복속(服屬)시켜 한나라의 위세를 크게 떨쳤다.
그는 그 공으로 4대 화제(和帝)때인 영원(永元) 3년(91)에 지금의 신강성 위구르 자치구의 고차(庫車:당시 실크로드의 요충)에 설치되었던 서역 도호부(西域都護府)의 도호(都護:총독)가 되어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도호의 직책은 한나라의 도읍 낙양(洛陽)에 왕자를 인질로 보내어 복속을 맹세한 서역 50여 나라를 감독 사찰(査察)하여 이반(離叛)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영원 14년(102), 반초가 대과(大過)없이 소임을 다하고 귀국하자 후임 도호로 임명된 임상(任尙)이 부임 인사차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했다.
서역을 다스리는 데 유의할 점은 무엇입니까?
반초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 성격이 너무 결백하고 조급한 것 같아 그게 걱정이네. 원래 '물이 너무 맑으면 큰 물고기는 살지 않는 법[水淸無大魚]'이야. 마찬가지로 정치도 너무 엄하게 서두르면 아무도 따라오지 않네. 그러니 사소한 일은 덮어두고 대범하게 다스리도록 하게나.
임상의 반초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묘책을 듣고자 했던 기대와는 달리 이야기가 너무나 평범했기 때문이다. 임지에 부임한 임상은 반초의 조언을 무시한 채 자기 소신대로 다스렸다. 그 결과 부임 5년 후인 6대 안제(安帝) 때(107년) 서역 50여 나라는 모두 한나라를 이반하고 말았다. 따라서 서역도호부도 폐지되고 말았다.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을 잃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① 가까운 사이의 이웃 나라 중 한 쪽이 망하면 다른 한 쪽도 온
② 서로 도우며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 또는 서로 도움으로 써 성립되는 관계의 비유
춘추시대 말엽(BC 655), 오패(五覇)의 한 사람인 진(晉)나라 문공(文公)의 아버지 헌공(獻公)이 괵(坆) 우(虞) 두 나라를 공략할 때의 일이다.
괵나라를 치기로 결심한 헌공은 진나라와 괵나라의 중간에 위치한 우(虞)나라의 우공(虞公)에게 길을 빌려 주면 많은 재보(財寶)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우공이 이 제의를 수락하려 하자 중신 궁지기(宮之奇)가 극구 간했다.
"전하, 괵나라와 우나라는 한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입니다.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망할 것이옵니다. 옛 속담에도 덧방나무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輔車相依],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란 말이 있사온데, 이는 곧 괵나라와 우나라를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되옵니다. 그런 가까운 사이인 괵나라를 치려는 진나라에 길을 빌려 준다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옵니다."
"경은 진나라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소. 진나라와 우리 우나라는 모두 주황실(周皇室)에서 갈라져 나온 동종(同宗)의 나라가 아니오? 그러니 해(害)를 줄 리가 있겠소?"
"괵나라 역시 동종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진나라는 동종의 정리(情理)를 잃은 지 오래이옵니다. 예컨대 지난날 진나라는 종친(宗親)인 제(齊)나라 환공(桓公)과 초(楚)나라 장공(莊公)의 겨레붙이까지 죽인 일도 있지 않사옵니까? 전하, 그런 무도한 진나라를 믿어선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재보에 눈이 먼 우공은 결국 진나라에 길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자 궁지기는 화(禍)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일가권속(一家眷屬)을 이끌고 우나라를 떠났다.
그 해 12월, 괵나라를 멸하고 돌아가던 진나라 군사는 궁지기의 예언대로 단숨에 우나라를 공략하고 우공을 포로로 잡아갔다.
시오설(視吾舌)
'내 혀를 보아라'는 뜻. 곧 혀만 있으면 천하도 움직일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
전국 시대, 위(魏)나라에 장의(張儀)라는 한 가난한 사람이 있었다. 언변과 완력과 재능이 뛰어난 그는 권모 술수에 능한 귀곡자(鬼谷子)에게 배웠다. 따라서 합종책(合從策)을 성공시켜 6국이 재상을 겸임한 소진(蘇秦)과는 동문이 된다. 장의는 수업(修業)을 마치자 자기를 써 줄 사람을 찾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초(楚)나라 재상 소양(昭陽)의 식객이 되었다.
어느 날, 소양은 초왕(楚王)이 하사한 '화씨지벽(和氏之壁)'이라는 진귀한 구슬을 부하들에게 피로(披露)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연석에서 구슬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모두가 장의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가난뱅이인 장의가 훔친 게 틀림없다'고
그래서 수십 대의 매질까지 당했으나 장의는 끝내 부인했다. 마침내 그가 실신하자 소양은 할 수 없이 방면했다. 장의가 초주검이 되어 집에 돌아오자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어쩌다가 그래, 이런 변을 당했어요?
그러자 장의는 느닷없이 혀를 쑥 내밀며 보인 다음 이렇게 물었다
'내 혀를 봐요[視吾舌].' 아직 있소, 없소?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아내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혀야 있지요
그럼 됐소.
몸은 가령 절름발이가 되더라도 상관없으나 혀만은 상(傷)해선 안된다. 혀가 건재해야 살아갈 수 있고 천하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의는 그 후 혀 하나로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연횡책(連衡策)으로 일찍이 소진이 이룩한 합종책을 깨는 데 성공했다
[ 동의어 = 상존오설(尙存吾舌). ]
신출귀몰(神出鬼沒)
자유 자재로 출몰하여 그 변화를 헤아릴 수 없음
전한(前漢)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엮은《淮南子》'兵略訓'은 도가 사상(道家思想)을 기본 이론으로 한 전략론(戰略論)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아군의 계략과 진(陣)치는 일과 군대의 세력과 병기가 겉으로 보아서 적군이 대책을 세울 수 있는 것이라면, 용병에 교묘한 것이 못된다고 말하고 있다.『교묘한 자의 행동은 신(神)이 나타나고 귀신이 돌아 다니는 것처럼 별과 같이 빛나고 하늘과 같이 운행하는 것이다. 그 나아가고 물러남과 굽히고 펴는 것은 아무런 전조(前兆)도 없고, 형태도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신출귀행(神出鬼行)이란 '신(神)이 나타나고 귀신이 돌아다닌다'는 뜻으로, 귀신과 같이 나오고 들어감이 자유자재여서 예측할 수 없는 것을 말하거니와, 같은 말이 병서(兵書)인《삼략(三略)》에도 실려 있다. 이 병서는 황석공(黃石公)이 이상 에서 유방(劉邦)의 공신인 장량에게 준 것으로, 淸나라의 적호(翟灝)가 지은《통속편(通俗篇)》'귀신지부'의 <신출귀몰>에서 나온 것으로, 이《삼략(三略)》의
신출귀행(神出鬼行)의 말을 들고 있다.
이 직접 나온 것은《당희장어》에 나오는 '두 머리 세 얼굴의 귀신이 나타나고 없어진다.(兩頭三面 神出鬼沒)'의 구절이지만, 이것은《淮南子》나《삼략(三略)》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
이 말은"漢書" '河間獻王德傳'에 실려 있는, '학문을 닦아 예를 좋아하고, 일을 참답게 하여 옳음을 구함.(修學好古 實事求是)'에서 나온 말이다.
19세기 초기, 즉 청나라 말기에서부터 중화민국 초기에 걸쳐 계몽사상가로서 활약한 양계초(梁啓超)는"淸代學術槪論"을 써서 淸代 학술의 개론을 시도한 사람이다
양계초는 다시 능정감(凌廷堪)이 대진(戴震)을 위하여 지은《事略狀》에서 다음과 같은 논평을 이용하여 대진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을 드러내 밝히고 있다.
"옛날 하간(河間)의 헌왕(獻王)은 실사(實事)에 대하여 옳음을 구하였다. 도대체 실사(實事)의 앞에 있으면서 내가 옳다고 하는 것도 사람들은 억지로 말하여 이것을 그르다고 하지 못하고, 내가 그르다고 하는 것도 사람들은 억지로 말하여 이것을 그르다고 하지 못한다." (《교례당집》35권 )
더구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학문의 표적으로서 존중한 것은 대지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그보다도 후배에 해당하는 청나라 왕조의 학자들 중에는 주대소(朱大韶)나 왕정진(王廷珍)과 같이, 스스로를 '實事求是燸'라고 아호를 붙인 사람들도 있었다.
실사구시(實事求是)'란 사실을 토대로 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말하며, 청조(淸朝)의 고증학파가 공론(空論)만 일삼는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반동으로 내세운 표어이다.
고증학자(考證學者)들은 정확한 고증을 존중하는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학문연구의 입장을 취했다.
십년한창(十年寒窓)
'十年寒窓'은 '10년동안 사람이 오지 않아 쓸쓸한 창문(寒窓)'이나,
'오랫동안 두문불출(杜門不出)한 채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공부한 세월'을 비유한다.
金나라때 유기(劉祁)의 <귀잠지(歸潛志)>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古人謂 十年窓下無人問
一擧成名天下知'(옛 사람이 이르길 10년동안 창문 아래 묻는 이가 없더니 한번에 이름이 나니 천하 사람이 다 알게 되었다). '이름이 나다'(成名)는 科擧에 及第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과거에 급제해야만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기에 젊은이들은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책과 씨름했다. 그런 고생스런 과정을 거쳐 일단 급제만 하면 '天下知名'(세상에 이름이 알려짐)이었으니, 요즘 山寺에서 공부헤 考試에 합격, 揚名하는 것과 비슷하다. '十年寒窓'은 '十年窓下'라고도 한다.
십보방초(十步芳草)
'十步'는 열 걸음, '芳草'는 향기로운 꽃과 풀이니, '十步芳草'는 직역하면 '열 걸음 안에 아름다운 꽃과 풀이 있다'이다. 도처에 人才가 있다는 뜻으로 세상에는 훌륭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비유한다.
漢나라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에 나온다. '十步之澤 必有芳草 十室之邑 必有忠士'(10보 안에 반드시 방초가 있고, 10채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충성스런 선비가 있다).
'步'는 한 걸음이고, '武'는 반 걸음이다. '步武堂堂'은 모든 걸음걸이가 당당하다는 말로 군인들의 행진같은 것이다.
'綠陰芳草'는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그늘[綠陰]과 아름다운 꽃이란 말로 '여름 경치'를 뜻한다. 윗 글에서는 '芳草'를 '忠士'에 비유했다. 한문은 이같은 비유가 많은데 반드시 좋은 것은 나쁜 것과 대응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