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事成語(고사성어)

[ㄱ], [ㄴ/ㄷ/ㅁ], [ㅂ], [ㅅ], [ㅇ], [ㅈ/ㅊ], [ㅌ/ㅍ/ㅎ]


안서(雁書)

철따라 이동하는 기러기가 먼 곳에 소식을 전한다는 뜻으로, 편지를 일컫 는 말.
한(漢)나라 소제(昭帝)는 19년 전, 선제(先帝)인 무제(武帝) 때(B.C. 100) 포로 교환차 사절단을 이끌고 흉노(匈奴)의 땅에 들어갔다가 그곳에 억류당한 중랑장 (中郞將) 소무(蘇武)의 귀환을 위해 특사를 파견했다. 현지에 도착한 특사가 곧바로 흉노의 우두머리인 선우(單于)에게 소무의 석방을 요구하자 선우는 '소무는 벌써 여러 해 전에 죽 었다'며 대화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상혜(常惠)라는 사람이 은밀히 특사의 숙소로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소무를 따라왔다가 흉노의 내란에 말려 일행이 모두 잡힌 뒤 투 항한 사람 중하나요. 그런데 그때 끝까지 항복을 거부한 소무는 북해(北海:바이칼 호) 변으 로 추방당한 뒤 아직도 그곳에서 혼자 어렵게 살아가고 있소.
이튿날 특사는 선우를 만나 따지듯이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황제께서 사냥을 하시다가 활로 기러기 한 마 리를 잡았는데, 그 기러기 발목에는 헝겊이 감겨 있었소. 그래서 풀어 보니 '소무는 대택(大 澤:큰 못) 근처에 있다'고 적혀 있었소. 이것만 봐도 소무는 살아 있는 게 분명하지 않 소?
안색이 변한 선우는 부하와 몇 마디 나누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제는 제가 잘 모르고 실언을 한 것 같소. 그는 살아 있다고 하오.
꾸며댄 이야기가 제대로 들어맞은 것이다. 며칠 후 흉노의 사자(使者) 가 데려온 소무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으나 그의 손에는 한나라 사신의 증표인 부절(符節)이 굳게 쥐어져 있었다. 이 고사에 연유하여 그 후 편지를 안서라고 일컫게 되었다.

안중지정(眼中之釘)

눈에 박힌 못이라는 뜻. 곧 ①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의 비유. ② 몹시 싫거나 미워서 항상 눈에 거슬리는 사람(눈엣가시)의 비유.
당나라 말, 혼란기에 조재례(趙在禮)라는 악명 높은 탐관오리가 있었 다. 그는 하북 절도사(河北節度使) 유인공(劉仁恭)의 수하 무장이었으나 토색(討索)질한 재 무를 고관대작에게 상납, 출세길에 오른 뒤 후량(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晉)의 세 왕조에 걸쳐 절도사를 역임했다.
송주(宋州:하남성 내)에서도 백성들로부터 한껏 착취한 조재례가 영흥 (永興) 절도사로 영전, 전임하게 되자 송주의 백성들은 춤을 추며 기뻐했다.
그 놈이 떠나가게 되었다니 이젠 살았다. 마치 '눈에 박힌 못[眼中之 釘]'이 빠진 것 같군.
이 말이 전해지자 화가 난 조재례는 보복을 하기 위해 1년만 더 유임 시켜 줄 것을 조정에 청원했다. 청원이 수용되자 그는 즉시 '못 빼기 돈[拔釘錢(발정전)]'이 라 일컫고 1000푼씩 납부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미납자는 가차없이 투옥하거나 태형에 처했 다. 이처럼 악랄한 수법으로 착취한 돈이 1년간에 자그마치 100만 관(貫)이 넘었다고 한다.

암중모색(暗中摸索)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어 찾는다는 뜻으로, 어림짐작으로 찾는다(혹은 추측한다)는 말.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였던 즉천무후(則天武后:690∼705) 때 허경종(許敬宗)이란 학자가 있었다.
그는 경망한데다가 방금 만났던 사람조차 기억하지 못할 적도로 건망 증이 심했다. 어느 날, 친구가 허경종의 건망증을 비웃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자네 같은 이름 없는 사람의 얼굴이야 기억할 수 없지만 조식(曹植) 이나 사령운(謝靈運) 같은 문장의 대가라면 '암중모색'을 해서라도 알 수 있다네.
"주" 조식 : 조조(曹操)의 셋째 아들. 뛰어난 시재(詩才)를 시기하는 형 문제[文帝:후한을 멸하고 위(魏)나라를 세운 조비(曹丕), 220∼226]의 명을 받고 지은〈칠 보시(七步詩)〉는 특히 유명함.
사령운 : 남북조 시대 남송(南宋)의 시인. 별명 사강락(謝康樂). 여러 벼슬을 지냈으나 치적(治積)을 쌓지 못하자 그의 글재주를 아끼는 문제(文帝:424∼453)의 만 류에도 불구하고 사임. 이후 막대한 유산으로 연일 수백 명의 문인(文人)들과 더불어 산야 (山野)에서 호유(豪遊)하다가 반역죄에 몰려 처형됨. 서정(抒情)을 바탕으로 하는 중국 문화 사상에 산수시(山水詩)의 길을 열어 놓음에 따라 '산수 시인'이라 불리기도 함.《산수시》 《산거적(山居賊)》 등의 시집을 남김.(385∼433).

양금택목(良禽擇木)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는 뜻으로, 현명한 사람은 자 기 재능을 키워 줄 훌륭한 사람을 가려서 섬김의 비유.
춘추 시대, 유가(儒家)의 비조(鼻祖)인 공자가 치국(治國)의 도를 유세 (遊說)하기 위해 위(衛)나라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공문자(孔文子)가 대숙질(大叔疾) 을 공격하기 위해 공자에세 상의하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사 지내는 일에 대해선 배운 일이 있습니다만, 전쟁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자리를 물러 나온 공자는 제자에게 서둘러 수레에 말을 매라고 일 렀다. 제자가 그 까닭을 묻자 공자는 '한시라도 빨리 위나라를 떠나야겠다'며 이렇게 대답했다.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良禽擇木]고 했다. 마찬 가지로 신하가 되려면 마땅히 훌륭한 군주를 가려서 섬겨야 하느니라.
이 말을 전해들은 공문자는 황급히 객사로 달려와 공자의 귀국을 만류했다.
나는 결코 딴 뜻이 있어서 물었던 것이 아니오. 다만 위나라의 대사 에 대해 물어 보고 싶었을 뿐이니 언짢게 생각 말고 좀더 머물도록 하시오.
공자는 기분이 풀리어 위나라에 머물려고 했으나 때마침 노(魯)나라 에서 사람이 찾아와 귀국을 간청했다. 그래서 고국을 떠난 지 오래인 공자는 노구(老軀)에 스미는 고향 생각에 사로잡혀 서둘러 노나라로 돌아갔다.

약롱중물(藥籠中物)

약농 속의 약품이란 뜻으로, 항상 곁에 없어서는 안 될 긴요한 인물(심복) 을 이르는 말.
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高宗:628∼683)의 황후였던 즉천무후(則天武 后)때의 이야기이다. 14세 때 2대 황제인 태종(太宗)의 후궁이 된 그녀(무후)는 26세 때 태 종이 죽자 여승이 되었으나 재색(才色)을 탐낸 고종의 명예 따라 환속(還俗), 그의 후궁으로 있다가 고종 6년(655)에 황후가 되었다.
그 후 고종이 중풍에 걸리자 무후는 스스로 천후(天后)라 일컫고 수 많은 명신(名臣)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고 전 황후의 소생인 태자를 폐하는 등 포악한 정치 를 했다. 고종이 죽은 뒤 무후의 친아들인 중종(中宗:4대) 예종(叡宗:5대)을 세웠으나 곧 폐 하고 67세 때(690년)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주(周:690∼705)라고 했다. 중국 역사상 전 무후무한 여제(女帝)가 출현한 이 정변을 무주 혁명(武周革命)이라고 한다.
그 무렵, 적인걸(狄仁傑:630∼700)이라는 청렴 강직하고 식견이 높은 명재상이 있었다. 그는 더없이 잔인하고 명석한 무후를 직간(直諫), 보필하여 어지러웠던 정 치를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유능한 선비를 추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게 했다. 그래서 그는 조야(朝野)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따라서 적인걸의 문하에는 많은 인재가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원행 충(元行沖)과 같은 박학다재(博學多才)한 인물도 있었다. 그 원행충이 어느 날, 적인걸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공(相公) 댁에는 '맛있는 것(훌륭한 인재)'이 많습니다. 혹 과식하시 어 배탈이 나는 일이 없도록 저 같은 쓴 약도 곁에 놔두십시오.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고[良藥苦於口而利於病], 충언을 귀 에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다[忠言逆於耳而利於行]'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자 적인걸은 웃으며 말했다.
'자네야말로 바로 내 얄롱중물일세[君正吾藥籠中物].' 임, 하루라도 곁 에 없어서는 안 되고 말고[不可一日無也].
"주" 적인걸 : 산서성(山西省) 사람. 당나라 고종(高宗) 때 강남 순무 사(江南巡撫使)가 되어 치적을 쌓은 뒤 위주 자사(魏州刺史)로 있을 때 거란의 침략군을 물 리쳐 공을 세움. 재상으로 있을 때 즉천무후(則天武后)에게 직간하여 그녀의 친조카인 무삼 사(武三思)로 하여금 황통(皇統)을 잇게 하려는 대역(大逆)을 막고 당황실을 회복, 수호하는 데 힘씀. 이후 국로(國老)로 예우 받음. 예종(睿宗) 때 양국공(梁國公)에 추봉됨.(630∼ 700).

양두구육(羊頭狗肉)

겉으로 훌륭하게 내세우나 속은 변변찮음.
춘추시대, 제나라 영공(靈公) 때의 일이다.
영공은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男裝)을 시켜놓고 완상(玩賞)하는 별 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취미는 곧 백성들 사이에도 유행되어 남장한 여인 이 날로 늘어났다. 그러자 영공은 재상인 안영(晏?:晏子)에게 '궁 밖에서 남장하는 여인들을 처벌하라.'는 금령(禁令)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그 유행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 았다. 영공이 안영에게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궁중의 여인들에게는 남장을 허용하시며서 궁 밖의 여인들에게는 금령(禁令)을 내렸습니다. 하오면 이는 '밖에는 양 머리를 걸어 놓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파는 것[羊頭狗肉]'과 같습니다. 이제라도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을 금하십시오. 그러면 궁 밖의 여인들도 감히 남장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영공은 안영의 진언(眞言)에 따라 즉시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 금지 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 이튿날부터 제나라에서는 남장한 여인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임금께서는 궁중에서는 미인에게 남장하는 것을 용서하면서도, 궁중 밖에서는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마치 소의 머리를 문에 걸어놓고 안에서는 말고기를 파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 궁주에서는 미인에게 남장시키는 것을 금하지 않는 것입니까? 궁중에서 금한다면 궁중 밖에서도 감히 남장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君使服之於內 而禁之於外 猶懸牛首于門 而賣馬肉於內也 公何以不使內 勿服 則外莫敢爲也.

"동의어"현양수매마육(懸羊首賣馬肉), 현우수(매)마육(懸牛首(賣) 馬肉)
"유사어"양질호피(羊質虎皮), 현옥고석(衒玉賈石)

양상군자(梁上君子)

대들보 위의 군자라는 뜻으로, ① 집 안에 들어온 도둑의 비유. ② 천정 위의 쥐를 달리 일컫는 말.
후한 말엽, 진식(陳寔)이란 사람이 태구현(太丘縣 : 河南省 所在) 현령 (縣令)으로 있을 때, 그는 늘 겸손한 자세로 현민(縣民)의 고충을 헤아리고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함으로써 현민으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어느해 흉년이 들어 현민의 생계가 몹시 어려웠다. 그러던 어 느날 밤, 진식이 대청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웬 사내가 몰래 드러와 대들보 위에 숨었다. 도둑이 분명했다. 진식은 모르는 척하고 독서를 계속하다가 아들과 손자들을 대청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악인(惡人)이라 해도 모두 본성이 악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습관이 어느덧 성품이 되어 악행도 하게 되느니라. 이를테면 지금 '대들보 위에 있는 군자[梁上君子]'도 그렇다."
그러자 '쿵'하는 소리가 났다. 진식의 말에 감동한 도둑이 대들보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그는 마루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했다. 진식이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얼굴을 보아하니 악인은 아닌 것 같다. 오죽이나 어려웠으면 이런 짓을 했겠나."
진식은 그에게 비단 두 필을 주어 보냈다. 이로부터 이 고을에 다시는 도둑이 나타나지 않았다.

時勢荒民儉 有盜夜入其室 止於梁上 寔陰見乃起自整拂 呼命子孫 正色 訓之曰 夫人不可不自勉 不善之人未必本惡 習以性成 遂至於此 梁上君子者是矣 盜大驚自投於 地 稽?歸罪 寔徐 譬之曰 視君狀貌不似惡人 宜深剋己反善 然此當由貧困 令遺絹二匹 自是一縣無復盜竊.

양약고구(良藥苦口)

'효험이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뜻으로, 충언(忠言)은 귀에는 거슬리나 자신에게 이롭다는 말.
이것은 孔子의 말씀으로 "孔子家語" '六本篇', "설원(說苑)" '정간편 (正諫篇)'에 실려 있다. 효과가 있는 좋은 약은 입에 넣을 때 쓰고, 사람들에게 듣는 충고는 좋은 말일수록 귀에 들어올 때 거슬린다는 뜻이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약은 입에는 쓰지만 병에는 이롭고, 충고하는 말은 귀에 는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다. 殷나라 탕왕(湯王)은 곧은 말을 하는 충신이 있었기 때문에 번창했고, 夏나라의 걸왕(桀王)과 殷나라의 주왕(紂王)은 무조건 따르는 신하들이 있었기 때 문에 멸망했다. 임금에게 다투는 신하가 없고, 아버지에게 다투는 아들이 없고, 형에게 다투 는 동생이 없고, 선비에게 다투는 친구가 없다면 그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 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임금이 잘못을 저지르면 신하가 諫해야 하고, 아버지가 잘못을 저 지르면 아들이 諫해야 하고, 형이 잘못을 저지르면 동생이 諫해야 하고, 자신이 잘못을 저지 르면 친구가 諫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나라에 위태하고 망하는 징조가 없고, 집안에 패 란(悖亂)의 악행도 없고, 부자와 형제에 잘못이 없고, 친구와의 사귐도 끊임이 없을 것이다.

孔子曰 良藥苦於口而利於病 忠言逆於耳而利於行 湯武以 ??而昌 桀紂以唯唯而亡 君無爭臣 父無爭子 兄無爭弟 士無爭友 無己過者 未 之有也 故曰 君失之 臣得之 父失之 子得之 兄失之 弟得之 己失之 友得之 是以國無危亡之兆 家無悖亂之惡 父子兄弟無失 而交遊無絶也.

"원 말" 양약고어구(良藥苦於口)
"동의어" 충언역어이(忠言逆於耳), 간언역어이(諫言逆於耳), 금언역어이(金言逆於耳)

어부지리(漁父之利)

'두 사람이 이해 관계로 다투는 사이에 엉뚱한 딴 사람이 이득을 봄'을 일컬음.
전국시대, 제(齊)나라에 많은 군사를 파병한 연(燕)나라에 기근(饑饉) 이 들자 이웃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기다렸다는 듯이 침략 준비를 서둘렀다. 그래서 연나라 소왕(昭王)은 종횡가(縱橫家)로서 그간 연나라를 위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해 온 소대(蘇代)에게 혜문왕을 설득하도록 부탁했다.
조(趙)나라에 도착한 소대(蘇代)는 소진(蘇秦)의 동생답게 거침없이 혜문왕을 설득하여 혜문왕의 연나라 침공 계획을 철회시켰 다고 한다.
"오늘 귀국에 들어오는 길에 역수(易水)를 지나다가 문득 강변 을 바라보니 조개[蚌蛤(방합)]가 조가비를 벌리고 햇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도 요새[鷸(휼)]가 날아와 뾰족한 부리로 조갯살을 쪼았습니다. 깜짝 놀란 조개는 화가 나서 조 가비를 굳게 닫고 부리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도요새가 '이대로 오늘도 내일도 비가 오지 않으면 너는 말라 죽고 말 것이다.'라고 하자, 조개도 지지 않고 '내가 오 늘도 내일도 놓아 주지 않으면 너야말로 굶어 죽고 말 것이다.'하고 맞받았습니다. 이렇게 쌍방(雙方)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서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운수사납게도 그곳을 지나가던 어부(漁夫)에게 그만 둘다 잡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연나라를 치려고 하십니다만, 연나라가 조개라면 조 나라는 도요새입니다. 연(燕) 조(趙) 두 나라가 공연히 싸워 백성들을 피폐(疲弊)케 한다 면, 귀국과 인접해 있는 저 강대한 진(秦)나라가 어부가 되어 맛있는 국물을 다 마셔 버리고 말 것입니다."
"과연 옳은 말이오."하며 혜문왕은 침공을 중지했다.

趙且伐燕 蘇代爲燕謂惠王曰 今者臣來過易水 蚌方出曝 而鷸啄其肉 蚌 合而?其喙 鷸曰 今日不雨 明日不雨 卽有死蚌 蚌亦爲鷸 曰 今日不出 明日不出 卽有死鷸 兩者不肯相舍 漁者得而幷禽之 今趙且伐燕 燕趙久相支 以弊 大衆 臣恐强秦之爲漁夫也 故願王之熟計之也 惠王曰 善乃止.

"동의어" 어부지리(漁父之利), 방휼지쟁(蚌鷸之爭), 견토지쟁(犬兎之爭), 전부지공(田父之功), 좌수어인지공(坐收漁人之功)

여도지죄(餘桃之罪)

'먹다 남은 복숭아를 먹인 죄'란 뜻으로, 애정과 증오의 변화가 심함의 비유.
전국 시대, 위(衛)나라에 왕의 총애를 받는 미자하(彌子瑕)란 미동(美 童)이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병이 났다는 전갈을 받은 미자하는 허락 없이 임금의 수레 를 타고 집으로 달려갔다. 당시 허락 없이 임금의 수레를 타는 사람은 월형(발뒤꿈치를 자 르는 형벌)이라는 중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자하의 이야기를 들은 왕은 오히려 효심을 칭찬하고 용서했다.
실로 효자로다. 어미를 위해 월형도 두려워하지 않다니 …‥.
또 한 번은 미자하가 왕과 과수원을 거닐다가 복숭아를 따서 한 입 먹어 보더니 아주 달고 맛이 있었다. 그래서 왕에게 바쳤다. 왕은 기뻐하며 말했다.
제가 먹을 것도 잊고 '과인에게 먹이다'니…‥.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미자하의 자태는 점점 빛을 잃었고 왕의 총애 도 엷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미자하가 처벌을 받게 되자 왕은 지난 일을 상기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놈은 언젠가 몰래 과인의 수레를 탔고, 게다가 '먹다 남은 복숭아 [餘桃]'를 과인에게 먹인 일도 있다.
이처럼 한 번 애정을 잃으면 이전에 칭찬을 받았던 일도 오히려 화가 되어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연목구어(緣木求魚)

나무에 올라 고기를 구하듯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함.
전국시대인 주(周)나라 신정왕(愼?王) 3년(BC 318), 양(梁 : 魏)나라 혜왕(惠王)과 작별한 맹자(孟子)는 제(齊)나라로 갔다. 당시 나이 50이 넘은 孟子는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인의(仁義)를 치세의 근본으로 삼는 왕도 정치론(王道政治論)을 유세 (遊說) 중이었다.
"전하의 대망(大望)이란 무엇입니까?"
선왕은 웃기만 할 뿐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맹자 앞에서 패도(覇 道)를 논하기가 쑥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맹자는 짐짓 이런 질문을 던져 선왕의 대답을 유도하였다.
"전하,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옷, 아니면 아름다운 색(色)이 부 족하시기 때문입니까?"
"과인에겐 그런 사소한 욕망은 없소."
선왕이 맹자의 교묘한 화술에 끌려들자 맹자는 다그치듯 말했다.
"그러시다면 전하의 대망은 천하통일을 하시고 사방의 오랑캐들 까지 복종케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까? 하오나 종래의 방법(무력)으로 그것(천하통일)을 이 루려 하시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緣木求魚]'과 같습니다."
'잘못된 방법[武力]으론 목적[天下統一]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을 듣자 선왕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니, 그토록 무리한 일이오?"
"오히려 그보다 더 심합니다.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일 은 물고기만 구하지 못할 뿐 후난(後難)은 없습니다. 하오나 패도(覇道)를 좇다가 실패하는 날에는 나라가 멸망하는 재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曰 王之所大欲 可得聞與 王笑而不言 曰 爲肥甘 不足於口與 輕煖不足 於體與 抑爲采色 不足視於目與 曰 吾不爲是也 曰 然則 王之所大欲 可知已 欲?土地 朝秦楚 `?中國而撫四夷也 以若所爲 求若所欲 猶緣木而求 魚也 王曰 若是其甚與 曰 殆有甚焉 緣木求魚 雖不得魚 無後災.

오리무중(五里霧中)

짙은 안개 속에 있어 방향을 알 수 없음과 같이, 무슨 일에 대해 알 길이 없음의 비유
후한(後漢) 순제(順帝) 때, 학문이 뛰어난 장해(張楷)라는 선비가 있었 다. 순제가 여러 번 등용하려 했지만 그는 병을 핑계대고 끝내 출사(出仕)치 않았다.
장해(張楷)는 "春秋" '古文尙書'에 통달한 학자로서 평소 거느리고 있 는 문하생만 해도 100명을 웃돌았다. 게다가 전국 각처의 숙유(夙儒)들을 비롯하여 귀족, 고관대작, 환관(宦官)들까지 다투어 그의 문을 두드렸으나 그 는 이를 싫어하여 화음산(華陰山) 기슭에 자리한 고향으로 낙향하고 말았다. 그러자 장해(張 楷)를 좇아온 문하생과 학자들로 인해 그의 집은 저자를 이루다시피 붐볐다. 나중에는 화음 산 남쪽 기슭에 장해(張楷)의 자(字)를 딴 공초(公超)라는 저잣거리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장해(張楷)는 학문뿐만 아니라 도술(道術)에도 능하여 쉽사리 '오리무(五里霧)'를 만들었다고 한다. 즉 방술(方術)로써 사방 5리에 안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장해(張楷)는 성격이 도술을 좋아하여, 능히 5里 안의 안개를 지을 수 가 있었 다. 그때에 관서(關西) 사람인 배우(裵優)가 또한 능히 3里의 안개를 일으킬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장해(張楷)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제자로 들어가 배우기를 바 랬지만 장해(張楷)는 모습을 숨겨서 그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張楷 性好道術 能作五里霧 時關書人裵優亦能爲三里霧 自以不如楷從學 之 楷避不肯見.

오손공주(烏孫公主)

정략 결혼의 희생이 된 슬픈 운명의 여인.
오손은 전한(前漢) 때 서역(西域) 지방에 할거하던 터키계(系)의 유목 민족으로, 그 세력권은 천산(天山) 산맥 북쪽의 이시크를 호수 부근으로부터 이리하(伊犁河: 일리 강) 유역의 분지를 포함하여 아랄해로 흘러 들어가는 시르 강 상류의 나린 강 계곡에 있던 적곡성(赤谷城:본거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오손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성했던 흉노는 북방 몽 골 땅을 근거지로 삼고 한나라를 끊임없이 침범했다. 그래서 한나라 7대 황제인 무제(武帝) 는 흉노를 무찌르기 위해 건원(建元) 26년(B.C. 115) 장건(張騫)을 오손에 보내 동맹을 맺었 다. 그리고 10년 후 무제의 형인 강도왕(江都王)의 딸 세군(細君)을 공주로 꾸며 오손왕에게 출가시킴으로써 동맹은 더욱 굳어졌다.
이리하여 흉노는 한나라와 오손의 협공에 견디지 못하고 서역은 물론 한나라의 변경으로부터 북방 멀리 쫓겨가고 말았다. 그러자 그때까지 흉노의 지배하에 있던 서역 50여 이민족의 소국들은 한나라를 상국으로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한나라는 이들 나 라의 이반을 막기 위해 구자(龜玆:쿠차)에 감독 사찰 기관으로서의 서역 도호부(西域都護府) 를 두었다. 건국 이후 100년 이상 시달려 온 흉노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먼 이국의 이민족에게 주어진 오손 공주는 망향의 노래를 부르며 슬픔의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오십 보 도망친 사람이 백 보 도망친 사람을 비웃는다는 뜻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론 마찬가지라는 말.
전국 시대인 기원전 4세기 중엽, 위(魏)나라 혜왕(惠王)은 진(秦)나라 의 압박에 견디다 못해 도읍을 대량(大梁)으로 옮겼다(이후 양나라라고도 불렸음). 그러나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도 늘 패하는 바람에 국력은 더욱 떨어졌다. 그래서 혜왕은 국력 회 복을 자문하기 위해 당시 제후들에게 왕도 정치론을 유세중인 맹자를 초청했다.
선생이 천리 길도 멀다 않고 이렇게 와 준 것은 과인에게 부국 강병 (富國强兵)의 비책(秘策)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 아니겠소?
전하, 저는 귀국의 부국 강병과 상관없이 인의(仁義)에 대해 아뢰고자 왔나이다.
백성을 생각하라는 선생의 인의의 정치라면 과인은 평소부터 힘써 베 풀어 왔소. 예컨대 하내(河內) 지방에 흉년이 들면 젊은이들을 하동(河東) 지방으로 옮기고, 늙은이와 아이들에게는 하동에서 곡식을 가져다가 나누어주도록 하고 있소. 그와 반대로 하 동에 기근이 들면 하내의 곡식으로 구호하도록 힘쓰고 있지만, 백성들은 과인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것 같지 않고, 또 이웃 나라의 백성 수가 줄어들었다는 말도 못 들었소. 대체 어찌 된 일이오?
전하께서는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에 비유해서 아뢰겠나이다. 전쟁 터에서 백병전(白兵戰)이 벌어지기 직전, 겁이 난 두 병사가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사옵니다. 그런데 오십 보를 도망친 병사가 백 보를 도망친 병사를 보고 '비겁한 놈'이라며 비웃었다 면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겠나이까?
그런 바보 같은 놈이 어디 있소? 오십 보든 백 보든 도망치기는 마찬 가지가 아니오?
그걸 아셨다면 전하, 백성들 구호하시는 전하의 목적은 인의의 정치 와 상관없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지향하는 이웃 나라와 무엇이 다르옵니까?
혜왕은 대답을 못 했다. 이웃 나라와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백성을 구호한 것을 진정으로 백성을 생각해서 구호한 양 자랑한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주" 대량(大梁) :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내 개봉(開封:카이 펑).

오월동주(吳越同舟)

사이가 나쁜 사람끼리 같은 장소와 처지에 함께 놓임.
:孫子"라는 책은 중국의 유명한 병서(兵書)로서 춘추시대 오나라의 손 무(孫武)가 쓴 것이다. 손무(孫武)는 오왕(吳王) 합려(闔閭) 때, 서쪽으로는 초(楚)나라의 도 읍을 공략하고 북방의 제(齊)나라와 진(晉)나라를 격파한 명장이기도 했다.
"孫子" '九地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병(兵)을 쓰는 법에는 아홉 가지의 지(地)가 있다. 그 구지(九 地) 중 최후의 것을 사지(死地)라 한다. 주저 없이 일어서 싸우면 살길이 있고, 기가 꺾이어 망설이면 패망하고 마는 필사(必死)의 지(地)이다.
그러므로 사지에 있을 때는 싸워야 활로(活路)가 열린다.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필사(必死)의 장(場)에서는 병사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필사적으로 싸 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유능한 장수의 용병술(用兵術)은 예컨대 상산(常山)에 서식하는 솔연(率然)이란
큰 뱀의 몸놀림과 같아야 한다. 머리를 치면 꼬리가 날아오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덤벼든다. 또 몸통을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한꺼번에 덤벼든다. 이처럼 세력을 하 나로 합치는 것이 중요하다.
옛부터 서로 적대시해 온 '오(吳)나라 사람과 월(越)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吳越同舟]' 강을 건넌다고 하자.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큰 바람이 불어 배가 뒤집히려 한다면 오나라 사람이나 월나라 사람이나 다 같이 평소의 적개심(敵愾心)을 잊고 서로 왼손, 오른손이 되어 필사적으로 도울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전차(戰車)의 말[馬]들을 서로 단단히 붙들어 매고 바퀴를 땅에 묻고서 적에게 그 방비를 파괴 당하지 않으려 해봤자 최후에 의지(依支)가 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의지(依支)가 되는 것은 오로지 필사적으로 하나로 뭉친 병사들의 마음이다."

夫吳人與越人相惡也 當其同舟而濟遇風 其相救也 如左右手.

"동의어" 오월지쟁(吳越之爭), 오월지사(吳越之思)
"유사어" 동주상구(同舟相救), 동주제강(同舟濟江), 호월동주(胡越同舟), 오월지부(吳越之富)

오합지졸(烏合之卒)

① 갑자기 모인 훈련 없는 군사. ② 규율도 통일성도 없는 군중
전한(前漢) 말, 대사마(大司馬)인 왕망(王莽)은 평제(平帝)를 시해(弑 害)하고 나이 어린 영(?)을 세워 새 황제로 삼았으나 3년 후 영(?)을 폐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잦은 정변과 실정(失政)으로 말미암아 각지에 도둑떼가 들끓었다.
이처럼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유수(劉秀) 는 즉시 군사를 일으켜 왕망(王莽) 일당을 주 벌(誅伐)하고 경제(景帝)의 후손인 유현(劉玄)을 황제로 옹립(擁立)했다. 이에 천하는 다시 한나라로 돌아갔다.
대사마가 된 유수가 이듬해 성제(成帝)의 아들 유자여(劉子輿)를 자처 하며 황제를 참칭(?稱)하는 왕랑(王郞)을 토벌하러 나서자, 상곡(上谷) 태수 경황(耿 況)은 즉시 아들인 경감(耿龕)에게 군사를 주어 평소부터 흠모하던 유수의 토벌군에 들어 갔다. 그때 손창(孫倉)과 위포(衛包)가 갑자기 행군을 거부하는 바람에 잠시 동요가 있었다.
"유자여는 한왕조(漢王朝)의 정통인 성제의 아들이라고 하오. 그 런 사람을 두고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이오?"
격노한 경감(耿龕)은 두 사람을 끌어낸 뒤 칼을 빼들고 말했다.
"왕랑은 도둑일 뿐이다. 그런 놈이 황자(皇子)를 사칭하며 난을 일으키고 있지만, 내가 장안(長安:陝西省 西安)의 정예군과 합세해서 들이치면 그까짓 '오합 지졸(烏合之卒)'은 마른 나뭇가지보다 쉽게 꺾일 것이다. 지금 너희가 사리(事理)를 모르고 도둑과 한패가 됐다간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면치 못하리라."
그날 밤, 그들은 왕랑에게로 도망치고 말았지만 경감(耿龕)은 뒤쫓지 않았다. 서둘러 유수의 토벌군에 합류한 경감(耿龕)은 많은 무공을 세우고 마침내 건위대장 군(建威大將軍)이 되었다.
우리가 돌격 기병대를 일으켜 써 오합지중(烏合之衆)을 치는 것은 썩은 고목을 꺾고 썩은 것을 깎음과 같을 뿐이다.

發突騎以?烏合之衆 如?枯腐耳.

"동의어"오합지중(烏合之衆)
"유사어"와합지중(瓦含之衆)

옥석구분(玉石俱焚)

선악의 구분 없이 함께 멸망함.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망하는 것을 <옥석구분(玉石俱焚)>이 라고 한다.
"書經" 夏書 胤征篇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불이 곤강(崑岡)에 타면 옥(玉)과 돌이 함께 탄다. 임금이 덕을 놓치 면 사나운 불길보다도 격렬하다. 그 우두머리 괴수는 죽이고 협박에 못이겨 복종한 사람들 은 벌하지 않을 것이다. 옛날에 물들어 더러워진 풍속은 모두 더불어 오직 새롭게 하리 라.
火炎崑岡 玉石俱焚 天使逸德 烈于猛火 殲厥渠魁 脅從罔治 舊梁 ?俗 咸與惟新.
'胤征'은 윤후(胤侯)가 夏나라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희화(羲和)를 치 러 나갈 때 한 선언으로, 희화를 치는 까닭을 말한 것이다.
'崑岡'은 玉을 생산하는 산의 이름이다. 만일 곤강이 불에 탄다면 玉 과 돌이 함께 타버릴 것이다. 화재는 무서운 재앙을 가져오거니와, 임금이 덕을 잃는다면 그 피해는 사나운 불길보다도 더 심하다. 따라서 지금 그 수령인 자를 쳐서 멸망시키는 것이거 니와, 억지로 가담했던 사람까지 모두 처벌하지는 않을 것이니, 함께 마음을 새롭게 하여 착 함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온고지신(溫故之新)

溫故는 '옛 것[故]을 배우다[溫]'이다. 溫에는 '배우다'는 뜻도 있다.
知新은 '새 것[新]을 알다[知]'이니 溫故之新은 '옛 것을 공부하면 새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20년 전만 해도 웬만한 집 대청에 걸려 있던 글이다.
《論語》의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알면 가히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를 줄인 말이다. 溫故는 '단순히 古典을 달달 외우는' 것이 아 니다. 현재나 미래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도리, 즉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강조한 것 이다. 이 글에서 師(스승)의 자격을 규정한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새로운 지식이 있을 때 그것을 감추고 자신만을 위하는 利己的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면 師의 자격이 없다. 師는 萬人을 위한 역할을 해야 한다.

와각지쟁(蝸角之爭)

매우 하찮은 일로 다투는 것, 또는 좁은 범위 안에서 싸우는 일.
전국시대, 양(梁:魏)나라 혜왕(惠王)은 중신들과 맹약을 깬 제(齊)나라 위왕(威王)에 대한 응징책을 논의했으나 의견이 분분했다.
그래서 혜왕은 재상 혜자(惠子)가 데려온 대진인(戴晉人)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대진인(戴晉人)은 도가자류(道家者流)의 현인(賢人)답게 이렇게 되물었다.
"전하, 달팽이라는 미물(微物)이 있는데 그것을 아십니까?"
"물론 알고 있소."
"그 달팽이의 왼쪽 촉각 위에는 촉씨(觸氏)라는 자가, 오른쪽 촉 각 위에는 만씨(蠻氏)라는 자가 각각 나라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들은 서로 영토 를 다투어 전쟁을 시작했는데 죽은 자가 수만 명에 이르고, 도망가는 적을 추격한 지 15일 만에야 전쟁을 멈추었다고 합니다."
"그런 엉터리 이야기가 어디 있소?"
"하오면, 이 이야기를 사실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전하, 이 우주 의 사방상하(四方上下)에 제한(際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끝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소."
"하오면, 마음을 그 무궁한 세계에 노닐게 하는 자에게는 사람 이 왕래하는 지상(地上)의 나라 따위는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은 하찮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으음, 과연."
"그 나라들 가운데 위(魏:梁)라는 나라가 있고, 위나라 안에 대 량(大梁:開封)이라는 도읍이 있으며, 그 도읍의 궁궐 안에 전하가 계십니다. 이렇듯 우주의 무궁에 비한다면 지금 제나라와 전쟁을 시작하려는 전하와 달팽이 촉각 위의 촉씨, 만씨가 싸우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과연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소."
대진인(戴晉人)이 물러가자, 제나라와 싸울 마음이 싹 가신 혜왕(惠 王)은 혜자(惠子)에게 힘없이 말했다.
"그 사람은 성인(聖人)도 미치지 못할 대단한 인물이오."

"원 말" 와우각상지쟁(蝸牛角上之爭)
"동의어" 와우각상(蝸牛角上), 와각지쟁(蝸角相爭), 와우지쟁(蝸牛之爭)
"유사어" 만촉지쟁(萬觸之爭)

와신상담(臥薪嘗膽)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으려고 괴롭고 어려움을 참고 견딤의 비유
춘추시대, 월왕(越王) 구천(勾踐)과 취리에서 싸워 크게 패한 오왕(吳 王) 합려(闔閭)는 적의 화살에 부상한 손가락의 상처가 악화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BC 496) 임종 때 합려는 태자인 부차(夫差)에게 반드시 구천을 쳐서 원수를 갚으라고 유명(遺命)했다.
오왕이 된 부차는 부왕(父王)의 유명을 잊지 않으려고 '섶 위에서 잠 을 자고[臥薪], 자기 방을 드나드는 신하들에게는 방문 앞에서 부왕의 유명을 외치게 했다.
"부차야, 월왕 구천이 너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때마다 부차는 임종 때 부왕에게 한 그대로 대답했다.
"예, 결코 잊지 않고 3년 안에 꼭 원수를 갚겠나이 다."
이처럼 밤낮 없이 복수를 맹세한 부차는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면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 사실을 안 월왕 구천은 참모인 범려(范?)가 간(諫)하는 것도 듣지 않고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월나라 군사는 복수심에 불타는 오나라 군사 에 대패하여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갔다. 오나라 군사가 포위하자 진퇴양난에 빠진 구천은 범려의 헌책(獻策)에 따라 우선 오나라의 재상 백비(伯?)에게 많은 뇌물을 준 뒤 부 차에게 신하가 되겠다며 항복을 청원했다.
구천은 오나라의 속령(屬領)이 된 고국으로 돌아오자 항상 곁에다 쓸 개를 놔 두고 앉으나 서나 그 쓴맛을 맛보며[嘗膽], 회계의 치욕[會稽之恥]을 상기(想起)했다. 그리고 구천 부부는 함께 밭갈고 길쌈하는 농군이 되어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며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회계의 치욕으로부터 12년이 지난 후 구천은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로 쳐들 어갔다. 그로부터 역전(曆戰) 7년만에 오나라의 도읍 고소(姑蘇 : 蘇州)에 육박한 구천은 오왕 부차를 굴복시키고 마침내 회계의 치욕을 씻었다. 부차는 용 동(甬東 : 折江省 定河)에서 여생을 보내라는 구천의 호의를 사양하고 자결했다.

"유사어" 회계지치(會稽之恥), 절치액완(切齒扼 腕)

완벽(完璧)

① 흠이 없는구슬[壁:환상(環狀)의 옥(玉)]. 결점 없이 훌륭함. ② 빌려 온 물건을 온전히 돌려보냄.
전국 시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화씨지벽(和氏之壁)이라는 천 하명옥(天下名玉)을 가지고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은 어떻게든 화씨지벽을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곧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성(城) 15개와 맞바꾸자'고 제의했다.
혜문왕에게는 실로 난처한 문제였다. 제의를 거절하면 당장 쳐들어 올 것이고 화씨지벽을 넘겨주면 그냥 빼앗아 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혜문왕은 중신들을 소집하여 의논했다.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결국 강자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다 하여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혜문왕은 중신들에게 물었다.
사신으로는 누가 적임자일 것 같소?
그러자 대부인 목현(繆賢)이 말했다.
신의 식객에 지모와 담력이 뛰어난 인상여(藺相如)라는 자가 있사온 데 그 자라면 차질 없이 중임을 완수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이리하여 사신으로 발탁된 인상여는 소양왕을 알현하고 화씨지벽을 바쳤다. 화씨지벽을 손에 들고 살펴보던 소양왕은 감탄하여 희색이 만면했으나 약속한 15개 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내비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예상했던 인상여는 조용히 말했다.
전하, 그 화씨지벽에는 흠집이 있사온데 그것을 외신(外臣)에게 주시 면 가르쳐 드리겠나이다.
소양왕이 무심코 화씨지벽을 건네주자 인상여는 그것을 손에 든 채 궁궐 기둥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소양왕을 노려보며 말했다.
전하께서 약속하신 15개 성을 넘겨주실 때까지 이 화씨지벽은 외신이 갖고 있겠나이다. 만약 안 된다고 하시면 화씨지벽은 외신의 머리와 함께 이 기둥에 부딪쳐 깨지고 말 것이옵니다.
화씨지벽이 깨질까 겁이 난 소양왕을 일단 숙소로 돌려보냈다. 인상 여는 숙소에 돌아오자 화씨지벽을 부하에게 넘겨주고 서둘러 귀국시켰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소양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당장 인상여를 잡아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를 죽였 다가는 신의 없는 편협한 군왕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 같아 그대로 곱게 돌려보냈다.
이리하여 화씨지벽은 '온전한 구슬[完璧]'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인상 여는 그 공으로 상대부(上大夫)에 임명되었다.

요동지시(遼東之豕)

'요동의 돼지'라는 뜻으로, 견문이 좁고 오만한 탓에 하찮은 공을 득의 양 양하여 자랑함의 비유.
후한(後漢) 건국 직후, 어양태수(漁陽太守) 팽총(彭寵)이 논공 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꾀하자 대장군(大將軍) 주부(朱浮)는 그의 비리를 꾸짖는 글을 보냈다.
"그대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옛날에 요동 사람이 그 의 돼지가 대가리가 흰[白頭] 새끼를 낳자 이를 진귀하게 여겨 왕에게 바치려고 하동(河東) 까지 가 보니 그곳 돼지는 모두 대가리가 희므로 크게 부끄러워 얼른 돌아갔다.' 지금 조정 에서 그대의 공을 논한다면 폐하[光武帝]의 개국에 공이 큰 군신 가운데 저 요동의 돼지에 불과함을 알 것이다."
팽총은 처음에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반군(叛軍) 을 토벌하기 위해 하북(河北)에 포진(布陣)하고 있을 때에 3000여 보병을 이끌고 달려와 가 세했다. 또 광무제가 옛 조(趙)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을 포위 공격했을 때에는 군량 보급의 중책(重責)을 맡아 차질 없이 완수하는 등 여러 번 큰공을 세워 좌명지신(佐命之臣:천자를 도와 천하 평정의 대업을 이루게 한 공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오만 불손한 팽총은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일컫고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가 2년 후 토벌 당하고 말았다.

요령부득(要領不得)

사물의 중요한 부분을 잡을 수 없다는 뜻으로, 말이나 글의 요령을 잡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
전한(前漢) 7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의 일이다. 당시 만리장성 밖은 수수께끼의 땅이었다. 그러나 영맹한 흉노는 동쪽 열하(熱河)에서부터 서쪽 투르키스탄(중앙 아시아 지방)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세력을 펴고 빈번히 한나라를 침범 약탈했다. 그래서 무제는 기원전 2세기 중반에 흉노에게 쫓겨 농서[감숙성(甘肅省)]에서 서쪽 사막 밖으로 옮 겨간 월지(月氏:大月氏)와 손잡고 흉노를 협공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월지에 다녀올 사신 을 공모한 결과 장건(張騫:?∼B.C. 114)이란 관리가 뽑혔다.
건원(建元) 3년(B.C. 138), 장건은 100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서쪽 이리(伊犁:위구르 자치구 내)란 곳에 있다는 것밖에 모르는 월지를 찾아 장안[長安:서안(西 安)]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농서를 벗어나자마자 흉노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때부터 흉노 와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장건은 활짝 트인 성격으로 해서 흉노에게 호감을 사 장가도 들 고 아들까지 낳았다. 그러나 그는 잠시도 탈출할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포로가 된 지 10년 이 지난 어느 날, 장건은 처자와 일행을 데리고 서방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우뚝 솟은 천산(天山) 산맥의 남쪽 기슭을 따라 타림 분지를 횡단한 그들은 대완국(大宛國), 강거국(康 居國)을 거쳐 마침내 아무 강 북쪽에 있는 월지의 궁전에 도착했다.
장건은 곧 월지의 왕을 알현하고 무제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왕의 대답은 의외로 부정적이었다.
"월지는 서천(西遷) 이후 기름진 이 땅에서 평화롭게 살아왔소. 그러 니 백성은 이제 구원(舊怨)을 씻기 위한 그런 쓸데없는 전쟁은 원치 않을 것이오."
장건은 여기서 단념하지 않고 당시 월지의 속국인 대하국(大夏國)까 지 찾아가 월지를 움직이려 했으나 허사였다. 이 일을 사서(史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끝내 사명으로 하는 월지의 '요령을 얻지 못한 채[要領不得]' 체류한 지 1년이 지나 귀국 길에 올랐다."
장건은 귀국 도중에 또 흉노에게 잡혀 1년 넘게 억류되었으나 부하 한 사람과 탈출, 13년만에 장안으로 돌아왔다(B.C. 126). 그로부터 3년 후 박망후(博望侯)에 봉해진 장건은 계속 서역(西域) 사업에 힘썼는데 그의 대여행은 중국 역사에 많은 것을 남 기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동서의 교통이 트이면서 서방으로부터 명마(名馬), 보석, 비파(琵 琶), 수박, 석류, 포도 등이 들어오고 한나라로부터는 금과 비단 등이 수출되기 시작했다. 이 른바 '실크 로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주" 대완국 : 중앙 아시아 페르가나 지방에 있었던 작은 나라.
강거국 : 아랄해 동쪽 시르강 하류의 키르기스 초원에 있었던 터키계 (系) 유목 민족의 작은 나라.
대하국 : 일명 박트리아 왕국. 힌두쿠시 산맥의 계곡, 아무 강 상류의 좁은 지역에 있었던 나라.

우공이산(愚公移山)

우공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 어떤 큰 일이라고 끊임없이 노력하면 반드 시 이루어짐의 비유.
춘추 시대의 사상가 열자[列子:이름은 어구(禦寇)]의 문인들이 열자의 철학 사상을 기술한 "열자(列子)"〈탕문편(湯問篇)〉에 다음과 같은 우화가 실려 있다.
먼 옛날 태행산(太行山)과 왕옥산(王玉山) 사이의 좁은 땅에 우공(愚 公)이라는 90세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사방 700리에 높이가 만 길이나 되는 두 큰 산 이 집 앞뒤를 가로막고 있어 왕래에 장애가 되었다. 그래서 우공은 어느 날, 가족을 모아 놓 고 이렇게 물었다.
"나는 너희들이 저 두 산을 깎아 없애고, 예주(豫州)와 한수(漢水) 남 쪽까지 곧장 길을 내고 싶은데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모두 찬성했으나 그의 아내만은 무리라며 반대했다.
"아니, 늙은 당신의 힘으로 어떻게 저 큰 산을 깎아 없앤단 말예요? 또 파낸 흙은 어디다 버리고?"
"발해(渤海)에 갖다 버릴 거요."
이튿날 아침부터 우공은 세 아들과 손자들을 데리고 돌을 깨고 흙을 파서 삼태기로 발해까지 갖다 버리기 시작했다. 한 번 갔다 돌아오는데 꼬박 1년이 걸렸다. 어느 날 지수라는 사람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노인이 정말 망녕'이라며 비웃자 우공은 태연히 말했다.
"내가 죽으면 아들이 하고, 아들은 또 손자를 낳고 손자는 또 아들 을…‥. 이렇게 자자손손(子子孫孫) 계속하면 언젠가는 저 두 산이 평평해질 날이 오겠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란 것은 두 산을 지키는 사신(蛇神)이었다. 산이 없어지면 큰일이라고 생각한 사신은 옥황 상제(玉皇上帝)에게 호소했다. 그러자 우공의 끈기 에 감동한 옥황상제는 역신(力神) 과아의 두 아들에게 명하여 각각 두 산을 업어 태행산은 삭동(朔東) 땅에, 왕옥산은 옹남(雍南) 땅에 옮겨 놓게 했다. 그래서 두 산이 있었던 기주(冀 州)와 한수(漢水) 남쪽에는 현재 작은 언덕조차 없다고 한다.

원교근공(遠交近攻)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략하는 정책.
전국 시대, 위(魏)나라의 책사(策士)인 범저(范雎)는 제(齊)나라와 내 통하고 있다는 모함에 빠져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진(秦)나라의 사신 왕계(王稽) 를 따라 함양(咸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은 진나라는 '알을 쌓아 놓은 것처럼 위 태롭다[累卵之危]'고 자국(自國)의 정사를 혹평한 범저를 환영하지 않았다. 따라서 범저는 소양왕에게 자신의 장기인 변설(辯舌)을 펼쳐 볼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소양왕 36년(B.C. 271), 드디어 범저에게 때가 왔다. 당시 진나 라에서는 소양왕의 모후인 선태후(宣太后)의 동생 양후(穰侯)가 재상으로서 실권을 잡고 있 었는데, 그는 제나라를 공략하여 자신의 영지인 도(陶)의 땅을 확장하려 했다. 이 사실을 안 범저는 왕계를 통해 소양왕을 알현하고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한(韓),위(魏) 두 나라를 지나 강국인 제나라를 공략한다는 것 은 득책(得策)이 아닌 줄 아옵니다. 적은 병력을 움직여 봤자 제나라는 꿈쩍도 않을 것이옵 고, 그렇다고 대군(大軍)을 출동시키는 것은 진나라를 위해 더욱 좋지 않사옵니다. 가능한 한 진나라의 병력을 아끼고 한,위 두 나라의 병력을 동원코자 하시는 것이 전하의 의도인 듯하오나 동맹국을 신용할 수 없는 이 마당에 타국 너머 멀리 떨어져 있는 제나라를 공략한 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옵니다. 지난날 제나라의 민왕이 연(燕)나라의 악의(樂毅)장군 에게 패한 원인도 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초(楚)나라를 공략하다가 과중한 부담을 안게 된 동맹국이 이반(離反)했기 때문이옵니다. 그때 덕을 본 것은 이웃 나라인 한나라와 위나라이 온데, 이는 마치 '적에게 병기를 빌려주고[借賊兵(차적병)] 도둑에게 식량을 갖다 준 꼴[齎盜 糧(재도량)]'이 되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나이다.
지금 전하께서 채택하셔야 할 계책으로는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 까운 나라를 공략하는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이 상책(上策)인 줄 아옵니다. 한 치의 땅을 얻으면 전하의 촌토(寸土)이옵고 한 자의 땅을 얻으면 전하의 척지(尺地)가 아니옵니까? 이 해득실(利害得失)이 이토록 분명 하온데 굳이 먼 나라를 공략하는 것은 현책(賢策)이 아닌 줄 아옵니다."
이 날을 계기로 소양왕의 신임을 얻은 범저는 승진 끝에 재상이 되어 응후(應侯)에 봉해졌고, 그의 지론인 원교근공책은 천하 통일을 지향하는 진나라의 국시(國 是)가 되었다.

원수불구근화(遠水不救近火)

'먼데 있는 물은 가까운 곳에서 난 불을 끄지 못한다'는 뜻으로, 먼 데 있으면 급할 때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
"한비자(韓非子)"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춘추 시대, 노(魯)나라 목공(穆公)은 아들들에게도 진(晉)나라와 형 (荊)나라를 섬기게 했다. 그 무렵 노나라는 이웃 나라인 강국 제(齊)나라의 위협을 받고 있 었다. 그래서 위급할 때 진나라와 형나라 같은 강국의 도움을 받으려는 속셈에서였다. 목공 의 그런 속셈을 이서가 간했다.
"사람이 물에 빠진 경우, 먼 월(越)나라에서 사람을 청해다가 구하려 한다면 월나라 사람이 아무리 헤엄을 잘 친다 해도 때는 이미 늦사오며, 또 집에 불이 난 경우, 발해(渤海)와 같이 먼바다에서 물을 끌어다가 끄려 한다면 바닷물이 아무리 많다 해도 때는 역시 늦사옵니다.
이처럼 '먼 데 있는 물은 가까운 곳에서 난 불을 끄지 못한다[遠水不救近 火]'고 했듯이 노나라가 이웃 제나라의 공격을 받았을 경우, 먼 진나라와 형나라가 강국이긴 해도 노나라의 위난은 구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원입골수(怨入骨髓)

원한이 뼈에 사무친다는 뜻으로, 원한이 마음 속 깊이 맺혀 잊을 수 없다는 말.
춘추시대 오패의 한 사람인 진(秦)나라 목공(繆公)은 중신 백리해(百 里奚)와 건숙(蹇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 장군에게 정(鄭)나라를 치라고 명했다. 진나라 군사가 주(周)나라의 북문에 이르렀을 때 마침 이곳에 소를 팔러 온 정나라의 소장수인 현 고(弦高)는 진나라 장군 앞으로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정나라 주상(主上)께서는 장병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소생에게 소 12 마리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어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 말을 듣자 생각이 달라진 세 장군은 공격 목표를 바꾸어 진(晉)나 라의 속령(屬領)인 활(滑)로 쳐들어갔다.
당시 진나라는 문공(文公)이 죽어 국상(國喪)중에 있었으나 태자[太 子:후의 양공(襄公)]는 즉시 용장(勇將)을 파견하여 침략군을 섬멸했다. 포로가 된 세 장군은 태자 앞에 끌려 나왔다. 그러자 목공의 딸인 태자의 모후(母后)는 그들의 구명을 청원했다.
"저들을 죽이면 강국인 진나라 목공은 '원한이 뼈에 사무쳐[怨入骨 髓]' 반드시 이 나라를 칠 것이오. 그러나 저들을 살려 보내는 게 좋겠소."
태자는 모후의 말을 옳게 여겨 세 장군을 모두 풀어 주었다.

월단평(月旦評)

'매달 첫날의 평'이란 뜻으로, 인물에 대한 비평을 일컫는 말.
후한(後漢) 말, 12대 황제인 영제(靈帝:167∼189) 17년(184)에 일어난 '황건(黃巾)의 난(亂)' 때 큰 공을 세운 조조(曹操)가 아직 두각을 나타내기 전 일이 다.
그 무렵, 여남(汝南:호북성 내) 땅에 허소와 그의 사촌 형 허정(許靖) 이라는 두 명사가 살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매달 첫날[月旦]'이면 허소의 집에서 향당(鄕 黨:향-1만 2500집, 당-500집)의 인물을 뽑아 비평했는데 그 비평이 매우 적절함으로 해서 평판이 높았다. 그래서 당시 '여남의 비평'으로 불리던 이 비평을 들으려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날, 조조가 허소를 찾아와서 비평해 주기를 청했다. 그러 나 난폭자로 소문난 조조의 청인지라 선뜻 응하기가 어려웠다. 조조가 재촉하자 허소는 마 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대는 태평한 세상에서는 유능한 관리이되,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간 웅(姦雄)이 될 인물이오."
이 말을 듣고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황건적(黃巾賊)을 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고 한다.

월하빙인(月下氷人)

월하노(月下老)와 빙상인(氷上人)이 합쳐진 말로, '결혼 중매인'을 일컬음.
⑴《續幽怪錄》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당나라 2대 황제인 태종(太宗) 때, 위고(韋固)라는 젊은이가 여행 중 에 송성(宋城 : 河南省 所在)에 갔을 때, '달빛 아래 한 노인[月下老]'이 손에 빨간 끈[赤繩] 을 든 채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위고가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묻자 그 노인 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세상 혼사에 관한 책인데, 여기 적혀 있는 남녀를 이 빨간 끈으로 한 번 매어 놓으면 어떤 원수지간이라도 반드시 맺어진다네."
"그럼, 지금 제 아내감은 어디에 있습니까?"
"음, 이 송성(宋城)에 있구먼, 성 북쪽에서 채소를 팔고 있는 진 (陳)이란 여인네의 어린아이야."
위고는 약간 기분이 언짢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 자리 를 떠났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뒤 상주(尙州 : 하남성)에서 벼슬길에 나아간 위고는 그곳 태수(太守)의 딸과 결혼했다. 아내는 17세로 미인이었다. 어느날 밤 위고가 아 내에게 신상(身上)을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실은 태수님의 양녀입니다. 친아버지는 송성에서 벼슬을 사시다가 돌아가셨지요. 그 때 저는 젖먹이였는데 마음씨 착한 유모가 성 북쪽 거리에서 채 소 장사를 하면서 저를 길러 주었답니다."

⑵《晉書》'索眈篇'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晉)나라에 색탐(索眈)이라는 점쟁이가 있었다. 어느날 영고책(令孤 策)이라는 사람이 몽 점(夢占)을 치러 왔다.
"꿈 속에서 나는 얼음 위에 서서 얼음 밑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 를 했습니다."
그러자 색탐(索眈)은 이렇게 해몽(解夢)했다.
"얼음 위는 곧 양(陽)이요, 얼음 밑은 음(陰)인데 양과 음이 이 야기 했다는 것은 '얼음 위에 선 사람[氷上人]'인 그대가 결혼 중매를 서게 될 조짐이오. 성 사(成事) 시기는 얼음이 녹는 봄철이고…."
그 후 얼마 안되어 과연 영고책은 태수의 부탁을 받고 태수의 아들과 장(張)씨의 딸을 중매 서서 이듬해 봄에 결혼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동의어" 월하노(月下老), 빙상인(氷上人), 빙인(氷人)
"유사어" 적승(赤繩)

위편삼절(韋編三絶)

① '독서에 열심함'의 뜻. ② 한 책을 되풀이하여 숙독함의 비유
현대식으로 말하면, 한 권의 책을 몇십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어서 책 을 철(綴)한 곳이 닳아 흩어진 것을 다시 고쳐 매어서 애독(愛讀)을 계속하는 것을 '韋編三 絶'이라고 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책이 소위 몇십 장의 죽간(竹簡)을 끈으로 철하여 만들었다. 그런데 그 끈이 몇 번이나 끊어지도록 책을 계속하여 읽는 것을 '韋編三絶'이라고 한다.
'三絶'이란 딱 세 번에 한정된 수가 아니라,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끊어진다 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고대 중국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로 알려진 前漢의 사마천(司 馬遷)이 쓴《史記》가운데 孔子傳, 즉 孔子世家에 실려 있는 말로, 공자가 만년에 역경(易 經)을 애독하여 韋編三絶에 이른 데서 나왔다고 한다.
孔子가 晩年에 易經을 좋아하여, 단(彖) 계(繫) 상(象) 설괘 (說卦) 문언(文言)을 서(序)하고, 易經을 읽어 韋編三絶하였다. 말하기를, '내가 몇 해를 빌어 이와같이 하면, 나는 易經에 있어서 곧 빛나게 될 것이다.'

孔子晩而喜易 徐彖繫象說卦文言 獨易韋編三絶 曰 假我數年 若是 我於易則彬彬矣.

유비무환(有備無患)

준비가 있으면 근심할 것이 없음
'열명(說命)'은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이란 어진 재상을 얻게 되는 경위와 부열의 어진 정사에 대한 의견과 그 의견을 실천하게 하는 내용을 기록한 글인데, 이 '有備無患'이란 말은 부열이 고종 임금에게 한 말 가운데 들어 있다. 그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생각이 옳으면 이를 행동으로 옮기되 그 옮기는 것을 시기에 맞게 하십시오. 그 능(能)한 것을 자랑하게 되면 그 공(功)을 잃게 됩니다. 오직 모든 일은 다 그 갖춘 것이 있는 법이니 갖춘 것이 있어야만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處善以動 動有厥時 矜其能 喪厥功 惟事事 及其有備 有備無 患.

또,《春秋左氏傳》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진나라 도승이 정나라에서 보낸 값진 보물과 가희(佳姬)들을 화친(和 親)의 선물로 보내오자 이것들을 위강에게 보냈다. 그러자 위강은 완강히 거부하면서 이렇 게 말했다.
"평안히 지낼 때에는 항상 위태로움을 생각하여야 하고 위태로 움을 생각하게 되면 항상 준비가 있어야 하며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근심과 재난이 없 을 것입니다."

居安思危 思危 則有備 有備則無患.

은감불원(殷鑑不遠)

멸망의 선례는 가까운 곳에 있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실패를 자신의 거울로 삼으라'는 말.
고대 중국 하(夏) 은(殷) 주(周)의 3왕조 중 殷王朝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은 원래 지용을 겸비한 현주(賢主)였으나, 그를 폭군 음주(淫主)로 치닫게 한 것은 정복한 북방 오랑캐의 유소씨국(有蘇氏國)에서 공물로 보내온 달기(?己)라 는 희대의 요녀 독부(妖女毒婦)였다.
주왕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막대한 국고(國庫)를 기울여 시설한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주야장천(晝夜長川) 음주폭락(飮酒暴樂)으로 나날 을 보내다가 결국
그는 가렴주구(苛斂誅求)에다가 충간자(忠諫者)를 처형하기 위한 포락 지형(?烙之刑)을 일삼는 악왕(惡王)의 으뜸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주왕(紂王)의 포학(暴虐)을 간(諫)하다가 많은 충신이 목숨을 잃는 가 운데 왕의 보좌역인 삼공(三公) 중의 구후(九侯)와 악후(鄂侯)는 처형 당하고 서백(西 伯)은 유폐되었다.
서백은 그 때, '600여 년 전에 은왕조(殷王朝)의 시조인 탕왕(湯 王)에게 주벌(誅伐) 당한 하왕조(夏王朝)의 걸왕(桀 王)을 거울 삼아 그 같은 멸망의 전철(前轍)을 밟지 말라'고 충 간(忠諫)하다가 화(禍)를 당했는데 그 간언(諫言)이《詩經》'大雅篇'의 '탕시(湯詩)'에 다음 과 같이 실려 있다.
은나라 왕이 거울로 삼아야 할 선례(先例)는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 걸왕 때에 있네.

殷鑑不遠 在夏后之世.

삼공(三公)에 이어 삼인(三仁)으로 불리던 미자(微子) 기자(箕子) 비간(比干) 등 세 충신도 간했으나 주색에 빠져 이성을 잃은 주왕은 걸왕의 비극적인 말로 (末路)를 되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마침내 원성(怨聲)이 하늘에 닿은 백성과 제후들 로부터 이반(離叛) 당한 주왕은 서백의 아들 발(發)에게 멸망 당하고 말았다.

"원 말" 재하후지세(在夏后之世)
"동의어" 상감불원(商鑑不遠)
"유사어" 복차지계(覆車之戒), 복철(覆轍)

읍참마속(泣斬馬謖)

'울면서 마속을 벤다'는 뜻으로 '법의 공정을 지키기 위해 사사로운 정을 버림'을 비유.
조조(曹操)가 급파한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司馬懿)는 20만 대군으로 기산의 산야(山野)에 부채꼴[扇形]의 진을 치고 제갈량의 침공군과 대치했다. 이 '진(陣)'을 깰 제갈량의 계책은 이미 서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인 만큼 군량 수 송로(軍糧輸送路)의 요충지인 '가정(街亭 :韓中의 東쪽)'을 수비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가정(街亭)을 잃으면 촉나라의 중원(中原) 진출의 웅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책(重責)을 맡길 만한 장수가 마땅치 않아서 제갈 량은 고민했다.
그 때 마속(馬謖:190-228)이 그 중책을 자원하고 나섰다. 그러나 노회(老獪)한 사마의와 대결하기에는 아직 어렸다. 그래서 제갈량 이 주저하자 마속은 거듭 간청했다.
"다년간 병략(兵略)을 익혔는데 어찌 가정(街亭) 하나 지켜 내지 못하겠습니까? 만약 패하면 저는 물론 일가 권속(一家眷屬)까지 참형을 당해도 결코 원망치 않겠습니다."
"좋다. 그러나 군율(軍律)에는 두 말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서둘러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지형부터 살펴 보았다. 삼면이 절벽을 이룬 산이 있었다. 제갈량의 명령은 그 산기슭의 협로(峽路)를 사수만 하라는 것이었으나 마 속은 욕심을 내어 적을 유인하여 역공할 생각으로 산 위에다 진을 쳤다. 그러나 마속의 생 각과 달리 위나라 군사는 산기슭을 포위만 한 채로 산 위를 공격해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자 산 위에 서는 식수가 끊겼다. 다급해진 마속은 전병력을 동원해 포위망을 돌 파하려 했으나 위나라 용장 장합(張?)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마속의 실패로 전군(全軍)을 한중(韓中)으로 후퇴시킨 제갈량은 마속 에게 중책을 맡겼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 군율을 어긴 그를 참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5월, 마속이 처형되는 날이 왔다. 때마침 성도(成都)에서 연락관으로 와 있 던 장완(張?)은 '마속 같은 유능한 장수를 잃는 것은 나라의 손실'이라고 설득했으 나 제갈량은 듣지 않았다. 마속이 형장으로 끌려가자 제갈량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울었다고 한다.

의심암귀(疑心暗鬼)

의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있지도 않은 귀신이 나오는 듯이 느껴진다는 뜻. 곧 ① 마음속에 의심이 생기면 갖가지 무서운 망상이 잇달아 일어나 불안해짐. ② 선입관은 판단을 빗나가게 함.
① 어떤 사람이 소중히 아끼던 도끼를 잃어버렸다. 도둑 맞은 게 틀 림없다는 생각이 들자 아무래도 이웃집 아이가 수상쩍다. 길에서 마주쳤을 때에도 슬금슬금 도망갈 듯한 자세였고 안색이나 말투도 어색하기만 했다.
'내 도끼를 훔쳐 간 놈은 틀림없이 그 놈이야.'
이렇게 믿고 있던 그는 어느 날, 저번에 나무하러 갔다가 도끼를 놓 고 온 일이 생각났다. 당장 달려가 보니 도끼는 산에 그대로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이웃집 아이를 보자 이번에는 그 아이의 행동거지(行動擧止)가 별로 수상쩍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② 마당에 말라죽은 오동나무를 본 이웃 사람이 주인에게 말했다.
"집안에 말라죽은 오동나무가 있으면 재수가 없다네."
주인이 막 오동나무를 베어 버리자 그 사람이 또 나타나서 땔감이 필 요하다며 달라고 했다. 주인은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났다.
"이제 보니 땔감이 필요해서 날 속였군. 이웃에 살면서 어떻게 그런 엉큼한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목지신(移木之信)

위성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들을 믿게 한다는 뜻. 곧 ① 남을 속이지 아 니한 것을 밝힘. ② 약속을 실행함.
진(秦)나라 효공(孝公) 때 상앙(?∼B.C. 338)이란 명재상이 있었다. 그 는 위(衛)나라의 공족(公族) 출신으로 법률에 밝았는데 특히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부국 강병책(富國强兵策)을 펴 천하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정치가로 유명했다.
한 번은 상앙이 법률을 제정해 놓고도 즉시 공포하지 않았다. 백성들 이 믿어 줄지 그것이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앙은 한 가지 계책을 내어 남문에 길 이 3장(三丈:약 9m)에 이르는 나무를 세워 놓고 이렇게 써 붙였다.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겨 놓는 사람에게는 십금(十金)을 주리라."
그러나 아무도 옮기려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오십 금(五十金)을 주겠다고 써 붙였더니 이번에는 옮기는 사람이 있었다. 상앙은 즉시 약속대로 오십 금을 주 었다. 그리고 법령을 공포하자 백성들은 조정을 믿고 법을 잘 지켰다고 한다.
"주" 상앙 : 전국 시대, 진나라의 명재상. 제자 백가(諸子白家)의 한 사람. 별명은 공손앙. 상군(商君). 위(衛)나라의 공족(公族) 출신. 일찍이 형명학(刑名學)을 공부하고 진나라 효공(孝公)을 섬김. 법치주의(法治主義)에 입각한 부국 강병책(富國强兵策) 을 단행하여 진나라의 국세(國勢)를 신장시킴. 효공이 죽자 그간 반감이 쌓인 귀족들의 참소 (讒訴)로 사형 당함. (?∼B.C. 338).

이심전심(以心傳心)

말이나 글로 전하지 않고 마음으로 마음에 전함.
송(宋)나라의 중 도언(道彦)이 석가 이후 고승들의 법어를 기록한《전 등록(傳燈錄)》에 보면, 석가가 제자인 가섭(迦葉)에게 말이나 글이 아니라 '以心傳心'의 방 법으로 불교의 진수(眞髓)를 전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 대해 송나라의 중 보제(普濟)의《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다음 과 같이 적혀 있다.
어느날 석가는 제자들을 영산(靈山)에 불러모았다. 그리고는 그들 앞 에서 손가락으로 '연꽃 한 송이를 집어 들고 말없이 약간 비틀어 보였다.[拈華]' 제자들은 석가가 왜 그러는지 그 뜻을 알 수 없었다.그러나 가섭만은 그 뜻을 깨닫고 '빙긋이 웃었 다.[微笑]' 그제야 석가는 가섭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 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전해 주마."

世尊在靈上會上 拈華示衆 是時衆皆寂然 惟迦葉尊者破顔微笑 世 尊云 吾有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 付囑磨訶迦 葉.

"동의어" 염화미소(拈華微笑)
"유사어"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인생조로(人生朝露)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이 덧없다는 말.
전한 무제(武帝) 때(B.C.100) 중랑장(中郞將) 소무(蘇武)는 포로 교환 차 사절단을 이끌고 흉노의 땅에 들어갔다가 그들의 내란에 말려 잡히고 말았다. 흉노의 우 두머리인 선우(單于)는 한사코 항복을 거부하는 소무를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귀국을 허락 하겠다'며 북해(北海:바이칼 호) 변으로 추방했다. 소무가 들쥐와 풀뿌리로 연명하던 어느 날, 고국의 친구인 이릉(李陵) 장군이 찾아왔다.
이릉은 소무가 고국을 떠난 그 이듬해 5000여의 보병으로 5만이 넘는 훙노의 기병과 혈전을 벌이다가 중과 부적(衆寡不敵)으로 참패한 뒤 부상, 혼절(昏絶)중에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 후 이릉은 선우의 빈객으로 후대를 받았으나 항장(降將)이 된 것이 부끄러워 감히 소무를 찾지 못하다가 이번에 선우의 특청으로 먼 길을 달려온 것이다. 이릉 은 주연을 베풀어 소무를 위로하고 이렇게 말했다.
"선우는 자네가 내 친구라는 것을 알고, 꼭 데려오라며 나를 보냈네. 그러니 자네도 이제 고생 그만하고 나와 함께 가도록 하세.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다[人生 如朝露]'고 하지 않는가."
이릉은 끝내 소무의 절조를 꺾지 못하고 혼자 돌아갔다. 그러나 소무 는 그 후(B.C.81) 소제(昭帝:무제의 아들)가 파견한 특사의 기지(機智)로 풀려나 19년 만에 다시 고국 땅을 밟았다.

일가지언(一家之言)

學者들 가운데는 누가 보아도 깜짝 놀랄 정도로 독자적인 학문체계 를 이룬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一家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 말은《史記》의 太史公自序(저자인 史馬遷이 쓴 序文)에 나온다. '略以拾遺補藝 成一家之言'(빠진 것을 모으고 보충해 간략하게 만들어 일가의 학설을 이루 었다). 宮刑을 당한 치욕을 참고 空前의 傑作인《史記》를 남긴 그로서는 당연한 自負心이 다.
역시 유명한 史書인《漢書》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通古今之變 成 一家之言'(고금의 변화에 통달해 일가를 이루었다). 따지고 보면 著者가 한 사람인 책을 읽 는 것은 모두 '一家之言'을 따르는 셈이다.
각자가 一家를 이루는 一家見을 갖도록 열심히 노력하되 학문적 맹 종(盲從)은 '學說의 對立'을 가져온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일각천금(一刻千金)

刻은 시간의 단위이다. 요즘의 15분에 해당되지만 '짧은 시간'을 의 미한다. 千金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이니 '一刻千金'(일각은 천금의 가치가 있다)은 '시간 을 아껴쓰라'는 말이다. 宋나라때 大文豪 蘇東坡의 <춘소(春宵;봄밤)>라는 詩에 나온 다. '春宵一刻値千金'(봄밤의 일각은 처금에 해당한다).
東 西洋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의 귀중함을 강조했다.
朱子는 젊은이들에게 시간을 아껴 공부할 것을 이렇게 강조했다. '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소년은 곧 노인이 되지만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일 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말라……).
田園詩人 陶淵明도 비슷한 詩를 남겼다. '盛年不重來……歲月不待人 '(한창 시절은 다시 오지 않으니……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歲月如流'(세월은 흐르는 물 같다)도 시간을 중히 여기라는 말이다.

일거양득(一擧兩得)

한 가지 일을 하여 두 가지 이익을 거둠.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때의 일이다. 중신 사마조(史馬金昔)는 어전 에서 '중원으로의 진출이야말로 조명시리(朝名市利)에 부합하는 패업(覇業)'이라며 중원으로 의 출병을 주장하는 재상 장의(張儀)와는 달리 혜문왕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신이 듣기로는 부국을 원하는 군주는 먼저 국토를 넓히는 데 힘써야 하고, 강병(强兵) 을 원하는 군주는 먼저 백성의 부(富)에 힘써야 하며, 패자(覇者)가 되기를 원하는 군주는 먼저 덕을 쌓는 데 힘써야 한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요건이 갖춰지 면 패업은 자연히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하오나, 지금 진나라는 국토도 협소하고 백성들은 빈곤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면 먼저 막강한 진나라의 군사로 촉(蜀) 땅의 오랑캐를 정벌하는 길밖에 달리 좋은 방법이 없는 줄로 압니다. 그러면 국토는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물은 쌓일 것입니다. 이야말로 '일거양득(一擧兩得)'이 아니고 무엇이 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천하를 호령하기 위해 천하의 종실(宗室)인 주(周)나라와 동맹을 맺 고 있는 한(韓)나라를 침범하면, 한나라는 제(齊)나라에 구원을 청할 게 분명하며, 더우기 주 나라의 구정(九鼎)은 초나라로 옮겨질 것입니다. 그땐 진나라가 공연히 천자를 위협한다는 악명(惡名)만 얻을 뿐입니다."
이에 혜문왕은 사마조의 진언에 따라 촉 땅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먼 저 국토를 넓혔다.

"동의어" 일거양획(一擧兩獲), 일전쌍조(一箭雙鳥), 일석이조(一石 二鳥)
"반의어" 일거양실(一擧兩失)

일망타진(一網打盡)

한꺼번에 모조리 잡음.
북송(北宋) 4대 황제인 인종(仁宗) 때의 일이다.
당시 북방에는 거란[契丹:遼]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남쪽에는 중 국의 일부였던 안남(安南 : 베트남)이 독립을 선언하는 등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는데도 인종은 연약한 외교로 일관했다. 그러나 내치(內治)에는 괄목할 만한 치적(治績)이 적지 않았다.
전한(前漢) 5대 황제인 문제(文帝)와 더불어 어진 임금으로 이름난 인 종은 백성을 사랑하고 학문을 장려했다. 그리고 인재를 널리 등용하여 문치(文治)를 폄으로 써 이른바 '경력(慶曆)의 치(治)'로 불리는 군주 정치의 모범적 성세(聖世)를 이룩했다.
이 무렵, 청렴 강직하기로 이름난 두연(杜衍)이 재상이 되었다.
당시의 관행으로는 황제가 상신(相臣)들과 상의하지 않고 독단으로 조서를 내리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내강(內降)이라 했다. 그러나 두연은 이 같은 관행은 올바른 정도(正道)를 어지럽히는 것이라 하여 내강이 있어도 이를 묵살, 보류했다가 10여 통 쯤 쌓이면 그대로 황제에게 되돌려보내곤 했다. 이러한 두연의 소행은 성지(聖旨)를 함부로 굽히는 짓이라 하여 조야(조야)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때 공교롭게도 관직에 있는 두연의 사위 소순흠(蘇舜欽)이 공금 을 유용하는 부정을 저질렀다. 그러자 평소 두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어사(御 史) 왕공진(王拱辰)은 쾌재를 부르고 소순흠을 엄히 문초했다. 그리고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모두 공범으로 몰아 잡아 가둔 뒤 재상 두연에게 이렇 게 보고했다.
"범인들은 '일망타진(一網打盡)'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유명한 두연도 재임 70일만에 재상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일의대수(一衣帶水)

한 줄기 띠와 같이 좁은 강물이나 바닷물이라는 뜻. 곧 ① 간격이 매 우 좁음. ② 강이나 해협을 격한 대안(對岸)의 거리가 아주 가까움.
서진(西晉:265∼317) 말엽, 천하는 혼란에 빠져 이른바 남북조(南北朝) 시대가 되었다. 북방에서는 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이라 일컫는 흉노(匈奴), 갈,선비(鮮卑), 강(羌), 저등 5개 이민족이 세운 열 세 나라와 세 한족국(漢族國)이 흥망을 되풀이했고, 남방 에서는 송(宋),제(齊),양(梁),진(陳:557∼589) 등 네 나라가 교체되었다.
북방의 북조 최후의 왕조인 북주(北周:577∼580)를 물려받아 수 (隋:581∼618)나라를 세운 문제(文帝:581∼604)는 마침내 남조 최후의 왕조인 진나라를 치기 로 하고 이렇게 선언했다.
"진왕(陳王)은 무도하게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도다. 이제 짐(朕)은 백성의 어버이로서 어찌 '한 줄기 띠와 같이 좁은 강물[一衣帶水]' 따위를 겁내어 그들을 죽 게 내버려 둘 수 있으랴."
양자강은 예로부터 천연의 요해(要害)로서 삼국 시대의 오(吳)나라 이 후 남안(南岸)의 건강(建康:南京)에 역대 남조의 도읍이 있었다. 문제의 명에 따라 52만의 수나라 대군은 단숨에 양자강을 건너 진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일이관지(一以貫之)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일을 꿰뚫음.
孔子께서 曾子에게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써 꿰었느니라. (參乎吾道一以貫之)" 曾子는 알아듣고 "네"하고 대답했다.
孔子께서 나가시자 문인(門人)들이 "무엇을 말씀하신 것입니 까?" 하자, 曾子는 "선생임의 말씀은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라고 대답 했다.
"論語" '衛靈公篇'에도 孔子께서 子貢에게 "나는 한 가지 이치 로 모든 것을 꿰뚫었느니라.(子一以貫之)"라고 말씀하신 것이 나온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사(賜)야, 너는 내가 많이 배우고 그것을 다 기억하는 사람이라 고 생각하는가?"
子貢이 대답해 말했다.
"그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나는 하나를 가지고 관철하고 있는 것이다."

子曰 賜也 女以予爲多學而識之者與 對曰 然 非與 曰 非也 予一 以貫之.

일자천금(一字千金)

戰國時代 末期 여불위(呂不韋)라는 商人이 있었다. 그는 돈의 힘으 로 秦의 宰相에 오른 실력자였다. 그에게는 食客만도 3천이 넘었다.
당시 列國들 사이에는 著述사업이 유행이었다. 呂不韋는 食客들을 동원해 古今의 정치, 경제, 사상, 문화, 역사 등을 모두 網羅한 백과사전格인 책을 완성해 ' 呂氏春秋'라고 이름 지었다. 그는 이 책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강했던지 수도인 咸陽 성 문에 걸어놓고 "누구든지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뺀다면 천금을 주겠다.(有能增省一字 者予千金)"고 豪言했다.《史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呂不韋는 자기 誇示겸 우수인사 誘致 목적으로 이 말을 했지만, 지 금 '一字千金'은 '심금을 울리는 아주 빼어난 글'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과 脈이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일인불과이인지(一人不過二人智)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처럼 제 아무리 잘난 사람도 여럿이 힘을 합하는 것만은 못하니 협동하고 협력하라는 가르침이다. 위의 글을 직역하면 '(아무리 똑똑해도) 혼자서는 두 사람의 지혜를 넘지[過] 못한다' 이다.
不過는 어느 정도에 이를지 못했을 때 쓴다. '不過五百名'은 5백명 이 안되다는 뜻이다.(겨우 5백명이라는 뉘앙스도 있다).
不過의 반대는 過多이다. 大入試처럼 경쟁이 치열한 것을 過多競爭이라고 한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及] 않는 것은 不過不及이다. '一人之能過千人 之能'(한 사람의 능력이 천 사람의 능력을 넘는다)이라는 말도 있다. 이런 一當千의 사람을 過人이라고 한다. 自古로 胎敎를 잘 해서 나은 아이는 過人이 된다고 한다.

일자사(一字師)

鄭谷은 唐나라때 시인이다.
어느날 '제기(齊己)'라는 스님이 여러 편의 詩稿를 가져 왔다. 그 중 <조매(早梅)>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前村深雪裏 昨夜數枝開……'(앞마 을이 깊은 눈 속에 파묻혀 있는데, 어제 밤에 몇 가지에 매화가 피었네).
이를 본 鄭谷이 말했다. "數枝(몇 가지)는 早梅(일찍 핀 매화) 라는 詩題에 맞지 않으니 一枝(한 가지)가 좋은 것 같소." 그렇게 바꾸어 놓고 보니 과연 詩 전체의 느낌이 달라졌다. 이에 스님은 鄭谷에게 큰 절로 감사를 表했고, 사람들은 鄭谷을 가리켜 '一字師'(한 글자를 가르쳐 준 선생님)라고 했다.
自古로 공부하는 사람은 한 글자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또 훌륭한 스승은 간단해 보이지만 핵심을 짚어 준다고 했다.

일침견혈(一針見血)

東西洋의 醫術은 각각 장단점이 있다. 그러나 발목 같은 곳을 삐었 을 때는 針을 맞는 것이 제일이다. 경험자는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針으로 병소(病巢;균이 모여 있는 곳)의 정곡(正鵠;핵심)을 찔러 '죽은 피'를 빼내면 혈액순환이 원활해지기 때문이다.
'針 한 방에 피를 본다'는 '一針見血'은 '간단한 요령으로 본질을 잡아낸다'는 비유이다. 우리네 인생살이에서도 名醫가 一針見血하는 式이 아니면 변죽만 울 리다가 끝내 흐지부지 되고 마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針은 침(鍼)과 같다. 針은 치(治;다스리다)의 뜻으로도 쓴다. 예를들 면 '逍遙以針勞 談笑以藥倦'(산책은 피로를 풀어주고 담소는 고달픔을 낫게하는 약이다).

[ㄱ], [ㄴ/ㄷ/ㅁ], [ㅂ], [ㅅ], [ㅇ], [ㅈ/ㅊ], [ㅌ/ㅍ/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