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자 -늦깎이 유학생의 이야기

Fugitive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던 1996년의 어느날 갑자기 어쩌다가 유학을 준비하게 되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노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퇴근길에도 바람이 별에 스치운다 " 며 소박하게 결심하고 살아온지 어언 졸업 후 5년. 배고픈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되자, 못오를 나무도 여러번 쳐다보면 올라가기 싫어진다, 나 자신을 알면 때때로 즐겁지 아니한가 등등 옛 성현의 말씀을 곰씹으며 부지런히 달려온 세월이었다.

마케도니아의 군주 알렉산더는 나이 스물다섯에 페르시아제국의 대군을 무찌르고 왕이 되었고 현대과학의 아버지 아인시타인 옹은 스물여섯에 상대성이론을 발표하였다고 남들이 나를 주눅들게 해도 알렉산더의 승승장구 뒤에는 과외선생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고 아인시타인의 명성 뒤에는 버림받은 천재 아내 밀레바가 있었다고 가볍게 응수하며 지내왔다. 결국 알렉산더는 불치의 왕자병으로 나이 서른셋에 세상을 뜨고 아인시타인옹은 조강지처를 버린 죄로 천벌을 받아 늙어 죽지 않았는가? 아, 가엾다.

그러다 문득 갑자기 어쩌다가 우연히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던 1996년 어느날 유학을 준비하게 되었고 이제 1997년 여름과 가을 사이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왜 가냐면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그냥 날이 더워서 그랬다고 해두는게 좋겠다. (음, 멋있어 보이는군) 혹은 영화 <도망자>에서의 킴블 박사의 심정이라고 해두자.(뭔가 절박감을 주는군) 결국 집요하게 나의 뒤를 쫓아오던 것은 지식과잉에 따른 상대적 결핍증,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로 과민해진 소시민성 신뢰 불감증, 즐겁지도 않은 현실 앞에서 매체를 통해 엔돌핀을 강요하는 근거없는 90년대식 낙관주의일지도 모르겠다.

순간, 나와 같이 동고동락하며 유학을 준비하던 늦깎이 85학번들의 얼굴이 주마간산처럼 내 눈앞을 스쳐간다. 아 그리고 유학생 의상 대사와 유학 가려다 만 그의 선배 원효 대사의 일화가 생각난다. 의상 대사는 청운의 꿈을 안고 열아홉에 장도에 오르지만 요동에서 스파이혐의로 잡혀서 수십일간 억류되어 있다 강제 귀국 당한 바 있다. 그가 다시 당나라에 입국한 것은 그의 나이 서른 여덟이 되어서였다. 해골바가지로 물 떠먹다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온 원효 대사의 이야기도 늦은 나이에 유학을 준비하는 모든이에게 희망을 줄 것 같다. 그가 유학을 결심한 나이가 서른넷이었다는 고증이 있기 때문이다.

희망은 우리를 목표에 이르게 하는 등대이다. 돌이켜보건대 유학파 의상 대사도, 국내파 원효 대사도 그들의 지식으로 통일 신라의 문화의 근간을 이루지 않았는가.

혹시 알겠는가, 늦깎이 유학생인 나도 비행기 안에서 기내식을 먹다가 위대한 깨달음을 얻을지. 아니면 원효 대사처럼 똑똑한 2세(주:설총) 를 통해서도 꿈은 실현할 수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