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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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기도와 첫 태동

99년 10월 2일 토요일
어젯밤 느닷없는 아랫배의 통증.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특별한 통증에 덜컥 겁이 났다. 통증은 10~20분 가량 지속됐고, 남편과 나는 안절부절 못하다 한참 심호흡을 한 뒤 서서히 통증이 멈추고 나자 또 쉽게 안심했다. 이제 5개월에 접어드는 뱃속의 아이가 제자리를 확인하기 위해 몸부림이라도 친 것일 테지. 혹은 갑작스런 외부의 자극에 대해 제 존재를 확인시키기 위한 몸짓을 해보인 것일 게 분명하다. 이렇게 내 배 안에 하나의 생명체가 너무나 뚜렷이 제 존재를 증명해 보이고 있다. 월요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아이를 위한 생활을 해야겠다. 학습, 음악감사, 독서, 운동 등 태교를 열심히.
내 아이는 정말 착하고 똑똑하고 건강했으면 좋겠다. 내 인생의 모든 희망이나 힘이 되어 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장 큰 힘, 가장 큰 희망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서로 의지가 되고, 힘이 되는 건강하고 좋은 관계를 기대한다. 서로의 감성과 지성을 나누고, 가르치고, 보완하는 그런 멋진 관계가 되기를...

99년 10월 3일 일요일
남편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가 배가 사르르 아프기 시작했다. 아이는 엄마의 꼭 끼는 바지가 몹시 싫은 모양이다. 자기 존재를 끊임없이 알려오는 아이의 작은 움직임들이 참으로 사랑스럽다.
남편이 매일 밤 읽어 주던 동화책 <동물회의>가 어젯밤에 마지막 장을 끝냈다. 오늘은 동화책 읽기를 쉰다. 몸살 기운 때문에 몹시 힘들어하던 나를 간호하느라 남편이 많이 힘들었나 보다. 밤 1시가 되자 비몽사몽하더니 금세 코를 곤다. 그래도 아기를 위한 기도만은 빠뜨리지 않는다. 참 고마운 사람이다.

99년 10월 4일 월요일
이제 아기는 양손을 모으고 가만히 오무리면 수프 그릇 엎어놓은 모양 동그랗게 제 집을 틀고 앉아 있다. 어떨 땐 옆으로 길쭉하고 어떨 땐 아래위로 길쭉하다. 내 아기의 존재감. 손으로 가만히 감싸쥐고 아이의 느낌을 감지하노라면 아기가 전하는 메시지인 듯 머릿속으로 행복감이 가득해진다.

99년 10월 5일 화요일
낮잠이 많이 준 듯하다. 오후 4시부터 2시간 정도 잠을 잤을 뿐이다. 태교책을 다시 읽고, 윤대녕의 소설 한 편을 읽었다.
아기는 어제보다 더 커진 듯, 내 배가 불룩 앞으로 나왔다.

99년 10월 7일 목요일
뱃속의 아기를 위해, 또 나 자신을 위해 새로운 마음으로 영어 단어 외우기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해보는 짓이다. 낯설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잡지사의 한 기자가 번역을 부탁해왔다. 또 너무나 촉박하다. 모르는 용어가 많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이전처럼 그렇게 빡빡하게 살고 싶지 않다. 비록 내용은 10장에 불과하지만 오랜만에 하는 잡지번역이라 사전을 뒤져야 할 일이 많을 테니 시간이 오래 걸럴 테고, 자칫하면 밤을 새울 수도 있다. 아기릉 위해서 결코 좋지 못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99년 10월 8일 금요일
<아이를 위하여>
온전한 육신으로 세상에 나와
부모의 극진한 사랑을 온몸에 받게 하시고
늘 사랑으로 충만한 아이가 되게 하소서.
신의 사랑을 믿고 늘 중심이 바로 서 있는
심지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며
그 사랑을 사람들 사이에서 행하며
살 수 있게 하소서.
자신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고
친절로서 대하게 하소서.
약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며
부드러운 말과 따뜻한 마음으로
도와주게 하시고
어려움에 처해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때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하소서.
불의를 만나거든 모른 체하지 말고
섣부르게 덤비지도 말며
현명하게 대처하도록 하소서.
정신과 육체가 잘 균형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해 애쓰도록 하소서.
부지런한 몸놀림으로 늘 안정된
정서를 유지하게 하시고,
세상에 대해 알고 싶은 지식욕이
시들지 않도록 늘 노력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많은 것에 대해 알고, 이해하게 하시되
항상 겸손하게 하소서.
좌절과 절망 또한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하나의 과정임을 알고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하소서.
제 삶을 알차게 채워나가는
기쁨에 젖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신이여, 도우소서.

99년 10월 9일 토요일
오는 13일이 친정엄마 생신이라 오늘 오후에 대구에 내려간다. 남편은 내일 올라오고, 나는 며칠 머물 생각이다. 뱃속의 아이로 인해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한결 더하다. 내가 이렇듯 마음조이며 신경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어머니도 나에 대해 온갖 사랑을 퍼부으셨을 것이다. 게다가 첫아이가 잘못되고 그 다음 아이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하셨을까. 오늘 나의 긴 여행(열차로 4시간)조차 불안해 하시는 어머니. 5개월에 접어들어 안심할 수 있는데도 못내 걱정스러우신 모양이다. 다섯 자식을 하나같이 소중히 키워주신, 그로 인해 온갖 고생을 하셨던 그분께 내가 지고 있는 이 짐은 아마도 평생을 갈 것이다. 어떻게 망각할 것이며,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뱃속의 내 아이에게 가는 이 질기고도 질긴 마음의 줄기만큼 그분과의 인연 또한 매양 한가지인 것을.

99년 10월 10일 일요일
태완, 태형, 현석. 세 조카 모두 예쁘고 착하다. 웃는 모습이든 우는 모습이든 이보다 더 귀여운 천사들은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우리 아기도 이렇듯 예쁘고 착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면...
세 조카를 보면서 아이에게 바라는 바가 몇 가지 생겼다.
*낮밤이 바뀌지 말고 낮엔 잘 놀고 밤엔 잘 잘 것
*느닷없이 아프지 말 것
*이유 없이 울지 말 것
*심하게 보채지 말 것
*엄마의 거절을 무시하고 계속 울어대는 일이 없을 것
*맛있게 먹을 줄 알기-젖이든 밥이든 간식이든

99년 10월 11일 월요일
아버지가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사오셨다. 어머니는 종일 부엌에 붙어서서 그걸로 곰국을 끓이셨다. 자식 사랑하시는 부모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 마음이 아리다. 눈이 동그랗고 피부가 고운 아이를 낳으라며 두 분이 정성을 들이시는 건데, 실은 그것이 산모의 영양 공급을 위한 것임을 어찌 모를까.
밤 11시 40분경 약 30초간의 통증이 있었다.

99년 10월 13일 수요일
엄마의 진짜 생일날. 일요일로 당겨서 생일상을 차리기는 했어도 서운하실 것 같아 미역국을 끓이고 잡채를 만들었다. 점심은 아버지의 제안으로 메기매운탕과 잉어찜을 먹으러 갔다. 참 맛있는 음식. 남편 생각이 많이 났다. 맛있는 음식이라면 특별히 밝히는 남편. 아버지는 자꾸 잉어찜을 내게 권하셨다. 내 아기는 잉어를 무척 좋아할 것 같다. 잉어곰국에 잉어찜까지 마구 먹어대니. 아내를 위해 외식을 권하고, 임신한 딸을 위해 잉어찜을 시키고, 손자를 무릎에 앉힌 채 먹는 것도 뒤로하시는 내 아버지의 자상함, 내가 그분에 대해 느끼는 이 사랑을 내 아이가 내게서 느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99년 10월 15일 금요일
아이에게선 아직도 태동을 느낄 수 없다. 너무나 기다려지는 내 아이의 움직임.

99년 10월 16일 토요일
은행 볼일을 보고 오는 길에 또 배가 아팠다. 약 5분 이상. 심상치 않게 여겨야 하는지, 대수롭지 않은 건지, 정말 아기가 크느라 그러는지...

99년 10월 17일 일요일
교회 다녀와서 곧바로 낮잠 2시간. 텔레비전 보기를 자제하고 남편과 함께 아기 교육을 위한 플래시 카드(글자 카드)를 만들었다. 뱃속의 내 아기에게 학습 능력을 키워주기 위한 소중한 작업이었다. 작업은 무척 재미있었고, 남편과 나는 진지하게 무려 4시간 가량을 소모하며 즐겁게 작업했다. 뱃속의 아이는 아직 태동도 없지만 우리의 이런 노력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입덧 같았던 잠도 이제는 거의 정상을 찾은 듯하고, 철분약을 복용해서 빈혈도 없어졌다. 가끔 오는 통증만 없다면 걱정거리는 거의 없다. 다만 10월 28일 병원에 가서 기형아검사 결과를 확인하기까지는 아직 불안감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은 아마도 거의 없으리라 믿는다. 하나님도 내 아이를 축복해 주시리라. 건강하고 몸 성한 아이로 태어나 틀림없이 우리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리라. 도대체 그런 검사를 해서 어쩌자는 건지, 벌써 5개월이나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99년 10월 18일 월요일
1. 열 손가락의 고른 움직임, 그로 인한 두뇌의 활성화를 위해 피아노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 내일부터.
2. 아기를 위한 글자 공부. 가~라/ㄱ~ㄹ/a~d.
참으로 느낌이 신선하다. 내 손과 머리를 통해 태아에게까지 학습이 전해질 수 있다는 건, 너무나 경이로운 일이다. 그리고 내가 그러한 것을 한치의 의심 없이 믿고 있다는 사실도.
3.요가 수업 시작. 의정부까지 1시간 가량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 결코 쉽지는 않을 듯하다. 감기 뒤끝에 만성 비염까지 있는 나로서는 가장 기본인 호흡마저 잘 안 된다. 그러나 꼬박 1시간을 아기와 나만 생각하며 명상을 하는 것은 정말 고맙고 기쁜 일이다.
4.운전면허 학원에서 학과시험 접수를 하고 요가학원으로 나를 데리러 온 고마운 남편과 함께 서점에 들렀다. 아기를 위해 사고픈 책이 수십권. 모두 보류하고(종로6가에 가면 싸게 살 수 있다) 동시 2편을 베껴 쓰고, 사고픈 책 제목들을 잔뜩 적어왔다.
5.서점에서 적어온 동시 중 하나를 그림물감으로 쓰고 주변에 그림을 채워 장식한 뒤 텔레비전 뒤 커튼에 꽂아 두었다. '다람쥐 다람쥐'

99년 10월 19일 화요일
피아노 치기, 평소에 잘 안 쓰던 약지는 유난히 말을 듣지 않는다. 그 손가락의 해당 부위만큼 잘 쓰이지 않던 두뇌 속 한 곳도 더불어 열심히 활동을 하게 될까. 비록 엉성한 연주지만 뱃속의 아기도 음악과 친해질까. 내 어린 시절엔 주변에 음악이라는 것이 없었다. 이름이 붙여진 음악들보다는 오히려 다른 소리들이 많았다. 시골에서 자라 자연과 늘 함께 있었으니 그 속에서 수많은 음악들이 나를 감싸주었으리라. 그러나 성장하면서 내가 음악이라고 이름붙여진 소리들을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었다. 음악이란 내게 참으로 낯선 분야였으니까. 비록 엉성한 소리지만 내 피아노 연습 소리를 들으며 내 아이가 음악과 친해지고 음악적인 감수성도 갖고 감상하고 느낄 수 있는 혹은 연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제 요가를 한 탓인지 피아노 의자에 1시간 이상 앉아 있는 것은 피곤했다. 게다가 저녁에는 동생네도 갔다왔으니 피곤, 피곤. 체력이 참으로 많이 약해져 있다.
뱃속의 아기는 탈없이 잘 자라고 있을까?

99년 10월 22일 금요일
낮에는 감기 기운 때문에 어제 받아온 일을 전혀 못하고 저녁 무렵부터 시작하여 새벽 1시에 모두 끝냈다. 오늘 번역한 양이 모두 104매. 아기가 태어나서 어학에 재능을 보일까. 지금부터 최소한 5개월간 열심히 번역일을 하게 되면 태교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99년 10월 23일 토요일
오랜만에 김치를 담갔다. 옆집 아줌마 덕분에 아주 맛있게 됐다. 김치 담그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랜 살림 경력에서 나온 경험들이 축적되어야만 맛있게 담글 수 있다. 무나 배추를 얼마 동안 절이는지, 간을 어느 정도로 하는지가 관건이다. 오늘 무는 약 20분 정도 절였다. 내 생각보다는 훨씬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절일 때 소금과 함께 설탕도 조금씩 넣는다는 건 처음 알았다.
배에 제법 무게감이 느껴지고, 어제의 피로 때문인지 다리도 금세 피로했다. 남편과 비디오 가게에 갔다 오는 길이 많이 힘들었다. 빵빵한 아랫배와 욱신거리는 허리와 다리, 발바닥... 엄마가 되는 길이 험난하다.

99년 10월 24일 일요일
문득, 내가 엄마로서의 자세를 제대로 갖추고나 있는지, 준비된 엄마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어떤 엄마여야 하는지, 내 아일르 위해 어떤 엄마로 살아야 하는지, 그 문제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저 내게 아이가 생긴다는 기쁨에만 들떠 나 자신이나 아이에게 제일 큰 영향을 미칠 엄마로서의 나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언젠가 뱃속의 내 아이가 나 하나만을 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던 그때에 이미 그런 고민을 하고 지금쯤은 명확한 결론을 갖고 있어야 하는 건데... 아기에게 참으로 미안하다.
<주여! 이런 엄마가 되게 하소서>
넉넉하고 부족함 없는 사랑으로 아이를 보살피되
내 욕심이 먼저 앞지르지 않게 하소서.
내가 주는 것보다 아이에게서 받는 것이 비록 터무늬없이 적더라도
화내거나 서운해 하지 않게 하소서.
아이를 온전한 내 소유물로 여겨 집착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해 주어 굳건히 제 삶을 살게 하소서.
아이의 상황과 처지, 능력에 대해 이해하고 배려하며
아이가 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며 살아가도록 도움이 되고
결코 장애가 되지 않게 하소서.
큰 기대를 갖고 따뜻한 눈으로 대하여 아이가 꿈을 갖게 하되
강요하지 않게 하소서.
내 아이에게 사회적인 명성이나 명예, 성공에 대해 집착하는 것을 가르치기보다
인생의 깊이와 풍요로움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경험들을 많이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엄마가 되게 하소서.
어떤 문제에도 현명하게 대처하는 의연한 모습을 지녀
아이에게 존경받는 엄마가 되게 하소서.
나 자신의 인생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알고,
내 아이 앞에 결코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어
아이가 배우고 싶은 인생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아이에게 늘 좋은 엄마로
인정받게 하소서.

 10월 25일 월요일
요가를 하러 가기는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집에서 쉬었다. 웬일인지 자꾸만 피곤하고 낮잠을 2시간이나 잤지만 피로는 풀리지 않는다.
이제 뱃속의 아이가 많이 자랐는지 허리가 굉장히 굵어져 입을 만한 바지가 마땅치 않고, 양손을 가득펴야 겨우 배가 감싸질 정도다. 매나 허리의 무게감이 제법 크게 느껴진다.
병원을 찾을 날이 3일밖에 남지 않았다. 불안감은 줄었다고 생각했는데 꿈은 어지럽기만 하다. 엄마라는 존재는 10개월간 이런 불안감과 초조함을 안고 살다가 그 후로는 또 다른 고민에 싸여 살겠지...

10월 26일 화요일
오전 피아노는 1시간을 넘지 못했다. 피로한 근육들이 자꾸만 쉬고 싶어했다. 피로인지 나른함인지... 식욕은 여전히 나지 않는다. 뱃속의 아이를 생각해 의무감으로 먹는 게 아니라면 아마도 일주일은 안 먹고도 살 것 같다. 내가 걱정스러운지 남편은 고픈 배를 안고 늦게야 집에 돌아와 저녁을 함께 먹어 주었다.
낮잠 3시간, 오후 피아노 보충연습 1시간 30분. 하루해가 금방 갔다.
어제부터 아기에게 동화책을 읽어준다. 옆집 아이 책을 빌린 것이다. 탈무드 이야기. 아침엔 글자 공부. 숫자 공부 카드도 만들어야 한다.

99년 10월 27일 수요일
요가를 시작하기 전에 배에 손을 대고 속삭였다. "아가, 엄마가 운동을 시작할 거란다. 너를 잘 낳을 수 있게 엄마 몸을 준비하는 거야. 그래야 너도 덜 고통받으며 태어날 수 있다는구나." 그리고 나서 호흡을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 다섯 번. 서서히 배가 딱딱해졌다. 참 신기하게도 아기가 내 말을 알아듣고, 내 행동을 예상하고 미리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막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경이로움은 한참 뒤에 이어진 것에 비하면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강사인 내 친구의 지시에 따라 골반을 움직이는 운동과 허리 강화 운동, 옆구리 운동 등을 하면서 짬짬이 휴식을 취하는데, 어느 순간 편안히 누워 있는 내 뱃속에 한 사건이 발생했다. 꿈틀... 꿈틀... 배꼽 밑 약간 왼쪽에서 뭔가가 마치 배 바깥에 대고 살며시 노크를 하는 듯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애가 움직여..." 꿈틀대는 부분에 얹어 놓았던 손을 다른 한손으로 가리키며 친구에게 말했다. 눈이 동그래진 친구가 얼른 손을 갖다댔다. 그 순간, 아이는 꿈틀거림을 멈추었다. 집 밖 외부세계에 대한 기대감과 공포심을 안은 아기새가 목만 삐죽 내밀고는 잠시 외부 상황을 점검하다 도로 집 속으로 쏙 들어가 숨어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내 아기가 처음 움직였다. 경이로움과 기쁨으로 오후 시간이 내내 즐겁다. 내 얘기를 들은 남편의 눈에 어리는 호기심과 일종의 부러움...

99년 10월 28일 목요일
병원에서 기형아검사 결과가 나왔다. 모체혈청 검사 결과는 이상 증세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나는 간도 혈액도 모두 건강한 상태. 초음파 검사는 아기가 움직여 주지 않아 정면 모습을 보지 못했다. 4주 후에 다시 실시하자고 한다. 내 아기의 귀여운 옆모습 사진이 나왔다. 큰 눈과 둥그런 이마, 오똑한 코, 오무린 손을 턱밑에 대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사랑스럽다. 등뼈 사진도 보았다. 전체 모습은 사진으로 찍히지 않아 보지 못했다. 별 이상은 없어 보이지만 다시 검사를 해보기 전에는 확신할 수 없다. 비록 기형아 선별검사나 초음파 검사가 완벽한 것은 아닐지라도 특별한 이상이 없는 한 일단은 안심이다. 내 사랑스런 아기에게 별 이상이 없기를 얼마나 열심히 염원했던가. 오늘은 아기가 자극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초음파 검사 기사가 아기의 모든 모습을 보겠다며 자꾸만 배를 두드려댔다. 나도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으니 아기야 오죽했을까. 아기가 전혀 말을 듣지 않은 건 아마도 날씨 탓이었으리라. 종일 꺼멓게 어둡고 오후엔 우박을 동반한 비까지 내렸다. 뱃속의 아기도 날씨를 감지한 게 아닐까. 오늘은 뒤돌아 누운 채 돌아눕지 않는 아기들이 많다며 그 기사는 계속 중얼댔다.
b형으로 알고 있던 내 혈액형은 a형이었다.

99년 10월 29일 금요일
아기는 가끔, 아주 가끔 꼼지락이는 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잠잠. 19.5주째의 아기에게선 태동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걸까. 태동을 느껴 보려고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어 보아도 별 소용이 없다. 아기는 나의 기다림을 알까...

99년 10월 30일 토요일
이렇게 닮았으면: 외할아버지의 훤칠한 키와 낙천적인 성격, 자식들에 대한 깊은 정과 건강함. 외할머니의 강한 책임감과 겸손함, 끈기, 참을성. 그리고 예쁜 종아리. 아빠의 침착하고 느긋한 성격과 젊잖은 품성, 예쁜 눈, 동그란 얼굴, 낭만, 여유, 인생에 대한 관조. 엄마의 머리카락과 호기심, 열정과 정의감, 모험심, 영특함. 그리고 늘씬한 허리.

99년 10월 31일 일요일
밤, 아기의 움직임이 제법 활발하다. 동그랗게 웅크린 채 턱밑에 손을 받치고 있는 아기는 어디를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걸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뚝불뚝. 오른쪽 옆이기도 했다가 왼쪽 옆이기도 하고, 또 어느땐 배 맨 아래쪽에서 불뚝. 규칙적으로 서너 번일 때도 있고, 간헐적으로 어쩌다 한번일 때도 있다. 이런 움직임들이 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아기가 몸을 움찔거리는 건지, 팔이나 다리를 확실히 움직이고 있는 건지... 지난번 병원에 다녀온 이후 조금씩 분명해지던 아기의 움직임은 마치 내 1달여의 기다림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부지런해졌다. 고맙고 반갑고 사랑스러운 아가의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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