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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많이 변했다

99년 11월 1일 월요일
가끔 뱃속의 움찍거림이 제 존재를 확인시키는 요 귀여운 놈. 잘 자라고 있을 것을 확신한다. 3~4일 전부터 음식을 많이 먹는다. 밥 양도 이전보다 2배는 는 것 같다. 이렇게 음식이 땅기는 건 아기가 빨리 자라고 싶다고 보내는 신호가 아닌지. 불쑥불쑥 자라서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소망일까...

99년 11월 4일 목요일
배꼽 주위로 배가 둥글게 불러 있다. 임신 중기의 전형적인 모습. 아기는 제법 크게 움직인다. 어느때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아기의 움직임은 정해진 시간이 없다. 누워서 고요한 상태에서 느껴 보려고 하면 잠잠하고, 움직이고 있을 때 불쑥 한번씩 움직이기도 하고, 어느땐 마치 내 기다림에 응수라도 하는 양 제법 여러 차례 내 손바닥 아래서 놀기도 한다.

99년 11월 5일 금요일
젖꼭지가 까매졌다. 임신 6개월. 20주에 들어서 있는 내 몸의 변화들 중 하나다. 허리 쪽에 살이 많이 붙었고, 쉬이 배가 고프며, 많은 양을 먹어치운다. 내가 먹는 음식물들에서 좋은 영양소만 아이가 빼먹고 건강하게 자라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99년 11월 6일 토요일
남편의 퇴근에 맞추어 함께 오랜 산책을 감행했다. 대학로-충신시장-청계7가-청계4가-종로5가-종로6가. 두루두루 두어 시간 가량 돌아다녔다. 털실을 샀다. 남편과 태어날 아기를 위해 조끼나 스웨터를 뜰 생각이다. 아기에게 입힐 옷을 뜰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작고 예쁜 옷. 아기에게 잘 어울릴 만한 옷이 되어 나올까, 과연 내 손에서. 실값은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값어치로 남편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99년 11월 9일 화요일
피아노 연습 3시간. 은행에 세금 내러 갔다오고, 모처럼 대청소. 오늘은 낮잠을 안 잤다. 의외로 피곤하지도 않다. 단지 감기 때문에 목과 코가 힘들 뿐. 은행 달인 물과 생강차를 여러 잔 들이켜고 잠을 청한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감기에 걸린다. 굉장히 저하된 체력. 아기가 옮을까 걱정된다. 아가야, 부디 병치레는 하지 말거라.

99년 11월 10일 21.5주째
<인생은 아름다워>(로베르토 베니니 감독, 주연)를 비디오로 감상. 이탈리아 영화는 초반부터 집중하기가 쉽지는 않다. 뜨개질을 하면서 보다가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한 영화. 참 아름다웠다. 코믹 속에 깃든 슬픈 휴머니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배려가 참으로 압도적으로 그려졌다. 남편과 나는 감동했고, 자기 전까지 서로의 감상만 애기하다 일기도 못 쓰고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잠들었다. 나는 아직도 감기 기운이 여전한데 남편이 사온 가습기 덕을 볼 수 있으려나 기대하며 꽉막힌 두 콧구멍 때문에 숨을 헉헉대며 잠을 청했다. 옆에 있는 남편의 고생이 심하다. 뜨거운 물수건도 대령하고 이불도 꼭꼭 여며주고...

99년 11월 12일 금요일
하루를 거의 내내 잠만 잤다. 그래서인지 감기가 많아 나았다. 콧물도 거의 없고 머리만 약간 아플 뿐. 일주일 만에 감기가 끝난 셈이다. 저녁은 외식. 중국집에서 짬뽕 한 그릇. 참으로 하는 일 없이 평화로운 하루였다. 아기의 움직임은 갈수록 활발하다. 그래도 남편은 손으로 잘 감지가 안되어 별로 흥미 있어 하지 않는다. 보다 분명하게 느껴질 때 만져보고 싶어한다. 나는 깨어 있는 거의 모든 시간에 아기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고, 그러면서도 매번 경이로운데...

99년 11월 13일 토요일
동대문에 집결되어 있는 의류도매센터로 가서 임신복을 샀다. 바지 2벌에 윗도리 하나. 이 옷이면 웬만큼 외출복은 해결될 터. 이제 내 모습은 어느모로 보나 어엿한 임신부. 22주째의 임신부치고 너무 빨리 배가 불러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배가 온통 빵빵하니 부담스럽다. 그러나 그 빵빵한 뱃속에서 꼬물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면 기분이 아주 좋다.

99년 11월 14일 일요일
아이를 갖고 처음으로 산책다운 산책을 한 듯싶다. 경복궁. 물론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지는 않고 그 언저리만 돌아다녔지만 충분히 만추를 가슴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 멋진 풍경 속에서 임신 6개월째의 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배만 불러온 게 아니라 어깨며 팔뚝, 다리, 허리, 등에까지 살이 찐, 점점 뚱뚱해져가는 내 모습. 이러한 신체적인 변화가 실로 엄청난 일, 아이를 낳는 위대한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 그 엄청난 변화의 힘에 새삼 가슴이 떨린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사계절, 그중에서도 온갖가지 색채들이 다양한 놀음을 하는 이 가을을 닮은 아기가 태어났으면...

99년 11월 16일 화요일
남편은 내가 뜬 조끼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 이쁘다. 내년 이맘때쯤 우리 아기가 입을 옷도 뜨기 시작했다. 하도 조그매서 뒤판 하나가 금세 완성됐다. 소매가 있는 스웨터로 만들고 싶은데 과연 아기에게 잘 맞을지, 어울릴지 걱정이다.

99년 11월 18일 목요일
아기 스웨터는 이제 팔 한 쪽과 앞깃 둘레의 고무단만 뜨면 완성된다. 아주 조그맣다. 작아서 앙증맞고 그 옷을 입을 예쁜 아기를 생각하니 행복하다. 근 2주째 계속되는 뜨개질에 남편도 흥미를 보인다. 코 만들기와 한 줄씩 떠 나가는 것을 배우는 남편의 어정쩡한 모습과 어설픈 손동작. 평화... 어린 시절 우리 형제는 엄마가 뜨개질 해준 옷을 많이 입었다. 특히 나와 바로 밑 동생은. 해가 바뀌면 또다시 실을 풀어서 새 옷을 만들곤 하던 엄마. 우리는 그 옷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엄마가 뜨개질을 할 때마다 옆에서 같이 해보곤 했다. 그보다도 더 멋진 추억은 엄마가 뜨개질을 멈추고 다른 집안을 할 때 슬쩍슬쩍 코를 채우시던 아버지의 가정적인 모습이다.

99년 11월 19일 금요일
아기 스웨터 완성. 아기 모자를 뜨기 시작했다. 피아노 연습도 3시간이나. 어깨와 팔이 고달파한다. 감기 뒤끝에 내리 한 3일을 몸이 붓더니 위층에서 얻은 호박을 삶아도 먹고 죽을 끓여서도 먹었더니 이틀간의 호박요법에 부기가 다 내렸다. 내겐 호박이 잘 맞는 모양이다. 몸은 많이 변해 있다. 배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살이 고루 올라 지난해에 입었던 옷들이 대부분 어깨와 팔뚝 부위가 끼어서 입기가 불편하다. 옆모습을 보면 가슴보다 배가 더 많이 튀어 나와 있다. 위대한 생명의 잉태, 그만큼 변해 있는 내 육체.
매일 2시간 이상 낮잠을 자고, 피아노 연습에 1~2시간을 보내고, 아기 옷 뜨는 데 또 남는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문득 아기를 낳은 후에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다 일본어 테이프를 듣는다. 아기를 낳기까지 약 4개월, 아기를 키우느라 전념해야 할 3~4년, 그 기간에 하루에 2~3시간만 꾸준히 공부해도 영어나 일본어 마스트는 문제가 없을 듯한데, 공부에 보내는 시간은 어쩐지 집중이 안 된다. 마음이 느긋해서 독한 마음으로 공부를 하지 못하는 탓이다. 어쩌면 내 삶 전체에 대해서도 느긋해진 건지 모른다. 한편으로는 게으른 본성과 생에 대한 무책임이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내게 필요한 건, 경각심.

99년 11월 21일 일요일
결혼 1주년. 1998년 11월 21일, 쌀쌀한 초겨울 날씨에 결혼을 했다. 인천에서 영종도를 거쳐 을왕리 해수욕장으로 갔다. 남편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에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고 했다, 며칠 전에. 그러나 우리에겐 지금 장거리 여행이 무리다. 아기의 안전을 위해서는 가까운 데로 만족할 수밖에. 을왕리 해수욕장은 조용하고 조그마했다. 초겨울의 약간 선선한 날씨와 대부분 데이트길에 나선 사람들과 조용한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뿐. 조그만 해변과 해변을 굽이돌아 바윗돌 몇 개. 필리핀 푸에르토갈레라 생각이 많이 났다. 푸에르토갈레라에서 보았던 그 환상적인 바다 밑 풍경과 을왕리와 흡사한 해안 모습. 그곳에서 보낸 평화롭고 행복했던 2박 3일. 세월이 지난 후 또 어딘가 평화롭고 조그만 해변에서 우리는 을왕리 해수욕장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푸에르토갈레라에서는 마드라스 해변과 바다, 노을을 생각했던 것처럼. 늘 어떤 장소는 우리의 추억 속에서 더욱더 아름답게 포장된 채 남아 있다. '을왕리-푸레르토갈레라-마드라스'처럼.

99년 11월 22일 월요일
인터넷 홈페이지 만들기에 도전. 훗날 일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준비를 해두어야겠기에 우선 쉽게 도전할 수 있는 홈페이지 만들기를 시작해 본다. 이것도 하나의 기술이며 재미삼아서라도 해볼 만한 일이며, 나중에 컴퓨터를 나보다 더 익숙하게 다룰 내 아이에게도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것이기에.
결혼식 비디오를 보느라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1년 전 내 모습이 참 생경하다. 온통 추위에 떨었던 것만 같은데 화면 속의 나는 매우 잘 웃고 행복해 보인다. 사뭇 긴장감이 돌고 행복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어 있는 듯하다. 이제 뱃속의 6개월 된 아기와 함께 그 비디오를 보았고, 내년이면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조그만 아이와 함께 또 더한 생경함을 맛보며 감상하게 될 것이다.

99년 11월 25일 목요일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다녀올 때마다 부담감과 두려움을 하나씩 안고 오게 된다. 혈압도 체중도 혈액검사도 혈당검사도 산모로서의 나는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건강하다. 그런데 아기의 신우가 평균보다 1㎜ 길다고 한다. 신장 속에서 조절막 역할을 한다는 신우의 정상 길이(아기의 월령에 대비한)는 4㎜. 몸이 아파 일찍 퇴근한 주치의를 대신해 설명해준 의사는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주치의 선생님과 전화 통화를 해서 물어보라"고 한다. 왠지 심상치 않은 불안감. "자라면서 자연치유되는 경우도 있으니 지금은 걱정 마세요." 그 말이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신우가 자꾸만 정상보다 더 긴 채로 자란다면 나중에는 태아의 몸 속에 관을 넣어 오줌을 빼내야 할 수도 있다는데 어찌 안심이 되겠는가. 그러나 일단은 심하게 걱정하지 않기로 결심. 병원에선 벌써 여러 차례 나를 긴장시켰지만 결국 나중에는 아무 문제가 아닌 일들이었다.
아가야, 부탁이다, 제발. 너도 네 몸을 어찌할 수 없는지 모르지만 혹시 만약 조금이라도 가능하다면 부디 온전한 몸으로 세상에 나와주렴.
아이는, 내 몸을 빌어 세상에 나오는 아이는 이렇듯 벌써부터 제 에미 애간장을 태운다.
온집안에 아기물품이 잔뜩 널렸다. 울산에서 동생들이 보내준 기저귀며 배냇저고리, 신발, 보행기, 양말, 타월, 턱받침, 가제 등. 아기가 태어나면 필요한 물품들이 주루루 줄을 서 있다. 참으로 사랑스럽고 앙증맞다. 남편도 한참동안 이것저것 만지작거린다.

99년 11월 26일 금요일
주치의 전화선 저쪽 너머에서 이미 준비된 답변으로 빠르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구요, 32주째 되는 때에 다시 살펴봅시다. 그때도 이상이 있으면 치료를 받으면 되고, 물론 이상이 없어도 계속 추적검사는 해야겠죠. 모든 사람이 다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일단 걱정 말고 기다려 보세요. 확률은 50% 정도예요."
아기는 불완전한 한 쪽 콩팥을 지니고 있다, 현재까지는.

99년 11월 29일 토요일
내가 입을 벌려 말하지 않으면 말다툼이 일지 않고, 내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 불화가 생기지 않는다. 자신을 죽이고 사는 삶. 평화라는 이름으로 매몰되는 개인. 혹은 위대한 평화를 위해 거룩하게 희생해주는 개인의 욕심.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면 안되는 나는,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 며느리, 형수, 딸, 언니, 누나...
"지금 뭐 해?" "지금 뭐 하니?"
마음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입으로 나온 말만, 귀로 들리는 소리만 듣고, 이해하고, 해석하려든다. 말하지 않으면 그들의 머릿속에 든 상상 안에서 오해가 되어 쌓인다. 쌓여진 오해들은 후에 커다란 망치가 되어 돌아와 뒤통수를 친다, 아프게.

99년 11월 29일 월요일
아기 배냇저고리들을 세탁해서 다렸다. 다리고 나서 보니 물려 입는 헌 옷 같지가 않다. 깨끗하고 반듯하고, 마치 새옷 같다. 아기도 기뻐하리라. 그리고 늘 새것만이 좋은 것은 아님을, 이 세상의 모든 물질들은 아끼고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무려 3시간이나 다림질을 했다. 옷 한 벌의 소중함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한 벌의 옷, 한 개의 연필, 한 칸의 방... 이 모든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99년 11월 30일 화요일
어제 오늘 배가 간헐적으로 아프더니 불숙 또 배가 나왔다. 이번엔 앞으로보다 옆으로, 양쪽 옆 배가 두드러지게 나왔다. 쑥쑥 잘 자라고 있는 우리 아기, 사랑스럽다. 아기의 콩팥을 위해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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